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중국역사 100가지요약 1

好學 2009. 10. 21. 23:30

중국역사 100가지요약 1

 

차례


  1 중국대륙의 구인류 - 북경원인
  2 황화, 중국문명의 원천 - 앙소문화
  3 남성의 시대로 - 용산문화
  4 하왕조는 실재했는가 - 중국의 전설시대
  5 신에게 묻는다 - 갑골문이 안내한 은허의 세계
  6 주의 봉건제도 - 은왕조의 멸망
  7 춘추 5패, 열국의 각축전 - 춘추시대의 개막
  8 철기의 확산과 군사기술의 변혁 - 제 2의 농업 혁명
  9 백가가 쟁명하다 - 제자 백가의 출현
  10 후진국 진의 대약진 - 상앙의 개혁
  11 진시황,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다 - 중화제국의 시작
  12 여산릉 병마용 허수아비의 노래 - 진승, 오광의 난
  13 항우와 유방의 대결 - 한 제국의 성립
  14 살아 있는 듯한 한나라의 여인 - 마왕퇴의 한묘
  15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지고 - 오초 7국의 난
  16 유교가 제국의 이념으로 - 유교의 국교화
  17 동서교역로의 좁은 문 비단길 개통 - 장건의 서역탐험
  18 사마천, (사기)저술을 위해 태어나다 - (사기)의 완성
  19 와망의 이상적 토지개혁 - 신 왕조의 명암
  20 호족 연합정권의 대두 - 후한의 성립

 

 

1. 중국대륙의 구인류(북경원인 - 약 50만년 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 250만년 전/한반도의 윤곽 형성
  * 70만년 전/구석기 문화시작

  1929년 12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북경 교외의 탄광 마을 주구점, 그 서남쪽 산, 일명 '용골산'에서는 일단의 학자들이 혹한을 무릅쓰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산은 석회암 산지였긴 때문에 수많은 동물의 뼈가 화석화되어 남아 있었고, 중국 사람들은 이 뼈를 '용골'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용골은 살마들 사이에 만병통치약쯤으로 여겨져 고가로 팔려가고 있었다. 그 약용의 뼈 중에 사람의 뼈가, 그것도 까마득한 옛날원인의 뼈가 포함되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스웨덴의 지질학자 앤더슨이 처음으로 새로운 시각으로 이 산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는 본래 원세개 정권이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서방에서 초빙한 광공업 고문이었으나, 광맥을 찾는 일보다는 그 속에서 인류의 화석이나 고대의 유물을 발굴하는 데 정열을 바침으로써, 1920년대 중국 고고학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을 이루어냈다.
  앤더슨 일행은 이미 1927년에 인류의 것으로 보이는 어금니 뼈를 찾아냈으나,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보다 확실한 유골을 찾기 위한 작업이 계속되었지만, 그 작업은 성과를 확실히 예견할 수 없는 지난한 작업이었다. 앤더슨은 고고학적 발견의 어려움을 '마치 공원에서 잃어버린 핀을 찾는 것과 같다' 고 표현했었는데, 그야말로 산을 거의 허물어내는 기나긴 노고 끝에 북경원인 의 화석이 발굴되었다.
  동굴을 파들어가던 사람들이 30m 깊이의 동굴 밑바닥에 도달했다.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도구는 대나무 주걱. 고고학이 현대 과학의 성과라고 하기에는 그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밑바닥에는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 2개가 나 있었다. 중국인 젊은 학자 배문중이 희미한 불빛에 의존하여 구멍 끝까지 들어갔을 때,  순간 그는 숨을 멈추었다. (앗! 두개골이다!)
  그것은 거의 완전한 모습의 인류의 두개골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서양인 학자들에 의해 시작되고 미국의 록펠러 재단의 지원 속에 진행되었던 이 발굴에서, 원인의 유골은 중국이 학자에게 그 첫 모습을 드러냈다.
  협화의학원의 해부학 교수로 있던 블랙은 이 유골이 50만년 전, 즉 구석기 전기에 활동했던 인류의 유골임을 확인했다. 그가 두개골을 손상시키지 않고 부착된 단단한 흙을 제거하는 데 걸린 시간만도 4개월, 북경원인에 매료되어 실체를 규명하고자 애쓰던 그는 끝내 과로로 숨졌다.
북경원인은 같은 단계의 자바원인과 달리 거의 완전한 상태로 발굴됨으로써 학계를 흥분시켰는데, 2차 대전의 와중에서 증발, 세계적인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북경원인과 같은 지층에서 불에 탄 뼈와 다량의 사슴, 코뿔소, 호랑이, 하이에나 등의 동물뼈, 그리고 인공을 가한 석기들이 발견되었다.
  이들로부터 추정하건대, 그들은 지금보다 훨씬 따뜻한 기후에서 직접 제작한 도구를 이용하고, 위대한 고동 노동을 통해서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짐승들을 사냥하며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집은 자연이 만들어놓은 동굴이었다.
  특히, 그들은 불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불의 사용은 인류가 자연계의 거인으로 탄생하게 되는 첫걸음인 도구 사용 다음으로, 인류의 발달사에서 아주 의미
깊은 일이었다.
  번개나 지진 등 자연적 현상 속에서 불을 관찰하기 시작한 인류도 처음에는 다른 동물들처럼 불을 몹시 두려워했으나, 점차 그 위대함을 깨닫고 생활에 적극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불은 생존을 위협하는 맹수들의 침입과 엄습하는 추위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주었으며, 식량을 익혀먹기 시작하자 인류의 신체는 더욱 튼튼해졌고 두뇌는 더욱 발달하기 시작했다.
  북경원인의 발굴을 시작으로 최근가지 발굴된 중국의 구석기 유적은 무려 200여 곳에 달한다.
  중국의 구석기 문화는 이미 북경원인이 살았던 시기보다 백만 년을 훨씬 앞선 시기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운남성 원모현에서 발굴된 원모인은 이미 17만년 전에 생활했음이 확인되었고, 섬서성 남전에서 발굴된 남전인은 약 60만년 전에 활동했다.
  홍적세 말기, 북중국에서는 다시 추위가 시작되었다. 몽고고원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은 고원의 석회석 가루로 중국 북부를 덮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바로 중국의 중원을 상징하는 황토 퇴적층의 형성이다. 기후가 다시 다듯해지면서 신석기 문화가 열리고, 이때에 새로이 등장한 주인공이 현재 중국인의 조상이다.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여와가 황토를 빚어서 인간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씩 만들었는데, 그 작업이 너무 더뎌서 나중에는 아예 새끼줄을 끌고 황토를 달렸다. 그 줄에 붙은 무수한 흙들이 모두 인간으로 변했다고 한다.

 

   

2. 황하, 중국문명의 원천


  만일 현대인이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로 떠난다면, 아마도 그 생존의 상한선은 신석기 시대에서 멈추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 지구상에는 오랜 빙하기가 끝나고 현재와 대차없는 지형과 기후가 만들어졌다. 인류는 수백 년간 인류를 지배했던 '깨뜨리는 문화'에서 탈피, '가는 문화'로의 기술상의 대혁신을 이룩했고, 자연현상의 배후에 있는 원리를 깨달은 만큼 성숙한  정신력을 갖게 되었다.
  신석기 시대에 인류는 야생하는 동, 식물을 사냥, 채집하는 일에만 의존하지 않고, 전혀 새로운 생활방식을 터득했는데, 그것은 농경, 목축의 시작이다. 이는 산업혁명에 견줄 만큼 인류 역사상의 대 사건으로, 우리는 이를 신석기 혁명, 혹은 농업혁명이라고 부른다. 이제 인류를 비로소 스스로 필요한 작물을 생산하고 조정하는 생산경제에 돌입, 문명의 기로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한 곳에 정착, 인공의 '집'을 만들어 생활하게 되었으며, 바늘을 발명하고 결박의 기술을 터득, 걸치는 옷이 아니라, '꿰매어 만든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했다. 마을이 이루어지고, 마을사람들의 공동의 의식과 문화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약 6천 개소의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그 이른 시기의 유적은 기원전 7천년경까지 소급된다. 그 최초의 터전은 황화. 중국 북부에 널리 발달한 부드럽고 비옥한 황토 퇴적층과 거대한 황하의 물줄기를 탯줄로 중국인들의 새로운 생활 곧 원시농경이 시작되었다. 오늘날은 남부의 양자강 유역이 최대의 농작물 지대로 알려져 있지만, 문병발생 초기의 생산기술로는 도처에 가득한 늪과 습지, 삼림을 개간할 수는 없었다.
  중국의 신석기를 대표하는 앙소문화는 첫 발굴지인 하남성 승지현 앙소촌의
 지명을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1921년 역시 앤더슨에 의해 처음 발굴되었다 대체로 기원전 5000년경부터 기원전 2500년까지 존속, 뒤의 용산문화에, 계승되었다.
  앙소인들은 현 중국인의 조산으로 확인되었다. 앙소인의 골격은 모두 몽고인종에 속하며, 현재의 화북 및 중앙아시아계보다는 남중국인계와 더 유사하다. 화북인은 이후의 역사 전개과정에서 북방민족과의 융합이 빈번해 체질사의 변화가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유적은 섬서성 서안시의 반파 유적으로, 1953년 서안에서 발전소를 건설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현재 유적 자체가 반파 박물관으로 조성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는데, 중국에서는 유적 자체를 박물관으로 개방하는 예가 적지 않다.
  앙소기의 마을은 대개 강가의 약간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의 규모는 약 20채에서 100채 정도. 집은 땅을 약간 파고 짚이나 이엉으로 엮은 원추형 지붕을 얹었다. 크기는 대략 직경 5m로 5명 내외의 사람0이 기거할 수 있는 면적이다. 집안의 중앙에는 화로를 두어 난로나 조명의 역할을 하게 했고, 집 부근에는 저장굴을 두어 곡물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오랜 경험으로 야생곡물의 생장이치를 깨닫고 농경을 시작한 이들이지만, 그것이 처음부터 풍부한 산물을 안겨주었을 리는 없다.
  초기의 원시농경은 여성들에 의해 전담되었다. 신체적인 조건상 임신, 육아를 담당해야 했던 여성들은 집 근처에서 간 돌도끼, 돌호미 등으로 수수, 조, 배추 등의 농사를 지었고, 수확물은 갈아서 토기로 된 시루에 가는 등 요리를 했다.
  사람들은 멀리 나가 말, 사슴, 들소 등을 사냥했으며, 낚시와 어망으로 물고기를 잡았다. 우리를 쳐서 개, 돼지, 소, 양 등의 가축도 기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남녀간의 분업은 있었으나, 아직 남녀의 차별은 없었으며, 빈부의 차나 그로 인한 사람간의 차별도 없었다.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는 있었을지언정,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살아서는 그만그만한 크기의 집에서 살았으며, 죽어서도 함께 씨족 공동묘지에 묻혔다. 죽은 이의 발 밑에 몇 개의 토기를 껴묻어,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는데, 씨족장이라 할지라도 널빤지를 댄다거나 약간의 비취를 장식하여 그의 생전에 노고에 대한 감사를 표했을 뿐 보통사람들과 별다른 것은 없었다.
  이들은 마을 중앙에 있는 커다란 집에서 마을 공동의 일을 함께 논의하고 결정했으며, 공동으로 생산하고, 그 산물은 평등하게 나누어 가졌다. 이들의 관계는 서로 평등했다.
  그렇다고 대자연 속에서의 신석기인들의 평등한 공동체적 삶을 낭만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마을 주위에는 5--8m의 도랑을 파서 맹수들의 침입을 방어했으나, 아직 인간은 맹수로부터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굶주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인간의 사망률은 매우 높았으며, 유아의 사망률은 더욱 높았다. 앙소인들은 유아가 죽었을 때 멀리 공동묘지에 내다묻지 않고, 질그릇에 넣어 집 부근에 매장함으로써 아이의 죽음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표현했다.
  인류가 굶주림에서 해방, 자연의 정복자로 등장하기까지는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 문제가 극복되는 순간, 인간 사이의 억압과 지배의 새로운 관계도 시작될 것이다. 어찌됐든 신석기인들은 그 서단을 열었고, 신석기를 대표하는 정착, 농경의 상징물은 바로 토기다.
  토기는 요리에도 응용되었지만, 본래는 저장을 위한 용기다. 토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류가 잉여생산물을 낳을 수 있는 생산력 단계에 도달했음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오랜 관찰을 통해 진흙을 햇볕에 말리면 매우 단단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태양열보다 더 강한 불에 굽는다면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앙소의 채색토기는 붉은색, 검은색, 흰색 등의 반탕에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있다. 별, 파고, 사선 무늬 등 기하학적 무늬도 있고, 물고기, 뱀, 새 등 동물 무늬도 많다. 그중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물고기도 있고, 초기 글자 같은 부호도 보인다.
신석기인들의 이러한 감각은 사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해내는 데 치중했던 구석기인들과 구별되는 것으로, 사물의 배후원리를 찾아내고 추상화하는 데 치중하는 신석기인들의 정신세계의 확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3 남성의 시대로


