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世界史/[지구촌]中國

중국역사 100가지[사건] 요약 4

好學 2009. 10. 21. 23:55

 

중국역사 100가지[사건] 요약 4

 

 

  61 자명종과 세계지도 - 선교사들의 활동
  62 안에는 반군, 바깥에는 적군 - 명의 멸망
  63 대만, 최후의 항쟁거점이 되다 - 정성공의 대만
  64 한족 최후의 저항 - 삼번의 난
  65 서구 열강, 중국을 넘보다 - 광동무역의 시작
  66 만주족 지배의 전성기 - 강회, 옹정, 건륭
  67 사실에 바탕하여 진리를 탐구한다 - 고증학의 발달
  68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 - 아편전쟁
  69 끌어내려진 애로 호의 영국구기 - 제 2차 아편전쟁
  70 지상에 세우려 한 농민들의 천국 - 태평천국 운동
  71 중국의 제도에 서양의 기술 - 양무운동의 추진
  72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중국' - 청, 전쟁과 청일전쟁
  73 백일천하로 끝난 개혁파의 꿈 - 변법자강 운동
  74 서양귀신들을 몰아내고 청조를 지키다 - 의화단 운동
  75 중국혁명의 아버지 손문 - 중국 동맹회 결성
  76 무창에서 솟은 혁명의 불길 - 무창봉기 발발
  77실현되지 못한 공화국 황제의 꿈 - 원세개의 중국 통치
  77 시련과 승리, 그리고 전락 - 국민당의 등장
  79 타도! 제국주의 - 5, 4운동 발발
  80 군웅할거하는 군벌들 - 군벌시대

 

 

61 자명종과 세계지도-선교사들의 활동(17세기 초)


  중국에 서양의 크리스트 교가 들어온 것은 당애였다. 그러나 그때의 크리스트 교는 정통 카톨릭이 아닌 이단의 한 파였다. 정통 크리스트 교가 중국에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명대 후반기 부터다.
  명나라 때 중국에 크리스트 교를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ㅎ할을 한 것이 제주이트 교단이다. 이 교단은 중국에서는 '야소회'로 불렸다. 제주이트 교단은 1540년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 성립한 카톨릭 포교단체다. 이 교단이 창립되던 16세기 유럽에서는 카톨릭 교단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프로테스탄트(개신교)들의 활동이 활발하던 때로서, 루터나 칼뱅의 종교 개혁이 이 시기를 전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제주이트 교단은 이런 분위기에서 점점 위축되어가는 카톨릭의 자기혁신 및 교세확장 운동의 하나로 나온 것이다. 이들의 중심사업은 이교도 지역에 대한 카톨릭 포교활동이었다.
  1542년 제주이트 교단의 창설자의 하나인 프란시스 자비에르는 인도를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 이것이 일본에 카톨릭이 들어오는 시초다. 그는 중국에 들어가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중국 카톨릭 전파의 가장 큰 공로자는 마테오 리치(중국명 이마두)였다. 그는 1583년 광동을 통해 중국에 입국했으며 1598년에는 북경에와 황제를 만나 북경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중국에는 없는 자명종(시계), 세계지도 등을 가지고 왓으며, 서양 문물 및 서양 실정을 중국인들에게 알리는 다리 역할을 했다. 물론 그의 절대적인 목표는 카톨릭 전파였다. 그는 북경 근처에 포교당을 짓고 주로 중국의 고위관리들과 친교를 맺은며 그들을 카톨릭에 들어오게 해싿. 그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서광계, 이지조, 양정균 등 명의 고위관리들이었다. 고위관리들을 중심으로 카톨릭을 소개하는 것은 제주이트 교단의 포교활동 지침의 하나였다. 선교사들은 중국에 와서는 중국어를 익히는 등 중국인들에게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노력해싿. 유학자들의 복장을 했으며 관리들에게 망원경, 자명종 등 신기한 물건들을 선물하기도 했다.
  마테오 리치는 또한 중국인들에게 카톨릭을 소개하는 책을 중국어로 썼는데, 그것이 유명한 (천주실의)다. 이 책은 조선에 들어와 조선에서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탄생하게 하는 촉매열할을 하기도 했다.
  (천주실의)에서는 크리스트 교는 불료보다는 유교에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을 강조하여 중국인들의 육교적인 사고방식에 접근하고자 했던 흔적이 보인다. 그는 1610년에 사망햇는데, 당시 중국의 카톨릭 신자 수는 약 2500여 명이었다. 그의 사후 교세는 더욱 확대 되어 명나라 말기에 이르면 약 15만 명 정도로 증가했다.
  그러나 청대에 들어오면 중국의 카톨릭 선교활동에 변화를 보이게 되낟.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명대에 활동했던 선교사들이 유교와의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카톨릭의 내용을 상당부분 유교에 맞추려고 던 점이다. 크리스트 교의 신과 유교에서의 상제가 같다고 하여 공자의 제사나 조상숭배 등도 인정햇던 것이다. 그런데 뒤에 중국에 들어온 도미니크 회나 프란시스코 회 등은 제주이트 교단의 이러한 유교와의 타협이 카톨릭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특히 제주이트 교단이 주로 지배층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햇던 데비해 도미니크 회나 프란시스코 회는 탁발수도회의 전통대로 일반 백성들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중국에서의 제주이트 교단의 활동은 로마 교황정에서 문제가 되었으며 청나라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청나라에서는 1706년 강희체 대 마테오 리치의 입장을 인정하는 선교사들에게만 중국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싿. 로마 교황청에서는 중국인 카톨릭 교도가 유고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못하도록 했다. 옹정제 때에는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크리스트 교 자체를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 선교사 중의 몇몇은 궁중내의 기술자나 황가 등으로 남아 있었으나 크리스트교 선교활동은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뒤 중국에서 크리스트교 활동의 자유가 인정된 것은 쩨2차 아편전쟁에서 청이 영국과 프랑스에 패한 이후 맺어진 베이징 조약에서다.
  선교사들의 중국 선교활동은 카톨릭 전파 말고도 서양의 학문이 소개되는 하나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천문학, 지리학, 수학, 같은 어느 한 분야를 전공하게 하여 선교활동에 활용하도록 교육을 받았으며, 선교활동 과정에서 이런 자연과학 지식의 일부가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 들어와서 여러 가지의 세계지도를 제작했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곤여만국전도)가 있다. 이 지도의 특징 중 하나는 중국이 지도의 중심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중화의식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세계의 위치와 각 지역의 여러 사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알레니의 (직방외기)는 중국인들에게 중국 밖의 또다른 세계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청나라 강희제 때는 선교사에게 청나라의 영토와 주변 속국들의 위치를 실제 측량하여 그리게 한 (황여전람도)가 작성되기도 했다.
  마테오 러치의 수학지식을 서관계가 정리한 (기하원본)은 유클린트 기하학을 소개하고 있다. 그 외에도 달력에 관한 것, 무기 특히 화포 만드는 기술 등이 중국에 알려지게 된다.

   

62 안에는 반군, 바깥에는 적군-명의 멸망(1644년)


  주원장의 건국 이후 200여년이 지나면서 명조는 안으로는 환관의 횡포와 도처에서 발생하는 민란, 그리고 밖으로는 홰구와 몽고족의 공격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특히 만주지방에서 세력을 확대해 명조를 압박해오는 후금(청) 세력은 명나라가 쉽사리 막아 내기 어려운 상대였다.
  명은 이 만주족과의 싸움에 엄청난 국력을 소비해야 했고, 그만큼 백성들의 고통도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의 고통이 커질수록 그 불만을 들에 엎고 반란세력들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천재지변으로 인한 기근이 심각한 지역이었던 하남과 섬서지방을 중심으로 거대한 반란세력이 형성되었다.
  원래 섬서지방은 기름진 땅이었지만 잦은 가뭄으로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의 국경수비 중심이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에서 군수물자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게 되자 군인들이 반란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도 이 지역의 반란세력의 지도자 중 하나엿다. 이자성은 연안출신으로 역에서 일하는 천한 신부의 사람이었다. 그는 그 지역의 반란군 지도자의 한 사람인 고영상의 휘하에 들어가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의 거센 공격으로 인해 발란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이자성도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피해 다녀야 했다. 명 정부군의 공격으로 거의 숨통이 끊겨가고 잇던 반란군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게 한 것은 청나라였다. 명이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 국력을 소모하고 있을 때 청은 명의 수도인 북경 근처에까지 육박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명의 황제 숭정제는 하남, 섬서 등지에 있는 정부군을 청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북겨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군이 부경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하남, 섬서 등지의 반란군들은 다시 활동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숨어 있던 이자성은 다시 군대를 모아 하남지역에 활동을 개시했다. 고통에 신음하고 잇던 하남지역의 농민들은 이자성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자성군은 농민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토지를 고르게 분배한다거나 악독한 지주의 창고를 열어 농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준다든가 하여 그들의 환심을 샀다.
  이자성은 세력을 더욱 강화시켜 마침내 1641년에는 낙양을 함락시켰다. 42년에는 개봉을 점령했으며, 43년에는 양양에 궁전을 짓고 스스로 신숭왕이라 칭하고 국가체제를 갖추어나갔다. 그 이듬해 다시 나라 이름을 대순으로 하고 서안을 서경으로 삼았다. 서안을 거점으로 한 이자성군은 동쪽으로 군대를 이동하며 명의 요충지를 하나씩하나씩 점령해들어갔다. 마침내 3월 17일 이자성군은 북경에 당도했다. 북경은 명의 수도라고 하지만 그 수비는 너무 허술하여 이자성의 반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3월 18일 저녁 무렵 황제가 가장 믿고 잇던 신하가 성문을 열고 이자성군을 불러들였다. 성문이 열리자 이자성군은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황제가 머물고 있던 궁성인 자금성 주변에는 이자성군의 함성이 들리고 북경 시내는 반란군이 방화한 불길이 여기저기서 번지고 있었다. 숭정제는 최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명의 맥을 잇기 위해 세 아들을 피신시킨 후 왕비와 후비들에게 자결을 명한 다음, 그의 딸들은 직접 죽였다. 아직은 자금성 안에까지 이자성군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만수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유서를 남긴 다음 자결했다. 그가 자신의 옷깃에 적어 남긴 유서는 비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죽어 지하에 가도 선왕들을 뵐 면목이 없어 머리털로 얼굴을 가리고 죽는다. 내 시신은 도적들에게 갈기갈기 찢겨도 좋지만 백성들은 한 사람이라도 상하게 하지 말라"
  그가 이 유서를 남기고 죽을 때 그의 나이 서른 넷이었다.

   

63 대만, 최후의 항쟁거점이 되다-정성공의 대만 정복(1661년)


  명은 중국본토에서는 소멸되었지만 이 명의 명맥을 잇겠다고 하여 본토를 떠나 대만으로 들어간 사람이 있는데 그가 정성공이다.
  그는 복건 출신으로 아버지 정지룡은 해적출신으로 명나라에 귀순했고, 어머니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정성공 역시 일본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중국으로 들어왔으며, 청나라 군대가 한해관을 넘어 북경으로 밀려들 때 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온 명 황제 융무제를 만날 수 잇게 되었다. 융무제는 정성공의 비범함을 알아버고 그에게 주씨 성을 내렸다고 한다. 청의 공격을 막고 명 황제를 지킨 것은 정성공의 아버지인 정지룡 등의 군사력이었다. 그러나 정지룡은 나중에 청나라에 투항해버리고 마낟.
  정성공은 아버지의 배신행위를 눈물로 만류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 정성공은 이에 그의 세력을 끌고 바다로 나와 해상에서 청나라에 대항했다. 그의 목표는 북경을 장악한 청왕조를 타도하고 한족 왕조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 숙원을 달성하기 위한 발판으로 우선 남경을 장악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했다. 그가 군대를 일으켰을 때는 1658년으로 순치제의 통치시기였으며, 당시 정성공이 거느린 군대는 20만 정도였다. 군대를 몰아 해안 지역에서 몇번의 승리를 거두었는데, 계속되는 승리에 자만한 정성공 분대는 남경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된다. 그는 그의 생일에 맞추어 남경을 함락시켜 남경에 십성하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청의 군대를 얕보고 담비다가 청군에게 크게 패한 뒤 그는 그의 근거지인 아모이(하문)로 철수했다. 중국본토에서 유일하게 발붙일 수 있는 곳이 이곳이었다.
  북경 회복이라는 목표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자신이 있는 해상전투의 근거지를 확보하려 했고, 그런 그의 생각에 떠로른 것이 대만이었다. 원래 대만은 남방계통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중국본토에서 대만을 정보했다는 기록은 수나라 때무터 보이고 있다. 그러나 대륙의 중국인들이 대만에 본격적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명나라에 들어와서였다. 특히 해안지대인 복건, 광동성 사람들이 대만으로 들어가 살게 된 것이다.
  이 지역에 조직적인 통치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중국인이 아니라 서양세력에 의해서였다. 1624년 네덜란드는 안평에 상륙했고, 그 당시 살고 있던 원주민인 '다이오완 족'의 이름을 따 다이완으로 부르게 되었다. 1624년 이래 정성공이 들어올 때까지 약 40여년 동안 네델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대만을 통치했다.
  대만 정착 한족들은 이민족의 지배에 고통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네덜란드에 저항햇으나 그때마다 많은 피해를 당했을 뿐 네덜란드를 몰아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민족에게 억압당하는 것보다는 정성공이 와서 통치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 정성공의 대만 정착을 바라고 있었다.
  1661년 정성공은 마침내 대만의 네덜란드 군을 공격했다. 나쁜 기상조건을 역이용하여 전개한 기습작전에 네덜란드 군은 재대로 저항하지 못했으며, 대만에 상륙한 정성공 부대는 네덜란드 총독의 부대가 수비하고 있는 대만성을 공격하여 약 1년여 만에 네덜란드 군을 몰아냈다.
  대만에 들어온 정성공은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펴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 비해 살기 좋은 섬으로 만들었다. 또한 토착 고산족의 생존권도 보호했다. 그러나 대만을 장악한 지 1년이 되지 못해 정성공은 39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그후 그의 아들인 정경이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20여년간 대만을 통치했으나, 1683년에는 청나라의 공격을 받아 정경의 아들인 정극상이 청에 투항하고 말았다. 정성공이 대만으로 들어올 때 청나라를 못마당하게 여기던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따라 들어왔고, 따라서 정씨 3대에 걸친 통치시기가 대만이 중국화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청은 정극상의 투항으로 대만을 차지함으로써 완전한 중국지배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19세기에 들어오면 이른바 대만사건이라는 국제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이 사건은 대만의 산지 거주 토착 만족이 유구인 어부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유구는 일본의 영토였고 유구인이 살해되었다는 것은 일본인이 살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기화로 대만을 공격하여 산지족을 죽였으며 그 군사동원의 경비를 청나라에 요구했다.
  그후 대만은 청나라가 약해지면서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어갔다. 1884년 인도차이나 반도를 놓고 청과 프랑스 사이에 싸움이 있었는데, 이때 프랑스 군대가 대만의 기륭을 공격하고 팽호도를 점령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1894년 조선을 사이에 두고 청일전쟁이 일어나 청나라가 패하게 되면서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 요동과 함께 대만을 일본에 넘겨주었고, 그후 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 대만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64 한족 최후의 저항-삼번의 난(1673년)


