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중국의 4대 미인

好學 2009. 9. 21. 18:55
중국의 4대 미인
 
 

 

1. 춘추전국 시대 월나라의 미인 서시
 
   서시(西施) - "침어(沈魚)"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서시(西施)는 원래 이름은 이광(夷光)이며, 춘추전국시대 월나라의 절강(浙江)저라산(苧羅山) 근처 가난한 나무꾼의 딸로 태어났으나 기가 막히게 빼어난 용모를 갖추고 있었다.  서시의 미모는 널리 소문에 퍼져 오왕 부차에게 미녀를 바쳐 미인계를 쓰고자 했던 범려가 그녀를 한 번 보고 즉시 궁전으로 불러들였다. 서시의 얼굴이 얼마나 예뻤던지 그녀를 한번이라도 보고자 하는 구경꾼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기에 서시를 태운 수레는 길이 막혀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겨우 사흘만에 궁전에 도착했는데 그녀를 본 궁전의 경비병이  그 아름다움에 빠져 기절해 버렸다(요즘 영화나 CF에서나 자주 나오는 상황-_-;).

그후 서시의 얼굴을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범려는 그녀를 구경하는 데  일전씩 돈을 내도록 했는데 그돈이 산처럼 쌓였다고 한다. 그 돈은 무기를 만들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서시가 오왕 부차 앞에 서자 부차는 첫눈에 서시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다.

그후 부차는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하게 했고, 특히 그녀가 뱃놀이를 좋아해대운하 공사를 벌였으며 이는 오나라 국력을 낭비시키고 높은 세금과 강제노역으로 백성들을 심하게 괴롭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오왕 부차는 서시에게 넋을 빼앗겨 정사를 돌보지 않고 사치와 환락의 세월을 보내게되었고 이틈에 월나라는 무섭게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여기서 경국지색이란 말이 떠오르게 된다. 나라를 기울어지게(망하게) 할 정도의 미모..서시는 어릴 적부터 가슴앓이란 지병이 있었는데 가슴이 아플 때마다 얼굴을 몹시 찡그렸다. 그러나 그녀의 찡그리는 모습이 오히려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아름다운 자태로 나타났다.부차도 그 찡그린 모습에 완전히 넋이 나갈 정도였다고 한다.태어나길 천하의 절세미녀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지방의 여자들은 무엇이든 서시의 흉내를 내면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 생각하고, 아플 때 서시의 찡그리는 얼굴까지 흉내를 냈다고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서자봉심(西施捧心)의 유래이다.

 

그 당시 서시를 흉내낸 찡그린 미녀의 이름이 동시였다. 그래서 방빈(倣嚬) 또는 효빈(效嚬)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어느 시골의 아주 못생긴 추녀(醜女) 또한 자기도 찡그리면 귀염을 받을까 하여 항상 얼굴을 몹시 찡그리고 다녔다. 그러자 인근 동네 사람들이 그 추녀의 찡린 모습에 모두 이사를 갔다 하니 이를 효빈(效嚬:찡그린 것을 본뜬다)이라 했다. 또한 빈축(嚬蹙)을 산다'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태백의 오서곡烏棲曲    

고소대 위에 까마귀 깃들이려 할 적 부차는 궁중에서 서시에 흠뻑 취했었네.오가 초무의 환락 끝나지 않았는데 푸른 산은 어느 덧 지는 해를 반쯤 삼켰었네.은 바늘 세운 금 항아리에선 물 많이 새었고 일어나 바라보면 가을 달 물결 속에 빠져 있었네.동녘 어느새 밝아 왔으니 못 다한 즐거움 어이 했을까.

   

             姑蘇臺上烏棲時

 

          吳王宮裏醉西施

 

          吳歌楚舞歡未畢

 

          靑山猶銜半邊日

 

          銀箭金壺漏水多

 

          起看秋月墜江波

 

          東方漸高奈樂何

 

*모름지기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남자들이고 그 남자를 움직이는

 이는 여자들이다...

 

2. 전한 시대의 왕소군
 
왕소군(王昭君) - "낙안(落雁)"

 


"왕소군의 미모에 기러기가 날개짓 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으로 떨어졌다."
 