  용산문화는 원시공동체 사회가 신석기 말기에 이르러 어떻게 계급사회로 이행했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농경기술이 더욱 발전, 광대한 황하유역이 모두 농경지대로 바뀌어갔고, 이를 기초로 중국문명의 원형이 탄생했다.l 풍부한 수확물은 인구를 증가시키고, 인간의 정신문화를 보다 풍족하게 해주었으나, 이의 획득을 놓고 씨족 내부의 갈등이 생겼고, 다른 씨족과의 전쟁 또한 빈번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1930년 황하 하류의 산동성 용산현 성장애에서 용산문화의 유적이 처음으로 발굴되었다. 그곳에서는 다량의 석제 농기구와 함께 검게 빛나는 흑색 토기가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너무 인상적인 것이었다.
학자들은 이를 양소의 채도와 대비, 웅대한 가설들을 세워나갔다. 용산유적의 발굴에 참여했던 부사년은 황하 중류를 채도 문화권으로, 황하 하류를 흑도 문화권으로 대별하고 이른바 화이 동서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마치 빙산의 일각을 보고, (여기에 앙소가 있고, 저기에 용산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았다. 최근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은 이들이 물 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안양시 후강의 한 유적에서는 최하층에 앙소문화, 중간층에 용산문화, 최상층에 은의 문화층이 발굴되었고, 묘저구 제2문화층에서는 앙소에서 용산문화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의 토기 유형이 발굴되었다.
  용산문화는 앙소문화와 동시대의 이질적이 문화가 아니라, 이를 계승, 발전시킨 신석기 후기의 문화였다.
  그렇다면, 채도에서 흑도로의 변화는 일종의 유행의 변화로 보면된다. 중국의 신석기인들은 다양한 색깔과 무늬를 넣어 토기를 장식하는 것에 싫증을 내고, 무늬가 없고 기형이 보다 충실한 토기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기술도 진전되어, 앙소인들은 대개 손으로 빚어서 토기를 만들었는 데 비해, 용산인들은 회전대를 사용했으며, 달걀껍질같이 얅고 광택 나는 토기를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앤더슨은 앙소의 채도가 서아시아의 것과 비슷한 것에
감탄, 서아시아 전래설의 심증을 굳히고, 서쪽으로의 낭만적인 고고한 여행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는 앙소 서쪽의 채도가 오히려 더 후대의 것임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의 가설이 황당한 것은 아니었으나, 서로 교류가 없는 상태에서도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는 비슷한 문화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용산 시기의 문화유적은 현재까지 약 300곳이 발굴되었는데, 그 문화의 정수는 산동지역에서 꽃피었다.
  용산 문화기에 이르러 농경은 더욱 확대되었다. 화석화된 벼껍질, 토기에 박힌 낟알 자국 등은 이 시대에 벼농사가 행해졌음을 말해준다. 반달모양 돌칼이나 돌낫, 나무 보습 등 새로운 농구가 개발되었다. 농경은 보다 확실한 생활수단이 되었으며, 가축사육도 보다 높은 수준에 달했다.
  이제 농경에 남성들의 근력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고, 그 수확물이 확대될수록 남성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었다. 남성의 묘에서는 생산도구가, 여성의 묘에서는  물레틀이나 머리 장식품 등이 출토되었다. 방직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생산활동에서 남성의 역할이 더욱 중요시되면서 여성의 지위는 점차 남성에게 종속되게 되었다.
  저장할 곡식이 더욱 많아졌고, 사유재산의 개념이 출현했다. 남성들은 사유재산을 자신의 아이에게 상속하기를 바랐다. 분명한 자기아이임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느 여성을 독점해야 했고, 이에 다라 일부일처제의 혼인제가 성립하게 되었다. 가끔 남녀 합장묘가 발굴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알려준다.
  세습적인 지도자가 출현했고, 씨족간의 평등한 관계도 깨어지기 시작했다. 묘지들은 이제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지 않았으며, 부장품의 수와 종류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부장품이 1점 출토되는 묘가 있는 반면, 160점이 발굴되는 경우도 있다. 지도자는 점차 지배자로 변해갔고, 세상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갈라지기 시작했으며, 빈부의 차이가 심해지기 시작했다.
  사회는 더욱 확대되어 앙소기의 5배 혹은 10배의 큰 마을이 생겨났다. 집은 앙소기와 큰 차이가 없었으나, 한 간짜리 움집 외에 두간짜리 집도 발견되고 있다. 주거지 주위에 서서히 성벽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도랑으로는 맹수는 피할 수 있었으나 다리를 놓고 건너오는 외적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성벽은 두 쪽의 판자 사이에 흙을 넣고 물을 부은 다음, 발로 짓이기는 우너시적 시멘트 공법, 즉 판축 공법으로 구축되었다. 성은 전쟁의 거점이 되었고, 각 부족간의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광대한 중원, 황화 유역에는 방, 읍, 국으로 불리는 성읍도시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청동기 시대에 이르면, 이들 무수한 성읍국가 중에서 강성한 국가가 출현, 최초의 고대국가를 창출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초기 국가 전설은 이들이 부족간의 빈번한 항쟁 속에 도읍을 무수히 옮기고 있음을 알려준다.

 

   

4 하왕조는 실재했는가


  현재까지 밝혀진 학문적 성과로는 중국 최초의 국가는 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금세기 초까지도 은의 실재를 의심하고 있었으나, 은나라는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나라일 뿐이었다. 그러나 갑골문자는 은 후기의 도읍지인 은허를 우리의 코앞에 들이대면서 지구상에 이렇게 훌륭한 청동문물을 본적이 있느냐고 외쳐댔다. 놀랍게도 (사기)에 기록된 은 왕실의 세계표는 거의 오차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은의 갑골문자, 주의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 등의 문자기록을 통해 우리는 보다 풍부하게 과거의 사실들을 만날 수 있다. 문자는 분명 인류가 오랜 원시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이 문명의 새벽을 준비하는 중요한 발명품이다. 인류는 문자를 통해 축적된 경험을 후세에 전달하게 되고, 이제 인류의 역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구석기 이래 인류는 공동노동의 과정에서 언어를 사용하여 서로 의사를 소통하고 있었으며, 언어에 의한 문화계승을 지속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다시 그 아들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오랜 전승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쩌면 더욱 귀중한 역사의 파편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독일인 슐리만이 어린 시절 읽었던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오디세이)의 감동을 잊지 못해, 마침내 트로이의 발굴에 나서고 또 성공했던 것처럼.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천지의 창조주는 반고이다. 태초에 우주에 가득 찼던 기운이 점차 거대한 바위로 변했다. 반고는 그 바위 사이에서 생겨났는데, 그가 점차 자라남에 따라 바위는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 한 조각은 하늘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땅이 되었다. 반고가 이 일을 마치고 숨을 거두자, 그의 눈은 태양과 달이, 그가 내쉰 숨은 공기가, 그의 뼈는 산이, 그의 육체는 흙이, 그리고 그의 피는 강과 바다가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 미개한 사회가 개화되었는데, 그 위업은 뛰어난 성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문화적 영웅들이 바로 삼황오제이다. 삼황오제의 전설은 국가 출현 이전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삼황오제는 기록에 따라 약간 다르게 나타나지만, 삼황은 상서의 수인씨, 복희씨, 신농씨를, 오제는 사기의 황제, 전욱, 곡, 요, 순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인은 불을 발명함으로써 화식하는 법을 알게 했으며, 인류를 추위로부터 보호했다. 혹희는 사냥의 기술을 창안했고, 신농은 쟁기와 괭이를 발명, 농경시대를 열었다. 이들이 삼황이다. 삼황은 다소 괴기한 모습을 한 초인적 영웅이다. 복희는 머리는 사람이지만 몸은 뱀이며, 신농은 머리는 소지만, 몸은 사람이다.
  반면, 오제는 보다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사마천은 이때부터를 역사시대로 파악, (시기)의 저술을 오제로부터 시작했다.
황제는 무력으로 중국을 처음 통일했으며, 문자, 역법, 궁실, 의상, 화폐, 수례 등 중국문물의 기초를 마련한 중국 문명의 창시자요, 중국민족의 공동조상이다. 다음의 전욱과 곡에 대해서는 뚜렷한 기록이 없다. 다음의 요와 순은 매우 높은 덕망에 의해 중국을 통치했으며, 자기 자식을 제쳐두고 현자를 지명하여 후계로 삼았다. 이것이 유명한 선양의 시작이다. 요는 효자로 이름난 가난한 농부 출신의 순을 찾아내 그의 덕망과 능력을 여러 차례 시험한 다음, 그를 사위로 삼고 위를 물려주었다.
  순의 선정으로 백성들이 편안했는데, 대홍수가 일어나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때 관리 우가 13년간의 노고로 훌륭히 치수의 사업을 이루었다. 순은 역시 자기의 아들을 제치고 우에게 제위를 넘겼다. 우도 훌륭한 선정을 폈다. 그가 죽자 백성들은 그가 지명한 후계자를 제치고 우의 아들을 후계로 삼았다. 이때부터 세습적인 왕조가 출현했으니, 이것이 중국 최초의 왕조 하나라다.
  이 전설을 통해서 우리는 인류역사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던 불의 발명, 사냥의 발명, 농경의 시작, 국가의 발생 등의 대사건들을 만나게 된다. 요와 순이 현자에게 선양을 한 것은 원시 씨족 공동체 사회에서 추대에 의해 지도자를 뽑았던 역사적 사실은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신석기 말에 씨족 공동체 사회가 깨지고 세습왕조가 출현하는 모습이 하왕조의 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하족으로 부르듯이, 전설상의 최초의 국가 하는 과연 실재했을까? (죽서기년)과(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하는 18대 472년간 존속했다. 각 왕들의 통치기간이 백년을 넘는 등의 허무맹랑함이 없어 매우 사실성이 있어 보인다. 서주 시대의 청동기 명문에서도 하왕조와 우의 명칭이 확인되었다. 최근 중국 최초의 청동기 유적인 하남성 언사현 이리두 유적이 하의 유적이 아닐까 추론되고 있으나, 하나라의 실체는  아직도 안개에 싸여있다. 초기청동기나, 왕의 출현을 알리는 궁전, 대묘, 거대한 성벽등이 발굴되어야 할 것이고, 그것이 은의 초기유적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가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인들은 과거에 투영하여 자신의 이상을 펼치기를 좋아하는 민족이다. 도가에서는 황하문명의 창시장인 황제를, 묵가에서는 절검과 노동을 중시하는 우를, 유가에서는 인애를 근본으로 선정을 펼친 요와 순을 강조했다. 전통적 유교에서는 요, 순, 우를 삼성으로 받들고, 하, 은, 주로 이어지는 삼대를 왕조의 모범으로 설정, 삼대의 이상적 도덕정치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곤 했다. 어찌됐든, 전설은 중국인의 의식 속에서 지속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5 신에게 묻는다


  총 말기인 1889년 어느 날, 갑골의 파편이 한 병든 학자의 집에 찾아들면서 3천년이 넘도록 땅 속에 감추어져 있던 은나라의 신비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 학자의 이름은 왕의영. 그는 당시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던 국자감의 제주, 즉 대학총장으로 있었는데, 금석학 등 고학문에 조예가 깊어서 그의 문하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고, 그중에는 유철운도 있었다.
  왕의영은 말라리아라는 지병이 있어서, 특효약으로 소문난 용골을 갈아서 약재로 쓰고 있었다. 용골이란 북경원인의 발굴에도 단서를 제공했던 바로 그 동물의 뼈이다. 용골이 막 빻아지려는 순간, 마침 그곳을 지나던 유철운이 문득 범상치 않은 글자의 흔적을 발견했다. 4년 후 그는 (철운장귀)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발간, 세간에 갑골문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용골의 출처를 찾아 나섰던 왕의영과 유철운에게 비자의 기업비밀을 쉽사리 알려줄 약재상은 없었지만, 이제는 골동품상을 통해 글자가 있는 용골이 고가에 거래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서 하천이 범람, 갑골의 파편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이 지역은 1928년부터 10년간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 기원전 15년경부터 은이 주에게 멸망되었던 기원전 1100년경까지, 즉 은 후기의 도읍지 은허였음이 확인되었다.
  은나라의 본래 이름은 상, 황하연변의 수많은 성읍국가 중의 하나였던 상읍이 주변의 성읍국가들과 연합, 주도권을 구축해나갔다. 아직 대규모 수리공사도 없었던 시절, 농경지는 제한되어 있고, 주변에는 수렵을 위주로 하면서 호시탐탐 농경민을 약탈하고자 하는 종족들이 있었을것이니, 농경민들은 서로 연합하게 되고 은족은 그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사기)의 은 본기에 의하면, 탕왕에 이르러 하나라의 걸왕을 쓰러뜨리고 주변국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지위는 불안정하여 수도를 다섯 번이나 옮긴 후에야 은허에 정착하게 되었다.
  거대한 도시유적 은허에서 가장 중요한 발굴은 역시 수만 편에 달하는 갑골편이다. 갑골은 점복에 사용되던 귀갑과 수골을 줄인 말로, 귀갑은 거북의 등껍질보다 배껍질이 많고, 수골은 소의 어깨 뼈가 많다. 이제 겨우 한자를 배우기 시작한 초보자의 눈으로도 갑골문 몇 자는 확인할 수 있듯이, 갑골문자는  한자의 원형이면 문장의 구조도 오늘날의 중국어와 같다. 세계의 고대문명 중에서 중국처럼 일관된 문화를 유지해온 나라는 없다.
  갑골문의 연구는 왕의영, 유철운을 이어 나진옥과 그의 제자 와국유에 의해 집대성되어 은대의 사회를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이 모두 비극에 끝나 사람들은 이를 갑골문의 저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왕의영은 의화단 사건 이후, 외국 군대가 중국에 진주하게 되자 이에 분노, 자결했고, 백화문으로 사회를 풍자한 (노잔유기)를 남기기도 하고 기인으로 유명했던 유철운은 백성들의 참상을 보다 못해 정부의 허가 없이 관곡을 풀어 나누어준 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유철운의 친구였던 나진옥은 일본에 망명했다가 만주 괴뢰정권에 관련, 두고두고 지탄을 받았다. 청말의 대표적인 학자로 유명한 왕국유는 언제나 전통복장을 하고 변발을 허리께까지 드리우고 다녔는데,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에게 제왕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청조의 몰락을 바라보다가 이를 비관하여 자살로써 인생을 마감했다.
  은의 왕실은 국가의 행사를 결정할 때마다 갑골로써 점을 쳐서'신의 뜻'을 묻고는, 갑골에 언제, 누가, 어떠한 내용으로 점을 쳤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기록했는데, 그것이 바로 갑골문인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국가의 중대사란 기상이나 자연현상, 농사의 풍흉, 자연재해, 제사, 전쟁, 수렵, 임신, 질병 등 온갖 것이 다 포함되며, 갑골은 일회용으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은허의 한 갱에서는 한꺼번에 1만 7천 7백 편의 귀갑이 출토되기도 했다.
  우선 갑골의 뒷면에 구멍을 내어 단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낸다음, 이곳을 불로 지지면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때의 균열의 형태나 수, 주변의 색깔 등으로 신의 뜻을 판단했다. 그것을 판단하는 자가 바로 왕이다. 왕은 신과 인간사회를 매개함으로써 권위를 인정받았다.
  이러한 신정정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서 긑없이 무력감을 느껴야 했던 초기국가의 일반적인 정치형태다.
  은나라 사람들은 10개의 태양이 땅 속에 있다가, 매일 하나씩 교대로 천상에 나타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열흘 간격으로, 도 다음 태양이 떠오르는 밤마다 일상적으로 점을 쳤다. 그 열 개의 태양의 이름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즉 10간이다.
  그들은 절대신인 상제로부터 10개의 태양신, 각종 자연신을 숭배했으면, 조상들이 이들에게 자신들의 간절한 바람을 전해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조상숭배를 각별히했다. 제사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왕의 가장 중요한 업무의 하나였다.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화려한 제단이 마련되고 술도 빚어졌다. 제단에는 수백 마리의 양, 소 등의 동물과 함께, 피정복민이 적게는 몇 명, 많을 때는 수천 명씩 목이 잘려진 채 제물로 바쳐졌다. 제사의 제물을 바치기 위한 전쟁이 수행되기도 했다.
  은왕은 수천 명의 귀족 전사와 함께 대규모 원정을 수없이 감행했는데, 은나라에 복속된 연맹부족들은 공물을 바치고, 유사시에 병력을 제공하는 한편, 은의 제사를 공동을 받들었다. 즉, 당시의 제전은 은의 지배력을 확인하는 유일한 의식 절차로서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은허에서 갑골문 다음으로 찬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청동기들이다. 그 제작기술은 흔히 서양의 르네상스기에 비견되는데, 특히 청동제기의 정교함과 세련미는 따라갈 것이 없다. 제기는 반드시 하나씩만 만들어졌으니, 제사에 바친 그들의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청동기는 지배층의 독점물이었고, 그들에 의해 무기나 제기로만 사용되었다. 그들은 청동무기로 무장, 지배력을 주변지역으로 확대해나갔으며, 신의 후예임을 자처, 화려한 제사의식으로 백성들을 위압해나갔다.
  생산활동은 오로지 평민들이 전담하게 되었지만, 생산기술에는 커다란 진전이 없었다. 그들은 청동문명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여전히 토기나 목기,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반지하기 움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을 살아서는 회랑으로 둘러싸이고 다시 토성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궁궐에서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죽어서는 청동기, 옥기 등이 대량으로 부장된 화려한 무덤에 매장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대규모 순장의 풍습이다. 대형 묘에는 수백, 수천에 이르는 사람들이 왕의 사후 생활을 편의를 위해 생매장되었다. 아마도 이들은 전쟁포로이거나 피정복민 노예였을 터였다. 훗날, 진시황의 무덤에서는 수천의 도용들이 이를 대신하게 되니, 생산력의 발달은 지배와 전쟁의 목적을 단순히 수확물을 얻기 위한 것에서, 토지와 백성의 획득을 위한 것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6 주의 봉건제도


