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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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전(史前, 약170만 년 전 ~ B.C.2070)]
- 중국 대륙에서 문명의 싹이 트다.
중국의 운남성(雲南省) 원모(元謀)에서 발견된 원모인(元謀人) 화석은 지금으로부터 약 170만 년 전의 것으로 이 지역에서 초기 인류가 진화되어 왔음을 증명하는 유적이다. 이후로 약 170만 년의 시간 속에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까지 풍부하고 다채로운 석기 문명 유적은 하 왕조 이전의 중국 옛사람들의 문명 진화 과정을 그려낼 수 있게 해준다.
약 80만 년 전의 섬서성(陝西省) 남전인(南田人)은 최초로 직립하여 걸어다녔던 인류이며, 약 50만 년 전 베이징 주구점(周口店)의 북경인(北京人)은 이미 간단한 생산도구를 제작할 수 있었다. 약 10만 년 전의 섬서성 대려인(大荔人)과 산서성(山西省)의 허가요인(許家窯人)들은 지능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과도기를 완성하였다.
산서성과 하북성(河北省) 등지에서 출토된 구석기 시대의 석기와 산서성 정촌(丁村)에서 출토된 세 선이 돌출된 뾰족그릇은 그 중 가장 전형적인 대표물이다.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약 6천 년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는 농경과 목축이 어로 및 수렵 그리고 채취보다 더욱 중요하게 떠올랐으며, 문양이 많고 찬란한 채도(彩陶)와 흑도(黑陶) 또한 문명의 발전하기 시작했음을 상징한다.
중화문명(中華文明)의 초기적 기초는 모계 씨족 사회 위주의 신석기 시대에서 이미 점점 확정되어 갔다.
[하(夏, B.C.2070 ~ B.C.1600)]
- 전설로만 전해져온 중국 최초의 국가 하 왕조의 시작!
기원전 2070년, 우(禹)가 순임금(舜王)의 직위를 물려받았으니 이는 우왕(禹王)의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 우는 ‘하(夏)’ 지역에 봉해졌기 때문에 그의 부락을 ‘하’라 칭한다. 우왕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계(啓)는 순임금의 선양(宣揚 - 왕의 자리를 타인에게 물려줌) 제도를 타파하고 부자 계승의 왕조 제도를 제정하였으며, 이로부터 중국 역사상 첫 번째의 왕조인 ‘하’가 출연하게 된다.
하 왕조의 정치 조직 제도는 비교적 간단하였는데, 천체사계(天體四季)를 책임지고 관찰하는 희씨(羲氏)와 화씨(和氏), 정사를 관리하는 목정(牧正) 차정(車正) 포정(庖丁), 그리고 전문적으로 죄인을 감금하는 곳인 ‘하대(夏臺)’가 있었다.
하남의 언사(偃師) 이리두(二里頭)의 하 왕조 유적지 안에서 수많은 돌삽, 돌도끼, 조개칼, 나무쟁기 등의 농기구가 발굴되었으며, 또한 적지 않은 청동제의 병기(兵器)와 공구(工具) 등도 발굴되었다. 도기(陶器)로는 작(爵) 정(鼎) 두(豆) 관(罐) 등의 기물(器物)들이 발굴되었다.
하 왕조의 농업은 아주 발달하여 당시에 이미 곡식인 쌀, 보리, 콩 그리고 오이 등의 각종 농산품을 생산했다. 하 왕조는 ‘오십이공(五十而貢)’이라는 세금제도를 실행했으니, 이는 후세의 정전(井田) 제도의 바탕이 되었다.
[상(商, B.C.1600 ~ B.C. 1046)]
- 발전된 청동기 문명을 바탕으로 강대한 국가로 커나가기 시작한 상나라(혹은 은나라)
상족(商族)은 황하 하류 지역에 살던, 역사가 유구한 부락으로 동이족(東夷族)의 한 갈래로 현조(玄鳥)를 토템으로 하고 있었다. 하 왕조 말년에 상족의 세력은 황하 하류에서 발전하여 중류까지 올라와 하 왕조의 통치 지역까지 침투하였다. 또한 강대한 부족 연맹을 건립하여 노예 제도로의 과도기를 시작하였다.
기원전 1600년, 성탕(成湯)은 하 왕조를 멸망시키고 상 왕조를 건립하였다.
성탕은 상 왕조의 건립 이후, 하 왕조 멸망의 교훈을 명심하여 ‘아량으로서 백성을 통치하는 정책’을 실행하면서 농업 생산의 발전에 주의를 기울였다. 동시에 주변 지역을 정복하여 영토를 서부의 강(姜)과 저(氐) 지역까지 확장시켜, 상 왕조의 통치를 점차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상 왕조 말년, 특히 주왕(紂王) 통치시기에 이르러 ‘포락지법’(炮烙之法 - 포락이라는 구리로 만든 뜨거운 형틀 위를 걸어가게 하는 형벌)과 같은 가혹한 형벌과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의 음탕함의 난무, 그리고 잔인무도함 등으로 백성의 강렬한 불만을 샀다. 그리하여 기원전 1046년,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주왕을 벌하니 이로서 17대 30왕(탕의 큰 아들인 ‘태정’은 포함하지 않음)으로 550여 년간 존재하던 상 왕조는 멸망했다.