 

*왕소군의 본명은 왕장(王牆)이며, 장강 삼협 부근의 남군南郡 자귀嘶歸 (현재 湖北省 興山縣) 출신의 양가집 딸로(양가라는

 

것은 3대 이상 범죄등에 저촉되지 않은 좋은 가문) 전한 元帝후궁(궁녀)으로 들어갔다. 

 

한(漢) 원제(元帝) 경녕(竟寧) 원년(BC 33), 남흉노(南匈奴)의 선우(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 C58~ BC31)가 원제를 알현

 

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왔던 것이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를 환대하자,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

 

을 청하였다.

원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 번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을 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후궁들은 이번이 황

 

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제각기 예쁘게 단장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바라보다,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다.그리고

 

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

 

이어도 괜찮습니다."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

 

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이에 원제는 호한야에게 직접 선택하도

 

록 하였고,호한야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지적하였던 것이다.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

 

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리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

 

망이 서린 듯,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

 

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에

 

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진상이 밝혀지자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

 

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라고 속이고는 그 3일 동안에 왕소군과 못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

 

소군을 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

 

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소군"에는 "한나라 왕실을 빛내고" "황제를

 

대신하여 흉노를 빛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후한 때의 西京雜記에 의하면, 당시 수많은 궁녀들을 다 접할 수 없던 황제가

 

화공에게 초상화를그려 바치라고 하여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에게 뇌물을 바쳐 아름답게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

 

으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아 얼굴이 추하게 그려졌고, 그로 인해 흉노의아내로 뽑히게 되었다. 소군이 말을 타고 장안

 

을 떠날 즈음에 원제가 보니 절세의 미인이었어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원제는 대노하여 소군을

 

추하게 그린 공 毛延壽를 참형에 처하였다고 한다. 

 

그 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숱한 소재를 제공하였다.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

 

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보거는 그 미모에 취해 날개 짓도 잊고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한서(漢書)≫「원제기(元帝紀)」와「흉노전(匈奴傳)」≪후한서(後漢書)≫「남흉노전(南匈奴

 

傳)」에 그 내용은 600자에 불과할 정도로 지극히 간략하다. 그 후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

 

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민간전설 등의 각종 문학양식을 통해서 그녀의 형상도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그 중 대표적

 

인 것을 예로 들면, 동한 채옹蔡邕의 <금조琴操>, 진晋나라 갈홍葛洪의 <서경잡기西京雜記>, 대만 작가 고양(高陽)의 ≪왕소

 

군≫, 희곡으로는 원대의 저명한 극작가 마치원(馬致遠)의 ≪한궁추(漢宮秋)≫, 곽말약(郭沫若)의 역사극 ≪왕소군≫, 조우

 

(曹禺 ) 의 역사극 ≪왕소군≫ 등이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왕소군의 형상은 더욱 풍부함을

 

갖출 수 있게 되었으니, 즉 문학속의 왕소군은 역사속의 왕소군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왕소군의 묘는 현재 내몽고자치주의 수도 호화호특(呼和浩特)에서 남쪽으로 9km 떨어진 大靑山기슭, 대흑하(大黑河) 북안(北

 

岸)에 자리잡고 있다. 봉분의 높이는 33m, 면적은 20여 무(畝)로 인공으로 만든 것이다. 무덤 위에는 흉노 땅에서 자라는

 

백초(白草)가 아니라 한나라 땅에서 자라는 청초(靑草)가 돋아났다고 하여 청총(靑塚)이라기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가을이

 

깊어가면 사야(四野)의 초목이 모두 시들어 누런 빛으로 변해 가지만 오직 소군의 묘 위에는 여전히 ‘어린 황색 검푸름 그 풀의

 

푸르기가 사철 쑥같다’(嫩黃黛綠 草靑如茵)는 것이다. 이로 인해 소군묘에는 푸른 무덤이 눈썹이 검푸른 미인을 안고 있다’(靑催

 

擁黛)는 염칭(艶稱)이 붙게 되었다. 왕소군의 인생을 한마디로 잘라 규정기는 힘들지만, 한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감당하기에

 

너무도 벅찬 것이었음은 분명한 것같다.“후한서”의 기록은 색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즉, 호한야가 죽고 그녀와의

 

사이에 태어난 ‘실자’(實子)가  흉노의 법에 의거 그녀(어머니)와의 재혼을 재촉하자 왕소군은 아들에게“너는 한의 인간으로

 

살아가려는가, 아니면 흉노의 인간으로 살아가려는가?”라고 물었다. 실자는 “흉노의 인간으로 살아가겠다”고 대답했다.

