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중국역사 100가지[사건] 요약 5

好學 2009. 10. 22. 00:03

 

중국역사 100가지[사건] 요약 5

 

 

 

  81 '한 점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 공산당 창당
  82 소련, 공산당과 손잡다 - 제1차 국공합작
  83 혁명 근거지 정강산 - 홍군의 형성
  84 일본의 대륙침략 -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등장
  85 18개의 산맥과 17개의 강을 넘다 - 홍군의 대장정
  86 항일 통일  전선 - 서안사건과 제 2차 국공합작
  87 피에 굶주린 지옥의 병사들 - 중일전쟁과 남경 대학살
  88 두 자매의 다른 길 - 송경령과 송미령
  89 약진하는 홍군, 무너지는 국민당 -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90 대륙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 장개석의 대만 통치 시작
  91 '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리다' - 한국전쟁 참전
  92 못 다 피고 시든 꽃 - 백화제방, 백가쟁명
  93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수립을 위해 - 집단농장화 및 대약진운동
  94 수정주의 대 교조주의 - 중, 소의 이념대립
  95 중국대륙을 휩쓴 광기 - 문화대혁명
  96 '세계인민의 적'과의 화해 - 미, 중국 수교
  97 문화대혁명의 후예들 - 4인방 체제의 등장
  98 오뚜기 정치인생 - 등소평의 집권
  99 천안문광장을 메운 자유의 함성 - 천안문 사건 발발
  100 지는 해 뜨는 별 - 한, 중 수교

 

 

 

81 '한 점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 공산당 창당(1921년)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22년/ 방정환, 일본에서 색동회 조직하고 어린이 문화운동 시작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재일 조선인 다수 사망

  지금 중국은 세계에서 몇 안되는 사회주의 체제 국가 중의 하나다.
중국 사회주의의 원천은 어디일가? 마르크스, 엥겔스에 의해 정리된 공산주의 이론은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현실에서 실현되어 사회주의 정치체제가 성립되었고 점차 세계로 퍼져나갔다. 사회주의 구호의 하나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였다. 레닌은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후 1919년 국제적인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이른바 코민테른(제3 공산주의 인터네셔널)이다. 그 후 1920년에 인도네시아와 이란, 1922년에는 일본에서 각각 공산당이 창설되었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창설된 것은 1921년이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공산주의 이론은 일부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지식인들을 중심으로하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5, 4운동을 전후로 북경대 교수들 중 일부는 이미 공산주의 이론에 접하고 있었다. 중국에 공산주의를 소개한 인물은 이대교, 진독수와 같은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들이었다.
  공산주의 이론은 외세와 결탁한 군벌을 타도하고 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중국의 반군벌 반제국주의 혁명운동에 힘이 되는 것이었다. 코민테른도 중국의 이같은 상황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으며, 제1차대전 이후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과정에서 러시아는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한다는 원칙아래 중국의 입장을 지지했다. 러시아의 이런 모습은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시달리고 있던 중국의 민족주의자들로 하여금 사회주의 체제를 우호적으로 보게했다.
  코민테른은 세계 공산화 전략의 일환으로 중국을 주목, 1920년 중국에 공산당을 창설하라는 임무를 띠고 보이틴스키가 북경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우선 중국 내 공산주의 이론에 밝은 북경대 교수 이대교를 만났다. 이대교는 북경대 교수를 그만두고 상해에서 글쓰는 데 전념하고 있던 진독수에게 보이틴스키를 소개했다.
  코민테른의 임무를 띤 보이틴스키와 중국의 대표적인 혁명적 지식인인 진독수의 대면은 중국에 사회주의가 뿌리내리는 데 있어 결정적 계기가 되는 중요한 만남이었다. 진독수는 보이틴스키와의 만남이후 1920년 8월 7명의 구성원으로 공산당 창립 발기대회를 개최했다. 그후 북경, 상해, 제남, 광주 등 전국 각지에 공산주의 소그룹(소조)들이 만들어졌고,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일어났다.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는 주로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마침내 1921년 7월, 상해의 프랑스 조계의 한 사립학교 기숙사에서 역하적인 중국공산당 창립모임이 있었다. 그 기숙사는 방학으로 학생들이 없었다. 이때 참가한 사람은 겨우 13명이다. 나중에 중국공산당을 이끌고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공산혁명을 성공한 모택동도 이 13명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적은 인원으로 은밀하게 창립대회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비합법 활동으로 당국의 추적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은밀히 진행하고 있던 집회도 경찰에게 들통이 나 집회도중 서류를 싸들고 황급하게 대회장소를 옮겨야 했다. 추랄점부터있었던 이런 시련은 공산혁명이 성공하는 때까지의 긴 장정의 시작에 불과했다.
  1921년 출발한 당원을 공산당은 30여 년 뒤에 중국대륙을 완전히 장악하고 수천만의 당원을 거느린 대조직이 되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정식 명칭은 중국공산당으로 정해졌으며 초기 당강령은 노동자 계급에 의한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를 위한 1단계 목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의 수립이었다. 또한 당연히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고 생산수단을 전부 사회적 소유로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물론 공산혁명이 성공해야 가능한 정책들이었다.
  공산당의 창당이후 조직활동은 아주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주된 활동은 계몽적인 선전활동 그리고 노동자를 조직하여 노동운동을 활발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1922-23년을 전후로 하여 이들의 조직적인 활동으로 노동운동이 매우 활성화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1922년 처음으로 대외선언을 채택하여 공산당의 존재를 정식으로 대외에 알리는 선언을 했다. 또한 코민테른에 가입. 국제적으로 공산주의 조직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눈부신 조직확대로 군벌과 외국에 대항하는 국민혁명 운동의 한 세력이 되었음을 인정받게 되었다. 1923년에는 군벌타도를 목적으로 하여 국민당과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1924년 1월 국민당 전당대회에서는 '연소, 용공, 농공부조'의 삼대정책이 채택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하게 된다(제1차 국공합작). 물론 국민당과의 합작은 당 대 당의 통합이 아니라 공산당 소속원들이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들어가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군벌타도를 위한 북벌운동이 성공하여 국민당이 중국을 장악한 후 국민당의 우파들은 공산당을 몰아냄으로써 이때부터 국민당과 공산당은 분열, 대립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그 뒤로 국민당은 공산당을 말살하기 위해 계속적인 공격을 가했으며, 공산당은 국민당과 투쟁하면서 조직을 유지해나가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만 했으며, 결국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최후의 승자가 된다.

     

82 소련, 공산당과 손잡다 - 제 1차 국공합작(1924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 창립
   1925년/ 조선 공산당 결성

  5, 4 운동이후에도 여전히 군벌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제국주의 외국세력은 중국인들의 삶을 어렵게 라고 있었다. 혁명세력들이 1920년대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 이 반민족적인 군벌과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혁명세력들은 원세개가 죽은 후 1927년 서남 군벌들과 손잡고 광동군정부를 수립했으나, 광동 군정부의 주력부대인 서남군벌이 연합지도 체제를 형성하자 손문은 광동 군정부의 대원수직을 사임하고 상해에서 은거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5, 4 운동이 일어났다. 5, 4 운동은 중국혁명세력들이 노동자 농민, 즉 민중의 힘을 다시 평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손문은 당시 군벌들이 서로 싸우는 틈을 타 다시 광도응로 가서 제 2 광동 군정부를 수립했다. 혁명세력은 광동을 혁명의 근거지로 삼아 북쪽의 군벌을 타도하고 중국을 하나의 정치체제로 통일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광동 군정부의 실질적인 군사력은 여전히 서남지방의 군벌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손문은 군벌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한 여러 가능성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혁명에 성공한 소련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소련은 다른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었다. 손문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가 소련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호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나는 북경정부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을 잡겠다. 우리는 미국, 프랑스, 영국 그밖의 모든 나라로부터 원조에는 희망을 잃었다. 우리 광동정부에 원조를 하고자 하는 나라는 소련밖에 없다)
  손문은 중국혁명에 소련의 도움을 받고 싶어했다. 그런 그의 앞에 러시아 사회주의 이론가인 보이틴스키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고 나타났다. 1922년 다시 러시아에서는 소련정부의 특별전권대사인 요페를 파견했다.그리하여 마침내 손문-요페 선언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중국에서는 공산주의를 실현시킬 수 없다는 점을 소련에게 납득시켰으며, 소련의 국민당에 대한 원조는 민국의 통일과 국가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소련과 손을 잡는 것은 중국 내의 공산당과 손을 잡는 것을 의미했다. 공산당은 1921년 창당한 후 1922년에는 국제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에 가입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소련의 지도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국민당과의 연합결성은 곧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 연합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문제는 연합하는 방식이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의 하나는 공산다으이 핵심간부가 개인자격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손문에게는 공산당원이라고 할지라도 국민당의 강령과 규칙에 찬성하는 자이면 같은 편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문제는 공산당 내부에서 격렬한 반발에 부딪혔으나 어렵사리 통과되었다. 그 결정에 따라 진독수, 이대교등이 국민당에 가입하게 된다.
  소련과의 연합을 확정한 손문은 그동안 손을 잡았던 일부 군벌세력과 결별하고 상해로 돌아와 1923년 중국국민당 선언을 발표, 국민당의 체질을 개선시키기 위한 개진을 전개했다. 그 개진 때 발표된 선언문은 교육, 선거제도, 기본권 보장등과 아울러 사회경제의  균등발전, 즉 빈부격차 해소 등을 담고 있다. 경제적인 평등의 구체적인 방법은 토지의 소유한도 제정, 토지의 국가에 의한 수매, 중요산업의 국유화, 농촌조직의 개량을 통한 농촌사회의 평등, 남녀평등이었다.
  1924년 1월 국민당, 공산당, 코민테른의 합의에 의해 광주에서 국민당 제1회 전국대표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국민당이 조직을 바꾸어 공산당을 받아들여 제 1차 국공합작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이 대회에서 선출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 24명 중 3명이 공산당원이었다. 나중에 중국공산당을 이끌게 되는 모택동은 이때는 아직 공산당의 주도적인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16명의 후보위원 명단에 들어 있었다.
  국공합작은 손문의 삼민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제국주의와 군벌의 타도, 농민과 노동자의 해방을 위한 이른바 연소용공, 부조농공(소련 및 공산당과 손잡고 노동자, 농민을 지원한다)는 원칙이었다. 국공합작 후 광동의 국민당 정부는반제, 반군벌의 혁명거점이 되었으며, 혁명군은 북상하여 군벌과의 싸움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그러나 국민당의 활동은 1925년 3월 손문이 죽으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모든 반군벌세력을 끌어들여 중국혁명의 완수라는 대과제에 합류시킬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인 손문이 죽자 국민당 내의 반공세력들이 공산당을 배척하려는 움직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25년 11월 우파들은 북경 교외에 모여 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독자적으로 열어 공산당원의 국민당적 박탈 및 공산당 출신의 중앙위원 9명의 제명을 결의했다. 그러자 좌파들은 이 회의가 무효임을 선언하고 26년 1월에 국민당 2차 전체회의ㅣ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는 공산당 출신의 진출이 더욱 두드러졌다. 이때 황포군관학교 교장이었던 장개석이 비로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장개석의 실권은 이전부터 막강했고 또 체질적으로 반공적인 인물이었다. 장개석은 그해 5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무 정리안을 내놓았다. 그 안은 첫째, 다른 당원이 국민당에 가입할 경우 그 당은 명단을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 둘째, 다른 당원으로 국민당의 고급기관을 간부를 맡게될 경우 전체의 1 / 3을 넘어서는 안된다. 셋째, 다른 당의 당원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자는 당 중앙기관의 부장이 될 수 없다. 이때의 다른 당이란 당연히 공산당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공산당은 결국 국민당 내에서 밀려났으며 제1차 국공합작은 이렇게 해서 끝을 맺었다.

     

83 혁명 근거지 정강산 - 홍군의 형성(1928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26년/ 6, 10 만세운동. 나석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1927년/ 신간회 발족

