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중국역사 100가지[사건] 요약 2

好學 2009. 10. 21. 23:39

 

중국역사 100가지[사건] 요약 2

 

 

  21 장형, 지진을 탐지하다 - 채윤의 종이 발명
  22 황제의 옆자리, 외척과 환관 - 황건적의 난
  34 천하 삼분의 적벽대전 - 삼국시대
  24 민족 대이동과 강남 개발 - 5호의 침입과 동진의 성립
  25 도교와 불교의 융성 - 도교의 성립
  26 예술을 위한 예술의 탄생 - 문벌 귀족사회의 성립
  27 대륙의 동맥 대운하의 건설 -수나라의 재통일
  28 고구려와의 전쟁 - 수나라의 멸망
  29 동아시아 세계의 완성 - 당 태종의 정치
  30 전무후무한 여황제 측전무후 -무주혁명
  31 서역으로의 관문 돈황 - 당삼채와 신라 사신
  32 이백과 두보 - 귀족문화의 절정
  33 절도사들의 시대 - 안사의 난
  34 구전체제의 붕괴 - 양세법의 실시
  35 9세기 중국의 생활상, 신라방, 견당사 - 일본승려 엔닌의 일기
  36 소금 장수 황소 - 황소의 난
  37 채소를 사 먹는 농민 - 산업의 대약진
  38 문치주의와 군주 독재체제의 확립 - 송의 건국
  39 과거제의 정착과 사대부 계층의 성장 - 지주, 전호제의 확대
  40 유목민족의 각성 - 최초의 정복왕조 요

 

  21 장형, 지진을 탐지하다


  문자가 발생하고 기록이 후세에 전해지기 시작하자 인류의 문명은 오랜 암흑기를 벗어나 새로운 도약을 맞이했다. 맨 처음의 기록의 재료는 나무나 돌, 찰흙, 동물의 가죽이나 뼈, 금속 등이었으나, 점차 문화적 역량의 성숙과 함께 수요가 증대되자 보다 간편하고 값싼 재료가 요청되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변에 야생하는 파피루스라는 갈대와 비슷한 식물의 주기를 얇게 잘라서 가로 세로로 맞춘후, 끈기있는 액체를 발라서 건조시켜 오늘날의 종이처럼 사용했는데, 당시에는 종이의 수요도 많지 않았고, 매우 번거로운 제작과정을 노예의 노동력으로 충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의 개발은 시도되지 않았다.
  세계 최초로 종이를 제작, 보급한 이가 중국의 채윤이다. 그는 후한 화제 때의 환관이었는데 수공업 분야의 권위자로 능력을 인정받아 궁중의 수공업품을 원활히 조달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가 관장하는 무기 제조공장의 제품들은 매우 정밀하고 견고하기로 명망이 나 있었다. 그가 민간의 종이 제법을 실용화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미 전한 시대에 여자들이 풀솜의 찌꺼기를 늘려서 종이를 만들었다고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최근 신강성, 감숙성 등지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실물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채윤의 발명보다 200년 가량 앞서는 이 종이들은 제조기술이 미숙하고 원료인 삼이나 모시풀 등의 비싼 재료를 사용함으로써 대중화에 어려움이 많았다.
  채윤은 나무껍질, 헌 옷, 넝마, 폐기된 어망 등 폐품이나 저렴한 원료들을 활용하여 마침내 가볍고 얇고 튼튼하며, 값싸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종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수집된 재료들을 절구통에 넣어 짓이기고 물을 이용해 제작하는 이 종이는 현대의 제지법 원리와 큰 차이가 없다. 채윤의 종이 제법은 놀라운 속도로 전국에 퍼져나갔고, 사람들은 이종이를 채후지라 불러 그의 공을 칭송했다.
  종이 발명 이전의 중국에서는 은대 이래 갑골이나 청동기 외에도, 나무를 이용한 죽간이나 목간이, 붓이 발명된 이후에는 비단 위에 기록을 남기는 백서가 널리 이용되었다.
  간은 폭이 약 1CM 남짓하고, 길이는 약20CM 남짓한 얇은 대나무나 나무에 대개 1줄씩 문자를 기록했는데, 이를 끈으로 엮어 둘둘 말아서 두루마리로 보관했다 간단한 편지 등은 폭이 넓은 나무에 여러 줄을 써서 사용했는데 이는 독이라 불리었다.
  전한시대의 사상가 혜시가 유학을 떠날 때 수레 다섯 대분의 나무책을 휴대했다 하여 '오거서'라는 말이 유래했다. 이는  사용의 편리 여부를 떠나서 문화를 소수 지배층에 독점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한 대에도 꾸준히 성장한 경제력의 신장은 학문 전반의 발달을 촉진했고, 종이의 KQF명을 요구하는 문화적 수요자층을 증대시켰으며, 종이의 발명은 또다시 문화의 보급, 발달을 촉진했다.
  채윤 외에 후한 대의 과학의 발달을 상징하는 인물로 그와 동시대인인 장형이 있다. 장형은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집이 가난하여 고학으로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그의 비범한 재능은 이미 청년기에 그를 당대의 거유, 명사들과 교유하게 했다. 37세 때 태사령이 된 그는 중국 천문학사상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내게 되었다.
  장형은 자동 천문 관측기인 '혼천의'를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공 모양의 천구 표면에는 별자리가 가득 새겨져 있으며, 천구의 바깥 둘레에는 지평, 적도, 황도를 표시하는 구리로 만든 바퀴가 둘러져 있었다. 또한 물시P의 원리를 채용, 수력으로 천구를 자동회전시킴으로써 앉아서 자연계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게 했다.
  그가 55세 때에 발명한 지동의는 세계 최초의 지진계일 뿐만 아니라, 1950년대의 복원 모형에 의하면, 그 장치가 매우 우수하고 정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술단지 모양의 지동의에는 약한 진동도 감지하는 내부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지진이 일어나면 지동의 둘레에 8방으로 부착된 용을 움직여 용의 입에 물려진 구리 구슬을 떨어뜨리게 함으로써 미미한 지진도 포착할 수 있게 했다.
  138년, 영대(천문대)에 설비된 지동의의 정서쪽 용의 입에서 구슬이 딱 떨어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빈정거리며 장형을 비웃었다.
  (장형이 만든 지동의는 아이들의 장난감밖에 안되지!)
  그러나 며칠 후 감숙성에서 사자가 급히 올라와 감숙성 일대에 대지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장형의 지동의가 500KM나 떨어진 곳의 지진을 정확히 포착했던 것이다.
  장형은 천문학 연구를 종합 정리한 저서 (영헌)을 남겼으며, 중국 최초의 성좌표를 만들기도 했는데, 성좌표에는 황하 유역에서 볼 수 있는 별2,500개를 기록하고 있다. 현대의 천문학에서도 같은 장소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은 이와 비슷하다.
  중국의 4대 발명품으로 유명한 제지술은 8세기 중엽, 당나라와 사라센 제국 사이에 벌어진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서방에 전파되었다. 사라센에 포로가 된 당군 중에 제지기술공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라비아인들은 다시 제지술을 유럽에 전파, 근대 유럽사회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2 황제의 옆자리, 외척과 환관


  궝궐은 국가 최고 권력기구인 황제의 공식적인 집무실이자 사적 생활의 공간이기도 하다. 황제가 평생토록 그의 모든 공사 생활을 영위하는 구중궁궐에는 황제와의 사적인 관계를 이용, 호시탐탐 대권을 노리는 세력이 있었다. 황후의 일족이 외척과 후궁을 돌보기 위해 설치된 환관이 바로 그들.
  특히 후한은 중국사에서도 외척, 환관의 전횡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시기로, 이들의 세력다툼 속에서 황제는 그들의 꼭두각시 정도의 희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공교롭게도 후한의 황실에는 유전적인 요인이 있었던지, 광무제와 그 아들 명제만 각기 62세, 48세까지 살았을 뿐, 나머지 황제들은 극히 단명했다. 황제가 어려서 죽으면 그 뒤를 잇는 황자는 더욱 어리게 마련이었다.
  4대 화제로 직계가 단절되고 방제에서 황위를 잇게 되니 황실의 위엄은 손상되고, 이때부터 외척, 환관의 정쟁이 시작되었다. 화제가 열 살에 제위에 오르자, 그의 어머니 두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면서 그녀의 오빠 두헌 등 일족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장성한 화제는 외척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측근의 환관 정중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환관제도는 중국뿐 아니라, 우리 나라나 베트남, 혹은 고대 이집트나 페르시아, 그리이스, 동로마 등 여러 나라에서도 발견되는데, 철저히 전제군주에 봉사하기 위해 설치된 제도다, 성불구자인 환관에게 후궁이 많은 궐내의 연락사무 등을 맡게 한 것인데, 처음에 환관은 궁형을 받은 죄인이나 이민족으로 충당되었으나, 점차 황제의 최측근이라는 특성 때문에 권력장악의 야망을 가진 자들 중에 거세를 자청하는 자도 생기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주대부터 왕조체제가 몰락하는 청말까지 존속했는데, 적을 때는 수천 명, 많을 때는 만명이 넘었다.
  후한의 외척세력으로 가장 유명한 이는 양익이다. 그는 순제 황후의 오바로 순제 때 전권을 장악한 후 충제, 질제, 환제까지 4대에 걸쳐 정치를 전횡했다. 환제는 양익의 누이인 황후가 죽자 다시 환관의 힘을 빌어 양씨 일족을 주살했다. 이때 환제는 환관 단초 등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단초의 팔을 깨물어 흘러나오 피로 선서를 하는 결의를 보이기까지 했다.
  이후 후한 최대의 환관 전횡기가 도래했다. 환관은 일족이나 양자를 관리로 중용하고 관료나 호족과 결탁, 중앙이나 지방의 관계에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정권을 독점했다. 그들은 뇌물을 받고 부정한 선거로 관리를 등용하고, 백성들에게는 혹독한 가렴주구로 일관하여 호화방탕한 생활을 일삼게 되니, 부정과 부패가 사회에 만연했다.
  한편 후한 대의 지방 유력자들인 호족 중에는 시류에 편승하여 외척이나 환관가 결탁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유교적 논리로 무장, 명예와 정절을 중시하면서, 부정부패의 척결을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청류라 부르고, 환관 일파를 탁류라고 지칭했다. 태학의 학생이거나 관리, 또는 재야 지식인이었던 이들은 세간에 광범한 여론을 조성하고, 중앙이나 지방의 관리를 품평하여 청절한 관료를 선정, 이들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환관 일파와 대립하게 되었다.
  후한에 이르면 유교가 뿌리는 내려 낙양의 태학 학생은 3만 명에 달했고, 태학의 건물도 여러 번 증축되어 말기에는 24동, 1,850교실의 대건물이 되었다. 지방에서도 각각 사숙이 만들어져 이름있는 학자를 스승으로 하는 동문의 학생들이 배출되었다. 유교적 의식에 고취되고 정상적인 관리 등DYDANS이 가로막힌 이들은 반환관 운동에 앞장섰다.
  환관파와 반환관파인 대립은 '당고의 금'으로 불리는 2차례의 대탄압으로 청류 지식인들이 관계에서 일소됨으로써, 표면적으로는 환관 일파의 완승으로 끝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지방에 세력을 갖고 있는 청류 지식인들은 재야의 잠재세력으로 광범하게 뿌리를 내려,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귀족층으로 성장해나갔다.
  166년의 1차 당고에서는 청류파 관료의 대표격인 사예교위(경찰총장) 이응을 비롯한 2백여 명의 관료와 지식인들이 투옥되었다. 이응은 환관의 비리를 엄중이 다스리던 중, 악행을 거듭하던 환관 장양의 아우 장삭을 추적, 형의 저택에  피신하여 기둥 속에 숨은 그를 끝내 기둥을 부수고 체포함으로써 환관들에게 쇼크를 주었다. 이응 등의 죄목은 (태학의 학생과 각 군의 생도들과 왕래하면서 당을 만들어 정부를 비방하고 사회의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는 명목이었다. 이들은 이듬해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종신 금고형, 즉 관직추방과 영원한 관리등용 금지의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어 169년의 2차 당고에서는 당인 100명이 사형을, 그 외 600명이 유형이나 금고에 처해지는 등 대숙청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당인을 은닉했다고 의심이 가는 집에까지 처형의 손길이 뻗쳤다.
  한편, 농민들은 부패한 정권과 잇따른 정쟁 속에서 서서히 몰락해갔다. 호족과 부패한 관료세력에 의한 토지겸병은 날로 심각해졌으며, 메뚜기 떼와 홍수, 가뭄등으로 인한 거듭된 대기근은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사서)는 (쌀값은 치솟고 사람이 서로 잡아먹으며 노약자는 길에 버려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좌절과 실의에 빠진 농민들 사이에서 태평도, 오두미도, 등의 도교적 신흥종교가 유행병처럼 번져갔다. 태평도는 부적을 살라서 물에 타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 하여, 절망적 가난 속에서 질병의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오두미도는 곡물 다섯 말을 바치면 된다고 했다. 뒷날 도교의 뿌리가 된 장각의 태평도는 하북성 거록에서 일어난 지 불과 10여년 만에 화북 동부에서 양자강에 걸쳐 수십만의 신자를 얻었다.
  184년에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이 태평도의 각 지부가 군사조직으로 전환되어 일어난 대규모 농민봉기다 중국의 전통적 오행설에 의하면 불에서 흙이 생성된다. 이들은 화덕에 해당하는 한나라는 곧 몰락하고 이어서 토덕에 해당하는 황건의 세상이 다가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머리에 새세상을 상징하는 황색의 띠를 동여매었다.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해 한꺼번에 36만이 봉기한 이 전대미문의 항쟁은 들불처럼 광대한 지역에 번져나갔다. 황건군은 그해 가을, 장각이 죽고, 동생 장량, 장보 또한 전사하는 등 유능한 지도자를 잃고 주력군이 쇠미해졌으나, 각지에서 약 30년간 끈질긴 항쟁을 벌였다.
  대규모 농민봉기에 봉착한 지배층은 즉시 권력투쟁을 중지하고 당고를 해제하는 등 호족세력을 무마하여 항쟁의 진압에 안간힘을 썼으나, 유명무실한 명목만의 왕조체제를 유지할 뿐이었다. 마침내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가 한의 왕위를 찬탈, 위나라를 세우니, 이로써 광무제로부터 196년 고조로부터 422년간 존속했던 고대제국 한나라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새로이 펼쳐지는 세상에서는 진, 한과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고대제국은 다시 출현하지 못했다. 더구나 농민들이 꿈꾸었던 새세상도 쉽게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황건난의 진압과정에서 실력을 자각한 호족세력들의 시대가 당분간 계속되었다.