 

이에 그녀는 자살의 길을 택했다고 전하고 있다. “후한서”의 편찬자 범엽(范曄)이 이 사실만은 채용하지 않은 것은 냉정한 역

 

사가로서의 그의 안목을 엿보게 하는 것이지만, 유교적 봉건 사고를 가졌던 전통 중국인에게 왕소군은 실로 ‘뜨거운 감자’였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재혼한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청대 육차운(陸次雲) 같은 자는 왕소군의 출새

 

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아들 뻘과 재혼한 사실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렇듯 왕소군은 중국인들에게

 

복잡한 감정을 갖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昭君怨 Ⅰ李    白 

 

漢家秦地月(한가진지월)    한나라 시절 진나라 땅에 떠 있던 달은

 

流影照明妃(유영조명비)    그림자를 내려 명비를 비추네

  

一上玉關道(일상옥관도)    한 번 옥관도에 올라

 

天涯去不歸(천애거불귀)    하늘가로 떠나간 후 다시 못 오네.

 

漢月還從東海出(한월환종동해출)한나라 달은 돌아와 동해를따라 오르건만

 

明妃西嫁無來日(명비서가무내일)명비는 서쪽으로 시집가고 돌아올 날이 기약없네.

 

燕地長寒雪作花(연지장한설작화) 연나라 땅의 긴 겨울에 눈이 꽃을 만들었으니

 

娥眉憔悴沒胡沙(아미초췌몰호사) 고운 아미는 초췌해져 오랑캐 모래에 쓰러졌도다.

 

生乏黃金枉畵工(생핍황금왕화공) 살아서 황금이 없어서 화공을 굽히었으니

 

死遺靑塚使人嗟(사유청총사인차)   죽어서 청총을 남겨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케 하네.

 

 

*昭君怨 2 | 李   白

 

昭君拂玉鞍(소군불옥안)   소군이 옥안장을 떨치며

 

上馬涕紅頰(상마체홍협)   말에 오르니 붉은 뺨에 눈물이 흘러

 

今日漢宮人(금일한궁인)   오늘은 한나라 궁녀이건만

 

明朝胡地妾(명조호지첩)   내일은 오랑캐의 첩이 되어야 한다네.  


 

*昭君怨  | 동  방  규 

 

漢道今(初)全盛         한나라 힘 이제 강력하고

 

朝廷足武臣             조정에 무신도 충분하건만

 

何煩(須)薄命妾         박명한 첩 무슨 필요 있어

 

辛苦遠和親             고생스럽게 화친의 먼 길을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저절로  허리띠가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이는미녀가되려 (허리 몸매 위)함이 아니었도다.


 

*昭君墓(소군묘) | 상건(常建:708-765)

 

漢宮豈不死(한궁기불사)  어찌하여 한나라 궁궐에서 죽지 못하고

 

異域傷獨沒(이역상독몰)  다른 나라 땅에서 홀로 죽음을 슬퍼하노라.

 

萬里馱黃金(만리타황금)  만리 길에 황금을 실어 보냈지만

 

娥眉爲枯骨(아미위고골)  고운 모습은 마른 뼈가 되었네.

 

廻車夜黜塞(회거야출새)  밤에 수레를 돌려 변방을 나오려 하지만,

 

立馬皆不發(입마개불발)  모두 말을 세우고 떠나지 못하며,

 

共恨丹靑人(공한단청인)  그림 그린 이를 원망하며

 

墳上哭明月(분상곡명월)  밝은 달 아래에서 무덤에 곡을 하노라.

 

 

* 이밖에도 송나라 왕안석의 [명비곡(明妃曲)]과 구양수의 [명비곡] 등이 있다.