  1927년 제 1차 국공합작은 국민당 우파의 공산당 축출로 끝이 났다. 공산당은 이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에게 무장봉기를 통한 근거지 확보를 지령했다. 하룡, 섭정, 주덕 등 공산당 군 지도자들은 약 2만여 명의 홍군을 동원, 남창에서 봉기했다. 그들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남창을 점령하여 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건군 기념일은 이 남창봉기일인 8월 1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남창봉기에 의해 수립된 남창 혁명위원회는 얼마 가지 못했다. 국민당군이 남창을 압박해오자 혁명위원회는 남창을 버리고 광주로 내려갔다. 그러나 국민당군의 추적은 계속되었고, 이러한 무장봉기를 통한 해방구(소비에트) 건설 노선은 광동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7년 12월 섭검영이 지휘하는 부대 및 노동자 수천 명이 광주에서 무장봉기하여 광주노농민주정부, 즉 광주 코뮨을 수립했다. 그러나 공산당을 말살하려는 국민당군은 이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대로 포위공격하는 국민당 군대와 3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대부분은 죽음을 당하고 몇 명만이 간신히 탈출하여 또 다른 해방구인 해륙풍으로 피햇다. 이 광주 코뮨과 해륙풍 소비에트에는 한국의 사회주의자 150여 명이 가담했다고 한다.
  무장봉기를 통해 도시 중심의 거점(소비에트)을 확보하려던 공산당의 전략과 코민테른의 지시는 결과적으로 잘못된 노선이었음이 드러났다. 당시 이 노선에 반대한 모택동의 노선은 농촌을 먼저 장악하여 도시를 포위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패한 군대를 끌고 정강산으로 들어갔다. 이 정강산이 바로 공산당의 최후거점이었다. 여기에서 홍군의 기본적인 조직이 짜여졌다.
  모택동은 자신이 이끌고 들어온 부대를 정리하여 노농혁명 제 1군 제 1사단 제 1연대로 이름붙였다. 부대 구성원들은 국민당의 소탕작전에서 살아남은 약간의 노동자들, 이 지역 출신의 젊은 광부, 철도원 및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뒤 주덕, 임표, 진의 등이 이끌고 들어온 부대를 재편성하여 홍군 제 4군(노농혁명 제 4군)이 창설되었다. 사령관은 주덕, 정치위원 모택동이었다. 약 5만 명 정도의 인원이었다. 그 후 28년 하건의 반란 이후 많은 부대들이 정강산으로 모였는데, 그 부대들을 중심으로 홍군 제 5군이 편서오디었으며 팽덕회가 지휘했다.
  정강산은 몇 개의 부락이 있는 오지였고, 지역은 넓지만 사람들이 많이 살고있지 않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자 의복, 식량 등이 매우 부족했다. 수수와 호박이 주식이었으며 추운 날씨에도 따뜻한 옷을 제대로 입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홍군은 혁명정신에 투철했다. 혁명을 위해서 홍군의 행동수칙이 정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홍군에는 '3대 규율'과 '8대 주의'가 있었다. 먼저 '3대 규율'은
  1. 모든 행동은 반드시 지휘에 따른다.
  2. 인민으로부터 바늘 하나 실 한오라기라도 얻지 않는다.      
  3. 토호로부터 몰수한 것은 모두의 것으로 한다.
  다음 '8대 주의'는
  1. 가옥으로부터 떠날 때는 모든 문짝을 제 위치에 복귀시켜놓을 것.
  2. 잠자고 난 뒤의 멍석은 개어서 원래의 위치에 놓을 것.
  3. 인민들에게 공손할 것이며 가능한 한 모든 힘으로 그들을 도와줄 것.
  4. 빌린 물건은 모두 반납할 것.
  5. 손상된 물품은 고쳐서 원상회복시킬 것.
  6. 농민들과의 거래시에는 정직할 것.
  7. 물건을 살 때에는 반드시 대금을 지불할 것.
  8. 위생처리에 주의하며, 특히 화장실은 인민의 주거지로부터 안전거리를 유지할 것.
  인민들을 대할 때에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가지 않게 해야한다는 규칙을 지키게 했다. 그런 홍군은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3가지 지침을 외우도록 했다.
  1. 적과 대항해서는 죽음으로써 끝까지 투쟁할 것.
  2. 인민을 무장시킬 것.
  3. 토쟁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확보할 것.
  이제 공산당은 정강산을 근거로 하여 주변지역인 호남, 강서, 광동 3개 성의 경계지역에 6개 현으로 구성된 소비에트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혁명근거지를 확대하기 위해 채택된 방법은 첫째, 무력투쟁의 방식이다. 이것은 이전까지의 투쟁이 군사력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패했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째, 도시보다는 농촌을 중심으로 전개하고 세력확대의 주대상을 농민으로 삼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지주들의 토지를 모수하여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지개혁이 중심적인 정책이 되었다. 그리고 지역별로 소비에트를 건설해야 하며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진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게 된다. 이 원칙은 이전의 실패에 대한 반성과 모택동의 판단에 주로 근거하고 있었다. 위에서 말했던 3대 규율과 8대 원칙은 바로 이러한 원칙을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것들이었다.
  또한 홍군의 유력한 전투 방식은 유격전술이었다. 이것 역시 무기와 숫자 등 모든 면에서 약세인 조건에서 나온 전술이다. 유격전술의 원칙은 모택동에 의해 제시되었다.
  1.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물러선다.
  2. 적이 멈춰서면 우리는 적을 교란시킨다.
  3. 적이 전투를 피하면 우리는 공격한다.
  4. 적이 물러서면 우리는 추격한다.
  그리고 이후의 세력 확대과정에서 이 원칙은 올바른 것이었음이 판명되었다.
  1928년 겨울이 끝날 무렵 공산당은 혁명의 중심 혼군의 산실인 정강산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많은 군대를 먹여살릴 수 있는 군수물자를 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은 국민당군이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들어오기도 힘들었다. 그들은 광동 근처에 새로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국민당 내부의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틈을 타 강서지역 외의 몇 개 지역에 소비에트를 수립했다. 1930년 여름에는 전국에 걸쳐 약 30여 개의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

   

84 일본의 대륙침략 -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등장(1931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28년/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조직
   1929년/ 원산 총파업. 광주학생사건

  (1031년 9월 18일 오후 10시 30분 중화민국 동북변방군의 한 부대가 봉처 서북쪽 영 부근에서 우리(일본) 남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여세를 몰아 우리의 수비대를 습격했다. 적대행동을 개시한 것은 그들(중국)이며 스스로 화를 자초한 장본인이다. 원래 우리 남만주 철도는 지난해 조약에 근거하여 정당하게 획득했고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 다른 나라가 손댈 수 없다. 중화민국 동북군은 감히 이것을 침범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일본제국 군대에 발포까지 했다. 본관은 철도 보호의 중책을 지고 있는바, 그 권익을 지키고 제국 군대의 위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소화 6년 9월 19일)

  일본은 이화같은 공식입장을 밝히고, 도발자인 중화민국을 '응징'하겠다고 군대를 동원했다. 이른바 '만주사면'의 시작이다.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봉천은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 두절되었다. 중국정부는 일본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고 국제연맹에 이 문제의 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의 한 지역에서 발생한 무력충돌은 유럽의 더 큰 문제들 때문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특히 영국은 일본을 감싸기까지 했다. 결국 국제연맹 이사회는 일본정부의 주장에 가깝게 아래와 같은 결의를 하고 그 문제를 마무리해버렸다.
  1. 만주에 대해 영토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일본의 성명을 중시한다.
  2. 일본정부는 그 국민의 안전 및 재산보호가 확보되는 대로 군대의 철수를 가급적 빠르게 시행한다.
  일본의 만주침략에 대해 중국인들은 격렬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전국 주요대학에서는 '항일 구국회'가 결성되었다. 남경의 중앙대학 학생 4천여 명은 일본과 싸울 것을 주장하면서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또 그들은 중국정부 외교부에 뛰어들어 외교부장인 왕정정에게 잉크병을 던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일본과 싸우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아직 국내에서 공산당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중앙당 집행위원회는 (전국학생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했다.
  (싸워햐 할 때 싸우지 않고 나라를 멸망시킨다면 그 죄는 정부가 져야한다. 그러나 싸우지 않아야 할 때 싸워 나라를 멸망시킨다면 그 죄 또한 정부가 져야한다. 이 큰 어려움을 당해 국민이 정부를 신임하지 않고 비난만 일삼는다면 건강한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중국정부가 일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으면서 국제여론을 통한 압력으로 일본이 물러가기를 원했으나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결정한 사항을 이행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이미 그들은 만주지역에 친일정권을 수립한 다음 완전히 먹어삼키려고 했다.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를 장악하려는 관동 주둔 일본군의 음모는 아주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원래 일본군부는 만주지역을 (만주친일괴뢰정권 수립 --> 만주국 독립 --> 일본의 영구 소유화) 라는 3단계 과정을 거쳐 일본영토로 편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제 1단계 친일 괴뢰정부의 황제로 낙착된 이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였다. 그는 만주족이었고, 한족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만주족의 독립적인 움직임으로 가장할 수 있다고 찬단했던 것이다. 관동군 사령관 혼조는 다음과 같은 만주지역 신정부 수립 3원칙을 일본각의에 제시했다.
  1. 만주, 몽고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시킬 것.
  2. 만주, 몽고를 통일할 것.
  3. 표면은 중국인이 통치하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이 장악할 것.
  만주, 몽고를 일본의 영토로 만드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지만 국제사회의 이목을 고려하여 차선책으로 만주, 몽고를 중국의 영토로부터 분리하여 독립국을 세운다는 것이다. 물론 그 독립국은 명목상일 뿐이고 일본의 조종과 지배를 받는 꼭두각시 정부가 될 것이었다. 이 독립국을 움직이기 위해 국방을 일본이 담당하고 철도, 항공로 등이 통제되며, 그것들을 감독하기 위해 독립국 내에 일본인으로 구성된 자문부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이괴뢰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만주 주둔 일본군(관동군)의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우선 만주지역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흑룡강성을 공격해들어갔으며, 천진을 공격하는 틈을 타 천진에 있던 청의 마지막 황제였던 부의를 탈출시켜 만주로 데리고 갔다. 부의는 1912년 청조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황제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는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일정한 생활비를 받고 자금성에서 생활하고 있던 중 1924년 쿠테타를 일으킨 군벌 풍옥상에 의해 쫓겨나 천진에 머물고 있었다.
  부의는 잃어버린 황제의 자리를 잊지 못하고 있었으며 언젠가는 되찾으려는 생각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일본이 만주국의 황제자리를 권유한 것이다. 부의에게는 더 이상 반가운 제의일 수가 없었다. 관동군의 제안에 대한 부의의 첫 질문은 그 국가가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인지 공화정인지였다. 부의는 다시 황제가 되고싶었던 것이다. 일본이 부의를 내세워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세우려하자 장개석은 마침내 일본의 만주침략에 정면대응하는 단안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중국 자체에 충분한 자위역량이 없는 한 국제연맹은 일본의 폭력을 제지할 결심을 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은 결코 철군하지 않으리라 본다. 중국은 이미 만주땅을 잃었다. 동포가 한 마음으로 협력해 이를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국제연맹을 신뢰하고 국제연맹이 정의를 옹호하고 공도를 주장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일본이 간단히 철수하지 않으리라는 점, 그리고 대련, 여순을 간단히 반환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 국민의 능력이며 세계의 공도이다. 우리는 최후의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피를 흘리겠다는 결심이다.)
  중국은 만주지역을 장악하려는 일본의 침략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이에 일본은 국제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만주지방에 국제연맹의 조사단 파견을 제안했다. 국제연맹은 일본의 제안에 따라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사변이 일어난 이듬해 1932년 영국의 리튼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이 만주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조사단이 활동하고 있는 중에도 일본은 연이어 상해를 공격했다. 이 전ㅌ에서 중국군의 피해는 사망 약 4천여 명, 부상 7천여 명에 이르렀다. 상해를 공격한 것은 국제여론이 만주에 집중되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만주의 괴뢰정부 수립계획은 착착 진행되었다. 우선 만주지역의 옛 군벌과 지방의 유력자들을 모아 1932년 2월 18일 만주의 독립을 선언하게 했다. 어디까지나 만주지역의 토착세력에 의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 신국가의 이름은 만주국으로 정하고 3월 1일 건국하기로 했으며 국가의 형태는 공화국으로 결정했다. 그러자 황제의 지위를 바라고 있던 부의는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그러자 관동군에서는 공화제 아래의 원수직을 주셌다고 하여 반발을 무마했다. 그 영역은 봉천, 길림, 흑룡강성의 동 3성으로 인구는 약 3천만 명 정도였다.
  중국정부는 이러한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지난해 9월 18일 이후 일본은 불법으로 침략하여 중국인민을 협박하고 소수 반란분자를 이용해 비합법적 조직을 하여 부의를 데려다가 꼭두각시 정권을 만들었다. 이것은 모두 일본의 협박과 유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일본의 손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 이 불법행위가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정부는 당초 이같은 정치조직은 반란기관이고 또한 일본의 부속기관이라고 간주해왔으며, 사태의 전책임은 일본정부가 져야 할 것이다)
  중국정부는 이와 같은 공식발표를 하고 일본에 대한 적극적인 대항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고 나중에 부의를 천황으로하는 만주제국으로 바꿨다. 이제 만주는 일본의 조종을 받는 괴뢰정부에 의해 지배되게 되었다. 이는 곧 일본의 만주지배를 의미했다. 이런 상태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85 18개의 산맥과 17개의 강을 넘다. - 홍군의 대장정 (1934 -- 1936)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1931년 / 만주사변 발발
  1932년 / 이봉창, 윤봉길 의거
  1933년 /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1927년 국공합작이 깨지고 고산당은 국민당 내에서 추방되었으며 국민당의 공격을 받은 공산당은 정강산에 최후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공산당은 정강산에서 조직을 정비하고 홍군을 재편성하여 다시 주변지역에 새력을 확대했다. 특히 농촌에서 농민들을 대상으로 토지혁명등을 통해 공산당의 근거지를 만들어 나가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1930년대 초에 들어서면 중국대륙의 중남부의 여러 성들에 소비에트가 들어섰다. 그리하여 1931년 11월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수도는 강서의 서금이었고 임시정부의 주석은 모택동이었다.
  소비에트의 실질적인 힘은 노동자와 농민으로 구성된 붉은 군대 (홍군) 였다. 공산당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자 남경의 국민당 정부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공비토벌은 30년에서 35년까지 5차례에 걸쳐 전개되었다.
  홍군은 1930년 국민당군의 1차 토공전과 31년의 공격은 막아냈다. 32년 일본의 침략 (민주사변) 으로 공세가 잠시 추춤해졌지만 장개석은 민주사변에서 일본과 타협한 다음 공산당 토벌에 다시 힘을 집중했다.
  1933년 말 제 5차 포위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국민당 군대의 포위망은 홍군의 세력근거지인 강서, 복건지역을 압박했다. 34년 공산당은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다. 공산당은 마침내 강서 소비에트 지구로부터 철수할 것을 결정했다. 약10만의 주력부대가 장개석군의 공격을 피해 포위망을 뚷고 대장정에 오르게 되었다. 그 주력부대를 유지하여 후일을 기다리자는 공산당 지도부의 결정에의한 것이었다. 방지민이 읶는 복건성 북부지역의 군대가 먼저 탈출했다. 뒤를 이어 정강산 지구의 홍군 제 6군이 탈풀했으며, 그 뒤를 이어 홍군의 주력부대가 탈출했다. 홍군의 탈출 및 장정은 초기에는 거의 도주하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탈출한는 과정에서부터 많은 희생자를 냈고, 탈출에 성공하여 대장정에 나서면서 계속적인 추격을 받아 희생자는 늘어갔다.
  34년 10월  탈출을 시작한 홍군은 4개의 봉쇄선을 뚫었다.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그들은 준의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중대한 회의가 열린다. 모택동은 국민당국의 5차 포위공격에 대한 공산당의 전술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비판했다. 즉 당지도부가 유격전이 아닌 진지전을 전술로 택한 것을 비판했다. 또한 모택동은 탈출과정도 '전략적 후퇴'가 아닌 '맹목적 도주'였다고 비판했다. 홍군의 간부 및 군인들에게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않았으며 그들의 근거지였던 강서의 농민들을 납득시키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싸움에 지친 홍군에게 휴식시간을 주지도 않았고 무거운 장비를 지고 행군하게 함으로써 행진속도를 더디게 하고 병사들을 힘들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택동의 비판은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동안 지도부 중심에 있지 않았던 모택동이 다시 공산당의 지도권을 잡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도시봉기를 주도하고 탈출방식을 결정했던 지도부들은 제거되었다. 이 준의회의 이후 홍군의 장정의 방법과 방향이 달라지게 된다. 그것은 국민당군의 추적에 맞서 싸워 살아남아야 하며, 일본군과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가는 것이었다.
  홍군은 1935년 5월 마침내 양자강을 건너 부대를 다시 3개로 나누고 국민당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소부대 단위로 이동했다. 그들은 추격군의 예상을 뛰어넘어 귀주의 산악지역을 넘었으며, 마냥 도망만 가는 것이 아니라 기습적인 공격으로 추격의 발길을 멈칫하게 하기도 했다.
  운남을 지나 사천을 접어들어서도 국민당군의 추격은 계속되었다. 장정에서 매우 중대한 계기가 되었던 것은 산악지대의 강 대도하를 건너는 것이었다. 국민당군이 도착하기 전에 그 강을 건너야 했다. 임표의 선봉대는 만 하루에 120킬로미터를 강행군하여 노정교라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선봉대가 다리 좌우의 거점을 확보해야 본부대가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도하를 건너자 이번에는 해발 4천미터가 넘는 대설산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 산을 넘어 7월에는 호북에서 탈출한 제4 방면군과 감숙에서 합류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섬서지방의 보안이었다. 이 지역은 강서 소비에트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역시 공산당의 근거지였다. 이 보안 소비에트는 유지단과 고강 등에 유지되고 있었다.
  그들은 국민당군의 봉쇄망을 뚫고, 지방군벌과 싸우면서 11개 성을 통과하고 18개 산맥을 넘고 17개의 강을 건너 1만 2천 킬로미터의 대장정을 해낸 것이다. 주력부대인 제1방면군은 8만여 명에 불과했다. 나중에 2방면군 4방면군이 합류하여 홍군은 약 3만 명이 되었다. 장정 이전의 강서 소비에트 시기 군사력의 약 1/10 정도로 준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넘어 장정을 완수한 병사들은 최정예부대로서 이후 항일투쟁과 공산혁명의 중심부대가 되었다. 모택동은 장정을 마감하면서 (장정은 선언서 이며 선전대이며, 파종기였다....11개 성에 많은 씨를 뿌렸고 머지않아 싹이 나와 잎이 자라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서, 앞으로 틀림없이 수확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실현된다.