   

23 천하 삼분의 적벽대전


  동아시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평생에 한번쯤은 만화, 소설, 혹은 드라마로 각색된 (삼국지)의 세계를 접할 것이다. 그 원형은 원말 나관중에 의해 씌어진 (삼국지연의). 이 소설은 역사서인 진수의 (삼국지)를 토대로 하여 이를 재구성하고 소설적 재미를 덧붙여 완성되었다. 따라서 우리들의 매력적인 영웅 조조나 도원의 결의로 맺어진 의형제 유비현덕, 관우, 장비, 하늘이 낸 군사 제갈공명 등은 소설적 허구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만은 아니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는 말이 있듯이, 아무리 뛰어난 개인이라 할지라도 시대를 초월할 수는 없다. 당대의 유명한 인물 평론가 허소는 무명의 청년이었던 조조에게 (난세의 영웅, 치세의 간적)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184년, 황건의 대란이 거대한 한제국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게 되자, 이들 군웅들은 토벌대의 이름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조조와 손견은  장교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유비도 대상인의 원조를 받아 관우, 장비와 함께 토벌에 나섰다. 이때 조조와 손견의 나이 30세, 유비의 나이는 24세였다.
  토벌에 나섰던 각지의 호족들도 스스로의 힘에 놀라고 자신의 실력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난이 일단 진압되자 중앙중권은 다시 정쟁에 휩싸였다. 외척 하진은 동탁을 끌어들여 환관 세력을 일소하려 했으나 오히려 환관에 의해 제거되고, 낙양의 시민들에게 포악한 동탁의 횡포만을 더해주게 되었다. 첫 번째의 군벌 동탁이 거리에서 그의 부장 여포에게 살해되자, 시민들은 환허성을 지르며 뛰어나와 살찐 그의 배꼽에 불을 켰던바, 그 불은 다음날 아침까지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의 실력자는 명문 구세력의 대표 원소였다. 그는 황관 2천명을 주멸하고 구질서의 회복을 꾀했으나, 관도의 대전에서 신진 세력인 조조의 군대에 격파되었다.
  조조는 재빨리 방황하는 후한의 어린 황제 헌제를 맞아들여 명분을 얻었으며, 일종의 국가 소작제인 둔전제를 실시하여 국가의 기반을 확충,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했다. 둔전제란 정부가 직접 몰락한 농민들을 불러모아 황폐해진 농경지를 할당, 정착시키는 제도로, 종래에 군대의 자급자족을 위해 변방에 실시되었던 것을 민간에 적용시킨 것이다. 조조는 현실적인 정치가에게 필요한 문무의 자지을 모두 겸비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한편 강남에서는 손견의 아들인 손권이 양자강 동쪽의 기름진 지대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형 손책만큼 용감하거나 무공에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주유, 노숙 등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토착 호족세력과의 연합에 성공하는 등 정치적 자질을 보였다.
  유비는 중국인들이 말하는 유덕한 인물이 흔히 그렇듯이 귀가 매우 커서 스스로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아무리 삼고초려의 정성을 기울였다고는 하지만, 황건 토벌의 공으로 말단 관직에 봉직했을뿐, 20년 세월을 조조, 원소 등의 밑에서 전전하여 뚜렷한 세력기반이 없는 그에게, 가문의 보존을 위해 융중에 칩거해 있던 제갈량이 마음을 움직였던 것을 보면 상당한 매력이 있는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환관을 양조부로 하고 뇌물로 승진을 거듭한 아버지를 둔 조조와는 달리, 전한 경제의 후손이라는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는 그의 시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확인할 길은 없다. 그는 일찍이 고아가 되어 돗자리를 짜서 생계를 유지하는 빈한한 생활을 했다.
  제갈공명은 형주의 유포에 의탁하고 있던 유비에게 흉중 대책, 이른바 천하 삼분의 계략을 토로했다. 그는 유비가 천하의 요새이자 양장강 중류의 요충지인 형주와 기름진 평야지대인 익주를 장악하여 터전으로 삼아야 하면, 이를 위해서는 일단 동쪽의 손권과 연합, 북방의 조조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208년 천하통일의 꿈을 안은 조조의 백만 대군이 형주를 향해 남하했다. 공명은 조조의 위력 앞에 망설이는 손권을 찾아가, 뛰어난 정세분석으로 그를 설득, 연합에 성공했다. 실제로 조조의 북방군은 대군이지만 투지가 없는 정복민이 많은데다, 남방의 풍토병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손권은 주유의 지휘하에 3만의 군대를 내었고,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양군은 대치하게 되었다.
  주유의 부장 황개는 조조군에 위압당한 듯, 거짓 항복의 깃발을 꽂고 조조의 진영에 나아갔다. 그를 따르는 10척의 배에는 마른 섶과 갈대가 가득 실려 있었다. 이를 까맣게 모르는 조조의 군사가 환성을 지르는 순간, 조조의 진영에 가까이 접근한 황개는 재빨리 신호를 올렸다. 때마침 세찬 동남풍이 불어대자 불붙은 선단은 조조의 함대에 돌입, 조조의 대선단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온천지가 불에 뒤덮이고 조조은 군대를 모두 잃고 겨우 목숨만을 보전, 도망했다. 이것이 유명한 적벽대전이다.
  조조군의 참패에 치명적이었던 것은 모든 배가 서로 연결되어 도망할 겨를도 없이 몽땅 소실되었다는 것이다. 수전에 익숙치 못했던 조조는 군사의 도망을 막고 배멀미를 줄이기 위해 전선을 모두 쇠고리로 연결하여 한덩어리로 만들어놓았다.
  220년 조조가 66세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자, 그의 아들 조비는 헌제를 압박, 선양의 형식으로 새 왕조 위魏를 수립했다. 이후 유비가 한漢을, 손권이 오吳나라를 세우게 되니, 중국의 천하는 명실공히 삼국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삼국의 국력을 비교하자면 단연 위가 압도적으로 우월했으며, 촉한의 세력이 가장 미미했다. 유비마저 죽고 미력한 그 아들 유선이 위를 계승했을 때, 제갈량은 명문으로 유명한 (출사표)를 바치고 북벌전에 나섰다가 마침내 진중에서 병사했다.
  (신, 은혜를 입고 감격을 이길 길 없어 이제부터 출진하려 하옵는바, 표를 바치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사뢸 바를 모르겠나이다...)
  이같을 서두로 시작하는 출사표는 상주문이라기보다 오히려 유언잔에 가까운 것이었다. 제갈량의 자는 공명, 그는 뛰어난 지략과 충성된 신하의 모범으로 후세에 널리 숭양받았는데, 유비보다 20살 아래였다.
  이때의 북벌전에서 활약한 위의 명장은 사마의였다. 그는 끝까지 촛의 공격에 응수하지 않고 성을 굳게 지켜 지구전으로 나아감으로써 물자가 부족한 촉의 자멸을 이끌었다. 그는 회하 유욕의 둔전에 성공함으로써 사마씨 정권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그의 손자 사마염은 마침내 진晉나라를 수립, 280년에는 오를 멸망시키고 잠시나마 전국을 통일했다.
  흔히 삼국시대를 낭만적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생사기로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였음을 상기할 필요는 있다. 한편, 삼국의 경쟁 속에서 내지의 국토는 더욱 확장, 개발되었고, 특히 위나라에서 시작된 여러 제도, 일종의 국영농장인 둔전屯田의 토지제도, 관리 추천제인 9품관인법九品官人法 등 선진적인 여저 제도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한 전형이 되었다.

   

24 민족 대이동과 강남 개발-5호의 침입과 동진의 성립(317년)

 

  사마염이 위나라의 제위를 빼앗아 진나라를 세운 후, 삼국으로 분열되었던 중국은 잠시 통일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 통일은 불과 4대 37년간에 불과했다. 한두 사람의 힘으로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었으며, 중국의 분열은 당분간 지속될 형편에 있었다.
  220년 한나라가 몰락한 이후부터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는 589년까지의 대분열기를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부른다.
  위는 삼국 중 강성했던 조조의 나라 이름을 딴 것이고, 진은 통일 왕조인 서진과 유목민족에게 북중국을 빼앗기고 강남에 수립한 이른바 동진을 합친 사마씨의 정권을 일컫는다.
  이후의 중국은 북중국에서는 유목민족의 정권들이, 남중국에서는 한족의 정권들이 각기 변천을 거듭했다. 이를 통틀어 남북조라고 부른다. 화북은 여러 유목민족이 난립했던 5호 16국을 선비족의 북위가 통일했다가, 서위와 동위, 이어서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계승되었다. 강남에서는 동진 이후,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왕조가 이어졌다. 흔히 부르는 6조라는 별칭은 여기에 삼국의 오를 포함한 것으로 강남에 세워졌던 여섯 왕조를 가리킨다.
  마치 서양에서의 게르만의 대이동처럼 유목민족들은 한의 몰락은 전후하여 중원을 점령, 중국사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로마가 라티품디움의 성행으로 인한 자영농민의 몰락으로 제국의 쇠퇴를 보이다가 마침내 게르만 족의 대이동으로 몰락을 맞는것과 유사한 현상이 중국의 고대제국 한나라에서도 나타났다.
  이미 한나라 말기부터 사실상 중앙정부를 지배했던 지방호족들은 황건의 대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사적으로 더욱 강력해졌다. 이들의 위치는 위진남북조 시기의 끊임없는 왕조 변천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황실을 능가했기에 우리는 이시기에 비로소 귀족사회가 성립되었다고 말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겨우 13세의 나이에 희생되었던 송의 순제는
  (다시 태어난다면 황실 이외의 집에서...)
  라고 탄식했다.
  송조 8대의 황제 중에서 암살을 모면한 자는 불과 3인 뿐이었으며, 48년간의 안정된 통치를 했던 양무제도 종국에는 후경의 난으로 유폐되어 굶어죽었다.
  한편, 귀족들에게 집중된 엄청난 부는 찬란한 귀족문화를 꽃피웠으나, 그들의 사치스런 생활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사마염때의 공신인 하증은 매일 1만 전의 비용을 들인 식사를 하면서도 아직도 부족사다고 했는데, 그의 아들 하소는 급기야 2만 전으로 정했다.
  혜제는 백성들이 굶주려 죽어간다는 보고를 받고서 말했다.
  (밥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좋을 텐데...)
  게다가 서진의 귀족들은 60일간에 전사자가 10만을 기록한 경이로운 골육상잔, 즉 8왕의 난을 겪으면서 민첩한 북방 유목민족의 무장병력을 끌어들임으로써 스스로 호랑이를 불러들인 꼴이 되었다.
  극도로 궁핍해진 화북의 농경민들의 행렬이 남으로 남으로 이어져서 양자강 유역 특히 호북, 사천 두 성 일대는 이러한 '난민'으로 들끓게 되었으며, 이들이 떠난 화북의 자리는 북방의 유목민족들로 채워졌다. 유목민족들의 중국 내지 이주는 이미 한말부터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들의 생활은 사회의 최하층, 즉 호족의 노예적 예농 혹은 소모품적 병사가 고작이었다.
  304년 8왕의 난 때 두각을 나타냈던 흉노인 용병대장 유연의 독립 선언으로 시작한 유목민족들의 저항이 5호 16국 시대를 개막했다. 5호란 흉노와 흉노의 별종인 갈족, 동복방에서 온 몽고계의 선비족(돌궐족 설), 서방에서 온 티베트 계의 전진은 우리 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나라로 특히 전진왕 부견은 5호의 가장 위대한 군주로 꼽힌다.
  놀라운 것은 유목민족이 한족을 지배했던 이 최초의 시기에서조차 한족의 문하는 보호, 육성되어 다음 시대에 계승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서양에서 게르만의 이동 이후 로마의 문화가 거의 단절되었던 것과 비교해볼 때 중국문화의 저력을 새삼 깨닫게 하는 것이다.
  439년 북중국을 통일, 중국내에 최초로 안정된 유목민족의 왕조를 건설했던 북위는 한족의 지배를 위해 중국의 효율적인 지배체제와 문화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본격적으로 실시한 가람이 효문제이다.
  할머니 풍태후로부터 유가적 교양을 주입받았던 효문제는 도읍을 북방의 평성(산서성 대동시)으로부터 중원의 낙양으로 옮기면서 농경사회에 바탕을 둔 이른바 한화정책을 실시했다. 그는 선비족 고유의 부족사회와 문화의 고수를 주장하는 반란세력을 진압하면서 이들에 의해 추대되었던 자신의 아들 황태자 순까지도 처형했다. 그는 스스로 부족명에서 전용된 성 '탁발'을 '원'이라는 한족풍의 성으로 바꾸었으며, 선비복의 전통적 풍속, 언어까지 폐지시켰다. 본관을 낙양으로 옮기고, 죽은 후에도 북방 들판으로 돌아가 매장하는 것을 금지했다.
  한편, 이들 유목민족에 의해 중국의 문화가 보존되었다는 사실만을 주목한다면 이 시기의 역사를 제대로 파악했다고 볼 수 없다. 일찍이 황하문며의 발생 이래 중국의 문화가 이때처럼 이질적인 문화의 커다란 충격을 받은 시기는 없었다. 유교라든가 하는 중국적 편견에 오염되지 않은, 보다 진취적이고 소박한 유목민족의 문화는 중국문화를 새로운 활력으로 가득 차게 했으며, 수, 당의 보다 개방적이고 풍요로운 문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경제적 후진지역이었던 강남(양자강 유역)지역이 화북의 혼란을 피하여 대거 남하한 한족에 의해 대부분 개발, 농업생산력이 크게 향상되면서 새로운 경제적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급격히 늘어난 노동력을 이용, 둑을 쌓는 등 대규모의 수리공사를 일으킴으로써 새로운 농토를 확대했다. 벼농사가 부적당한 땅에는 보리 농사가 크게 장려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25 도교와 불교의 융성-도교의 성립(444년경)

 

  절이나 탑 등 도처에 산재해 있는 불교적 건축물들은 마치 중국의 산천이 처음 생성될 때 그때부터 함께 있어왔던 것처럼 중국적 풍광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서 불교가 중국문화와는 대조적일이만큼 이질적인 이국 종교였다는 것을 기억해내는 것이 새삼스러울 정도이다.
  그러나 불교는 신유학의 서단을 열었던 당대의 거유 한유가 비판했던 것처럼, 인도에서 발생한 이적의 종교로서 중국적 관습과는 대립되는 요소가 많았다. 승려의 독신주의와 고행으로 육체를 괴롭히는 수도생활은 대를 이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야 하는 중국적 가족제도, 조상으로부터 받은 신체를 온전히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국적 전통 사고방식을 뿌리째 흔드는 것이었다.
  공자는 일찍이 죽은에 대해서 묻는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살아가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은 후의 것을 알겟는가?)
  공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구원의 문제를 중요시하는 어떠한 종교도 무지한 대중을 현혹시키는 비합리적인 미신에 불과하다.
  이러한 불교가 위진남북조 시대에 중국인들을 열광시키고 중국인의 정신세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시기 화북에 왕조를 세웠던 유목민족들에게 중국적 편견이 없었던 점, 또한 거듭되는 전란과 정치적 분열 속에서 이미 제국의 학문으로 뿌리를 내린 유교가 힘을 잃고 사상적 공백을 보이고 있었던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계층 상하에 관계없이 종교의 세계에 침잠하여 정신적 안정을 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널리 퍼졌다. 이국 종교인 불교뿐만 아니라 중국 전통의 도가사상도 다시 부각되어 중국사상의 약진은 앞서의 춘추전국시대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제국이 붕괴하고 가닥이 잡힐 것 같지 않은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자, 지식인들은 사회로부터 시선을 서서히 거두어 자신의 내면 세계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유교적 교양을 갖춰 관료가 되는 길은 이미 차단되어 있었고, 어지러운 세상은 절망과 인생에 대한 허무감을 안겨주었다. 경제적 여유 집단인 이들은 세속을 떠난 개인적 완성이나 구원의 문제에 빠져들었고 자연스레 도가의 사상이 다시 부상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죽림 7현이라고 불리는 은둔자 집단의 청담사상이다. 청담이란 '더러운 세속을 초탈한 맑은 이야기' 정도의 의미로, 이들은 세상일을 등지고 자연에 묻혀 살면서 자신의 감정을 시나 칠현금, 술을 빌어 표현하기도 하고, 기이한 충동적 행적을 일삼이면서 사회적, 정치적 환멸에 응답했다.
  종교로서의 도교는 엄밀하게 말하면 본래의 도가 사상과는 거리가 있다. 도교는 오늘날까지도 유달리 건강에 관심이 많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염원되었던 질병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즉 불로장새의 염원이 담긴 신선사상을 중심으로, 음양오행설, 참위설, 혹은 민간의 잡다한 신앙들이 뒤섞인 것이다.
  진시황 이래 도교에 심취해서 불교 대탄압을  단행했던 당 무종에 이르기까지 불로장생을 구하는 황제들의 행렬은 그치지 않았으며, 이들 중에는 연금술로 만들어진 중금속을 불로장생약으로 잘못 믿어 하늘이 내린 명까지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원시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금술에 대한 관심은 4세기 초, 이분야의 기념비적인 저작인 (포박자)를 출현시켰고, 민간에서는 불로장생을 가져온다고 믿어졌던 호흡 조절법과 술과 고기등을 피하는 섭생법이 널리 유행했다.
  도교의 성립시기를 정확히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교단조직 등 최초의 조직화된 움직임은 후한 말 황건적의 난의 모체가 되었던 장릉, 장로의 오두미도와 장각의 태평도를 들 수 있다. 그후 여러 파로 나뉘어져 통일적인 교리나 조직을 갖추지 못하고 있던 도교가 민간종교로 완성되는 과정에서 고등종교인 불교가 미친 영향은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도교의 승려인 도사가 보통 결혼이 허용되는 것은 불교와 다르지만, 도교의 경전(도장)이나 사원(도관) 제도는 불교의 경전이나 사원 제도를 많이 닮아 있다. 실제로 민간에 이르면, 도교와 불교는 신화와 미신, 주술 등이 뒤섞여 구별이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한편, 북위 태무제는 유교가 이적시하는 유목민족의 중국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444년 새로이 도교를 국교로 삼았다. 이때 오두미 계열의 도사였던 구겸지에 의해 도교의 세력이 정비되었다. 대체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도교가 민간종교로서 완성되었다고 본다.
  전승에 의하면, 불교는 64년 후한 명제의 꿈에 현몽함으로써 중국에 처음 전래되었다고 한다. 이를 말 그대로 믿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이 시기에 상인, 혹은 승려들에 의해 전래되었다고 보인다. 가장 위대한 전래자는 구마라습이다. 그는 인도인을 아버지로 하여 중아아시아에서 태어났으며, 382년경 중국인 원정대에 포로로 잡혀 중국에 끌려온 후 방대한 역경사업을 이끌었다.
  불교는 외래문화에 대한 편견이 적은 북조 상류층에서 널리 성행하기 시작했다. 5호 시대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북위 왕조에서 만개하게 되었는데, 그 상징물이 바로 돈황 막고굴과 함께 3대 석굴로 꼽히는 운강, 용문의 석굴사원이다.
  석굴 조성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는 황제였으며, 운강석굴은 북위 최초의 수도였던 산서성 대동, 용문석굴은 두 번째 수도였던 낙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운강석굴사원을 예로 들면, 사암층의 단애를 따라 약 40개의 동굴이 약 1킬로미터에 걸쳐 장대하게 조성되어 있는에, 조각된 불상이 대소 합해서 자그만치 5만개 이상이 된다. 그중 제16굴부터 20굴, 이른바, '담요 5굴'에 있는 위풍당당한 5불은 당대의 황제인 문성제와 그의 선조인 다섯 황제를 상징한 것으로, '제왕이 곧 여래'라는 지배이념의 표현이다. 이제 불교는 황제권과 손잡고 국가 불교로 정착하면서 폐불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며, 황제는 불력의 힘을 벌어 스스로 부처로 군림함으로써 자신의 세속적인 지배를 정당화 하고자 했다. 이를 주도한 승려가 담요였다.
  이후의 불상에 새겨진 명문에서 '황제폐하를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라는 글자를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불교를 이용해 황실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려는 북위황제의 의도는 훌륭히 달성되었다고 보이며, 이러한 현상은 중국을 통해 불교를 전해 받은 우리 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에서도 나타났다.
  국가 불교로 재해석된 불교의 윤회설을 현실에 적용하면, 민중들의 고난에 찬 삶은 지배층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생에서의 자신의 잘못된 행위(업)의 결과, 즉 인과응보이므로 누구를 탓할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민중의 저항은 부당한 것이 되고, 현실에서의 불평등한 사회질서는 정당화되는 것이다.
  500년부터 23년간 조성된 거대한 용문석굴사원의 조성에는 80만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불교가 널리 성행함에 따라 진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인도 순례를 감행하는 구법승이 줄을 이었다. 8세기까지의 약 200명의 승려 명단이 알려져 있다. 그중에 9명이 우리 나라의 승여로 확인 되었는데, 혜초가 처음에는 중국의 승려로 알려졌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좀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로는 5세기 초의 법현, 7세기 전반의 현장, 7세기 후반의 의정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여행기를 남겨 정확한 연대기적인 기록이 적은 인도의 역사를 밝히는 데 뜻밖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현장은 우리가 (서유기)에서 만나는 삼장법사(본래의 뜻은 경전 번역가)의 모델로 유명하다.