  이자성군의 군격을 받아 북경이 함락되고 자금성이 반란군의 발길 아래 놓이게 된 것이 1644년이었다. 이자성은 대순왕의 칭호로 성대한 북경입성식을 거행했다. 중국 천하는 이자성의 새로운 왕조에 의해 장악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자성은 법을 공표하고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는 등 국가 통치체제를 정비해갔고, 대세가 이미 이자성에게로 기운 것으로 판단한 지방 세력들은 이자성에게 충성을 맹세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이자성군에게 가장 거치적거리는 상대가 중국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산해관의 수비를 맡고 있는 오삼계였다. 산해관은 예로부터 중국의 최후 관문으로 만주족의 중국침략을 저지하는 데매우 중요한 요충지였고, 그곳에는 50만의 대군이 버티고 있었다. 그 지역의 책임자가 바로 오삼게였다. 그는 이자성군의 북경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북경으로 올라가던 중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받고 다시 산해관으로 돌아가 있었다.
  한편 청나라도 태종이 죽은 후 8세 된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으며, 그의 삼촌인 다이곤이 대신 통치했다. 청은 중국을 장악하려는 야심을 버리지 않고 중국으로 침략해들어오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중국대륙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산해관을 거쳐야 했다. 이 산해관은 명나라 장수인 오삼계가 지키고 있었다. 오삼계는 명조를 멸망시킨 이자성에게 굴복할 생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 투항하겠다는 마음도 없었다. 그는 새로이 성장하고 있는 양세력 사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진로를 결정한 것은 이자성의 부하들이 그의 아버지와 그가 아끼던 여자를 잡아갔다는 소식이었다.
  이자성에게로 기울 듯하던 그의 마음은 삽시간에 바뀌어 이제 이자성을 원수로 생각하게 되었다. 오삼계는 이자성을 치기로 결정하고 청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오삼계의 오청은 청에게는 말할 수 없는 희소식이었다. 중국대륙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산해관이었고, 엄청난 희생을 치러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이 안 서는 천연의 요새인 산해관의 오삼계가 도움을 청해왔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청은 오삼계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군대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청으로서는 중국을 장악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인 이자성군과 오삼계군을 동시에 약화 혹은 해체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셈이다. 청나라가 격파해야 할 두 적대세력이 서로 싸워 힘이 빠진다면 청나라는 간단히 중국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자성군과 오삼계군은 숙명의 일전을 벌이게 된다. 오삼계는 청군을 뒤에 두고, 산해관에 다가와 있는 이자성군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오삼계는 청군의 도움을 받아 이자성군을 대파했다. 이자성군은 크게 패한 뒤 한걸음에 달아나 북경으로 되돌아갔다. 이자성은 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4월 29일 성대하게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황제가 된 이자성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금방이라도 청의 막강한 철기군이 북겨으로 쳐들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자성군은 지레 겁을 먹고 북겨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황제로 즉위한 다음날 이자성군은 북경르 떠나 서쪽으로 피했고, 그 다음날 청군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북경에 입성했다. 북경에 입성한 청은 고통받고 있는 백성들을 압제자로부터 구해내려고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들은 북경에 들어오면서 "폭력을 제거하고 백성들을 구하며 천하를 편안하게 하려고 한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북경을 장악한 청나라는 명의 숭정제를 예에 따라 장사지내고 명나라 때 관료를 지냈던 모든 사람을 간직에 복귀하도록 했으며, 관청 사무에는 만주문자와 더불어 한자를 게속 사용하도록 하는 등 한족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아직도 겉으로는 청나라에 굴복한 것처럼 하고 있었으나 내심 청나라에 대항하는 명나라의 옛 장수들이 있는 한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볼 수 는 없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세력으로 오삼계군, 그리고 공유덕, 상가희, 겅중명 등이 있었다. 특히 오삼계는 이자성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부흥운동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영력제를 추적, 미얀마 에서 죽인 공을 세웠던 자이다.
  청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남쪽지방에 이들을 왕으로 봉했다. 운남, 귀주의 오삼계, 광동의 상가회, 복건의 경중명 등이 바로 그들인데, 이들을 삼번이라고 한다. 청왕조는 명의 남은 세력을 격퇴하기 위해 이 세력을 이용했으나, 이제 명을 따르던 세력도 어느 정도 제압했고,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정왕조도 안정적인 기반을 다지게 된 강희제 때에 이르러 세 왕의 세력을 굴복시킬 필요가 있게 된다.
  세 왕들은 청조가 그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고 그들의 요구도 들어주지 않은 것을 보고 마침내 청조에 대항하는 난을 일으키게 된다. 이것을 '삼번의 난'이라고 한다. 당시 대표적인 세력이었던 오삼계는 운남지역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으며, 태종의 딸과 자기 아들을 혼인시켜 청조와 결혼관계를 맺고, 티베트와 교역, 광산개발 등으로 만만치 않은 경제력도 가지고 있었다.
  1673년 11월 오삼계는 마침내 청조에 대항하는 군대를 일으켰다. 다른 두 왕인 경정충과 상가희의 아드린 상지신이 오삼계의 군사동원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이 세 세력은 일시에 군대를 모아 양자강 이남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했다.
  오삼계는 그가 거느리는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누어 청나라의 군대와 싸웠으나, 힘이 분산되어 전세는 오삼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오삼계군이 약화될 조짐을 보이자 다른 두 왕은 오삼계와의 연합을 풀고 청나라에 굴복하려 했다. 오삽계는 전세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되돌이기 위해 그의 권위를 높일 필요를 느꼈고 그리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주'로 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즉위한 지 5개월 여 만에 죽고 말았다.
  오삽계가 죽은 후 그의 군대는 곧바로 분열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청나라에 총공격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눈치를 보려 이 세력 저세력에 옮겨다니며 붙던 두 왕도 역시 청왕조에 의해 제거되고, 이후 약 250여년간 중국대륙은 만주족의 처안라에게 지배항하게 된다.

   

65 서구열강, 중국을 넘보다-광동무역의 시작(1757년)


  전통적으로 한족들은 세계에서 가장 중앙에 위치한 나라라는 의미로 스스로 '중국'이라고 했고,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 지구상에도 최고통치자인 신의 아들 '천자'는 하나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문명의 수준이 가장 높은 민족 역시 한족이라고 여겼다. 다른 민족들은 중국의 교화대상인 야만족일 뿐이었다. 모두 미개한 오랑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외국과는 향상 동등한 통상관계가 아닌 조공관계를 유지했다. 유럽인들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항로의 개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15세기 말 이후 유럽인들은 중국과의 불평들 관계를 깨고 대등한 조건에서 무역 및 국가 관계를 맺고 싶어했다. 그러나 중국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고 중국인들의 우월감 역시 쉽게 깨지지 않았다. 신항로 개청 이후 가장 먼저 중국과 무역관계를 맺었던 나라는 신항로 개척에 앞장섰던 포르투갈이었다. 신항로 개척 초기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스페인)가 선두주자였는데, 에스파냐는 주로 아메리카 대륙에 세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했고 아시아 쪽은 포르투갈의 무대였다.
  포르투갈은 1553년 마카오를 점령하여 그곳의 관리를 돈으로 매수, 그 관리의 이름으로 땅을 사는 방식으로 그 지역을 차지했다. 몇년 뒤 비밀리에 땅을 넓혀 포대를 세우고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관청을 설치하여 실질적으로 마카오를 식민지화했다. 이것이 서양세력이 처음으로 힘에 의해 중국 땅을 차지하게 된 시초다. 물론 중국은 포르투갈의 마카오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곳에는 계속 중국관리가 파련되고 있었다. 16세기까지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중심으로 중국과 이론을 연결하는 무역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한편 에스파탸는 1565년 필리핀을 점령했으며, 아모이 항구(하문)를 무역통상 기지로 삼았다. 1626년에는 대만의 기륭을 강제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17세기 초로 접어들면 유럽에서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른 네델란드가 앗.아 지역을 장악한다. 네덜란드는 자바 섬에 바타비아(자카르타)라는 그들의 전진기지를 전설하여 동남아시아 여러섬들을 식민지로 삼았으며 중국 및 일본과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무역로가 성행했다. 1604년 대만의 팽호도를 습격했으며, 1623년에는 대만을 점령하고 안평요새를 구축했다. 1641년에는 대만을 놓고 네덜란드와 에스파냐가 싸움을 벌렸고, 이 싸움에서 이긴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를 통해 대만을 약 40여년간 지배하다가 청나라 초기 정성공 세력에 의해 밀려나게 된다.
  네덜란드는 영국과의 무역전쟁에서 패한 이후 그 세력이 급격하게 약해졌다. 네덜란드 세력에 대신하여 아시아 무역에서 패권은 영구과 프랑스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영국은 플래시 싸움(1757년)에서 승리함으로써 인도를 독점적으로 식민통치하게 되었고 중국과의 무역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서양세력들이 중국을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광동항 하나만을 열어 외국인들의 무역거래를 제한시켰다. 이것을 광동무역이라고 한다. 광동무역에는 허가맏은 상인만이 무역을 할 수 있었는데 그들이 조직한 상인 길드를 공행이라고 한다. 이 공행은 외국과의 무역을 독점할 뿐만 아니라, 외국상인들을 관리하거나 관제를 거두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청의 관리와 외국상인들이 접촉하지 못하게 했던 것은 중국과 야만족이 대등한 관계로 만날 수 없다는 우월감의 표시였다.
  광동무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나라는 영국이었다. 특히 영국이 유리하게 무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인도를 식민지화함으로써 그곳의 물자를 충분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청나라는 조공무역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고, 광동무역은 영국에게 만족스러울 수가 없었다. 대제국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었던 영국에게 이 조공관계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영국은 청나라의 이러한 제한적인 무역방식을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무역통로를 넓히려는 영국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1793년에는 영국의 메카트니가 영국왕 조지 3세의 친서를 들고와 청의 황제를 만나려 했으나 거절당했으며, 대등한 무역관계의 개선 요구도 역시 거절당했다. 1802--1809년 동안 영국은 마카오를 뺏기 위해 3차례에 걸쳐 포르투갈과 싸우기도 했다.
  영국은 중국에서 막대한 양의 차를 수입해가면서도 영국산 제품들을 팔아먹을 수가 없었다. 특히 차의 수입대금으로 많은 양의 은을 중국에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1820년 이후 중국에 수출하는 것은 면제품이 중심이었고 그들이 중국에서 사가는 것은 차, 약재, 도자기 등이었다.
  마침내 영국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러한 관행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부당한 방법을 동원, 청나라와의 무역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꾸고자 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은 아편을 몰래 청나라에 파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이러한 아편판매는 중국에게는 엄청난 문제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아편무역을 금지 시키게 되었고, 마침내는 이 문제로 인해 영국과 청나라 사이의 전쟁으로까지 번지게 된다.