 

 

王昭君一(왕소군 일)

 

滿面胡沙滿빈風   얼굴에 가득한 호지의 모래와 바람

 

 

 

 

眉銷殘黛瞼銷紅   그린 눈썹도 다 지워지고 얼굴에 연지곤지 다 없어져

 

愁苦辛勤憔悴盡   수심과 괴로움에 고생으로 초췌해져서

 

如今却似畵圖中   지금은 화공이 그린 그림과 꼭 같구나

 

胡沙(호사) : 북방 만속 호지에 일어나는 먼지.

 

殘黛(잔대) : 예쁘게 그린 눈썹이 다 망가진 것.

 

辛勤(신근) : 고생을 하다.



漢使却回憑寄語   한나라 사신이 돌아갈 때 말 전갈하기를

 

黃金何日贖蛾眉   언제 황금으로 나를 다시 사서 되돌아가게 하나요

 

君王若問妾顔色   군왕이 만일 나의 얼굴 묻는다면

 

莫道不如宮裏時   궁중에 있을때보다 더 미워졌다고 말하지 마소서.

 

  漢使(한사) : 왕소군이 있는 곳으로 간 한의 사절

 

  却回(각회) : 귀환하다

 

  寄語(기어) : 말을 전하다

 

  黃金(황금) : 몸값으로 지불하는 황금

 

  蛾眉(아미) : 미인

 

  顔色(안색) : 용모

 

  宮裏(궁리) : 궁중

 


화번공주는 흉노의 왕인 선우에게 시집가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정략결혼의 희생물이기 때문에  영광스런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산 설고 물 선 이국 땅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여인들의 슬픈 이야기는 듣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다. 역사상 화번공주로 북방 유목민족 지역으로 끌려간 여인들은 수없이 많지만, 한대의 烏孫公主 세군(細君), 왕소군, 채문희(蔡文姬) 등과 당대의 문성공주(文成公主) 등이 특히 유명하다.그러나 후세에 가장 화제가 된 여인은 채문희와 왕소군이라 할 것이다. 흉노의 선우는 농경족의 여인을 좋아하였다. 누구나 그러한 것처럼 이국색의 여인은 아침 저녁 항상 보아 식상한 여인들보다 분명 낫게 보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항상 거친 가죽 옷을 입고 말을 타고 달리며 가축의 젖을 짜는 일에는 남자에 못지않는 초원 여자와 달리 비단 옷에 파묻혀 고운 얼굴을 수줍은 듯 드러내는 한족 여인들은 그들의 애간장을 태우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일찍이 묵특(冒頓)선우는 한고조 유방(劉邦)이 죽자 과부로서 정치적 실권을 휘두르던 여태후(呂太后)에게 매우 외설적이고 무례한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고독에 번민하고 있는 나는 늪지대에서 나서 말이 마구 달리는 평원 광야에서 자랐다. 이따금 국경을 넘어 중국에서 노닐기를 원하였더라. 지금 폐하도 혼자된 몸, 나 또한 혼자 있어 두 임금이 모두 쓸쓸하니 우리 있는 것으로써 없는 것을 바꿈이 어떠하리.

(孤奪之君 生於沮澤之中 長於平野牛馬之域 數至邊境 願遊中國. 陛下獨立 孤奪 獨居. 兩主不樂 無以自虞 願以所有 易其所無)


 
3. 삼국시대 미인 초선
 
*초선(貂嬋) - "폐월(閉月)"

 

 


"초선의 미모에 달도 부끄러워서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다."

*초선은 삼국지 시대인 동한 말기 충신 왕윤의 가기(요즘의 가수)였다. 그녀를 가리켜 천향국색(天香國色)이라 한다.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미녀라는 경성지모(傾城之貌),경국지색(傾國之色)은 모두 그녀에게서부터 나온 고사이다.(이설도 있음) 삼국지 초반에 나오는 동한왕조 간신 동탁에게 발견되어 정쟁에 이용되는 운명에 처한다.이른 바 달밤에 분향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다는 고사에 이용되었다. 그녀는 계략(전형적인 미인계요 연환계)이 성공한 연후에 달밤의 후원에서 왕윤의 무사하기를 기원하고 달에게 절했다.

