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중국역사 100가지[사건] 요약 3

好學 2009. 10. 21. 23:47

 

중국역사 100가지[사건] 요약 3

 

 

  41 신법당과 구법당 - 왕안석의 개혁
  42 상업도시의 발달과 도시문화 - 지폐 교자문자의 공인
  43 화약, 나침반, 인쇄술 - 심괄의(몽계필담)
  44 송, 중국회화의 황금시대 - 문인화의 세계
  45 여진족의 화북 지배 - 북송의 멸망
  46 초원의 폭풍 칭기즈칸 - 몽고의 유라시아 제패
  47 약탈자에서 지배자로 - 원 왕조의 성립
  48 일본원정과 고려의 고뇌 - 2차 일본원정
  49 마르코 폴로의 중국여행 - (동방견문록)의 완성
  50 희곡과 소설의 개화 - 원대 서민문화의 발달
  51 칭기즈칸의 후예에 맞선 한족 - 홍건적의 난
  52 한족, 다시 중국대륙의 주인으로 - 주원장의 명 건국
  53 (영락대전)이 완성되다 - 영락제의 즉위
  54 화교들, 동남아시아로 진출 - 정화의 남해 원정
  55명복적 조공과 힘의 논리 - 월남과 중국의 월남 정복
  56 황제 위에 올라탄 환관 - 토목의 변
  57 지행합일을 최고선으로 - 양명학의 성립
  58 변방, 바다에서 밀려드는 오랑캐 - 북로남왜의 화
  59 만주족, 다시 일어나다 - 만주족의 재통일과 후금의 건국
  60 황제의 충성스런 부대 - 팔기군

 

 

41 신법당과 구법당-왕안석의 개혁(1069--1074년)

 

  (돌아보건대, 안으로는 사직의 일을 근심하지 않을 수 없고, 밖으로는 곧 이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하의 재력은 날로 곤궁해지고 풍속 또한 날로 쇠미해집니다...)
  이 글은 1060년, 왕안석이 인종에게 바친 (만언서)의 서두이다. 그는 22세에 과거에 급제한 후, 16년간의 지방관 생활을 통해 피부로 절갑했던 당시의 위기상황을 당송팔대가의 명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송왕조는 건국 후 100년이 경과한 인종 무렵, 대내외의 여러 문제들이 표출, 심각한 상황에 봉착하고 있었다.
  거란과는 전연의 맹 이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새로이 서북방에서 티베트 계의 탕구트 족이 강성, 다시 중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들의 본거지는 황하 상류 오르도스 지방. 그들은 당말 황소의 난 진압에 협조한 후 중국으로부터 이씨 성을 받고 복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원호라는 뛰어난 인물이 등장하더니, 1038년에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하라 했다. 중국인들에게는 서하라 불리었던 이들은 독자적 문자를 제정하고 가공할 군사력으로 중국을 침공,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7년간의 전쟁을 마치고 1044년에 맺어진 양국의 화의에서, 서하는 송에게 신하의 예를 다시 취한다는 명분을 주면서, 해마다 비단 13만 필, 은 5만 냥, 차 2만 근의 세폐를 받는 실리를 택했다. 송은 화의를 주선해준 요나라에게 다시 비단 10만 필, 은 10만 냥의 세페를 추가하기로 했다.
  유목민족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인한 군사비의 증강, 여기에 송의 군사제도의 모순이 겹쳐 군사비는 엄청나게 증액되고 있었다. 태조 때 37만이었던 군대는 인종 때에 이르면 125만에 달했고, 군사비는 정부예산의 8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의 군대는 수적으로 비대했을 뿐 질적 수준을 매우 낮은 것이었다. 군대는 다분히 실업자 구제의 의미를 띠게 되어 흉녀닝 들면 재민을 구재하기 위한 모병이 이루어지곤 했으며, 제대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노병이 많았다.
  권력분산 정책과 3년마다 치러지는 과거로 인해 관료의 수는 급증했다. 게다가 진종의 봉선의식 등 황실의 경비 또한 격증했다.
  이른바 3용, 용병, 용관, 황실의 용비는 송의 국가재정 지출을 크게 확대했으나, 대지주관료들의 토지확장으로 농민들의 유망은 격심해져서 재정수입은 크게 감소하고 있었다. 마침내 송의 재정은 적자로 반전되기에 이르렀다.
  1067년 19세의 청년 신종이 즉위되게 되면서 전면적인 대개혁이 시도되었다. 일찍이 왕안석의 정견에 깊이 공감하고 있던 신종은 1069년 왕안석을 전격 기용했고, 왕안석은 신종의 전적인 신뢰 속에 잇따라 과감한 신법을 발표, 송의 국력은 다시 회복되는 듯이 보였다.
  신법은 농촌정책으로서의 청묘, 모역법, 상업정책으로서의 균수, 시역법, 병제개혁으로서의 보각, 보마법, 그리고 농전수리법, 방전 균세법 등으로 이를 통해 대지주, 대상인의 횡포로부터 중소농민, 중소상인들을 보호 육성, 부국강병을 도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청묘법과 시역법은 각기 가난한 농민과 상인들에게 2할의 저리 융자를 주어 당시 10할을 초과하던 고리대금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다. 보갑법은 농민을 10가, 50가, 500가 단위로 편제, 치안유지 조직으로 삼은 것인데, 농한기에 군사교련을 실시, 병농일치의 민병조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군사력을 강화하고 양병비를 절감하려는 것이었다. 농전수리법은 수리시설의 신설이나 보수 때 그 비용을 주민이 공동으로 부담하거나 정부가 대부해주어 지주가 독점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특히 논란이 되었던 모역법은 양세법 체제에서 화폐화되지 않고 남아 농민들을 괴롭혔던 노역을 화폐화하여 그로 인한 몰락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즉, 노역을 제공하던 민들에게 등급을 매겨서 화폐를 징수하고, 면역의 특권을 받던 관호로부터도 농촌의 반액인 조역전을 징수, 그 동으로 전문적 대리인을 고용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개혁은 근본적으로는 지주제를 부정하지 않으며,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이를 옹호하는 정책이었으나, 눈앞의 이익을 삭감당한 대지주, 대상인, 고리대금업자 등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들은 왕안석의 개혁을 지지하는 신법당과 구별, 구법당으로 부른다.
  신종은 이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왕안석을 잠시 지방장관으로 좌천시키기도 했다. 그후 왕안석은 재기용되었으나, 그의 뜻을 펼치기에 지주관료들의 세력은 너무나 완강했다. 거기에 출세에 눈먼 여혜경의 변신, 개인적으로는 동생과 아들을 연이어 잃는 슬픔도 겹쳐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강녕(남경)의 종산에 은거했다.
  구법당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사마광, 구양수, 소동파 등이 있다. 그중에도 (자치통감)의 저자이자, 지주관료들로부터 '살아 있는 부처'로 칭해졌으며, 신동으로 불리었던 어릴 적의 일화를 담은 (소아격옹도)의 주인공, 사마광이 대표적 인물이다.
  사마광은 왕안석보다 두 살 위로, 강남 출신의 신흥관료였던 왕안석과는 달리, 대대로 진사를 내었던 화북의 대표적인 지주관료 출신이었다. 당시의 중앙고관은 화북 출신의 전통 지주관료들, 즉 구법당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한편, 11세기 전반에는 강남의 눈부신 발전을 배경으로 강남 출신의 신흥관료의 진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으니, 왕안석의 개혁은 그와 같은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
  1085년 개혁의 군주였던 신종이 죽고 철종이 즉위하자 사마광이 재상으로 등용, 모든 신법은 폐지되고 개혁은 원점으로 돌아갔으며, 당쟁의 깊은 골만 남게 되었다. 이듬해, 왕안석은 종산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으니, 그때의 그의 나이 66세였다.

   

42 상업도시의 발달과 도시문화-지폐 교자의 공인(1023년)

 

  북송의 수도 변경의 도시생활을 그린 (청명상하도)를 보면, 사람들이 서로 몸을 부딪힐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왁자한 거리에서 도시민들의 활력이 가득 느껴진다. 또한 이를 소개한 맹원로의 (동경몽화록) 등은 변경의 활기찬 도시 모습을 다시금 우리에게 확인, 놀라움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어떻게 마치 19세기인 양 착각을 일으킬 만큼 이와 같은 화려한 도시생활이 12세기 이전에 가능했던 것일까? 도시민들 중에는 부재지주, 사대부, 하급과료나 서리, 서숙의 교사, 상인 배우, 창녀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계층들이 존재하였을 터이다.
  이제 도시는 당대까지의 정치 도시적 성격에서 탈피, 상업도시로의 대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대에는 10만 호 이상의 대도시가 10여 곳에 불과하였으나, 북송대에는 40여 곳으로 늘어났으며, 전국 각지에는 시, 진이라고 불리는 중소 상업도시가 널리 출현하게 되었다.
  당의 장안은 큰길로 반듯반듯하게 구획된 백 수십개의 방으로 나뉘어지고 방마다 담장이 둘러쳐져 있는 폐쇄적인 도시였다. 서민들에 대한 통제도 자심해서 서민들은 큰길을 향해서는 문을 열지 못하고 방문으로만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해가 진 후부터는 성문, 방문이 모두 폐쇄되었다. 상업활동은 동서에 설치된 두개의 구획, 즉 시로만 제한되어 있었으며, 역시 야간영업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송대, 1038년에는 방벽이 무너지고, 시의 제한은 없어졌다. 상점들이 성 안의 각 곳에 진출, 도로 양측에 즐비하게 되니, 성내 전체가 번화가로 변해버렸다. 각종 물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전문상점가가 출현, 상인 조합인 행, 수공업자 조합이 작이 조직이 되었다. 야시장도 서서, 밤에도 찬란한 등불이 대낮과 같이 거리를 밝혔으며, 새벽에만 반짝 섰다 사라지는 도깨비 시장도 섰다. 성벽 밖에까지 인가가 넘쳐, 이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 바깥 둘레에 성벽을 쌓으니, 그 규모는 장안의 3배에 달했다.
  도시의 구조는 완전히 개방되고, 도시민들의 생활은 보다 자유로워졌다. 시민들이 향유하는 각종의 서비스업이 출현하게 되었다. 와자라는 오락거리에는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 생겼고, 거리에는 야담, 마술, 곡예, 씨름, 연극 등 온갖 구경거리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십 개의 음식점, 술집, 찻집이 즐비한 골목도 생겨났으며, 그중에는 수백 명의 창녀를 고용한 창녀를 고용한 요정도 있었다. 곳곳에는 각종 일용품이나 애완동물 외에도, 서적, 문방구류 등도 판매되고 있었다.
  서적이 거리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 시기의 매우 새로운 현상이었다. 그 배경에는 당대 이후의 사설 서당과 서원의 증가, 특히 송대의 과거제의 확대와 인쇄술의 발달이 있었다. 송대에는 문화의 향유층이 보다 확대되고, 적어도 법적으로는 과거제도가 서민층에게 열려 있었던 것처럼 평등주의의 실현이 전대에 비해 진전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서민들 중에 그 어려운 한자를 터득한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을 것이고, 역시 문화의 주도층은 사대부층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와 희곡의 중간적 위치를 차지하는 사가 널리 유행, 송대 문학의 새로운 경향을 대표한다. 서정시에서 유래하는 사는 도시의 찻집이나 주점 등에서 대중가요로 불려지게 되었다. 사는 음조에 따라 자유롭게 구사되며 구어체를 많이 사용했는데, 점차 문장가들의 천시로부터 벗어나, 소동파를 많이 사용했는데, 점차 문장가들의 천시로부터 벗어나, 소동파를 위시한 송대의 유명한 시인들이 적어도 약간의 사를 남기는 바가 되었다.
  도시의 구란이라는 연예장에서는 잡극이 공연되기 시작, 고전연극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전문가수나 예인도 출현하였다. 지방의 소시장이나 촌사, 사묘 등지에서도 편력배우에 의한 연극이 출현, 농민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도시의 발달과 도시문화의 성장 토대는 당말 이래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던 경제의 성장에 있었다. 농업생산의 획기적인 발전과 지역적 분화는 전국적인 유통망의 확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인구도 놀랄 만큼 증가하여 12세기 초에 중국의 인구는 처음으로 억대를 돌파하고 있었다. 특히 경제적 비중이 커진 강남의 인구증가는 두드러진 것이어서 남중국 대 북중국의 인구비율은 대략 6.5 대 3.5의 비율을 보이고 있었다.
  인구의 증가,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그중에서도 능력있는 구매자의 성장으로 이제 상품생산에 돌입한 각 분야의 생산물은 보다 광범한 수요자를 맞아 활발히 교환되었다. 상품도 소수 지배자의 사치품 단계에서 벗어나 좀더 일용적이고 대중적인 것으로 확산되었다.
  여기에 대외무역의 획기적인 증대가 가세하니, 송대의 상업은 가히 상업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커다란 질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북방의 유목민족과의 무역도 증가했지만, 해상무역로를 통한 아시아 각국과의 무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제 비단길은 서서히 전성기를 마감하고 해양무역이 개시, 광동 등 중국 남부에 대무역 도시를 탄생기켰다. 신라나 아라비아 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남해무역이 중국인들의 손에 장악되기 시작했으며, 대양항해에는 나침반이 사용되었다. 송대의 화폐는 무역로를 따라 일본에서 동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널리 발견되고 있다.
  상업혁명은 화폐경제의 발달을 수반, 엄청난 금속화폐가 주조되기에 이르렀다. 당 현종 말기에 연간 30만 관의 동전이 주조되었으나, 송의 신종 대인 11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500만 관으로 폭증, 사상 최고의 수준에 달했다.
  상업량이 증폭함에 따라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가 발행되는 등 유가증권의 발행도 촉진, 송대에는 역사상 최초로 화폐가 지배하는 경제에 도달했는데, 교자는 성도의 16대 부호들이 당시 사천 지방에서 통용되던 철전이 휴대에 불편한 점을 개선, 철전 대신 유통시 켰던 지폐다. 당국에서는 1023년 사천에 교자무를 설치하여 지폐를 흡수, 이를 공식화했다. 이밖에도 금은포, 전호 등의 금융기관이 나타났으며, 수도 변경에는 일종의 환전소가 생겨 상인들이 이곳에 현금을 넘기고 영권, 즉 수표를 받아간 다음, 다시 지방에서 현금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주판도 발생, 계산기의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현상들은 인플레를 야기하고 농촌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었으며, 서양의 근대에서와 같이 독립된 시민 계층의 출현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행, 작 등 상공업 단체들도 도시행정에의 참여를 추구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국가에 의한 물자조달의 청부기관으로서의 측면을 강하게 띠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미 중국의 관료제도는 이 모든 변화를 탄력적으로 흡수할 만큼 고도의 수준에 달해 있었다. 오히려 중국정부는 국내상업의 수입과 대외무역의 관세 등을 추렴, 단단한 재정수입을 조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상품화를 기초로 하는 도시문화의 성장 속에 여성들의 지위는 더욱 하락했다. 도시문화는 농촌에 비해 여성의 노동력이 덜 중요시될 수밖에 없는 조건에 있었고, 여성의 상품화가 진전, 창녀가 증가하고, 축첩의 제도가 널리 성행했던 반면, 과부의 재혼을 반대하는 사회의 관습이 강화되었다.
  특히 상류층 사이에서 전족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전족은 이미 오대의 남당에서 시작된 풍습으로 점차 확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적 병폐로 굳건히 자리잡았다. 전족이란 한참 뛰어놀 소녀 시절,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발가락을 아래로 향하도록 꽁꽁 묶어두고 조그만 신에 고정, 기형적인 발을 만든 것이다. 이로써 여성의 발은 정상적인 발의 반 정도에서 성장을 멈추게 되고 뒤뚱거리며 겨우 걷게 되는데, 전족은 남성의 노리개로 전락한 여성의 지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43 화약, 나침반, 인쇄술-심괄의 (몽계필담)(11세기 말)