   

26 예술을 위한 예술의 탄생-문벌 귀족사회의 성립(3세기--6세기)

 

  '글을 보고 그 사람을 안다'라는 말이 있지만, 중국 사람들은 글을 담아내는 글씨 또한 사람의 인품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는 예를 존중하는 중국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할 터이지만, 표의문자인 한자가 갖는 독특한 회화성도 한몫을 단단히 거들어 '서예'라는 독립된 예술분야가 개척되기에 이르렀다.
  왕희지가 그 선구자로, 사람들은 그의 이름 앞에 서성이라는 칭호를 덧붙여 부르면서, 서예가의 대명사로 그를 떠올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는 놀라운 끈기와 정열로 한, 위의 비문을 연구하여, 예서 외에도 당시까지 아직 미진했던 해서, 행서, 초서를 예술적 서체로 완성해냈다. 그의 글씨는 힘이 있으면서도 전아하여 귀족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가 처음 글씨를 배웠던 어린 시절에는 솜씨가 또래들에 미치지 못할 정도였으나, 남다른 외골수의 집념으로 일가를 이루어냈다. 그의 머리 속은 공부할 때나, 식사할 때, 길을 걸을 때, 언제나 서체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고, 한번 글씨에 열중하면 흠뻑 삼매경에 빠져들어 아무것도 그를 방해할 수 없었다. 연일 옷 위에도 손가락 글씨를 써대니, 옷이란 옷은 이내 너덜너덜해졌으며, 벼루를 씻었던 그의 집 연못은 어느새 온통 시커멓게 변해버렸다고 한다.
  왕희지의 열렬한 팬이었던 어떤 도사는 왕희지가 흰 거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꾀를 내었다. 그에게 깃털이 흰 거위가 있다는 소문을 들은 왕희지는 그를 찾아가서 거위를 팔 것을 청했다. 도사가 말하기를,
  "거위를 팔 수는 없습니다만, 제게 만일 (도덕경)을  베껴주신다면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왕희지는 기꺼이 붓을 들었고, 도사는 꿈에서 그리던 그의 글씨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일이 있자 사람들은 왕희지의 글씨를 '거위와 바꾼 글씨'라고 불렀다.
  당태종도 그의 글씨를 사모하여 (난정서)를 자신의 무덤에까지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 능이 도굴되었기 때문에 그 진품은 유실되었다.
  난정은 거울 같은 시내와 울창한 대숲으로 둘러싸인 희계 땅의 명소다. 왕희지는 어느 봄날 41명의 명사들은 난정에 초청, 시의 향연을 벌였다. 시인들은 냇가 돌부리에 걸터앉아 술잔을 기다리고, 술을 가득 담은 술잔이 마치 나뭇잎처럼 냇물 위로 일렁이며 내려온다. 술잔이 시인의 앞에 다가오면, 단숨에 이를 들이키고 이내 시 한 수를 적었다. 갑자기 한 권의 시집이 완성되었고, 왕희지가 서문을 썼으니, 이 글이 바로 (난정서). 중국 행서의 대표작이다.
  낭만적인 이 장면의 연출은 왕희지가 당대의 귀족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명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동진의 최고 명족인 낭야 왕씨로, 사마의의 증손인 사마예가 동진을 세운 후 3대에 걸쳐 왕조의 기초를 세우는 데 헌신한 왕도의 사촌동생의 아들이었다. 현재 남경시 교외의 상산에는 약 5만 평에 달하는 왕씨 일가의 묘지와 전실묘가 있어 이들의 권세를 짐작하게 한다.
  위진남북조 사회가 전반적으로 그렇지만, 특히 강남에 쫓겨온 한족의 남조사회에서는 이러한 명족들의 위세가 황실을 위협하고 있었다. 명족들은 북방의 유목민족의 남침을 제어하기 위해 통일왕조를 원했을 뿐, 황실은 또 하나의 명족에 불과한 따름이었다. 황실이나 왕씨, 안씨, 주씨 등 명족의 무덤에는 대차가 없으며, 이때부터 선산을 정해 일가의 묘역을 삼는 제도가 시작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를 귀족사회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족들은 일정한 지역을 구획할 정도로 넓은 대농장을 갖고 있었으며, 위나라 이후의 관직 추천제인 9품중정법을 통해 관직을 독점했다. 대등한 집안끼리만 통혼이 이루어지고 귀족의 가문은 세세로 이어졌다. 명실상부한 귀족사회가 성립되자, 이에 따라 귀족문화가 개화하게 되었다.
  20세기의 대문호 노신은 남조를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대'로 지칭했다. 이제 예술의 목적은 통치자의 백성에 대한 교훈적인 의미를 탈피하여, 진정한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단계에 돌입하게 되었다. 서예뿐만 아니라 문학, 회화도 이때에 비로소 독립된 예술분야로 정착했으며, 각 분야의 평론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양나라의 소명태자는 육조의 시와 문장을 모아 (문선)을 편찬했다. 4자 6자의 대구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4, 6병려문은 시각적 형식뿐만 아니라, 청각적으로도 사성의 격식을 따지는 고도의 형식미, 완성미를 강조함으로써 그 귀족적 성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병이란 나란히 달리는 두 마리의 말을, 려는 남녀의 동반자를 일컫는다.
  전원시인 도연명은 당시의 부패한 정계에서 관리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새장에 갇하는 새'의 신세에 떨어질 뿐이라 생각하여 세번 관직에 올랐다가 세 번 물러났다. 이때 그가 남긴 글이 유명한 (귀거래사)인데, 당시 불교에서 유행했던 (귀거래찬)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동쪽 울 밑의 국화 한 송이를 꺾어 들고
  유유히 남산을 바라본다.

  이 귀절은 연작시 (음주)의 일부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술을 벗삼아 향리의 전원생활을 노래하고 아름다운 전원시들을 남겼다. 소명태자는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술을 어지러운 세태에 대한 부정을 애써 감추고자 하는 의미로 파악했다.
  중국 회화사상 최초로 굵은 획을 그으며 등장한 화가이자 이론가인 고개지도 동진 때의 사람이다. 당시에는 산수화보다 인물화가 유행했지만, 눈에 보이는 형상보다 내면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중국화의 기본정신이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364년 수도 건강의 와관사 벽에 그린 유마거사상이 꼽힌다. 와관사를 짓는 데 당대의 명사, 고관들이 10만 전 정도의 시주를 했는데 가난한 고개지가 백만전을 약속하여 사람들을 휘둥그레 놀라게 했다. 그는 주지에게 다만 절 가운데의 벽면 한쪽을 부탁하고는 유마거사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마거사는 산스크리트 어로 '청정무구'를 뜻한다.
  깊은 묵상으로 정신을 몰입한 고개지가 마지막으로 눈을 찍어 점정함으로써 거사상을 완성하는 순간, 유마거사가 마치 되살아난 듯 자비스러운 눈으로 법당 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감동한 신도들은 너도나도 전대를 풀어 시주하니 지켜질 것 같지 않았던 그의 약속은 실행되었다.
  그의 작품 중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여사잠도)는 장효가 지은 (여사잠)이라는 책에 삽화식으로 그려넣은 그림이다. 여사잠은 서진의 혜제 때 권력을 휘둘렀던 가황후 일족을 경계, 궁중의 여인들의 본분을 교훈적으로 적은 책이다. 이 그림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7 대륙의 동맥 대운하의 건설-수나라의 재통일(589년)

 

  후한의 몰락 이후, 분열의 상태가 자그만치 370년간 지속되면서 다시는 오리라 믿기 어려웠던 중국사회의 재통일이 이루어졌다. 581년 외척 양견이 북주의 왕위를 찬탈, 수隨나라를 세우더니, 마침내 589년에는 진을 멸함으로써 통일을 완성했다. 그가 수 문제다.
  문제는 통일의 힘으로 발휘되었던 백성들의 측정할 수 없는 열기를 토대로 정치에 힘써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특히 당제국의 기초가 되었던 각종 제도들은 바로 문제가 북조의 각 제도를 수렴하고 정비해낸 것들이다.
  균전제에 기초한 부병제와 조용조의 세제, 문벌에 의한 9품관인 법에 대신하여 중소 지주층의 관계진출의 길을 연 과거제, 3성 6부의 중앙 관제 등이 실시되었다. 주, 군, 현의 지방행정 조직이 간소화되어 주현제로 정착하게 되었고, 인보제를 실시하여 백성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그의 개혁에는 물론 지방 물벌귀족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다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었다. 18년이 경과하자 수의 호적 대장에 등재된 호구수가 400만 호에서 900만 호로 불어났다. 수도 장안의 창고에는 조정이 5, 60년을 족히 사용할 만한 곡물과 피륙이 쌓이게 되었다.
  수 양제는 문제의 둘째 아들로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용모와 재능으로 양친의 사랑을 독점했다. 그는 13세에 이미 진왕에 봉해졌는데, 마침내 형 양용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일설에는 문제도 그의 손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다.
  문제가 무력으로 중국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다면, 양제는 대운하를 개통하여 남북 문물교류를 활발히 함으로써 오랜 남북 분열을 통합하고 통일을 실질적으로 완성했다. 최초로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진의 상징물이 만리장성이라면, 수의 중국 재통일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대운하를 꼽을 수 있다.
  남북조 이래 강남의 경제적인 중요성은 이미 중원을 능가할 정도로 증대됨으로써 대운하의 완성을 재촉했다. 특히 양자강 유역의 쌀을 수도인 장안과 동도 낙양 등의 소비도시에 직송하는 문제는 중요한 것이었다. 양제는 대운하의 완공으로 보급로가 정비되자 곧 바로 고구려 대원정을 감행할 수 있었다.
  중국의 지형은 서고동저형으로, 주요 강들은 3천미터가 넘는 서쪽의 산지에서 발원, 동으로 흘러간다. 대운하는 이들 주요 강, 이른바 백하, 황하, 회수, 양자강, 전단강, 즉 5대 강의 하류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605년부터 610년까지 4차의 공기로 나뉘어 건설된 대운하는 북으로 북경, 남으로 항주에 이르는 장장 2천 킬로미터의 거대한 물길이다. 이로써 실핏줄 처럼 얽혀 있던 각 강의 지류들이 서로 연결, 중국이라는 거대한 몸체를 관류하는 대동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관용 수로로 출발했던 대운하를 따라 점차 민간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활발한 사람들의 왕래는 중국 내 문물의 교류를 더욱 촉진, 사회의 동합을 재촉했다. 물론 이러한 결실은 거대한 중국의 다른 문물이 그러하듯이 백년쯤 지난 당대에 맺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만리장성처럼 대운하도 역시 그동안 역대왕조에게서 개별적으로 추진되던 것을 통일국가에서 완결을 본 형태이지만, 이 운하의 건설에 바쳐진 백성들의 고통은 대단한 것이었다. 대운하의 양 언덕에는 죽어나가는 백성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뒹굴었으며, 사람들은 죽음에 이르는 노역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팔다리를 잘라서 복수복족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참으로 고대의 웅대한 문화유산들은 오로지 전제국가들이 무수한 노동력을 강제 징발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백성들은 대운하의 건설에 매월 100여만 명, 만리장성의 보수, 축성에 10만명, 동도 낙양과 이궁의 건설에 200만 명이 동원되었다. 가령 강남의 훌륭한 목재 한개를 낙양에 운반하려면 2천 명의 인부가 동원되어야 했다.
  낙양은 동주시대 이래 중요성은 인정되었지만, 대개 역대왕조에서 천혜의 군사요충지이자 관중의 곡창지대를 거느린 장안의 세에 눌려 있었다. 그러나 강남의 경제가 개발되고 대운하가 건설되는 즈음에 이르러서는 남부그이 운하가 합류하는 낙양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지금도 낙양 주위에는 큰 건물이 들어갈 정도의 대형 곡물창고들이 발굴되고 있다.
  웅장한 낙양성은 전국에서 수집한 진기한 동식물들로 가득했다. 장안에도 전한시대의 장안성 동남쪽에 거대한 대홍성의 축조를 시작했다. 장안의 서원은 둘레 2백 리의 거대한 궁원이었는데, 그 가운데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그 안에는 신선들이 산다는 봉래, 방장, 영주의 인공산을 조성했다. 거대한 인공산 위로는 궁전, 망루등이 장관을 이루었다. 겨울이 되어 나뭇잎이 떨어지면 색색의 비단으로 꽃과 잎새를 만들어 나뭇가지에 매달았고, 임긍이 배라도 탈 양이면 얼음을 깨뜨려 앞길에 꽃을 흩뿌렸다.
  또 장안에서 강도(양주)에 이르는 운하를 따라 40여 개의 이궁을 지었다. 양제는 운하 양옆에 드리워진 버드나무 사이로 거대한 운하를 따라 뱃놀이를 즐겼다. 순행을 빙자한 수만 척 배의 행렬은 2백리에 달하고, 노를 젓는 사람만 8만 명, 황제가 탄 이른바 용선은 4층에 길이 600미터, 120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 운하의 양쪽 언덕에는 호위병사들의 황금 갑주가 눈부시게 빛났으며, 군대의 휘황한 깃발이 하늘을 덮고, 대행렬의 그림자가 강물에 출렁거렷다.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제왕의 화려한 생활은 중국의 고대제국에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28 고구려와의 전쟁-수나라의 멸망(618년)

 