그때 구름이 달을 가렸기에 왕윤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초선의 미모에 달도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구나.(이른 바 폐월(閉月)". 왕윤은 왕조를 찬탈하려는 동탁을 죽일 결심으로 계략을 꾸며 초선을 동탁 눈에 뜨이게 하였다. 왕윤은 먼저 여포에게 결혼을 약속하고, 바로 동탁에게 초선을 바친다. 여포는 물론 당대의 영웅이었으나 아직 젊음 뿐이요, 동탁 노간신이며 교활하기 그지없기에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호색하기로는 둘째가기 서러운 둘은 양부와 양자가 되어 어울렸다. 초선은 바로 이들이 서로에게 칼을 들이밀 반간계의 비수로 쓰여진 것이다. 먼저 여포가 초선의 추파에 경도되고, 동탁 또한 아름다운 초선의 눈썹에 혼을 빼앗겼다. 여포가 어쩔 수 없이 초선을 동탁에게 빼앗기다시피 바칠 수밖에 없게 되자 마음속이 자연 불만으로 가득 찼다. 어느 날, 여포가 동탁부에 입부할 시 초선을 찾았다. 둘은 봉의정(鳳儀亭)에서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초선은 동탁에게 받은 괴로움을 짐짓 토하였다. 여포는 당연히 분노하였기에 방천화극으로 동탁이 회부하기를 기다려 찔러 죽였다.

*초선이 관우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說에 관해...
조조는 세 의형제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관우에게 여포의 아내 초선을 주었다.관우는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져 밤낮을 보냈다. 유비는 걱정이 되어 “여자에게 정을 주는 것과, 우리 세 사람의 의(義)와 한 황실의 부흥이라는 대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라고 물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달빛 아래서 초선의 목을
베었다는 설.여포 처형 후 장비가 초선을 데리고 와서 관우에게 헌상했다. 관우는 초선을 재운 후에 달빛아래서 「춘추(春秋)」를 읽다가 문득 깨달았다. ‘예로부터 미녀나 요부들이 남자를 그릇된 길로 인도해서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망했던가. 이 여자 또한 동탁과 여포 부자를 파멸로
이끌었다. 절세 미모에 물오른 버드나무 같은 육신을 보면 마음이 끌리지만 역시 죽이지 않으면안 되겠다.’ 관우는 그렇게 결단을 내렸다.(명,청대의 연극) 
 
조조(曹操)가 여포(呂布)를 교살(絞殺)한 뒤, 초선(貂蟬)은 유비(劉備)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초선이 꽃보다도 더 아름답게 생긴 터라, 유비는 첩으로 삼고 싶었으며, 장비(張飛)도 한 번 보더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관우는 그러한 광경을 보고 말했다.「셋째 아우가 미인을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네.」 이에 장비가 말했다. 「초선이 저렇게 예쁘니, 큰 형님과 짝 지으면 천생배필이겠지요.」 유비는 은근히 그렇게 되기를 원했지만, 또 한편 곧바로 대답하기도 계면쩍어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둘째가 부인이 없으니, 아무래도 그에게 주어야겠네" 이에 관우가 급히 말했다. "저는 싫소이다!"
 
그러자 유비는 또 장비에게 데려가라고 말했다. 장비는 싫지는 않았지만 승낙하기도 어려워 유비에게 사양을 했다. 세 사람이 이러니저러니 옥신각신하며 서로들 양보하다가, 결국 누구도 초선을 데려가려 하지 않겠다는 상황이 되었다. 관우는 원래 여색을 탐하지 않았으므로 유비와 장비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동탁(董卓)과 여포(呂布)가 모두 초선을 사랑했기 때문에 목숨과 함께 공훈과 업적도 잃어버렸다. 지금 형님과 아우가 초선의 미색에 빠진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만약 형제 두 사람이 한 여자 때문에 화목함을 잃게 되거나, 형님이 초선에게 미혹되어서 천하대사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후회해도 이미 늦게 된다. 이 여자는 남겨둘 수가 없어」 이리하여 관우는 초선을 없애기로 결심했다. 그 날 저녁, 그는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를 들고 초선을 불러냈다. 달빛 아래 비친 초선의 모습은 마치 물위에 피어있는 한 떨기 연꽃과 같아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족했다. 관우는 여태까지 여인의 정에 마음이 끌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그녀의 청초한 모습을 대하자 자신도 모르게 얼음처럼 차갑던 마음이 녹아 내렸다. 그러나, 다시 마음을 바꾸어 이렇게 생각했다.
 