   

66 만주족 지배의 전성기-강희, 옹정, 건륭(17세기 중엽--18세기 말)


  청은 삼번의 난과 대만의 정씨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마침내 중국을 완전히 그들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족들은 세게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스스로 최고의 문화민족임을 자부했다. 그것은 중화의식으로 표현되었다. 문화수준이 낮은 소수의 이민족이 중국대륙을 통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고의 중국대륙 통치도 채 100여년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청은 250여년 동안 중국을 지배했다. 그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청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강희제(1662--1722), 옹정제(1723--1735), 건륭제(1736--1795) 시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삼번의 난'을 진압함으로써 중국을 최후로 통일한 시기는 성조 강희제 때다. 그는 대만의 정씨 정권을 굴복시켰으며 몽고를 공격하여 외몽고를 중국의 통치권 내에 포함시켰다. 강희제는 중국을 장악한 이후 한족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한족 지식인들을 청조의 통치체제에 참여시키고자 했다. 물론 많은 한족 지식인들은 이민족 지배하의 관리가 되기를 거부했다. 실제적으로 한족 지배층들의 참여 없이 넓은 중국대륙을 통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한족들을 관직에 등용함으로써 이민족 통치에 대한 한족의 반발을 무마하고 통치에도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강희제는 명의 관리들을 대부분 그 자리에 머물게 해싿. 최고위관직까지도 한족과 만주족을 같은 비율로 임명했다. 지방행정의 대부분은 한족들에게 위임하여 명대의 지방 지배층인 향신층의 지위를 게속 인정해주었다. 문자도 만주어와 한자를 같이 사용하게 했다. 그러나 황제에게 올리는 공식문서만은 만주어로 통일했다.
  또한 강희제를 전국의 학자들을 모아 대대적인 편찬사업에 참여시켰다. 그래서 만들어진 책이 중국 최대의 자전이라고 할 수 있는 (강희자전)이다. 이 자전에는 약 5만여 자의 글자가 수록되어 있다. 그외에도 (대청회전) 등 엄청난 분량의 책들이 편찬되었다. 그 때 편집된 (고금도서집성)은 1만여 권일 정도로 엄청난 대작이었다.
  강희제는 8세에 즉위하여 61년 동안 황제의 직위에 있었다. 그에게는 35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황태자로 지명되었으나 잘못된 행동을 많이 하여 황태자의 지위에서 밀려났다. 그후로 청조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황제가 후계자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상자에 넣어 궁중에 보관하고 황제가 죽은 다음에 그 상자를 열어 후계자를 선포하게 했다. 이 방식은 이후 관습으로 굳어졌다. 옹정제는 황제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파벌이 형성되는 등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후계자를 지명하는 대신 상자 안에 후계자 이름을 넣어두었다가 황제가 죽은 다음에 열게 하는 방식을 정착시킨 것이다.
  옹정재는 새로운 통치기루로 군기처를 만들었으며, 지방관들에게 자세한 보고를 하게 하고 직접 그 보고서를 읽고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옹정제 때에는 한족에 대한 사상탄압 정책이 가혹하게 행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 사상탄압을 '문자의 옥'이라고 한다. 즉, 글이 빌미가 되어 감옥에 가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한 것이다. 특히 만주족을 비방하고 한족의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어김없이 이 문자의 옥에 걸려들었다. 심지어는 실수로 잘못 쓴 글자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사상탄압은 만주족의 머리 모양인 변발을 강요한 것과 아울러 한족에 대한 강경책의 대표적인 예다. 예컨대 청은 한족 지식인들을 관직에 등용하거나 편찬사업에 동원하는 등으로 회유하기도 했지만, 변발을 강요한다거나 만주족을 비방하는 사상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등 이른바 '당근과 채찍' 정책으로 몽고에 비해 더 오래 중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 때에도 이런 청조의 정책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건륭제도 주변지역에 대한 정복활동을 계속했으며 편찬사업도 계속되었다. 이 시기의 편찬사업은 강희제 시기의 사업의 규모를 훨씬 능가했다. 이때 정리된 것이 (사고전서)다. 이것은 중국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다. 즉 경전, 역사서, 여러 학자들의 문집 등을 모은 것으로, 건륭제 때 10여년간에 걸쳐 정리되었는데 약 10여만 권이나 되었다. 이러한 대대적인 편찬사업은 청 황제들의 문화에 대한 애착의 결실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족 지식인들을 회유하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특히 전국의 서적을 모아 정리하는 것은 책들을 모두 검열하는 효과까지도 기대할수 있었다. 모은 책들을 모두 검토하여 청조의 입장에서 내용이 문제가 되는 책들은 전부 폐기처분했다. 무수히 많은 책들이 금서로 지정되었고 불에 타 사라졌다.
  건륭제는 60년 만에 황제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이는 강희제의 61년을 넘기지 않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말까지 130여년간의 강희, 옹정, 건륭제 통치시기가 바로 청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미 건륭제 때부터 청조 내부에 서서히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태평성대를 지나면서 알게 모르게 관료들이 부패해가고 있었다. 건륭제 말기에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던 화신이라는 자는 건륭제가 죽은 후 처벌을 받아 처형되었는데, 그의 집에서 몰수된 재산은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가 권력을 이용해 모은 보물들은 황금 15만냥 등 무수히 많은 보석류 등이 수십 개의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청나라에서 20여년 동안 거두어 들이는 세금의 양과 맞먹을 정도여서 건륭제의 아들인 인종 가경제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화려하게 꽃피던 청의 내부는 이미 썩어들어가고 있었고, 19세기 초반에 들어오면 그 부패상이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67 사실에 바탕하여 진리를 탐구한다-고증학의 발달(18세기--19세기 전반)


  중국의 각 시대에는 그 시대의 사회변동과 상황에 맞는 사상들이 발달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여러 사상이 나왔으며, 진시황 대의 분서갱유를 거쳐 한 대에 이르면 유학이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잡는다. 따라서 학문은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대부분의 유교경전의 내용이 소멸되어버렸기 때문에 한나라에 들어오면 잊혀지고 사라진 유교경전에 관한 내용과 그 뜻을 밝혀내는 학문이 발달하는데 이것을 훈고학이라고 한다. 훈고학은 글자 하나하나의 뜻을 정확하게 밝혀 원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학문이다. 이 훈고학적 전통은 당나라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송나라에 들어오면 단순히 유교경전의 글자 해석이나 의미를 파악하는 데 머물지 않고, 경전이 담고 있는 전체적인 철학적 의미를 밝히는 데 관심이 집중된다. 그때 나온 사상이 성리학이고, 그 성리학의 세계관에 반대하여 명나라 때 나온 것이 양명학이다. 성리학이나 양명학은 인단과 세계, 자연의 이치를 보는 철학적 관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명나라 말기에 이르면 그와 같은 철학적 논의가 일상생활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 특히 청나라의 ㅈ배를 받게 된 이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 학문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고염무 등이다.
  이들은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게 되면 처벌받기 때문에 정치에 관계하지 않고 학문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또한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도 쉽게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주로 과거의 여러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 경전의 뜻을 더욱 정밀하게 해석한다거나 역사적 사실을 좀더 확실하게 밝히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혹은 일반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하는 경향도 있었다.
  특히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에 서양의 제주이트 교단 선교사들이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지고 들어오게 되어 중국의 학문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성립하는 청대의 학문을 고증학이라고 한다. 고증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진살을 구한다는 '실사구시'를 주장한다.
  성리학이나 양명학과 같이 경전의 글자 하나 문장 하나에 얽매이지 않고 철학적인 측면으로 관실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해 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실을 구한다는 고증학자들은 우선 경전연구에 있어서는 한나라에서 이루어졌던 훈고학 쪽에 가까운 것이다. 물론 훈고학으로 그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에 근거한다는 말과같이 객관적인 증거를 수집하여 진실을 밝히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으로 전해내려오던 경전 하나하나를 다시 연구하여 어떤 것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다른 사람이 위조한 것도 있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런 고증학적인 분위기는 역사학, 지리학의 발전을 가져오게 했으며, 특히 옛날의 비문이나 종 등에 새겨진 글을 판독해내는 금석학 같은 진실을 밝히는 매우 중효한 방법의 하나였다.
  청대 고증학의 발달로 많은 서적이 편찬되었다. 특히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고전서)인데, 이것은 수만권에 이르는 책을 모아 분야별로 분류해서 정리한 대업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대적인 편찬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청나라의 사상탄압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청나라는 소수의 만주족이 지배층이 되어 다수의 한족들을 통치해야 했기 때문에 강경책과 회유책을 교묘하게 동원해야 했다. 관직에 만주족과 한족을 같은 수로 임명한다든지 하는 것이 한족을 회유하는 하나의 예라고 하면, 한족의 민족주의적인 사상의 탄압, 변발의 강요, 만주족과 한족의 결혼금지 등은 만주족이 그들의 혈통을 잃지 않으면서 한족을 통치하기 위한 강경책에 해당한다. 그러한 강경책 중 하나가 바로 '문자의 옥'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한족 지식인들이 청조를 비난하는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그것을 어길 경우 강력한 처벌을 하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사상탄압을 받아 회생되었다.
  전국의 서적을 모아 검토하여 편찬한 결과인 (사고전서)도 실은 그 책들의 내용을 검토하여 청조를 비난하는 책들을 가려내어 읽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한족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현실 정치적인 문제에 눈을 들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편찬사업에 동원하려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고증학은 성리학이나 양명학처럼 그 시대의 흐름을 방여하는 하나의 사상체계라기보다는 방법적인 측면의 성격이 강한 학문이덨다. 물론 유교경전이나 고전을 새록ㅂ게 해석해내어 근대지향적인 사상을 찾아내려는 노력들도 행해져 성과를 거둔 부분도 있으나, 그 시대 전체를 주도할 만한 사상체계나 혹은 다가오는 근대세계를 맞아 사회의 핵심적인 사상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 못했다.

   

68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아편전쟁(1840--1842년)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초부터다. 청나라는 18세기에 들어 3대의 황금기가 끝나고 혼란으로 빠지면서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질 때였기 때문에,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아편을 피우게 되어 그 수요가 급속하게 늘어났다. 아편은 마약이기 때문에 한면 중독이 되면 끊을 수 없게 되어 죽을 때까지 피울 수밖에 없었다. 아편에 중독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아편은 더욱 많이 팔렸다.
  아편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세기 초 연간 약 4천여 상자에 이르던 것이 30여년이 지난 1830년대에 이르면 연간 약 4만여상자로 10배 가량 늘어났다. 이것은 무게로 하면 거의 300만 톤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고위관료, 군인 등 지위가 좊은 사람들에서 일반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아편을 피웠다. 아편이 들어오는 것은 곧 그 가격만큼 중국의 은이 영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은은 당시 청나라의 화폐호 사용되었기 때문에 은이 부족해지면 경제적으로 많은 문제점이 생기게 된다.
  아편이 많이 팔린다는 것은 아편 중독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편수요의 증가는 심각한 사회문제와 경제문제를 유발했다. 아편에 중독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심각한 사회문제가 디었으며, 아편의 대금으로 은을 지불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이었다.
  중국에서는 아편을 피우는 것을 인정할 것인가 금지시킬 것인가를 놓고 많은 논쟁이 있었으며, 마침내 금지시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이윽고 1836년부터 아편을 금지시킴과 아울러 외국인들이 드나드는 개항장인 광동에서 아편 매매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영국은 계속 아편무역을 하고 있었다.
  청나라 황제는 임칙서라는 관리를 특사(흠차대신)로 파견하여 광동의 아편거래를 막게 했다. 임칙서는 1839년 광동에 내려가 아편 무역을 금지시키고, 영국상인들로부터 아편을 몰수하여 불태웠다. 당시 광동에는 자기 나라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인 엘리어트가 군함 3척을 이끌고 들어와 있었다.
  청나라의 아편무역 금지조치에 대해 영국의회에서는 아편 밀수출을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과 아편 밀수출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했다. 장시 영국은 휘그당과 토리 당의 양당에 의한 의회정치가 자리잡고 있었던시기다. 휘그 당은 아편판매를 중국무역의 기회를 확대시킬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토리 당은 아편무역이 영국의 주요한 무역품목인 면포시장을 위촉시킬 것이라는 이유로 아편거래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 영국의회에서는 근소한 차이로 휘그 당의 계획대로 하기로 결정했으며 중국에 군대를 파견할 것을 승인했다.
  중국과 영국 사이에는 전쟁을 예고하는 긴장감이 돌았다. 마침내 영국은 1840년 6월 중국에 약 4천여 명의 원정군을 파견했다. 영국 함대는 양자강 하구를 봉쇄하고 천진(텐지) 가까운 곳까지 함대를 파견하여 청나라를 위협하면서 타협을 시도했다. 타협은 결렬되었으며 이듬해 정쟁이 재개되었다. 1841년 5월 영국함대는 광동을 공격했다. 광동이 함락의 위기에 처하자 청은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굴욕적인 조건으로 영국과 타협하여 600만 불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광동에서 양국 군대를 동시에 철수시키기로 하는 '광동협정'을 맺었다.
  청나라 정부의 이러한 굴욕적인 태도는 중국인들을 분노케 했다. 당시 중국인들은 곳곳에서 침략적인 외국인들에 대항하는 자위조직을 결성하고 있었다. 그중 한 지역의 농민군이 영국군을 포위 공격하여 사상자를 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시 중국인들이 영국군을 비롯한 외국인들에 대해 얼마나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예다. 이것은 또한 청조의 대외정책에 대해서 중국민중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사건은 영국의 태도를 더욱 강경하게 몰아갔다. 영국은 중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1842년 6월 상해를 점령하고 남경(난징)으로 진격했다. 청나라는 아주 불리한 조건으로라도 타협을 할 수밖에는 없는 상황에 몰렸다. 결국 1842년 8월 영국함대의 갑판에서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역사적인 '남경조약'이 체결되었다. 남경조약의 내용은
  1. 홍콩을 영국에 넘겨준다.
  2. 광동, 하문ㅌ, 복주, 영파, 상해 등 5개 항구를 개항한다.
  3. 개항장에 영사를 주재시킨다.
  4. 중국은 전쟁 배상금 1200만 달러, 몰수된 아편 배상금 600만 달러 등을 3년 안에 영국에 지불한다.
  5. 공행의 독점무역을 폐지한다.
  6. 수출입의 관세를 정한다.
  7. 동등한 지위에 있는 양국간의 문서 교환은 동등한 형식을 사용한다. 는 등으로 되어 있다. 그 뒤 관세에 관한 내용, 영사 재판권, 최혜국 대우, 5개항에서의 군사 정박권 등을 추가시키게 된다.
  남경조약의 내용은 이렇게 비교적 간단한 내용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인 의미는 엄청난 것이다. 이 조약은 중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며 불평등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중국이 오랫동안 유지해오던 중화사상이 여지없이 깨졌으며, 광동에만 제한시켰던 외국상인들의 활동을 다른 항구에서도 활 수 있도록 인정해주게 된 것이다. 문제가 되었던 아편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이는 아편무역을 계속하겠다는 영국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번 봇물이 터지면 걷잡을 수 없듯이 영국과의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게 된 후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서양 여러 나라들과도 영국과 맺은조약의 내용과 비슷한 불평등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1844년에는 미국과 망하조약, 프랑스와는 황포조약을 맺게 되고 중국대륙은 서구 열강에 의해 서서히 잠식되어가기 시작했다.