  수나라라는 초강대국의 출현으로 동아시아는 팽팽한 긴장상태에 들어갔다.
  한반도에서는 삼국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 이미 중국의 군현을 몰아낸 지 모래였으며, 오히려 중국의 분열을 이용, 고도의 양면 외교를 펼칠 만큼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특히 삼국의 선두주자이며 거란이나 말갈족의 지배를 두고 중국과 국경을 다투는 만주의 실력자 고구려의 존재는 수나라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한편, 서북의 돌궐도 북주와 북제의 분열을 교묘히 이용, 급속한 신장을 거듭, 커다란 유목국가를 건설하고 있었다.
  수나라는 '왼쪽 눈으로 돌궐을 무섭게 쏘아보고, 오른쪽 눈으로는 고구려의 동정을 주의깊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궐은 '가한'이라고 불리는 제왕의 지위를 둘러싼 내분에 들어갔고, 수는 이를 교묘히 이용, 제국을 동서로 분열시키는 공작에 성공했다.
  고구려는 수왕조가 수립되자 곧바로 사절을 보내 수의 책봉체제에 들어갔으나, 남조의 진왕조와의 교섭도 단절하지 않은 채 사태를 낙관하고 있었다. 중국의 책봉에서 고구려가 받은 칭호는 '요동군공 고구려왕' 정도였다. 그러나 진이 너무도 쉽게 멸망 해버리자 잠시 당황했던 고구려는 방위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돌궐과 연합을 꾀하면서 적극적인 대비책을 강구했다.
  일촉즉발의 양구그이 대치상태는 양원왕을 이은 영양왕이 사죄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잠시 평온을 유지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문제는 고구려가 (조공을 게을리하고 신하의 예를 결여했다)는 명분으로 수륙 30만 대군을 일으켰다. 결과는 수의 참패였지만, 고구려측의 손실도 엄첨났다. 수의 침공을 물리친 고구려는 다시 형식적인 사죄의 사자를 보내기로 하여 사태를 진정시키면서 국력을 정비했다.
  양제는 다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구려 침공에 매달렸다. 607년의 어느 날 양제가 돌궐 가한의 막사를 방문했는데, 때마침 그곳에 머물고 있던 고구려 사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돌궐과 고구려의 결탁은 수로서는 커다란 위협이었으며, 게다가 고구려의 남하를 경계한 백제와 신라의 요청은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뒷날, 수는 백제에게 고구려의 동정을 탐색하는 일을 의뢰했으나, 백제는 막상 수의 침공 때에는 중립을 지켰다.
  612년 1월, 드디어 양제는 고구려를 '군신의 예를 어기는 자'라고 힐책하면서 대규모 원정을 감행했다. 대운하의 북쪽 종점인 북경에는 113만의 대군이 집결했고, 보급부대의 숫자는 그 2배를 넘었다. 병사들의 행렬은 장장 480킬로미터에 달해 출발에만 40일이 걸렸다. 수군 정예부대 4만 명도 산동반도를 떠나 평양으로 진격했다.
  육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격함으로써 서전을 장식했다. 그러나 요하를 건널 때부터 이동식 다리, 부교가 설계 착오로 짧게 만들어져 전쟁도 하기 전에 많은 사상자를 낸데다가, 요동성의 철통같은 방비는 대군의 3개월간의 공격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수군도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외곽까지 진격했으나, 고건무가 지휘하는 결사대 500명의 습격을 받아 대패했다.
  양제는 할 수 없이 30만 정예로 별동대를 편성하여 평양성 공격에 나섰다.
  이때 고구려의 총지휘관은 을지문덕. 그는 수의 별동대를 깊숙이 끌어들인 후 일시에 섬멸하는 작전을 세워놓고, 예정된 후퇴를 거듭했다. 수나라 군대는 하루 7번 싸워 7번 이기는 승전을 거듭하며 평양성에 닿았다.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평양성 북방 30리에 병영을 설치한 수의 명장 우중문에게 을지문덕의 시 한 수가 날아왔다.

  귀신같은 책략은 천문을 꿰뚫고
  기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도다.
  싸워서 이긴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함을 알아서 그치기를 바라노라.

  우중문은 서둘러 총퇴각을 명령했으나 그의 깨달음은 너무 늦은 뒤였다. 먼길을 떠나온 수나라의 병사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고구려의 복병은 퇴각하는 수나라의 병사들은 사면에서 공격해댔다. 패주하던 수나라 군대가 살수(청천강)를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은 막아놓았던 강물을 일시에 터뜨림으로써 수나라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30만 별동대 중에 살아서 돌아간 자는 2,700명에 불과했다. 이것이 세계 전투사에 빛나는 살수대첩이다.
  1차 원정에서 뼈아픈 참패를 당한 양제는 다음해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고구려 원정을 감행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수나라 백성들 사이에서는 (요동에 가서 개죽음 당하지 말자)는 노래가 유행했다. 백성들은 더이상 무모한 고구려 원정에 동원되어 헛되이 인생을 마감하기를 원치 않았다. 민심이 떠난 것을 알아챈 지방의 유력자들도 수왕조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2차 고구려 원정에서 수군이 급거 철수하게 된 것은 보급을 담당했던 양현감의 반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나라는 거듭된 고구려 원정의 실패를 계기로 몰락의 길을 치닫게 되지만, 그 몰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외부의 고구려가 아니라 중국 내부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각처의 반란으로 궁지에 몰린 양제는 강도에서 시국을 점치고 있던 중, 결국 자신의 친위대장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함으로써 50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그때가 618년, 수가 건국된 지 불과 2대 37년이 경과하고 있었다.
  (주모자가 누구냐?)
  죽음 직전, 양제의 호통에 들리는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온 천하가 똑같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어찌 한 사람에 그치겠습니까?)

   

29 동아시아 세계의 완성-당 태종의 정치(626--649년)

 

  수나라가 몰락한 후, 618년에 이르러 이연이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니, 그가 당 고조다. 역시 북위 이래의 무천진 군벌 출신이었던 그의 평생은 전국의 군웅을 굴복시키는 데 할애되었고, 실제로 당 제국의 기틀을 확립하고, 동아시아를 제압하는 세계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사람은 태종이었다.
  태종의 이름은 이세민. 그는 이미 20대에 뛰어난 지략과 대범한 성품으로 왕세충, 두견덕 등 짱짱한 군벌을 제거하는 무공을 세움으로써 당왕조 창업의 숨은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둘째 아들. 이른바 왕조 계승의 정통성은 그의 형 건성에게 주어져 있었다.
  태종은 꾀를 내어 아버지 고조를 찾아가서는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멋들어진 연극을 했다. 깜짝 놀란 고조가 이들을 급히 부르게 되고, 다음날 새벽 현무문을 들어서던 이들 형제는 무참히 살해되었다. 현무문은 장안성의 북문으로 황제가 거처하는 대명궁에 출입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이었다. 세민은 건성의 심복이었던 현무문의 수비대장 상하를 미리 매수해두었던 것이다. 이를 '현무문의 변'이로고 한다.
  그때 태종의 나이 28세. 그는 피의 숙청으로 권력을 장악한 다음 탁월한 정치를 펼쳐, '정관의 치'라 불리는 당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 후대의 군주에게 군주의 이상형으로 널리 추앙받게 되었다. 그는 전통 명족과 한문 서족 출신의 인재를 고루 등용, 신구 세력의 조화 속에서 군주의 정치력을 발휘했으며, 대신들의 반대여론에 귀를 기울여 일인통치의 한계를 최소화하고, 훌륭한 인재라면 건성의 책하였던 위징까지도 높이 등용하는 등 과감함을 보였다.
  위진남북조 이래 등장한 여러 제도가 수나라에서 정비되고, 당나라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3성 6부의 중앙관제, 균전제의 토지제도, 이에 수반하는 조용조의 세제, 부병제의 병제 등이 637년의 율령격식으로 완성되었다. 이 율령적 지배체제는 왕조국가라는 전제하에서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최대화한 것으로 동아시아의 각국에 널리 채용되었다.
  국내체제를 정비한 태종도 동서의 다른 제왕들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알렉산더 콤플렉스'에 의한 대원정을 감행했다. 돌궐, 위구르를 복속하고 다시 비단길을 장악했다. 이들 각국에는 이미 전한 때부터 성립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그것을 상징하는 책봉제가 다시 강요되었다.
  책봉이란, 본래는 중국의 천자가 그 일족, 공신을 왕, 후에 봉건하던 중국의 국내체제였는데, 이것이 점차 동아시아 제국의 군주에게 확대된 것이다. 동아시아 각국은 초강대국인 중국으로부터 형식적인 군신관계를 맺고 조공무역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교류했으며, 중국이 분열되었을 때는 이를 적절히 이용하는 고도의 외교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세계를 커다란 문화권으로 나눌 때, 동아시아 세계는 고도의 보편성을 지닌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여질 수 있다. 그 보편성은 한자, 유교, 불교 등의 보편 문화, 율령적 지배체제, 책봉과 조공으로 엮어진 국제질서 등으로 상징되는 것이었고, 당의 세계제국 속에서 더욱 확대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에 반기를 들고 나온 세력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고구려였다. 이미 수는 고구려의 책봉관계의 의무 불이행을 이유로 수차례의 대원정을 감행했다. 당 태종도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문책한다는 이유로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꿈은 고구려 서북방의 요충지 안시성에서 좌절되었다.
  안시성의 군민들은 굳게 단결하여 고구려의 후원군이 끊기고 당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1년 여의 공방전을 버티어냈다. 때마침 겨울은 닥쳐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태종은 어쩔 수 없이 철군명령을 내려야 했다. 이것이 유명한 안시성의 전투. 당시 안시성의 싸움을 이끈 성주는 양만춘. 그는 국내에서는 연개소문의 독재를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철수하던 태종은 격심한 악천후를 만나 전쟁 이상의 피해를 보았다. 그는 이후에도 재차 원정군을 파견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다시 대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그는 51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 불로장생을 가져다줄 것으로 믿었던 묘약이 사실은 극약, 그의 사인은 수은 중독이었다.

   

30 전무후무한 여황제 측천무후-무주혁명(688년)

 

 신라와 연합, 숙적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장본인,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인 건릉의 앞에 비석 두 개가 서 있다. 하나는 고종의 비로, 비문은 측천무후가 찬하고 중종이 해서로 썼다. 그런데 다른 하나, 무후의 비에는 어찌된 이유인지 아무런 글씨가 씌어 있지 않다. 이 비가 '무자비'가 되었던 이유에 대해서 혹자는 무후가 너무도 높고 큰 자신의 공덕을 표현할 글을 찾지 못한 까닭이라고도 하지만, 그녀가 죽은 다음, '찬탈'틔 경력을 넣지 않고는 기록할 수 없는 그녀의 비문을 섣불리 지을 수 있는 신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비석들은 현재 섬서성 박물관의 비림-비석의 숲-에 옮겨져 있는데, 고종비는 여러번 부러져 그 흔적이 남아 있지만, 무후의 비는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사에서 측천무후처럼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여성은 없다. 그녀는 현종의 할머니로 '개원의 치'로 불리는 현종 전반기의 번영의 기초를 쌓은 여걸이며, 무엇보다도 중국사에서 전무후무한 최초 최후의 여황제였다.
  일찍이 중국사에서 들먹여지는 여성들은 대개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 혹은 (여자와 술은 가까이하면 안된다)는 식의 유교적 여성관에 적용되는 경우였다. 그녀들은 조비연처럼 왕의 손바닥 위에 올라갈 듯이 가녀린 모습이거나, 양귀비처럼 풍만한 모습이거나 상관없이, 빼어난 미모로 왕의 정신을 흐리게 하여 정치를 어지럽게 했다. 급기야 은이나 서주 같은 나라의 몰락 뒤에는 달기와 포사라는 여인이 있었다라는 식으로 얘기되는 것이다.
  때로 정치적 영향력을 구사했던 여후나 서태후 같은 여성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어린 아들의 뒤에서 섭정이라는 형식을 취해 왕의 후광 뒤에 숨어 있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측천무후는 실력자로 부상, 고종과 함께 '2인 천자'로 불리었던 유례없는 예우에도 만족치 않고 스스로 황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라 이름을 '주'로 정하고, 아들 예종도 자신의 성 '무'씨를 따르게 했다. 이를 무주혁명이라고 부른다.
  측천무후의 이름은 무조, 그녀의 아버지는 고조의 거병에 협력했던 지방의 목재상이었다. 그녀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이름없는 궁녀로서 궁중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타고난 미모와 총기, 당당한 자태로 곧 태종의 눈에 들어 그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뒷날 고종이 된 태종의 9째 아들 이치는 일찍이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고, 아버지 태종이 죽은 다음 그녀를 비구니로 만들었다가 다시 궁중에 불러들여 총애했다. 소의가 된 그녀는 소숙비, 왕황후를 차례로 누명을 씌워 살해하고,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때가 32세. 말단의 궁녀에 불과했던 그녀의 새로운 이름은 측천무후였다.
  고종은 병약하고 우유부단한, 극히 평범한 인물로 왕의 재목으로는 부족함이 많았는데, 바로 이 점이 구귀족들의 눈에 들어 황제로 추대되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신구귀족의 균형 속에 강력한 황권을 구사했고, 구귀족들은 항상 이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황후 소생의 세 아들 중, 첫째는 동성애를 이유로 황태자에서 폐위되었고, 태종을 닮아 매우 유능하고 야망에 차 있던 둘째를 제치고 이치가 바로 범상하는 이유 때문에 즉위하게 된 것이다.
  황후가 된 측천무후는 고종의 지병인 간질병을 이유로 정치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뛰어난 정치력으로 차츰 고종을 능가하여 최고의 실력자로 떠올랐다. 스스로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던 그녀는 구귀족에 대한 냉혹한 숙청을 서슴없이 감행했고, 과거출신의 능력있고 한미한 가문의 개인들을 대거 관리로 등용함으로써, 황제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공적인 기능을 확대, 국력을 신장시켰다.
  최근 낙양의 당 유적을 복원하던 중, 성 밖의 함가창성 유적에서 수백 개의 땅 속 움막이 발굴되었다. 이것은 곡물 저장창고로, 낙양은 대운하를 통해 들어온 강남의 미곡이 집산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나온 기록에 의하면, 비축곡량이 가장 충실했던 시기가 바로 측천무후와 현종의 집권기였다. 이것으로 중국 역대왕조의 숙원 사업이었던 고구려의 정벌도 이루어졌으리라.
  그녀가 밀녀네 다른 남성 황제처럼 이성 편력도 하고, 도가에 기울어지는 등 혼미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황제로서의 그녀의 역량은  자신의 두 아들(중종과 예종)을 폐위시킨 그녀의 야심을 추하게 보이지 않게 할 만큼 매우 뛰어난 것이었다. 뒤늦게 그녀를 폐출 시키려 했던 고종의 시고는 좌절되었고, 권신들도 속수무책, 그녀가 빨리 노쇠해지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705년 재상 장간지 등은 와병중인 그녀를 핍박, 중종을 다시 복위 시킴으로써, 다시 당왕조는 복귀되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 82세.
  이후, 중종의 황후인 위씨 등이 그녀를 흉내내어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꾸었으나, 그 꿈은 다시는 실현되지 않았다.
  여황제의 군림은 전통적 한족사회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에, 수, 당 제국의 황실에 유목민족의 혈통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축을 낳았다.
수 양제나 당 고종이 아버지의 비를 취한 것, 도용에 보이는 기마 여인상, 나아가서 제국의 개방적인 문화등도 이에 한몫을 거들고 있다.
  실제로 수, 당의 황실은 북조의 명가 출신으로 순수 유목민족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들을 흔히 '관농 집단'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무천진을 동향으로 하고 관농지방, 즉 위하 유역에 거점을 갖고 있었다. 무천진은 선비족의 왕조였던 북위의 토찰 엘리트들의 거점인 6진의 하나였다.
  이들 관농 집단의 시조격인 인물은 서위의 우문태로, 그의 자는 흑달(검은 수달), 선비화한 흉노계의 부족 출신이다. 그의 아들 우문각은 마침내 정권을 탈취, 북주를 창건했다. 재미있는 거은 우문태의 협력자로 선비족 최고의 명가를 이룬 독고신이란 존재인데, 그는 장녀를 우문태의 장남에게, 4녀를 북주 최고의 명가인 이병에게, 7녀를 대장군 양충의 아들 즉, 수 문제 양견의 황후로 줌으로써, 북주, 수, 당 3대에 걸친 외척이 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병의 아들 이연이 바로 당 고조이니, 수양제와 당고조는 이종사촌이었던 셈이다.