   

86 항일 통일전선 - 서안사건과 제2차 국공합작(1936-37년)


  그 때 우리나라에서는 -
  1934년 / 진단학회 설립
  1935년 / 최초 발성영화 (춘향전) 단성사에서 개봉

  대장정을 마무리한 공산당은 1년여의 휴식시간을 가지면서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항일투쟁에 나섰다. 또한 1936년 국민당 정부에 대해 국공간의 대립을 중단하고 항일투쟁에 일치하여 나서자는 제안을 했다. 중국 내의 여론도 더 이상 국내의 세력다툼에 힘을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분위기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그의 공산당 탄압에 대한 입장을 바꾸지 않았고 공비토벌 작전은 계속되었다. 심지어 장개석은 외국기자에게 중국(국민당)에 있어서 (일본은 피부병이고 공산당은 심장병이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전세를 바꾸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서안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장학량인데, 그는 만주 지방의 실력자로 일본의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밀려나 북경을 근거로 국민당군에 합류하고 있었다. 장학량의 군대는 장개석의 남경정부의 지시로 공비토벌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장학량은 같은 중국인들끼리의 싸움을 중지하고 모두 항일투쟁에 나서자는 공산당의 주장을 더 옳다고 보고 있었다. 1936년 장학량군과 홍군 사이에는 비밀협정이 맺어져 적대적인 싸움이 중지되었다.
  그해 12월 장개석은 싸움을 독려하기 위해 서안에 주둔하고 있는 장학량 부대를 찾아갔다. 그러나 장학량은 서안에 찾아온 장개석을 감금했다. 장개석은 잠을 자다가 장학량군에 의해 공격받았는데 다급하게 도망치면서 그의 의치까지 빼놓고 달아날 정도였다. 장학량은 장개석을 감금한 다음 8가지의 요구조건을 제시한 글을 전국에 공표했다.
  (...동북지방을 잃은 지 5년, 국가의 주권은 쇠퇴했고 영토는 축소되었다. ...최근 국제정세가 바뀌어 몇몇 세력들이 짜고 우리 국가와 민족을 희생시키려 하고 있다. 이 중요한 때 중앙의 지도자는 마땅히 군대와 인민들을 북돋아 거국적인 항전에 나서게 해야 하는데... 장개석 위원장은 소인배들에게 둘러싸여 민중의 지지기반을 잃고 국정을 바로잡지 못한 죄는 크다. ...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장개석 원수에게 최후의 권고를 하고 그 안전을 보장하면서(감금된 상태) 반성을 촉구하기로 했다. 서북의 군과 민은 일치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남경정부를 개편하고 각당 각파를 참여시켜 구국의 책임을 질 것
  2. 모든 내전을 정지할 것
  3. 상해에서 체포된 애국적 지도자를 즉시 석방할 것
  4. 전국의 모든 정치범을 석방할 것
  5. 민중의 애국운동을 개방할 것
  6. 민주으이 집회, 결사 등 모든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손문의 유언을 확실히 실행할 것
  8. 구국회의를 즉시 소집할 것
  발기인 장학량, 양호성)
  결국 장개석은 공산당의 주은래와 담판을 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12월 25일 극적인 타협이 이루어져 8개항을 지키기로 약속했다. 장개석은 이 약속을 문서화하자는 주은래의 말에 (말한 이상 성실히 지킬 것이며, 행한 이상 결과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문서화하는 데는 끝까지 거부했다.
  1937년 3월 국민당은 대회를 열어 서안사건 이후의 정책변화에 대한 문제를 논의했다. 이 대회 앞으로 공산당은 다음과 같은 3개항목의 제안서를 보내왔다.
  1. 내란을 중지하고 국력을 집중하여 외적에 대항할 것
  2.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와 정치범을 석방할 것
  3. 각당 각파의 대표자회의에 의한 공동구국의 실시
  국민당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결국 그 골격을 수용하기로 결정하면서. 아울러
  1. 홍군의 해체
  2. 소비에트 정부 해체
  3. 적화전선 중지
  4. 계급투쟁 중지
  5. 삼민주의 복종
을 내세웠다.
  마침내 장개석은 공산당을 합법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항일투쟁에서의 단결을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써 제 2차 국공합작이 완결되었다. 장개석은 그렇게 오랫동안 뿌리뽑으려고 노력했던 공산당과 다시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 되고 있었고, 이에 공동 대처해야 한다는 공산당의 주장이 국민들로부터 명분을 얻었기 때문이다. 특히 37년 7월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본격화 되면서 국공합작에 의한 항일전선은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 섬서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홍군부대를 국민혁명군 제 8로군으로 개편했으며, 다음해 1월에는 양자강 하류의 공산당 분견대를 신 4군으로 재편했다.

   

87 피에 굶주린 지옥의 병사들 - 중일전쟁과 남경대학살(1937년)


  그 때 우리나라에서는 -
  1936년/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 일장기 말소사건
  1937년/ 백백교 사건

  일본의 침략은 노구교 사건이후 노골화되었다. 1937년 어느날 몇발의 총성이 일본 노구교 근처에서 야간연습을 하고 있던 일본군 근처에서 울렸다. 발포가 어느 쪽에서 이루어졌는지 불분명하지만 일본은 이 총격을 일본에 대한 중국의 도발행위로 간주했다. 일본군은 즉각 보복공격을 퍼부었으며 일본정부는 중국에게 사죄 및 발포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만일 이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협박까지 서슴치 않았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이 조건을 들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노구교 사건 이후 몇차례의 충돌이 있었지만 현지에서는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내각회의에서 이 사건을 중국이 계획적으로 일본에 무력 대항한 것으로 단정하고 중대결정을 했다는 발표를 했다. 그 중대결정이라는 것은 곧 전쟁이었다.
  일본 내의 군대들이 속속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8월 13일에는 상해로 전쟁이 확대되었다. 1937년 8월 15일 일본의 고노에 내각 정부는 (지나군(중국군)의 폭력을 응징하여 남경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지금 단호한 조치를 취할 때에 이르렀다)고 발표하여 전면전을 선포했다. 이른바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중, 일 양국의 군대는 치열한 전투를 계속했으며 11월에 일본군은 중국의 중요거점인 남경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중일전쟁이 시작된지 6개월여 만인 12월 13일 마침내 남경은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5만여 명의 일본군이 장악한 남경에서는 이때부터 약 2개월 동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잔인한 학살과 강간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스러운 온갖 잔학행위가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일본군에 의해 자행되었다. 일본인의 만행은 거기에 가담했던 일본군인, 그것을 목격한 일본인 종군기자, 외국인 기자들에 의한 생생한 증언으로 밝혀졌다. 그것은 차마 인간의 탈을 쓰고는 할 수 없는 잔혹한 짓이었다.
  죽음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중국인의 증언이다.
  ( ... 부두에 도착하자 날이 어두워졌다. 일본군은 우리를 20명씩 한데 묶었다. 묶고 나면 바로 기관총으로 쏴 갈겼다. 나는 앞에있어서 다른사람을 따라 강으로 뛰어들었다. 총소리가 계속 귀를 때렸다. 기관총 소리가 멈추고 일본군은 한 사람씩 총검으로 찔렀다. 죽지 않고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총검질이 끝나자 시체들을 불로 태웠다)
  (아시아 신문)의 한 기자는 그가 목격했던 것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부두에는 시커멓게 탄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일본군은 시체를 한 구씩 강물에 내던지고 있었다. 신음소리, 시뻘건 피, 경련하는 손발...)
  (넓은 강 위엔 온통 시체였다. 강변에도 시체가 높이 쌓여 끝이 안 보였다. 시체 중에는 군인은 물론 일반 백성, 어린아이까지 있었다. 시체는 강물을 따라 하류로 흘러내려갔다)
  (중화문을 지키던 일본군이 한 여자를 강간한 후 중국인들에게도 똑같은 짓을 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어기면 당장 총살이었다. 때마침 성 안으로 한 스님이 들어오려고 했다. 일본군은 스님에게 여자를 강간하라고 했다. 스님은 합장하고 염불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스님을 못난 놈이라 비웃으며 칼로 스님의 성기를 잘라버렸다)
  이 뿐만 아니라 시아버지에게 며느리를 강간하게 하고 아들에게 어머니를 강간하게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만행이 자행되었다.
  몇십년 뒤 이 학살에 가담했던 일본군인의 일기가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그 일기는 (요즘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죄없는 중국인들을 산 채로 매장하거나 장작불에 밀어넣어 몽둥이로 때리거나 혹은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라고 쓰고 있다.
  미국의 (뉴욕 타임)지 기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남경 점령은 일본군에게 있어서 정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이 군사적 승리는 야만적 잔혹행위, 포로들의 대량학살, 강탈, 강간 및 양민학살로 일본민족의 명예에 오점을 남겼다)
  나중에 국제극동군사재판 판결에 따르며, 살해된 사람만도 비전투원 1만 2천 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 등이고 근교로 피난간 시민 5만여 명 등 합계 13만여 명이 2개월 동안 살해되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최소한의 것이고 실제로는 30여만 명이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물론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중국의 유명한 작가의 한 사람인 임어당은 이 전쟁의 참사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후 오늘에 이르러 처음으로, 병사들이 웃는 얼굴로 어린아이를 공중으로 던졌다가 떨어져내려오는 어린아이를 날카로운 총검의 끝으로 받아내고는 그것을 스포츠라 부르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눈을 가리운 포로가 참호 옆에서 총검술 등과 같은 훈련의 표적으로 사용되었다)
  일본군의 만행은 남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점령한 곳은 어디에서든 계속되었다. 말 그대로 그들은 인간의 피에 굶주린 아귀들이었다.
  일본군은 38년 5월에는 서주를 점령했으며 10월에는 무한, 광주등을 점령했다. 남경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을 피해 이미 무한으로 옮겼다가 다시 중경으로 피해 있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 내에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하려 했던 일본의 의도는 38년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빗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은 계속 승리했지만, 중국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45년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기까지 힘겨운 전투를 계속해야 했다.