  은의 제후국에 불과하던 서방의 주족이 눈부시게 성장, 마침내 은을 멸하고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은의 지배기에 황하 중하류 지역에 그치던 중국적 세계는 북중국 전역으로 확대, 동아시아 최고의 문명권을 이루었다. 중국 위주의 천하관과 화이의 관념이 시작되었고, 천명사상, 혈연 중심의 예문화 등 중국문화의 뼈대가 마련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주족의 시조는 후직이다. 그의 어머니 강원은 들에서 바윙에 새겨진 신의 발자국을 밟은 후, 이상한 기운을 느껴 그를 잉태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삼과 콩을 재배하기를  좋아했는데, 놀랄 만큼 결실이 좋아서 사람들은 그로부터 농사의 기술을 배웠다.
  주족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 부근, 비옥한 관중평원에서 농업의 기틀을 닦으면서 성장했다. 이곳은 농경에 적당할 뿐 아니라 천연의 요새이며, 또한 감숙방면으로부터 서방문화가 중국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경로이다. 전국을 통일한 진도 이곳에서 성장했다. 후직의 10대손인 고공단보 때에 기산 아래 주원(기주)에 정착했다. 이곳은 예부터 주의 청동기가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으로, 주의 명칭도 이로부터 유래한다.
  고공단보의 아들 계력 때 주의 국력은 크게 성장, 은의 경계를 사기에 이르렀다. 계력은 은 왕실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그의 아들 문왕은 유명한 태공망 여상의 보필 속에 비약적 발전을 거듭, 은은 서백의 칭호를 주고 이를 회유하려 했다. 문왕 때에 은 정벌의 계획은 이미 수립되었으며, 그의 아들 무왕에 이르러 이 계획은 실현되었다.
  마침 은의 주왕이 동방의 대정벌에 나섰다. 기회를 포착한 무왕은 목야의 결전에서 은의 대군을 격파했다. 전쟁에서 패한 주왕은 궁전을 불지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흔히 주왕은 아름다운 달기와의 사랑에 빠져 국정을 소흘히 했다고 전해지는데, 은의 계속된 무력정벌과 지배층의 화려한 생활이 은의 국력을 피폐하게 했다. 순장이나 갑골문에 등장하는 각종의 형벌이 말해주듯이, 은 왕실의 잔혹한 지배는 백성들의 거센 저항을 받았다. 또한 은나라 사람들은 술을 너무 좋아해서 멸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은을 정복한 주는 이를 경계, 음주를 특별히 통제했다.
  무왕은 도읍을 호경으로 옮겨 주왕조를 개창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주왕실은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주의 지배력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왕이 갑자기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성왕이 즉위하게 된 것이다. 이때 크게 활약, 주의 지배력을 공고히 한 사람이 무왕의 동생 주공 단이다.
  주공은 동방의 거점인 낙읍(하남성 낙양 부근)을 제2의 수도로 건설하고, 은의 잔존세력의 반발을 평정했으며, 3년간의 대 동방원정을 감행하여 주를 명실상부한 중원의 지배자로 부상시켰다. 그러나 그는 긑내 왕위에 오르지 않고 성왕을 슬기롭게 보좌함으로써, 훗날 공자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주왕실은 방대해진  영토와 주민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다스려야 할 것인지 커다란 고민에 빠졌다. 아직 청동기 단계에 불과한 당시의 기술수준에서 북중국 전체를 중앙에서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차피 간접통치를 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면 각 제후들을 포섭, 통제하여 반란에 쐬기를 박을 수 있을까?
  이때 창안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체계적 통치제도가 바로 봉건제도다. 봉건제도란 직할지를 제외한 전국의 확장된 영토에 왕실의 혈족이나 공신을 제후로 임명, 다스리게 하는 제도로, 제후는 왕에 의해 봉해져서 해마다 공물을 바치고 유사시에 병력을 지원했으나, 지역의 내정에는 간섭을 받지 않았다.
  주왕실은 이러한 지역분립을 극복하고 주왕실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봉건제도에 '현연적'인 특색을 가미했다. 왕실과 제후는 단순히 정치적인 군신관계일 뿐 아니라, 본가와 분가의 관계, 즉 공동의 조상을 모시는 한집안임이 강조되었다.
  아울러 '천명사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널리 유포, 주왕실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하늘은 주 무왕에게 포악한 은의 주왕을 멸하고 주왕조를 개국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므로 은, 주왕조의 교체는 단순한 무력 쿠데타가 아니라, 하늘의 듯을 반영한 것이다. 이 논리에 의하면, 백성들은 불가항력적으로 주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주의 지배에 반항하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무서운 죄악이 되는 것이다.
  주의 지배는 제사의식으로 완성되는 것이었으나, 은나라처럼 대규모 피의 제물을 바치는 일은 사라졌다. 이는 주의 문화가 보다 질박하고 합리적으로 발전했다는 애기가 된다. 주왕실의 조상을 모시는 종묘가 도읍의 중심에 자리잡고, 심지어 주가 정복한 은의 제사도 중시되어서, 그들 조상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후손을 제후국에 봉했다. 제사의식과 관련하여 독자적 예문화가 정착, 이후 중국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주나라는 기원전 770년 유목민 견융의 침입을 받았다. 주 유왕은 여산 기슭에서 살해되고, 주 왕실은 도읍을 동쪽의 낙읍으로 옮겨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이를 주의 동천이라고 하는데, 이때부터를 동주, 그 이전 시대를 서주 시대로 칭한다. 동주는 다시 춘추와 전국으로 나뉘어져 춘추전국시대로 불리는데, 춘춘시대는 공자의 책명 (춘추)에서, 전국은 전한시대의 저술인(전국책)에서 따온 이름이다.
서주의 멸망에 관해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유왕은 포사라는 후궁을 몹시 사랑했는데, 그녀는 이상하게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보로 봉화가 올려졌다. 다급해진 제후들은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도읍으로 달려왔으나, 오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모두들 넋빠진 모습이 되었다. 이를 본 포사는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왕은 그녀의 아름다운 웃음을 다시 보기를 원했고, 자구만 봉화를 올렸다. 거듭 속아왔던 제후들은 정작 견융의 침입으로 주왕실이 위기에 닥쳤을 때는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7 춘추 5패, 열국의 각축전


  춘추시대에 관련된 중국의 고사성어에 '와신상담'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춘추시대 각국의 치열한 생존경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야말로 와신상담하지 않고서는 도시국가간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가 바로 이 시기였다. 춘추 초기에 100--180개 정도였던 도시국가가 말기에는 10여 개의 국가로 정리되었다. 기록에 남겨진 전쟁의 횟수만도 1,200회가 넘는다.
  이때 각국은 그때 그때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게 되었는데, 그 회맹의 대표자를 패자라고 불렀다. 춘추시대에는 다섯 사람의 유명한 패자가 있어 이를 춘추 5패라고 부른다. 춘추 5패는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최초의 패자가 된 사람이 제나라의 환공이다. 이때는 초나라가 남방에서 흥기, 강성해져서 중원을 위협하고 있었다. 중원 제국은 동방의 제나라에게 구원을 요청, 각국의 동맹이 이루어졌다. 그는 관중을 재상으로 등용, 혁신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부국강병에 성공함으로써 최초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제 환공은 이 연맹에서
(주나라 왕실을 높이고, 이민족을 물리친다.)
즉, 존왕양이의 구호를 내걸었다.
  춘추시대에 이미 주왕실은 하나의 소국에 다름아니었으나, 주왕실을 존중한다는 명분이 제후들에게 호소력을 지닐 만큼 아직 주왕실의 권위는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봉건제도의 잔재는 전국시기에 이르면 깨끗이 사라지고, 양육강식, 오로지 실력만이 인정받는 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각국은 춘추시대에도 독자적인 주권 영토국가로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춘추좌전)에 의하면, 소국 송의 재상 화원은 통행증 없이 송나라의 영토를 통과했던 대국 초의 사신을 사형에 처했다. (사기)에 의하면, 오나라와 초나라는 국경에 서 있는 뽕나무의 소유에 관한 양국 주민의 시비가 원인이 되어 대병력전을 치르기도 했다.
  춘추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대한 나라 둘을 든다면 그것은 역시 중원을 대표하는 진나라와 양자강 유역에서 새로이 성장한 초나라를 들 수 있다. 실로, 진나라가 한, 위, 조 3국으로 분열했던 기원전 453년, 혹은 주왕실이 이를 공인한 403년을 기점으로 춘추와 전국시기를 가르는 것이다. 춘추 5패로 진의 문공과 초의 장왕이 있다. 초는 더 남족의 신흥국 오와 월의 약진으로 잠시 위기를 맞았는데, 오의 합려와 그의 아들 부차, 월왕 구천 등이 역시 춘추 5패로 거론된다.
  오와 월은 보병 중심의 새로운 전법을 터득하고 일찍이 철기의 기술을 습득하여 강성해졌다. 오와 월이 소유했다는 명검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근래에 발굴된 무덤에서 유명한 월왕 구천의 검이 실제로 발견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2천 4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칼날은 지극히 날카롭기 이를 데 없고 날 밑의 양면에는 남색 유리와 터키석이 상감되어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칼의 몸통은 다이아몬드 무늬의 선으로 장식되어 있다. 현대의 공예가도 어떻게 칼날 부분에 이러한 무늬를 넣을 수 있었는지 감탄할 뿐이다.
  오왕 합려는 즉위 후 9년간 국력을 키워 초를 공격했는데, 다섯 번 싸워 다섯 번 이김으로써 초를 위기에 빠뜨리는 등 강성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월왕 구천과의 싸움에서 손가락을 부상당한 후 이것이 원인이 되어 죽음에 이르렀다. 그가 강소성의 해용산에 묻힐 때 10만 명의 인부가 동원되었으며, 묘안에는 3천 자루의 명검이 함께 묻혔다고 한다.
  합려의 아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와신', 즉 땔나무 위에서 잠을 자면서 고통을 상기하고 국력을 키워, 회계산의 전투에서 월왕 구천 의 굴복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구천은 부차에게 뇌물과 미녀를 보내어 마음을 안심시키고, '상담', 즉 쓸개의 쓴맛을 매일 보면서 스스로에게 회계산의 굴욕을 상기시켜 결국은 부차를 물리쳤다.
  각국이 패자로 등장하는 과정을 보면, 각 패자의 뒤에는 훌륭한 재상들이 있다. 제나라 환공에게는 '관포지교'의 아름다운 우정을 남긴 관중과 포숙이 있었고, 오나라 합려와 부차에게는 오자서가 있었으며, 월왕 구천에게는 범리가 있었다. 부차는 구천에게 패하고 자결할 때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는데, 그 이유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패하여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환공은 포숙으로부터 관중의 인물됨을 듣고, 자신을 죽이려 했던 과거지사까지 과감하게 묻어버리고, 그를 재상으로 등용하는 용단을 내렸다.
  각국의 군주들은 기존의 명문귀족들의 세력을 억압하고 세력기반이 없는 평민출신의 인재들을 과감히 등용하여 왕을 정점으로 하는 중앙집권화를 꾀했으며, 저마다 부국강병에 힘써 항쟁의 대열에 나섰다. 빈번한 전쟁 속에서도 과학기술은 더욱 발전하고, 통일 국가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훌륭한 사상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철기의 보급과 함께 전국시대에 더욱 확장되었다.

   

8 철기의 확산과 군사기술의 변혁


  전국시대는 중국사회에서 커다란 격동기였다. 이제 신석기 말기 이래의 도시국가 체제는 마감되어가고, 거대한 고대제국의 출현이 예고되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철기의 발명으로 대변되는 기술상의 대혁신이 있었다.
  철기는 지배계급의 상징물에 불과했던 청동기와는 달리, 사회 전반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청동기 시대에도 생산용구는 석기와 목기였으며, 그에 따라 생산력 수준도 신석기 시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은주 시대의 고도의 청동문명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부가 집중된 결과였다.
  그러나, 점차 금속 제작기술이 발달, 춘추 중기에 이르면 보다 단단한 철기가 발명되고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철기는 보다 예리한 무기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농기구로 널리 사용됨으로써 정치, 군사, 경제, 사회 전반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했다.
  철제 농기구는 땅을 보다 깊이 갈 수 있게 했으며, 여기에 소를 경작에 이용하는 우경이 시작, 인간의 근력에만 의존하던 농경은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이를 제 2의 농업혁명이라 부른다. 이제 기계화 이전 전통 농업사회의 기본틀이 마련된 셈이었다. 예전에는 쓸모없던 땅에 불과했던 황무지가 개간되고, 단위면적당 생산량도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각국은 다투어 대규모 수리사업을 벌이게 되니 농지는 더욱 확대되었다.
  농업기술의 진전에 따라 집단농경에 의존하던 농업경영 방식은 소가족 단위의 생산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점차 사회조직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새로운 물결을 재빨리 인식하고 개혁을 가속화시킬 수 있는 나라가 장차 통일제국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주산업인 농업생산의 발달로 경제 전반에 생기가 넘쳤다. 수공업, 상업등이 농업에서 분리, 독자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특히 제철업, 제염업의 발달이 돋보였다. 제철업은 각종 농구와 무기의 수요 폭증에 따라 눈부신 발전을 보였다.
  제나라의 수도 임치에서 발굴된 야금유적지는 넓이가 십여 만 평 방미터에 달했으며, 곳곳에서 발굴된 주조장에서는 철제 농기구가 다량으로 발굴되었다. 사람들은 이때 이미 산 위에서 적갈색 흙이 발견되면 그 아래에 철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으며, 당시 철이 출토된 산이 3,609개 소였다는 기록이 있다.
  각국의 산물이 활발히 교환되어 원격지 무역을 통해 재부를 축적한 대상인들이 출현했는데, 진나라의 여불위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화폐는 이미 춘추시대에 출현했으나, 전국시대에 널리 보급, 농기구 모양의 포전, 칼 모양의 도전이 널리 사용되었다.
  산업발달의 거대한 흐름은 또 다른 면에서 각국 국경의 철폐를 요구하고 있었다. 각국의 화폐, 도량형 등의 차이는 상업의 발달에 제약이 되고 있었으며, 국경을 넘어 한 줄기로 흐르는 강물에 대한 대규모 수리사업이 요청되고 있었다.
  각국의 왕들은 각기 부국강병에 힘써 스스로 통일의 주인공임을 자임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군사력의 우열로 판가름날 성질의 것이었다. 따라서 전국시대에는 군사상으로도 커다란 변화가 뒤따랐다.
  전국시대의 전쟁에 비하면, 춘추시대의 전쟁은 거의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춘추시대의 전쟁이란 청동제 칼과 창으로 무장한 귀족들이 4,5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싸우는 차전이었으며 귀족전이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이르면, 춘추말기 강남의 오, 월에서 시작된 평민병사의 보병전이 중심이 되었다. 보병부대는 산림과 소택지에도 자유로이 신출귀몰했으며, 쇠뇌라는 발사용구가 발명되면서 사정거리가 길어져 수레 위에서의 사격전은 이미 효력을 상실했다. 북방의 조나라에서는 유목민족의 기마전술을 채용하기도 했다.
  춘추시대의 전쟁은 한번의 싸움으로 승패가 판가름나고, 수도 바위에 치중하는 야전이었지만, 전국시대에는 주요 도시 및 변경에 이르기까지 성을 거점으로 끈질긴 공방전이 벌어졌다. 춘추시대의 초강대국 진, 초의 싸움에서는 전차 4천 승, 즉 많아도 4만 정도의 병력이 동원되었으나, 전국시대의 각국은 60만--100만의 대군이 동원되었다.
  이제 전쟁은 귀족들의 영예가 아니라, 국민개병제에 의해 평민 모두가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되었다. 전리품의 획득과 상대국의 복속에 목적을 두었던 전쟁은 토지의 획득과 적국 병력의 말살로 바뀌었다. 순수 무장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전쟁의 이론과 작전을 연구하는 병법이 발전, 유명한 손자병법이 출현하기도 했다.
  사력을 다한 각국의 경쟁 속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 백성들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위협속에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묵자의 반전론이 백성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받았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에는 묵가가 가장 인기있는 학파였다.