   

69 끌어내려진 애로 호의 영국국기-제2차 아편전쟁(1856--1860)


  이편전쟁의 패배로 맺은 남경조약은 오랫동안 지켜오던 중화의식이 무너짐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중국이 한순간에 호락호락 서양 세력들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주지는 않았다. 5항구를 열어 무역을 허용한다는 약속을 했지만 그 실행을 미루고 있었고, 아직은 내륙지역까지 외국인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영국 상인들은 항구를 벗어나지 못하는 제한된 무역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영국산업을 이끌어왔던 면제품 산업이 생산과잉이 되면서 하루빨리 넓은 시장을 개척해야 했다. 중국은 그들에게는 아주 먹음직스러운 떡이었다. 서양 자본주의 국가들은 다른 분쟁을 만들어서라도 중국을 굴복시켜 내륙 깊숙이 진출려고 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그 선두에 서 있었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는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에 대항 저항이 커지고, 영궁에 대항하는 민중운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광동의 영국상관이 공격받았으며, 광동성의 관리가 영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성내의 중국인 지역으로 영국인들의 출입을 허용했을 때 격렬한 저항이 있어 결국 그결정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도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 얼마 동안은 영국도 러시아와 크림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무력압력의 시기를 늦추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애로 호사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애로 호는 홍콩에 선적을 둔 중국인 소유의 배로서 선장이 영국인이었다. 이 배가 광동성에 정박하고 있을 때 중국관리가 배에 올라 영국국기를 끌어내리고 해적혐의로 중국 선원 12명을 체포했다. 사건이 일어나자 광동의 영국영사 파크스는 양광총독에 항의하고 사건의 마무리를 위한 교섭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 그러자 바로 다음날 영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광주를 공격하고 청의 관청에 쳐들어갔다.
  물론 이 모든 사건의 바탕에는 영국의 자본주의가 중국에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영국 내에서는 "법률적으로 보나 도덕적인 면에서 보나 정당하지 않는 싸움이다"라는 반대 여론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더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중국을 완전히 굴복시키고자 했다.
  중국인민들의 반영감정은 더욱 높아져갔고 두 나라는 극한적인 대립상태가 되었다. 영국해병이 목 잘리는 사건이 있었고 영국은 이를 이유로 영국인이 죽은 지역의 마을을 불살라버렸다. 또한 영국은 홍콩의 중국인 빵집의 빵에서 비소가 나온 것을 중국인의 음모라고 하여 홍콩에 사는 중국인 약7만여 명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명령을 내렸다.
  영국은 중국과의 싸움에 프랑스를 끌어들이려 했다. 프랑스 역시 아시아에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생각이 있었던 참에 때마침 중국에 선포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중국에 파견되어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 한 명이 중국관리에게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857년 6천여 명의 영, 프 영합군은 광동을 점령하고 청에게 교섭에 응할 것을 요구했으나 청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영, 프 연합군의 공격은 계속되어 북경 가까운 천진을 위협하게 되자 청은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서양 강대국들과의 교섭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맺어진 조약이 천진(텐진)조약과 북경(배이징)조약이다. 북경조약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서양의 외교사절이 북경에 상주할 수 있게 할 것
  * 남경조약 때 5개항 외 10여 개 항구를 추가 개항할 것
  * 외국인의 중국 내륙지역 여행권리를 인정할 것
  * 크리스트 교의 선교의 자유를 인정할 것
  * 홍콩 옆에 있는 구룡반도를 영국에게 할양할 것
  중국은 북경조약으로 인해 항구뿐만 아니라 내륙지방에도 외국인들의 활동을 허용하게 되었으며, 서양 자본주의가 내륙 깊숙이 침투하여 중국민중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 조약은 또한 선교사 살해를 이유로 전쟁에 가담했던 프랑스는 크리스트 교 종교활동의 자유를 승인케 함으로써 강희제 이후 활동을 할 수 없었던 크리스트 교에 대한 제한이 풀렸다.

   

70 지상에 세우려 한 농민들의 천국-태평천국 운동(1850--1864년)


  태평천국을 이끌었던 홍수전은 영국에 의한 아편무역의 한창이던 19세기 초 1814년 광동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안은 다른 지역에서 그곳으로 이사해와 농사를 짓는 중농이었다. 홍수전은 총명하여 그의 집에서는 다른 형제들에게는 농사일을 돕게 하면서도 그에게는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신분상승의 거의 유일한 통로라고 할 수 있는 과거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하고 실망과 좌절감, 그리고 주변의 기대를 저버린 데 대한 죄책감들로 괴로워하면서 방황하게 된다. 1837년 또다시 과거시험에 떨어진 후 그는 높은 열레 휩싸이는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음과 삶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그는 이 열병의 고통을 겪으면서 신기한 꿈을 꾼다. 꿈속에서 어떤 노인으로부터 "악마와 요괴들을 무찌르고 세상을 악으로부터 구해내라"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그 꿈의 내용이 그가 꿈을 꾸기 몇 년 전에 서양 선교사로부터 우연히 받았던 (권세양언)이라는 크리스트 교 포교를 위한 책의 내용과 일치함을 알고 그 꿈속의 노인을 상제, 즉 여호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신이 계시한 지상천국을 만들기 위한 종교단체를 만들었는데 이 단체의 이름이 '배상제회'다. 처음에는 간청의 눈을 피해 포교활동에 나서 1년 만에 그의 뜻을 따르는 무리 2천여 명을 모았다. 그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리는 가난한 농민들, 숯을 굽거나 광산에서 일하거나 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억눌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홍수전의 주변에 모여든 것은 그가 내세운 평등이념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홍수전이 제시하는 평등사회는 천국으로 비쳤을 것이다.
  홍수전을 중심으로 한 배상제회는 사람들을 모아 교단의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그들을 하나로 할 수 있는 교리를 정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여호화만을 섬기며 남녀와 신분의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을 선전했다.
  1850년 배상제회에 동조하는 무리들을 모두 모았을 때 1만여 명이 모였다. 그들은 자기의 전재산을 내놓고 모두 공평하게 분배하는 등 모임 내에서부터 평등을 실현했다. 또한 가족을 풀어 헤치고 남녀를 따로 나누어 군대를 편성했으며, 청나라의 지배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만주족이 강요했던 변발을 버리고 머리를 길렀다. 그래서 그들은 자발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이듬해(1851) 이 모임의 지도자들은 광서의 금전이라는 곳에서 태평천국이라는 이름의 나라를 선포했다.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사회는 나라이름에 보이슥이 평등한 지상낙원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어 태평천국군은 청나라 군대와 싸우면서 북쪽으로 거슬러올라가기 시작했다. 홍수전을 천왕으로 하고 그 주변에 양수청이 동왕, 조소귀는 서왕, 풍운산이 남왕, 위차휘가 서왕, 석달개가 익왕으로 가각 군대를 이끌었다.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면서 그들이 정복한 지역에서 적과 내통한 자나 약탈, 폭행을 일삼는 자들을 처벌하고 태평천국에 협력하는 자들을 받아들이는 등으로 그 세력을 크게 확대했다. 53년초 호남성의 중심지인 무창을 함락했을 때 태평천국군은 50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53년 3월, 마침내 양자강 유역의 남경을 정복하여 남경을 천경, 특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들이 봉기한 지 2년여 만이었다.
  세력을 확대하고 국가조직을 갖추어나가면서 사회제도 역시 정비되어갔다. 태평천국 내의 백성은 모두 평등한 형제 자매였으며, 전족을 없애고 여자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았다. 또한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천조전무제도가 만들어졌으며, 사유재산은 인정하지 않았다. 즉 "밭이 있으면 함께 경작하고 음식이 있으면 함께 나눠먹고 돈이 있으면 함께 쓰며 모든 사람이 균등하게 혜택받을 수 있는" 평등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또한 멸만흥한의 깃발을 내걸고 만주족의 중국지배에 반대하여 청나라를 몰아내고자 했다.
  태평천국의 이러한 정책을 억눌렸던 농민들에게는 큰 호응을 받을 수 있었지만, 기득권 계층, 즉 재산을 많이 가진 지주, 청나라 지배 아래서 관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아가려는 위험한 존재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에게도 매우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청나라는 태평천국군의 제압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외국세력도 태평천국군의 세력확대를 원치 않았다. 중국 내의 움직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영국은 1853년 영국공사가 태평천국의 수도인 남경을 방문하여 청나라와 영국이 맺은 남경조약을 태평천국 지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태평천국의 지도자들은 아편무역 이외의 자유로운 통상은 인정하지만 외국이 태평천국의 통치권에 간섭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말했다. 결국 외국세력은 태평천국의 확대가 그들이 중국에 침투하는 데에 별로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각 지방의 유력자들을 '향신'이라고 불렀는데, 이들도 태평천국군을 막기 위해 군대를 길러 대항했는데, 그중에 가장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사람은 호남의 중국번이었다. 청나라의 군대보다는 이들이 개인적으로 거느리고 있던 군대가 태평천국의 세력확대를 막는 데 더 큰 역할을 했다.
  태평천국군은 향신층의 반격으로 주춤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의 내분에 있었다. 1856년 태평천국군은 엄청난 내분에 휘말려 지도자인 양수청이 위창휘에게 살해된 데 이어 위창휘 역시 내분의 와중에서 살해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태평천국의 평등사회 이념은 빛이 바래가기 시작했다. 군기는 문란해지고, 태평천국의 관리들은 토착 실력자들과 야합,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엄격한 규율과 금욕주의, 사유재산 금지의 원칙도 허물어져갔다.
  마침내 64년 7월 중국번이 거느리는 상군이 남경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여 남경을 함락시켰다. 홍수전은 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하기도 하고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하기도 한다. 나머지 지도자는 중국번에게 잡히기나 죽거나 하여 14년 동안 중국의 중요지역을 대부분 장악했던 태평천국은 끝을 맺었다. 태평천국을 무너뜨리는 데는 중국번의 상군뿐만 아니라 그의 부하였던 이홍장이 이끈 회군, 그리고 영국인 장교에 의해 훈련된 중국인 부대인 상승군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양세력의 처지에서는 태평천국이 처음에는 크리스트 교 국가를 선언했기 때문에 서양이 중국에 침략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예측 아래 지켜보는 태도를 취했지만, 이들이 곧 한족의 민족주의적인 모습을 드러내자 태평천국을 공격하는 데 가담한 것이다.

   

71 중국의 제도에 서양의 기술-양무운동의 추진(1860--1894년)