   

88 두 자매의 다른 길 - 송경령과 송미령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38년 / 한글교육 금지됨
  1939넌 / 강제징용

  손문은 1924년 간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그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긴다.
  (나는 국가의 일에 전념하느라 가산을 다스리지 못했다. 내가 남기는 책, 의복, 주택 등 일체는 나의 처 송경령에게 주어 이것으로 기념이 되게 하라. 나의 딸은 스스로 장성하여 자립하게 하라. 바라건대 각각 자애하고 또 나의 뜻을 이어갈 것을 부탁한다)
  그의 유언에서 보이는 부인 송경령의 송씨 가문은 중국현대사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세 자매 중 첫째 애령은 공상희와 결혼했다. 공상희는 공자의 직계후손으로 나중에 국민당의 재무부장이 된다. 둘째 경령은 중국혁명의 아버지인 손문의 혁명동지이자 부인이다. 셋째 미령은 손문을 이어 국민당 정부를 이끌다 공산당에 패하고 대만으로 쫓겨난 장개석의 부인이다.
  이 세 자매의 아버지는 12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남부에서 감리교파 목사가 된 후 중국으로 돌아와 상해에서 정착했다. 결혼 후 그는 목하를 그만두고 외국의 기계를 수입해 파는 사업가로 변신하여 많은 돈을 모았다. 경령과 그의 자매들은 중국사회의 생활수준보다 월등히 높은. 서구화되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 계통의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행로는 엄청나게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경령과 미령은 10대였던 190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다녔다. 경령은 미국의 분위기에 매몰되지 않고 항상 그가 중국인임을 잊지 않았다. 그녀와 달리 동생 미령은 (나에게서 오직 동양적인 것은 나의 얼굴 뿐이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그들 자매는 판이한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손문과 경령이 가까워질 수 있었던 기간은 손문이 혁명에 실패하고 원세개에 밀려나 일본에 망명하고 있던 시기였다. 1915년 10월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손문의 나이 49세, 경령의 나이 22세였다. 그녀가 손문과 결혼하기 전 손문에게는 부인이 있었으며 그 부인과의 사이에 3명의 자녀가 있었다. 중매결혼한 사이였다. 그 부인은 헌신적인 아내이자 좋은 어머니였지만 혁명을 함께하는 동지적인 위치는 아니었다.
  전통적인 중국의 관습에 의하면 본부인이 있을 경우 첩이 되든가 아니면 본부인이 잘못할 경우 내보내고 새 부인을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손문은 그 둘 중 어느 것도 아니고 처음 부인과는 영원한 별거라는, 당시 중국 관습에 있지도 않은 방식으로 관계를 정리하고 경령과 결혼했다. 물론 대부분의 주변 사람들이 그 결혼에 반대했다. 경령의 아버지는 그녀를 가두었으나 그녀는 유모의 도움을 받아 창문으로 탈출하여 결혼을 강행했다.
  결혼 후 그녀는 전통적인 중국여성의 이미지를 깨고 남편을 도와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으며, 손문의 가장 중요한 협조자이자 정치적인 동반자로서 손문이 혁명운동에 전력할 수 있도록 하는 최고의 배우자가 되었다. 손문은 1924년 북경의 군벌정부의 초청을 받아 북경으로 향했다. 그러나 손문은 심한 병에 시달리고 있어 북경정부와의 협상을 시작하지도 못한 채 간암으로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경령은 손문 사상의 가장 확실한 계승자로서 중국 수억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을 위한 혁명운동가의 자리에 굳건하게 섰다.
  그녀는 북벌운동이 전개되면서 무한정부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특히 1927년 여성정치 훈련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외국의 한 기자는 당시 그녀의 풍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태도면에서는 예절바르고 부드러웠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강철 같은 기질이 있었다. 나는 그녀가 가족과 사회의 온갖 억압속에서도 굳건히 자기의 길을 고수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20년대 말 북벌이 끝난 후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무자비한 탄압을 가할 때, 경령은 공산당에 우호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시시각각 느꼈으며 결국 소련으로 잠시 망명을 떠나게 된다. 소련에서 환영받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 그녀의 동생인 미령이 장개석과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장개석도 부인이 있었으나 미령과 결혼하기 위해 이혼한 상태였다. 장개석은 손문이 죽은 후 경령에게 청혼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경령은 이 청혼을 거절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정략적인 방편으로 사랑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그녀는 몇 년 전 장개석이 동생 미령에게 청혼했을 때 크게 반대한 적이 있었다.
  언니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혼식은 성대하게 그리고 공식적인 행사로 진행되었다. 결혼식장에는 거대한 손문의 사진이 걸렸다. 장개석으로서는 처가 쪽이기는 하지만 손문과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자기의 정치적인 위치를 강화시키기 위한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개석과 결혼한 동생 미령의 생활은 언니 경령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미령은 국민당 정부와 미국 사이의 중요한 고리 역할을 했다. 그녀는 미국의회에서 연설을 행한 최초의 여성이었으며 미국 사회에서 큰 명망을 얻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미국인들이 뽑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10명의 여성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두 동생인 경령과 미령이 중국의 대정치가의 부인으로서 서로 다른 방향이기는 하지만 대외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에 비하면 큰 언니 애령은 공식석상에 나타나는 것보다는 그늘에 숨어살면서 재산을 모으는 일에 열중했다. 남동생 송자문은 국민당의 재정부장관 외교부장관 및 행정원장 등을 지낸 사람인데 세계에서 가장 부자라고 널리 알려질 정도였다. 어쨌든 이런 막강한 인맥으로 송씨 가문은 중국국민당을 이끄는 가장 영향력있는 가문이 되었다.
  송씨 가문을 둘러싼 이러한 경제력, 정치, 군사적 배경은 하나의 거대한 왕국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발단은 아버지의 사업수완, 경령과 손문의 결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당은 장개석 가문, 송씨 가문, 공씨 가문 등 인척으로 얽힌 몇 개의 가문에 의해 운영되었다.
  나중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그의 대통령 시절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국민당을 돕기 위해 우리가 보낸 돈은 모조리 바닥났다 ... 그 가운데 많은 돈이 장개석과 그의 부인, 그리고 송자문 및 공상희 집안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그들은 그 돈을 숨겨서 뉴욕의 부동산에 투자했다)
  그러나 경령은 이러한 반동적인 합작을 바라지 않았으며 결국 정치적으로 반대편에서 이 거대한 왕국을 무너뜨리는 길고 험난한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항일전쟁의 시기에 경령의 주임무는 전쟁구호물자를 모아 항일운동을 하고 있는 공산당에게 보내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 일에 헌신적이었으며, 정작 그녀 자신은 세들어 살았으며 개인소유는 거의 없었다. 그녀에게 사치는 당시 중국 사정에서는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난한 중국을 도와달라는 탄원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는 동생 미령의 짐은 고급 화장품과 란제리, 모피코트로 가득햇다. 미 군용비행기의 병사들은 그녀의 특별 구입품을 운반하면서 분노하여 소지품 상자를 부숴버린 일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두 자매의 삶은 중국 현대사를 상징하고 있다. 미령의 삶은 곧 국민당의 부패상과 연결되고, 경령의 혁명운동은 공산당과 연결되었다.

   

89 약진하는 홍군, 무너지는 국민당 -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1949년)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49년 / 창시개명 강요. 중국 중경에 광복군총사령부 성립
  1942년 / 조선어학회 사건

  전쟁 이전까지 국공합작에 의해 항일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던 공산당과 국민당은 겉으로는 일본군과 싸움에 온힘을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안으로는 일본 패망 이후 중국에서의 패권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개입 등으로 일본과의 전쟁이 점차 유리하게 전개되어가자 전쟁 이후의 중국에 대한 여러 가지 설계가 양세력들에 의해 검토되고 있었다. 장개석이 구상하고 있었던 전쟁 이후의 새로운 중국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중국 고유의 도덕과 기능의 회복
  2. 국민의 건국신념과 결의의 격려
  3. 중국 전성기인 한나라, 당나라 규모와 기백 수준으로의 부흥
  즉 유교적인 도덕윤리를 회복하여 국력을 강화하여 세계적인 국가로 다시 한번 성장하자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삼민주의를 이념으로 하여 국민당이 중심이 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에 비해 모택동은 전쟁 이후 새로운 국가형태를 연합정부론으로 정리하고 있다. (중국은 각 당파와 무소속의 대표자를 단결시켜 민주적인 임시 연합정부를 성립시키고 민주적 개혁을 실행하며, 당면 위기를 극복하여 전 중국의 항일세력을 통일, 일본 침략자들을 물리쳐야 한다. 그후 폭넓은 민주적 기반 위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연합적인 성격의 민주정부를 만들어 해방 이후 중국 전인민들을 이끌어 중국을 하나의 독립된 자유, 민주, 통일 국가로 건설해야 한다)
  2차대전의 전세가 일본 쪽에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전개되는 마지막 사건은 소련의 극동전선의 개입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은 1945년 4월 얄타회담에서 일소중립조약을 깨고 8월부터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겠다고 통보했다. 8월 9일 소련군은 극동의 500킬로미터 전선에 걸쳐 일본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약 150만명이다. 소련군은 8월 중 하얼빈, 여순, 대련 등 만주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만주의 괴뢰정부 만주국도 끝을 맺었다.
  일본은 두 번의 원자폭탄 투하에 굴복하여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이제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최후의 한판이 남아 있었다. 중국인들은 오랜 전쟁 끝에 찾아온 평화가 깨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1945년 8월 말 모택동은 장개석의 초청을 받아 중경으로 가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평화교섭을 위한 회담을 했다. 이 회담에는 미국대사가 함께 했다. 미국은 당연히 국민당 정부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만일 소련의 도움이 없다면 공산당은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겉으로는 공산당과 평화회담을 하면서도 은밀히 공산당에 대한 마지막 타격을 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본이 항복했을 1945년 당시 전력에서는 국민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모택동과 만난 후 얼마 되지 않은 그해 10월 국민당 정부는 약 200여만에 가까운 군대를 동원하여 공산당의 거점인 해방구를 공격했다. 물론 미국은 국민당을 지원했다. 중국 내에서는 미국의 내정 간섭에 대한 반대여론이 일어났다. 1946년 1월 미국특사 마셜의 조정에 의해 국, 공 양당의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각 세력들이 참여하는 정치협상회의가 중경에서 열렸다.
  국민당은 정치협상회의의 결정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 전쟁을 중지하자는 합의를 하고도 공산당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결국 정치협상은 만주지방에서 두 세력이 충돌하면서 깨지고 만다. 국민당은 소련군의 철수와 함께 만주의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고, 그 지역에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공산당이 그것을 막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무력충돌로 번지게 된 것이었다.
  두 세력의 싸움은 누가 더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느냐에 있었다. 그 점에서 공산당은 국민당보다 앞서 있었다. 실제적인 군사력은 약하지만 공산당의 정책은 중국인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해방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토지개혁은 인민들을 공사당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1946년 6월 200만에 가까운 국민당군이 화북과 화중의 대규모 홍군 근거지를 공격했다. 홍군은 화중지방, 양자강 하류 등의 거점에서 밀려났다. 국민당군은 47년 3월 대장정 이후 심장부였던 연안을 점령했다. 공산당의 홍군은 국민당의 공격대상이 되는 도시거점을 지키는 데 주력하지 않았다. 그들은 군대를 빼돌려 국민당군을 교란시키는 작전을 택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공산당의 근거지가 점령당했지만 공산당 군사력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철도가 통과하는 지역 등을 공격하여 국민당 군대의 보급선을 끊었다. 또한 연안을 내주는 대신 좀더 풍요한 지역인 산서지역을 장악했다. 홍군의 발표에 의하면 국민당군이 승리를 거듭하고 있었던 46년 - 47년 사이 국민당군 70만 명을 무력화시켰다. 국민당은 표면적으로는 이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패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는 중에도 두 세력 사이에는 평화협상이 계속되었으나 어느 쪽도 진정으로 상대방을 대화의 상대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장개석은 남경에서 47년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총통인 자신이 강력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헌법을 채택했다. 공산당도 역시 47년 2월 당중앙위원회에서 국민당 정부를 전복한다는 정책을 결정했다. 3월에는 중경, 남경, 상해, 북경 등지에 남아있던 공산당 대표단이 철수했다. 협상은 끝이 났고, 싸우는 일만 남게 되었다.
  초반에는 국민당의 군사적 우위에서 시작했으나 1년이 지난 47년 경에 이르면 전세는 공산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국민당 정부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부의 부패, 그리고 생존에 허덕이는 국민들의 고통을 외면함으로써 이미 민심을 잃고 있었다.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물가폭등에 대한 도시 노동자들의 항의시위가 계속되었고 농촌에서는 납세거부 시위가 돛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장악한 해방구에서는 토지개혁이 이루어져 농민들이 자기 땅을 가질 수 있었고 부패한 관리들에게 착취당하는 일은 없었다. 자유주의자들도 공산당 편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특정지역을 점령하거나 방어하지 않고도 국민당군을 붕괴시키고자 하는 공산당의 계획은 성공하고 있었다.
  1947년 홍군은 전세가 유리해진 것으로 판단하고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46년에 국민당군 400만에 대해 100만에 그쳤던 공산당 군대가 200만으로 증가했다.
  국민당 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는 엄청난 물가상승 등 경제가 붕괴되고 있었다. 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화폐를 월급으로 받지 않으려고 아우성을 칠 정도였다. 실업자도 늘어났다. 궁지에 몰리기 시작한 장개석은 1949년 남경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공산당과의 평화교섭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 답으로 공산당은 8개항의 평화안을 제시했다. 장개석을 포함한 장개석을 포함한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적 원칙에 따른 군대 재편성, 관료자본 몰수, 토지개혁등을 요구한 것이다. 장개석은 이미 대세가 기운 것으로 판단, 49년 봄부터 정부의 금괴와 정예부대를 대만으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내전 3년 만인 49년 1월 공산당은 국민당의 정예부대를 격파하고 북경에 입성했다. 4월에는 국민당 정부가 있던 남경을 점령했다. 남경 국민당 정부는 광동과 중경, 다시 성도로 옮겼다가 49년 12월 미국의 보호를 받으면서 대만으로 철수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공산당 창당 이후 겨우 30년이 지났을 뿐이었다. 수도는 북경, 주석에는 모택동이 선출되었다. 30년에 걸친 긴 내전에서 최후의 승자는 공산당이 된 것이다.