「이 여인이 이렇게까지 사람의 혼을 빼니, 세상에 남겨두었다가는 반드시 그 화가 형님과 아우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그러니 더욱 죽이지 않으면 안되겠어.」 관공이 큰칼을 들고 다가오는 것을 본 초선은 너무나 놀랐다. 가녀린 몸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은, 마치 빗속의 모란꽃 같고 바람 속의 수양버들 같아  더더욱 가련해 보였다. 관우는 더 이상 두 눈을 뜨고 바라볼 용기가 없어 두 눈을 굳게 감아버렸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청룡도를 손에서 떨어뜨렸다. 그 큰칼은 땅에 떨어지면서 묘하게도 초선의 목을 찍었다. 절세의 미녀 초선은 이렇게 하여 결국 관우의 손에 죽게 되었다.
 
 *중국 4대 미인 중 유일하게 정사에 없는 인물 임. 
 

 

4. 당 태종의 왕비  양귀비

*양귀비(楊貴妃) - "수화(羞花)"

 


"양귀비의 미모에 꽃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양귀비의 본명은 옥환, 도호가 태진이다.포주 영락(지금의 산서성) 출신으로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숙부 양립의 집에서 자랐다.가무와 음률에 뛰어났으며, 총명하면서도 용모가 천하절색이었다.양귀비는 원래 현종과 무혜비의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로 궁궐에 들어갔다.당시 양귀비는 17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런데 어느날 현종이 우연히 자기의 며느리인
양귀비의 어여쁜 자태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 버렸던 것이다.그날 이후부터 현종은 양귀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아무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현종은 자신의 측신이자 당대 최대의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를 불러 이 일을 의논하였다. 결국 고력사는 양귀비의 두 몸종을 매수하여 그녀들에게 양귀비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였다.몸종들은 매일같이 양귀비를 설득하였으며, 양귀비도 본래 수왕에 대한 사랑보다는 부귀영화에더 욕심이 있었기에 일단 수왕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수왕을 떠난 양귀비는 우선 화산으로 가서 여도사 생활을 하다가 다시 현종의 궁으로 들어왔다. 양태진이란 이름은 바로 양귀비가 여도사 생활을 할 때 얻은 호이다.이때 현종은 아들 수왕에게는 다소 미안했든지 위씨 성을 가진 여인을 아내로 삼도록 배려하였다.현종은 자기의 품으로 돌아온 양귀비를 위해 궁궐을 하나 마련해주고 그것을 태진궁이라 하였으니,
그로부터 이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양귀비는 공식으로 황후 책봉을 받은 적은 없으나, 천보 4년에 "귀비"에 책봉된 이후 이미 고인이 되고 없는 황후의 위치를 대신하다 시피 하였다.