   

31 서역으로의 관문 돈황-당삼채와 신라 사신(7세기--8세기)

 

  현장이나 혜초가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날 때, 고구려의 후예 고선지가 티베트 정벌을 나갈 때, 장안을 출발한 이들이 새로운 세계를 예감하는 첫 관문은 돈황이었다. 이들에게 돈황은 비단길의 시발지였으며, 낙타에 짐을 가득 싣고 험난한 천산산맥을 넘어온 중앙아시아의 상인들에게는 이제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는 비단길의 마지막 기착지였다.
  현재  약 1만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감숙성 돈황현. 그 동남쪽 약 50리 지점에 명사산이 있고, 그 산 중턱에 4세기 중반부터 거의 1천년에 걸쳐 파인 석굴이 자그마치 492개가 발굴되었다. 휘황있는 이 석굴군은 비단길의 살아 있는 증인이다.
  역시 당나라가 비단길의 최융성기였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당나라의 석굴사가 232개. 그중 당말의 한 석굴사에 오늘날의 돈황학을 탄생시킨 놀라운 보물창고가 숨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1900년경,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이 석굴사에 자칭 도사라는 왕원록이라는 이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동굴 안의 조그만 밀실을 발견했을 때, 그 안에는 고문서와 불경, 불화 등이 천장까지 가득 차 있었다.
  왕 도사가 이 사실을 당국에 보고했으나, 적절한 조처가 없었다. 1907년 헝가리 출신의 유태인으로 비단길 탐험을 위해 영국 국적을 갖고 있었던 슈타인은 그로부터 1만 점도 더 되는 고문서와 불화를 불과 말굽은 4장으로 구입했다. 그 공적으로 슈타인은 영국 왕실로부터 경의 칭호를 수여받았고, 오늘날 이 유물들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게 되었다. 다음해에는 프랑스의 펠리오가 와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포함한 5천여 점을 입수해 갔다. 고문서들은 모두 10세기 이전의 것이었으니, 아마도 11세기 초, 누군가가 침략세력으로부터 이들은 보호하기 위해 서둘러 밀실을 봉했고, 궁극적으로는 사막의 건조한 기후가 이들은 세월의 침탈로부터 보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의 문화가 전후의 왕조에 비해 보다 개방적이고 국제적일 수 있었던 까닭은 당의 국력에 대한 자신감이라든가 지배층 내부의 진취적 성향 같은 요인과 함께 비단길을 통한 서역과의 빈번한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나라에서는 외국인들도 문무의 관직을 얻어 활동하는 등, 외국인들은 상인에서 학자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서 기량을 발휘, 당문화의 발달에 기여했다.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네스토리우스교 등 외래종교도 유입되었다. 네스토리우스교, 즉 경교의 유행을 알려주는 '대진 경교 유행 중국비'가 명말에 발견되어 현재 섬서성 박물관 비림에 보관되어 있다.
  당 전기의 황제, 귀족의 무덤에서는 당삼채라는 독특한 도용이 다량으로 발굴되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이국적이어서 주목을 끌고 있다.
  당 황실의 능묘는 장안의 교외, 위하 북쪽의 구릉지대에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동서로 장장 150킬로미터. 이른바 '관중 18릉'으로 불린다. 당대의 능묘는 한대 이래의 전통을 이어받은 분구석, 즉 지하 깊은 곳에 현실을 마련하고 지상에 거대한 사각 추대형의 분구를 쌓은 것과, 자연산의 중턱에 묘의 갱도를 뚫고 현궁을 구축한 형식이 있다. 대체로 태종의 소릉부터 노동력과 재력이 다소 절약되는 후자의 방식이 채택되었는데, 이는 위진 시대부터 널리 이용되었던 방식이다.
  거대한 고분의 마지막 시대를 장식하는 당의 능묘는 불행하게도 거의 도굴당했다. 그 대표적인 도굴자는 오재 시대 후량의 절도사였던 은도. 그는 능묘안의 금은보화를 탈취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거부가 되었는데, 그는 도굴의 기록까지를 남기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의 손에 걸려들지 않았던 유일한 무덤이 서쪽 끝에 있는 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릉 건릉이다. 이 거대한 능묘가 발굴되는 날, 우리는 성당기의 훌륭한 벽화와 풍부한 문물을 고스란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1971년, 건릉을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황실, 귀족의 배총 중에 장희태자, 의덕태자, 영태공주의 3묘가 발굴되었다. 영태공주의 묘에서는 도굴자의 시체가 벽에 기댄 채로 발굴되었는데, 분배의 몫에 눈이 어두웠던 그의 일행이 그를 배신, 그를 남겨둔 채 도굴갱을 닫아버렸던 모양이다. 발견되면 사형, 도굴범들은 신속하게 금은의 부장품만을 챙긴 채 무덤을 나왔다.
  3묘가 모두 도굴당했지만, 무덤의 주인을 알리는 묘지와 풍부한 벽화, 그리고 화려한 당삼채 도용은 남았다. 당삼채란 여러 색깔을 입힌 연질 도기로, 녹색과 붉은색, 흰색의 3색인 경우가 많았고, 이상하게도 안사의 난 이전의 당 시기에만 나타났다가는 홀연히 사라졌기 때문에 당삼채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것은 무덤의 명기로만 만들어졌기 때문에 도굴범들의 손으로부터 남겨지게 되었다.
  당삼채 그릇 중에는 페르시아의 금속기와 모양이나 디자인이 닮은 것이 많다. 삼채 도용에는 다양한 모습의 기사용이 많은데, 여자가 탄 모습도 눈에 뛴다. 눈이 움푹하고 코가 높으며 턱수염을 기른 서역의 마부용도 있고, 아마도 당시에는 유행의 첨단을 걸었을 서역풍의 의상, 화장을 한 중국 귀부인의 모습도 보인다. '악사를 태운 낙타'가 걸작인데, 낙타의 등에는 장방형의 카페트가 낙타의 배를 가릴 정도로 덮여 있고, 그 위에 5명이 타고 있다. 그중 3인은 수염을 기른 어김없는 서역인인데, 4명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서 각기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이들은 아마도 장안 시내를 그런 모습으로 떠돌아다녔을 거리의 악사나 가수였을지 모른다.
  장희태자 이현은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황태자였으나, 어머니 측천무후에 의하면, 그는 측천무후의 언니 한국부인과 고종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무후는 태자의 마굿간에서 수백 벌의 갑옷을 발견했다는 구실로 그를 폐출 시켰다. 의적태자와 영태공주는 남매간 말년의 측천무후가 사랑하던 미소년 장씨 형제를 모함했다는 이유로 할머니 무후에게 주살되었다.
  장희태자는 중종의 형이요, 의덕태자와 영태공주는 중종의 자녀다. 중종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들의 애달피 여겨 장중한 무덤을 조성했다. 따라서 3묘의 벽화는 돈황 벽화가 불교적인 색채를 많이 띠는 데 발해, 일월성신도, 사신도 등 도교적인 주제가 강하다. 특히, 출행도, 의장도, 궁녀도, 타구도 등의 그림은 당나라 황실의 일상생활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장희태자 이현의 묘에 그려진 '예빈도'의 한 사절이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는 깃털 2개를 꽂은 모자를 썼으며, 하얀 도포에 흰 띠, 헐렁한 바지에 황색 구두를 신고 있다. 그의 옆에는 움푹한 눈에 높은 코, 커다란 털모를 쓴 다른 나라 사절들이 있다.
  고구려의 풍속을 (구당서) 고려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관직이 높은 사람은 청라로 관을 하고, 다음 직위는 비라로써 한다. 두 개의 깃털을 꼽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윗도리는 통소매이며, 바지는 폭이 넓고, 흰 가죽의 띠, 황색의 가죽신을 신는다.)
  아울러 신라, 고구려, 백제의 풍속, 형법, 의복은 모두 같다고 했고, 이현의 장례 당시에는 이미 신라만이 있었으니, 이 사신은 아마 신라 사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2 이백과 두보-귀족문화의 절정(8세기)

  대당 제국의 영화와 몰락을 상징하는 시점에 현종이 서 있다. 그의 지배기에 수도 장안은 인구 백만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장안은 세계 도처의 사람들이 모인 인종 전시장과 같았으며 당의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년에는 제국 몰락의 서곡인 안사의 난이 일어났으며 당의 국력은 다시는 전과 같은 영화를 회복할 수 없었다.
  중국인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현종과 양귀비의 아름다운 사랑과 그 비극적 말로를 주제로 삼아 몰락하는 제국의 쓸쓸한 황혼은 즐겨 노래했다.
  현종의 이름은 이융기. 예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이씨의 황실은 할머니 측천무후가 시작한 새로운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야망에 가득찬 여성들-중종의 비인 위황후, 무후의 막내딸인 태평공주-과 그들 뒤에 버티고 선 명문 구세력과 과거로 진출한 신흥 세력간의 갈등 등으로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마침내 위황후는 고기만두에 독을 넣어 중종을 시해했다. 이때 25세의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켜 예종을 복위시킨 실력자가 바로 현종이다. 황위를 계승한 현종은 실력자 태평공주를 제거하고 타고난 총명과 정성으로 힘써 정부를 돌봐 '개원의 치'라고 불리는 번영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즐겨 시를 짓고 서역의 음악까지 흡수하여 음악을 작곡하는 등 에술적 감각과 재능 또한 뛰어났던 현종은 점차 정치에 싫증이 났다. 그는 명문 구귀족 출신인 이임보에게 정치를 도맡긴 채 양귀비와의 사랑놀음에 빠졌다.
  양귀비의 이름은 양옥환. 귀비는 황후 다음가는 비의 칭호다. 그녀는 백낙천의 (장한가)의 표현을 빌린다면 '구름 같은 머리카락, 꽃 같은 얼굴에, 눈동자를 돌려 한 번 웃으면 백 가지 사랑스러움이 생기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것, 궁중의 그녀의 경쟁자가 '뚱뚱보 계집'이라고 불렀다 하니, 그녀는 당삼채 도용에서 보는 것처럼 풍만한 미인이었던 것 같다. 그녀에 대해서는 고아 출신이었다고도 하고, 이백의 시에도 등장하듯이 당시 장안에는 서역의 미인들이 들어와 있었다 하니 그녀 또한 서역 계통이 아니었겠나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는 본래 현종의 아들 수왕의 비였는데, 현종은 그만 그녀의 미모와 훌륭한 가무에 정신을 빼앗겨, 급기야 그녀를 여도사로 만들었다가 다시 궁중에 불러들여 귀비로 삼고, 화청궁에서 환락에 젖은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시성 두보는 길을 지나다가 화청궁에서 벌어진 이들의 향락적인 주연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두보의 뇌리에 고통 속에 나날을 살아가는 민중의 고달픈 삶이 교차되어 지나갔다. 장안 네 거리에 굶어 얼어죽은 시체가 연상되었다. 그는 이를
  (부자집엔 술 고기 썩어나는제 길가에는 얼어죽은 시체 널렸네)
라는 당 두 줄의 세련되고 생동적인 시어로 표현했다. 또한 부의 원천이 농민들의 노동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궁궐에서 나눠주는 그 바단필은 가난한 여인들 짠 것이건만)
  중국 시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시선 이백과 시성 두보는 모두 이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태백이라는 자로 더 유명한 이백은 두보보다 10살 위였고, 두 사람이 서로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삶과 시 세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명승지를 주유하면서 시작 활동을 하던 시절을 서로 그리워했다.
  두 사람은 모두 조국의 웅휘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노래했으며, 어두운 시대를 극복하려는 애국적 열망을 갖고 관계에 진출하여 조국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말단의 이름뿐인 관직에 올라, 백성들의 고통 치유를 기대하기에는 너무나 부패한 정계를 목도했을 뿐이다.
  어느 날 이백은 현종과 양귀비의 모란연회에 궁정시인의 자격으로 불려와 작시를 요구받았다. 굴욕감과 분노에 가득 찬 그는 당대의 유력한 권신인 환관 고력사에게 신발을 벗기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두 사람의 작품에는 그들이 함께 살았던 동시대의 아픔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백이 타고난 자유분방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뛰어난 감각으로 인간의 기쁨을 드높이 노래했다면, 두보는 인간의 고뇌에 깊에 침잠하여 시대적 아픔을 깊은 울림으로 노래했다.
  이백이 두보의 표현대로 '한 말 술을 마시면 곧 백 편의 시'를 짓는 격렬하고낙천적인 성품으로, 인생과 자연의 불가사의를 즐겁게 노래하는 도가적 경향의 시인이었는 데 비해, 두보는  '티끌만한 유감도 남길 수 없는' 경지에 달하기 전에는 작품에서 손을 떼지 않는 엄정함을 지닌 유가적 경향의 시인이었다. 흔히 이백을 시선으로, 두보를 시성으로 부르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백이 부유한 상인의 가계에서, 두보가 빈궁한 관료의 가계에서 자랐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달과 술과 노래'로 지칭되는 이백의 삶은 사람들에게 그가 받아 온 사랑만큼이나 많은 일화와 전설을 낳았다. 물 속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익사했다는 그의 사망에 대한 전설은 그의 이러한 삶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두보는 조국의 웅대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그의 사실주의적 시안에서 그의 민중과 조국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표현하고 있어서, 탁월한 시어와 절제된 감정과 사색의 깊이와 함께 중국인들에게 널리 사랑받아왔다. 그는 귀족시인들에게 민중들의 처절한 삶과 사회적 모순에 관심을 쏟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선각자이기도 하다.
  이백은 구비문학과 굴원, 장자, 도연명 등에 의해 넓혀져온 낭만주의의 흐름을 급격히 고조시켜 낭만주의의 전통을 확립했으며, 두보는 시경과 악부 민요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확장하여 사실주의의 경지를 개척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당나라를 중국 시문학의 황금시대로 인식시켰다.

   

33 절도사들의 시대-안사의 난(755--763년)

 

  안녹산의 체중은 200킬로그램. 어찌나 뚱뚱했던지 뱃살이 늘어져 무릎을 덮을 정도였다. 어느 날 현종이 그의 배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 뱃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기에 그리도 뚱뚱한가?)
  안녹산의 대답인즉,
  (예, 오직 폐하에 대한 일편단심만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참으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대단한 아부다. 그는 현종의 사랑이 쏠려 있는 양귀비에게도 양아들로 행세했는데, 그의 나이는 양귀비보다 10여 살이나 위였다. 이러한 능수능란한 처세로 말미암아, 그가 세상을 뒤흔드는 대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현종은 이 사실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안녹산은 그의 일므이 말해주듯이, 이란계 소그드 인을 아버지로, 돌궐인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그의 성씨인 '안'은 중국에 귀화한 이란계를 표시하며, '녹산'이라는 이름은 소그드 인에게 흔한 이름으로, '빛'을 의미하는 소그드 어의 한자표기이다. 소그드인의 탁월한 중개무역 솜씨는 일찍부터 널리 알려져 있는바, 안녹산의 사회생활도 역시 한족과 이민족간의 중개업 상인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익살스럽고 소탈하게 성격을 타고난데다 6개 국어에 능통했던 까닭에 점차 상인으로서의 솜씨를 인정받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유주 절도사의 눈에 들어 군인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절도사란 부병제가 무너지고 모병에 의한 전문군인이 출현하게 되명서, 710년 처음으로 변방에 설치되었던 전문직 군관으로, 떠도는 농민과 이민족을 모아, 당 중기 이후 뚜렷이 세력을 결집하고 있는 변방의 위구르, 토번, 거란, 발해 등의 세력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중앙권력이 약해짐에 따라, 절도사의 권한은 군정뿐만 아니라, 정치 일반에 미쳐 '번진'이라고 부르는 지방군벌로 변화해갔다.
  한편, 명문귀족 출신인 재상 이임보는 정치에 싫증이 난 현조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당대 최고의 권신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입가에는 꿀, 마음에는 칼'을 가진 자로 일컬었는데, 그는 국내 귀족세력의 반대를 견제하고자 이민족이나 서민 출신을 절도사로 임명했다. 이에 안녹산은 이임보의 지원 속에 평로, 범양, 하동 삼번진의 절도사가 되는 파격적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권신 이임보가 죽고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이 재상에 오르자, 그의 출세가도에는 먹구름이 끼게 되었고, 그의 야심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삼번진의 용병 군단을 몰아 대반란의 기치를 올렸다. 이때가 755년, 그의 병력은 20만에 달했다.
  반란군은 이렇다할 저항도 받지 않고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안녹산은 낙양에서 즉위, 국호를 대연, 연호를 성무라 칭했다. 현종은 72세의 늙은 몸으로 서쪽의 촉 땅으로 피난길에 올랐고, 장안을 떠나 백리쯤 되는 마외역에 도착했을 때, 성난 호위병사들의 요구로 사랑하는 양귀비와 양국충 일족에게 죽음을 내렸다. 연도의 백성들은 현종의 피난행렬을 막으며 반란에 적극 대처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마침내 현종은 아들에게 양위하게 되니, 그가 숙종이다.
  점차 각지에서도 의병이 조직, 반격이 시작되었으며, 위구르에 원군도 요청했다.
  이때 우리에게는 서예가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안진경의 활약이 돋보였다. 그는 당시 평원 태수로 있었는데, 위진 이래의 대표적인 명족 출신이었다. 그의 글씨는 종래 서예계를 풍미하던 왕희지의 '왕체'를 대신, 성당기의 서도를 대표하게 되었는데, '안체'라고 불린다. 흔히 당나라 사람들은 '안진경의 글씨에는 힘줄이 있고, 유공근의 글씨에는 뼈가 있다'로 표현했는데, 그의 글씨가 호방하고 중후하면서도 탄력이 넘쳐 힘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뒷날, 당 왕조에 반기를 든 회령의 지방관 이희열을 설득하는 사자로 파견된 후, 그의 회유책에도 뜻을 굽히지 않다가 76세의 나이에 교살당했다.
  한편, 안녹산은 반란을 일으킨 후 시력이 나빠져서 완전히 실명에 이른데다가 악성 종양까지 생기는 등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그가 애첩의 소생인 안경은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미리 알아챈 적자 안경서가 먼저 안녹산을 죽이는 것으로 시작된 반란군의 내분은 관군의 반격보다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어 안경서 토벌군이 일어나고, 안경서를 지원했던 안녹산의 부장 사사명이 안경서를 죽이고 대연황제라 칭했다. 그의 아들 사조의가 다시 사사명을 죽이고 즉위한 후, 패전을 거듭한 끝에 763년 자살했다. 이로써 안녹산, 사사명의 반란, 줄여서 '안사의 난'이라고 불리는 당 중기의 대 반란은 마감되었다.
  안사의 난 이후로도 당 왕조는 150여 년간 명맥을 유지하게 되나, 이제 중국사회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변경에만 설치되었던 절도사제가 전국에 확산되고, 이들이 점차 자립화하여 중앙권력에 도전하게 되니, 세계제국으로서의 당의 풍모는 어디서도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34 균전체저의 붕괴-양세봅의 실시(780년)