   

9 백가가 쟁명하다


  인류의 정신사를 더듬어볼 때, 인류의 자유로운 정신활동이 최초, 최고로 고양되었던 시기는 아마도 기원전 6--5세기, 각국이 고대제국으로 나아가는 대변혁기를 꼽아야 할 것이다. 소크라테스, 석가, 공자 등 동서양의 위대한 철인들은 모두 이시기에 활약했다.
  이 시기에 인류는 비로소 자연으로부터 독립, 자아를 확립해나갈 수 있었다. 생산력의 비약적 발달은 분업을 촉진, 생산에서 자유로워진 전문적 지식인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대가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우리가 산업화 이후 전통적 가치가 무너지고 혼란 속에서 새로운 가치관의 수립에 골몰했던 것처럼, 당시의 중국도 제22의 농업혁명 이래, 씨족 공동체적 질서에 기반한 주의 봉건제도와 예교문화가 이미 중심적 위치를 상실한 상태에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을 위해 치열한 탐색의 과정을 겪고 있었다. 거기에 저마다 통일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던 각국 군주의 경쟁은 사상의 발달을 더욱 촉진, 그 결과 중국 사상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대를 열었다.
  흔히 춘추전국 시대를 사상의 황금시대, 이름하여 '제자백가' 시대로 부르는데, '자'는 교사를 존대하여 부르는 명칭이고, '가'는 직접적으로는 저술가, 확대해서 사상의 한 흐름을 이룬 학파를 일컫는다.
  춘추 말기에 최초의 교사로 등장한 공자는 주대의 봉건적 질서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했던 반면, 전국 초기의 묵자는 반전론을 주장하면서 만인 평등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혁신적인 철학을 개창했다. 한편 허무주의자요 문명비판론자인 노자는 모든 인위적인 노력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그러므로 자연으로 돌아가 순리에 맡기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사상은 각기 뛰어난 제자들에게 이어져 후대에 계승, 중국사사의 원천이 되었으나, 실제로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지향하던 당시의 군주들에게 채택, 구현되었던 사상은 역기 법가의 사상이었다.
  유가의 시조인 공자의 이름은 공구, 그의 신분은 명확치 않으나 아마도 귀족 중에 다소 낮은 신분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주왕실의 전통일 강했던 노나라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제사 용기를 갖고 놀았다고 하는데, 일찍이 고아가 되어 독학으로 학문을 성취했다. 그는 세상의 어지러움은 전통의 예문화가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 그가 가장 존경해 마지 않았던 주공과 같은 성인 군주가 출현, 이 난세를 수습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는 실제로 어진 정치를 펼칠 군주를 찾아 14년간 전국을 주유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에서 후세를 교육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유교의 경전이 된 (오경)은, 말하자면 그가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든 교과서를 기초로 뒷날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제자는 모두 3천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학업을 익힌 후 관리로 등용되기를 바라는 평민들이 많은 수를 차지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인'과'예'. 인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예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은 이러한 덕목이 가장 순수하게 나타나는 첫 번째 장이다. 그는 이 가족애를 보다 큰 사회단위로 차츰 확산, 어진 정치를 펼 것을 주장했지만, 이러한 가족중심의 설명방식은 그의 사사의 가장 커다란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어떤 신분의 사람이든지 관계  없이 가족으로부터 최초의 인간관계를 경험하고 애착을 갖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가족으로부터 출발하는 공자의 구체적 접근방식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가까운 것에 치우치는 것을 당연시했으나 평등한 사랑은 아니었다. 아울러 보수적인 그의 사상은 신분제의 철폐로 나아가지 않았다.
  공자의 '인'은 전국 중기의 맹자에 의해, '예'는 전국 말기의 순자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맹자는 성선설에 기초하여 왕도정치의 구현을 강조했으며, 순자는 성악설에 의거, 환경과 후천적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니 법의 중요성도 크게 부각되었다. 한비자와 이사는 순자의 제자였다.
  묵자의 이름은 묵적. 그 역시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는 낮은 신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초기에 공장의 사상에 심취했던 그는 공장의 인이 차별적인 사랑임을 깨닫고, 무차별적인 사랑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은 '겸애설'로 일컬어지는데, 겸애란 다른 사람의 신체, 가족, 국가를 자기의 것과 독같이 여기는 것이다. 빈번한 전쟁은 각국 군주의 이기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므로 전쟁은 즉각 중지되어야 하며, 유가에서 미화되는 귀족들의 호화로운 장례도 중지되어야 한다. 그는 단순히 사상의 주장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사상의 실천에 앞장섰다. 직접 신성한 노동에 종사했으며, 근검절약의 생활을 실천했다. 그의 평등의식과 검증을 요구하는 논리적 사고방식은 귀족적 신분제, 운명론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나아갔다.
  도가의 시조는 노자다. 그의 이름은 이이, 초나라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가 실존인물이었다는 것조차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사상은 전국말기, 장자에 의해 정리되어 흔히 노장사상이라고 불려진다.
  도가의 중심사상은 '도'다. 도란 사물의 근본을 따져나갈 때 맨 마지막에 남는 것이다. 즉, 우주만물의 생성근원으로, 천지만물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천지만물이 벗어날 수 없는 위대한 힘이다. 그것은 유일하고 절대적이며 불변하는 것. 이 도를 제외하면, 우주적 존재들은 모두 상대적이고 허무해서, 서로 대립되는 것들의 그 대립조차 무의미한 것이다. 인가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어서 도라고 말해지는 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 모든 인위적이 노력은 도에서 멀어지게 할뿐이다. '무위자연'만이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며, 문명 이전의 원시사회로 복귀할 수 있다면 그때에 인간을 가장 행복할 것이다.
  매우 난해하면서도 또한 매우 매력적인 도가의 사상서인 <도덕경(노자)>과 (장자)는 그 풍부한 상상력과 낭만적인 언어 구사로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영어권에서는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번역되는 책의 하나이다.
  대개 유가는 지배층의 철학으로, 도가는 피지배층의 철학으로 발전했는데,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흔히 중국사람들은 '공인으로서의 유가, 개인으로서는 도가'라고 하듯이, 고도의 긴장 생활을 요구하는 유가와 이를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도가는 상호대립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 시기 현실적인 정치에서 가장 커다란 힘을 발휘했던 사상은 역시 법가이다. 당시의 군주들은 제가의 사상에 모두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으나. 실제로 구현한 것은 법가의 사상이었다. 이회, 상앙, 신불해 등의 관료들은 모두 법가의 선구자들이며, 진의 통일도 이사 등의 법가적 실천에 의해 이루어졌다.
법가의 사상을 완성한 사람은 전국 말기의 한비자이다. 그의 이름은 한비, 본래는 한자라고 불렀으나, 당나라의 명유인 한유와 구별하기 위해 한비자라고 부른다. 그는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현명한 군주는 고대사를 모범으로 삼아서는 안되며, 현실의 상황을 직시, 이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봉건제를 타파하고 관료제를 채택해야 하며, 규범으로서의 법과 법을 실천하는  수단으로서의 술을 강조했다. 그는 동학이었던 라이벌 이사에게 모함을 받아 살해당했다.
이외에도 일종의 논리학인 명가, 세계를 음양의 2원적 원리에 의해 설명하는 음양가, 우주만물이 '목화토금수'로 구성되었다고 주장, 이의 운행으로 모든 변화를 설명하는 오행가, 외교와 변설을 중시하는 종횡가 등도 출현했다.
  병가의 서적인 (손자병법P은 전국시대의 실전경험에서 출발한 고도의 전쟁이론서이자, 심원한 인생철학을 담은 명저로 오늘날까지 널리 애독되고 있다. 손빈은 친 구 방연의 모함으로 두 다리의 힘줄을 잘리는 형벌을 받은 후 저술에 몰두, 이 책을 남겼다.

   