양귀비가 "귀비"에 책봉된 이후로 그녀의 죽은 부친은 대위제국에 추서되고, 숙부는 광록경에 임명되었다. 뿐만 아니라 큰오빠는 홍로경, 작은오빠는 시어사, 남동생은 사공에 임명되었으며, 큰언니 옥패는 한국부인, 셋째언니 옥쟁은 괴국부인, 여덟째언니 옥차는 진국부인에 봉해졌다.현종의 극진한 총애로 단숨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양귀비의 형제자매들은 그 세력이 강대해져 궁궐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막강 권세를 과시하며 많은 사람들을농락했다.특히 그녀의 셋째 언니 괴국부인의 집에는 전국 각지에서 청탁을 하러 찾아오는 관리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그들이 바치는 진상품들로 온 집안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한번은 괴국부인이 궁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주와 부마의 행열과 마주쳤는데, 서로 길을 양보하지 않다가 큰 싸움이 일어나고 말았다.마침내 이 사실을 알게 된 현종은 평소 공주에게 주었던 물건들을 모두 빼앗고 부마의 관직마저 박탈하였다. 궁궐 내에서 그들의 위치가 공주나 부마보다도 위에 있었던 것이다.양귀비의 언니들도 비록 양귀비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모두 뛰어난 미색을 갖춘 여인들이었다.어느날 현종은 괴국부인과 눈이 맞아 양귀비를 배신하고 그녀와도 정사를 벌였다.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양귀비의 마음 속에는 질투의 불길이 솟아올랐으며, 그래서 한번은 현종이 또 양귀비에게 괴국부인을 입궐시키라고 하자 양귀비는 현종의 명을 거역하였던 것이다.급기야는 이 일로 현종과 대판 싸움을 벌이게 되고, 크게 노한 현종은 고력사에게 명하여 양귀비를 양국충의 집으로 쫓아보내게 했다.

당시에 승상이었던 양국충은 양씨 집안에서 양귀비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아주 음흉한 성격의 소유자인 양국충은 젊은 시절에는 고향 영락에서 술과 노름으로 방탕한 생활을 보냈다. 후에 군에 입대하여 전쟁에서는 용맹을 떨쳤지만, 평소에는 늘 사람들을 괴롭히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결국 직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났다. 그 뒤 다시 선우중통의 집에서 집안일을 관리하며 하인들의 돈을 가로채 양귀비의 집으로 도망쳤다. 그때 양국충은 지금의 괴국부인인 양옥쟁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던 사이었다.따라서 괴국부인으로 인해 시끄러워진 이번 일을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승상 양국충이었던 것이다.

양씨 일문의 운명이 양귀비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양국충은 고력사와 합심하여 두 사람의 관계를 화해시키기로 하고, 현종과 양귀비를 화청지로 보냈다.그곳에서 현종은 다시 양귀비를 품에 안게 된다. 그간의 다툼은 사라진지 오래였다.두 간신의 노력으로 다시금 양귀비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된 현종은 양귀비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였다. 양귀비의 품속에서 환락에 빠져 유희와 쾌락에 정신을 잃은 현종에게서 더이상 지난날 성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현종은 전기에는 두 명의 명재상 요숭과 송폭의 보좌로 "개원성세"를 이루어냈지만,후기에는 두 명의 간신 이림보와 양국충의 전횡으로 "천보대란"을 맞이하였다."천보대란"이란 바로 당나라를 쇠망의 길로 이끌고 양귀비를 죽음의 길로 데려간 "안록산의 난"을 말한다.

영주유역의 호인 출신인 안록산은 처음에는 변방의 일개 군졸에 불과했으나, 후에는 세 지역을 다스리는 절도사로 승승장구하면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다.안록산이 이렇게 세력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양귀비 때문이었다. 천보 6년 정월 현종은 변방의 절도사 안록산을 환영하는 연회를 흥경궁에서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안록산과 양귀비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후 안록산은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안록산을 양귀비는 수양아들로 삼았다. 안록산은 양귀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아양을 다 떨었고, 양귀비는그러한 안록산의 우람한 몸집을,특히 그의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좋아했다고 한다.안록산은 현종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자주 입궐하여 양귀비를 만났으며, 양귀비는 그를 화청지로 데려가 목욕을 시켜주곤 했다.원래 양국충은 안록산과 연합하여 이림보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림보가 먼저 죽자 그들 사이에 세력 다툼이 일어났다. 양귀비를 등에 업고 점점 그 세력을 확대해 가는 안록산에게 위협을 느낀
양국충은 현종 앞에서 자주 안록산을 비방하기 시작하였다.