 

  중국의 농민들은 그 최초의 국가가 발생한 이래, 오로지 그 나라에 백성된 의무로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모든 물자와 노동력을 제공해왔다. 고대로 거슬러올라갈수록 노동력의 수탈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특히 농민들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는 것은 병역이었다.
  중국에서 최초로 발달한 법은 율, 즉 형법이었다. 이것은 국권에 도전하는 반란세력에 대응하는 조처인 한편, 농민들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저항한 농민은 노비로 팔려가게 되거나 잔인한 죽음을 맞거나, 혹은 신체의 일부가 잘리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율에 이어 행정법인 령이 제정되고 한대 이래 정비되었던 율령 제도는 국가통치의 기본지침이 되었다. 수나라 때 일종의 임시법인격, 시행세칙을 담은 식이 가미, 이른바 율령격식의 체제가 마련되었다. 흔히 당을 율령국가로 일컫는 것을 율령이 그때 가장 완결적 모습으로 정비되었기 때문이다.
  당의 율령체제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균전제이다. 균전법은 령에 규정, 624년에 처음으로 공포되었는데, 균전법이란 이리 북위 이래의 토지제도였다. 그 내용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것이지만, 그 기본적인 틀은 같다.
  국가는 평민의 성인 남자들에게 삶의 가장 중요한 수단인 토지를 고르게 분배한다. 농민들은 그 대가로 국가운용에 필요한 모든 것, 즉 조용조의 세역과 병역을 제공한다. 조용조의 세역이란 곡물, 노동력, 지방 특산물을 제곡하는 것이다. 또한 농민들은 농한기에 군사훈련을 받고, 유사시에는 군대의 병사로 충당되었다.
  근래에 발굴된 '돈황 고문서' 등은 균전제가 일부지역에서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불완전하나마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중국의 왕들은 주나라 때 시행되었다는 정전제를 이상으로 삼아, 토지의 고른 분배를 꿈꾸고 있었으나, 사회주의 혁명 이전의 어느 시기에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된 적은 없었다. 춘추전국 시대에 토지의 사유화가 시작된 이래 진한대에는 이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고 있었다. 동중서는 이미 (부자의 밭두둑은 연달아 있고,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전한시대부터 토지의 상한을 정하는 한전법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으나, 그 시도는 언제나 실패했다.
  균전제도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를 부정했던 것도, 국가가 토지를 소유, 개인에 대한 토지의 수여와 회수를 전적으로 주관했던 제도는 아니었다. 균전제 역시 국가의 토지제도의 이상을 관념적으로 반영한 형태였으며, 단지 국가의 공권력이 강성했을 때에는 귀족들의 부당한 대토지 확대를 어느 정도 견제하면서 농민들의 토지 안착을 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사의 난 이후 당의 지배체제가 급격히 무너지고, 절도사 등 지방의 군벌이 크게 대두하기 시작하자 농민들의 유망, 전호화, 사병화 추세가 격증, 국가의 재정수입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되었다. 이의 타개책으로 새로이 등장한 것이 양세법이다.
  그러나 양세법은 종래에 국가에 의해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포기되지 않았던 평등의 원리에 기초한 율령 지배체제를 공식적으로 포기하는 것으로, 중국사회의 질적인 전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제 세금은 농민이 아니라 토지에, 고르게 부과되는 것이 자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개인이 아니라 가구별로 배당되게 되었다.
  국가는 엄청난 재산의 격차를, 대토지 소유제를 처음으로 공식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 한전법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게 되었고 지주제는 국가의 제한 없이 발전하게 되었으니, 송대의 지배적인 지주-전호제의 싹은 여기서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양세법은 780년 재상 양염의 건의로 처음 시행되었다. 농민들의 직역이나 요역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세금은 토지, 혹은 상업소득에 대한 재산세로 일원화되었다. 국가는 세금수입으로 직업군인을 양성하게 되었다. 농민의 인신 수탈에 보다 크게 의존했던 율령국가에서 점차 재정국가로 이행하고 있었다. 아울러 농민들의 지주, 국가에의 예속관계는 보다 경제적인 것으로 바뀌어갔다.
  사회는 점차 경제가 더욱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었다. 양세법이라는 명칭은 세금을 보리의 수확기인 6월과 쌀의 수확기인 11월, 두 차례에 걸쳐 징수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이것 자체가 당시 경제발전을 반영하는 것이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일년에 한 번 수확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상업은 더욱 발달하고 그에 따라 화폐경제도 더욱 발달하게 되니 장차의 새로운 시대가 예고되고 있었다.

   

35 9세기 중국의 생활상, 신라방, 견당사-일본 승려 엔닌의 일기(838--847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현장의 (대당서역기), 엔닌의 (입당구법 순례행기)를 세계 3대 동방 여행기로 꼽는다. (대당서역기)는 7세기 인도, 그리고 (입당구법 순례행기)와 (동방견문록)은 9세기와 13세기의 중국의 역사에 대한 귀중한 자료이다. 이들은 당시의 생생한 인간의 숨결을 그대로 간직,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연대기적 역사 서술과는 전혀 다른 감흥을 안겨준다.
  (동방견문록)은 서양세계에 중국을 처음으로 소개한 서적으로 유럽 사회에 커다란 충격과 파문을 던졌다. 그러나 너무나 이질적인 문화권에서 온 상인 마르코 폴로의 눈을 통애 소개된 중국의 문물은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불교를 '우상숭배' 정도로 가볍게 치부해버리기도 했고, 게다가 그의 기록은 그가 여행을 마친 지 수년이 경과한 다음, 어렴풋한 기억에 의존한 채 씌어진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 승려 엔닌의 순례기는 놀랄 만큼 상세하고 그려낸 듯 정확하다. 그는 불교와 한자문화를 공유한 동아시아 문화권의 일원으로서 중국을 따뜻한 시각으로 깊이 있게 이해했으며, 예리한 관찰력으로 중국의 관료나 민중생활의 실상을 일기형식으로 그때그때 기록함으로써 여행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엔닌은 일본 동부의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5살 때 연력사에서 일본 천태종의 개조인 사이초의 제자로 불교계에 입문한 그는 마침내 불교계의 최고의 지위에 올라 일본 불교계에 새로운 족적을 남겼다. 명족들이 지배하는 당시 사회에서 그가 이러한 성공을 일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9년 반 동안의 위험에 가득 찬 중국 순례가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가 새로이 가져온 밀교의 화려한 의식과 예술품, 풍부한 상징들이 일본의 궁정인들을 매혹시켰다.
  838년 그는 견당사의 일원으로는 좀 많은 46세의 나이로 중국 순례의 길에 나섰다. 견당사는 조공의 형식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던 외교 사절단으로 일본이 중국의 고고의 문물을 직수입하는 주요한 통로였기 때문에 많은 지식인들이 승선하고 있었다. 종래에 일본은 우리 나라를 통해 간접적으로 대륙의 문물을 섭취했으나, 7세기 초 쇼토쿠 태자가 통일국가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점차 대규모적인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중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강조하면서 다른 나라처럼 중국의 신하가 되는 형식을 밟는 책봉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엔닌의 일기는 중국황제의 알현에서 대사 등 일본의 사절들이 받았던 중국의 관위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견당사의 파견은 일본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국가적 대사였으나, 당시의 항해기술로는 조난의 위험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일본 천황은 '견당사를 보내는 연회'를 직접 베풀고 대사와 부사에게 '권위의 칼'을 수여하는 의식을 통해 선상에서의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젊은 대사에게 정2품으로의 파격적인 승진이 이루어지는 등 위험한 사명을 띠고 떠나는 일행에게는 높은 관직과 각종 하사품이 전달되었고, 이들의 무사귀환을 비는 전통 신도와 불교의 신들에 대한 봉헌과 기원이 연일 계속되었다.
  당시 신라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일본은 신라 연안을 따라 육지를 육안으로 확인하면서 항해하는 항로를 택하지 못하고 공해상을 직접 통과하는 위험한 항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세 차례의 시고 끝에 어렵게 중국에 도착했을 때, 4척의 배에 651명으로 출발했던 사절단 중에 391명이 생존하고 있었다.
  엔닌은 당나라에 발을 디딘 후 최초로 목도한 거대 도시 양주로부터 수도 장안에 이르러 당나라 황제를 알현하기까지 거쳤던 크고 작은 도시와 촌락, 관료와 민중들의 구체적인 생활모습들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된 관심은 역시 천태종의 본산인 천태산을 순례하는 것이었다. 그의 순례 신청은 사절단의 일정 안에 매듭될 수 없다는 이유로 불허되었고, 마침내 그는 사절단과 떨어져 중국에 불법체류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림으로써 오늘날 우리들은 그의 귀중한 일기를 더 연장시켜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의 일기에 등장하는 신라인의 존재다. 그의 일기에서 일본인들은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나 신라인들은 중국인과 비등하게 자주 나타나고 있다. 신라인들은 당나라에 머무는 여러 외국인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신라인은 견당사절의 배에 탑승했던 신라 통역 김정남인데, 그는 공해상의 항해기술뿐만 아니라, 중국 내의 사정에 정통하고 있어서 사절단의 통관절차를 보다 용이하게 하는 역할을 했으며, 사절단의 귀행에서도 선박을 보충, 수리하거나, 우수한 신라 선원의 탑승 등을 주선했다.
  엔닌에 의하면, 페르시아나 아라비아인들에 의한 해상무역이 고조되던 당시에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은 신라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다. 이들의 동아시아의 무역의 중국 최대 종착점은 대운하와 회하를 연결하는 요충인 초주엿으며, 신라의 거점은 중국으로부터 신라의 서안에 이르는 무역로와 반도의 서남단을 돌아 신라 수도 경주와 일본에 이르는 무역상의 요충지 완도(청해진)였다. 일본 내의 무역거점은 확인할 수 없으나, 엔닌은 장보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대사로 부르면서 극진한 존격의 표현으로 시종했는데, 그는 일본을 떠날 때 장보고에게 바치라는 일본관리의 편지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의 신라인들은 산동반도 남안 일대와 회하 하류 일대에 집중되어 방대한 신라조계를 셩성하고 있었으며, 신라방 내의 행정은 신라인의 총독이 관장, 치외법권적 지위를 부여받고 있었다. 엔닌은 그중에 장영이나 유신언 등과 교유하면서 커다란 도움을 받았는데, 이들은 말하자면 신라 영사였던 셈이나, 신라 정부에서 공식 파견된 사절이 아니라, 위대한 모험가요 무역왕인 장보고의 대리인이었다.
  적산 법화원은 신라를 왕래하는 배들의 최초의 도달점인 산동의 높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어 황해를 수호하고 신라 배들의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했다. 장보고는 이 절에 연간 500석을 수확할 수 있는 토지를 기부했다.
  장보고는 막강한 해상력을 근거로 점차 신라 정부에 영향력을 갖게 되어 청해진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해 그의 보호를 받았던 우정이 신무왕으로 즉위한 후 점차 왕위계승 분쟁에 휘말리더니 골품 귀족들의 반대로 841년 마침내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과 함께 신라의 해상왕국은 쇠최하고 점차 제해권은 중국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엔닌은 남쪽 항구의 여러 곳에서 교역하는 신라의 배를 만났고, 삼림이 많은 산동에서 초주로 목탄을 수송하는 신라인의 배를 보았다. 한번은 적산원에 머물면서 신라인들의 대명절인 8월 15일을 지냈는데, 신라인들은 모두 모여 수제비와 떡을 장만하고 흥겹게 노래부르고 춤추기를 3일 밤낮을 계속했다고 했다. 엔닌은 이날을 신라가 발해에게 대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는 행사라고 기록했으나, 그도 발해 사절단을 만났던 것처럼 그것은 발해가 아니라 고구려였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당말의 상황을 왕조 붕괴기로 보고 적어도 관료조직은 크게 해이해져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중국의 튼튼한 관료 행정조직은 당망에 이르러서는 한말 같은 혼란은 보이지 않고 있었음을 엔닌은 확인시켜준다. 당시의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정연한 고도의 행정조직은 유지하고 있었다.
  엔닌은 천태산행의 탄원이나 지방장관이 발행하는 통행증의 발급 또는 갱신 등을 위한 중국관료와의 절충과정을 통해 당나라 관료제도의 치밀하고 복잡한 조직을 알게 되었다. 양주 절도사로 있던 거물 정치인 이덕유에게 천태산 행의 허가를 내어줄 것을 설득했으나, 그는 정중하지만 확고하게, 자신의 허가증은 관할하에 있는 8주에 한정되어 있음을 알리고 이를 거절했다. 중국의 관료는 규정에 따라 모든 것을 문서로 남겨놓으려는 관료의 획일적이고 융통성 없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복잡한 절차로 엔닌의 여행을 지연시키기는 했으나, 뇌물을 받고 직권을 남용하는 부정한 방법은 거의 통용되지 않았다.
  엔닌 일행은 중국을 유랑하는 동안 도로나 거리의 정확항 정보를 얻지 못하여 불편을 느낀 적은 좀처럼 없었다. 당시 중국은 수도 장안에서 변방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도로와 수로가 방사선상으로 그물눈처럼 설치되어 있었다. 엔닌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5리마다 표식을 세우고 10리마다 다시 하나의 표지를 세웠는데, 이를 '리격주'라고 불렀다. 표지는 흙을 사각으로 쌓아올려 위를 뾰족하게 하고 아래를 넓힌 모양이었다.
  엔닌은 여행중에 식량이나 숙박의 문제로 거의 고생을 하지 않았다. 중국은 주요도로를 따라 공식적인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한 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육로 통행에서는 (매역마다 나귀를 빌려 문서 보따리를 운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통행증을 지닌 여행자들은 주변에 달린 점이나 관으로 불리는 관영, 혹은 민영의 숙박시설에 머물 수 있었다. 또한 승려였던 그는 절을 발견하면 그곳에 머물렀으며, 불교신자들에게 개인적인 후원을 받기도 했다. 당시 사원의 시설은 승려만이 아니라 외국사절이나 관리, 혹은 일반 여행자 등 그것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여관과 사원을 겸하고 있었다.
  엔닌은 해주의 동쪽 연안지대에서 북쪽까지 '소금이 모여있는 장소를 겨우 빠져나가기도' 했으며, 델타지대에 2천 마리도 넘을 것 같은 오리가 대규모로 떼지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4세기 후에 마르코 폴로가 보고 놀랐던 석탄에 대해서 (산 주위에는 석탄이 많아 멀고 가까운 곳의 여러 주민들은 이것으로 불을 지폈다. 음식을 요라하는 경우에는 놀랄 만한 열량을 발휘했다. 사람들은 번개로 탄 것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곳의 중생들에게 부처님이 내린 보상인 것에 틀림없다)고 기술했다.
  엔닌은 메뚜기의 습격을 받은 중심 마을을 지났는데, '발아한 곡물은 모두 메뚜기에 갉아먹혀서' 기근이 닥쳤으며, 마을사람들은 짐승 사료인 작은 콩이나 도토리를 주워먹기도 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기근으로 도적떠로 변한 사람들의 습격을 우려했던 관료들의 우려와는 달리 엔닌 일행은 한 번도 습격을 당하지 않았다.
  그는 황하의 모습을 (물은 누런 진흙빛이고 흐름은 마치 빠른 화살과 같다)고 묘사하고, 황하 양안의 벽을 둘러친 선착장에는 (많은 뱃사람들이 다투어 손님을 태우려고 대기하고 있었다)고 했다. 일행이 강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찬 죽을 네 사발씩 먹자 깜짝 놀란 점포 주인이 체한다고 걱정했던 것까지 기록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혜성을 '빛나는 칼'과 같다고 했으며, 혜성이 나타나면 국가가 쇠퇴해지고 군사상의 혼란이 일어난다고 하여 황제는 혜성이 나타나면 경계하여 궁전에 머무르지 않고 멀리 낮은 장소로 옮겼으며 엷은 베로 몸을 돌렸다. 대사면령을 내리고 여러 사원에 명령하여 경전을 송독하게 했다. 그는 3회의 월식과 1회의 부분일식을 보았는데, 한번은 적산원에서 월식이 일어나 승려들이 (모두 방 밖으로 뛰어나가 소리를 지르며 목탁을 두들겼다)고 기록했다.
  오늘날같이 새해 첫날은 당시의 중국인들에게도 가장 큰 명절로, 사흘간의 휴가가 주어졌다. 섣달 그믐날이면 지폐(혹은 동전모양의 종이)를 태워 부귀와 만복을 축원하고, 자정이 되면 '만세'를 외치면서 폭죽을 터뜨렸다. 죽과 만두와 여러 가지 과자 등 많은 음식이 차려졌고, 집집마다 대나무 기둥에 기를 당아 세우고 장수를 기원했다. 사람들은 새해 달력을 구입했는데 엔닌은 이 달력 전체를 베껴놓았다. 달력에는 60일을 주기로 하는 달의 첫날, 24절기, 제례날, 그밖의 민간신앙 정보 등이 기록되었다.
  동지 전날밤에는 일본의 섣달 그믐날처럼 아무도 자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음식을 넉넉히 차려먹고 역시 사흘간의 행사를 가졌는데, 서로 절을 하며 (동지를 축하한다)며 덕담을 나누었다. 승려들은 (세상에서 오래 사시면서 모든 중생들을 화목하게 하기를 삼가 바라옵니다)라고 인사했다. 엔닌은 이덕유에게 (서서히 이동하여 태양이 남쪽 끝에 이르렀습니다. 삼가 존체 만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인사했다.
   불교는 당시 널리 민간에 유행하여 그 절정에 달했다. 절은 변두리 마을이나 산지에서도 흔히 발견되었으며, 불교신아은 깊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북중국 평원의 어느 불교신자는 그곳을 통과하는 승려에게는 사람 수를 묻지 않고 식사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유를 위시하여 점차 새로이 등장하는 신유학 관료들 중에서 외국 종교인 불교를 규탄하는 움직임이 시작되더니 무종 대의 불교 대탄압이 시작되었다. 엔닌은 장안에서 이를 집접 목도하고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842년 시작된 불뵤 탄압은 처음에는 종래와 다름없이 경제적인 이유에 기인했다. 사원의 면세토지의 증가나 면역이 되는 승려 수의 증가는 종종 국가의 제한조처를 불러왔었다. 사원 재산의 몰수나 젊은 승려의 환속 등의 조처가 있었고, 사원 내의 불상이나 종등의 쇠붙이가 염철의 관료에 의해 거두어져 농기구나 동전으로 주조되었다. 그러나 844년 이후 무종이 도교의 광신으로 기울어지면서 경쟁상대였던 불교세력에 대한 전면적이고 폭압적인 대탄압으로 변화했다. 불교사원은 폐허가 되고 승려들은 거의 환속되었다.
  엔닌은 불교 탄압의 일환인 외국 승려 추방의 칙령을 맞아 '비통하면서도 기쁜 양면이 있었음'을 토로하고 있다. 수년간 귀국 청원을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국의 도정에서 그는 참담히 파괴된 무수한 사원을 만났으며, 그중에는 적산 법화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엔닌은 다시 신라 친구들은 만났고 그들의 보호 속에 그동안 모아온 귀중한 불경이나 만다라를 보존할 수 있었다. 마침내 846년 무종이 도교의 불로발사의 약을 잘못 먹은 탓으로 죽음에 이르자 불교의 대탑압은 중지되었다. 847년 9월 2일 정오, 엔닌 일행은 신라인 친구들의 배웅 속에 신라인 김진의 배를 타고 산동의 적산포를 출발, 귀국 행로에 올랐다. 다음날 밤에 신라 서남단의 작은 섬에 도착한 그들은 순풍을 기다려 정박하기도 하면서 남해안을 돌아 규슈를 거쳐 9년 3개월 전 엔닌의 출발지인 하카다 만에 도착한 것은 9월 17일이었다.