   

90 대륙의 실패를 거울삼아 - 장개석의 대만 통치 시작 (1949년)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43년 / 카이로 선언. 한국의 독립 결의
  1945년 /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됨
  1945년 / 8, 15 해방. 신의주 반공 학생 의거

  대만이 청대 이후 중국의 행정구역에 속해 있다가 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의 체결에 따라 일본으로 넘어가자 대만인들은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일본은 이 저항을 강력하게 무너뜨렸다.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대만은 일본의 대재벌인 미쓰이, 미쓰비시 등의 독점자본에 의해 경제적으로 착취당했다. 일본의 통치에 대한 대만인들의 저항 역시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신해혁명에 고무되어 일어났던 무장 항일봉기, 5, 4 운동의 영향을 받은 신민회 등의 의회설치 운동이 있었고 국민혁명의 시기에는 대만 공산당, 대만 농민 조합이 결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항일운동은 철저히 탄압당했으며 일본은 일본어 보급 등을 통해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때에는 20여만 명의 대만인들이 징집되어 동남아시아 전선 등지로 끌려갔으며,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일제 치하 조선과 흡사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일본 패망 이후 대만을 다시 중국영토로 회복시킨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45년 일본은 물러갔고 대만은 중국 국민당 정부 아래 속하게 된다. 국민당 지배하의 대만 역시 중국 본토와 마찬가지로 국민당의 부채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 미국의 문서에 의하면 대만에 파견된 신임 장관은 오만한 수행원을 거느리고 섬에 도착했는데, 이들은 대만에서 주로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47년 2월 27일 정부의 전매품인 담배를 몰래 팔던 한 노파가 단속반에게 폭행을 당하자 주변 사람들이 이에 항의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경찰은 항의하는 군중에게 총질을 했다. 그 다음날 28일 이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장관 집무실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경찰은 또다시 이 시위에 기관총을 난사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른바 '2, 28사건'이다. 사건은 확대되었다. 대만의 유력인사들은 대만의 자치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32개항의 요구안을 제시했다.
  신임장관이었던 진의는 반발이 거세어지자 그들과 타협하는 듯 하면서 시간을 번 다음 본토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국민당 정부는 3월 8일 2천여 명의 군인을 파견했으며 이후에도 군대를 계속 증파했다. 3월 9일부터 섬 전체에서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졌다. 국민당의 결창과 군인은 행인을 약탈하고 총질을 했으며 총에맞은 부상병을 치료하던 간호원에게까지 총탄을 퍼부었다. 숨거나 도망가려는 자는 무조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약 3만 명 정도가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49년 대만 전지역에 계엄령이 내려졌으며, 그 계엄령은 87년에 가서야 해제되었다. 49년 12월 10일 장개석은 공산당에 패해 국민당의 50만 군대와 함께 대만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중국본토로부토 이주해온 국민당에 의해 '중화민국'의 이름으로 국가체제를 갖추게 된다.
  냉전체제의 세계질서 속에서 대만은 미국의 소중한 우방이었다. 미국은 1950년 6월 대만 해협에 미 7함대를 배치하여 대만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많은 원조를 했다. 미국은 1970년대 중국과 화해하고 중국의 유엔 가입 및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인정하게 될 때까지 대만과 장개석 정부를 중국으로 인정했다. 대만은 세계적으로 반공투쟁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대만은 냉전체제 아래 미국을 등에 업고 국제적인 지위를 누렸지만 국내에서는 국민당이 계엄령 상태 아래 철저한 장개석의 1인 독재체재를 유지했다. 단, 본토에서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관리들의 부패 등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벌을 했다. 그의 권력은 대만에서도 절대적이었다. 국민당 이외의 당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의회가 있었지만 국민당에 의한 1당제의 절름발이 의회였다. 오래 전에 중국본토에서 이주해와 대만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 중심의 독립된 국가를 만들기를 원했으나 국민당은 그것을 허용치 않았으며, 대만 독립운동가들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정치적으로 국민당 1당, 그리고 장개석 1인의 독재체제 아래 대만은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1960년대에 섬유나 가전제품 등 노동집약적인 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수출지향형의 공업화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현재 대만은 아시아 신흥공업국을 가리키는 이른바 '4마리 용' 중 가장 안정된 경제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세계 최대의 외환 보유고를 자랑하기도 한다. 중국대륙과의 경제수준의 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졌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대만의 지위는 계속 낮아졌다. 그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과 중국의 수교였다. 현재 국민당 지배의 대만을 하나의 국가체제로 인정하는 나라는 30여 국을 넘지 못한다. 우리 나라도 1992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의 국교를 단절했고, 이로인해 국내의 많은 화교들이 눈물을 삼켜야 했다. 중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다른 나라와 국교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대만은 세계의 많은 나라와 교역을 계속하고 있으며 50만에 가까운 정규군대 및 현대적인 장비로 무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75년 장개석은 마침내 눈을 감고, 그의 아들 장경국이 대만의 총통이 되어 대를 이어 통치를 하게 되었다. 그 장경국도 죽은 뒤 현재는 최초로 대만 출신이 이등휘가 대만을 통치하고 있으며, 일당 독재체제에 대한 민주화 시위에 따라 점차 대만인들의 정치적인 발언권도 강화되어 가는 추세이며 야당의 존재도 인정되고 있다.

   

91 '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리다' - 한국전쟁 참전(1950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1946년 / 신탁통치 문제로 미, 소 공동위원회 개최. 반탁운동 일어남
  1949년 / 남한 총선거 실시. 대한민국 수립 선언
  1949년 / 반민특위 발족, 김구 피살

  1950년 6월 한반도에서 남한과 북한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다.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소집을 요구했고,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유엔군을 파견하게 된다. 미국은 남한을 공산세력을 막는 기지로 삼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남한의 공산화를 적극적으로 막고자 했다. 동아시아에서 사회주의의 확대를 저지하고자 했던 미국의 계획을 중국국민당의 패배로 좌절되었는데, 이제 동아시아 보루인 남한이 공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전쟁은 초반에는 북한의 압도적인 우세로 전개되었으나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1950년 말쯤에는 남한군의 선두부대가 백두산까지 진격, 중국 국경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만일 북한이 패전하여 사회주의권에서 떨어져나간다면 중국으로서는 심히 우려할 상황이 올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러한 우려는 (입술이 망하면 이가 시리다)는 중국지도자의 말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한국국이 38선을 넘는 것은 상관없지만 미군이나 유엔군이 북상할 때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즉, 제국주의자드이 중국침략과 아시아를 장악하려는 움모에 강력히 대항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입장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싸움에 밀려 중국 쪽으로 퇴주한 북한군을 공격한다는 명목으로 중국영토내에 비행기를 띄우기도 했다.
  미국의 군사행동은 중국의 위기의식을 더욱 크게 했고, 마침내 중국은 1950년 10월 말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중국 홍군의 최고 지도자 중의 하나인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하는 인민지원군 약 60만의 참저으로 전세는 다시 북한 쪽에 유리하게 기울어 한때 다시 서울이 함락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은 다시 수복되었고 원래의 경계선이었던 북위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중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북한을 돕자 맥아더 사령관은 대만의 국민당 군대 50만을 동원하여 중국 남부를 공격하고 동북지방에 30 - 40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한 제안에 발맞추어 당시 대통령인 트루먼도 그해 11월에 (원폭 사용을 고려할 수도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은 영국과 프랑스의 반대, 그리고 국제여론도 그것을 지지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실행되지는 않았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중국에 대한 경제봉쇄를 했으며 미국의 동맹국에게도 이 봉쇄에 동참하기를 요구했다. 미국은 1951년 5월 유엔 총회에서 중국 및 북한에 대한 전략물자 금수안을 가결시켰다. 미국 내에서는 '상호방위원조통제법'을 통과시켜 특정품목을 공산국가에 수출하는 나라에 대해서는 미국의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이런 미국의 조치는 중국이 자본주의 국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더욱 좁게 만들었다. 중국경제는 이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교류로 제한되었고 경제개발에 막 나서는 중국의 상황을 매우 어렵게 했다.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1년여 만에 다시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된 중국은 다시 정쟁수행을 위한 체제로 국가정책을 짜게 되었다. 여러 정파 및 대표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국인민 세계평화방위, 미국침략반대 위원회' 가 만들어졌으며, 미국에 대한 저항의식을 국민에게 불러일으키는 작업들이 행해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내에서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국민당 군대가 다시 중국에 진입하기를 바라는 구체제 인물들과 국민당과 관련된 세력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공산당 간부를 암살하거나 토지개혁을 방해하는 등의 움직임도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한 통제가 강화되었으며 51년에서 52년 사이에는 부패한 관료들과 자 가들의 불법행위를 적발하여 처벌했으며, 지식인들의 사상개조운동이 전개되었다.
  노동자들에게는 국가를 위한 경쟁적인 생산활동을 촉구했고 농민들에게는 사회질서 강화, 민병 참가, 군량납인 등을 요구하였다. 상업이나 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투기방지, 물가안정 등을 이룰 수 있도록 유도했다. 많은 인민들이 이러한 정신무장을 하는 교육에 참가했으며 북경, 상해, 천진 등과 같은 대도시 인민들의 80퍼센트 정도가 국가를 위한 애국선언에 동참했다. 공산당 정부는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한국전에 계속 참가하면서 반혁명운동을 완전히 누르고, 토지개혁 등 새로운 국가건설을 가속화시켰다.
  한국전쟁은 51년에 접어들어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어느 쪽도 일방적인 우세를 보이지 않게 되면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이 때 중국은
  1. 미국에 대항하는 원조운동을 더욱 강화할 것
  2. 애국 증산운동을 제창, 추진할 것
  3. 모택동 사상 학습운동을 조직할 것
등 3개항을 결의했다. 이는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전쟁이 끝나는 이후 미국의 장기적인 군사압력에 대항하고 국방의 강화 및 근대화와 중공업 기반건설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급속하게 만들어내자는 중국 지도자들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전쟁은 1953년 휴전협정의 조인과 함께 끝이 났으며 이때부터 중국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착수하게 된다.
  한국전쟁은 중국 내에서 공산당의 중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자유주의자 등 공산당에 속하지 않는 파벌들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공산당은 중국 내에서 더욱 확고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92 못 다 피고 시든 꽃 - 백화제방, 백가쟁명(1956년)


  그 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50년 / 6, 25 동란 발발
  1951년 / 거창 양민학살 사건
  1952년 / 발췌개헌으로 이승만 대통령 재선
  1953년 / 반공포로 석방. 휴전협정 조인

  1957년 1차 5개년계획이 끝났을 무렵 중국의 경제조건은 상당히 개선되었다. 임금은 높아졌으며 실업자는 줄었다. 이 상황에서 모택동은 57년 2월 (인민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중국에 건설된 사회주의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의견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사회주의 사회에는 적과의 모순이 있으며 인민 내부의 자체모순이 있다는 것이고, 두 종류의 모순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인민 내부의 모순을 잘못 처리하게 되면 모순이 격화되어 적대적인 모순으로 발전하여 이러한 생각은 헝가리와 같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민주화 시위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당시에는 소련, 폴란드, 헝가리 등의 사회주의 국가의 부정적인 측면이 드러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공산당의 지배권이 유지되는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가 안고있는 모순점들을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인민 내부에서는 단결과 비판을 통한 새로운 단결을, 과학과 문화에서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경제적인 면에서는 국가이익, 집단이익, 개인이익을 아울러 고려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7년 4월 모택동은 상해에서 (당과 지식인의 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 당과 비당원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민주적인 여러 당파 없이는 안된다 ... 민주적인 여러 당파없이는 안된다 ... 민주적인 사람들을 타도하려 한다면 그들은 우리들에 반대하기 위해 궐기하게 될 것이다. 열린 마음을 가지고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꼭 필요하다. 백화제방과 공산당의 기반이 잡혔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공산당에 대한 비판은 견뎌잴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남의 표현이기도 했다.
  지식인들에게는 당에 대한 비판을 권유했다. 지식인들은 그동안 반대의견을 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권유가 있게 되자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당원들이 전분기관에가 실권을 쥐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이 당에 가해졌으며, 대학에서는 당 위원회가 대학을 장악하는 것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민주동맹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적인 당파들이 10여만 명 규모의 정치적 조직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당원 가운데서 이들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는 공산당의 지베권을 비판하는 사람도 나오게 되었다. 민주 제당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교통부장 장백균 등은 공산당의 지도권 자체를 부인하고 신문의 자유 및 양당제 아래의 정당정치적인 체제로의 변화가지도 주장하고 자섰다. 많은 수의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이러한 견해에 동조했다.
  공산당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비판이 제기되자 57년 6월부터 바대세럭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가했다. 이른바 '반우파 투쟁'이라는 것이다. 공산다의 지도권을 부정하거나 비판을 가한 사람들은 부르주아로 지목되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는 당의 지도권에 도전하는 부르주아우파들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자는 주장의 글을 실었다. 그후 1년여에 걸쳐 우파에 대한 총공격이 행해졌다. 58년 7월까지 전당원과 공산주의 청년단을 동원하여 우파에 대한 철저한 공격이 진행되었다. 국무원 고위관직에 있던 장백균과 자융기는 그들의 대표적인 표적이었다. 여류시인 정령 등 많은 믄예인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중앙당의 고위간부, 당원작가, 예술가 등 7천여 명이 우파로 지목되어 당에서 쫒겨나 노동개조에 보내지거나 한직으로 밀려났다. 당의 말만 곧이 곧대로 믿고 서슴없이 비판에 나섰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정직성으로 인해 고통을 당했다.
  심지어는 모택동이 우파는 전인구의 5% 정도일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따라 각 직장에서 무턱대고 5% 정도의 인원을 찍어 추방한곳도 있을 지경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등소평이 다시 집권하게 되는 1970년대 다시 복권되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이 반우파투쟁 이후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침묵하거나 아지면 중앙당이 행하는 정책을 무조건 따르게 되어 중국의 발전을 늦추는 걸림돌이 되었다. 반우파투쟁은 공산당의 경직성이 강화되는 것을 잘보여주는 사건이었다.