 

  송대의 3대 발명품으로 화약, 나침반, 인쇄술을 꼽는다. 이슬람 세력을 통해 서양에 전해진 이들 과학적 발명품들은 서양의 근대사회를 재촉했다. 화약은 중세의 기사계급을 몰락시켰고, 나침반은 지리상의 발견을 가능하게 했으며, 인쇄술은 새로운 문화를 시민계급의 손에 쥐어주는 역할을 했다. 송대의 중국은 분명 세계 어느 나라도 따라갈 수 없는 최고의 문명국이었다. 자연과학, 인문과학 할 것 없이 과학기술이 전반적으로 발달하고, 그것을 뒷받침으로 해서 산업이 급격히 발달하고 있었다.
  화약은 초석, 유황, 목탄 등을 혼학하여 만들어지는데, 이미 당초의 어느 도사는 이들의 배합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물론 폭발력이 있는 무기를 제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하기 위한 연금술의 과정에 있었을 터이지만. 화약이 무기로 처음 사용되었던 것은 당말이었으며, 그 제작과 사용법이 널리 발달한 것이 송대였다. 1161년 남경 부근까지 남하한 금군과의 전투에서 폭발력이 강한 화약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당시는 종이로 만든 용기에 화약을 담아, 점화한 다음 손으로 던졌으나, 13세기에는 철제 용기가 출현하고, 통 모양의 용기에 넣고 정확히 조준 발사하는 장치가 발명되니 명중률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화약은 13세기 중엽, 이슬람 제국에 출정한 십자군에 의해 유럽에 전달되었고, 유럽은 14세기 전반부터 화약을 제조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 중국에 나타난 서양인들의 손에 들린 화약무기는 옛 중국인들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위력이 강한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일찍부터 자석의 원리를 알고 있었으며, 11세기에는 자침이 정확히 남북을 가리키지 않고 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는 것까지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이러한 원리는 송대에 해상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나침반의 제작을 이끌어냈다. 낮에는 태양, 밤에는 별을 기준삼아 원시적인 항해를 해왔던 항해기술이 급격히 진전, 원양항해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했다.
  한편, 인쇄술이 급격히 발전했다. 송대에는 산업의 발달에 따라 문화층이 확대되고, 과거제가 정착, 수험용 참고서 등 서적의 수요가 크게 증대되고 있었다. 중국에는 일찍이 제지술이 발달하고 있었고, 제지업이 발달한 곳은 따라 인쇄업도 발달했다. 서적이 상품으로 팔리기 시작한 것은 이미 당말부터였다고 한다.
  현존 최고의 목판인쇄물로는 우리 나라의 석가탑에서 발굴된 (무구정광 다라니경)이다. 이것은 8세기 전반의 어느 시기에 말들어졌다. 목판에 글자를 새긴 다음 반복해서 찍어내는 목판 인쇄술은 이처럼 불경이나 혹은 유가의 경전의 대량보급을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어떤 이는 한대 이래의 탁본의 원리에서, 혹은 도장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041년, 필승이 찱흙을 아교로 굳혀 최초로 움직이는 활자를 만들었다. 목판으로는 다른 책을 인쇄할 수 없는 데 비해, 활자는 철판 위에 글의 순서대로 배열하여 인쇄를 한 다음, 다른 책을 찍을 때는 또다시 배열하여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문자는 표음문자가 아니라 표의문자, 글자의 수가 무수히 많다 보니, 활자가 널리 사용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송대에는 각 분야의 서적출간이 매우 활발히 일어나는 등 신기원을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구양수의 (신당서), 사마광의 (자치통감)이 있다. (신당서)는 (구당서)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한 기전체의 전술이고, (자치통감)은 사마광이 19년간 편찬한 통사로, 편년체로 되어 있다. 송대에는 역사서술에서의 새로운 방법, 즉 사건의 본말을 중심으로 기술하는 이른바 기사본말체가 출현했다. 금석학이 새로이 개척되어 구양수의 (집고록), 조명성의 (금석록) 등이 발간되었으며, 각종 지리서적들도 활발히 출간되었다.
  송대의 과학을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심괄이다. 11세기 왕안석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그는 중국의 대표적인 과학자로, (몽계필담)이라는 저술을 통해 당대의 천문학, 수학, 물리학, 생물학, 문학, 역사학 등의 학문적 성과를 깊이있게 일괄하고 있다.
  그는 자연관찰을 통해 고대에 있어서의 기후의 변동과 해륙의 변동을 추정해냈고, 각종 천문기계를 제작했다. 태양력의 사용을 주장했으며, 자침이 정남북을 가리키지 않는 것에 유의, 입체 모양의 지도와 천하도를 만들었다.
  11세기 말의 소송은 의상대를 건설했다. 그 5층에 혼천의가 설치되고, 28수를 비롯한 각 성좌를 배치한 천구의를 설치했는데, 이들은 모두 수차와 물시계로 움직였다고 한다. 두헌이 나타나 수학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 당 중기에 등장했던 곱셈법이 발전했고, 0이 발명되었다. 송자는 검시법, 사상의 판별을 포함한 당시까지의 법의학 지식을 총정리했다.

   

44 송, 중국회화의 황금시대-문인화의 세계(11세기--13세기)

 

  어느 서양 성악가가 판소리 공연을 관람한 후에 하는 첫마디가 (저 사람 화났습니까?)였다고 한다. 아무리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서구식 가치기준에 의존하는 정규 학교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은 음악이든 미술이든 우리 문화, 혹은 동양의 문화보다 서양의 것에 더 익숙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나라의 회화사에 카다란 영향을 키쳐왔던 중국의 회화는 송대에 그 황금기를 맞았다. 흔히, '당시 송화'라고 표현하듯이. 화원, 사대부, 재야 직업화가들이 대거 활약했다. 송대의 국립 미술기관 한림도화원은 중국 화원 사상 가장 완벽한 화원제도로 평가 받으면서 훌륭한 화원들을 낳았다. 사대부 화가들은 어디까지나 사대부 계층의 취미생활로서 그림을 즐겨 그렸는데, 그들 사이에서는 전문화원의 그림과는 구별되는 이른바 '문기어린' 그림이 강조되었다.
  송대에는 점차 불교가 쇠퇴하면서 조각에 쏟아졌던 중국인들의 예술적인 정열이 회화로 옮겨지게 되었다. 왕실의 궁정화가에 의해, 혹은 종교의 부속화로서 종속되어 있던 하나의 독립된 예술분야로 정착, 높은 예술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특히, 화가의 주관적인 가치를 담아냈던 문인화는 송대 회화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 좁은 의미의 문인화란 사대부의 의취를 담은 매란국죽의 사군자화를, 나아가서는 사대부들이 그린 그림 일체를 일컫는다. 사군자는 사대부들에 의해 즐겨 그려졌던 주제이며, 화원의 시험에서도 대나무 그림의 배점이 제일 높았다.
  문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는 소동파와 문동이다. 특히 소동파는 직업적 화가들이 기교를 중시하고 실제의 대상을 얼마나 닮게 그리느냐에 칟중한다고 보고, 사대부들은 그와 달리, 눈앞의 현상보다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은 다음, 다시 그것을 초월하여 흉중의 뜻을 담아내야 한다고, 이른바 '문기어린'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적벽부의 문장으로 더욱 알려지고, 대대로 짝사랑을 아낌없이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러한 주장이라면, 일찔이 고개지도 회하를 논하면서 이른바 전신, 즉 정신을 전하는 것을 회화가 추구해야 할 사명으로 예기한 바 있다.
  가령 대나무를 그린다면, 마디로 분절해서 치밀하게 그리는 거이 아니라, 대나무를 깊이 관찰하여 그 본질을 마음에 담아낸 다음, 땅에서 가장 꼭대기까지 한 획으로, 그 속도가 마치 '토끼가 튀는 듯, 솔개가 급강하하면서 덮치듯이'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사대부들은 그림을 즐겨 그리면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군자로서 정신적인 수양을 위한 하나의 세련된 여가생활이었지, 그림을 전문으로 하는 화업은 여전히 천기로 취급하고 있었다.
  당초기의 염립본은 대신급 고위관료였는데,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 어느 날 왕과 동행, 놀이를 나갔는데, 왕이 명하여 모두들 노는 자리에서 엎드려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후 그는 '화기는 천기'라 하여 붓을 꺾어버렸다고 한다.
  특히 송대에서는 산수화가 독보적인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송대에 도시가 널리 발달, 도시적 분위기가 성숙해지자 사람들에게 자연미에 대한 각성이 새롭게 다가왔을 것이며, 그간의 불교, 도교의 자연에 대한 애착 등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동양의 산수화, 즉 풍경화는 사의를 강조하는 까닭에 흔히 '동양화는 읽는 그림'이라고도 하고, '시는 소리있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없는 시'라는 표현도 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좋은 시에 붙여 그림을 그리고, 좋은 그림에 돌려가며 감상을 쓰는 것은 일반적인 것, 그 속에 사대부들의 한가로운 아취가 담뿍 담겨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합은 이 둘이 먹과 붓의 동일한 도구를 사용했기 때문에 더욱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흔히 동서양의 풍경화를 비교하여, 그들의 상이한 자연관이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동양인이 자연의 내재적 질서를 중시하고 그 '운동태'를 중시해서 선적인 미술을 창조했다면, 서양인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파악, '존재태'를 중시함으로써 면적 미술을 창조했다. 서양화에서는 한 화면에 하나의 시각만이 존재하고, 또 하나의 시간만이 존재하는 반면, 동양화에는 여러 개의 시각과 시간의 경과까지도 표현되고 있다. 예컨대, '끝없는 강산' 같은 유의 화폭에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주제의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중국의 산수화에서는 근경, 전경, 원경이 잘 구분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근경은 위에서 내려다본 시각이고, 전경은 옆에서 본 시각이며, 원경은 아래에서 올려다본 시각을 잡았다. 서양사람들이 자연보다 인간이 중심이 되고, 그것도 개인의 시점에서 자연을 표현했다면, 동양사람들은 자연을 위주로 해서 인간이 거기에 시각을 맞추고 있다.
  안견 이래 우리 나라의 화단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곽희는 전문 화원 출신으로, 북송기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고개지 이래 7백년의 뛰어난 화론을 이룬 평론가였다. 그는 자신의 화론을 담은 (임천고치)에서 말하기를,
  (산은 가까이에서 보면 이와 같고, 멀리 몇 리 밖에서 보면 또 이와 같으며, 멀리 수십 리 밖에서 보면 또 이와 같다. 매번 멀어질수록 매번 다르니, 산의 모습은 '걸음걸음마다 모두 돌아 보지 않으면' '천 개의 산'을 '두 눈으로 빼앗을 수' 없다)고 얘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북송의 곽희파, 남송의 마하파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북송의 그림은 여백이 강조되고 부드러운 남송의 그림보다 산봉우리가 꽉 짜여져 있고, 낮은 산이라기보다 준령이 첩첩하며, 습기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느낌보다는 건조하고 메마른 느낌을 준다.
  이러한 경향은 화풍의 차이에도 기인하지만 화북과 강남지방의 자연이 이처럼 차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중국인들은 어디까지나 실경을 그렸던 것인데, 이를 받아들인 우리에게는 가경이되는 것이다. 뒷날, 우리 나라의 화단에 실경을 그리는 화풍이 등장, 이를 '진경산수화'라 부르게 되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

   

45 여진족의 화북 지배-북송의 멸망(1127년)

 