10 후진국 진의 대약진


  고대 아시아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라면 아마도 기원전 3세기 말에 이루어진 중국의 통일일 것이다. 그것은 거대하고 장구한 중국적 세계의 커다란 틀거리가 처음으로 완성된, 첫 중화제국의 출현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통일전쟁을 일으킨 지 불과 10년 만에 이루어졌다. 진시황은 기원전 230년 한나라를 정복한 것을 시작으로, 조, 위, 초, 연을 차례로 멸하고,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의 대업을 완성했는데, 그때가 기원전 221년이었다.
  그러나 통일은 그렇게 쉽사리 이루어진 것도, 진시황 개인의 영웅적 역량에만 의존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4세기 중엽, 상앙의 개혁으로부터 준비되어온 것이니, 진시황이 최초로 통일을 이룬 시점으로부터 장장 130년 전의 일이었다.
  상앙은 위나라 사람으로 진의 효공 때 재상으로 등용되어 개혁에 착수했다. 개혁의 목적은 엄격한 법의 집행을 통해 부국강병을 적극 도모, 강력한 왕권을 출현시키는 데 있었다.
  이러한 개혁의 움직임은 이미 전국 초기, 중원의 선진 제국에서 시도되고 있었다. 뒷날 법가의 시조로 추앙받은 이회는 이미 위나라에서 개혁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중원 제국은 전통 귀족을 중심으로 한 구체제의 반발이 너무 거셌고, 각국이 서로 밀집, 각축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변혁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데, 그곳은 춘추시대까지 변방의 후진국에 불과했던 지나라였다.
  이 시기에 변방의 후진국이 선진국 주도의 판도를 깨도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중원의 선진국보다 상대적으로 귀족들의 힘이 약해 과감한 혁신책의 시행이 가능했으며, 주변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농지를 확대하는 등 경제력을 탄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앙의 개혁도 철제 농기구의 사용과 우경으로 새로운 국면에 돌입한 농업의 발전을 적극 도모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생산기술의 발달로 농경방식이 집단경영에서 소가족 단위의 경영으로 변화하자 씨족 공동체는 심각하게 붕괴되어갔다. 상앙은 소가족의 독립을 적극 추진하고, 수리공사를 일으키는 등 이를 지원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을 꾀했다. 부자형제간의 분가가 적극 추진되었고, 변방의 황무지는 비옥한 농토로 바뀌어갔다.
  진나라라 한들 귀족들의 반발이 없었을 리는 만무하다. 종래에 귀족들은 씨족 공동체가 지배하는 농촌에서 농민들을 지배하고 국가의 관직을 독점, 세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가족 생산방식이 확대되면서 씨족 공동체는 점차 해체되어갔고, 독립된 농가는 이제 귀족이 아니라 왕권에 의해 직접 통제되어갔다.
  상앙은 귀족들의 각종 특권을 폐지했으며, 평민이라 할지라도 전투에서 뛰어난 공적을 세운 이에게는 관작과 토지를 주었다. 작은 취락을 통합하고 현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권력의 중앙집중을 강화하고, 연좌제를 실시, 농민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를 강화했다.
  이제 왕은 호적을 작성하고 군현을 직접 지배했으며, 광범하게 성장한 자영농민층으로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재정의 수요를 충당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병력을 충원, 강력한 군대를 구성할 수 있었다.
  물론 상앙의 개혁은 오로지 효공의 절대적인 지지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효공이 죽자 상앙은 귀족들에의해 '거열의 형'에 처해져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거열의 형이란, 머리와 사지를 각각 수레에 매단 후 말을 달리게 하여 신체를 찢는 형벌이었다. 이 형벌은 상앙이 창안한 형벌이라고 한다.
  상앙은 죽었으나, 그의 법가정신은 후대의 왕들에게 계승되어 착실한 성과를 거두었고, 진의 국력은 눈부시게 성장, 전국 7웅 중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기원전 4세기 말, 혜문왕 때에는 역시 위나라 출신의 재상 자의가 교묘한 외교술로 동방 6국의 연합세력을 분쇄했는데, 이는 합종책에 대한 여횡책의 승리로 일컬어진다. 합종책의 대가는 소진이다. 장의와 소진은 함께 귀곡자에게 외교술을 배웠던 역사상의 라이벌이었다. 한치의 혀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이들의 외교술은 전국시대를 풍미했다.
  학업을 마친 장의가 제후들에게 유세를 다니고 있던 어느 날, 귀족에게 도둑의 혐의를 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끝까지 주장, 수백 대의 곤장을 맞고 풀려난 일이 있었다.
  그의 아내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아아, 당신이 독서와 유세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치욕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의가 혀를 내밀면서 물었다.
  (내 혀가 온전한가, 어떤가?)
  (혀라고요? 있는데요!)
  장의가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그러면 되었네!)
  진의 통일은 상앙 때부터 이루어진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장의로 대표되는 뛰어난 외교정책, 범수의 유명한 원교 근공책 등 뛰어난 군사전술이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가까운 나라를 먼저 공격하되, 먼나라와는 친교를 맺으니, 각국은 고립된 속에서 하나씩 하나씩 각개격파되었다. 각국의 성벽은 허물어지고, 중국적 세계는 최초로 하나의 국가 틀 속에서 다스려지게 되었다.
  전국 말기, 진나라를 방문했던 순자는 진나라의 풍부한 자원과 정연한 질서에 감복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나라가 승리를 얻어온 것은 요행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11 진시황,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이륙할 때, 가장 마지막까지 육안으로 확인되는 인류의 건조물은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사람들에게 중국을 상징하는 문화물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슴없이 만리장성을 꼽을 것이다.
  오늘날 북경 교외의 팔달령으로 오르는 장성은 관광의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곳 장성의 입구에는 (장성에 올라보지 못한 사람을 어찌 사나이라 하리)라고 씌어진 모택동의 글귀가 걸려 있다. 이곳에서 성에 이르는 계단을 약 40분 오르면, 해발 1,015m의 정상에 다다른다. 그 정상에서 발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준령의 물결을 바라본 사람들은 그 장려함을 잊지 못한다고 하는데, 현재의 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에 축조된 것이다. 본래 장성은 토성이었으며,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소 위치가 변하기도 하고 보수, 확장이 거듭 되었으니, 그 총연장을 합치면, 아마도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것이다.
  본래 만리 장성은 진시황 때 이 무렵 중국 북방을 위협하던 흉노족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다. 흉노는 아시아 최초로 기마술을 터득한 유목민족으로, 놀라운 기동력으로써 중국의 북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장성은 서쪽의 감숙 성 임조에서 시작, 황하 북쪽을 휘돌고, 음산을 따라 조나라와 연나라 때 이미 축조되었던 성벽을 연결, 동쪽으로 요령성 양평에 이르는 것으로 현재의 것보다 훨씬 북방에 이어져 있었다. 비록 기존에 있던 성벽을 연결한 부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참으로 엄청난 대역사였다. 성벽은 단순히 높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넓이도 대단해서 성벽 위로 5필 정도의 말이나, 10열의 병사가 동시에 보행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만리장성을 중국통일의 상징물로, 또 진시황이라는 전제군주의 위대한 권력의 화신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찌됐든 만리장성의 완성으로 진시황의 중국통일의 과업은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다. 만리장성은 중국적 세계를 북방의 유목민족과 구별하는 북방한계선이 되었고, 만리장성 이남으로 표현되는 중국의 영역은 오늘날까지도 큰 변화가 없다.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중국의 명칭이 진에서 유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진시황-그의 이름은 정, 기원전 259년 장양왕 자초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나이는 불과 12살, 정치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머니 태후와 여불위에게 맡겨졌다.
  여불위는 대상인 출신으로 일찍이 정치적 야망을 품고 조나라에 인질로 있던 자초에 접근, 곤궁한 처지에 있던 그의 후원자가 되었으며, 마침내 공작을 통해 그를 즉위시켰다. 그는 자초가 자신의 애첩에게 마음을 빼앗기자 그녀마저도 자초에게 내주었는데, 그녀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한다. 그 아이가 바로 진왕 정. 그렇다면 여불위는 진시황의 실부가 되는 셈이다. 그가 학자나 변론가 3천 명을 빈객으로 우대하고, (여씨춘추)라는 일종의 대백과전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하니 그의 재력과 권세는 가히 천하를 호령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왕 정은 그렇게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기원전 238년 성인 의식을 치르고 친정에 들어가자, 냉철하고 과단성있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상인 출신이었던 여불위의 중상책은 다시 억제되고, 상앙 이래의 전통적 개혁정책이 강행되었다. 낙양에 연금되었던 여불위는 마침내 전도를 비관하여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재상으로 등용된 이사는 강력한 법치로써 통일을 추진하였다. 진시황은 하루에 30kg의 서류를 처리하지 않고서는 결코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고한다.
  39살의 나이에 천하에 군림하는 유일한 왕이 된 그는 자신의 명칭이 종래 6국 군주와는 차별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왕'이 아니라 '황제'라고 불리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으니, 바로 시황제이다. 황은 빛나고 빛난다는 의미의 형용사이고, 제란 자연계와 인간계를 지배하는 최고신을 의미한다. 이제 군주는 '하늘의 아들', 혹은'천명을 받은 자'정도가 아니라, '절대신' 그 자체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가히 전제군주의 출현에 걸맞은 칭호라 할 것이다.
  전제군주 시황제의 명령은 군현제를 통해 지방의 말단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황제라는 칭호가 허황한 이름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간접통치 방식인 봉건제는 폐지되고, 군현제가 전국에 걸쳐 시행되었다. 전국은 36개의 군으로 나뉘고, 군 밑엔 현, 향, 정, 리를 두었다. 지방의 행정 책임자는 독자적 세력을 가진 지방의 토착세력이 아니라, 중앙에서 황제의 대행자로 파견되어 황제의 신임에 절대 의존하는 충성스러운 관료로 대체 되었다. 이제 황제는 백성들을 직접 지배하게 되었으며, 최초로 중국 전역은 중앙집권적인 하나의 통치체제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수도 함양으로부터 지방 각지로 뻗어나가는 방사선의 도로망이 정비, 황제의 명령이 전파되었고, 반란군이 발생되었을 때는 신속한 지압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도로건설의 과정에서 반란군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성벽이나 진지 등에 제거되었다. 전국의 토착부호 12만 호가 강제로 수도에 이주당했으며, 민간 소유의 무기들은 모두 몰수되었다. 진시황은 전국을 5차례에 걸쳐 순행하고, 태산 등 명산에 올라 거대한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과시했다.
  통일국가 속에서 문자, 도량형, 화폐등도 통일되어 사회발전에 기여했다. 그런데 진시황을 폭군적 이미지로 굳히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분서갱유로 일컬어지는 사상통일책이었다. 강력한 무력과 엄격한 법으로 통일은 일단 성취되었으나, 이미 춘추 이래 발달한 각 지역의 독자적 문물과 창의 적인 생각, 비판적 언론이 문제가 되었다. 진시황은 제국의 장기적인 지배를 위해 사람들의 생각까지도 통일하기를 바랬다.
  민간인들에게는 당시의 지배이념인 법가 사상서와 실용서적들을 제외한 어떠한 책의 소지도 금지되었으며, 관리가 아닌 사람의 자유로운 학술토론도 금지되었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서적들이 금서로 취급되어 관에 수거되고 잿더미로 화했다. 옛 서적에 대해 논의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고, 옛것을 찬미하고 진을 비방하는 자는 일족을 멸한다는 법령이 반포되었다. 이듬해에는 이에 비판적인 유생 460여 명이 생매장당하는, 이른바 갱유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말렸던 그의 장자 부소도 멀리 변방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은 독재적 국가권력에 의해 사상과 학문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최초의 선례로, 세계적 언론탄압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12 여산릉 병마용 허수아비의 노래


  현대인의 과학지식과 지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고대의 상징물 -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진시황릉을 호위하는 병망용 갱 - 들을 대할 때, 우리는 gms 히 불가사의라는 표현을 쓴다. 그 거대한 위용, 그것을 가능하게 한 고대인들의 예지, 무엇보다도 그 위대한 건조물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음에야 달리 어떤 표현을 쓸 수 있겠는가?
  1974년 5월, 여산 북쪽의 옥수수밭에서 우물 공사를 하던 중국 농민들에 의해 '진시황 병마용 갱'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당시의 군단을 상징하는 3개의 땅굴에는 흙으로 구운 등신대의 7천여 병마용들이 마치 사열 직전의 군대처럼 엄숙한 대열을 이룬채 서쪽을 향하고 있었다.
  평균 1.8m, 등신대의 도용들은 흙으로 빚은 뒤 한번 가마에 굽고, 표면에 투명한 아교를 칠한 후 광물성 자연연료로 채색되었는데, 그 사실적 표현기법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도용들은 갑옷의 복장, 전차의 장식만으로도 그 병사의 계급을 알 수 있을 만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으며, 당시 진나라 군대를 구성했던 지역민의 신체적 특색이며, 개개 병사의 표정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들은 마치 살아 있는 듯이 보였으며,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무기는 모두 실물이었다. 그 도용들이 자그마치 7천. 우리는 갱속의 병마용들이 함성을 지르며, 곧 군단의 나팔소리에 맞춰 행진이라도 할 것 같은 전율에 빠진다. 갱 속의 전차가 바퀴 소리도 요란하게 굴러가고, 수많은 군마용들의 울음소리가 이내 들릴 것만 같다.
  이들 병마용들이 향하고 있는 서쪽 1,500m 지점에는 진시황릉, 즉 여산릉이 있다. 바로 이들은 진시황을 호위하고 있는 것이다.
  여산릉은 지금도 끝없는 보리밭 사이로 우뚝 솟아 있다. 마치 자연적 구릉같이. 현재 능의 높이는 45m, 둘레는 약 2천m. 본래의 높이는 이보다 반 정도  더 높았다고 한다.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의 관은 지하수 층을 세 번이나 통과하도록 깊이 판 다음, 동판을 깔고 그 위에 안치되었다. 능 안에는 지상의 궁전과 누각이, 묘실 위에는 일월성신의 천계가, 아래에는 중국의 산하가 재현되었는데, 무덤의 비밀이 밝혀질 것을 우려해서 마지막 기술공들의 출로를 폐쇄시켰다고 하며, 만일 무덤에 접근하는 자가 있을 때, 그들을 Tm러뜨리기 위한 자동발사 장치까지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여산릉은 항우가 함양을 점령했을 때 파괴되었다. 이 때 항우는 30만명을 동원하여 30일 동안 능 안의 보물들을 날랐음에도 다 나르지 못했다고 하니 그 호화로움을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무덤이 이 정도라면, 그의 생전의 생활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진시황은 다른 나라를  멸망시킬 때마다 그 나라의 궁전을 그림으로 그리게 한 다음, 수도함양에 재현하게 했기 때문에, 위수에 비친 궁전들의 그림자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는 위수 남안에도 대규모 궁궐 조성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그 일부가 유명한 아방궁이다.
  아방궁은 동서 700m의 거대한 궁전으로 전상에 1만 명이 앉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역시 아방궁도 항우군에 의해 소실되었는데, 그때 궁실을 태운 불은 3개월간 꺼질 줄 몰랐다고 한다.
  진시황은 우주의 주재자인 상제가 하늘에서 군림하듯이, 천하 유일독존의 황제인 자신의 생활공간은 상제의 천상공간을 그대로 지상에 재현하는 위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권력의 과시는 진의 몰락을 재촉했다. 백성들은 오랜 전란이 그치고 통일의 그날이 오면, 기쁜 노래를 부르며 농사에 전념하는  평화로운 시대가 오리라고 믿었을 터이나, 그러한 날은 오지 않았다. 여산릉, 병마용 갱, 아방궁, 그리고 만리장성과 전국 도로의 건설, 게다가 변방의 수비에 동원되어야 했다. 그 엄청난 노역과 세금, 혹독한 법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엉망이었다. 최근 발굴된 진의 법률에 의하면, 범죄자는 죄가 가벼울 경우에는 재물로써 속죄했지만, 무거울 경우는 국가의 노예, 다리의 절단, 효수 등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감옥은 넘쳐났고, 아방궁의 건설에만 70여만 명의 죄수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학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이들 각종 노역이나 병역에 차출된 성인 남자의 수는 약 3백만. 당시 인구를 약2천만명에 대략 400만 호로 잡는 다면, 1호당 1명은 동원되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진시황에게도 죽음의 그늘은 찾아왔고, 그럴수록 그는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애쓰는 등 생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보였다. 죽음을 생각하기도 싫었던 그는 후계자도 명확히 지목해 놓지 않았다. 동방순행에 올랐던 그는 마침내 기원전 210년 5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죽음에 임박한 그는 변방에 나가 있던 장자 부소에게 위를 물리고자 했으나, 환관 조고의 농간으로 어리석은 호해가 허수아비 황위에 오르게 되었다.
  진시황이 죽은 이듬해 마침내 백성들의 원성은 폭발하기 시작했는데, 그대표적인 움직임이 최초의 농민란으로 불리는 진승, 오광의 난이다.
  진승과 오광은 옛 초나라의 땅이었던 하남성 남부의 가난한 농민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209년 7월, 북쪽 변방 수비의 명을 받고 어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여름 장마가 닥쳐 길이 막히니, 도저히 기일 안에 당도할 수 없는 지경에 달하게 되었다. 진의 엄한 법률은 어떠한 사정도 용납하지 않았고, 기일이 늦어지면 참수형에 처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뜻을 모은 두 사람이 농민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 기한에 늦어버렸다. 어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형, 비록 사형을 면한다 하더라도, 변경의 수비를 맡는 다면 두 번 다시 고향 당을 밟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왕후 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겠는가? 우리도 똑같은 인간이 아닌가?)
  농민들은 모두 함성을 지르며 이들을 따랐다. 진승의 예견대로 봉기의 소식에 접한 전국 각지의 백성들은 항쟁의 대열에 나섰다. 이미 백성들은 깃발만 오르면 반란에 동참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셈이다.
  진승은 초나라의 수도였던 진을 함락,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장초라 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실전경험이 없는 농민들의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했고, 농민 주력군이 진의 장군 장감에게 패한 후에는 내부동요까지 일어나 진승, 오광이 살해되기에 이르렀다. 사상 최초의 농민정권은 불과 6개월 만에 몰락했고, 봉기의 열매는 농민들의 손에 쥐어지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진나라는 진승, 오광의 난 이후 전국에 빗발치는 반란의 물결에 휩싸이고, 기원전 206년 그 최후를 맞이했다. 통일을 이룬지 불과 15년 만의 일이었다.