   

93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수립을 위해 - 집단농장화 및 대약진운동(1950년대 후반)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54년 / 사사오입 개헌
  1956년 / 3대 정,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됨

  한국전쟁이 끝나가는 52년경 중국에서는 토지개혁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본격적인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계획이 세워진다. 이 정책의 핵신은 장기간의 점진적인 사회주의 공업화의 실현, 국가가 주도하는 농업, 수공업, 상업정책 등이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3차에 걸친 5개년계획이 수립되었고, 제1차 5개년계획은 1953년부터 시행되었다. 이 계획대로라면 67논 3차 5개년개획이 끝나는 해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를 안정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 계획은 경제적인 측면에 집중되었는데, 사회주의 선배격인 소련을 모델로 했다. 농업에서 소련에서 집단농장인 콜호즈와 유사한 농업합작사를 추진하는 한편, 중공업을 크게 발전시키고자 했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이 계획이 끝나는 시기까지 무기의 자급체계를 비록한 자주 국방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농업면에서는 소농 중심의 농업상산체제를  고쳐 집단농장화를 적극 추진해나갔다. 집단농장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나 기대했던 만큼의 소득증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집단농장 관리의 문제, 그것을 운영하는 간부의 자질 부족, 강압적인 방법으로 인한 농민의 참여의식 부족 등의 이유였다.
  55년 전국 대표대회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첫째, 자발적인 의사, 상호이익을 기초로하여 빈농에 의지하고 중농과 단결할 것, 둘째, 겅제성을 줄이고 중농의 이익을 해치는 것을 줄일 것, 셋째 개인이 경영하는 농가의 생산의욕을 꺽지 말 것 등의 개선책을 마련했다.
  어떻든 1차 5개년계획으로 인해 농업, 수공업, 자본주의적 상공업은 사회주의적 집단소유 혹은 국유제가 되었다. 공업의 비중이 농업보다 높아졌고, 철강생산 등의 목표량을 당성하는 등 사회주의 체제이 기초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1956년 9월 8회 당대회가 열려 지금까지의 경제정책에 대한 검토 및 새로운 정책에 대한 결의가 있었다. 이 회의에서는 그 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2차 5개년계획의 방향을 결정했다. 첫째 국민경제의 균형있는 발전과 각 부분간의 균형있는 발전, 둘째 공업과 농업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농업에 대한 투자비율을 높일 것, 셋째 합작회사의 이익 분배비율을 높일 것 등이었다.
  그러나 1975년에 접어들면서 중국 사회주의 건설계획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조짐이 보였다. 10월 당대회에서 (빠르고 휼륭하고 유익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 는 원칙이 결정된 것이다. 이른바 대약진운동이다.
  제국주의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는만큼 무엇보다 인민 내부의 반사회주의 세력들의 반동적인 움직임을 차단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 중국의 정책노선이었다. 이것은 공업과 국방건설의 속도를 빨리해야 한다는 정책변화로 이어졌다. 그 속도는 15년 내에 공업생산면에서 영국을 추월하자는 것이었다. 이로한 정책은 58년 당대회에서 통과되었다. 또한 이제는 소련을 모델로 하지않고, 수정주의로 빠지고 있는 소련을 새로운 사회주의 모델로 만들어내고자 했다.
  공업정책이 적극 추진되었으며 늘어나는 노동자들의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합작사가 합병되어 인민공사가 만들어졌다. 58년 말에는 거의 대부분의 농가가 인민공사에 소속되었다. 인민공사는 평균5천 호 정도 구성되고 전국에 2만 4천여개가 설립되었다. 인민공사에서는 공급제와 임금제가 채용되었는데, 식비는 노동의 유무에 상관없이 인민공사가 지급하고 일정 등급에 따라 임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임금은 거의 유명무실한 것이었고 노동에 따른 분배원칙에도 맞지 않아 노민들의 열심히 일할 의욕을 고취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대약진운동은 실패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조건에 맞지 않는 무리한 목표는 농민과 노동자들을 혹사기켰드며, 목표량에 이르지 못했어도 허위보고를 올리는 일이 빈번했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 대약진운동은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고되곤 했다.
  현실은 보고된 수치와는 전혀 달랐다. 농촌에서는 식량의 자급자족이 되지 않아 굶어죽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거지가 되거나 강도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대약진운동은 참담한 실패로 끝난 것이다. 59년 국방상 팽덕회는 대약진운도의 실패를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그는 당을 분열시모택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직위에서 파면되었다. 당에서는 대약진운동이 실패는 급속한 공업화 노선 때문이 아니라 소련의 비협조, 자연재해 때문이었다고 진단했다.

   

94 수정주의 대 교조주의 - 중, 소의 이념대립 (1963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
  1960년 / 4, 19 학생의거
  1961년 / 5, 16 군사혁명
  1962년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성안

  중국공산당은 1921년 공산당의 창립 때부터 소련공산당의 지도를 계속 받았다. 1949년 중국을 장악한 직후에도 모택동은 소련이 이끄는 국제 사회주의를 확고하게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국제사회에서 벌언권을 강화해나가면서 점차 소련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특히 소련과 견해차이를 보이는 것 중 하나가 1950년대 미국에 대한 입장이었다. 중국은 '미제국주의'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주장한 반면 소련은 가능하면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입장이었다. 그외에도 국제 공산주의 조직에 대한 지원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보였다.
  1957년 11월 모스크바에서는 12개국이 참가한 공산당 회의가 열렸다. 모택동은 중국 대표단을 이끌고 이회의에 참석, 미국과의 핵전쟁도 피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발언을 한다. 58년 2월 3일 (인민일조)는 다음과 깉이 말하고 있다. (소련을 포함한 사회주의 진영각국의 지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국제환경은 의연히 자본주의 제국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지본주의 집단들은 우리들을 전복시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소련이 미국과의 대결을 피하고 평화를 원하는 타협적인 자세를 보이게 되는데에 대해 중국은 아직도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의에 대한 공격의도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점에서 중국은 소련이 사회주의의 순수성을 포기한 수정주의 노선이라고 비판하는 데 비해 소련은 중국이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지않고 사회주의의 원칙에만 충실하고자 하는 교조주의라고 비판한 것이다. 서로 간의 대립은 중국으로 하여금 소련에 의존하지않는 국방력 건설, 스스로의 힘에의한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겠다고 선언하도록 했다. 그러한 중국의 독자적 군사력 강화계획은 결실을 맺어 1964년 최초의 원폭실험에 성공했으며, 67년에는 수폭실험에도 성공했다.
  58년 7월 모택동과 흐루시초프 사이에 중, 소정상회담이 열린다. 이 회담에서 흐루시초프는 중소연합함대를 구성하여 극동의 방위체제를 설립할 것을 제안했다. 이것은 소련이 핵전쟁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중국의 핵을 소련의 통제아래 두고자 하는 의도였다. 중국은 이 제안을 거부했고, 소련은 이에 대응, 원자폭탄의 견본과 생산기술을 제공하기로 한 약속을 무효화시켰으며, 소련에서 파견한 기술자들을 철수시켰다.
  59년에는 티베트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로인해 중국과 인도가 대립하게되자 소련은 인도를 지지하고 나섰다. 당연한 결과로 중국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중국과 인도의 대립은 대규모 전쟁으로 번졌고, 소련은 인도에 막대한 경제적 지원을 한다.
  대외정책 면에서 두 나라는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50년대 60년대 초까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데 소련은 이러한 나라들에 대해 무장투쟁보다는 정치적압력과 협상에 의한 독립을 권했고, 신흥독립국에 대해서는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정치 경제적인 속박을 당하게 하지 않기 위해 경제원조 정책을 위주로 하고 있었다. 소련은 지역적인 분쟁이 확대되어 미국 등이 개입하는 핵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중국혁명과 같은 방법이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민족해방의 모범이 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노선을 비파하면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무장세력들을 적극 지원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신흥 독립국들 상당수로부터 지지를 획득하게 된다. 이것은 중국이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서 양진영의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새로운 제3세력의 중심국가로 역할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중구구은 이제 소련을 더 이상 사회주의 종주국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소련은 사회주의 노선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수정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이 중국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는 소련을 제국주의 미국이 공모자라고 지칭하기까지 했다. 이제 중국은 자본주의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파악했던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만 해싿.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이 전쟁의 위혐을 내세우면서 사회누의 국가들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제국주의를 실천함과 동시에, 초강대국 두 나라 사이는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인정해주는 공모자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미국도 제국주의이지만 소련 역시 사회주의적 제국주의라는 것이다. 당시 중국지도자들은 이 두나라를 제1세계로 보고 그보다 국가의 힘이 좀 약한 서유럽과 일본 등을 제2의세계고 파악했다. 중국으로 볼 때  이 제2세계는 각국의 민족주의에 호소하면 미국과의 관계를 약화기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나라들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나라들은 제3세계로 파악한다. 제3세계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저개발국으로 끊임없이 제국주의에 의해 군사적인 의협과 아울러 경제적인 착취를 당하는 나라들이다. 60년대까지 중국은 미국을 '세계인민의 적'으로 지칭했으며 소련을 미국의 공모자로 불렀다. 따라서 중국의 대외정책은 이 두 나라에 적대하면서 제2세계 일부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노력하는 것 되에 주로 신생독립국드과 비동맹권을 형성하는 데 집중한다.

   

95 중국대륙을 휩쓴 광기


  그떄 우리 나라에서는
  1996년 / 제2차 경제개발 5계년 계회규의결 공포
  1996년 / 1, 21사건 발발, 김신조 생포. (국민교육헌장)

  1959년 6월 북경시 부시장인 오함은 인민일보에 (해서, 황제를꾸짖다) 라는 비유적인 수필을 발표했다. 명나라 때 해서라는 관리가 황제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그 수필의 한 부분은 (과거의 당신은 매우 조금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말할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의 마음은 혼미하고 독단적이어서 편견에 가득 차 있다. 당신은 언제나 스스로 옳다고 여겨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당신의 결점은 셀 수 없이 많다 ... )는 비판이 나온다. 이 비판은 과거 황제를 비판하고 있지만, 당시 중국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던 모택동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기도 했다.
  50년대 말 60년대 초 모태동은 어느 정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여 스스로 책임을 많은 핵심당원이 모인 확대 중앙공작회의에서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반동세력의 잔존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되며 그들에 대해 계속 투쟁해야 한다. 이미 전복된 반동계급이 다시 부활을 기도하고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다시 새로운 부르주아 분자가 생겨났으며, 따라서 사회주의 전체에걸쳐 계급과 계급투쟁이 존재하여, 그 계급투쟁은 장기간에 걸쳐 복잡하고 격렬하게 전개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모택동에 대한 비판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며, 그가 이러한 비판세력들을 누르면서 중국을 광기의 사회로 몰아가는, 이른바 문화대혁명의 조짐이 싹트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 그림은 문화대혁명 포스터. 홍위병들이 모택동의 지도에 따라 문화대혁명 사업들을 추진하는 것을 그렸다. 손을 들고 있는 붉은 책은 모택동 어록집.'
  61년 1월 북경에서는 오함의 (해서면관)이라는 작품이 연극으로 공연되었다. 모택동은 그전에 해서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이 연극은 모택동을 지지하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발단은 1965년 요문원의 (해서의 면관을 평한다)는 글이라고 한다. 그 글은 모택동에 비판적인 내용의 글인 북경 부시장 오함의 (해서면관)을 비판한 것이다. 이 글이 바로 모택동을 신격화하는 문화대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1966년 5월 청화대학에서 최초의 홍위병이 조직되었으며 6월, 10월 (인민일보) 사설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이란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
  1966년 6월 모택동은 북경대학장을 비난하는 하나의 대자보를 널리 공개하기로 하고, 그것을 계기로 그를 비판하는 세력들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그는 상해에서 북경으로 돌아와 8월에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 을 제정하고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숨어있는 부르주아의 대표적인물, 당내의 자본주의적 실권파를 공격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그 선봉대를 혁명저인 청소년이 맡아야 한다고 했다. 이들 청소년이란 바로 홍위병의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청년 노동자, 대학생, 중학생, 심지어 소학교 학생 등이 가담한 홍위병 단체가 무수히 만들어지면서 모택동의 외침에 호응하여 일제히 거리를 휩쓸기 시작했다. 66년 8월 천안문광장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축하하는 100만인 집회가 열렸으며 모택동은 이러한 광기를 동원하여 유소기, 등소평 등을 자기비판하게 하여 실각시켰다.
  67년에 접어들어 각 지역에서 호위병을 중심으로 한 무혁세력은 당과 정부가 장악하고 있던 권력을 빼았기 시작했다. 67년 1월 (인민일보)는 프롤레탈리아 혁명파로 하여금 자본주의 조선의 실권파들로부터 권력을 탈취할 것을 부추키는 사설을 실었다. 상해에서는 당과 정부관리를 밀어내고 호위병 중심의 상해인민공사를 만들기도했다. 이것은 모택동이 생각한 제2의 혁명을 통한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공산당 중앙정부는 문혁파들에 의해 탈취된 권력을 하나로 모아 혁명의원회로 통일시켰다. 68년에 이르면 임표가 이끄는 해방군의 지원을 받아 전국적으로 혁명위원회가 성립한다.
  그러나 홍위병들의 활동은 68년에 접어들어 서서히 약화되고, 문화대혁명의 불길이 점차 사그러드는 양상을 보인다. 모택동은 더 이상 홍위병들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대들은 나를 실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으로서 중국의 전사들을 실망시켰다) 는 말로써 문화대혁명을 진정시켰다. 68년 12월에는 도시 청년, 간부 지식인들을 농촌에서 일하게 하는 하방이 제창되었다. 이제 모택동은 자기에게 대항할 만한 세력이나 인물을 어느 정도 정리했기 때문에 홍위병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다음그림은 문화혁명에서 천안문광장에서 모여 지지대회를 여는 군중. 문화혁명은 권좌에서 밀려난 모택동이 당권파를 숙청하기 위해 일으킨 일종의 탈권운동이었다.'
  문화혁명은 69년에 와서 끝을 맺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임표의 해방군이가장 부각되었고 임표는 모택동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문혁 이전까지 관료층으로서 실권을 가지고 있던 세력들은 밀려났고 문화계에도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약70만 명이 문혁기간 동안에 불이익을 당했다고 한다.
  호위병에 가담하여 열성적으로 문화대혁명을 이끌었던 청소년들에게도 마지막 남은 것은 정치에 대한 불신과 증오, 공포, 그리고 부모나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느끼는 비탄의 심정뿐이었다.