  만주에는 퉁구스계의 여진족이 널리 분포되어 반농반목의 부족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찍이 발해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 무렵에는 요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들 중 이미 요의 지배하에 편입된 세력은 숙여진, 그렇지 않은 부족들은 생여진으로 불리었다. 생여진 중에 송화강 지류인 이르추흐 강 유역에 거처하던 완옌부가 추장 아골타를 중심으로 급격히 성장, 12세기 초 동아시아에 돌풍을 몰고왔다.
  굳세고 용맹한 아골타는 요의 간섭에 공공연한 반기를 들고, 1115년에 독립적인 여진족 최초의 국가를 건설, 국호를 대금이라 칭했다. 금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여 요의 집압군은 송화강변에서 무참하게 대패했고, 금군은 요동 요서로 남하, 종횡무진으로 세력을 떨쳐나갔다.
  금의 발전의 모태는 군사, 행정의 주축인 맹안, 모극의 제도에 있었는데, 여진족의 300호가 1모극으로, 다시 10모극이 1맹안으로 조직되었다. 1모극에서 100명의 군사가 뽑혀 1모극군이 되었고, 10모극군이 모여 1맹안군이 되었다. 이들은 군사, 행정이 일치된 맹안, 모극의 제도 속에서 유목민 특유의 강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맹안은 1000을 위미하는 여진어의 '민간' 모극은 족장의 뜻인 '무게'의 음역이다.
  한편, 이무렵의 중국은 왕안석의 개혁도 실패하고, 당쟁은 격화, 급격한 국력의 쇠퇴기를 맞고 있었다. 휘종은 회화 등 문화적 재능으로는 유명하지만 정치에는 뜻이 없어 그가 신종의 아들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 틈에 채경 같은 처세술에 능한 관료가 환관 동관과 결탁, 온갖 부정 부패를 일삼고 있었다.
  휘종은 도성 동북면에 인공산을 만들고 도시의 향락생활에 빠져 들어갔고, 채경과 동관은 이를 부추겨 전국의 기화요초와 괴석들을 수집하게 되니, 기석을 운반할 때, 민간집의 담장이 방해가 되면 담장을 허물고, 집이 방해가 되면 집까지 허물어버렸다고 한다.
  1120년 송은 연운 16주를 회복할 심산으로 금과 연합, 요를 협공하기로 했는데, 방납의 난이 일어나 그 군대를 국내에 투입할 수밖에 없는 상활에 이르렀다. 방납은 강남의 분노한 백성들을 이끌고 한때 대운하의 종점인 항주를 점령하는 등 세력을 떨쳤다. 한편, 산동의 양산박에서는 송강 등이 출몰, 관군을 크게 괴롭혔는데, 이들이 바로 유명한 (수호지)에 등장하는 양산박의 108명의 호걸의 모델이다.
  금군은 거의 독자적 힘으로 일거에 요의 본거지를 석권했다. 요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는 서쪽으로 도망, 한때 서하에 몸은 의탁했지만 1125년 금나라에 체포, 요는 건국 이래 210여년 만에 멸망했다.
  송은 국내정치의 불안도 있고 해서 금나라와의 약속을 밥먹듯이 어겼고, 양국의 관계는 불안정했다. 일단 회군했던 금군은 다시 남하, 이듬해에는 송의 수도 변경을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다.
  당시 금의 군대가 도성에 육박했다는 보고를 들은 휘종은 신하들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금나라가 설마 우리 도성을 공략해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이 말을 마치고 기절하고 말았다. 백성들은 채경 등의 처벌을 요구하면서 결사대를 결성, 목숨을 버려서라도 도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흠종은 두려움에 떨며 마지못해 도성에 머무를 뿐이었다.
  결국 송은 금나라가 요구하는 모든 굴욕적 조건들, 황금 5백만 냥, 백은 5천만 냥, 비단 1백만 필, 우마 1만 마리 등을 바치기로 하고, 흠종이 금나라 황제의 조카가 될 것 등을 모두 수락했으나, 이듬해에 금나라에 멸망하고 말았다. 때는 1127냐년, 이 사건을 후대의 사가들은 당시의 연호를 따서 '정강의 변'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변경에 도읍했던 북송은 멸망했다. 휘종과 흠종, 3천 명의 종실들은 포로로 잡혀 옛땅으로 유배되었으며, 휘종과 흠종은 그곳에서 쓸쓸한 여생을 마쳤다.
  때마침 금에 사신으로 가기 위해 수도를 떠나 있던 휘종의 아홉째 아들 강왕이 금의 추격을 피해 강남으로 이동, 임안(항주)을 수도로 삼고 송의 피난정권을 수립하니, 그가 고종. 이것이 남송의 시작이다.
  이제 중국은 북중국을 완전히 빼앗기고, 회하를 경계로 금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양국 사이에는 수없이 전쟁이 되풀이되었다. 화북지방에도 여러 의병장들이 활약하고, 송은 주전파와 강화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1141년 강화파가 진회가 악비, 한세충등 명장들의 지휘권을 박탈한 후, 이듬해 다시 금과의 화의를 수립, 그 대립을 종결시켰다. 이때 송이 금에게 제출한 서약서에는 대대로 신하의 절개를 지킨다는 약조가 담겨져 있었으니, 이전까지의 중국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민족의식이 고조되었던 중국인들에게 악비는 영원한 민족의 영웅으로 두터운 사랑을 받았으며, 그를 투옥, 끝내 옥사시켰던 진희는 대표적 매국노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대표적 의병장으로 금군에 타격을 주었던 악비는 중국인들의 중원 복귀의 꿈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46 초원의 폭풍 칭기즈칸-몽고의 유라시아 제패(13세기)

 

  1161년 금나라에 세종이 즉위, 최성기를 구가할 무렵, 시베리아 남단 해발 1,400미터의 몽고 초원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테무진. '눈에 불이 있고, 얼굴이 빛나는' 아이. 그가 장차 몽고족을 통일. 유라시아를 제패하는 세계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룩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전설에 의하면, 몽고족은 하늘에서 내려온 푸른 이리가 흰 사슴을 아내로 맞아 건설한 나라이다. 북방의 혹독한 추위와 거친 유목 생활은 그들을 강인한 체력과 끈질긴 인내심을 가진, 매우 독립적이고 용먕한 개인으로 키워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평생을 말 안장 위에서 생활했다.
  테무진은 용맹한 몽고 부족장 예슈게이와 호겔론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그가 9살 때 아버지 예수게이는 타타르 족에게 독살당하고 말았다. 당시 몽고고원에는 몽고족 외에도 몽고계, 투르크 계의 여러 유목 민족들이 서로 각출을 벌이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부적은 타타르, 메르키드, 케레이트, 옹구트, 나이만 등이었다.
  아버지를 잃은 테무진은 어머니 호겔론 슬하에서 고난에 찬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점차 장성하면서 부족 재건의 투지를 불태웠고, 그의 용맹함은 주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몽고고원을 통일해나갔다.
  한번은 메르키드 부족에게 아름다운 아내 뵈르테를 빼앗겼던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예슈게이가 메르키드 청년의 아내 호겔론을 탈취해갔던 것에 대한 복수였다. 그때 예수게이는 호겔론의 미모에 반하기도 했지만, 유력한 부족의 신부를 얻는다는 것은 당시 부족간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한 방법이기도 했다.
  마침내 1206년 몽고의 부족장들은 부족 연합회의인 '쿠릴타이'를 개최, 이미 백전의 경험을 가진 뛰어난 전략가로 성장한 테무진을 '칭기즈칸'으로 추대했다. 칭기즈칸이란 몽고어로 '강력한 군주'라는 뜻이며, 쿠릴타이는 집회라는 뜻이다. 이제 그가 태어난 한 부족의 명칭에 불과하던 몽고는 몽고고원 일대에 거주하는 종족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확대되었다.
  그는 종래의 씨족제를 해체하고, 사회를 천호, 백호제로 재편했는데, 이는 금의 맹안, 모극제와 매우 유사한 것이다. 당시 총 95개의 천호 중 88개의 천호장에는 '나라를 함께 세우고 함께 고생해온 전사'가 임명되었고, 칭기즈칸은 피로써 다져진 충성스런 전사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지휘, 대정복을 수행해갔다.
  1215년, 먼저 동으로 진격하여 금의 연경을 공략, 하남으로 밀어낸 칭기즈칸을 말머리를 서방으로 돌려 그야말로 질풍노도와 같이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해나갔다.
  요의 망명정권 서요를 대신한 나이만 왕국이 쓰러졌고, 중앙아시아 최대 강국으로 사마르칸드에 도읍하고 있었던 호라즘 왕국이 쓰러져갔다. 1225년까지 남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에서 서로는 카스피해를 넘어 남러시아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거의 전역이 몽고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귀향한 칭기즈칸은 1227년 마침내 서하를 무너뜨리고, 금으로 진공을 꾀하던 중 대정복으로 점철된 60여 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몽고족의 풍습은 매장 후 봉분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고향에 묻힌 그의 묘소는 확인할 길은 없다.
  칭기즈칸에게는 정실 소생의 4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툴루이가 있었는데, 그의 영토는 몽고풍습에 따라 이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대칸의 위는 오고타이, 그의 아들 구유크, 툴루이의 아들 몽케, 몽케의 동생 쿠빌라이에게 이어졌다.
  칭기즈칸의 정복사업은 그 자손들에게 훌륭히 계승되었다. 오고타이는 1239년, 마침내 숙적 금을 멸망시켰고, 몽케는 1258년 세계 최고의 문명 발상지이자 고도의 이슬람 문명국인 서아시아의 압바스 왕조를 무너뜨렸다. 칭기즈칸의 5대 대칸 쿠빌라이는 1279년, 마침내 동아시아 최대의 문명국 송을 멸망, 제국의 최대판도를 이루었다. 그것은 동해에서 남러시아에 이르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 최대의 제국이었다.
  몽고군의 전술은 마치 초원에서 사냥을 할 때 포위망에 들어 있는 짐승을 압축하듯이 추호의 사정이 없었다. 정복당한 나라의 백성은 기술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잔인하게 살육되었다. 그들은 전진하는 몽구군의 후방을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이다. 살육당하지 않은 정복민은 다음 전쟁터로 끌려나가 위험한 노역에 동원되는 등 몽고군의 방패막이로 쓰러져갔다.
  몽고군이 지나간 도시는 철저히 파괴되어, 수천년 귀중한 문화 유산들이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져갔다. 몽구군의 말발굽 소리만 듣고도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각국의 처절한 항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더욱 철저한 피의 보복뿐이었다.
  몽고군의 이 가공할, 파괴적인 위력은 신출귀몰한 기마전술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나, 금을 통해 취득한 중국의 화약, 성벽 도시에 큰 돌을 쏘아넣는 투석기, 성벽을 무너뜨리는 특수 수레 등 신기술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몽고의 대제국은 몽고 본토 및 중국은 황제의 직할령이 되고, 그 나머지 땅은 이른바 4칸국으로 나뉘어 다스려졌다. 남러시아에는 킵차크 한국, 서아시아에는 일 칸국, 중앙아시아에는 차가타이 칸국, 서북 몽고에는 오고타이 칸국이 건설되었다.
  특히, 킵차크 칸국은 오고타이 때 주치의 아들 바투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바투의 폴란드, 헝가리, 실레지엔 등 유럽 대원정은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실레지엔 공 하인리히 2세는 1241년 발시타느 전투에서 전사했다. 유럽인들은 몽고군의 가공할 위력을 '신의 채찍'이라고 불렀다.
  몽고의 대제국 속에서 동서의 문물은 매우 활발히 교류했으며, 몽고의 문화는 그들의 지배력이 뻗쳤던 유라시아의 각국에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47 약탈자에서 지배자로-원 왕조의 성립(1271)

 

  대제국을 건설한 몽고족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숙제가 하나 남겨졌다. 그것은 어떻게 스스로를 잔인한 정복자에서 고도의 지배자로 변신시켜, 고도의 문명국들을 다스리는가 하는 문제였다. 몽고족은 초원의 목동이자 전사였고, 정복민인 중국은 세계 최고의 문화전통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게다가 몽고족은 숫적으로도 열세를 면치 못하는 실정이엇다. 그 과제는 참으로 오랜 전통 끝에 달성되었으나, 또한 그것을 몽고족의 건강한 풍습을 해쳐 마침내 제국의 지배를 종식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순수 유목민인 몽고인들에게 중국의 농경문화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생소한 것이었다. 오고타이가 지배하던 어느 날, 이렇게 진언하는 몽고의 중신이 있었다.
  (몽고제국에 있어서 한인들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차라리 한인들을 모두 그들의 농경지에서 쫓아내고 그곳을 초원으로 만들어 소와 양을 방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러한 몽고인들의 중국 지배관을 바꾸어놓은 이가 야율초재. 그는 거란 황실 출신의 금나라 최고의 학자요 정치가로, 몽고가 금나라로부터 얻은 최고의 보물이었다. 그는 칭기즈칸으로부터 오고타이 때까지 30여년간 재상으로 활약했다. 그는 몽고인들에게 농토와 농민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토지가 생산해내는 풍부한 생산물을 세금으로 확보, 국가재정을 확충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외국인이었다.
  1259년 몽케가 남송 정벌 도중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자, 대권을 두고 쿠빌라이와 아릭부게 간의 4년 여에 걸친 대립이 있었다. 몽고의 전통귀족들의 대부분은 아릭부게를 중심으로 결집했으나, 소수파에 불과했던 쿠빌라이가 중국대륙의 광대한 힘을 기반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일찍이 중국문화와 접촉했던 중국통으로, 그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몇 안되는 몽고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몽고인들은 전통의 고수와 중국화의 기로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었다. 그것은 쿠빌라이와 오고타이의 아들 카이두의 항쟁으로 지속, 그들은 죽을 때까지 20여년간에 걸쳐 대립항쟁했다. 실제로 4칸국 중에서 쿠빌라이의 동생 훌라구가 건설한 일 칸국만 제외한 모든 칸국들은 카이두를 지지하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몽고의 전통 도시 카라코룸을 두고, 제국의 근거지를 중국 내지로 옮겼다. 수도는 금의 수도였던 대도 북경으로 옮겨졌고, 1271년에는 국호를 '시초', 혹은 '근원'이라는 뜻의 '원'으로 정했다. 이는 중국의 고전인 (역경)에서 자구를 딴 것이다. 남송 정벌의 대장정이 다시 결행되고, 1279년에는 마침내 남송을 멸망, 몽고족은 중국민을 송두리째 정복한 최초의 민족이 되었다.
  원제국은 중서성을 최고관청으로 하는 중국식 중앙관제를 약간의 손질을 가해 그대로 운용했다. 그러나 과거를 통해 관리를 뽑을 필요는 없었다. 대부분의 고위 관직자들은 몽고인 제일주의에 의거, 반드시 몽고인으로 충당되었으니, 과거가 실시된다 하더라도 몽고인으로부터 외면당해 단기적 실시에 그치게 마련이었다.
  지방의 행정기구로는 예전의 주현제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부, 로를 설치했는데, 각 단위에는 다루가치라는 몽고인 감독관을 파견했다. 전지역은 10여 개의 지역으로 묶여지고, 각각 행중서성을 두었는데, 그 뜻은 중서성의 파견기관 정도의 의미이다. 이를 줄여서 행성, 더 뒷날에는 성으로 불리어졌다. 중국에서 성이 지방 행정구획으로 된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원은 백성들을 크게 4개의 신분으로 구별, 철저한 차등을 두어 다스렸다. 물론 최고의 신분은 몽고인. 몽고인 제일주의는 다수의 문화민인 중국인을 지배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제2신분은 색목인. 색목인이란 '여러 인종이 섞여 복잡하다'는 뜻으로, 서역 계통의 제종족을 일컫는다. 이들은 원의 제국 확장이나 중국 통치에 일찍부터 중요한 협력자 역할을 해왔다. 몽고인들에게는 이들이 중국문화와는 아주 이질적인 이슬람 문화권에 속해 있다는 것, 그리고 뛰어난 상업, 재정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아주 매력적이었을 거이며, 상업활동에 종사하던 이들도 몽고의 대제국 속에서 대상로가 확보되고 상업상의 이득이 확대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다.
  중국인들은 몽고의 지배 속에서 가장 커다란 차별을 받고 있었는데, 제 신분인 한인과 최하신분인 남인으로 구별되었다. 한인은 금의 지배하에 있던 화북의 중국인들로 말단의 관직에 봉직할 수 있었으나, 최후에 정복된 남송 지배하의 강남의 중국인들, 즉 남인에게는 그것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일찌감치 벼슬을 포기한 중국의 지식인들은 재야에 묻혀 시짓기를 즐기거나, 잡극이라는 새로운 문학분야를 개척, 민중의 문화수준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한편 단지 몽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생애에서의 모든 영화가 보장되었던 몽고인들은 점차 유목민족 특유의 강건한 기풍, 용맹한 군사력을 상실해갔다. 칸의 계승권 다툼은 갈수록 심화되어 성종에서 마지막 황제 순제 사이의 26년간에는 무려 8인의 제왕이 교체되었다. 게다가 황실의 라마교 신봉은 원제국의 몰락을 재촉했다.
  라마는 '높은 이'라는 뜻이다. 라마교는 티베트의 토착신앙과 결합한 불교의 변종으로, 주술과 예언을 중시하는 밀교다. 라마교의 최초의 신자는 쿠빌라이로, 그는 티베트 원정에서 라마 승려 파스파의 설법에 감동하여 그의 열렬한 신도가 되었다. 티베트 문자를 변형, 제작한 파스파 문자는 몽고의 공문서에 사용되었으며, (라마승을 때리는 자는 그 손을 자르고, 이를 욕하는 자는 그 혀를 자른다)는 법령까지 재정되었다. 수백 회에 이르는 빈번한 라마교의 불사, 라마교의 방중술에 빠진 황실의 퇴폐적인 생활은 재정난을 더욱 악화, 지폐가 남발되니, 인플에의 격증 속에서 백성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48 일본원정과 고려의 고뇌-2차 일본원정(1274, 1281년)