   

13 항우와 유방의 대결


  진승, 오광의 농민봉기를 기폭제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w3ls 타도의 물결은 마침내 항우와 유방의 숨막히는 각축전으로 집약되었다. 이들의 대조적인 성격과 천하를 놓고 벌어진 팽팽한 접전의 드라마를 중국인들이 놓칠 리는 만무한 것이어서, 일찍이 삼바천은 항우를 본기에 넣어 특별히 지면을 할애했다. 항우가 고향을 눈앞에 두고 비장한 심정으로 최후를 맞는 장면은 명문장으로 꼽히는(사기) 중에서도 최고의 문장으로 꼽히고 있다.
  항우는 초나라에서 대대로 장군직을 지낸 명문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숙부 황량의 손에 길러졌는데, 소년 시절부터 무예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그는 숙부 항량과 함께 강동(양자강 하류)에서 거병, 양치기를 하던 초의 왕족 심을 회왕으로 추대하면서 반군의 중심세력으로 떠올랐다.
  유방도 역시 초나라 사람이었지만, 그는 항우와는 달리 이름없는 농민 출신이었다. 젊은 시절, 농사에 듯을 잃은 그는 각지를 유랑하다가, 고향에 돌아와서는 유력 가문인 여공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녀가 뒤에 권력을 독단했던 유명한 여후이다. 고향의 말단관직에 오른 유방은 죄수들을 인솔, 여산릉 축조에 동원되었는데, 도망하는 이가 속출, 화를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는 아예 이들을 풀어주고 스스로 유격대장이 됨으로써 반군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항우에 비하면 그의 출발은 참으로 미미한 것이었다.
  유방은 항량의 진영에 합류했고, 이들은 함께 진의 수도 함양을 공략하는 대출정에 나서게 되었다.
  초 회왕은 여러 장군을 독려하면서 말했다.
  (최초로 함곡관에 들어가 관중을 평정하는 자를 그곳의 왕으로 봉하리라)
  항우는 북로, 유방은 남로를 택해 각기 출진했는데 항우는 장감이 이끄는 진의 주력군 20만을 거록의 전투에서 궤멸시켜 전하에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막상 함양에 먼저 당도한 자는 유방이었다.
  유방은 진의 허수아비 3대 왕 영의 항복을 받아낸 후에도, 모든 재물에 일절 손을 대지 않았으며, 군기를 엄정하게 하여 민폐가 없게 하고, 단 3조의 법, 이른바 약법 3장만을 남긴 채 일체의 법을 폐지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뒤늦게 관중에 다다른 항우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실제로 홍문에 진을 친 항우의 군대는 40만, 유방의 군대는 10만에 불과했다. 만일 양군이 전투를 벌인다면, 유방의 군대가 패주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냉철한 유방은 현실을 직시하고 수치를 무릅쓰고 항우를 찾아 홍문에 나아갔다.
  항우의 모신인 범증은 유방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 자객에게 명해 검무를 추게하면서 항우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유방의 목숨을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장량이 유방의 호위 무장인 번쾌를 불러들였다.
  번개같이 날아든 번쾌는 됫박만한 술잔으로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 피가 둑둑 떨어지는 돼지를 칼로 슥 베어서는 모조리 먹어 치운 다음, 유방에게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그를 죽이고자 하는 항우의 처사가 얼마나 용렬한 것인지 항우를 가차없이 질책했다. 가슴이 뜨거운 항우가 멈칫하고 있는 사이에, 유방은 필사적으로 탈출, 위기를 모면했다. 범증이 발을 동동 굴렀으나 이미 허사였다. 이것이 유명한 홍문지회.
  함양을 장악하게 된 항우의 처사는 유방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는 이미 항복한 진왕 영을 죽이고 함양을 남김없이 파괴했다. 궁궐을 불사르고, 여산릉을 파헤쳐 재화를 획득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부귀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다면, 모처럼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
  이러한 항우의 감상적인 처사를 빗대어 한생은 (마치 원숭이에게 관을 씌운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관중 지역은 천연의 요새일 뿐만 아니라, 비옥한 평야지대로 일찍이 서주와 진이 일어났던 거점이자 경제적 기반이었다. 뒷날, 유방의 모사 소하는 한번도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유방에게 최후의 승리를 안겨주는 커다란 역할을 했는데, 그것은 관중의 경영에 주력, 든든한 후방의 보급원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항우는 초나라의 후예로서 초를 멸망시킨 진에게 복수를 펼치고 싶은 마음이 강했으며, 역사를 되돌려 진 통일 이전의 사회로 복귀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는 공신들에게 전국을 분봉했는데, 시대를 역행하는 그의 농공행상적인 영토분배는 매우 무원칙한 것이어서 커다란 불만을 샀다. 제후왕들의 불만은 각지의 반란으로 표출, 그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특히 척박한 땅을 분봉받은 유방의 불만은 대단한 것이었고, 때마침 항우가 초의 의제를 살해하자 명분을 얻은 유방은 행동을 개시했다.
  사실, 항우와 유방, 즉 초와 한 사이의 3년이 넘는 대결에서 항우군의 무공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보급전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고, 후방기지의 건설에 실패한 항우는 점차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힘만을 믿고 주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많은 인재를 잃었다. 유방의 명장 한신도 항우의 휘하였는데, 그를 얻은 유방은 위기를 극복, 항우군에 마지막 쐐기를 박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해하(안휘성 화현)에서 겹겹이 포위된 항우의 귓가에 사방으로부터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것이 사면초가라는 고사의 유래이다.
  (어느새 고향 사람들까지 한나라의 군대가 되었던 말인가?
  비감한 심정에 빠진 항우는 한밤중에 일어나 주연을 베풀고, 애마 추와 연인 우미인을 슬퍼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힘은 산을 뽑고, 기세는 천하를 덮었거만
  때가 불리했도다, 추도 다리지 않는구나
  추가 달리지 않으니, 내 어찌하랴
  우여, 우여 너를 어찌한단 말인가

  4주만에 포위망을 극적으로 탈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향 마을 앞에 선 그는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자신의 목은 한군에 투항한 고향 친구 여마동에게 주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기원전 202년 최후의 승자 유방이 마침내 제위에 올라 한왕조를 세우니, 그가 바로 한 고조이다. 농민 출신이었던 유방은 항우보다 뛰어난 개인은 아니었을지 모르나,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고 이재를 잘 활용했으며,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언제나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마침내 황제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한제국은 기원을 전후한 약 400년간의 장구한 통치 속에서 진시황이 꿈꾸었던 만년 제국의 꿈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는 로마제국이 번영하고 있었다.

   

14 살아 있는 듯한 한나라의 여인


  1972년의 어느 날,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은 세계인들의 눈이 뎅그렇게 커졌다. 도대체 과학 추리소설에서나 읽을 수 있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 바로 눈앞의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2천년 전에 죽어 관 속에 묻혔던 여인의 시신이 전혀 부패하지 않은 채로 있었으며, 그녀의 팔을 손가락으로 누르자, 잠시 움푹해졌던 그녀의 피부는 천천히 원상태를 회복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듯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녀의 체내의 기관들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보존되어 있었으며 지문도 채취할 수 있었다. 자세히 분석해본 결과, 그녀의 나이는 50세 정도. 154.4CM의 키에 비만형이었고, 머리는 숱이 많지 않았으나 흰머리는 없었다. 그녀는 가발을 쓰고 있었다. 혈액형이 A형인 그녀는 병약한 체질이어서 선천적 담낭 기형에다 결핵을 앓은 적이 있었으며, 동맥경화에다 류머티즘가지 앓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 담석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참외를 먹었는데, 두세 시간 후 심장에 발작을 일으켜 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식도에서 위장까지 138개의 참외씨가 발견되었다.
  이 여인의 무덤을 옛 초나라 땅이었던 장사시 동쪽 교외에서 발굴되었다. 사람들은 그녀 일가의 무덤을 10세기 군소 정권의 하나였던 초나라 마은의 무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왕의 무덤, 즉 마왕퇴로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1972년 근처에 병원 신축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공구 하나가 무덤을 건드리게 되자 갑자기 무덤으로부터 청백색의 가스가 높이 분출되었다, 완전히 밀폐됨으로써 앞으로도 영원히 간직될 수 있었던 무덤은 이제 파괴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마치 2천년 전에 당 속에 묻어놓았던 완벽한 타임캡슐을 캐낸 것처럼 전한 시대 유력자의 화려한 생활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게 되었지만.
  무덤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외부세계와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묘실을 땅을 파서 조성된 것이 아니라, 판축공법으로 땅 위 2배 정도의 높이로 쌓아올려 굳힌다음, 그 위로부터 파내려 가는 방법으로 조성되었다. 그녀의 시신은 20겹의 옷으로 싸여졌고, 4겹의 목관, 다시 곽에 넣어졌다. 모든 것에 당대 최고의 장인의 솜씨가 발휘되었다. 양질의 목재가 엄선되어 휘거나 갈라지지 않았으며, 이음새는 못의 사용 없이 요철로써 처리되었는데 조금치의 틈새도 없었다. 관곽은 옻칠로써 마감되었고, 곽은 총중량 5톤 가량 되는 두터운 목탄층으로 둘러싸인 후, 다시 백토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공기나 습기, 지하수로부터 시신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사체뿐만 아니라, 비단, 칠기, 도기 등과 함께 곡물과 식품까지도 온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는데, 특히 귀중한 것은 관 위에 덮여 있던 비단,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위에 그려진 그림(백화)이다. 이 그림은 중국 회화사에서 크게 주목되는 작품으로, 약 2N의 길이를 3분해서 천상과 인간계, 지하의 세계를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중단에 그려진 노부인이 바로 이 무덤의 주인공이다.
  마왕퇴의 무덤은 그녀와 그녀의 남편 이창, 그리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녀의 아들의 무덤이었다. 이창은 전한의 제후국이었던 장사국의 재상이었으며, 기원전 186년에 죽었다. 무덤의 구조로 볼 때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창의 무덤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고, 그 아들의 무덤은 부인처럼 완정히 보존되지는 못했으나 역시 귀중한 유물을 남겼다.
  4편의 백화와 함께 비단에 씌어진 책들, 즉 백서가 발굴되었던 것이다. 백화에는 마차, 배, 가옥 등 당시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잇는 그림도 있고, 합기도의 여러 동작들도 그려져 있었다. 백서는 (전국책), (노자), (춘추) 등의 희귀본과 (상마경), (내공) 등의 유실된 책들이다. 중국 최고의 지도도 발굴되었다. 악기와 무기도 부장되었으니,  30세쯤에 요절한 무덤의 주인공은  아마도 문무를 겸비한 호걸이었던 것 같은데, 그의 신분이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한나라는 관혼상제가 사치의 극을 달렸던 시대였다. (한서)에는  태수의 현직에 있던 원섭이라는 자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향전이 1천만 전 이상 부조되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산업을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산업을 정했다' 함은 요즘말로 치면 기업을 차렸다는 정도의 의미였을 것이다. 한나라에도 생산력의 발전은 꾸준히 거듭되었으나, 그 결실은 소수층에 독점되었다.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지배층이 한 대에 등장하고 있었다.
  한 대의 무덤을 논하면서 중산왕 유승 부부의 무덤을 빼놓을 수는 없다. 1968년 훈련중이던 인민해방군의 한 병사가 발굴했는데, 암산의 낭떠러지에 파들어간 횡혈식 묘이다. 유승은 경제의 아들이자 무제의 의붓형이었다. (사기)에 의하면, 그는 술을 즐기고 색을 좋아해 아들이 12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의 방종함은 제후왕들을 죄어오는 무제의 의구심을 피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면도 있었을 것이다.
  유승의 무덤은 마왕퇴와는 달리 금, 은, 동, 철기 등 다양한 금속제 유물이 부장되었는데, 특히 우리의 시선을 그는 것은 이른바 '금루옥의'의 완벽한 발굴이다. 이 옥으로 된 수의는 2천 조각 남짓한 네모난 옥편의 네 귀퉁이에 구멍을 내고 이를 황금실로 엮어 만든 것이다. 이 옷 한 벌을 공인 1사람이 만든다면 10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또 그의 옥은 멀리 사막을 넘어 신강성에서 가져온, 그 유명한 '곤륜의 옥'이었다.
  중국인들은 옥을 영적인 힘이 있는 고귀함의 상징으로 생각해왔다. 천자의 말을 옥음이라 하고, 천자의 인장을 옥쇄라고 한다. 죽은 사람의 입에 옥을 물리면 영적인 세계에 부활하고 시신이 부패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15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지고


  우리가 흔히 진한제국으로 부르는 것처럼, 한나라는 진나라의 각종 제도를 거의 그대로 계승했던 대표적 고대제국이었다. 그러나 아직 정권이 안정되지 않았던 초기에는 폭압적인 진의 지배와의 차별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한 고조는 가혹한 법칙을 완화하고
안정된 농업생산을 장려하는 조처들을 발표하여 백성들에게 휴식을 주는 정권임을 강조했다.
  특히, 아직 굳건한 힘을 지니고 있는 건국공신들의 반란을 없애기 위해 이른바 군국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군국제란 군현제와 봉건제가 절충된 것으로,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한지역과 서부 군사 요충지는 황제 직속의 군현으로 두고, 나머지 땅은 대표적 공신세력인 한신 등 7인의 왕과 소하 등 제후에게 분봉, 나누어 다스리게 한 것이다. 거기에는 진나라가 군현제를 통해 너무나 급격하게 중앙집권을 추진했기 때문에 단명에 그쳤다는 고조의 판단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왕조의 지배력이 안정권에 접어들자, 이성의 제후왕들은 모반을 꾀했다는 누명으로 하나씩 하나씩 제거되기 시작했다. 천하의 명장인 초왕 한신, 양왕 팽월, 회남왕 경포,,,
  감쪽같이 고조의 덫에 걸려든 한신은 한탄하여 말하기를,
  (세상사람들의 말이 맞았구나,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날랜 사냥개는 삶아 없어지고, 높이 나는 새가 떨어지면 좋은 활은 구석에 처박히게 되며, 적국이 패하면 지모있는 신하는 필요없게 된다더니,,,)
  그러나 그도 비참하게 예정된 죽음을 면할 길이 없었다. 기원전 195년 고조가 그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할 때에는 이미 거의 모든 제후왕들은 유씨 일족으로 대체되었다. 유언처럼(우씨가 아닌 자는 왕이 될 수 없다)라는 불문율이 남겨졌다.
  그런데 동성의 제후왕들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혈연관계도 소원해지고, 점차 자신의 영내에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 중앙권력에 위협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군은 15개에 불과하고, 제후국은 30여 개에 달했으면, 큰 제후국은 군 5,6개를 합친 것 이상으로 거대했다.
  마침내 무제의 아버지인 경제 때에 이르러, 제후국에 대한 압력이 시작되었다. 경제는 박사인 조조의 의견을 채용, 제후왕의 과실을 헤아려 영지를 삭감하는 등, 제후국의 축소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오,초 등 7개 제후국들이 연합하여 황실에 반기를 들었다. 이것이 이른바 오초 7국의 난. 기원전 154년의 일이었다.
  오왕 유비는 황실의 원로였지만, 40년간 오나라를 다스리면서 오나라에 대한 강한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중앙정부에서 오나라 국부의 원천인 소금과 구리의 산지를 헌납하나는 명령이 떨어졌다. 거기에 경제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겹쳐 난을 주도하게 되었다. 경제가 태자 시절, 중앙에 입조하러 갔던 그의 아들이 경제와 함께 바둑을 두던 중, 경제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절명했던 것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우리 제후왕들은 점점 가난해져서 마침내 멸망하고 말 것이다.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일어나서 살길을 도모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유비의 호소에 응해 초, 조 등 중국 동남부의 6국이 가세, 간신 조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흉노 등 외세와의 동맹도 꾀하고 있었으며, 초반의 전세를 장악, 한나라는 건국 50년만에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 7국의 감정을 진정시키기 위해 조조가 참수되었으나 반군의 목적이 그것이었을 리 없었다.
  그런데 경제의 친동생 양왕이 반란군의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성공하자, 반격의 실마리가 마련되었다. 진압군 총사령관이 주아보는 성문을 굳게 닫고 반란군의 어떠한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메아리 업는 전쟁에 지치고, 보급로가 차단된 반란군을 점점 굶주림에 쓰러져갔다. 마침내 오왕은 살해되고, 다른 제후왕들도 모두 살해되니 반란은 불과 3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오초 7국의 난을 끝으로, 한황실의 중앙권력에 도전할 지방세력은 없었다. 이제 제후국의 정치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에 의해 운영되었고, 제후왕은 국정에서 분리되기 시작했다.
  한무제는 추은령을 실시하여 제후권의 발호에 마지막 쐐기를 박고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권력을 완성했다. 추은령이란 제후왕의 사망시, 적장자 이외의 아들에게도 토지를 나누어 주고, 이를 열후로 승격시켜 중앙정부의 관할하에 있는 군에 속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제후왕의 영지는 더욱 세분, 축소되게 마련이었다.
  한무제는 기원전 141년 16세의 나이로 즉위, 기원전 87년 71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장장 54년간 중국을 통치하면서 고대제국의 가장 화려한 시기를 장식했다. 그것은 아마도 진시황이 꿈꾸었던 세계였을 것이다. 한무제는 진시황의 꿈을 현실정치에서 실현, 전제군주의 가장 대표적인 전형이 되었다.
  무제 때는 오늘날 중국의 지도와 거의 비슷한 판도가 형성되었다. 그는 외정에도 힘써 오랜 숙원이 흉노 정벌에 총력을 기울여 커다란 타격을 입혔으며, 베트남을 정복하고,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다. 조선의 사람들은 1년간이나 왕검성을 지키기 위해 굳세게 항쟁했으나 긑내 멸망, 한4군이 설치되었다. 우리 나라로서는 최선진국이었던 고조선이 멸망함으로써 커다란 역사적 손실을 입었다. 후발국가인 고구려 등이 다시 강성해지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16 유교가 제국의 이념으로