   

96 '세계인민의 적' 과의 화해


  그때우리 나라에서는-
  1970년 /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2년 / (7, 4 남북공동성명) 발표. 10월 유신

  60년대 중국은 소련과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 절정은 1969년 우수리 강을 사이에 든 영토분쟁이다. 한때의 동반자였던 소련이 이제는 중국을 위협하는 가장 의험한 나라로 등장한 것이다. 이제 중국은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의 현실적인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동반자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소련에 대항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볼 때 미국은 '세계인민의 적'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중국은 부득이 세계에 대한 관점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중국의 변신에 중대한 계기를 미국이 제공하게 된다.
  1969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이른바 '닉슨 독트린' 을 박표했다. 긴장과 대결의 냉전체제를 청산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연일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미국의 경제도 해외 군사비 지출등으로 어려운 상태였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종결 및 냉전체제를 해소하고 싶었던 것이다. 닉슨 독트린으로 세계는 냉전체제에서 벗어나 긴장완화 시대, 이른바 '데탕트'의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위의 그림은 중,미의 화해는 양극화되었던 세계를 다극화로 변모시켰다. 사진은 1972년 중국을 방문한 닉슨 미대통령이 주은래와 만찬에 참석한 모습.'
  소련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중국과 국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미국은 서로에게 손짓하여 가까워질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69년 소련과 중국의 국경분쟁에 대해 미국은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중국 편을 들었다. 당시 중국은 소련을 상대로 전재을 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미국 사이를 두껍게 막고 있던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도는 매우 빨랐다.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던 69년 11월에 미국함대의 대만해협 순찰이 중단되었으며 12월에는 중국에 대한 미국인의 여행제한이 완화되었다. 1970년 11월의 유엔총회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유엔에 받아들이고 대만을 밀어내자는 안이 알바니아에 의해 제안되어 과반수를 간신히 넘기면서 통과되었다. 71년 4월 미국의 탁구팀이 중국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유명한 '핑퐁외교'다. 1971년 10월 유엔총회에서 중국의 유엔가입이 승인되고 중국은 안정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대만은 유엔을 탈퇴했다.
  닉슨은 파키스탄이나 루마니아의 지도자들을 통해 미국 고위층의 북경 방문가능성을 타진했고 중국은 이에 긍정적인 답을 했다. 1971년 미국의 국무장관인 헨리 키신저가 비밀리에 북경을 방문했다. 그는 주은래를 만나 대만과 월남을 비롯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긴 시간 동안 회담했고 주은래는 닉슨의 중국 방문을 요청했다. 닉슨이 중국을 방문할 것이라는 발표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것은 동아시아 관계는 말할 것도 세계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1972년 2월 '세계인민의 적'의 우두머리인 미국 대통려이 북경에 모슨을 드러냈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 (상해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이 공동성명은 양국의 20여년간에 걸친 적대관계를 끝내고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우연히 또는 오산이나 오해로 인한 적대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국가들 사이의 관계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은 (협상을 통한 해결책이 없다고 하더라도 자결의 목적과 부합되는 지역으로부터 모든 미군이 궁극적으로는 철수할 것 ) 임도 아울러 박ㄹ혀 베트남에서 철수하겠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다. 중국도 (자유와 해방을 위한 모든 피압박 인민들과 민족들의 투쟁) 에 대한 지지를 거듭 밝히면서도 중국은 결코 초강대국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울러 두 나라는 (다른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3국과의 협정이나 이해관계) 에 따르지 않을 것임을 밝혔는데, 이것은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이 소련과 공모하여 중국을 위협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가장 큰 걸림돌은 대만이었다. 이 문제에 관해 (상해공동성명) 에서는 아주 외교적인 언어로 (무력의 사용이나 위협에 호소하지 않고) 국제분쟁을 해결할 용의가 있음을 양국이 합의하는 문구를 넣고 있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대만은 이미 오래 전에 모국에 속한 중국의 1개 성) 이라고 하여 대만에 관한 문제는 어떤 다른 나라가 간섭할 권리가 없는 중국 국내의 문제임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대만해협 양쪽에 있는  모든 중국인에게는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을 뿐이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 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외교적인 표현이다. 미국은 대만을 오랫동안 지지해왔고 반공전선의 가장 철저한 우방으로 간주해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외교적인 표현은 중국이나 대만 어느 쪽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김으로써 대만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중국에게도 명분을 제공하는 방법이었다. 이와같이 (상해공동성명) 은 서로 합의하고 있는 부분과 아직은 합의되지 않는 양국의 견해차이를 밝히고 있다.
  이 공동성명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두 나라는 스포츠나 문화 등으로부터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로 했다. 1973년 키신저는 다시 중국을 방문, 중화안민공화국과 미국이 북경과 워싱턴에 연락 사무소를 열기로 합의했다. 양국의 정치가들과 민간인들의 교류는 빈번해졌으며 교역량도 급속하게 늘어났다. 냉전체제는 끝나고 세계는 바햐흐로 다극화시대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97 문화대혁명의 후예들 - 4인방 체제의 등장 (1973 -- 1976)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73년 / 6, 23 평화통일외교정책 발표. 김대중 피랍 사건
  1974년 / 긴급조치 1, 2, 3, 4, 호 선포. 육영수 여사 피격
  1975년 / 유신헌법 찬반투표 실시 (찬성 73. 11%)

  문화 대혁명을 거치면서 모택동의 혁명동지이자 유력한 당간부였던 유소기와 등소평은 실각하여, 유소기는 감옥에서 폐렴으로 죽었으며 등소평은 강서의 한 시골 트랙터 공장으로 쫓겨갔다. 모택동의 우상숭배는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홍위병의 광란은 2년여 만에 진정되었고 그들은 하방에 의해 다시 시골로 내려갔다. 69년에 중국공산당 9전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선출된 중앙위원 279명중 그전부터 중앙위원이었던 사람은 고작 53명에 지나지 않았다. 문혁기간 중 새로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이 당대회에서 임표가 모택동의 후계자로 정식 지명되고 모주석 바로 다음 직위인 부주석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문혁기간중 등장한 문혁파가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들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나 임표가 모반사건에 이은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한루 잠시 중국의 권력을 장악했던 4인방 그룹들이다.
  임표의 모반사건이란 당 부주석이었던 임표가 모택동을 암살하고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다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고 하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많은 의문점을 안고있다. 정부는 임표가 사건이 발각되자 헬리콥터로 국외탈출을 시도했으나 사막에 추락하여 그의 가족과 함께 사망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임표는 비행기를 타지 않았으며 체포되어 북경으로 끌려갔다는 소문도 심심치않게 나돌았다. 모택동은 임표를 후계자로 정하기는 했지만 그의 세력이 커지고 군대를 장악해나가게 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그를 제거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임표가 반란사건을 일으킬 필요는 별로 없었다. 그는 모택동에게 충실하게 따르기만 하면 그의 후계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표는 2인자의 지위를 넘어서서 모택동과 어깨를 겨눌 정도로 성장했고 모택동은 그것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2인자 임표가 제거되자 문혁파인 4인방이 급부상하여 주요관직을 장악햇다. 4인방이란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 강청, 4명을 가리킨다. 73년 대회에서 당 부주석에 선출된 왕홍문은 문화 혁명기에 활발한 조직할동을 전개했던 사람이다. 장춘교는 대약진운동의 이론가로써 활약햇던 인물로며, 붓대하나로 중국을 휘어잡아서 일명 '붓대'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평론가 요문원은 그의 문장실력으로 문화대혁명의 불을 지핀 사람이다. 그리고 또 한사람은 예술단원 출신으로 1930년대 모택동과 결혼한 강청이다.
  73년 공산당 전국대회를 계기로 문혁세대들은 급속하게 공산당 조직의 중심부로 스며들었다. 그들이 가장 취약한 곳은 군사부문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메꾸기 위해 민병을 그들의 세력기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당의 실질적인 운영경험이 없기 때문에 임표시대 추방되었던 당의 원로들이 복귀하계 되었고 그들은 원로중심인 주은래 주변에 모이게 된다. 이들의 복귀는 문화대혁명에의해 성장한 새로운 세력들에게 큰 위협이었다.
  76년 혁명 1세대이자 당의 핵심인 주은래가 죽었다. 등소평은 76년 4월 주은래를 추모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인 군중들을 배후조종했다는 죄목으로 다시 공산당으로부터 추방된다. 4인방과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이어서 공산당의 살아있는 신화였던 모택동도 죽게되자 이제 중국공산당은 바로  이 4인방에 의해 장악되었다. 물론 모택동은 그의 후계자로 화봉국이라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지명했다.
  4인방으로서도 세력기반을 갖추고 있지않는  화봉국의 등장이 그들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아직 4인방은 당의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택동의 죽음은 인민들이나 당간부들로 하여금 당에 대한 비판 및 4인방에 대한 반발을 거세게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존재가 사라진 공백기를 틈타 권력투쟁이 표면화되었던 것이다.
  화봉국은 이와 같은 분위기를 틈타 모택동이 죽은지 채 한달이 되기도 전에 4인방을 전격 체포했으며, 4인방체제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4인방의 급격한 몰락은 그들이 오직 모택동이라는 개인의 힘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당내에 탄탄한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4인방의 몰락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정도까지 그들의 기반이 취약한 것일줄을 몰랐던 것이다.
  4인방의 몰락으로 몰아간 세력은 화봉국을 중심으로 한 비4인방 문혁파, 섭검영, 이선념 등의 실무관료, 그리고 군인 그룹들이다. 그러나 화봉국도 확고한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화봉국은 그의 체제를 갖추어 나가기 위해 4인방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정치적 단결과 경제건설을 강조하는 한편 4인방의 체제하에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구제했다. 이때 등소평도 화봉국을 전면적으로 지지한다는 편지를 보냈고 그는 곧 중앙관직에 다시 복귀했다. 그러나 등소평은 중앙에 복귀하여 화봉국과 권력투쟁을 전개한 끝에 결국 그를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했다.
  4인방의몰락은 문화혁명을 통해 등장했던 문혁파의 모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문화혁명에 의해 추방되었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문화혁명에 의해 추방되었던 옛 관료들이 다시 복귀하는 것을 의미했다. 

   

98 오뚜기 정치인생 - 등소평의 집권 (1980년)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
  1979년 / 박정희, 피격 사망
  1980년 / 광주민주화항쟁 발발
  1983년 / KAL기 소련기에 피격, 미얀마 아응산 묘소 폭발사건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실권자는 등소평이다. 그는 작은 거인 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오뚜기라고 이컬어지기도한다. 그것은 그의 삶과 정치역경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의 키는 150cm 남짓된다. 키가 작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하늘이 무너지면 키가 큰사람이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게 된다) 라는 농담으로 받아 넘겼다고 한다.
  등소평은 1904년 사천성 광한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주였으며, 생모는 일찍죽고 계모 아래서 태어났다. 신문화 운동과 5, 4운동이후 중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유럽으로유학을 떠날 무렵 등소평도 1920년 16세의 나이로 그 무리에 가담한다. 나중에 영원한 동지가 되는 주은래도 그 프랑스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만났다. 프랑스의 생활은 고된 노동과 학습 그리고 공산ㄴ당 조직이라는 힘겨운 과업의 연속이었다. 그는 고무공장, 자동차공장 등에서도 일했다. 프랑스에서도 공산주의의 이념은 퍼져 있었으며 주은래는 이미 1921년에 프랑스에서 중국인의 공산주의 소모임을 만들었다. 1922년 유럽 중국소년 공산당이 설립되었고 등소평도 여기에 가입했다. 1924년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주은래가 중국으로 돌아간 후 등소평은 주은래의 뒤를이어 공산당 파리지부의 중요한 일을 맡게 되었다.
  그는 귀국하여 20년대 말부터 모택동과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30년대 초 모택동이 밀려났을 때 등소쳥도 모택동의 지지자로 여겨져 그의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것이 그가 맛본 최초의 정치적 패배였다. 그러나 장정 도중의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의 노선이 인정받게 되어 그도 모택동과 함께 다시 핵심요직에 들어갔다.
  제2차 국공합작 이후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하는 항일운동의 전선에서 활동했으며, 마지막 국공 내전시 황하 주변지역의 작전에 참가, 여러차례 전투를 치렀다. 그의 나이 45세 때인 1949년 북경에서 중화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그는 중앙인민정부 의원회 및 혁명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52년에서 54년까지 국가계획위원회 위원, 54년에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으로 사회주의 건설 초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삼람들 중 한명이었다. 그는 이시기에 모택동, 유소기 등을 이어 중국 공산당의 서열 6위에 있었다.
  50년대 중반부터 전개되었던 경제개발계획에서 대약진운동, 인민공사설립 등의 사회주의 경제정책이 실패로 판명되자 등소평과 유소기, 주은래 등은 좀더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고자 했다. 유소기와 등소평은 인민공사와 같은 집단경제체제에 대한 신념을 잃었으며, 이때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는 그의 유명한 발언이 나오게 된다. 즉, 국민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체제면 어느 것이든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모택동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들의 주장을 자본주의적이라고 비판했고 문화대혁명의 미친 바람속에서 유소기와 등소평의 실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은 66년 가을 이후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68년 10월 2년 만에 열린 중앙전회에서 국가주석 유소기는 당내의 직위와 아울러 당원자격마저 박탈당했다. 그는 제국주의, 수정주의, 반 혁명주의로 나가고자 하는 반역자이며 노동자의 적으로 매도되었고, 69년 폐렴으로 감옥에서 죽었다.
  등소평은 유소기만큼 중죄로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홍위병들이 발행했던 소책자에 거론된 그의 죄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당의 총서기로써 월권행위가 있었고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은 모택동의 권위를 깍아내렸으며, 농업정책에서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 의 주장을 했다....) 또한 서양의 부르주아 계급의 눌이인 브리지게임을 했다는 것도 비판의 주요한 항목이었다. 그의 아들은 북경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죄상을 밝히려고 했던 홍위병들이 그에게 아버지의 죄목을 자백하기를 강요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않자 그를 3층 옥상에서 집어던져 하반신이 마비되는 폐인이 되고 말았다.
  등소평은 2년여 동안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으며, 69년경 감금된 곳에서 그의 아내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화동지방의 강서시에가서 재교육을 받으라는 통고를 받았다. 그들은 남창 교외의 한 보병군사학교의 교장관사로 쓰이던 2층 석회석 벽돌건물에 거처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3년을 보냈다. 그의 나이 65세였다. 그들의 생활은 3년 내내 규칙적이고 단졸운 것이었다. 아침에는 트랙터 공장에서 일했고, 점심때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은 후 방송을 듣고 신문을 보았으며, 오후에는 마당의 채소밭을 가꾸었다. 노모는 바느질을 했다.
  71년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목되엇던 임표가 반란을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비행기 착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표가 죽은 후 등소평은 1973년 중앙에 복귀했다.
  73년이후 등소평의 위치는 강하되어 75년 에는 당부주석, 인민해방군 총 참모장에 임명되었고 75년 이래 생산활동을 향상시키는 경제정책을 적극 추천했다. 그의 정책은 생산성을 향상시키기이해 노동하는 만큼 보상이 돌아가게하고 선진기술을 받아들이는 것등이었다. 그러나 1976년 그의 유력한 후원자였던 주은래가 죽으면서 그는 또 시련을 겪게된다. 주은래는 프랑스 유학시절부터 친분이 있었고 등소평은 그를 스스럼없이 '영원한 형님' 으로 부를 정도였다. 그런 주은래가 죽자 이른바 4인방이라고 불리는 그의 반대파들은 등소평에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1976년 4월 5일, 이날은 죽은 자들의 면복을 비는 중국 전통의 청명절이었다. 주은래의 죽음을 추도하는 인파가 인만혁명기념비 주변에 모였고 주은래에게 경의를 표시하는 화환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러나 당국은 화환을 치워버렸다. 이것은 군중들을 분노케했다. 군중은 경찰차를 전복시켜 불을 질렀고 경찰 전망대를 불질렀다. 천안문 광장의 군중은 강제해산 되었으며, 등소평은 4인방에 의해 천안문 광장에서의 반혁명적 폭력을 선동한 혐의로 모든 직책을 박탈당했다.
  76년 9월 모택동은 마침내 숨을 거두었고 화봉국이 주석에 취임했다. 그는 광주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국가주석에 취임한 화봉국은 4인방들이 그의 지위를 노리고 있는 것을 알고 국방부장섬검영의 옹호아래 4인방을 체포했다. 4인방이 제거된 뒤 76년 10월 등소평은 화봉국에게 편지를 보내 그에 대한 지지를 표하면서 전면에나서 일할 수 있게 되기를 간청했다. 등소평은 1977년 7월 당부주석, 총참모장 및 국무원 부총리의 지위로 복귀했다. 이것은 그가 화봉국에 이어 당 서열의 2인자의 위치에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등소평과 화봉국의 노선은 달랐다. 화봉국은 문화대혁명의 전통을 개승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등소평은 대외개방을하고 적극적으로 경제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8년 11월 3중 전회 준비대회에서 등소평은 사상해방, 실사구시, 일치단결 전진이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그는 화봉극의 노선이 잘못되었음을 자아비판하도록 요구했다.
  76년의 천안문 사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과시켰고, 12월 3중 전회에서는 팽덕회, 유소기 등이 복권되었다. 이는 등소평이 확고한 기반을 마련했음을 의미한다. 80년 9월 마침내 화봉국은 사임했다. 4인방은 재판정에서 피고의 위치가 되었다. 11월 호요방이 국가주석이 되었고, 등소평은 중국공산당 군사위원회 주석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실질적으로 중국의 최고 지도자 였다. 그는 외국의 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시련을 당했을 때의 그의 생각에대한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내가 치명타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낙관주의자라서 절망을 하지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정치란 넓은 바다 속의 파도와 같아서 사람들은 파도위에 있을 때도 있으나 때로는 파도밑에 깔리기도 한다.)