상 왕조는 중국 노예 사회에서 하나의 중요한 발전 단계에 있었다. 특히 갑골문자의 발견은 상 왕조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동시에 상 왕조의 휘황찬란한 청동기 제조기술과 문화는 중국 고대 문화를 위한 진일보된 기초를 다져 주었다.
[서주(西周, B.C.1046 ~ B.C.771]
- 중국의 발전이 가파른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주나라
기원전 1046년 무왕은 상 왕조를 멸망시키고 서주를 건립하였다.
서주 시대에는 제후들에게 ‘분봉’을 하여 나라를 다스렸는데, 여기서 분봉(分封)이란 종법제도(宗法制度 - 친척관계 관련 제도)에 기초하여 국왕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여러 친척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봉건종법제도(封建宗法制度)의 중요한 특징은 ‘등급제’다. 서주의 통치자는 이러한 등급제를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부득이 일련의 강제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군대와 법제도를 함께 묶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또한 서주의 국가기구 역시 비교적 세밀한 설계가 있었다. 주나라의 천자(天子 - 임금)는 국가에서 가장 높은 통치자이며, 천자 아래의 각급 기구와 각종 관직은 모두 천자 개인을 위해 봉사해야 했다.
상나라(혹은 은나라)와 비교할 때 서주의 경제 발전 수준은 무척 향상되었다. 농업도구와 농작물의 품종 그리고 초보적인 농업기술 등이 서로 결합하여 서주의 농업 발전은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동시에 방직, 염색, 양조(釀造), 도자기 굽기, 야금(冶金) 위주의 수공업 역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상업과 무역 면에서도 - 비록 화폐 교역이 아직 싹이 트는 단계이기는 했으나 - 물물교환이 매우 성행하였다.
[춘추시대(春秋時代, B.C.770 ~ B.C.476)]
- 욕심이 극에 달한 권력자들에 의해 중국 천하가 사분오열되기 시작한 시대
기원전 770년, 주(周) 평왕(平王)이 낙읍(洛邑 - 지금의 하남성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대혼란의 동주(東周) 시대가 시작되었다.
동주는 역사가들에 의해 춘추(春秋)와 전국(戰國) 두 시기로 나뉜다. 동주의 전기를 춘추시대라 칭하고, 후기는 전국시대라 칭한다. 춘추 전기에 왕실이 쇠약해지자, 제나라의 환공(桓公)과 진(晋)나라의 문공(文公)이 앞을 다투어 여러 민족들과 남방의 초국(楚國)을 공격하여 각각 정복함으로서 잠시 평화를 유지하였다.
춘추 중기를 지나서는 진(晋)과 진(秦), 진(秦)과 초(楚) 간의 전쟁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약 백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그 후 오나라와 월나라가 ‘오월동주’(吳越同舟 - 원수지간인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한 배를 탔음이라)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패권쟁탈이 이루어지는 혼란이 나타났다.
춘추시대의 정치는 두 가지 기본적인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소위 말하는 패주(覇主) 정치이며, 또 하나는 집권(集權)이 분권(分權)으로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옛 제도와 새로운 제도의 교체를 촉진시켰는데, 그 중 가장 뚜렷한 것은 토지 제도와 법률 제도의 교체다. 이러한 두 방면의 부단한 전개는 노동자들의 생산력에 적극성을 불어넣었으며, 최종적으로는 생산력의 발전과 문화의 진보를 촉진하였다.
[전국시대(戰國時代, B.C.475 ~ B.C.221)]
- 전쟁으로 날이 새고 전쟁으로 날이 지는 가운데 학문은 더더욱 빛이 난다.
기원전 475년에서 221년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를 전국시대라 한다.
춘추시대의 오랜 패권 다툼과 전쟁의 과정에서 많은 작은 나라들이 큰 나라들에 병합되었다. 그렇기에 전국시대가 시작되면서 제후국들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그중 주요 국가는 제나라, 초나라, 연나라,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 진(秦)나라 등 일곱 나라였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부른다.
전국시대에 중국 봉건 사회의 군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사회 경제의 발전에 따라 옛 세력과 신흥세력 사이에는 격력한 투쟁이 진행되었는데, 이에 여러 나라들은 분분히 변법개혁(變法改革 - 법을 고쳐 개혁을 꾀함)을 단행하였다. 치열한 전쟁과 영토병합의 와중에서 변법을 가장 철저하고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진나라는 국력이 제일 강하였다. 그렇기에 결국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전국시대에 역사는 시대의 줄을 긋는 변혁을 겪게 된다. 즉 서로 다른 계급과 계층의 대표적 인물들이 사회 변혁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을 내세우니, 이른바 ‘백가쟁명(百家爭鳴)’과 인재 배출의 국면이 출현함으로써 중국 학술사상 찬란한 페이지를 쓰게 된 것이다.