 

  1960년 4월, 마산 앞바다에 미제 최루탄이 눈에 박힌 16살 김주열군의 시신이 떠올라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보다 약 700년 전인 1274년, 마산부두에서는 일본정벌을 떠나는 900척의 군단이 출정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려와 몽고의 첫 접촉은 1219년, 평양성까지 쫓겨온 가란족을 함께 물리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후 고려인들은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며 오만불손한 태도를 일삼는 몽고사신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1225년 교만한 몽고사신 저고여가 공물을 싣고 귀국하던 중, 압록강변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 몽고는 이를 문책한다는 빌미로 고려 침략을 개시했다.
  1231부터 1258년까지 몽고는 6차에 걸침 대전투 외에도 크고 작은 침탈을 끈질기게 계속했고, 그에 맞선 고려인민들의 30년 항쟁은 세계 역사상 매우 드문 것이었다. 몽고의 초토화 작전에 따라 전국의 국토는 남김없이 유린되어 폐허가 되었고, 그 속에서 황룡사 목탑 등 귀중한 문화재인들 안전할 수가 없었다.
  강화의 무신정권이 무너진 후, 고려왕실은 몽고에 굴복, 이후 약 100년간 우리는 몽고의 간접지배를 받게 되었다. 몽고의 공주와 결혼하여 몽고왕의 사위가 된 후에야 즉위할 수 있었던 고려왕의 이름 앞에는 '충'자가 붙여졌다. 엄청난 공물이 요구되고, '결혼도 감'이 설치되어 고려의 여자까지 몽고에게 공물로 부쳐졌다.
  왕은 몽고옷을 입고, 머리 주위를 둥글게 깎고, 중앙의 머리만을 땋아 길게 늘어뜨린 변발을 했다. 몽고의 풍습은 상류사회에 먼저 유행, 시간이 흐른 뒤에는 민간에도 깊이 침투, 전통문화는 크게 변질되었다. 족두리도 몽고의 풍숩이었고, 목마장이 설치되었던 제주도에는 몽고어의 잔재가 지금까지도 크게 남아 있다.
  몽고의 수탈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죽음이 그를 제약할 때까지 평생 정복전쟁을 계속했던 쿠빌라이는 일본원정을 계획했고, 그 방법은 몽고의 전쟁방식, 피정복민을 방패막이로 삼는 대리전이었다. 몽고는 고려를 기지로 삼아 일본원정을 감행했고, 이 대리전을 통해 고려의 국력은 더욱 피폐해졌다.
  1274년 1차 일본원정을 위해 고려는 9백 척의 병선, 무기, 군수품등 모든 물자를 담당해야 했다. 이때 병선 공사의 감독관은 홍다구. 그는 고려인들의 증오의 표적이었으며, 때문에 그는 더욱 알랄하게 고려인들을 채찍질했다. 그의 아버지 홍복원은 구려 국경 수비대장으로 몽고의 침입 때 가장 먼저 항복, 침략의 앞잡이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마침내 몽고군 2만과 고려군 5천으로 구성된 일본원정군은 마산항을 출발, 대마도와 이키를 소탕하고, 하카타 만의 이마즈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정벌군은 화약으로 만든 대포, 석화시 등 신예무기를 동원, 일본무사들을 혼비백산케 했다. 이윽고 밤이 되고,  야습을 걱정했던 원정군은 함선에 올라 아침을 맞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 때마침 불어닥친 폭풍우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원정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1281년 2차 원정이 감행되었다. 이번에도 고려는 9백 척의 병선제조를 강요받았다. 몽고군 10만과 고려군 4만은 다시 하카타 만에 도달했다. 그러나 또다시 몰아닥친 태풍으로 정벌군은 일본땡에 상륙도 못한 채 퇴각했다.
  2차에 걸친 원정으로 고려의 국력은 더욱 피폐해갔고, 일본으로부터는 침략자의 난인이 찍혔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준 폭풍우를 '신풍' 즉, 가미가제로 부르면서 스스로를 '신의 보호'를 받는 국민으로 자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일본인들을 구해준 것은 베트남, 자바 등지에서 벌어진  끈질긴 대몽항쟁이었다. 3차 일본원정을 준비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일본으로 향할 병력을 이쪽으로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베트남은 남과 북에 각기 점성국과 대월국이 있었다. 1283년 원군은 해로로 점성국을 함락시켰으나, 그 선단은 폭풍으로 괴멸되었다. 다시 증원된 선단도 역시 폭풍으로 괴멸, 원군은 대월에 대해서 '길을 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화가 난 쿠빌라이는 1284년 말부터 4년간 계속해서 대군을 증파, 역시 순식간에 수도 하노이를 점령했다. 그러나 동남아의 무더위와 저습지에서는 몽고의 날랜 기병도 힘을 잃었고, 베트남 인은 고향의 익숙한 산천지리를 적절히 이용, 끈질긴 저항을 펼친 끝에 마침내 원군을 격퇴시켰다. 이때 저항군을 지휘했던 이가 왕족 진흥도, 그는 오늘날 까지 민족적 영웅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계속된 원정에 반대하는 소요, 카이두 계의 반발도 끊이지 않았다. 이어 1292년에는 자바가 입공을 거절하고 나섰다. 자바에 사륙한 원군은 역시 쉽게 왕도를 점령했으나, 민간의 끈질긴 항쟁 속에 아무 전과 없이 철수해야만 했다. 패보가 계속되는 가운데 쿠빌라이는 1294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세계사적 시각에서 볼 때 우리 나라와 일본, 중국은 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한다. 그 문화의 원류는 중국에서 시작한 것이 많고, 우리 나라나 일본은 중국의 문화를 각기 주체적으로 소화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어왔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중국의 실력을 항상 피부로 느끼며 생활해왔던 것이 비해, 일본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좀더 여유있게 중국의 문화를 조명할 수 있었다.

   

49 마르코 폴로의 중국여행-(동방견문록)의 완성(1299년)

 

마르코 폴로는 보석상인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동방으로의 기나긴 여행을 떠났다. 1271년 고향 베니스를 출발한 그는 흑해를  횡단하고, 파미르 고원과 타림 분지를 지나 원의 수도 북경에 다달았다. 그때 원의 황제는 쿠빌라이. 젊은 상인 마르코 폴로는 그의 신임을 받아 1275년 부터 1292년까지 17년간 중국의 자방 행정직에 봉사하면서 중국의 문물을 두루 익혔다. 그는 중국 남방의 최대 무역항 천주를 출발, 남지나해, 말라카 해협, 인도양, 아라비아 해, 페르사아 만의 호르무즈 항에 기항한 후 1295년에야 다시 고향 땅을 밟았다.
  돌아온 고향 베니스는 제노바와의 전쟁에 휩쓸렸고, 이 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포로의 몸이 되어 제노바의 한 수감되었다. 이곳이 바로 (동방견문록)의 산실. 함께 감옥에 있던 직업적 작가 루스티치아노가 마르코 폴로의 기행담을 정리, 유럽에 중국의 문물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동방견문록)은 이탈리아 어, 라틴 어, 프랑스 어 등 각국에 필사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현재 120종의 필사본이 남겨져 있을 정도로. 낯선 세계의 이색적인 풍광, 다양한 산물, 독특한 문화는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중세말의 유럽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신비한 세계'였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세계 최고의 신기술들, 산에서 캐내는 불타는 검은 돌(석탄), 소액까지 9등급으로 발행되어 널리 통용되는 지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고상한 도시 항주-이 모든 이야기들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믿어버리기에는 중국의 문물은 너무도 새롭고 선진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마르코 폴로라는 말은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터무니없는 말'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이 책의 사본을 구해 밑줄을 긋고 토를 달면서 열심히 읽었고, 마침내 이 신비한 동방의 나라를 찾아나설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지구가 둥글다는 당시에 확인되지 않았던 가설을 믿었기 때문에 서쪽으로의 대항해에 나섰고,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는 동방을 여행한 유일한 유럽인도 아니었고, 그가 거쳤던 육상, 해상의 무역로가 죽음을 무릅써야 할 만큼 대단히 새롭고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몽고의 세계제국 속에서 유라시아의 온갖 인위적인 장벽들은 제거되어 있었다. 아울러 제국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 역참제가 정비되어 여행자들의 편의를 도왔다. 25리마다 말과 숙소를 갖춘 역이 있었는데, 황제가 발행하는 특허장인 배자만 있다면 어느 역에서든지 역마와 숙소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고, 쾌적한 숙소에는 고급침상까지 놓여 있어져 있어 마르코 폴로를 거듭 놀라게 했다.
  유럽인 중에도 교황의 사절이었던 카르피니, 루브르크, 그외에도 기록을 남기지 않은 많은 유럽의 상인들이 이 길을 통해 동서양의 무역에 종사했다. 그러나 당시 상업활동의 주역이자, 이를 통해 동서 문물교류에 가장 공헌한 이들은 이슬람, 특히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인이었다.
  그들은 일찍이 당나라 때부터 산동의 신라인들처럼 광주 등지에 자신들의 집단 거류지를 건설하고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면서 해상무역에 종사했었고, 송대 이후 해상교역이 더욱 성해짐에 따라 고려에까지 와서 우리 나라의 로마자 표기명 'Korea'의 유래를 제공했다. 그들은 몽고제국의 신임 속에 제국 내외의 상업활동을 거의 전담했다. 모로코 인 이븐 바투타는 마르코 폴로보다  약70년 후에 중국을 방문했는데, 그는 중국에서 만났던 아랍인의 동생을 사하라 사막에서 만났다고 한다. 당시 아랍인들은 중국을 가장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외국세력 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통해 서아시아의 선진 과학기술이 전해져 중국의 과학기술이 더욱 발달했다. 자말 웃딘 등이 전수한 천문, 역법의 지식은 곽수경의 '수시력'을 탄생시켰는데, 이는 종래 중국의 어떠한 달력보다도 우수한 것으로, 1년을 365. 245일로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다. 알라 웃딘과 이스마일이 만든 회회포는 150근의 쇳덩이나 돌을 먼 거리에 발포, 성벽을 격파하는 등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다. 중국인들은 이슬람교를 회교라고 부르는데, 이슬람교가 회홀, 즉 중앙아시아의 위구르 족을 통해 중국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회회 의학, 회회음악, 회회 요리 등이 중국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문명 발생 이래 수천년간 독자적인 발전을 해오던 세계 최고의 문명권, 동아시아와 서아시아 세계가 이처럼 깊은 영향을 끼치며 서로 교류했던 일은 일찍이 없었다. 그 옛날 스키타이 인이 개척했던 '초원길',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대상들이 담당했던 '비단길'을 통한 료류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광범한 것이었다.