  평등사회의 깃발을 내세운 태평천국 세력이 짧은 시간에 큰 세력을 형성하면서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19세기 말 중국농민들의 생활이 그만큼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양의 침략은 계속되엇으며 청나라는 더 이상 중국을 온전히 통치할만한 힘이 없었다. 청조의 지배층 내에서는 권력다툼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태평천국이 전국을 휩 쓸 때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을뿐 아니라, 외국세력의 압력에+도 변변히 저항을 못하고 굴복했다.
  이런 상황에서 청조 지배층 일부에서는 중국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서양의 근대 공업기술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것을 양무운동이라고 한다. 양무운동은 곧 서양의 문물을 힘써 배우자는 것으로, 마치 우리 나라의 개화운동과 비슷했다. 이 운동의 중심인물은 태평천국군을 물리치는 데 큰 역할을 한 중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으로, 이들은 한족으로서의 청의 고위 관직에 있던 사람들이다.
  청조의 지배층이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서양의 과학기술이었다. 청조가 서양과 대결할 때 우수한 서양무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던 뼈저린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윤리도덕이나 정치제도들은 중국전통을 계속 유지하면서 과학기술만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른바 '중체서용'이라는 말에 잘 표현되어 있다. 중국전통을 근본으로 하여 서양세력에 침략당해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지만 내심으로는 아직까지 그들의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를 볼 수 있다.
  양무운동은 채평천국군 세력이 약화되고 있던 1860년대 초부터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는 1894년까지 계속된다. 양무운동을 담당했던 기관은 총리아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에서 실질적으로 힘을 가지고 태평천국의 난을 제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중국번과 이홍장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양무운동은 보텅 3단게로 구분한다. 제1단계는 1860--1872년까지의 시기로, 주로 군수공업 중심의 개혁이며, 제 2단게는 1872--1885년까지로 무기와 아울러 조선관련 기업, 근대적인 운수 통신시설, 전신 부설 등이다. 제3기는 1885--1894년까지로 이홍장의 북양해군이 편성되고 장지동이 한양제철소를 건설하는 등 근대산업시설과 군사조직이 강화되었다.
  제1단게는 청의 황제인 동치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함풍제가 외국세력을 피해 가 있었던 열하에서 1861년에 죽자 측근 신하들은 그의 다섯 살 난 아들을 황제에 올렸다. 이 사람이 동치제다. 그러자 동태후(함풍제의 정부인)와 동치제의 친어머니인 서태후가 쿠데타를 일으켜 함풍제의 측근들을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했다.
  이때 지배층들에 의해 전개된 개혁운동은 주로 군사기술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의 개혁은 동치제 때 이루어진 것이라 하여 '동치중흥'이라고도 한다. 1862년 증국번이 '안경내군계소'라는 서양식 무기제조 공장을 건설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흥장이 '상해양포국''강남제조총국' 등 무기공장을 만들었다. 이 공장들은 모두 관영으로 국가재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러한 근대적인 군수시설들은 그것을 주도했던 양무파들의 실권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했고, 특히 그중에서 두드러진 인물이 이홍장이었다. 그는 북양대신이라는 직책으로 양무운동을 주도, 상해에 무기제조 공장을 세워 무기와 탄약을 생산했으며, 군함을 만들기도 했다. 이홍장은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그의 지휘 아래 있던 해군의 전력강화를 꾀했고, 1888년 북양해군을 만들엇다. 그뒤 양무파의 또 다른 실력자였던 좌종당은 남양해군을 창설했다.
  이들 양무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국내의 정치, 경제제도 등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목표는 근대기술을 도입하여 전통적인 중국사회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들은 태평천국군과 싸울 때는 외세에 의존하기도 했다. 이홍장의 외국들에 대한 정책은 타협과 양보였다.
  그러나 군대의 전력강화와 산업의 성장으로 나라를 부강하고 안정되게 하려는 그들의 노력이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계기가 닥쳐왔다. 그것이 바로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일본과 싸웟던 청일전쟁(1894)이다. 청나라는 군사력을 강화시키면서 가상적국으로 일본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일본과의 싸움이 시작되자 그동안 많은 노력을 들여 육성했던 이홍장의 북양함대가 일본해군에게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이홍장의 양무운동이 별다른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다. 그전에 좌종당의 남양해군도 인도차이나 반도로 침투하는 프랑스와 맞서 싸운 청, 프전쟁에서 패한 바 있었다.
  양무운동 과정에서 서양 여러 나라는 양무파들이 운영하는 공장에 기술자를 파견하고 기계를 수출했으며, 차관을 주어 경제적으로 그들의 지배 아래 두었다. 아울러 서구열강은 중국 내륙 깊숙이 들어가 상품을 팔고 원료와 농산물을 사들이게 되어, 중국은 서양의 완전한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주권을 서양세력에 뺏긴 반신민지 상태에 떨어지게 되었다. 실용적인 서구의 과학기술 도입을 통한 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주권을 강화시키지도 못했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도 성공하지 못한 셈이었다.

   

72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중국-청, 프전쟁과 청일전쟁(1894년)


  몽고제국을 제외하면 청나라는 중국대륙을 지배한 세력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다. 그들은 그들의 근거지인 만주와 중국대륙은 직접 지배했으며, 정복하여 굴복시킨 주변 나라들은 직접지배 방식이 아닌 조공관계의 의한 간접지배 방식을 택했다. 조공국의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월남과 한반도 조선이었다.
  서양세력들은 해외 식민지 개척에 핏발을 세우고 있었고, 종이호랑이로 무력해져가는 청제국의 드넓은 영토나 조공국은 서양세력이 노리는 군침나는 먹이감이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는 중국대륙을 지키기도 힘겨웠으며, 조공국들은 하나씩하나씩 외국의 손에 넘어갔다.
  우선 월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로 넘어가게 된다. 19세기 중반의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하는 제2제정인데, 그는 프랑스 국내문제에서는 무능하면서도 외국에 대한 침략을 매우 빈번하게 했던 인물이다. 이때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다. 당시 월남은 완조의 이배하에 있었으며 청나라와는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침입하여 1862년 베트남의 왕조인 완조와 사이공 조약을 맺고, 야금야금 땅을 먹어 들어가 1873년경에는 통킹 지방의 송코이 강 하류 델타 지대를 거쳐하노이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완조로 하여금 청조에 대한 조공관계를 부인하도록 했다. 이것은 베트남을 프랑스의 식민지로 삼으려는 의도였다.
  이때 국경지대에서는 유영복이라는 사람이 흑기군이라는 사병을 거느리고 중국의 운남지방과 배트남 사이에서 통행세를 받아 먹으면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완조의 원조를 받아 베트남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군대를 공격했으며, 1881년 하노이로 근거를 옮겼다. 그러자 프랑스에서는 이 세력을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1882년 하노이를 점령했다.
  하노이가 점령되자 청을 월남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프랑스 군을 밀어내기 위해 운남, 광서 지역의 청군을 베트남 북쪽으로, 남양함대를 통킹 만으로 이동시켜 프랑스와 한판 싸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청의 움직임에 아랑곳하지 않고 월남에 압력을 넣어 84년에 앞서의 조약을 수정하여 새로운 조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실질적으로 프랑스가 월남을 독점지배한다는 것이었다.
  84년 8월 프랑스는 월남으로부터 북상하여 대만의 포대를 공격하고 이어 복건성의 복건함대를 대파했다. 이때 중국의 강력한 이홍장의 북양함대는 이 전투에 가담하지 않은 채 뒷짐을 지고 있었다. 청나라는 프랑스의 도발행위에 대항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중국인들의 프랑스에 대한 감정도 격화되어 홍콩이나 광동의 곳곳에서 프랑스 교회나 프랑스 삼품을 불질렸다. 프랑스는 대만에 공격을 가해, 기륭을 공격하고 대만을 봉쇄했으며, 85년에는 팽호도를 점령했다.
  전세가 중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그 틈에 청 정부 내에서 실권을 쥐고 있던 서태후는 관리들 중 주전론자들보다는 주화론자들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프랑스와의 협상을 원했다. 양국은 결국 1885년에 '파리의전서'에 합의했고 천진조약이 맺어졌다. 청조는 월만에 대한 종주권은 완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 조약으로 월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편입되고 말았다.
  조선 역시 월남과 비슷한 형태로 청에 조공을 바치는 조공국이었다. 1860년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까지는 외국과의 정식 국교를 열지 않는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조선에 압력을 가해 문을 열게 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은 그들이 미국에 당한 방법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했다. 해안측량을 한다는 명목으로 '운요 호'가 조선의 해안을 오르내리자 조선 수비대가 이 배를 공격했으며, 일본은 그것을 빌미로 조선에 압력을 가해문을 열게 했다. 이른바 1876년의 '강화도조약'이다.
  그 뒤로 여러 나라들이 조선과 정식으로 조약을 맺어 조선에서의 이권 다툼에 끼어들었다. 일본은 조선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일부 세력에게 군사력을 지원해주기도 했으나 청나라가 행사하는 종주권을 완전히 뺏지는 못했다.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고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청을 격파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마침내 그 기회는 1894년에 왔다.
  1894년 2월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조선정부는 도저히 자력으로는 동학농민군을 당해낼 수가 없게 되자 청나라에 군대파견을 요청했다. 청나라는 조선에 약 3천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면서 일본에게 통보했다. 이미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사이에 맺어진 천진조약에 의하면 두 나라의 군대가 조선에 동시에 물러나고 어느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될 경우 상대방에게 통보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일본이 이를 놓칠 리 없었고 즉시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두 외국군대가 들어오게 되자 동학농민군측에서는 원치 않는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정부와 협상, 외국군대를 내보내고 개혁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조건으로 점령하고 잇던 전주성에서 농민군을 해산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두 나라에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청나라에게 조선의 내정개혁에 개입하자는 제안을 내놓고는 청이 가담하지 않으면 일본 단독으로 하겠다고 선언했다. 청의 원세개는 우선 철병을 주장했으나 일본은 결코 물러날 의사가 없었다.
  마침내 일본은 속셈을 드러내어 청에게 조선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공격하겠다는 뜻을 분명이 했다. 1894년 7월 25일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인천 앞바다에서 청나라 함대를 공격했다. 육지에서는 충청도 성환에서 청, 일군이 맞부딪쳐 싸웠으나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황해에서는 양국의 함대가 대격전을 벌인 결과 청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홍장이 수십 년간 애써 육성했던 막강 북양함대는 일본해군의 공격에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참패하고 말았다.
  결국 청과 일본사이에 배상금 지불, 조선의 독립, 대만과 요동의 할양 등의 내용으로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졌다. 조선이 독립국임을 밝힌 이 조약을 조선이 더 이상 청의 속국이 아님을 표현하는 다른 형식의 말이었고, 결국 일본이 조선을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을 청이 인정한 것이었다.

   

73 백일천하로 끝난 개혁파의 꿈-변법자강운동(1898년)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등 세계의 대부분의 침략세력들이 중국에 들어와 이권을 나누어가 졌고, 중국은 외국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외국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힘을 키우려 했던 양무운동도 청일전쟁의 패배로 성공하지 못했음이 드러났다.
  중국의 이권은 계속 외국에게 넘어갔다. 중국 남부지방은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은 프랑스가 광산개발, 철도건설 등의 이권을 가져갔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후 청은 러시아에 접근, 삼국간섭을 끌어내 일본의 압력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러시아 역시 만주지역 철도건설 등의 이권을 챙겼으며, 아울러 여순과 대련을 강압적으로 조차했다. 독일은 산동을 중국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1898년경에 동북지역은 러시아, 양자강 유역은 영국, 강남의 광동, 광서, 운남은 프랑스, 복건은 일본, 산동은 독일이 각가 세력권으로 확보했다.
  서태후와 이홍장 등이 중심이 되어 수행한 청일전쟁의 패배는 상대적으로 그 반대파라고 할 수 있는 광서제, 장지동 등 황제파의 발언권을 높일 수 있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홍장에 의해 주도되었던 양무운동의 한계도 역시 청일전쟁의 패배로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제 지배층 내부에서는 좀더 근본적인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한 움직임을 주도했던 대표적 인물이 강유위, 양계초 등이었다.
  강유위는 공자의 사상을 새롭게 해석하여 자신의 개혁사상을 합리화시켰다. 즉 "옛것에 비추어 오늘의 제도를 고친다"는 말을 빌어온 것이다. 그는 또한 (대동서)라는 책 속에서 모든 인류가 평등한 조건으로 살 수 있는 이상사회를 구상하기도 했다. 그런 사회가 바로 대동사회라는 것이다. 1895년 북경에서 과거시험이 있었고 강유위는 이 시험에서 합격, 진사가 되어 관료의 길에 들어섰다.
  관료의 길에 들어선 강유위는 본격적으로 그의 생각을 실천해나갔다. 강유의를 중심으로 하는 변법 개혁파들은 (만국공보)를 간행, 자본주의 체제의 도입, 입헌정치의 실시, 유럽의 학술과 교육의 도입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북경에서의 변법파의 활동은 서태후가 중심이 된 수구파들의 반격에 의해 저지되었고, 강유위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상해로 잠시 피했다. 상해에서 그는 황준헌, 장건 같은 당대의 개혁론자들과 어울려 중국의 개혁정책을 모색했다. 변법파의 개혁안은 북경보다는 일부 지방에서 더욱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각 지역의 실력자들은 그런 움직임을 저지했다.
  변법파들의 개혁안이 정책적으로 시행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된 것은 독일이 교주만을 점령한 사건이 발생했던 1897년 말 이후였다. 강유위는 황제에게 다섯 번째 상서를 올려 법과 제도를 고쳐나가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법을 다시 한번 제시했다. 당시 황제인 광서제는 강유위 일파의 개혁안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다. 1898년 제도의 개혁 들을 주로 하는 개혁세력들과 함께 제도를 새롭게 한다는 의미 '변법'을 추진하겟다는 선언을 했다. 1898년의 이 개혁을 제도의 개혁을 통해서 나라를 강하게 만든다는 의미로 '변법자강운동'이라고 하기도 하며, 무술년에 있었다고 하여 '무술개혁'이라고 하기도 하낟. 그해 6월 강유위, 담사동, 황준헌, 양계초 등이 관서제의 부름을 받았다.
  광서제는 이러한 개혁세력들에 의해 구상된 정책들을 정리하여 100여 항목이 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 몇 가지 중심적인 개혁내용은 과거제 개혁, 새로운 학교제도의 도입, 신문, 잡지 발행, 인재등용, 농공상업 진흥, 우편사업, 육해군의 근대화 등이다.
  광서제는 변법파의 활동에 제약이 되는 고위관리들을 해임시켰다. 그들은 대부분 서태후에 충성하는 자들이었다. 9월에는 이홍장이 총리아문대신의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러한 광서제의 과감한 조치는 서태후와 그의 일파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서태후는 자기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군사 지휘관들에게 명령하여 군대를 이동시켰다. 이러한 움직임은 광서제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광서제는 마침내 당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인 원세개에게 기대고자 했다. 개혁파 담사동은 원세개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서태후가 머물고 있는 이화원을 호위하여 서태후파의 활동은 제한시켜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러나 원세개는 약삭빠르고 야심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서태후측과도 긴밀하게 관게를 맺고 있었다.
  개혁파들의 계획은 고스란히 서태후에게 보고되었다. 9월 21일 아침 일찍 서태후는 광세제의 침실로 찾아와 모든 왕실의 일과 국가의 정사를 자신이 담당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황제 광서제는 유폐되었고, 개혁파들은 숙청당했다. 강유위 등 몇 명은 보수파의 공격을 간신히 피해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으며 당사동 등은 붙잡혀 처형되었다. 이른바 무술정변이다. 무술개혁이 시작된 지 103일 만에 개혁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74 서양귀신들을 몰아내고 청조를 지키자-의화단 운동(1899--1900년)