   

36 소금 장수 황소-황소의 난(875--884년)

 

  881년 1월 8일 이른 아침, 대당의 수도 장안에서는 잠시나마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장안성의 서문으로는 황제 희종의 피난행렬이 허둥지둥 줄행랑을 치고 있었고, 동문으로는 반란군의 수령 황소가 금으로 장식한 수레를 타고 위풍도 당당하게 입섭하고 있었다.
  성문을 지키던 친위부대조차 이미 전의를 상실했고, 장안의 백성들은 조수처럼 길 양쪽에 밀려들어 환호성을 지르며 황소의 군대를 환영하고 있었다.
  환영나온 백성들을 향해 황소의 부장 상양이 큰 소리로 외쳤다.
  (황왕이 군사를 일으킨 것은 오로지 백성들을 위한 것. 당왕조와는 다르다. 백성들을 절대 학대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안심하고 각자의 생업에 힘쓰라!)
  반란군은 엄정한 군기를 지켜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며, 장병들은 가난한 백성들을 보면 의복과 금품을 나누어주었다. 이들도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황소군의 주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날 백성들의 눈에 비친 반란군의 모습은 해방군의 그것이었으며, 백성들은 그들이 자신들을 당왕조의 가혹한 지배로부터 탈출시켜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황소는 스스로 황제가 되어 백성들 위에 군림했고, 창졸간에 장안을 빼앗긴 귀족들도 다시 세력을 정비, 장안을 탈환하게 되니, 이들은 다시 백성들에게 반군에 협조했다는 죄목을 씌어 살인, 방화, 약탈 등의 보복을 자행했다.
  반동군에 되밀린 황소군은 후퇴하면서 금은보화를 길바닥에 뿌리는 작전을 폈다. 관군은 다투어 이를 줍기에 정신이 없었고, 황소는 이 틈을 타서 군대를 가까스로 이동시켰다. 반란군은 다시 최초의 봉기 때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게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해서 관군의 토벌을 어렵게 했다.
  이들의 엄청난 조직력과 금력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소금이었다.
  19세기 중국을 방문한 서양 사람은 중국의 소금 값이 엄청나게 비싼 것에 놀랐다. 중국에서는 소금 산지가 일정 지역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독점할 수만 있다면 엄청난 부가 보장된다. 일찍이 이를 기반으로 국가가 일어나기도 했고, 소금을 쟁탈하기 위해 전쟁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특히 한 무제 이후 정부에서는 이를 전매함으로써 부족한 재정을 메우고 있었다.
  당나라도 안사의 난 이후 소금 전매에 의존, 극심한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했다. 실로 소금 전매수입은 총재정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전매 이전에는 한 말에 10전 하던 소금값이 110전으로 오르더니, 급기야 300전에 달했다.
  소금이 인간 생존의 필수품인 이상, 그 가장 커다란 피해자는 물론 농민들이었다. 안사의 난 이후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당의 궁중에서는 다시 독버섯처럼 환관들의 세력이 자라나 허약한 황실을 쥐고 흔들어대니, 황제는 이들에 의해 세워지고 폐해졌다. 그 속에서 농민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져, 당말에 이르면 거의 목불인견의 참상을 보였다.
  살 길이 막혀버린 농민들은 포악한 관리들을 습격하여 울분을 표시하거나, 부유층의 물산이 집산하는 농촌의 초시를 약탈하는 등 산발적인 저항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를 전국적 대봉기로 이끌어내는 데 소금밀매 조직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소금값이 급등하게 되면 자연히 암거래가 생겨나고, 점차 그들의 비밀결사가 결성된다. 정부는 비밀경찰을 동원, 이들을 추적하고, 추적망에 걸린 자들에게는 사형 등 중형으로 가혹하게 처리한다. 이렇게 되면, 소금 밀매조직들은 보다 적극적인 자위책을 찾아 무장봉기의 길에 나서게 된다.
  875년 봉기의 선두에 나선 황소와 왕선지는 하남성 접경에 가까운 산동성, 교통이 편리한 황하 연변에서 사염 밀매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낙방한 후 봉기를 결심하게 되었다. 즉각적으로 실업자 농민 수만 명이 가세하고, 북방의 돌궐, 위구르 출신 전문 병사들이 가담했다.
  광범한 농민병사의 지지 속에 이민족 군인의 전투력, 비밀결사의 조직력과 자금력이 결합했으니 반란군의 기세는 참으로 대단했다. 이들은 전국적 조직을 이용, 일정 거점을 두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작전을 폈고, 때로는 동시에 여러 주를 공격하는 위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소군에게 치명적이었던 것은 주온의 배신이었다. 그는 사태를 저울질하다가 당왕조 쪽으로 자리를 바꿔섰는데, 이러한 지도층의 한계는 주온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황소도, 왕선지도 그랬다. 이들은 자신에게 고위관직이 확실하게 보장만 된다면 언제든지 농민들을 저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황소는 자신의 부장이었던 주온과 터키계 사타족의 수장 이극용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마침내 호랑곡 전투에서 참패, 자결로써 일생을 마쳤다. 그때가 884년. 황소의 난으로 불리며 10년간 전국을 들끓게 했던 농민 대봉기는 비틀대는 당왕조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면서 또다시 이렇게 좌절되었다.
  당왕조는 주온의 공을 인정, 요직을 주고 전충이라는 이름을 새로 내렸는데, 그가 장차 290년간의 당왕조를 멸망시킬 인물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주전충은 907년 당의 마지막 황제 애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즉위, 후량을 세움으로써 5대 10국 시대를 열었다.

   

37 채소를 사 먹는 농민-산업의 대약진(10세기 전후)

 

  현행 중학교 1학년 사회 교과서를 보면, 현대 중국의 농업은 화북지방은 밀, 조, 수수 등의 밭농사 지대, 화중, 화남지역은 벼, 보리가 주로 생산되는 세계적 벼농사 지대로, 특히 화남지방에서는 벼의 2기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농업생산기술의 전반적 진전에 따른 이러한 농업생산의 지역적 분화가 이미 10세기를 전후한 시기, 즉 당말 오대 송초에 이루어져 중국사회 전반의 대변혁을 초래했다.
  진종(997년 즉위)때의 중신이었던 장영이란 이가 처음 진사에 급제, 산간 도지인 숭양현 지사로 발령되었다. 어느 날, 그는 고을 안의 시장에서 채소를 사들고 돌아오는 농민을 발견하고 개탄해 마지않았다.
  (농사꾼이 시장에서 채소를 사다 먹다니 고약한 일이로다. 필시 게으름뱅이 농사꾼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사해본 결과, 고을 근교 일대에는 그같은 채소를 재배하는 농민이 없었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일반적인 양상이었다.
  체계적인 농서로서 현종 최고의 노서인 (제민요술)에 의하면, 6세기경의 화북에서는 주곡은 아직 조였으며 조와 밀의 재배는 별개의 농지에서 1년 1모작의 형태로 재배되었다. 그러나 당대 이후 밀의 분식이 널리 성행, 대규모 제분업이 출현하게 되었으며, 이 무렵이 되면 밀이 주곡으로서의 위치를 확립, 같은 농지에서의 밀과 조의 2년 3작의 농법이 출현했으며, 이후 화북의 농업의 기본적인 형태로 정착했다.
  화중, 화남지역의 벼농사는 더욱 획기적인 발전, 1세기 만에 생산량이 배가되고,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를 수반했다. 나라 경제와 국가재정의 중심은 이제 명백히 강남지대로 이행, (소호사 풍년이 들면, 천하가 족하다)라고 하는 속담이 생겼다.
  대체로 남조기까지 강남의 벼농사는 파종 전에 잡초를 모두 태워 버리고 볍씨를 직접 뿌리는, 그리고 1년 휴한을 수반하는 농법을 시행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이 무렵에는 모내기법, 인분, 퇴비, 참께 찌꺼기 등을 자연 비료로 사용하는 시비법, 저습지대의 기름진 진흙을 농토에 넣는 객토법 등의 기술이 크게 확대되고, 용골차로 불리는 관개용 수차를 비롯한 각종 새로운 농구가 출현, 생산기술의 비약전인 발전을 보였다. 이에 따라 벼와 보리의 1년 2모작이 널리 시행되었고, 화남에서는 벼의 1년 2기작이 시작되었다. 벼의 품종도 다양화되고, 특히 베트남 남부에서 유래, 그 지명을 딴 점성도가 도입, 점차 도시 하층민의 식량으로 널리 거래되기 시작했다.
  또한 우전, 위전, 호전 등으로 불리는 농경지가 크게 확대, 벼의 생산량이 급증했다. 가령, 남경 부근 하천의 주요 범람원에 대규모 제방이 설치되니 제방 안쪽으로 너른 농토가 생겨났다. 소주에 인접한 태호로부터 양자강 하류의 저습지대에는 크리크를 통해 배수하고, 파낸 흙으로 제안을 쌓아 수전을 보호했다. 또 호수나 소택의 일부를 제안으로 에워싸 수전화하기도 했다.
  농업생산의 비약적 발달과 지역적 분화는 점차 자급자족적 단계에서 상품생산의 경향을 띠기 시작했고, 쌀과 보리까지 광범한 물자유통 과정에 편입되면서 상업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대중적인 수요의 증가에 따라 각종 수공업이 농업에서 분리, 지역 특화 산업으로 발전했으며, 여기에 해상무역이 크게 발달, 차, 비단, 도자기로 대표되는 중국 산물의 생산 또한 크게 고무되었다.
  차는 본래 인도의 야생식물이었으나, 중국에 전래되어 처음에는 약용으로 쓰이다가, 삼국의 오나라에서 기호식품으로 사용하기 시작, 점차 일반화했다. 당 중기에 이르면 (다경)이라는 책자가 발간 될 정도로 일반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송대에는 대중적 음료로서의 지위를 확립, 차의 재배는 중요한 산업으로 자리잡았으며, 중국의 대표적인 산물이 되었다. 차의 맛에 한번 길들여진 사람들은 그 맛을 잊지 못했다. 거란 등 북방 유목민족들도 차를 몹시 즐기게 되어차를 수입하고 말을 수출했다. 복건, 강서, 사천 지방에는 차의 재배를 전업으로 하는 농가가 속출했다.
  견직물은 여전히 중국의 대표적인 대외 수출품으로서, 또한 중요한 내수용품으로서 생산량이 급증했다. 비단은 중국귀족들의 수요를 충당하는 화북지방의 최고품으로부터, 신흥 도시민, 중소지주, 중소상인을 겨냥한 강남의 하급품 등으로 분업, 대량생산되기 시작했다. 12세기경에는 면화도 재배, 중국의 직불자원을 추가시켰다.
  특히 도자기업이 송대에 커다란 발전을 보여, 가히 황금시대를 창출했다. 북송기에는 정요, 여요, 관요, 가요, 균요 등 화북의 이른바 5대 도요지가 이름을 날렸고, 남송기가 되면 강남의 경덕진과 용천 등이 요업의 중심지로 각광, 중국 도자사상 최고수준의 청자와 백자를 생산했다. 대중적 수요에 상응한 일용품의 대량행산도 시작되었다.
  또한 오늘날 하북성 제일의 요업지로 각광받는 자주요의 도자기는 석탄을 동력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석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중국인들에게 알려져 있었고, 당말부터 연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송의 수도 변경에는 어느 집이고 석탄을 사용하지 않는 집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한 산업 전반의 놀라운 발전을 동력으로 송대의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의 발달이 반드시 일반민의 생활향상으로 귀결되지는 않았다. 생산의 증진 속에 농민간의 계층 분화가 더욱 촉진, 송대의 일반적인 지주-전호제가 확립되었다. 신흥 지주층이 대규모 수리 관개공사를 주도한다든가, 소 등의 가축, 혹은 용골차 등의 새로운 농구를 독점하면서 새로이 성장, 위진 이래의 문벌귀족에 대신하는 송대의 새로운 지배층이 되었다.