   

50 희곡과 소설의 개화-원대 서민문화의 발달(13--14세기)


  중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호적 등이 백화문학 운동을 벌이게 되면서, 원대의 문학이 새롭게 주목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귀족 문학이 운율이나 고도의 형식미를 추구하는 문어체였던 것에 반해, 원대를 대표하는 희곡이나 소설은 일상언어에 가까운 구어체, 즉 백화로 씌어진 자유로운 통속문학이다.
  송대에 도시시민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한 서민적 문화가 원대에 이르러 더욱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원대에는 전통직으로 정계진출을 의중에 두고 있던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그 길이 제도적으로 막혀 있었기에 그들의 재능과 분노가 이러한 새로운 문학형식을 통해 표출되엇다. 그들은 서회라는 일종의 작가 클럽을 구성, 창작활동을 펴기도 했다. 또 이러한 구어체 문학은 중국의 고전적 지식이나 교양에 익숙치 못하고 소박한 생활태도를 지녔던 원나라의 지배층의 정서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원대에 더욱 진전된 도시의 발달, 인쇄술의 보급 등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촉진했다. 새로이 성장한 도시의 신지식층 중에서도 새로이 작가가 등장했고, 도시서민에게 확산된 새로운 문화는 향촌에도 널리 확산, 민간의 숨결을 담아내게 되었다. 이제 문학의 주인공은 고급 관료 학자나 과거의 뛰어난 영웅에 제한되지 않고, 이름없는 서민이나 군인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원대의 희곡을 시대를 대표하는 문학형식으로 여겨, 흔히 원곡이라고 표현한다. 한부, 당시, 송사라고 하듯이. 원곡이란 잡극이라고 불리는 연극의 대사다. 잡극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시대처럼 무대장치나 소도구가 없는 무대에서 연기자들의 춤과 노래로 공연되었는데, 비파를 주악기로 하는 관현악도 등장하였다. 말하자면 연극과 오페라의 중간 정도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4막으로 구성되었고, 도시의 극장에서 널리 공연되었다.
  잡극은 이미 송대에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원곡도 송대부터 내려오던 것이 정리된 형태가 많다. 흔히 작가의 출신지나 노래의 격조에 따라 남, 북곡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1000여 편에 달하는 연극의 이름이 전해져내려온다. 명나라 때 장진숙이 명작만을 모아 (원곡선백인집)을 간행했는데, 북곡으로는 관한경의 (두아원), 마치원의 (한궁추), 왕실보의 (서상기)가, 남곡으로는 고칙성의 (비파기)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서상기)는 남녀간의 사랑의 정서를 표현, 봉건윤리에 대한 강한 반항을 나타내고 잇으며, (비파기)는 주인공 왕사가 본처를 버리고 권문세가에 재가, 부귀영화를 꾀하는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한편, 관한경은 많은 소재를 훌륭히 소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희곡 63편을 남겨 중국 연극사상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그는 희곡 (불복로)의 대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아무리 찌거나 삶아도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아무리 때리고 볶는다 해도 끄떡없는 생생한 완두콩이다"
  (두아원)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일찍이 고아가 된 두아에게 슬픔은 끝없이 펼쳐진다. 그녀는 외동아들을 둔 채씨부인의 민며느리로 팔려가고, 19살에는 남편과 사별한다. 비통한 마음을 추스르고 시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살아보려는 그녀에게 이번에는 음흉한 장여아가 그의 아버지와 함께 들이닥쳐서 결혼을 강요한다. 두아가 이를 완강히 거절하자 장여아는 먼저 양고기 수프에 독약을 넣어 채씨부인을 독살하려다가 그의 아버지가 이를 잘못 마셔 즉사한다. 다시 결혼을 거절당한 장여아는 두아에게 살인죄의 누명을 씌워 관에 넘긴아. 이미 뇌물을 두둑히 받은 초주 태수는 갖은 구타와 물고문으로 호위자백만을 강요하더니, 끝까지 저항하던 두아에게 이번에는 그녀의 효심을 이용, 채씨부인을 고문하려 한다. 두아는 일단 물러났다가 다른 재판관의 무죄판결을 기대햇으나, 역시 마찬가지. 두아에게 사형이 선고된다.
  "천지신명이시여, 그대는 어찌하여 세상의 옳고 그름을 그렇게도 분간할 줄 모른단 말쓰밍오. 땅이여, 너는 어째 그리 선악을 분간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러고도 땅이라 할 수 있는가"
  형장으로 끌려가는 두아의 울부짖음이다. 그녀의 마지막 유언처럼 그녀의 목이 잘리는 순간 하늘에서는 갑자기 먹구름이 일며 눈이 펄펄 날리고, 그녀의 피는 한 방울도 땅을 더럽히지 않고 깃대의 흰 천 위에 흩뿌려졌다. 초주에는 3년 동안 한발이 계속된다.
  희곡이 주로 도시를 배경으로 성장했다면, 소설은 구래의 이야기가 직덥적 만담가들ㄷ에 의해 정리, 일반 민중들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갔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삼국지연의), (수호지) 등의 틀이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 (삼국지)는 진수의 역사서 (삼국지)를 낭만적 형태로 소설화한 것이고, (수호지)는 송 휘종 때의 민란세력인 양산박의 송강 등을 소재로 한 모험소설이다. (삼국지연의)는 나관중, (수호지)는 시내암이 지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모두 14세기에 활동한 인물들이니, 대체로 이 작품들이 원말 명초에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들 문학은 중국문화의 위대한 생명력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것으로, 명청대의 지식인들에게는 크게 환영받지 못했으나, 이미 서민대중의 가슴속에 깊이 파고들어 수없이 개작, 보충되면서 중국문학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했다.

   

51 징기즈간의 후예에 맞선 한족-홍건적의 난(1351년)


  북방 유목민인 몽고족의 중국지배 동안 중국의 한족들은 매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민족에 따라 차별적인 통치방법을 썼던 원의 지배 아래서 한족들은 가혹한 처지에 잇었다. 특히 양자강 이남의 옛 남송지역 사람들은 몽고에 끝까지 저항한 데에 대한 보복으로 심한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한족에 대한 가혹한 탄압과 착취는 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원 말기의 저항의 무리 중 대표적인 것이 백련교라는 종교를 기반으로 하여 조직된 홍건적이었다. 백련교는 남북조 시대 동진의 승려인 혜원에 의해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종파였다. 백련교는 미륵불을 숭배했는데, 미륵불이란 세상이 말세에 이르면 세상을 개벽하러 내려온다는 미래불이다. 즉, 지상천국을 세우게 되는 부처였다. 미륵불 숭배는 원나라의 가혹한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한족의 염원의 상징이었다. 홍건적은 백성들의 이러한 염원을 바탕으로 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세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백련교를 중심으로 한 홍건적 조직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곳은 황하의 남쪽인 하남지방이었고, 이 지역은 특히 원나라의 착취로 인한 고통에다 황하의 범람 등과 같은 자연재해가 겹쳐 백성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했다. 굶주림과 고통에서 허덕이고 있는 백성들에게 새 세상을 열어준다는 미륵불은 그들에게 한 가닥 희망의 등불이었다.
  홍건적의 중심인물은 하남의 영주지장 사람 유복통과 한산동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을 끌어모으는 데는 상징적인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상 대대로 백련교의 핵심인물이었고 교주라고 할 정도의 위치에 잇던 한산동을 지도자로 추대했다. 백성들은 미륵불의 세상이 오리라는 것을 외치는 이들에게 모여들었다. 세력이 점차 확대되자 홍건적 지도자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한산동이 원래는 한씨가 아니라 원에 의해 멸망한 중국왕조인 송 휘종의 8대손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 퍼뜨리기까지 했다.
  그들은 마침내 1351년 한족의 옛 왕조 송을 부흥한다는 깃발을 내세우며 봉기했다. 송황조가 화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뜻을 계승하는 의미로 불을 상징하는 붉은색 머리띠를 둘렀다. 이 때문에 홍건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와 대결하려고 한 계획이 사전에 흘러나가 홍건적 조직의 우두머리인 한산동은 잡혀서 처형되고 이 조직을 주도했던 유복통은 간신히 피해 목숨을 건져 영주로 갔다. 한산동의 부인과 아들 한림아도 간신히 몸을 피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홍건적의 주모자들이 체포당해 처형되거나 도망함으로써 홍건적군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은 다시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흩어진 세력들을 모아 다시 조직을 정비한 홍건적은 한림아의 지도아래 하남지방의 여러 지역들을 차례로 장악하게 되었으며 그때마다 홍건적에 합세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늘어나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물론 홍건적 외에도 원의 중국 지배에 저항하는 세력은 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각각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어 활동하고 있었다. 따라서 홍건적군이 원에 대항하는 각 지방의 반란군을 모두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국 도처에서 크고 작은 민란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시기이게 때문에 처음에는 원나라에서는 홍건적을 일상적으로 있었던 하찮은 농민반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건적군의 규모가 점차 늘어나 10여만 명에 이르게 되자 이제는 더 이상 그냥 놔둘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은 군대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홍건적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원나라의 거센 공격에 대항하기 위해 홍건적 무리들은 조직을 정비하고 내부의 결속을 더욱 다질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1355년 홍건적은 호주에서 한산동의 아들인 한림아를 황제로 세우고 나라 이름을 송이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몽고적을 몰아내고 한족에 의한 국가를 세우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었다.
  원의 토벌군은 홍건적의 중심부인 박주를 포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원의 공격을 받은 홍건적은 박주를 버리고 안풍으로 피한 후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누어 원을 공격했다. 그러나 군대를 분산시켜 공격을 하게 했던 것은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잘못된 작전이었다. 군대의 힘을 집중치켜 상대의 주력부대를 공격했어야 했던 것이다.
  홍건적과 원나라간의 밀고 밀리는 접전은 여러 해 계속되었으며, 한때 홍건적의 일파가 원나라의 수도인 북경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원나라의 사령관 차칸테무르의 공격을 받은 홍건적은 관중의 농지방에서 포위를 당해 100일을 갇혀 있다가 황제인 한림아 등 몇몇 주동자들만 간신힌 탈출하여 안풍으로 밀려났다.
  원나라의 공격은 계속되어 마침내 홍건적의 핵심 거점인 안풍을 포위했다. 홍건적군은 호주에서 원나라에 반대하여 세력을 펴고 있었던 주원장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주원장은 처음에는 백련교 조직과 관련이 있었으나 홍건적에 포함된 세력은 아니었다. 구원 요청을 받은 주원장은 군대가 안풍에 도착하기도 전에 안풍은 함락되었다. 그리고 홍건적군의 핵심인물이었던 유복통은 여기에서 원나라 군대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민족인 몽고족의 지배를 벗어나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홍건적은 안풍의 함락과 주동자들의 죽음으로 끝을 맺게 된다. 홍건적의 마지막 상징이었던 송 황제 한림아는 안풍에서 탈출하여 주원장의 보호를 받게 되었는데, 그의 생애 마지막 부분은 묻혀지고 말았다.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엇던 주원장이 한림아를 죽였다고 하기도 한다.
  이렇게 홍건적의 봉기는 실패로 막을 내렸으나 원나라의 중국지배는 더 많은 한족들의 저항을 받게 되었고, 결국 몽고족들은 150여년만에 다시 그들의 고향인 몽고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52 한족, 다시 중국 대륙의 주인으로-주원장의 명 건국(1368년)


  주원장은 안휘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배움도 없었고 집안도 미천했으며 17세 때 악질과 기근으로 부모형제를 잃고 황각사라는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절이라고 해서 어려운 생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고 절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배고픔을 면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탁발을 하여 주린 배를 채웠다. 그가 후에 명을 건국하여 황제가 되었을 때 어떤 기록자는 그에 대해 "떠돌이 거지로 출발하여 나라를 세웠으나 눈으로는 글을 읽지 못했다"라고 쓸 정도였다. 다소 과장이기는 하겠지만 주원장의 처지와 집안형편을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시기는 원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던 때다. 원나라의 통치 아래서 중국인들의 생활은 몹시 어려웠으며 농민들이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홍건적의 난이다. 그는 황각사에 있을 때 홍건적의 반란군을 만나게 되어 홍건적에 가담하게 된다. 이때가 1352년으로 그의 나이 25세 되던 해다.
  그가 황각사를 떠나 홍건적의 한 무리였던 곽자흥 조직에 들어갔을 때 그는 외부로부터 침입한 첩자로 오인되어 체포되었으나 곽자흥은 그의 생김새가 기이해서 그를 풀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확자흥군 밑에서 많은 공을 세워 곽의 신임을 크게 받았으며 곽의 양녀를 아내로 삼았다. 주원장의 아내가 된 이여자는 원래 마씨 성을 가진 사람이 유괴하여 곽자흥에게 팔아넘긴 까닭으로 마씨 성을 갖게 되었으며,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여 황제가 되자 그녀는 황후가 된다.
  주원장이 섬기고 있던 곽자흥 세력은 원나라 토벌대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당했으며 주원장은 줄어든 병력을 채우기 위해 고향으로 가서 군대를 모집했다. 당시에는 농민들이 굶주렸으며 원에 대한 반감이 있었기 때문에 먹을 것만 해결해줄 수 있다면 군대를 모으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가 사람들을 모아 돌아왓을 때 곽자흥군 내부에 분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이에 주원장은 아예 곽자흥을 떠나 독자적인 세력을 거느리기로 결심했다.
  곽자흥을 벗아난 주원장은 자기의 부대를 이끌고 남하하면서 계속 세력을 확대해나갔으며, 그가 남경을 장악했을 때는 2만여 명의 군대를 거느리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제 주원장은 자기가 섬기던 곽자흥의 세력을 능가하게 된 것이다. 그 세력을 몰아 주원장은 주변 세력을 하나씩 하나씩 장악해나갔으며, 1364년 주원장은 마침내 오나라의 왕을 자칭하게 되었다.
  그는 양자강을 건너 남경을 장악, 세력의 근거지로 삼았다. 강을 건너 남경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직까지 양자강 이북은 원나라의 지배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강남지방이 농업의 중심으로서 식량문제 등을 해결하는 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원장이 강남에 근거지를 확보하고 잇을 무렵, 주변에는 장사성, 진우량 등이 이끄는 다른 여러 세력이 활동하고 있었다. 각 세력들은 원나라에 대항하는 싸움과 아울러 그들 사이에도 주도권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을 치러야 했다.
  우너나라는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금방 무너질 정도는 아니엇다. 원은 제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반란세력들에게 총공격을 가했다. 원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어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몰락 진적에 이르게 된 홍건적군은 강남의 주원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주원장이 군대를 이끌고 홍건적군에 이르기도 전에 홍건적은 원나라에 의해 타격을 입고 무너지고 말았다.
  홍건적이 원의 공격으로 무너진 뒤 주원장은 남경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던 진우량, 장사성 등과 힘겨운 싸움을 계속했으며, 무수한 전투 끝에 마침내 그들 세력을 격파하고 양자강 유역을 완전히 자기의 세력 밑에 둘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반란세력 중 소주에 자리잡고 있던 장사성 세력이 강대했는데 장사성이 차지하고 있던 지역인 호주는 주원장의 고향이기도 하다. 1365년 마침내 장사성 세력을 격파하고 고향에 들렀을 때 그는 고향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고 한다.
  "고향을 떠난 이후 10여년, 어려운 싸움들을 했고 마침내 부모의 무덤과 고향의 어른들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오래도록 함께 머물러 즐기지 못하는 것이 섭섭합니다. 어르신께서는 자제들에게 효도와 농사에 전념케 하시고 멀리 떠나 상업에 종사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아직도 세상에는 도적들이 날뛰고 있으니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그가 장악한 소주, 항주, 복건, 강서 등은 중국경제의 중심을 이루는 지역으로 예로부터 "소주, 호주에 풍년이 들면 천하가 풍요롭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강남의 여러 반란세력을 격파한 후 마침내 주원장은 1368년 남경에서 나라를 세워 '명'으로 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연호를 '홍무'라고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북경의 원나라를 정벌하는 일만 남게 된 것이다. 명나라는 원을 정벌하기 위하여 약25만여 명의 군대를 동원했다. 원나라는 명나라가 공격해오는데도 대항할 계책이 없이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명나라 군대는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원나라의 수도인 북경에 다가갔고 마침내 원나라 황제는 성을 버리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원 황제인 순제는 밤에 몰래 북경을 빠져나와 응창부에 머물게 되었으나 그는 그곳에서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치게 된다.
  남경을 근거로 명나라를 건국하고 북벌군을 조직하여 북벌에 나선 지 8개월 만에 주원장은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몰아낸 것이다. 주원장은 북경에 입성한 수, 싸우지 않고 북경을 떠나간 원의 마지막 황제에 대해서 "하늘의 명에 따라 싸워서 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높이 받들어 '순제'라는 칭호를 주었다. 승자가 가질 수 있는 여유와 아량이었다.
  그후 원의 황태자가 북쪽으로 도망쳐 막북이라는 지역에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북원이라고 했다. 그러나 몽고족의 중국지배는 1368년에 끝을 맺고, 다시 중국대륙은 100여년 만에 한족에 의해 다스려지게 되었다. 그 땅의 주인이 되돌아온 셈이었다.