  아편전쟁 이후 청은 계속 외국의 강압에 의해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으며 중국의 이권은 잇따라 강대국의 손으로 넘어갔다. 청조에 의한 개혁정책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어려운 백성들의 생활은 개선될 가능성을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가뭄과 기근 또는 황하의 범람과 같은 자연재해가 이어졌다.
  서양세력의 침략행위는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특히 서양세력의 침략과 함께 들어온 크리스트교는 침략자의 종교로 인식되어 상당수의 중국인들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선교사의 살해를 이유로 프랑스 군대가 영국군대와 함께 중국을 공격했던 제2차 아편전쟁은 크리스트교에 대한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크리스트교의 활동은 곧 침략자들의 활동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여 백성들의 반감을 사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반감은 조직적인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이것을 '구교운동'이라고 한다. 이 운동은 유교질서의 유지를 원하는 보수적인 관료와 지방의 실력자인 향신층들이 주도했다. 그리고 그 비밀결사조직도 주도세력 중 하나였다. 중국에서의 종교적인 비밀결사조직의 뿌리는 매우 깊은데, 미신적인 종교를 바탕에 깔고 있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이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드러나게 된 것은 청일전쟁 이후 독일, 러시아, 영국, 프랑스가 조차지를 획득하고 일본이 만주에서 군사활동을 전개하려던 1890년대 말이었다. 이들은 지주들이나 외국세력에 굴복하는 태도를 보이는 관리들을 공격했으며, 서양 선교사나 중국인 크리스트 교도를 죽이거나 외국공관을 습격했다.
  1898년 사천성 동부지역에서 6천여 명의 무리를 끌고 교회와 교민들의 토지 및 재산을 몰수하는 등의 활동을 했던 여동신이라는한 구교운동 지도자는 다음과 같이 그들의 뜻을 밝히고 있다.
  "양인들이 통상무역과 야소의 전교를 이용하여 우리 농민들의 생계와 의식수단을 빼앗았으며, 아편으로 우리 땅을 더럽혔으려...,조정을 모욕하고 우리 도시를 빼앗고...상해, 대만을 빼앗았다... 이제 우리들은 의롭게 일어서서 국가의 수치를 씻고자 한다"
  이러한 구교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의화단운동으로, 당시에는 권비의 난이라고 했다. 이는 그들이 권법을 익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권법을 수련했으며, 무술이 깊어지면 총알을 피할 수도 있고 하늘을 날 수도 있다고 믿었다. 이 무리들 안에는 여자들도 있었으며, 그들은 부채를 흔들며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식으로 무협지나 영화에 표현되기도 한다. 그들은 예수에 대항하여 옥황상제에서부터 손오공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전통신앙에서 여러 숭배대상을 찾아냈다.
  의화단 세력은 1895년경부터 산동성 서남부를 중심으로 산동, 강소, 하남, 안휘성 등을 무대로 활동했다. 1897년 의화단 세력은 중심부를 산동성 서북 및 하북성 남부로 옮기고 세력도 보강하여 농촌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으며 조직을 강화했다. 주로 여기에 가담한 백성들은 가난한 농민, 일자리가 없이 떠도는 사람들, 수공업자, 항구 등에서 일하는 운수 노동자 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하나의 조직체계 안에서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각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여러 세력들이 있었다.
  청조의 관리들 내부에서는 이러한 의화단이 활동에 대해 일치된 의견을 가지지 못했다. 보수적이고 외국을 배척하는 입장에 있는 강경파들은 의화단을 지지하는 쪽이었고, 서양세력과 연결을 가지면서 그들의 힘을 빌어 개혁을 하고자 했던 양무파들은 의화단의 활동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했다. 청조의 군사 실력자인 원세개는 의화단을 공격했고, 독일인 장교에 의해 훈련된 정예부대가 의화단 공격에 앞장섰다.
  1900년 5월 의화단 세력은 천진과 북경에 들어가 모든 외국세력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하면서 외국공사관이 모여 있는 지역을 호위했다. 그 당시의 의화단 세력은 약 2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등의 서양세력들은 청조에 2개월 이내에 의화단을 진압할 것을 요구하고 청조가 진압하지 못한다면 서양 연합군을 결성하여 이를 진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청조에서는 의화단을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으나 번번이 의화단에 패했다.
  특히 당시 청조의 실권자인 서태후는 의화단의 진압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서양 서러 나라들은 서태후가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야 하며 그녀에 의해서 폐위되었던 광서제가 복위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전했다. 이에 서태후는 강력히 반발, 의화난을 북경에 불러들여 활동하게 하는 한편, 열강에 선전포고를 했다. 북경에 들어온 의화난의 거리를 떼지어 다니면서 서양과 관계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파괴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들은 공동으로 청나라에 군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여기에 일본, 이탈리아, 독일 등이 가담한 8개국 연합군이 6월 17일 천진에 공격해 들어왔다. 뒤를 이어 그들이 북겨을 공격해들어오자 당황한 서태후는 재빨리 외국 공사관에 "의화단은 발란세력이고 이를 진압한다는 것이 청의 입장이다. 그런데 처리를 잘못하여 외국공사와 선교사, 크리스트 교 신도들을 보호하지 못했으므로 책임지고 스스로 힘으로 의화단을 진압하겠다"는 통보를 했다. 그러나 서양 연합세력은 8우  북경을 점령하고 북경은 제국주의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파괴, 약탈당했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서안으로 피난갔다.
  1901년 9월 청은 제국주의 침략세력과 '북경 의정서'를 맺었다. 이 조약은 회세에 반대하는 관리들의 처형, 외세배척운동에 대한 철저한 탄압, 중국 포대의 철거, 북경의 공사관이나 교통의 요지에 외국군사 주둔 허용, 배상금의 지불 등의 내용이었다. 북경 의정서에 이르러 청은 더 이상 자력으로 중국을 통치할 수 있는 위치에 머무르지 못하게 되었고,  중국은 어느 한 나라의 확실한 식민지가 되지는 않았으나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국권이 박탈된 반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75 중국혁명의 아버지 손문-중국동맹회 결성(1907년)


  중국대륙의 공산당이나 대만의 국민당을 포함하여 모든 중국인들에게 국부로 받들여지는 사람이 손문이다. 그의 1866년 광동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동성은 당시 서양세력들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1866년은 태평천국이 중국을 휩쓰다 막을 내린 2년 뒤다.
  손문은 어렸을 때무터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10세 때 마을의 서당에서 공부했다. 12세 때는 형이 있는 하와이로 건너가 그곳에서 서양학문을 접하게 된다. 그의 형은 소작인이었는데 1871년에 하와이로 이민을 가 농장경영에 성공했다. 손문은 얼마 후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1886년부터 의학을 공부하고 1893년에 광주에서 의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의술을 베푸는 것보다는 중국의 현실개혁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94년 하와이로 건너가 중국혁명을 위한 흥중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홍콩에 흥중회 본부를 설치했다. 그를 비롯한 혁명가들의 목적은 만주족을 몰아내고 중국에 새로운 민주주의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해 손문과 그의 동지들은 광주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했으나, 지원되기로 되어 있던 무기가 제때에 도착하지 않은데다가 사람들의 이동계획이 어긋나 봉기는 연기되었으며 몇 명의 동지들이 청조의 감시망에 걸려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손문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의본으로 피신했다. 청은 그에게 많은 현상금을 걸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해외의 중국인(화교)들에게 혁명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여행 중 영국에 이르렀을 때 청조의 공사관 관리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구사일생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여행을 또한 손문으로 하여금 서양 자본주의의 눈부신 발전, 그리고 그 사회가 안고 있는 극심한 빈부의 격차를 동시에 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고 그의 새로운 중국사회 구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의 중심사상인 삼민주의는 이 여행에서 큰 틀이 잡혀졌다.
  1895년의 혁명계획이 실패한 이후 1900년 홍콩에서 다시 혁명계획을 세워 광주와 혜주 등에서 동시에 봉기할 것을 결정했다. 영국에서 파견한 홍콩 총독, 일본에서 파견된 대만총독도 이 거사를 지원하기로 했으며 양관총독 이홍장도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홍장이 혁명세력과의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광동과 광서에서 계획된 봉기는 단해오디지 못했다. 그런데 이같은 사정을 연락받지 못한 혜주의 혁명세력은 계획대로 정사량의 지도 아래 봉기, 창나라 군대와 싸워 크게 이겼다. 그러나 예정되어 있던 광주지역에서의 봉기가 실패하면서 정사량의 혁명부대는 고립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1개월 정도 청의 군대와 싸우다 성과없이 해산하게 되었다.
  몇 차례의 지역적인 봉기실패는 혁명세력들로 하여금 보다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혁명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당시 중국 국내와 해외에는 무수히 많은 혁명조직들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단체로 호남성 출신 황흥과 송교인 등이 중심이 된 화흥회, 절강성 출신의 채원배, 장병린 등이 중심이 된 광복회 그리고 손문이 이끌었던 흥중회가 1907년 일본에서 모여 단일 혁명조직인 중국동맹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중국동맹회 회원은 중국 여러 성에서온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각 성의 조직활동 책임자기 정해졌다. 그들은 도쿄에 본부를 설치하고 기관지인 (민보)를 발행하면서 중국 내의 비밀결사조직과 연결, 무장봉기를 계획했다.
  동맹회의 이념은 손문에 의해 제시된 삼민주의였다. 삼민이란 민족, 민권, 민생이다. '민족'은 민족주의적인 한족 국가를 세우는 것이고, 이는 제국주의 외국세력에 묶여 있는 청조를 타도함으러써 완서오딘다. '민권'은 인민들의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될 것이다. '민생'은 인민들의 안정적인 생활을 갖추어줄 수 있는 경제정책인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정책을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소유권을 고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모든 개혁세력이 이 이념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세력들은 서로 생각이 다른 부분들이 많았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를 놓고 혁명파와 입헌파로 갈라진다. 먼저 민족주의의 문제다. 우선 정치체제적인 문제에서 입헌파는 청조 타도를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만주족의 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입헌군주제 정부를 세울 것을 구상했다. 그에 비해 혁명파는 만주족의 청조가 한족을 억압하여 ㅗ이국에 굴욕적이기 때문에 이를 타도하지 않고는 진정한 개혁을 이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다음은 민권에 관한 문제인데, 예를 들어 입헌파인 양계초를 중국인민은 무지하여 공화제를 실행할 능력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입헌군주제 아니면 서양식의 계몽군주제 비슷한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혁명파는 당연히 중국인민들의 수준에서 공화제는 가능하며 혁명운동 자체가 인민들의 민주주의적인 의식을 깨우쳐나가는 과정이라고 주상했다.
  세 번째로 민생주의의 있어서 입헌파는 토지국유 및 토지개혁에 절대반대의 입장이었다. 토지소유권은 신성 불가침이기 때문에 이것을 침해하는 것은 인민들로 하여금 부자가 될 꿈을 갖고 열심히일하려고 하는 생각을 감퇴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파는 토지가 소수에 의해 독점되는 것은 불합리하며 땅을 가진 사람들이 일하지 않고 농민들의 피땀을 빼앗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입헌파의 중심인물이 양계초 같은 지식인들이다. 그러나 입헌주의자들의 사상으로는 중국의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 손문 등은 중국동맹회로 결집하여 혁명을 꿈꾸게 된 것이다.
  입헌파의 중심인물이 양계초 같은 지식인들이다. 그러나 입헌주의자들의 사상으로는 중국의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믿는 손문 등은 중국동맹회로 결집하여 혁명을 꿈꾸게된 것이다.
  혁명파는 1907년 이후에도 10여 회에 결치는 무장봉기를 시도했으나 모두 큰 성과 없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혁명의 불길은 의외로 다른 곳에서부터 치솟게 된다.