   

99 천안문광장을 메운 자유의 함성 - 천안문 사건 발발 (198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86년 / 서울 제10회 아시안 게임 개최
  1987년 / 6월항쟁. 6, 25선언 공표
  1988년 / 서울 제24회 서울올림픽개최, 국회청문회

  1989년 6월 4일 오전 1시 40분, 약 10만에 가까운 인민해방군은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들이 밤을 세우고 있는 천안문 광장을 습격했다. 인민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바로 겨누고 사격했으며 광장은 순식간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이로써 약 50여 일간에 걸친 중국인민들의 요구는 막을 내렸다.
  다음날 중국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중국 내 언론의 보도를 통제하면서 (6월 4일 천안문 광장에서는 한사람의 사망자도 없었다. 학생들은 해산했고 총에 맞거나 전차에 치인 학생은 없다. 폭도들이 소란을 피운 곳은 다른 곳이다. 폭도들은 군으로부터 총을 탈취하여 국가를 전복시키려 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사망자는 300여 명이다. 희생자의 절반은 군인이며 절반은 폭도 및 질 나쁜 구경꾼들이다) 라고 발표했다.
  4일 한밤중의 대살육전이 끝나고 날이 밝아지자 4일 오전 계엄부대 사령부는 (수도에서 어제 저녁 중대한 반혁명 동란이 발생했다. 폭도들은 광기의 상태로 해방군 장병들을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군용차를 불질러 바리케이트를 쳣으며 해방군 장졍을 연행하는 등 중화인민공화국을 전복하고 사회주의 체제를 뒤엎으려고 획책했다) 라고 하면서 천안문의 학살을 정당화했고, 천안문 시위대들을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폭도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천안문 광장에서 죽음을 간신히 피한 한 학생은 홍콩으로 탈출하여 기자들에게 그날밤의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많은 동료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전차에 깔려 갈기갈기 찢겨졌다. 군대는 짖겨진 시체를 삽으로 모아 포대기에 넣어 불태웠다)
  이날 사건의 희생자는 중국 당국의 발표, 대만 그리고 외국언론에 따라 각각 다르다. 정확한 보도로 정평이 있는 영국 BBC 방송이 6월 7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사망자만 7천여 명 (그중 군인이 1천여명) 에 이르렀다. 당연히 부상자는 수만 명에 이르렀을 것이다. 천안문 광장에서 몸을 피한 시위대 지도부들, 특히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대표들에 수배령이 내려졌으며 잡히면 총살당했다. 이것이 89년 봄 중국에서 전개되었던 민주화 운동의 비극적인 촤후를 장식하는 천안문 사건이다. 이 사건은 어떤면에서 10여년 전인 1976년 주은래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위집회와 비슷했다. 두 사건 모두에 관련된 사람은 등소평이다. 1976년에는 시위대를 배후조정한 협의로 실각했지만, 1989년 사건 때 그는 중국 최고지도자로서 시위대를 무력진압하는 위치였다.
  학생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무엇을 요구했는가? 북경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고 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여 어떤 때는 1백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였던 천안문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는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지냈던 호요방의 죽음이었다. 그는 4월 15일에 죽었는데, 그때부터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천안문 광장의 약 50여일 일간에 걸친 긴 시위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호요방의 죽음은 하나의 죽음은 하나의 계기였을 뿐,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회주의 중국의 체제에서 비롯된다. 중국은 모택동이 죽고 등소평이 실권을 장악한 이후 10여년간 개혁과 개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 및 개방정책은 완고한 사회주의 체제에 묶여 있던 중국을 커다란 혼란 속에 빠뜨렸다. 1980년대 중반에 인민공사가 해체되면서 개인농, 즉 사유제하의 농민이 생겨났으며 생산량도 향상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농산물의 생산량이 무한히 증가할 수는 없었다. 중국정부는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농산물 수매가격을 약 30% 가량 전체적으로 인상했고 이로인해 중국정부의 재정상태가 악화되었다.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화폐를 발행하게 되고 그것은 바로 물가상승, 즉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했으나 이 돈은 일부기업과 당 간부수중에서 놀아나게되어 경제에 큰 보탬이 되지 못했다.
  아떻든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중국경제는 상품시장 및 시장경제가 발달했다. 당연히 배금주의적인 풍토가 만연하게 되었으며, 이런 변화에서 당간부들이나 몇몇사람들은 엄청난 재산을 모으게 되어 심각한 소득 불평등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1988년 중국공산당 13기 삼중전회에서는 긴축경제정책이 채택되었다. 개혁과 개방은 중국경제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고 이제다시 긴축경제정책을 펴게되자 미래에 대한 전망이 아주 불투명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당간부들은 특권신분층으로 지위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개방정책에 의해 새로 세워지는 회사들은 당간부와 결탁할 수밖에 없고, 당간부들은 권력뿐 아니라 개인의 부도 증대시켰다. 고위 당간부들의 자식들은 그 부모를 이어 요직을 차지했다.
  대학생들은 부패한 당간부에 의한 국가경영으로 인민들만 고통을 받고 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천안문 민주화 시위가 있기 전부터 이미 일부 지식인들로부터 공산당의 통치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과 개선요구는 공산당 중앙정부에 의해 탄압을 받았으며, 그 결말이 천안문의 비극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천안문 민주화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했던 호요방의 죽음은 1989년 4월 15일 이었다. 호요방은 당면의 과제를 놓고 당시 중앙당 간부들이었던 조자양, 이붕, 양상곤, 등과 격력한 토론을 벌리다 졸도하여 그대로 죽고 말았다. 하생들은 (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않고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었다) 라고 애석해했다.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 지칭한 것은 등소평이다. 그의 장례식을 계기로 북경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중앙당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들의 집회장소는 중국의 상징인 천안문 광장이었다. 그들은 호요방의 재평가, 면예회복과 언론보도의 자유, 그리고 제반민주화 조치를 요구했다.
  학생들의 움직임을 보고받은 등소평은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니라 동란이다) 라고하면서 강력한 진압을 명령하였다. 이를 이어받아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는 이 학생운동은 비합법 조직의 계획적인 음모에 의한 동란으로 규정하고 강력하게 비판, 학생들을 더욱 자극했다.
  시위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났다. 중국을 공식방문하고 있던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천안문 광장에 있는 인민영웅기념비에 헌화하기로 예정이 잡혀있던 5월 17일에는 1백만의 인파가 모여들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이 헌화계획을 취소하게 된다. 시위대의 행위에 동정적이었던 총서기 조자양은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를 방문하여 눈물을 글썽이며 학생들의 시위가 정당하다고 위로했다. 그는 실권자인 등소평에 대항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중앙에 의해 조자양은 연금상태에 들어가 실각되고 이붕 수상은 시위대에 대한 강경진압을 명령했다. 5월 20일 북경의 중요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군대는 시위대를 포위했고 포위된 상태에서도 북경 중앙미술학생들은 민주의 여신상을 만들어 천안문 광장에 세웠다. 그러나 민주의 여신상은 군인들에 의해 넘어뜨려졌으며 수많은 학생들이 희생되고, 민주를 부르짖던 시위운동은 엄청난 희생자를 낸 채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었다.
   

100 지는 해 뜨는 별 - 한, 중 수교 (1992년)


  그때 우리나라는 -
  1990년 / 한, 소 수교
  1991년 / 지만자치체 부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1992년 / 한, 중 수교

  1992년 8월 한국과 중국은 국교를 열었다. 중국은 한국과 수교하는 조건의 하나로 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했다. 대만은 한국에서는 자유중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두 나라는 1930년대 항일투쟁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던 뿌리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한국의 독립운동을 했으며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당시 한국임시정부와 중국국민당 정부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공동의 적으로 두고 있었던 우방이었다. 한국의 독립이나 중국의 영토회복은 일본을 물리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다른 이념으로 갈라져 갈라져 이었듯이 한국에서도 항일운동세력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갈라져서 거의독자적인 활동을 했다.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과 관련을 가지면서 활동하기도 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주로 국민당과 관계를 맺고 있덨고 장개석의 지원을 받았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이념대립이 격렬하게 일어나 또 한차례의 내전이 전개되었고, 1949년 공산덩에 패한 국민당과 장개석은 그의 50만 군대 및 국민당 조직을 대만으로 옮겨삳. 그리고 대만의 중화민국은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교를 열고 중국이유엔에 가입하면서 밀려날 때까지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면서 냉전체제하 반공국가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해방 이후 이념대립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결국 미국과 소련의 점령에 의해 남북이 갈라져,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어 북한의 남침으로 6, 25라는 동족상잔의 내전을 치러야 했다. 6, 25때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덩연히 남한을 지원했고 중국공산당은 북한을 지원했다. 수십만의 중공군 개입은 전쟁을 북한에게 유리하게 했다. 이 전쟁이 냉전체제 아래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념의 차이에 의한 적과 동지관계는 매우 분명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남한은 대만의 국민당 정부만을 인정했고 북한은 공산덩의 중국정부와 친선관계를 맺고 있었다. 남한은 중국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칭호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중국공산당이라는 말을 줄인 '중공'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남한은 철저한 반공국가였고 그 점에서 대만의 국민당정부와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었다. 대만의 장개석도 공산당과 끈질기게 싸웠으며 결국에는 그들에게 패해 대만으로 밀려나야 했었던 쓰라린 경험이 이었고 남한은 북한의 남침을 받아 거의 공산화되기 직전까지 가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했다.
  남한에서는 5, 16군사정권이 들어서서 반공을 국시로 하게 되어, 대만은 여전히 자유중국이었고 가장 소중한 우방이었다. 미국은 대만과 남한을 동시에 지원했다. 냉전체제 아래서 두 나라는 소련과 중국이나는 두 개의 거대한 사회주의 국가의 사회주의 국가의 세력확대를 막는 동북아시아의 방파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70년대 이른바 데탕트라고 하는 화해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이런 절대적인 관계는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수교는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공을 이념으로 하는 남한은 70년대까지는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원치 않았다. 대만과의 우정은 계속 강조되었다. 미국이 대만을 버렸을 때도 한국과 대만과의 우정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념대립이 완화되고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등 세게사적인 변화가 가속화되면서 이와 같은 관계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현실론이 대만과 대한민국 사이에도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이념보다는 자국의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기 시작하면서 남한은 중국을 이념적인 적대국가라기 보다는 막대한 잠재력을 가진 교역 상대국으로 보게 된 것이다. 중국도 그들의 경제발전을 모델을 남한에서 구하면서 남한의 자본을 끌여들여 경제 발전에 도움을 받고자 했다.
  남한과 중국은 점차 비공식적인 관계를 확대시켜나가기 시작했다. 무역거래가 이루어지고 남한인의 중국방문이 제한적으로나마 허용되었다. 결국 1992년 8월 대한민국과 수교하는 조건으로 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했고 대한민국은 대만과 국교를 단절했다. 대만인은 한국의 배신에 분노했으며 외교관계 및 무역관계 등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반공으로 묶인 수십 년간의 혈맹관계는 이로써 막을 내렸다. 한국정부는 대만대사관을 비워주기를 요구했고 그 자리는 주화인민공화국 외교관들이 자리를 잡았다.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기가 내려지고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가 걸리게 된 것이다. 해는 떨어지고 붉은 별이 뜨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