   

53 (영락대전)이 완성되다


  명을 건국한 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두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그 한가지 방법은 백성들의 경제와 행정제도의 정비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었으며, 다른 또 하나는 그를 도와 나라를 세우고 원나라를 몰아내는 데 공이 많은 측근 신하들을 죽이는 방법이었다. 특히 나라를 다스릴 인재를 구하기 위해 전국에 특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또한 문신을 우대하고 중용하는 정책을 폈는데, 그에 대해 무신들이 불만을 갖게 되자 그는 "세상이 혼란하면 무가 나서고, 세상이 평화로우면 문이 다스려야 한다"고 대꾸했다고 한다. 그가 황제에 머무는 동안 여러차례의 숙청이 있었고, 그때마다 그를 도와 명을 건국하고 원을 밀어내는데 공이 큰 역적의 노장들을 포함하여 수만 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는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는 그의 아들에게 확고한 지위를 마련해주기 위한 계책이었다. 더 이상 무인들이 황제의 주변에 많이 모여 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기로 되어 있던 그의 큰아들이 갑자기 죽게 되자 그는 자신의 황제 자리를 계승할 사람으로 그의 손자를 지칭했다. 그러나 손자는 아직 나라를 이끌어나갈 만큼 성장하지 않아 태조는 주씨 황실의 유지에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불안감이 크면 클수록 숙청은 더욱 가혹하게 행해졌다.
  홍무제의 숙청이 하도 잔인하여 제위를 계승하게 되어 있는 그의 손자가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간언을 했다. 그러나 홍무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다음날 손자를 조용히 불러 가시 많은 나무를 맨손으로 잡아보라고 했다. 손자가 가시 돋힌 나무를 집어드는 것을 주저하자 태조는 손자를 향해 말했다.
  "가시가 있으면 손을 찌른다. 내가 살아 있을 때 가시들을 모두 없애 너에게 전해주려는 것이다"
  이것이 숙청을 위해 무수한 인명을 살상했던 태조 주원장의 내심 이었다.
  홍무제는 1398년 7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황제의 자리는 그의 손자에게 계승되었다. 바로 명의 제2대 황제인 건문제다. 그러나 건문제 통치시기 황제의 자리를 위협한 것은 태조 주원장이 염려했던 개국공신들이 아니라 황실 내부에 있었다. 태조에게는 26명이나 되는 많은 아들이 있었다. 그 혈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중 가장 야심만만한 사람이 태조 홍무제의 넷째 아들이며 나중에 영락제가 되는 주체였다. 태조의 큰아들인 주표가 일찍 죽은 후 제위가 주표의 아들에게 돌아갔으니, 주체는 2대 황제 건문제의 삼촌이 되는 셈이다. 주체는 원래가 야심만만한 사람으로 아버지를 도와 전쟁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다.
  영락제를 다른 왕과 비교하자면 당나라 건국자 이연의 아들로서 나중에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당태종 이세민, 조선 태조 이성계의 넷째 아들이었다가 왕자의 난으로 왕의 자리를 빼앗은 태종 이방원과 비슷한 성격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인물로 보인다. 태조 주원장도 넷째 아들인 주체의 능력을 알고 있었으며, 큰아들이 죽자 주체에게 황제의 자리를 잇게 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현하지 못했다. 태조 홍무제는 못내 아쉬워 통곡했다고 한다.
  22세에 황제의 자리를 계승한 건문제는 지방의 번황으로 임명된 황족들을 눌러 중앙의 권력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번'이라는 것은 황제가 관장하지 않고 황족이나 혹은 그 지역의 실력자들에게 통치를 위임한 일종의 지방 자치지역이다. 번의 존재한다는 것은 아직 중앙의 황제의 세력이 절대적인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분열된 세력을 통합한 후 중앙권력을 강화하려 할 때 번의 왕은 보통 자기들의 세력 근거지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 저항을 하게 된다. 한나라 무제 때의 '오초 7국의 난'이나 청나라 때의 '3번의 난'이 그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건문제가 첫 번째로 제거하려 했던 것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 그러니까 건문제의 막내 삼촌으로 주왕에 본해진 주수였다. 주왕 주수는 체포되어 운남지방에 유배되었다. 이어서 제왕 주부, 대왕 주계가 번왕의 직위에서 쫓겨나 평민이 되었고 상왕 주백은 자살했다. 그러나 야심만만하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넷째 황자 연왕 주체는 건문제가 결국 자기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건문제는 주체를 가장 두려운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쉽사리 제거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건문제가 연왕 주체의 체포를 명했을 때 주체는 순순히 앉아서 당하지 않았다. 그는 북경에서 먼저 군사를 일으켜 남경으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제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를 '정난의 변'이라고 한다. 물론 명분상으로는 황제를 보좌하고 있는 간악한 신하들을 처단하여 황제의 권위를 다시 세운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군대와 연왕 주체의 군대는 맞붙어 싸우게 되었고 그 싸움은 4년 여를 끌었다. 군대의 숫자나 여러 가지 면에서 황제의 군대가 유리했으나 이를 효과적으로 통솔하고 지휘할 수 있는 인물이 많지 않았다. 이미 태조 홍무제가 황실의 안전을 위해 개국공신들을 거의 숙청, 처형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우세한 군사력을 가지고 초반에 승리하던 황제의 군대는 유능한 지휘관의 부족 등으로 사기가 떨어지면서 연왕의 군대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무장들을 제거하여 황실의 안전을 도모하려 했던 홍무제는 결국 자기 꼬임에 넘어간 꼴이 된 것이다.
  마침내 주체의 군대는 남경의 성곽에 도달했다. 전세가 연왕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수도 남경의 수비대 내부의 불안은 커졌고, 자기의 살 길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연왕 주체와 내통하여 빠져나감에 따라 남경 주비는 더욱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경의 성문이 연왕과 내통한 내부인에 의해 열리고 군인들이 미구 성안으로 쏟아져들어오고 있을 때 황제 곁에 남아서 황제를 끝까지 지키려는 신하는 거의 없었다. 연왕의 군대가 남경을 함락하여 군대들이 밀려들자 건문제는 궁성에 불을 질렀다. 주체는 건문제를 찾기 위해 궁성의 샅샅이 뒤졌으나 불탄 황후의 시체밖에 찾을 수 없었다. 건문제는 중의 복장으로 변하고 성을 탈출, 잠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남경을 함락하여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홍무제의 넷째 아들 연왕 주체가 바로 성조 영락제이다. 그는 여러 차례 몽고지역에 원정하여 그들의 침략의 근거지를 도려내려 했으며, 안남을 거쳐 수마트라 지역까지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안으로는 문물제도의 정비에 힘썼으며, 대대적인 편찬사업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사서대전), (오경대전), (영략대전) 등이 그의 통치시기에 정리되었다. 특히 (영락대전)은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2천여 명의 학자들이 약 3년간의 작업 끝에 완성시킨 것이다. 이 책은 천문, 지리, 역사, 사상, 정치제도뿐만 아니라 의학이나 연극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중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총정리라고 할 수 있다. 그 권책 수만 하더라도 22937권 10109책 4뎍자 가량에 이른다. 그러나 이 책은 1900년 서양세력이 청나라에 침입했을 때 상당 부분 불타거나 외국에 유출되어버리고 중국에 남아 있는 것은 겨우 100여 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54 화교들, 동남아시아로 진출


  성조 영락제는 황실 내부의 혈투를 거쳐 황제 자리를 빼앗은 야심 찬 인물이엇고, 그 야심은 황제가 되어서는 대외적인 영토확장 쪽으로 발휘도기도 했다. 그것을 잘 말해주는 것 중 하나가 정화의 남해 원정이었다.
  정화는 홍무 4년 운남에서 태어낫는데, 원래 성은 마씨였고 이슬람 교도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났던 1371년 당시는 명나라가 건국되기는 했지만 운남지역은 아직 원나라의 잔존세력이 지배하고 있었다. 정화의 아버지는 그 지역의 함양왕으로서 원나라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명의 정복군이 공격해왔을 때 정화의 아버지는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했고, 그의 가족들은 반항세력에게 내리는 징벌로 생식기를 거세당하고 연왕 주체의 전리품이 되었다. 연왕 주체는 나중에 조카 건문제를 밀어내고 황제가 된 영락제다. 주체는 정화가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를 가까이 두어 보좌했다. 주체가 조카인 명의 2대 황제 건문제와 피할 수 없는 한 판 승부를 벌인 이른바 '정난의 변' 때 30살 남짓의 정화는 연왕 주체의 기대에 맞게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러자 주체는 그에게 정화라는 이름을 내렸다. 주체가 황제가 되었을 때 정화는 환관의 최고 직위인 태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황제가 된 영락제는 자기의 야심을 해외로 펼칠 계획을 세웠고 바다를 통한 대원정을 총지휘할 인물로 정화를 선택했다. 항해는 7차례에 걸쳐 진행되는데, 1차 항해는 영락 3년 1405년에 있었다. 항해 선단은 배 60여 척에, 배에 탑승한 선원의 숫자가 3만 명에 육박하는 대규모였다. 큰 배는 약 8천 톤 규모 정도였다고 한다. 정화의 1차원정 약 90년 뒤에 서양의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도는 새로운 항로를 찾아낼 때 타고 갔던 배의 크기가 고작 120통 정도인 것과 비교해보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정화의 남해 원정은 남해, 즉 종남아시아 여러 나라들로 하여금 명에 조공을 바치게 하는 조공관계 확립을 위한 것이었다(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남해 원정은 남경 함락 때 생사를 확인하지 못 했던 건문제의 행방을 찾으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동남아시아에 대한 이러한 정책은 영락제가 태조 홍무제의 쇄국정책에서 벗아나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추구하고 잇다는 것을 보여준다. 원래 중국인들은 중국의 넓은 땅에 많은 문물이 잇어 부족함이 없는 땅이라고 스스로 자부했으나 외국과의 거래를 완전히 단절해도 좋을만큼 필요한 모든 산물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중국에 없는 물품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도자기의 무늬에 새겨넣는 코발트나 향료 및 보석 같은 것이었다.
  정화는 들느는 지역마다 부력시위를 하며 중국과의 형식적인 복종관계를 권유했고 거절당할 때에는 무력을 행사했다. 대부분의 국가는 명나라 대함대의 위력에 눌려 굴복했다. 이때 정화가 가지고 가서 팔았던 물건들은 주로 도자기, 비단 등이었으며, 사들인 외국 물품은 향료, 후추, 진주 그리고 서역지방의 말 등 중국에 희귀한 특산물들이었다.
  항해 때마다 대개는 무력시위에 그치고 직접적인 싸움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3차원정 때는 실론(쓰리랑카)과의 싸움이 있었다. 스리랑카의 왕의 명 황제의 신하국이 되는 책봉을 거부하자 정화는 기습공격으로 왕궁을 함락시키고 왕을 인질로 잡아 굴복시켰다. 그러나 방문하는 지역마다 대체로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그 지방 토착세력의 풍속이나 습관을 인정하여 우호관계를 뱆엇으며, 국왕이나 추장, 왕자 등 토착 지배층들을 중국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4차원정 때는 아라비아 반도까지 갔으며, 5차(1417년)는 동아프리카까지 갔다. 6차원정을 끝내고 귀국하던 1423년의 귀항 때는 1200여 명이 넘는 외국사절들과 동승하고 있을 정도였다. 정화의 원정이 가장 멀리까지 이루어진 것은 마지막 7차원정 때였다. 이때는 1431년으로 영락제가 죽고 손자인 선덕제가 즉위한 뒤였으며 정화가 61세 되던 해다. 마지막 원정은 아프라카 동해안까지 이르렀다.
  명나라 때 행해진 정화의 남해 원정은 그후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에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동남아시아의 경제와 정치를 장악하고 잇는 사람들은 바로 중국의 화교들이다.