   

76 무창에서 솟은 혁명의 불길-무창봉기 발발(1911년)


  손문을 비롯한 혁명세력은 1900년대 여러 차례의 무장봉기를 시도하지만 큰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혁명의 불길이 거세게 일어난 계기는 의외로 청조의 철도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철도는 건설과정의 이권이나 건설 이후 이용과정에서의 효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근대시설이었다. 중국에서의 철도는 관영으로 건설되다가 민영화 요구에 밀려 민영화되는 경우가 있었다. 제국주의 침략세력들도 철도건설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청조는 1909년 호분, 호남, 두지역의 철도부설에 필요한 경비를 외국의 차관도입으로 조달하여 건설하고자 했다. 물론 이것은 총조의 자율적인 의사는 아니었다. 이에는 서양세력들이 철도건설과 그 운영권에 개입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외국은 차관을 제공함으로써 철도건설에 참여하려고 했던 것이다.
  차관의 도입을 통한 철도건설은 곧 철도가 국유화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청조가 철도 국유화정책을 발표하자 철도건 것을 추진하고 있었던 지방 실력자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청조는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외국과의 차관계약에 서명했고 민간인 철도회사를 접수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등은 이 차관계약을 통해 호북, 호남 일대의 철도부설권을 손에 넣었고 철도가 연장되어 건설될 경우 역시 그들이 우선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철도국유화 반대운동이 여러 지역에 일어났다. 최초의 집회는 장사에서 약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해오디었다. 호남성의 관리들과 철도회사는 국유화령을 취소하고 민영으로 계속할 것을 요청했으나 청조는 듣지 않고 더욱 강경한 자세를 보이며 시위대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갔다. 광동성에서도 역시 국유화령에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사천성에서는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분노한 시위군중들은 아예 청조 타도 운동으로 그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철도국유화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했던 시위는 청조의 탄압에 의해 잠시 주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상황을 새롭게 몰아가게하는 사건이 무창에서 발생했다. 무창도 역시 철도국유화 반대운동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사천성의 시위대에 총격이 가해지면서 반발이 더욱 거세어지자 청조는 무창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사천성의 시위진압에 동원하려 했다. 그런데 무창에 있던 군대에는 이미 혁명세력이 침투해 있었다. 무찬 군대 내의 혁명 중심인물들은 혁명 거사일을 1911년 10월 6일로 잡았다. 그러나 준비가 부족해 계획일이 늦추어지는 가운데 봉기 중심인물의 하나인 손무가 폭탄을 제조하다가 폭발사고가 발생하면서 혁명당원의 명부와 서류 등이 발각되어 이것이 청조에 보고되어싿. 청조는 혁명계획의 주동자 체포에 나섰고 거사하기도 전에 지도부 대부분이 잡혀 총살되었다.
  그러나 지도부를 잃은 혁명파 군인들은 10월 10일 밤 7시를 기해서 들고일어나 그들에 반대하는 장교들을 죽이고 무기고를 습격, 점령했으며, 다음날 호광총독 관청을 장악함으로써 무창은 혁명의 도시가 되엇다. 무창에 이어 한양과 한구의 신군이 혁명국에 합류함으로써 혁명운동은 마른 들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청은 무창의 봉기소식을 듣고 2개 사단을 보내 이를 막게 했으나 혁명군에게 격파당하고 말았다.
  무창에서 시작된 혁명운동 소식은 곧 중국 전지역으로 빠르게 퍼졌으며 1달여 만에 13개 성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하북성, 하남성, 산동성만이 예외였을 분이었따. 이렇게 빠른 속도로 혁명의 물결이 휩쓰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는 청의 지배에 대한 반감이 중국인민들 사이에 뿌리깊게 박혀 있었고, 혁명세력들이 군대내에 손길을 뻗쳐 조직적인 사업을 해놓은 결과였다.
  한때 혁명세력이 중국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혁명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한구와 한양이 청군에 의해 함락되어 혁명세력이 위기에 차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세를 다시 혁명세력 쪽으로 돌리게 한 사건이 남경의 장악이다. 여러 성의 독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남경은 여전히 청의 군사력 아래 있었는데, 이 남경이 혁명세력에 의해 장악된 것이다.
  11월 15일 독립을 선언한 각 성의 대표는 상해에서 모여 대표회를 무창에 설립할 것 등을 결의했고, 무창으로 옮긴 혁명세력의 성대표들은 임시정부 구성안을 발표했다. 또한 청의 군사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원세개가 혁명세력에 가담한다면 그를 임시총통에 추대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원세개는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세개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당시 독립한 성의 대표들 중 상당수가 혁명파보다는 보다 온건한 입헌파가 중심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점에서 혁명세력의 상징인 손문이 12월 25일 귀국하여 상해에 모슴을 나타냈다. 손문은 혁명세력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29일 임시대총통 선거에서 손문은 각 성대표들의 압도적 지지로 이시총통에 선출되었다.
  1912년 1월 1일 남경에서 정식으로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의 혁명 정부가 선포되었다. 손문은 "인민의 공의를 취하고 중을 위해 복무한다"는 총통선서를 했다. 드디어 2천여년 동안 지속되어왔던 절대 군주제도가 무너지고 최초의 근대적인 공화정 정부가 중국에 들어서 인민들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 것이다. 남경 임시정부는 임시대총통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혁명정책을 발표하였다.
  1. 아편의 재배 및 흡연 금지
  2. 여성의 전족 금지
  3. 가혹한 형벌의 금지
  4. 인신매매, 도박의 금지
  5. 천민신분의 해방
  그러나 중화민국의 장래가 마냥 순탄한 길에 들어선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청나라의 신군의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인 원세개의 영향력은 아무도 무시할 수 없었다. 외국, 특히 영국의 경우 민족주의적인 혁명세력이 움직이는 중화민국보다는 원세개를 중국의 대표로 세우고 싶어했다. 중국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데는 민족주의적인 혁명파보다는 민족의식이 희박하고 개인적 야심이 가득한 원세개가 훨씬 다루기 쉽다는 판단에서였다. 남경의 중화민국 정부내에도 입헌파 등은 원세개와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다.
  원세개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던 혁명정부에서도 결국은 원세개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원세개는 청조를 멸망시킨다는 조건으로 남경정부의 대총통에 취이하기로 타협이 이루어져싿. 청은 원세개에 혁명세력을 진압할 것을 명했지만 원세개는 더 이상 청조에 충성을 바치기를 원치 않았다. 원세개는 청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를 퇴위시키고 손문이 사임한 남경정부의 총통에 취임했다. 혁명은 다시 한걸음 후퇴하게 된 것이다.

   

77 실현되지 못한 공화국 황제의 꿈-원세개의 중국 통치(1912--1916년)


  1911년 청나라 타도를 외치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실질적인 군사력을 가지지 못한 총나라로서는 원세개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원세개는 청조의 내각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원래 이홍장의 밑에서 성장했으며, 이홍장이 죽은 후 그뒤를 이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곧 북양군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청나라가 점차 쇠약해지는것과 반대로 그는 독자적인 군대를 더욱 강화해나갔다. 원세개는 청의 황제에 충성을 바치는 충성스런 신하는 아니었다. 도리어 그는 황제의 지위를 넘보고 있었다.
  원세개는 화평을 내세우면서 혁명세력을 공겨했다. 그의 군대는 신해혁명의 핵심지역 중의 하나인 한구와 한양을 점령했다. 원세개의 공격으로 혁명군이 밀리고 있었으나 혁명의 불길은 전국을 휩쓸었고, 원세개는 이런 불길을 그의 군사력만으로는 누를 수 없음을 알았다. 혁명세력도 신식군대를 장악하고 있는 원세개를 완전히 격퇴할 수 없었다. 결국 원세개와 혁명군 사이에 "청조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조건으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혁명군은 청조를 폐지하는 성과를 얻었고 원세개는 새로운 정부의 총통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1912년 원세개는 임시총통인 손문이 사임한 후 총통 자리에 앉았다.
  남경의 중화민국 정부 총통에 취임한 원세개는 서서히 그의 야심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의 야심은 황제였다. 그는 중화민국의 의회활동을 막았다. 혁명파의 중심인물로서 의회를 통해 국가를 이끌어 나가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송교인이 암살되자 혁명파는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원세개에 대항하는 새로운 싸움을 벌여야 함을 감지했다.
  원세개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던 일부 성의 도독들이 중심이 되어 1913년 7월 원세개 타도를 위한 사령부를 설치했다. 이것이 신해혁명에 이은 제2혁명이다. 그러자 원세개는 단기서, 풍국장 등으로 하여금 혁명세력을 공격, 혁명파의 의도를 저지시켰다. 그해 10월 대총통 선거가 실시되었고 의원들은 원세개 친위세력들의 포위 속에 갇혀 원세개를 총통으로 선출했다. 이듬해 1월 원세개는 약법 회의를 열어
  1. 외교에 관한 권한은 총통의 전권이다.
  2. 선전포고, 강화조약도 참의원의 동의 없이 할 수 있다.
  3. 중요한 관직의 임명은 총독의 전권이다.
라는 법을 정했다. 이는 명목만 총독일 뿐 전권을 행사하는 황제나 다름없었다. 이제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는 일만 남게 된 것이다.
  원세개가 황제의 꿈을 꾸며 중국을 통치하던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이때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독일군을 공격했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독일이 중국에 가지고 있는 이권을 차지하겠다는 의도였다. 원세개 정부는 독일과 일본이 중국 내에서 싸우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독일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중국 내의 일부 지역을 장악한 다음 원세개 정부에 그 유명한 '21개 조항'을 요구했다. 그 조항에는 독일이 갖고 있는 산동성의 이권, 여순, 대련의 조차권, 남만주 일대의 철도부설권 연장, 한양 등지의 철광, 탄광 경영권을 일본이 갖겠다는 것이다.
  원세개 정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였다. 일본이 원세개의 개인적인 야심을 만족시키는 반대급부를 주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은 21개조 요구 협상을 벌이면서 원세개에게 (만일 성의를 가지고 교섭에 응한다면 일본정부는 대총통(원세개)이 다시 더 높은 단계에 오르는 것을 기대한다)라는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본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자기가 황제가 되는 것을 일본에게 양해받는 교환조건이었다.
  1915년 10월 원세개는 국민에 의해 추대되는 식으로 황제에 오르기 위한 '국민대표대회조직법'을 공포했다. 그러나 원세개의 황제가 되고자 하는 꿈은 대부분의 중국인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외국 여러 나라들도 찬성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21개조 요구를 들어주는 대가로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을 지지하기로 했던 일본조차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욕심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1916년 1월 1일로 황제가 된다는 것을 선포했다.
  전국에서는 다시 원세개를 타도하자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원세개를 반대하는 이 전쟁을 제3차 혁명이라고 한다. 지방에서의 영향력이 감소되어가는 데에 대해 반발하는 지방실력자들, 그리고 공화국을 지향하고 있던 혁명세력 등이 원세개의 황제취임을 계기로 단결하게 되었다. 물론 원세개에 반대하는 중심세력을 손문 등의 혁명파였다. 혁명군 세력은 국민의 지지를 받고 급속하게 확대되는 가운데 상황이 점차 원세개에게 불리하게 흐르자 원세개의 부하인 풍국장 등이 먼저 나서서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일이 이에 이르자 원세개도 어쩔 수 없이 황제가 아니라는 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황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원세개는 총통 사임 압력까지 받게 되었다. 더욱이 원세개를 완전히 절망에 빠뜨린 것은 그가 가장 믿었던 사천장군 진환이 그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뜻을 보내왔을 때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졸도했으며,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58세의 나이로 욕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황제에의 꿈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78 시련과 승리, 그리고 전락 - 국민당의 등장(1919년)


  중국 현대사의 전개에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공산당과 국민당이다. 국민당은 공산당보다 먼저 창설되었고 1949년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할 때까지 중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정당이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의 싸움은 최종적으로 공산당의 승리로 돌아갔다. 대륙에서는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국민당은 신해혁명으로 성립된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대만으로 가게 된다.
  국민당의뿌리는 19세기 말의 해외 독립활동에서 비롯된다. 중국의 혁명세력들은 19세기 말 주로 일본을 중심으로 조직으로 형성해 나갔고, 그러한 조직은 1907년에 '중국동맹회'로 결집되었다. 1911년 무창의 군대봉기로 댕겨진 혁명의 불길은 마침내 중국대륙을 휩쓸었고, 1912년 중화민국이라는 근대적인 공화국 체제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중국동맹회는 중화민국의 건국으로 해체되고, 중화민국을 이끌어갈 혁명적인 정당으로 창설된 것이 국민당이다. 국민당은 중화민국 아래서 1912년에 실시한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위의 그림은 국민당 전국대회가 끝난 후 대회장에서 나오는 대표들. 가운데가 손문이며, 그 옆에 황홍의 얼굴도 보인다. 손문이 1925년 죽은 후 장개석이 이끌게 된다'
  그러나 국민당이 새로운 중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정당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난관을 넘어야 했다. 중화민국 내에서 혁명파들은 혁명을 주도적으로 실권해나갈 실질적인 힘을 완전히 갖추지 못했고, 보수세력들의 군사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또 다른 보수세력과 손을 잡아야 했다. 중화민국을 구성하는 여러 세력들이 손문의 삼민주의를 지지하여 근대적인 민족 민주국가를 세우는 데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분위기에 밀려 참가한 군벌세력도 있었으며, 이들은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원세개를 총통으로 앉히자는 입장이었다. 원세개는 근대적인 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신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결국 타협이 필요하게 되었고 원세개는 중화민국의 총통의 지위에 올랐다. 원세개는 민족주의적이거나 혁명적인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으며, 개인적인 야심에 가득 찬 인물일 뿐이었다. 원세개에 대항할 만한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혁명세력이 원과 타협한다는 것은 곧 그의 야욕에 희생물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1913년 의회는 해산되고 국민당은 사라졌다. 손문은 일본으로 망명, 다시 일본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했다. 이 조직을 바탕으로 활발한 공작을 하여 제2혁명, 제3혁명을 거듭 일으켰으나 손문과 혁명당은 중국을 장악하지 못했다.
  1919년 겨우 광주지역에 혁명파의 거점을 마련하고 광주에서 다시 국민당의 이름으로 정부를 세우게 된다. 그러나 1910년대 말까지 중국은 원세개의 뒤를 이은 군벌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으며, 국민당은 군벌과의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국민당 내부에는 혁명세력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일부 군벌 세력들까지 가담하고 있었고 이들 반동세력은 끊임없이 국민당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1920년 4월 광주에서열린 중국국민당 비상회의에서는 대총통에 손문을 선출하고 새로운 내각을 구성, 아직까지 세력을 떨치고 있는 군벌들로부터 중국을 되찾기 위한 북벌계획을 세웠다. 특히 1920년 초반 군벌들 내부의 세력다툼이 크게 일어나 전쟁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국민당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마침내 혁명군이 군벌을 잡기 위해 북상을 시작할 때 국민당에 속해 있던 진형명이라는 자가 내분을 일으켜 배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것은 국민당 내부에도 자기의 이해관계나 세력관계에 따라 그 이념에 동조하지 않는 세력들이 다수 섞여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진형명의 반한을 간신히 제압한 국민당은 당의 단결과 중국에서의 주도권 확보를 위해 국제적으로는 소련과 손을 잡고 급속하게 세력을 확대해가는 공산당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이러한 계획은 손문에 의해 진행되었다. 마침내 1924년 제 1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공산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참가하게 되어 모든 힘을 군벌타도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925년 3월 북경의 군벌정부의 협상제의를 받고 북경으로 향하던 손문이 병으로 죽은 후 국민당은 손문 사상의 충실한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장개석이 이끌었다. 장개석은 1920년대 말까지 북벌에 전념하였고, 북벌이 마무리되자 이번에는 공산당을 소멸하고자 했다. 따라서 국공합작은 결렬되었고, 이후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질 때까지 국민당은 공산당을 소멸시키기 위해 5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했다. 공산당은 이 토벌작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대장정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위협이 가속화되던 1936년, 만주의 군벌 장학량에 의해 장개석이 서안에서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서안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과 국민당은 다시 항일 통일전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제2차 국공합작이다. 그러나 장개석은 합작 이후에도 일본과 싸우는 것보다는 공산당의 세력확대를 막는 데에 골몰했다.
  일본이 패망한 뒤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마지막 대결이 벌어졌고 결과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다. 장개석과 국민당은 대만으로 밀려났다. 대만에 자리잡은 국민당은 일당통치로 중화민국을 지금까지 40여년 동안 통치해오고 있다.