  중국문화라고 하면 제일 먼저 유교가 떠오른다. 유교는 한무제 때 국교로 채택된 이래, 역대왕조의 지배이념으로서 흔들림없는 지위를 누렸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국의 향촌 사회에도 깊숙이 뿌리를 내림으로써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진이 몰락하자 한 초기에는 다시 제자백가의 사상이 부흥했으며, 휴식의 정치에 힘입어 '무위자연'의 도가사상이 풍미했다. 진의 가혹한 법치, 그리고 오랜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무제 때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국가체제가 완성되자 이에 적합한 통일된 사상체계가 요청되었다. 마침내 무제는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경박사, 국립대학이 태학을 설치했으며, 유교적 덕목에 의해 관리를 등용하는 효렴제를 개설함으로써, 유교국가의 기초를 마련했다.
  기원전 136년 조정에 처음으로 설치된 오경박사는 오경 중에 1경씩을 전공했으며, 처음에 50명의 관선학생으로 출발한 태학의 졸업생은 후한 말에 이르면 3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효렴제에서 시작한 중국의 관리등용법은 유학자이자 정치인인 학자적 관료로서의 중국적 지신인을 배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며,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며,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공자는 일찍이 인간의 차별성을 전제로 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동중서는 이 도덕규범을 다음과 같이 치환했으니, 이것이 삼강이다.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며, 아버지는 아들의 근본이다. 남편은 부인의 근본이다.)
  동중서는 유가의 사상에서 인정하는 인간사회의 차별적인 질서가 하늘에 의해 경정된 것이라고 주장, 천하통일은 '하늘과 땅의 이치이며, 고금의 원리'이고, 군주는 '나라의 근본'으로 높이 추앙 받아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군주와 신하는 본과 말, 즉 줄기와 가지의 관계라는 것이다. 유가의 사상에 종교성을 부어하고, 여기에 음양오행적인 천인론을 가미함으로써 마침내 군주권을 합리화시키는 데 성공한 동중서의 유교는 무제에게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그렇다고 유교가 국교로 되면서 곧바로 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아니며, 무제가 반드시 유교로서만 통치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사기)나 (한서)의 흑리전에는 한무제 때의 법가적 관료에 의한, 이른바 '유혈 십리에 미치는' 주살이 거듭 기록되고 있다.
  얼핏 법가와 유교는 서로 상충하는 사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유교이념을 표방한 중국의 역대왕조들 중에서 어떤 왕조도 법가적 통치를 포기한 적은 없다. 오히려 이 두 사상은 상호보완적으로 왕조의 지배력을 공고히 함으로써 중국의 전제왕조를 2천년간 지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유교는 군주의 전제권력을 합리화시켜주었을 뿐만 아니라, '설득에 의한 자발적인 복종'을 실현, 권력행사의 절약까지를 가져다주었다.
  유교의 경전으로 사서오경이 있다. 사서란 (대학), (중용), (논어), (맹자)를, 오경이란 (역경(주역)), (서(상서)), (시), (예경), (춘추)를 일컫는다. 처음에는 오경이 중심이었으나, 송대에 신유학 즉 성리학이 발생하면서 사서가 경전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오경은 공자가 편찬하거나 저술했다고 전해지는데, (주역)은 고대의 64괘에 의한 점술서이며, (서경)은 노나라에 전해진 주공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다. (시경)은 은대 이래의 시 305편이 담겨져 있고, (예기)는 고대의 예에 관한 학설을 모아 기록한 것이다. (춘추)는 공자가 정리한 노나라의 편년체 역사서로, 간단한 연대기적 기록 속에 깊은 뜻이 함축, 이에 대한 해설서인 공양전, 곡량전, 좌씨전, 이른바 춘추 3전을 낳았다.
  사서 중 (대학)과 (중용)은 (예기)의 한 편에 불과했으나 점차 중요시되면서 이로부터 독립한 것으로, (대학)은 유교 교학의 강령들이 담겨져 있고, (중용)은 불교에 대항할 만한 유교경전 중에서는 가장 철학적인 책이다. (논어)는 공자의 언행을 기록, 공자가 강조되면서 점차 유교 최상의 경전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맹자)는 말 그대로 맹자에 대한 기록인데, 맹자는 당 중기 한유에 의해 공자의 계승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나라 이후 당대까지는 이른바 훈고학이 성행했다. 훈이란 경전에 서술된 말을 난해한 것은 쉽게, 옛날의 용어는 현대적으로 풀이 한 것이다. 즉, 언어를 연구하여 고전을 바르게 해석함으로써, 그 본래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훈고학의 발생에는 진시황의 분서사건도 한몫한 셈이다. 당태종의 명으로 공영달이 (오경정의)를 편찬, 여러 유파의 해석을 통일했는데, 과거제의 시행과 더불어 일종의 국정교과서로 채택, 유학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했다. 공영달은 공자의 32세 손이라고 했다.
  송나라 때에 이르러 신유학, 즉 성리학이 발생했다. 성리학은 노장사상과 불교의 형이상학적인 면을 흡수, 훈고학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다. 이와 기의 개념을 중심축으로 우주와 인간의 생성을 설명하고,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구체적 실천을 제시하고자 했다. 주자로 불리는 주희는 주돈이의 제자인 정호, 정이 형제의 사상을 계승, (사서집주를) 편찬함으로써 성리학을 완성했다. 그의 이름을 따서 성리학을 주자학, 혹은 정이 형제의 이름을 함께 따서 정주학이라고도 부른다.
  신유학, 유학의 새로운 흐름으로 주자학과 쌍벽을 이루는 것이 양명학이다. 양명학이라는  이름은 왕수인의 호양명에서 유래하며, 명대에 유행했다. 왕수인도 처음에는 성리학에 심취했으나, 성즉리설을 비판, 심즉리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우리의 마음속에 우주만물의 이치가 내재하고 있으며, 마음의 양면은 앎과 실천이다. 그는 앎과 함계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 지행합일을 주장했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주관적이고, 실천은 이에 기초한 도덕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성리학과 함께 관념주의에 빠질 위험은 있었다.
  고증학은 명말 청초에 일어나 청대에 성행했다. 창시자인 고염무, 황종희 등은 지나치게 관념적인 종래의 학풍을 비판, 과학적인 고증과 박학을 통한 실천으로 세상의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학문, 즉 실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 근대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지나치게 고증에 치중, 실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청의 한족 회유책에 이용당한 경향도 있다.

   

17 동서교역로의 좁은 문 비단길 개통


  비단길을 개통한 장건과 비슷한 인물을 굳이 서양사에서 찾는다면 콜럼버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첫 탐험가였으며, 그들이 개척한 새로운 교통로는 동서의 교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물론 장건은 고대, 콜럼버스는 근대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교는 어디까지나  순수 비교일 뿐, 그들이 미친 사회적 파급력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간격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장건은 본래 탐험가로서 서역탐험에 나섰던 것은 아니다. 그는 무제가 파견한 외교사절이었다. 무제는 중국의 오랜 숙원이요 당시의 가장 커다란 현안이었던 북방의 흉노족을 효과적으로 치기 위해 서쪽의 월지국과 군사동맹을 맺고자 했고, 장건이 그 사절단장으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진한대 중국 북방에서 가공할 위력을 떨쳤던 흉노족에 대해서는 불행해도 현재까지 명맥이 이어지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서양 고대의 몰락과정에서 등장하는 훈족도 바로 흉노의 일파라는 설이 있다. 그들은 당시의 최첨단 기술이었던 기마술을 스키타이로부터 도입, 아시아에서 가장 최초로 흥기한 유목민족이 되었다. 진시황도 이들에 대해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일부를 북방으로 내몰면서 만리장성의 대역사를 이루었고, 한고조는 이들과의 싸움에서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한나라에서는 이들의 대표인 선우에게 황족의 딸을 시집보내고 온갖 선물로 회유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전제권력을 확립한 무제 때에 이르러 국가의 명운을 건 흉노와의 대전쟁이 단행되었다. 흉노와의 전쟁은 약 20여년간 끈질기게 되풀이되었다. 한은 위청과 곽거병 등의 뛰어난 명장을 영웅으로 배출시키면서 흉노의 세력을 약화, 이들을 외몽고 지역으로 내쫓는 데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흉노의 위협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되풀이되는 대규모 살상전으로 한나라측의 손실도 대단한 것이었다. 인명피해는 말할 필요도 없고, 재정상의 타격도 매우 심각해서 무제기의 빛과 그림자를 한꺼번에 연출했다. 무제 때는 한이 국력을 가장 크게 떨쳤던 Eio이기도 하지마, 또한 쇠퇴의 씨앗을 배태한 시기이기도 하다 무제 추기에 관의 창고에는 곡식과 화폐가 넘쳐나서, 곡식이 썩어나가고 돈을 꿴 줄이 썩어 셈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으나, 말기에는 바닥난 재정 타개하기 위해 염철전매법 등 신경제정책이 수립되어야 했다.
  어느 날 무제는 흉노의 포로로부터 솔깃한 애기를 들었다. 흉노의 서쪽에 월지라는 나라가 있어 일찍이 흉노에 패한 바 있는데, 그왕은 흉노왕이 자신의 부친의 해골을 술잔으로 사용한다는 애기를 듣고서 단단히 복수를 벼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이들과 연합, 양쪽에서 흉노를 협공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훌륭한 묘안은 없을 것이었다. 이에 사신을  자정하고 나선 이가 바로 장건이었다.
  장건은 기원전 139년 100여 명의 일행을 이끌고 월지국을 향해 출발했다. 월지국이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닥칠 것인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당시까지 중국인들은 중국의 서쪽에는 사람의 얼굴을 한 괴물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서역이라 하여 막연히 중국의 서쪽 지역 모두를 지칭했는데, 그 서역이란 오늘날로 말하자면, 좁게는 타림분지 주변을, 넓게는 중앙아시아 전역, 나아가서 서아시아까지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인식은 중국의 서쪽에 중국을 외부세계로부터 차단하는 험준한 자연조건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지리적 고립이 중국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세계 문명 발생지를 볼 때 중국만이 유일하게 황하 문명 이래의 그 기본골격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장건일행이 월지를 향해 서쪽으로의 길을 떠났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흉노의 포로생활이었다. 월지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흉노의 땅을 통과해야만 했고, 그들이 국경을 밟는 순간 곧바로 흉노에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던 것이다. 장건은 그곳에서 10년이 넘는 억류생활을 해야했다. 그동안 흉노족의 부인을 얻고 자식까지 두었던 그는 사절의 사명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경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탈출, 대원국을 거쳐 마침내 월지국에 도달했다.
  그러나 월지국은 이동을 거듭, 남러시아의 소그디아나 지방에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이미 비옥한 지애에 안주하고 있었던 그들은 옛 원한을 되살려 흉노를 정벌하는 모험에 나서고자 하지 않았다. 교섭에 실패한 그는 타림분지 남쪽, 즉 천산남로로 귀국했는데, 또 다시 흉노에 억류되었다가 다시 탈출, 마침내 귀향에 성공했다. 기원전 126년, 실로 13년간에 걸친 대단한 집념이었다. 흉노 부인과 종자 감보만이 그를 다르고 있었다. 장건은 체격이 좋고 관대하며 신의가 두터워 흉노 등 외국 사람들에게도 호감을 받았다고 하며, 감보는 본디 유목민족으로 활을 잘 쏘아, 험난한 여행 도중 식량이 떨어졌을 때는사냥으로 생활을 자급하거나 위기를 모면하게 하여 장건의 귀향을 도왔다.
  비록 월지와의 동맹에는 실패했지만, 장건의 서역 견문은 무제를 비롯한 당신의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으며,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제 중국인들에게는 월지 외에 대원, 오손, 강거 등 중앙아시아 각국의 사정과 문물이 전해졌다. 인도(신독국)의 존재도 이때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무제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것에는 서역 제국의 신기한 물산도 있었지만, 명마에 대한 이야기였다. 장건은 말하기를 대원국은 천마의 후손으로 일컬어지는 데, 피땀을 흘리며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한혈마의 산지라고 했다. 무제는 명마를 얻기 위해 대원국에도 정벌의 군대를 보냈고, 이광리는 중국사상 최초로 파미르 고원을 넘은 군사가 되었다. 한나라의 위력은 서역에 진동하게 되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각 국가의 교류가 시작되었으며, 이들을 통해 서아시아, 심지어 로마(대진국P의 문물도 교류되게 되었다. 그 동서 문화의 교통로의 이름이 바로 비단길. 이 길을 통해 서역에 전해진 중국의 대표적인 물산이 비단이었기 때문이다. 포도와 석류, 호도, 낙타, 사자, 공작, 향로, 상아, 산호, 유리 등이 중국에 전래되었고, 중국의 비단, 칠기, 약재 등이 서역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들 교역품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의 교류는 대중적 수요에 기초를 둔 광범한 것은 아니었고, 주로 귀족들의 사치품을 위주로 한 귀족들 상호간의 교류였다. 로마의 귀족들은 중국 비단의 부드러운 감촉과 아름다운 광택에 매료되어 이를 사기 위해서는 어떤 비싼 값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단길을 이야기할 때 후한 대의 반초를 빼놓을 수는 없다. 반초는 궁정관료 반표의 아들로 (한서)의 저자로 유명한 반고의 쌍둥이형제다. 그의 누이동생 반소는 고대중국의 가장 뛰어난 여성지식으로 반고가 죽은 후 (한서)를 완성했다. 반초는 30여년간 서역 경영에 주력, 카스피해 이동의 50여 국을 복속, 비단길을 장악했으며, 감영을 로마 사절로 파견하기도 했다. 비단길을 통한 동서 교역은 7세기 중엽 당나라 때에 가장 번영, 당의 국제적인 문화를 꽃피우게 했다. 동서양의 각종 산물과 함께 각종 종교, 과학기술, 음악, 곡예 등 민간의 기예, 풍습 등도 이 길을 통해 전파되었다.