   

55 명목적 조공과 힘의 논리-월남과 중국의 월남 정복(1407년)


  인도차이나 반도의 월남과 중국의 관계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던 진시황 시대 중국은 양자강을 넘어 지금의 광동이나 광서지방 및 남쪽으로 월남지역을 징벌하게 됨으로써 월남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진이 멸망하고 한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는 때를 전후로 해서 월남지역에 남월이라는 족립적인 왕국이 수립된다. 남월을 세운 조타는 중국출신으로 토착 월남인의 지지를 바탕으로 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한이 중국을 통일했을 때 남월국은 자청하여 중국의 조공국이 되어 선진적인 문화를 수입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중국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여 끊임없이 중국의 경계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한무제는 고조선을 멸망시키기 몇년 전인 기원전 112년 월남지역을 정복하여 중국의 군현에 포함시켰고, 이후 월남은 10세기까지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당나라 때 월남은 안남도호부에 속했으며, 당나라가 멸망하고 기원후 10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 중국이 5대 10국의 분열기를 맞을 때 다시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월남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월남인에 의한 국가가 수립된 것이 바로 이때다. 중국이 분열하여 대립하고 있는 동안 월남의 토착세력인 고구엔이라는 사람이 경쟁자를 물리치고 오왕조를 수립한 것이다. 이때가 939년이니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거의 비슷한 시기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건국되는 과도기로, 중국세력이 월남지역에 신경을 크게 쓸 수 없었던 시기를 틈타 중국세력으로부터 벗어나 당당하게 나라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 송나라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송나라는 월남에서 975년 내분으로 왕이 살해되는 것을 빌미로 하여 월남을 침공했다. 월남은 980년 육지와 바다 양면에서 공격해들어오는 송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월남을 중국 영토화하려는 중국세력의 의도를 일단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송나라의 침략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대립관계를 지속시킨다는 것은 힘에 벅찬 일이었고 결국 월남은 송나라와 일정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침략군을 몰아낸 월남은 그 이듬해 사절단을 파견하여 잘못을 빌고 조공을 청해 다시 송나라의 조공국이 되었다.
  그러나 송나라의 왕안석이 중국정치를 주도하고 있었을 때 그는 다시 월남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는데, 그 낌새를 월남에서 알아채고 역습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054년 국호룰 대월로 한 월남왕조는 송의 남쪽 국경지역을 공격, 상당한 지역을 빼앗고 10만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롤 잡아갔다. 일격을 당한 송은 그에 대한 앙갚음으로 반격을 가했으나 월남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송군을 격퇴한 후 다시 월남은 조공관계를 회복했다. 월남은 중국과는 형식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했지만 인도차이나 반도 내에서는 강대국으로서 주변 여러 나라를 국복시키고 조공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대월의 이조를 계승한 진왕조(1225--1400) 때 중국에는 몽고 제국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월남 역시 몽고제국의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진왕조는 1257년, 1284년, 1287년 세 차례의 침략에서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도 몽고군을 물리쳤고 1288년에 원과의 조공관게를 맺었다. 이렇게 월남은 중국의 침략에 단호하게 대응하여 그들을 격퇴한 다음 불리하지 않은 조건에서 조공관계를 열어 그들의 독립성을 확보하면서 평화적인 관계를 맺는 방식을 취했다.
  원의 세조 쿠빌라이 칸 때 원나라는 월남의 지배 아래 있던 참파국을 치겠다고 길을 터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월남이 이를 거절하자 다시 원은 두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했다. 월남을 공격한 원은 두 번 모두 수도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왕을 사로잡지도 못하고 끝까지 저항하는 월남인들을 제압하지도 못한 채 철수해야 했다.
  중국에 원을 이어 명나라가 들어서고, 영락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월남에서는 정변이 일어나 진씨 왕조가 무너지고 호씨 왕조가 들어섰다. 명은 이를 기회로 왕위를 빼앗은 자를 징벌한다는 명목으로 1407년 월남을 침략, 다시 월남에 대한 직접 지배의 길을 열었다. 영락제의 통치시기에 몇 차례의 저항이 있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영락제가 죽은 이후에야 월남 세력은 레로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명나라에 저항하여 침략자를 밀어내고 1428년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레로이에 의해 수립된 후여조의 시기는 월남 문화의 융성기였다.
  청조에 들어오게 되면 후여왕조는 완씨와 정씨 세력의 대립으로 분열되어 정씨는 북부, 완씨는 남부를 세력의 근거로 삼았다. 완씨 세력이 명목만으로 왕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후여왕조를 누르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할 움직임을 보이자 청나라는 이를 빌미로 월남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월남인들은 청군을 크게 격파하여 청에 대해 유리한 위치를 유지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개척하려는 서양 세력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월남은 격국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이후 20세기 중반까지의 월남역사는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벗어나려는 저항으로 점철되었다.

   

56 황제 위에 올라탄 환관-토목의 변(1449년)


  환관이란 우리 나라에서는 내시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로 궁중의 일을 보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궁중에서 숙식 및 일상생활을 하기 때문에 생식기를 제거, 궁궐에서 성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했다. 중국에서 환관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특이하다. 특히 한족들의 지배 시기 환관들이 황제 가까이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주물러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역사적으로 환관들이 정치에 관계하여 정치 질서를 문란시킨 것은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라고 한다. 진나라에 이르러서는 조고라는 환관이 있어 진시황이 죽은 후 유언을 위조하여 큰아들이 물려받아야 할 왕의 자리를 작은아들이 계승하게 했던 적도 있었다.
  한나라에 들어오면 환관들이 아예 무리를 지어 하나의 당파로서 위세를 부리게 될 정도에 이른다. 후한대에 이르면 환관이 작당하여 황제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충성스럽고 강직한 기질을 지닌 선비들을 모함하여 몰살시키기에 이를 정도였다.
  아주 비천한 신분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환관들이 이렇게 엄청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 그들은 황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다. 심지어는 황제가 이들에게 중요한 정책의 결재, 혹은 명력을 대신 작성하게 하기도 한다. 따라서 환관에게 둘러싸인 황제는 그들의 손에 놀아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명나라 때의 환관이 정치적인 결정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매우 특이한 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며나라의 최고관직인 내각 대학사가 정책 등에 대한 건의안을 올리면 황제는 이건의안에 대한 생각이나 승낙 혹은 반대의 뜻을 써서 내려주게 되었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그 일을 하는 것은 황제가 아니라 환관이었다. 글을 환관이 대필하는 것이다. 따라서 황제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가장 가까이서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환관이었다. 황제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게 될 수록 만일 환관이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다거나, 환관들이 황제를 둘러싸 인의 장막을 쳐 신하들의 접근을 막을 수만 있다면 황제의 절대적인 권력을 환관이 대신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니는 것이다.
  이미 한나라와 당나라가 환관의 횡포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게 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명 태조는 이러한 과거 역사 경험을 거울삼아 환관들이 날뛰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그는 궁문에 "내신(환관)은 정사에 관여할 수 없다. 정치에 개입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라고 새겼으며 환관의 숫자를 100명 이하로 했다. 또한 봉급도 아주 낮게 주었다. 이러한 환관에 대한 정책은 건문제 때도 계속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자가 '정난의 변' 때 영락제와 재통하여 영락제의 황제 즉위에 공을 세우기도 했다. 영락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환관에 대한 대우를 약간 개선시켰다. 남경에서 떠나 북경에 도읍을 옮기면서 궁전을 넓히고 환관의 숫자를 수천 명으로 늘인 데 이어 위계질서에 따른 환관의 직책을 만들었다.
  그중 최고위직이 사례감이었고, 공식문서에 황제 대신 대필하는 병필태감도 사례감에서 나왔다. 나중에는 궁중뿐만 아니라 지방장관 아래에 감찰관으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정보를 수집ㅎ사는 밀정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영락제는 관료들보다는 환관을 더 신뢰하는 밀실정치로 그의 통치체제를 지탱했을 정도였다.
  환관의 황포가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5대 황제인 영종 때부터다. 영종은 9세의 어린 나이로 황제에 올랐고 앞선 황제의 뜻에 따라 그의 할머니 태황태후 장시가 정치를 맡게 되었다. 장씨가 죽은 이후 영종은 황태자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환관 왕진이라는 사람을 기용했다. 왕진은 환관의 최고직위인 사례감으로서 영종의 신임을 등에 엎고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영종은 왕진을 신임했고 그의 의견은 거의 반대하는 일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왕진의 황포는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졌다. 궁전의 동쪽에 어마어마한 대저택을 지어 위세를 떨치는가 하면 임의로 외국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명나라는 바야흐로 왕진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된 것이다. 자기에 대해 피판적인 관리는 팔다리를 잘라 죽이기도 했으며, 그에게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관리나 학자는 어김 없이 쫓겨나거나 좌천되었다.
  명나라가 이런 상황에 있을 때 항상 중국에 위협이 되는 몽고족의 세력파도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몽고의 일족인 오이라트가 세럭을 키워 명나라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촉발시킬 빌미가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발단은 몽고가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치는 말이었다. 오이라트는 명나라에 말을 조공으로 바치고 있었는데 말에 대한 값을 지불하는 조공의 형태였다. 즉, 명은 오이라트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조공이라는 제도를 빌어 손해를 보면서 말을 사주었던 것이다.
  1448년 오이라트는 조공사절단으로 2500명을 보낸다고 명에 통보했다. 이는 신제 파견하는 숫자보다 많은 숫자로서, 명에서도 이를 알면서도 묵인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왕진은 실제로 온 숫자만큼만 상금을 내리고 그들이 가져와서 부른 말값도 1/5만 계산해주었다. 이것은 오이라트를 분노케 하는 일이었다. 마침내 오이라트는 대세력을 몰아 명을 침공했다. 왕진은 천자에게 친히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설 것을 요청했으며, 그 의견을 받아 영종은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그러나 오이라트는 세력이 강성하여 겨뤄볼 생각을 못하고 철수하다 토목보에서 오이라트군의 포위를 받아 수만 명의 군사가 죽고 황제가 사로잡히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1449년). 이 싸움에서 왕진은 황제 호위장교에게 맞아죽었다. 이것을 토복보의 치욕이라고 하여 '토목의 변'이라 부른다.
  토목의 변 이후 북경의 명 황실에서는 황급하게 영종의 아우를 황제로 올리고 방어책을 세웠다. 물론 이 토목의 변 이후 왕진은 죄상을 물어 그 족당을 모조리 죽이고 집 재산을 몰수했다. 이때 황진의 집에는 금과 은의 창고 60여 채 정도가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모든 보물은 그의 권력을 배경으로 관리들이나 백성들로부터 착취한 것이다.
  왕진 이후로도 환관의 횡포는 그치지 않았다. 그중 대표적인 예만 들어도, 왕진이 죽은 10여년 뒤에 화노간인 조길상 등이 실권을 장악하여 세도를 부리다가 모반을 시도하여 실패 후 살해되는 일이 있었다. 16세기 초에는 환관 유근이 권력을 장악하여 반대파를 간악한 무리를 몰아 추방하고 정치를 마음대로 하다가 살해되었다.
  환관들로 인해 국가가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경우는 대개 한족의 국가들에서 볼 수 있고 유목민족으로 중국을 정복했던 정복민졸들에게는 환관의 횡포가 심각한 경우는 별로 없었다.

   

57 지행합일을 최고선으로-양명학의 성립(15세기 말--16세기 초)


  남송대 이후 원나라를 거쳐 명대에 이르는 동안 중국사상의 핵심은 주자가 완성시킨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거의 완벽한 사상적 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명대 초기만 하더라도 주자학(성리학)의 큰 흐름 밖에서 새로운 사상의 흐름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아울러 후세 사람들은 주자의 생각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게 되어 사상의 새로운 변화를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한치의 빈틈이 없을 것 같은 성리학에 반대하여 새로운 사상을 들고나온 사람이 있으니, 그가 곧 양명학을 성립시킨 왕양명이다. 1472년 절강성에서 태어난 왕양명은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가게 된 아버지를 따라 10세 때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5세 때 세도를 부리던 환관 유근에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했으며, 유배나 다름없는 변방의 관직에 머물기도 했다. 머무를 집초차 없어 스스로 집을 지어야 했고, 수행하는 시중이 병들어 도리어 그를 간호해야 하는 처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어려운 조건에서 과거 옛 성현들의 도(진리)가 무엇이었을까를 깊이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된다. 그는 마친매 도라는 것은 여러 사물을 통해 깨닫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서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음을 깨우치게 된다.
  자기를 내쫓았던 환관 유근이 살해되면서 왕양명은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정상적인 관료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가 살전 시기(1472--1528)는 문화적으로 명대의 융성기이면서도 반란이나 민란이 자주 일어나던 시기로서, 그는 사상으로뿐만 아니라 군사 전략가, 정치가로서도 능력을 발휘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는 광서성의 반란군을 토벌하고 돌아노는 길에 폐결핵이 재발하여 60세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왕양명은 주자학(성리학)을 비판하고 그의 독창적인 학문인 양명학을 만들었는데, 양명학과 주자학은 어떻게 다를까? 우선 주자의 성즉리설에 의하면 이라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이인동시에 외적인 여러 사물의 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양명의 사상은 이것과 달리 이른바 심즉리를 주장하여 마음을 바로잡아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덕성을 존중하고 학문에 의존한다고 했는데, 양며의 생각에는 덕성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학문에 의존할 수 있겠는게 하는 것이다. 또한 성리학에서는 성인의 경지는 배워서 도달할 수 있다고 한 데 반해, 양명은 성인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컨대 양명은 마음을 강조한 것이다. 예를 들어 효라고 하는 것은 효에 관한 덕목을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버이를 공경한 자연스러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즉, 효심과 효행은 하나라는 것이다. 이런 경향으로 해서 양명학은 '지행합일' 즉,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라는 주장을 펴게 된다.
  성리학에 대항한 양명학이 나오게 되는 것은 송대 사회와 명대 사회가 다른 데에도 이유가 있다. 즉, 송나라 시기는 사대부 중심의 신불질서가 확고한 농업사회였다. 따라서 성리학에 의하면 사람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의 직분이 있다는 것이다. 지주와 소작인(전호) 관계는 하늘의 이치에 따라 결정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명대는 상품생산이 활발해지고 화폐경제가 성립했으며 소농민들의 농업경영이 더욱 활발했던 시기였다. 송대 이래의 신불질서가 무너져가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사상도 그러한 사회의 변화에 맞추어 새로이 정리될 필요가 있었다. 양명학의 탄생은 그런 사회 변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하여 양명은 "마음으로 구해 옳지 않을 때에는 공자의 말이라도 옳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백성들에 대한 생각에도 두사상의 차이가 있다. 사서 중 (대학)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신민,..."이 나온다. 여기서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구절은 원래 "백성을 친하게 한다"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주희는 이 '친'자를 '신'자로 보며, 왕양명은 원래대로 본다. 이것은 신분질서를 옹호하는 입장인 성리학은 백성을 새롭게 한다고 하여 백성을 교화의 대상, 즉 지배층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양명학에서는 백성을 친하게 한다고 해석하여 단순히 지배층의 교화의 대상이 아니고 함께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다.
  왕양명을 이어서 양명학을 계승 발전시킨 사람이 이탁오(1527--1602)였다. 복건성 사람으로 그의 집안이 이슬람 교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족보가 최근에 발견되기도 했다. 이탁오 스스로는 나중에 머리를 깎고 마치 승려처럼 행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세상 사람들의 도덕과 일반적인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괴상한 생동으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결국 70이 넘는 나이에 체포되어 옥에 갇쳐 있다가 옥중에서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쳤다.
  이탁오는 왕양명이 마음을 중시한 것을 더욱 강조하여 기존의 인습이나 도덕, 지식 등에 의해 오염되지 않는 지극히 순수한 마을을 '동심'이라 하고, 이 동심 앞에서는 공자, 맹자도 유교경전도 절대적 권위를 가질 수는 없다고 했다. 그의 유교에 대한 이러한 거친 비판이 그의 적들을 많이 만들어냈고 결국 체포되기에 이른 것이다. 왕양명과 이탁오 등의 사상적 활동으로 인해 성리학은 핵심적인 사상의 위치로부터 서서히 밀려나게 되었고 명나라에서는 양명학이 융성하게 되었다.