   

79 타도! 제국주의 - 5. 4 운동 발발(1919년)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19년/3.1운동 발발, 상해에 임시정부 수립

  1914년 7월 게르만 족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슬라브 족인 세르비아를 침공함으로써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 전쟁은 주로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아시아 등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이들 서양열강들의 식민통치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열강들의 세력변화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은 어느 한 나라에 의해 전적으로 식민지배를 받지는 않았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에게 많은 이권을 빼앗기고 있었다. 독일에 의해 주도된 1차대전에서 연합국에 가담한 중국은 연합국의 승리로 전쟁이 끝남에 따라 전승국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여러 학교들이 휴교하고 천안문 광장에서는 북경대 교수들이 전승축하 강연을 하는 등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분위기가 중국 전지역에 넘쳤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기쁨과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것은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회담에서 중국의 이익이 철저히 무시당했기 때문이었다.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이 평화회담에서 윌슨의 '14개조 평화안'이 전후 처리를 위한 원칙으로 제시되었고, 그 평화안의 핵심적인 내용 중의 하나가 민족자결의 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중국인의 기대를 한껏 부풀게 했다. 중국도 전승국의 위치로 대표단을 파견하여 중국의 요구를 국제사회에 제기하고자 했다. 특히 중국으로서는 독일을 비롯한 열강들이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여러 이권을 되돌려 받으려 했다. 즉, 열강들이 중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세력범위와 이익범위 철폐, 외국군대 경찰의 철수, 영사재판권 폐지, 조차지 조계의 반환, 관세자주권 승인 등을 획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기대는 환상이었음이 금방 드러났다. 파리회담은 정의로운 세계, 평화로운 세계건설을 위한 모임이 아니었다. 패전국 독일이 가지고 있는 이권을 나누어 가지는 자리였고, 전승국들의 이권이나 식민지에 대한 권리는 전혀 양보되지 않았다. 중국측의 요구는 대부분 묵살되었고, 전쟁 전에 독일이 가지고 있던 여러 권리는 일본으로 넘기도록 하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이런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중국의 군벌정부가 보여준 반민족적인 성향, 일본의 치밀한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미 전쟁 전에 일본측이 산동과 남만주 등의 이권을 확보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21개조 요구'가 원세개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1917년 이후 일본은 중국에게 막대한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1918년 중국영토 내에서의 일본군의 자유로운 군사행동, 군사기지 설치 등을 승인하는 '중일공동방적협정'을 비밀리에 맺은 것이다.
  파리 강화회담에서 중국대표의 요구가 묵살되고 일본에게 유리한 결정이 내려지자 중국인들의 분노는 점점 커져갔다. 그 분노는 그들의 이권과 주권을 배앗아가려는 제국주의 열강들을 향한 분노였고, 또한 외세와 결탁하여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던 중국의 군벌세력에 대한 분노였다. 파리 강화회담의 결정내용이 중국에 전해진 1919년 4월 30일 이후 북경에서는 5월 1일 북경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그 결정에 대한 반대표시를 해야한다는 의견이 모아졌으며, 5월 3일 저녁 각 학교 대표들은 파리 강화회담 반대시위를 하기로 결정했다.
  5월 4일 오후, 천안문 광장에서는 약 3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21개조를 취소하라)(청도를 반환하라)(매국노를 타도하라) 등의 구호가 적힌 깃발을 들고 파리 강화회담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말 것과 중국의 이권을 외국에 넘긴 매국노들을 처벌할 것을 외쳤다. 시위대는 그들의 의사를 세계에 전하기 위해 각국 공사관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몰려갔으나 경찰과 군대에 의해 저지당한 끝에 시위대표들이 진정서를 전하는 데 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노한 시위대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매국노로 지목된 조여림의 집을 습격했다. 그는 군벌정부의 교통총장으로 중국의 이권을 외국에 넘기는 등 반민족적인 행위를 한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조여림은 이미 도피한 후였다. 시위대는 조여림의 집을 불태웠다.
  이날의 시위에 대해 중국정부는 학생 30여 명을 체포하고 학생들의 타도대상이었던 조여림 등의 매국노들에게 상을 줌으로써 중국인들의 민족감정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에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항의했고, 이날의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항의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동맹휴학 사태가 전국에 걸쳐 전개되자 그때까지 사태를 관망하던 정부는 마침내 6월에 들어서면서 시위에 가담한 대학생들을 마구 체포하기 시작했다. 체포된 학생의 숫자가 많아져서 북경대학 건물이 임시수용소가 될 정도였다.
  시위대의 체포소식이 당시 중국경제의 중심도시인 상해로 번지자 상해의 상가는 항의의 뜻으로 문을 닫고 노동자들은 파업했으며, 도시의 창녀까지도 이 항의에 동참할 정도였다. 범죄가 넘치던 상해에서 시위가 행해지던 10여일 동안 한 건의 범죄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상해시민들의 애국적인 시위를 잘 말해주고 있다. 부두 노동자들의 작업거부로 일본 화물선은 화물을 싣지 못한채 항구를 떠나야 했다.
  상해의 경제활동이 중단되는 것은 곧 중국경제의 마비를 의미했고 정부도 더 이상 강경책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마침내 중국정부는 전국민적인 항의에 굴복하여 매국노로 지목된 조여림 등 3명을 그 지위에서 파면했으며, 파리에 파견되었던 중국대표로 하여금 파리조약을 거부하도록 했다.
  5월 4일 북경대생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시위는 전국의 많은 국민이 동참하면서 한달여 만에 외국에 굴욕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던 군벌정부로 하여금 주권을 회복하도록 하는 결실을 맺었다. 이 운동은 우리 나라의 3.1운동과 마찬가지로 침략적인 외세에 대한 전국민적인 저항이었다.

   

80 군웅할거하는 군벌들-군벌시대(1910-20년대)


  그때 우리 나라에서는-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 승리
  (동아일보)(조선일보)창간
  1921년/ 자유시 참변

  중국이 외세를 몰아내고 근대적인 민주적 민주국가로 향하는 길목에 넘어야 할 산은 외국세력과 아울러 내부에도 있었다. 그 세력은 이른바 군벌이라는 이름의 보수세력이었다. 원세개의 죽음 이후 약 10여년간은 반민족적 군벌의 시대라고 할 만큼 이들의 세력은 중국을 좌우하고 있었다. 중화민국의 진로가 순탄하지 못했던 요인 중의 하나는 군벌로 대표되는 이들 반민족적 보수세력의 존재였다.
  군벌의 뿌리는 양무운동기의 이홍장의 군사력 강화과정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군벌의 시대라고 하면 원세개가 죽은 후 단기서와 풍국장 둥이 중국정부를 이끌던 시기를 말한다. 그들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각각의 근거지를 장악하였는데, 그 군사력 유지를 위한 막대한 군사비는 농민과 상인에 수취, 또는 폭력적 방법을 통한 약탈 등으로 조달했다. 또한 군벌 자체가 대지주이거나 기업에 투자하는 대자본가이기도 했다. 군벌의 중심부대는 빈농, 도시 유이민, 비적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빈번한 군벌전쟁, 막대한 군비조달을 위한 가혹한 세금수탈 등으로 삶의 근거를 잃은 농민들이 군벌의 용병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장악 지역 내의 백성들로부터 각종 세금을 거둬들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아편의 재배, 판매 등으로 돈을 벌었으며 외국의 차관을 도입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개인적인 권력을 위해 국민을 수탈하거나 외국과 손을 잡고 중국의 이권을 넘기는 대가로 차관을 빌리거나 하여 중국의 근대적 민족국가 수립에 방해되느 암적 존재들이었다.
  군벌들은 열강의 군사정치적 후원을 발판으로 세력확대를 꾀했다. 단기서 정권은 대일차관과 무기원조를 받았으며, 만주의 장작림은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일본의 기대를 배반한 후 열차폭파로 죽음을 당하는 말로를 겪기도 했다.
  군벌은 크게 북양군벌과 서남군벌로 갈라지는데, 북양군벌은 주로 북경을 중심으로 하여 원세개 사후 북경정부의 권력을 장악했던 세력이다. 대표적으로 단기서, 풍국장, 오패부, 장작림 등이 있다.
  20세기 초에 서남지역을 제외한 중국의 대부분 지역은 원세개의 북양군의 세력에 놓이게 되었고, 원세개의 부하인 단기서, 예사충 등이 각 지역의 도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이 원세개가 죽은 후 각 지역의 군벌로서 그 지역을 장악한 것이다.
  각 지역의 여러 군벌 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원세개 총통 때 육군총장의 자리에 있었던 단기서, 직례도독이었던 풍국장 등이다. 원세개의 뒤를 이어 중앙정부를 장악한 군벌은 단기서였다. 그는 자시의 정책에 반대하는 기존의 국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국회를 구성하면서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자기 세력을 국회에 심었다. 또한 그러한 권력강화를 위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빌었다. 물론 일본에게 산동지방의 이권을 넘겨주는 대가였다.
  그 상황에서 단기서에 실질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또 다른 군벌인 직례지역의 풍국장 세력이었다. 결국 두 군벌세력은 타협하여 양 세력에 중간의 위치에 있는 문관출신 서세창을 새로운 총통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남쪽의 혁명세력은 북경의 군벌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을 계속했고, 1919년 2월에는 군벌과 남경정부 세력간에 '남북화의'가 진행되었으나 별소득없이 결렬되었다.
  한편,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회담이 열렸을 때 군벌정부는 일본과 했던 약속과 일본의 외교적인 수완에 말려 산동지방의 이권을 되찾는데 실패하는 무능을 드러내보였다. 이는 중국인민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켜 5, 4운동을 촉발시켰다. 군벌정부의 반민족적 자세에 대한 중국인들의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군벌을 무너뜨리는 데까지 미치지 못했다. 군벌시대는 계속되었으며 군벌 사이의 세력확대를 위한 대립은 마침내 전쟁으로까지 번졌다. 당시 군벌세력을 양분하고 있었던 직례파는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결국 직례파가 단기서의 안휘파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단기서 군벌정권은 붕괴되었다.
  그 후 직례파 군벌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자 그들과 제휴하여 안휘파를 밀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장작림이 이끄는 봉천파가 직례파에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 대립은 1922년 전쟁으로 폭발했고 역시 직례파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제 직례파 군벌은 북경의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한 무력통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들의 싸움은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중국인민들의 생활을 개선시키기 위한 명분을 가진 싸움도 아니었다. 중국대륙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목적이었다. 이 권력다툼의 틈바구니에서 고통당하는 것은 민중들이었다. 군벌의 이와같은 움직임은 중국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군벌간의 세력다툼이 계속되면서 국민들이 더욱 등을 돌리게 되었다.
  군벌세력이 서로 싸우고 있던 이 시기, 혁명세력은 군벌을 바로 몰아낼 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서남지역의 일부 군벌세력들과 연합하는 등으로 그들의 세력범위를 계속 확대했다. 마침내 1926년 국민당의 장개석 사령관은 대대적인 북벌을 선언하고 군대를 몰아 광동으로부터 북경을 향하는 북벌운동을 단행하게 된다. 군벌타도는 곧 신해혁명의 뜻을 잇는 국민혁명의 연속되는 과정이었다. 광동을 떠난 국민당의 북벌군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전진을 계속하여 6개월여 만에 양자강 유역을 장악했다. 군벌들에게 고통당하고 있던 민중들은 당연히 북벌군을 크게 환영했으며, 군벌세력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광동 국민정부 군대는 계속 각지의 군벌들을 격파하면서 북상했고, 1928년에는 동북지방의 유력한 군벌이었던 장작림이 일본군의 계략에 의해 열차여행 중 폭사당함으로써 비로소 군벌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의 완전한 통치 아래 들어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