   

38 문치주의와 군주 독재체재의 확립-송의 건국(960년)

 

  907년 황소의 부장이었던 주전충이 당 애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후량을 세운 이후, 중원지역에서는 후당, 후진, 후한, 후주의 다섯 왕조가 이어지고, 그 외의 지역에서는 오, 남당, 전촉, 후촉, 남한, 초, 오월, 민, 남평, 북한의 10국이 할거했다. 960년 후주의 노장 조광윤이 공제로부터 역사상 최후로 선양의 형식을 밟아 송을 건국하기까지의 50여년간을 우리는 5대, 혹은 5대 10국 시기로 지칭한다.
  중국 최후의 대분열기였던 이 시기는 무장들의 혁명으로 점철, 가히 지방적 할거의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로, 왕조사적인 시각을 굳이 고집하지 않는다면, 이미 당말의 연장선상에 있는 시기였다. 때문에 우리는 흔히 이 시기를 당말오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정치사적인 입장에서는 혼란기였음에 틀림없었고, 중국의 분열을 맞아 북방 유목민족들이 두드러지게 흥기,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불리한 조건이 마련되고 있었다. 오대의 여러 왕들 중에도 유목민족 출신들이 많이 섞여 있었다. 돌궐 출신으로 후진을 세운 석경당을 후당과의 대결에서 거란의 힘을 빌린 후, 거란에 신하의 예를 갖추고 북방의 연운 16주를 떼어 바침으로써 유목민족의 중국 지배의 서단을 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으며, 절도사 등 지방세력의 할거 속에서 위진 이래의 문벌귀족들이 대거 몰락, 송대의 새로운 사회가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던 중국사회의 구조적 변혁기였다.
  이 시기가 낳은 가장 흥미있는 인물로, 풍도라는 정치인이 있다. 그는 5대 중 4대에 걸쳐 정계의 원로 자리를 지켰는데, (장락로서)라는 저술을 통해, '아침에는 진나라에 벼슬하고, 저녁에는 초나라에 벼슬했던' 자신의 생애를 자랑스럽게 술회했다. 장락로란 그가 스스로를 칭했던 이름이다.
  후주의 명군 세종이 직접 진두 지휘하여 군사 강국인 북한과의 결전에 나섰다. 그때 중대한 고비마다 언제나 알쏭달쏭한 태도를 취하던 풍도가 갑자기 튀어나와 이를 만류하고 나섰다.
  (당태종께세도 친히 전선에 나가 천하를 평정하지 않았던가? 집은 궁중에 편안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소.)
  (폐하께서 과연 당태종과 같다고 생각하시옵니까?)
  (짐의 군사를 보오. 유숭 따위는 우리 군사 앞에서는 계란으로 산을 치는 것과 같은 것이오)
  (폐하의 힘이 과연 산과 같을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세종은 끝내 출진하여 북한군을 격퇴했고, 풍도는 완전히 자신을 잃고 그해에 병사했다.
  세종은 처음 10년간은 천하를 평정하고, 다음 10년간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마지막 10년간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다는 통치 청사진 속에서 천하통일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는 내정에 충실을 기하고, 거란을 공격하여 연운 16주의 일부를 회복하는 등 눈부시게 활약했으나, 재위 6년 만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그가 뿌린 통일의 씨앗을 거두어들인 자는 송태조 조광윤이었다. 세종이 죽고 그의 아들 공제가 7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당시 금군 사령관이었던 조광윤이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 송 왕조를 개창했다. 중국의 통일은 다음 대인 태종 때, 즉 979년 북한을 쓰러뜨림으로써 완성되었다.
  집권에 성공한 송 태조가 맨 처음 착수한 일은 군벌의 제거였으며, 이로써 송대의 문치주의의 전통도 윤곽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셈이다. 본인 자신이 절도사 출신이었던 태조는 군벌의 생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여전히 지방에 잔존하는 군벌의 존재는 그에게 커다란 위협이었고, 그는 군벌의 제거라는 최대의 현안에 정면 승부를 걸었다.
  어느 날, 태조는 자신을 추대해주었던 석수신 등 장군들은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그대들이 아니었던들 짐은 도저히 황제가 될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황제의 자리도 그리 즐거운  것만은 아니어서, 밤에도 안심하고 잠을 이룰 수가 없소)
  석수신 등은 당황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
  (황제가 되고 싶지 않은 사나이가 어디 있겠는가?)
  (폐하,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폐하의 지위는 이미 하늘이 정한 것이오니 여기에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알고 있소. 여기에 있는 경들이야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지만, 경들의 부하 가운데는 더 출세하고 싶어하는 자도 있을 것이오. 만약 경들의 부하가 왕관을 내밀면 어떻게 하겠소. 고개를 저을 까닭이야 없지 않겠소?)
  다음날 석수신을 비롯한 장군들은 모두 중병이라는 이유로 자진해서 군사에 손을 떼고, 군대의 통수권을 태조에서 넘겼다. 어찌됐는 태조는 당태종만큼이나 고도의 정치력을 구사했던 인물로 평이 나 있다. 태조는 이들을 지방의 한직으로 좌천시켰으며, 그들의 군대를 중앙의 금군과 지방의 상군으로 재편, 군대의 통수권을 장악했다.
  아울러 재상권을 약화시키고, 군정, 민정, 재정을 분담, 각기 추밀원, 중서성, 삼사에서 관할하게 했다. 당시 로, 주, 현의 지방제도에서 모든 단위의 지방관은 모두 문관 출신으로 황제에 의해 임명되었다. 지방에서도 역시 모든 관료들의 권한은 분산되었다. 가령, 주의 장관인 지주도 차관격인 통판이 재정권을 관장하게 됨으로써 주의 모든 권한을 장악할 수 없었다.
  모든 관리의 권한은 철저히 분산, 제한되어 제도로서 확립되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황제권의 강화로 귀결, 송대의 황제의 독재적 권력을 그 어느 시기보다 안정된 위치에 자리하게 했다.
  한편, 수요가 크게 늘어난 문신관료들을 과거로써 선발하게 됨에따라, 과거는 수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지 수백년이 경과한 송대에 비로소 정착하게 되었다. 특유의 유교적 학식으로 단련되고 과거를 통해 전제 황권과 절묘하게 결합한 신흥 사대부들은 전통 귀족들과는 달리, 비록 당쟁은 했을망정 황제권을 넘보지는 않게 되었으니, 사대부 관료의 보좌 속에 송대의 전제 황권은 더욱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학자적 관료가 사회를 주도하는 문치주의의 전통이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39 과거제의 정착과 사대부 계층의 성장-지주-전호제의 확대(11세기)


  송대의 황제 독재권의 확립과 문치주의의 강화는 문관의 수요를 증대, 문관 등용의 관문인 과거제를 정착시킴으로써, '가문'보다는 '실력'을 중시하는 보다 평등한 사회가 열리게 되고, 과거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게 된 신흥지주층, 즉 학자적 관료, 다시 말해서 사대부 계층이 이후의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남송의 주자에 의해 그들의 이념으로 정리된 성리학은 정통학파로서의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위진 이래 당대까지의 사회 주도층이었던 전통 문벌귀족들은 보다 개인적인 부력에 의존, 가문 대대로의 세습적인 지위를 누렸다. 이를테면 당대의 명문강인 안진경의 가문을 더듬어올라가면 위진 시대의 대문벌을 만날 수 있다. 왕조가 여러번 바뀌었어도 지방의 토착 대부호로서의 그들의 지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관리는 '시험'에 의해 선발되는 것이 아니라, '추천'에 의해 등용되었다. 한나라의 향거이선제가 있었지만, 위나라에서 처음 시작한 주품중정법이 이후의 문벌귀족 사회의 토대를 마련했다. 구품중정법은 구품관인법이라고도 불리는데, 주, 군 단위로 그 지방 출신의 중정관을 두어, 관애의 우수한 인재를 1품에서 9품까지 나누어 추천케 한 다음, 등급에 따라 관직을 주는 것이다. 중정관은 지방의 유력자와 협의하게 되고, 가문의 우열이 관품의 근거가 되니, (상품에 한문 없고, 하품에 세족 없다)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과거제는 수나라 때 처음 실시되고, 당나라 때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당나라 때의 과거에는 명경, 진사, 수재 등 여러 과목이 있었으나, 그중 진사과가 가장 주목되었다. 지방의 향시에서 합격한 인재들은 중앙에 모여 예부에서 행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고, 그후에도 이부에서 실시하는 신언서판, 즉 외모, 언어, 필적, 소송판전 등의 까다로운 절차가 남아 있었다. 이부는 당대 제일의 명문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난한 가문의 진사가 이 관문을 통과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것이었다. 한유와 같은 대 문호도 세 번이나 실패했다.
  973년 송태조는 과거의 최종단계에 새롭게 전시를 추가했다. 전시란 임금이 직접 시험장에 나가 진사의 서열을 결정하는 것으로, 이때의 성적이 진사의 임관, 승진을 좌우했다. 이에 합격한 진사는 감격하여 임금에의 충성을 맹세하게 되고, 황제의 지위는 더욱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당말 오대의 대변혁기에 몰락했던 전통귀족 대신, 새로이 성장하고 있던 재지 지주층들이 과거를 통해 대거 관계에 진출, 새로운 지배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 중기 이래 절도사의 지배하에 들어가 관청사무를 보좌하고, 몰락한 농민들을 자신들의 장원에 흡수하면서 서서히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태조 때 수십 명에 불과하던 과거 합격자는 점차 수백 명으로 확대, 과거제는 관리등용의 중추적인 지위를 확립했다. 새로이 등장한 신흥 지주관료들의 재력은 고위관직을 획득함으로써 가장 확실히 보장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뒷날 치열한 당쟁이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피지배계층은 당대에는 천민과 양민으로 대별되어 있었으나, 송대에는 대부분의 노비, 부곡민이 해방, 양민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신흥 지주관료들도 법적으로는 같은 양민의 신분에 속했다.
  양민은 농지를 소유한 주호와 소작인인 객호로 구분되었는데, 객호가 대체로 전체의 1/3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호는 자산액에 따라 5단계의 호등으로 나뉘어졌는데, 그 상등호가 형세호, 혹은 관호라고 불리는 지주적 신분에 속했고, 4, 5등급의 하등호는 이들 지중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영세 농민층으로 그들이 주호의 과반 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호는 국가의 조세부담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이들 하등호의 생활이 반드시 객호보다 나았던 것은 아니었으며, 점차 객호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대체로 송대의 사회는 지주-전호의 관계로 정착되었다. 형세호는 관계에 진출, 관직을 이용해 장원을 더욱 확대해나갔다. 국가는 주호의 몰락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왕안석의 개혁이 실패했듯이. 남송기에 이르러 지주관료의 지배력은 더욱 굳어지고 전호의 신분은 농민들의 더욱 일반적인 생활 양태가 되었다.
  12세기 남송의 주희는 불교와 도교의 심각한 도전을 맞아 유교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통 훈고학을 탈피,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이윽고 이상적 도학정치를 이루는 실천의 학문으로서의, 또한 우주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사변철학으로서의 성리학을 개창, 과거를 통해 위정자가 되려는 사대부 계층을 이사을 일반화시키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당시의 법률 또한 지주계층의 이익을 반영하고 있다. 11세기 후반의 형법에 의하면, 지주가 전호에 대해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 죄가 장죄 이하일 경우에는 아예 처벌되지 않고, 도형 이상인 경우에는 일반인보다 한 등급 감형되었다. 남송 초기가 되면 다시 한 등급을 더해, 즉 합계 2등급이 감형되었다. 반대로 전호가 지주에게 죄를 저질렀을 때는 2등급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객호는 노예처럼 매수되지 않지만 주호가 전호를 살리고 죽이는 것이 개돼지만도 못하다)라는 표현이 나오게 되고, 농민들의 집단적인 저항, 즉 항조 운동이 개시되었다.
  흔히 전호를 서양 중세의 농노에, 형세호를 영주에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호가 이전의 자유가 제한되고, 법률상의 차별대우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 예속성은 인신적이라기보다는 더욱 경제적인 것이었다. 지주가 사회의 지배층이었으나, 그들은 봉건적 통치기구, 불수불입의 특권을 갖고 있지 못했고, 관료화하여 국가권력에 몸담음으로써 지배력을 유지, 확대하고 있었다. 중국에 있어서 국가, 국가조직의 존재는 중국의 장구한 역사 속에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선, 마치 거대한 바위와 같았다.

   

40 유목민족의 각성-최초의 정복왕조 요(916--1125년)

 

  중국문명이 탄생한 이래, 중국민족과 북방 유목민족과의 대립은 역사상 중요한 주제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중국의 우위는 확고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말 오대의 변혁기에 이들이 뚜렷하게 각성, 독자적 국가체제를 갖추고 중국을 정복해들어가니, 송대의 중국은 동아시아에서의 정치적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거란족의 요, 여진족의 금, 몽고족의 원으로 이어지는 유목민 정복왕조의 행렬은 중국의 일부, 절반, 끝내는 중국 전역을 송두리째 지배하게 되었다. 천하의 중심으로 자처하던 중국인의 자처하던 중국인의 자존심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잇따른 전쟁 속에서 각국의 민족주의는 크게 고양되었다.
  유목민족들은 유라시아 대륙의 내륙부, 건조한 기후대를 따라 목축, 수렵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광대한 초원의 바람소리를 귓가에 들으며 천막 속에서 살았고, 목초지를 따라 계절에 따른 이동 생활을 했다. 이들의 재산이라면 수백, 수천의 양떼와 말에 불과했다. 말은 여름철에 수많은 양떼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했으며, 겨울에는 부족원들의 사냥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먹고 사는 것은 가능하지만 재산은 늘릴 수 없는' 이들의 유목 생활은 언제나 소박했다. 가난은 주변 농경민족으로부터 생활필수품을 약탈하게 했으나, 성원간의 평등한 관계를 유지시켜줌으로써 그들의 부족 내부는 견고하게 단결되어 있었다.
  중국 최초의 정복왕조가 되었던 거란족의 건국설화를 살펴보자.
  (그 옛날, 흰 말을 탄 신인이 토하(랴오허 강) 상류로부터 내려고, 검은 소달구지를 탄 선녀가 황허(시라무렌 강)의 상류로부터 내려왔다. 마침내 두 남녀는 두강의 합류점인 목엽산 기슭에서 만나 부부가 되었고, 아들 여덟을 두었는데, 이들이 각각 거란 8부의 조상이 되었다.)
  거란족은 만주 시라무렌 연안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몽고계의 종족으로 8개의 대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목민족인 그들에게 말이나 소는 매우 중요한 동물이었을 터이고, 아마도 수말과 암소를 토템으로 하는 씨족의 족외혼으로 결합하여 국가를 건설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과의 접촉기에 강성했던 두 성씨, 즉 야율 성과 심밀 성은 각기 말과 소를 상징하는 씨족명의 한자 표기어다.
  916년 부족연합의 대칸이었던 야율 성의 아보기가 세습적인 지위를 확보, 전제국가 체지를 갖추고 '대거란국'을 건설했다. 아보기는 926년 만주에 200년간 군림했던 해동성국 발해를 멸망시키고, 몽고지역을 제패했으며, 그를 이은 태종은 석경당의 후진을 후원, 이른바 연운 16주를 얻고, 937년 국호를 '대요'라 했다. 거란족, 즉 '키타이'의 위력은 주변에 진동하여 러시아 말의 키타이는 중국의 호칭이 되었다.
  연운 16주는 만리장성 남쪽, 즉 북경과 대동을 중심으로 한 화북의 일부 지역으로 이 중원의 땅이 이민족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은 중국인들로서는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통일을 완성한 송태종은 이 실지의 회복을 위해 여러 차례 북벌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거란족은 농경민으로부터 단순히 물자를 약탈하는 차원에서 이미 벗어나 있었다. 약탈보다는 농업이나 수공업 기술자의 획득에 치중, 국력을 다져가고 있었다. 장성 이북의 유목지대에도 많은 도서적 집락이 만들어졌고, 그 가구 수는 연운지방의 호수에 필절하는 것이었다.
  거란의 국력은 6대 성종 대에 이르러 최고수준에 달했다. 성종은 송의 영토를 향해 남하를 거듭, 송의 조정에 위기감을 조성했다. 송의 조정에서는 천도론까지 대두했으나, 재상 구준이 끝까지 싸울것을 주장, 진종의 친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황하를 사이에 두고 요군과 대치하게 된 진종은 전쟁터가 가까워질수록 두려움에 떨며 일말의 전의도 없이 화의만을 모색할 뿐이었다. 한편, 보병 위주의 송군은 초원의 야전에서는 기마병인 요군을 당해내지 못했으나, 성을 거점으로 싸울 때는 완강한 저항력을 보였다. 때마침 송과의 교전에서 명장을 잃을 요군은 사기의 하락을 우려 화의에 응하게 되니, 이것이 이른바 '전연의 맹', 1004년의 일이었다.
  이 조약에서 송은 형의 나라라는 명분은 얻었으나, 요에게 연운 16주의 지배를 인정하고,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바치기로 했다. 이것은 빈번한 전쟁보다는 나은 차선의 선택이었다고 했으나, 다른 유목민족들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선례가 됨으로써, 송의 국력은 크게 피폐하게 했다. 진종은 자신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하늘이 내린 글을 위조하여 봉선례의 의식을 성대하게 거행했으나, 비용만 더욱 소비되었을 뿐, 송의 실추된 권위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요나라는 장성 이날의 화북 농경지대에는 한인 관료에 의한 중국식 행정을 유지시킴으로써 장성 이북의 유목지대와는 다른 이원적 지배체제를 취했다. 이른바 북면관, 남면관이 그것이다. 또한 불교를 도입, 중국인과 거란인의 일체화를 도모했다. 대장경의 간행 등 발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불궁사 석가탑은 중국 내에 현존하는 최고의 목탑으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요나라의 중심은 명백히 장성 이북의 유목지대였으며, 그곳에서 거란족 독자의 체제를 구축, 중국에 대한 이민족 의식을 뚜렷이 하고 있었다. 그들의 민족의식은 위구르 문자를 계승하여 만들어진 거란 문자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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