    

18 사마천, (사기)저술을 위해 태어나다


  중국인들을 다른 민족과 비교할 때, '역사적'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최초의 통사인 (사기)이래 그들은 왕조가 교체할 때마다 전 왕조에 대한 역사를 써서 후세에 남기는 작업을 2천년간 계속해왔다.
  중국 사서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기)가 탄생하기 이전의 그 옛날부터 중국인들은 역사기록을 남겨 후세의 귀감을 삼고자 했고, 역사 기록자인 사관은 객관성을 생명처럼 귀중하게 여겼다. (춘추좌씨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나라 대부 최저라는 사람이 군주를 살해하고 그 아우를 임금으로 세웠다. 제나라 태사가 이를 기록하자, 격분한 최저는 그를 살해했다. 죽은 태사의 뒤를 이은 그 아우가 역시 똑같은 사실을 기록했다. 최저는 다시 그를 죽였다. 그러나 또 하나 남은 동생이 태사가 되어 다시 이를 기록했다. 이에 이르러서는 최저도 어쩔 수 없어 기록의 말살을 단념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지방에 있던 다른 사관이 태사가 차례로 살해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기록판을 들고 달려왔다. 그는 기록이 지켜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지방으로 돌아갔다.
  사마천 필생의 업적인 (사기). '사기'라는 명칭은 삼국시대 이후에 붙여진 이름이고, 사마천 자신은 (태사공서)라고 불렀다.
  (사기)의 사료로서의 가치는 (사기)에 기록된 1천년 전의 은대 계보가 갑골문자의 발굴을 통해 정확히 확인된 바와 같다. 그는 (사기)를 저술하면서 객관적 자료와 자신의 개인적 견해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역사가로서의 엄정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기)가 2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며 각국어로 번역, 널리 애독되고 있는 까닭은 유려하고 생돔감있는 문장 속에 무수한 인간 군상의 인생역정이 깊이있게 서술되고 있기 대문일 것이다. 사마천은 왕에서 서민까지, 성자에서 악인까지, 역사의 주연에서 조연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편견없이 등장시키고 있다. 그는 이 책에 빠져드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이들 개성적 인물들이 서로 교차하면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에 주목, 역사란 어떻게 창조되는가, 인간이란 참으로 어떠한 존재인가를 깊이 성찰하게 만든다.
  (사기)는 본기, 서, 세가, 열전의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총 13권 중 열전이 7권을 차지, 높은 비중을 보이고 있다. 기전체란 본기와 열전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사마천에 의해서 새로이 창안된 이 새로운 역사 서술 체제, 즉 기전체는 이후 중국 정사 서술의 모범이 되었다.
  본기는 황제 이후의 역대 제왕, 세가는 제후, 열전은 그외의 인간 군상에 대한 전기다. 표는 유동하는 역사적 사실을 상호연관시켜 일람하기 위한 바둑판식의 연표이며, 서는 사회문화의 기초가 되는 역법, 천문, 법, 예법, 경제, 치수 등에 대한 제도사다.
  사마천은 대대로 주의 사관을 지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을 태사령, 즉 천체를 관측하여 역을 만들고 문헌이나 기록류를 관리하는 직에 있었다. 사마담은 사관의 지위가 점차 기술직으로 천시되고, 옛 기록이 사라져가는 것에 깊은 비애를 느끼고 사서편찬을 계획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어릴적부터 역사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으며, 그의 아버지에 의해 의도적으로 역사가로서의 소양을 키워갔다. 그는 이미 10대에 고문서에 통달했으며, 20대에는 전국 각지의 주요 사적지를 직접 답사, 각지의 전승과 풍속, 중요 인물들의 체험담 등을 채록하는 등 귀중한 체험을 했다. 그후 낭주의 직에 올라 무제를 수행, 사자로서 출장을 거듭하게 되니, 전국 각지에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기원전 110년, 아버지 사마담이 죽고, 사마천이 태사령의 직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의 집필을 결심하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남아 있던 시, 서, 춘추, 전국책등과 궁중에 비장되어 있는 각종 서적, 상소문, 국가의 포고문 등을 섭렵, 사기의 집필을 시작했다.
  구로돈 중, 예기치 않은 재난이 닥쳐왔다. 명장 이릉을 단죄하는 무제 앞에서 모든 중신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사마천이 홀로 이릉을 변호하고 나선 것이다. 화가 난 무제는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릉은 5천의 병사로 10만의 흉노 기병과 대적, 흉노1만명을 살상하는 등 분투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포로의 신세가 되고 말았었다.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천하의 사마천이 옥에 갇혀 옥리만 보면 공포감에 죄어드는 비참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용감하고 비겁하고 강하고 약한 것은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는 손자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고, 인간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다.
  당시에 사형을 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50만 전의 막대한 벌금을 내는 것, 아니면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을 받는 것이었다. 살아가는 것도 넉넉치 못했던 사마천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견디며 스스로 궁형을 선택했다.
  이때의 그의 심경은 뒷날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극형을 받으면서도 태연스럽게 부끄러운 빛조차 띠지 않았던 것은 이 저술을 미완성으로 긑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책을 완성하여 명산에 소장하고 각지의 지식인들에게 전달할 수만 있다면, 저의 수치도 충분히 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설령 이 몸이 산산조각난다 한들 무슨 후회가 있겠습니까?)
  2년 여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다시 세상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시 예기치 않은 일이 닥쳤다. 그가 무제의 측근에 봉직, 중서령의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그것은 그가 환관이 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게 되었으며, 이를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연결시켜나갔다. 무려 10여 년간의 산고 끝에 (사기)가 완성되었으니, 그때가 기원전 97년. 탁월한 재능과 예리한 관찰력, 거기에 인생의 가혹한 체험을 겪은 사마천에 의해 (사기)는 불멸의 역사서로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사마천은 마치 (사기)를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기)가 씌어진 시기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사기는 진정한 통일국가를 이루었던 무제 시기의 문화적 상징물인 것이다.

   

19 왕망의 이상적 토지개혁


  한나라는 외척 왕망이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했던 신나라를 기점으로 전한과 후한으로 나뉜다. 이는 전한의 수도는 서쪽의 장안, 후한의 수도는 동쪽의 낙양이었기 때문에 서한과 동한으로 불리기도 한다.
  왕망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환경속에서 유학에 전념했다. 적어도 젊은 날의 그는 유학에 심취한 열렬한 신봉자였으며, 이는 그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유교적 도덕의 실천에도 힘을 기울여 검소한 생활과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도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당시는 원제가 죽고 어린 성제가 죽의, 원제의 황후였던 왕황후 일족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왕씨의 위세를 날아가는 새도 떨어드릴 정도라고 일컫고 있었다.
  왕망은 왕황후 동생의 아들, 즉 조카였다. 일찍이 관계에 오른 그는 38세 이미 재상인 대사마의 지기에 올라 왕씨 일족을 대표하는 지위에 올랐다.
  어느 날 왕망의 어머니가 병에 들자 귀족들이 다투어 문병을 갔는데, 사람들은 왕망의 검소한 생활에 깜짝 놀랐다. 마중나온 왕망의 부인의 의복이 너무도 초라하고 겨우 무릎을 가릴 정도로 짧아서 하녀로 착각될 지경이었던 것이다.
  한번은 왕망의 차남이 집안의 노예를 죽인 사건이 있었다. 당시는 노예를 죽이는 것은 그다지 중한 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망은  아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육친조차 용서하지 않는 그의 엄정한 태도는 부패가 만연한 당시 사회에서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되었다.
성제, 애제가 거듭 요절하고 9살의 평제가 즉위했다. 왕망은 자신의 땅을 황후로 삼고 점차 실권을 장악해나갔다. 마침내 평제를 살해하고 2살박이 선제의 현손 영을 황태자로 삼은 후 스스로 가황제가 되더니, 이윽고 참위설을 이용, 자신의 즉위가 하늘의 뜻이라는 여론을 조작, 진천자가 되었다. 이때가 기원후8년, 신나라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왕망의 꿈을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유교적 이상국가는 이미 주나라 때 실시되었던 것으로 믿어졌고, 모든 것을 주나라의 제도로 복귀시킴으로써 그 꿈은 가능한 것이었다. (주례)에 의거해 관제가 바뀌고, 관명, 지명 등이 변경되었다.
  그의 정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왕정제의 실시였다. 왕전제란 주의 정전제를 모범으로 삼아 모든 토지를 왕전으로 하여 매매를 금지하고 백성들에게 토지를 고르게 분배하는 것이다. 정전제란 1정의 토지를 아홉으로 구분하여 그 여덟을 여덟 집에 주고, 하나를 공전으로서 공동으로 경작케 하여 이를 조세로 공출시킨 것이다. 아울러 사노비의 매매 또한 금지되었다.
  이는 전한 중기 이후 점차 확대되어온 대토지 경영의 폐단에 정면으로 승부를 거는 것이었으며, 중국 최초의 토지 균분제, 혹은 국유제의 실시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상적인 개혁은 책상 위에서 관념적으로 추출한 복고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객관적 현실에서 힘을 얻기 어려웠으며, 관료들의 부패로 시행되기도 어려웠다. 마침내 호족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겨우 3년만에 폐지되었다.
그는 또한 중화사상을 내세워 주변 제국의 왕들을 후려 격하시킴으로써 각국의 이반을 초래했다. 특히 한동안 잠잠하던 흉노를 격분시켜 북방에는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왕망은 30만의 군대를 파견, 흉노 정벌을 감행함으로써 oqr성들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적미군과 녹림당으로 대표되는 농민반란이 전국을 휩쓸었다. 번숭을 우두머리로 한 북방의 농민군은 눈썹을 붉게 칠해 관군과 구별했기 때문에 적미군으로 불리었는데, 도가적 경향이 강한 비밀결사에 부리를 두고 있었다. 왕광, 왕봉이 이끄는 농민군은 호북성 녹림산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녹림당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막상 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호족이었다. 하남 남양의 대표적인 호족인 유인, 유수 형제는 녹림군과 연합했다가 점차 지도권을 장악해나갔다. 이들은 일족 중 유현을 임시 황제로 세우고, 곤양의 싸움에서 왕망의 대군을 격파, 장안으로 향했다.
  왕망은 죄수를 풀어 군대를 충당, 이에 대응했으나, 군 내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성내의 시민들이 봉기군에 가세함으로써 위기를 맞았다.
  최후의 순간에도 왕망은
  (하늘이 나에게 사명을 주었는데, 한나라의 군사가 나를 어찌하랴)
 큰소리를 쳤으나, 불타는 궁전을 버리고 이리저리 피해다니다가 난병에세 살해당했다. 이때가 기원후 23년, 신나라는 불과 15년만에 역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왕망은 음흉하고 위선적인 찬탈자로, 혹은 최초의 국가 사회주의자로 매우 상반되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 호족 연합정권의 대두


  기원후 25년 유수가 후한을 건국하고 황제의 위에 오르자, 어릴적부터 그를 보아왔던 고향 어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문숙(광무제의 자)이 다만 정직하고 유화할 분, 농담도 잘하지 않고 얌전한 보통 청년이었는데, 이렇게 높은 지위에 오를 줄이야,,,)
  이 말을 들은 유수는
  (나는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유화의 길에 의해서 하고자 하노라)
라고 말했다.
  유수는 장안의 대학에 유학했던 온유하고 실직한 지주 청연으로 농업경영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반왕망 운동의 물결을 타고 호족연합군의 대표로 부상, 뒷날 빛나는 무공의 황제', 즉 광무제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전한 경제의 6세손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었던 그가 새 왕조의 창업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호족들의 지지와 후원속에만 가능한 것이었다. 유수 그 자신 또한 하남성 남양의 호족이었으며, 그의 아내 번씨도 명문 호족의 딸이었다.
  왕망이 이들 호족세력을 억압하고 대개혁을 추진함으로써 다시 강력한 황제권을 건설하려다가 실패했다면, 유수는 이들 세력을 인정하고 이들과 손잡음 으로써 '유화한' 후한 정권의 수립에 성공했다고 하겠다.
  /따라서 신나라의 모든 제도가 폐지되고 전한시대의 것 복귀되었으나, 전한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후한 시대에도 꾸준히 생산력이 증대되고 인구가 증가했으나, 후한의 절정기에도 꾸준히 생산력이 증대되고 인구가 증가했으나, 후한의 절정기에도 중앙정부의 조세대장에 오른 지배민의 수는 전한시기에 미치지 못했다.
  전한의 고조 유방이 제국 건설을 마감한 후, 최고 일등공신들에게까지 무자비한 숙청을 가하면서 황제권을 공고하게 했던 일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광무제는 공신들뿐만 아니라, 저항하다 항복한 이에게도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상당한 지위와 명예를 부여하여 회유했다.
  양시대를 가르는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호족세력이 이제 역사의 전면에 거대한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후한 정권은 토지 소유의 제한에 대해서는 전혀 손을 대지 못했다. 토지문제에 해단 정부의 무정책을 틈타 대토지 소유는 더욱 확대되고 장원 형식에 의한 소작제도는 더욱 보편화되었다.
  우리는 이미 춘추 말기부터 전국시대에 걸친 경제의 발전이 사회의 변화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았었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 우경의 보급 등에 기초하고, 국가적 규모의 치수, 관개공사 등에 의한 생산력의 향상은 농경에 있어서 씨족 단위의 집단노동에서 개별 소가족 단위의 경영을 가능하게 하고 토지의 사유제, 씨족공동체의 해체를 촉진했으며, 전제 군주제의 출현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미 전한 시기에 이르자 소농민 사이에는 부농과 빈농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제 지난 시기처럼 주위 농토의 개간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만큼 여분의 토지가 넉넉히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건강한 자영농민 외에 대토지 소유자가 등장,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부농 중에서 개간이나 매입, 혹은 겸병 등의 방법으로 농토를 확대하여 대토지 소유자로 성장한 호족들은 혈연관계와 강고한 동족의식으로 결합, 향촌의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다. 이들 호족은 농지뿐만 아니라 주변의 산림이나 원야, 지소를 사들여 장원을 구축, 농민을 압박해들어갔다.
  반면, 토지를 잃고 소작이나 고용농, 심지어는 노비로 떨어지는 농민들이 생겨났다. 살 길이 막연해진 농민들을 고향을 떠나 도적질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폭동을 일으켜 전면적인 저항에 나서기도 했다.
  이제 한 대 이후 왕조의 역사가 외형적으로는 순환의 양태를 띠게 되는 경제적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자영농민에 부과하는 세금을 기초로 운영되는 왕조는 점차 대토지 소유제의 진전과 이에 수반하는 자영농민의 감소로 점차 기울어져가다가 마침내는 농민의 반란을 마지막으로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