 

58 변방, 바다에서 밀려드는 오랑캐-북로남왜의 화(16세기 중엽--16세기 말)


  명의 멸망을 재촉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외적의 침입이었다. 북족에서는 몽고족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명을 침략하여 국가 존립을 위협했던 것이다. 이것을 '북로남왜의 화'라고 한다.
  북방의 몽고적은 오랫동안 중국을 위협한 세력이었으며, 원나라로 중국대륙을 100여년간이나 지배했다. 명의 건국과 함께 북쪽으로 밀려난 후에도 몽고족의 중국에 대한 위협은 계속되었다. '토목의 변'은 몽고족의 일족인 오이라트의 에센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한 세력에게 명군이 패배하고 명 황제 영종이 사로잡힌 사건이었다. 토목의 변 이후 에센은 1451년 주변 몽고세력을 통합하여 칸의 지위에 올랐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그 뒤 오이라트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타타르의 다얀이라는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면서 다시 한번 몽고 전체를 통일하면서 칸의 자리에 올랐다. 다얀 칸의 손자였던 알단이 칸의 지위에 오른 후 1541년(가정21년) 알단 칸은 제2의 쿠빌라이가 되겠다는 야심을 실행에 옮겨 중국을 침공해들어왔다.
  그들은 삭주를 거쳐 하북지방 깊숙이 침투,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고 2백여만 마리의 가축을 약탈해갔다. 그후에도 타타르의 침략은 연례행사로 되풀이되어 명나라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1550년의 침입 때에는 북경을 포위공격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중국 각 지방의 원군이 모여들어 북경의 함락만은 간신히 면했다.
  북경에 대한 포위공격이 있은 이듬해 1551년, 명에서는 타타르와의 타협의 한 방편으로 몽고와의 말 거래를 허용했다. 말 시장을 열어 몽고의 말을 사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원래 명나라에서는 명나라의 책봉은 받은 나라에 한해 조공무역을 허락했는데, 이는 형식적으로 몽고족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아 조공국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몽고가 중국에 말을 팔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명나라로 보아서는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을 사야 하게 된 것을 의미했다. 결국 형식적인 책봉관계를 맺으면서 몽고가 명나라에게 말을 팔 수 있게 됨으로써 몽고는 유목민의 생종에 필수불가결한 말 판매지를 확보하게 되었고, 명은 몽고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어느 정도 한숨을 돌릴 수 있는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다.
  몽고는 말 무역의 특권을 확보하면서 몽고족들의 생활기반을 어느 정도 안정시켰지만, 현실에 안주하게 되는 조건이 만들어짐으로써 그들의 대외팽창 의지를 잠재우게 되어 나중에 만주족에게 대륙의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 몽고족과 함께 명나라를 괴롭힌 또 다른 세력은 일본 왜구였다. 이들은 원 말기부터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일본과 명은 처음에는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중국의 해안에 왜구가 출몰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은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12--14세기), 무로마치 막부시대(14--16세기)의 상공업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국내의 상업활동만으로 일본의 상업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까지 그들의 활동범위를 넓혀간 것이다.
  명 태조 주원장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를 단속해줄 것을 요청했다. 영락제에 이르러서 공식적인 무역이 시작되었다. 공무역이 이루어지게 되면 당연히 밀무역은 금지된다. 명의 경제 때 일본의 아시카가와 관계를 맺고 왜구의 출몰을 막아줄 것을 일본에 요구하기도 했다. 아시카가 통치 시기에 일본국왕은 명과 조공국의 관계를 맺게 된다. 이는 아시카가 정권의 중국과의 무역을 공무역 형태로 독점하고자 하는 의도였으며, 그 독점효과를 최대화 하기 위해 사무역은 당연히 금지되었다.
  그후 잠시 왜구의 출몰이 줄었으나 아시카가 막부가 세력이 약해져 왜구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면서 다시 왜구들의 횡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왜구들이 약탈에 나서게 된 요인은 중국의 제한된 조공무역 때문이었다. 명이 일본에게 허용한 조공무역은 극히 제한되어 특권계급들에게 한정된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지방호족들이나 상인들은 이러한 조공무역의 혜택을 볼 수가 없었고, 양국 상인들ㅇ간에 밀무역이 싹틀 소지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막부가 세력이 약해져 지방세력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지방의 실력자들이 독자적으로 중국과 무역거래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와의 무역거래량은 한정되어 있는 데 반해 일본의 욕구는 넘침에 따라 문제가 발생했다. 어느 해 일본 지방세력의 하나인 오우치 쪽에서 배 3책을 중국에 파견했는데, 다른 실력자였던 호소가와 쪽에서 보낸 배가 거의 동시에 광동에 입항하게 되어 두 세력들간에 선상에서 집단 난투극이 벌여졌고, 일부 일본인들이 배에서 내려 명의 영파 등 해안지대를 약탈, 파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명 정부의 조공무역 체제 아래서는 밀무역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고, 실격자들간의 쟁탈전 및 밀무역이 성행하게 된 것이다. 명은 당연히 밀무역자를 색출하여 처벌하게 되고, 그에 반발하여 중국 상인들 및 일볼인들이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기도 했다. 1533년(가정31년) 한 무리의 왜구들이 동남해안을 따라 절강, 항주, 안휘성 등 강남지방의 성들을 차례로 휩쓸면서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살인과 약탈을 서슴지 않았다. 왜구 무리들은 80여 일동안 약 4천여 명의 농민들을 살해했다. 당시 왜구들의 잔인한 행위는 다음과 같이 묘사될 정도였다.
  "곡식창고를 약탈하고 민가에 불을 질렀으며 백성들을 죽였다. 시체와 피가 산과 강을 이룰 정도였다. 어린 아이를 기중에 묶어놓고 끊는 물을 끼얹는 것을 놀이삼아 했으며, 임신부를 보면 뱃속에서 태아를 끄집어내는 등"
  이처럼 왜구들의 잔학상은 조선에서나 중국에서나 마찬가지였다.

   

59 만주족, 다시 일어나다-만주족의 재통일과 후금의 건국(1616년)


  오래 전부터 만주지방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민족이 있었는데, 그들은 시대에 따라 숙신, 말갈, 여진족 등으로 통했으며 명나라 때에는 만주족이라고 불리었다. 그들의 조상은 12--3세기경 통합을 이루어 금나라를 세우고 송나라를 제압하는 등,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가 몽고제국에 의해 멸망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후 만주족은 원나라와 명나라의 영향력 아래 부족 단위 햇ㅇ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송화강 유역의 해서여진, 장백산 일대의 건주여진, 연해주 일대의 야인여진이라는 3개의 큰 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만주족을 통일하여 다시 중국대륙을 장악하는 발판을 마련한 사람은 누르하치였다. 그는 건주여진의 부족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명나라에 충성을 바치며 세력을 유지했던 부족장으로, 명나라에 반대하는 아타이 세력이 명의 공격을 받을 때 그들을 설득하여 명에 항복하게 할 목적으로 아타이의 성에 들어갓다가 억류되었다. 누르하치의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가 나오지 않자 아타이의 성에 들어갔다 똑같이 억류당했다.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명나라가 아타이를 공격하는 과정에 죽었다. 이것이 누르하치의 가슴 속에 갚은 원한으로 남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누르하치의 가슴 속에 깊은 원한으로 남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면서 "우리 조상은 대대로 명에 순종하면서 살았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죄없이 명에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도저히 씻을 수 없는 한이다"라고 하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세력을 키워 스스로 명나라와 대적할 정도에 이르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명나라에 복종했다.
  당시 만주지역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던 사람은 이성량이라는 명나라 장군이었다.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보호와 원조를 받으면서 세력을 확대해갓고, 누르하치의 세력확대는 이성량에게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엇다. 왜냐하면, 만주에서 많이 나는 인삼이나 모피, 진주 등을 구입하기 위해 모여든 명의 상인들은 이성량을 거칠 수밖에 없었고, 이성량과 누르하치는 중간에서 많은 이익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량은 부를 축적하는 데 눈이 멀어 만주지역의 북방민족을 다스리고 통제해야 하는 자기의 임무를 저보리고 있었다. 결국 이성량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보고에 의해 그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못한 것이 알려져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동안 누르하치는 세력을 크게 확대했고, 새로이 파견된 명의 만주 책임자들은 이미 강성해진 누르하치의 세력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결정적으로 누르하치에게 유리한 기회를 제공한 것은 일본의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한 임진홰란이었다. 명은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에 원군을 보냄으로써 국가사정이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누르하치에게는 하늘이 도운 기회였다. 명나라가 일본과 사우는 틈을 이용해 누르하치는 여러 부족을 통합하면서 내부체제를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 것이다.
  1616년(만력44년) 마침내 누르하치는 대부분의 만주족을 자기 세력 밑에 넣어 나라 이름을 '후금'이라 칭하고 요령성에서 왕위에 올랐다. '후금'이라는 이름은 12세기경 그의 조상들이 세웠던 금나라를 계승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후금은 본격적으로 명과의 대결상태에 들어갔다. 후금의 군대조직은 그들의 유목적 전통을 바탕에 두고 있는 팔기군이었다. 이 제도는 부대편성을 한 다음 각 부대마다 색깔이 다른 깃발로 구분한 것인데, 이것은 단순한 군대조직이 아니라 빈번하게 이동하는 유목족에 있어 사회조직의 기능도 했다. 즉, 만주족이면 남녀노소가 모두 팔기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군사기능과 아울러 징세, 행정의 기능을 함께하는, 그야말로 유목민 특유의 사회 군사조직이었다. 이러한 독특한 사회조직은 평상시에는 생산활동에 종사하고 전쟁시에는 그대로 부대편성으로 이어지는 등 효율적인 기능으로 만주족의 세력확대에 큰 힘을 발휘해싿. 나중에 가면 정복한 지역의 민족들을 그 민족들에 다라 독자적인 부대로 편성하면서 팔기제도가 정착되게 이른다. 누르하치가 왕위에 오를 무렵의 후금 군대는 약 10여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후금은 군대를 동원, 명의 영토였던 무순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러자 명에서는 만주족 토벌을 위한 군대 동원령을 내리고 요동의 심양에 주력군을 주둔시켰다. 명과 후금의 대결을 결정적으로 후금에게 유리하게 만든 유명한 전투가 바로 무순 동쪽 50km 지점에서 벌어진 살이호의 전투다. 1619년 이전투에서 명의 대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둔 후금의 군대는 심양, 요동 등을 그들의 영역 안으로 아루렀고, 1625년에는 심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중국대륙을 향해 한발 더 다가들게 된 것이다. 후금은 그들의 정복활동의 대의 명분을 살리기 위해 전투에 나설 때는 몇 가지 원칙을 군인들에게 지키게 했다. 예를 들면,
  "싸워서 잡은 포로의 옷을 벗기지 말라"
  "여자를 납치하지 말라"
  "대항하지 않는 자는 죽이지 말라" 등이었다.
  누르하치는 1626년 관녕성을 공격하던 도중 부상을 입고 그해 8월 68세로 죽었다. 그가 죽은 후 2대 황제 태종이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고쳤다.

   

60 황제의 충성스런 부대-팔기군의 성립(1616년)


  만주족은 지리적인 생활조건으로 말미암아 유목생활이 중심이 되었으며 그들의 사회조직도 그들의 생활특성에 때라 이루어졌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팔기제다. 청의 건국자 누르하치는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부족단위로 흩어져 살던 만주족들을 모아 대세력을 형성하게 되자 사회 및 군사조직을 정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처음에는 부족집단들을 4개의 묶음으로 하여 노랑, 빨강, 남색, 백색의 4가지 색의 깃발로 구별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팔기가 아니라 사기였던 셈이다. 그후 나중에는 4기를 더 만들어 팔기로 했다. 이것은 마치 신라가 삼국을 통합하면서 고구려, 백제 출신들까지 부대를 편성하여 9서당을 만들었던 것과 비슷하다. 팔기의 기나 9서당의 당은 모두 깃발을 의미하는 한자다.
  팔기의 기본단위는 니루인데 1니루는 300명의 장정이다. 국가는 니루를 기본단위로 하여 군대징발, 장비 마련, 요역, 노동력 징발을 했다. 5니루를 1잘란, 5잘란을 1구사로 편성했고 구사고 곧 기가 된다. 따라서 한 기는 산술적으로 하면 7천 5백 명의 장정이 속해 있는 집단이 된다. 각 기는 유력한 대표자들에 의해 통제되엇고, 만주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도 전 부대를 다 장악하지 못했다.
  태조의 뒤를 이어 태종 홍타지에 이르면 정복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몽고족, 한족들을 중심으로 몽고 팔기와 한인 팔기를 따로 편성했다. 물론 군사력의 핵심은 만주팔기였다.
  마침내 만주족이 이자성군을 몰아내고 북경에 들어와 중국대륙의 주인이 되자 당연히 만주 팔기들도 대부분 북경성 내에 거주하게 되었다. 원래 팔기제는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의 기능을 병행하는 것이었는데, 만주뿐만 아니라 중국의 넒은 대륙을 다스리게 되자 부족적인 팔기체제로는 중국대륙을 효율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다. 청은 한족들을 통치하면서 명나라 때부터의 제도를 계승하여 군현제를 신시했다. 따라서 팔기는 이제 행정적인 기능보다는 군대조직의 의미로 굳어지게 되었다. 팔기병은 청의 군사력의 핵심이 되어 북경 수비뿐만 아니라, 국경이나 군사상의 중요한 지역에 주둔했다. 특히 황색 깃발의 황기와 백기는 황제 직속의 부대였다.
  중국을 지배하게 딘 만주족은 지배 신부층으로서 많은 특권을 누렸는데, 그들의 경제적인 기반은 기지였다. 이는 팔기군에 편성된 만주족이 군대에 복무하는 대가로 지급받은 땅으로, 보통 정복지를 넓혀갈 때 정복한 땅이 지급되었다. 물론 소유자인 만주족은 그것을 집접 경작하지 않았고 한족 노예들을 시켜 경작하게 했다. 이 땅에는 세금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한족 중에서 땅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땅을 기지로 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경작을 담당했던 한족 노예가 고통을 견디지 못해 도망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기지는 전호(소작인)들에 의해 주로 경작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원래 이 땅은 팔 수 없게 되어 잇는데, 점차 매매하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어 이를 막을 수 없게 디자 아예 매매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