양귀비는 자기 애인을 비방하는 양국충의 말을 그대로 안록산에게 전하게 되었고, 그후 안록산은 양국충에게 반감을 가지고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현종은 안록산이 반역을 꾀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마다 양귀비가 안록산을 변호해 주어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다. 양귀비는 조정의 일마저도 마음대로 주물렀던 것이다. 755년 마침내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의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워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 소식을 접한 현종은 깜짝 놀라 가랑비 내리는 한여름 새벽에 승상 위견소, 양국충, 양귀비 자매와 소수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장안성 연추문을 벗어나 서쪽으로 방향을 잡은 일행은 마외파(지금의 섬서성)에 이르렀으나,병사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현종에게 양국충과 양귀비를 비롯한 양씨 일족들을 모두 죽이기를 강요했다. 결국 양국충과 일족들의 목이 잘리고 시신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양귀비도 어쩔 수 없이 마외역관 앞의 배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결하였다. 이때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안록산의 난이 평정된 후 당현종은 태상황이 되었고, 그의 아들 숙종이 난을 평정하면서 황제라 칭하였다. 현종은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도 죽은 양귀비를 잊지 못하고 얼마나 그리워하였는지 모른다.양귀비의 죽음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즉 일설에 의하면 안록산의 난 때 양귀비가 죽지 않고 일본 상인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현재 일본에는 양귀비에 관한 이갸기와 함께 그녀의 유물과 사당,무덤 등이 전해지고 있다.양귀비가 38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30년간을 활동하다가 68세에 죽었다는 것이다.

흔히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수화 (꽃이 부끄러워 한다)"라는 말을 쓴다.현종과 만나기 이전 ,어느 하루 양귀비가 정원에서 꽃구경을 하다가 무성하게 꽃이 핀 모란과 월계화 등을 보고 덧없이 지나가는 청춘을 아쉬워하였다.그래서 "꽃아! 꽃아! 너는 해마다 다시 피어나지만 나는 언제나 빛을 보겠느냐?"라는 한탄과 함께 눈물을 흘리하면서 그 꽃을 쓰다듬었다.그러자 갑자기 꽃받침이 오그라들고 꽃잎이 말려들어갔다. 그녀가 만진 꽃은 바로 함수초였던 것이다. 이때 한 궁녀가 그러한 광경을 보았다.그후 그 궁녀는 가는 곳마다"양귀비가 꽃과 아름다움을 견주었는데 꽃들이 모두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고 소문을내었으며, 여기에서 "수화"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5. 그 외 미인

*조비연(趙飛燕) - "작장중무(作掌中舞)"
 
"가볍기 그지 없어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을 정도였다."

 

 

중국에서 미인을 표현 하는 대표적인 어휘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이다.그중에서 각각 "침어(沈魚)", "낙안(落雁)", "폐월(閉月)", "수화(羞花)"의 대명사 격인4명의 여인을 골랐으니 이들을 일컬어 중국4대미인이라 칭하였다.아쉽게 4대미인에서 탈락한 미녀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조비연(趙飛燕)이다.조비연은 한나라의 성황제(漢成帝)의 총애를 받아 황후(趙皇后)의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다.한번은 황제가 호수에서 선상연(船上宴)을 베풀었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자 춤을 추던 비연이 휘청 물로 떨어지려하지 않는가. 황제가 급히 그녀의 한쪽 발목을 붙잡았는데 춤의 삼매경에 빠진 비연은 그 상태에서도 춤추기를 그치지 않아서 비연은 임금의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추었다.(飛燕作掌中舞)라는 고사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했다.

 

4대 미녀의 반열에서 조비연이 탈락한(?) 이유는 아무래도 그녀의 특징이 아름다움보다 가벼움에 치우쳤기 때문인 듯 싶다.(요즘 같으면 최고 미인의 반열에 올랐을 수도...원체 쭉빵을 치주니..)대신 그녀를 지칭할 때는 항상 4대 미인의 한 사람인 양귀비와 더불어 거론된다.바로 "연수환비(燕瘦環肥)"라는 성어인데 그 뜻은 다음과 같다.조비연(趙飛燕)은 말랐으나[瘦] 미인이었고,양귀비[본명: 양옥환(楊玉環)]는 뚱뚱했으나[肥] 미인이였다.또한 흔히 일컬어조비연(趙飛燕)은 날씬한 미인의 대명사로 임풍양류(臨風楊柳)형 미인,양귀비(楊貴妃)는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로 부귀모란(富貴牡丹)형 미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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