[진(秦, B.C.221 ~ B.C.206)]
- 최초의 통일왕조가 압제의 상징이 되다.
진나라를 가을 바람이 낙엽을 쓸어가는 듯한 기세로 전국시대의 여섯 나라들을 차례로 멸망시키면서 기원전 221년에 중국 전역을 통일하였다. 이렇듯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것은 중국 역사상 첫 번째의 통일로 기록되며, 이 때문에 사학자들은 이를 “만세(萬世)의 토대를 닦았다”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 토대를 닦은 것은 다름 아닌 시황제(始皇帝) ‘영정’이다.
진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중앙집권적 봉건제국이다.
진나라는 주나라 때부터의 분봉제(分封制)를 폐지하고 대신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황제가 있는 중앙이 지방에 대한 엄청난 통제권을 지녔다. 이 밖에도 진시황은 흉노족을 토벌하고, 만리장성을 건설하여 변경의 방비를 든든히 하고자 하였으며, 문자와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함으로서 중국을 위해 수많은 공을 세우려 하였다.
하지만 진시황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여 진나라의 통치가 태양처럼 영원할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의 힘을 과도하게 동원하였으니, 이는 비록 통일에는 필수적이었으나 그와 함께 백성들을 지치게 하였다. 또한 분서갱유(焚書坑儒 - 책을 불태우고 학자들을 살해하여 황제의 권위에 도전할 여론을 형성하지 못하게 함)로 대표되는 일련의 폭정과 제2대 임금 호해의 무능함으로 인하여 백성들은 폭동을 일으키고 신속히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서한(西漢, B.C.206 ~ A.D.25)]
- 중국인들의 정체성의 기원, 한나라.
서한은 진나라에 이어 중국의 두 번째 통일왕조다.
기원전 206년, 한 고조 유방이 진나라를 멸하고, 또한 초 패왕(覇王) 항우와의 싸움에서 이긴 후 202년 황제가 되었으며, 국호를 한(漢)이라 하고 수도를 장안(長安 - 지금의 섬서성 서안)에 건립하니 역사에서는 이를 ‘서한(西漢)’이라 한다.
서한 시대에는 봉건 제도가 기본적으로 확립되었으며, 정치 경제 문화 면에서 모두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한 무제(漢武帝) 때의 한나라는 아시아 최고로 번영하고 부강한 다민족 국가였다. 한나라는 또한 유학을 중국의 정치계와 사상계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확립하였으니, 이때부터 유학 문화는 중국의 수천 년 역사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한나라의 정치제도 또한 진일보하여 완전한 군주전제집권제도(君主專制集權制度)를 확립하니 이 역시 중국 후세 몇천 년간 줄곧 발전을 거듭하며 공고해지면서 중국의 기본적인 정치 제도가 되었다.
한나라는 중국 역사상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왜냐하면 중국문화를 이때부터 ‘한문화(漢文化)’라 하고, 중원 지역의 중국인 역시 ‘한인(漢人)’이라 부르며, 문자 역시 ‘한자(漢字)’라 하니 이러한 명칭에서 모두 한나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서한 후기에 사회의 모순이 점차 첨예해지고 외척인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여 신(新)나라를 세우니, 서한은 이로써 종말을 고한다.
[동한(東漢, A.D.25 ~ A.D.220)]
- 왕망의 신나라를 멸하고 다시 일어난 한나라 동한
서기 25년, 황족(皇族)의 먼 지류인 유수(劉秀 - 한 광무제)는 새롭게 한나라를 재건하고 수도를 낙양에 건립하니 역사상 이를 ‘동한(東漢)’ 혹은 ‘후한(後漢)’이라 칭한다.
동한은 ‘광무중흥(光武中興 - 광무제에 의한 한나라의 중흥)’을 거치면서 사회의 경제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며 문화 역시 진일보의 발전이 있어 휘황찬란한 한문화의 창조를 완성하였다.
동한 시대에 호족의 통치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하나의 특색이었다. 각지의 호족들은 대량의 토지 및 농민들을 장악하고 대농장을 확립하여 자급자족의 전장(전장) 경제를 발전시켰다. 심지어 개인 병력을 소유하는 능력까지 갖추게 되었으니, 결국 이 모든 것은 사회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동한 말년 환관의 전횡과 폭정, 가혹한 수탈 등의 갖가지 횡포로부터 농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으며, 급기야 그 유명한 ‘황건족의 난’이 폭발하였다. 이러한 농민반란군 때문에 타격을 받은 동한 왕조는 결국 이름만 있지 실제로는 멸망한 국가와도 같았다.
중국은 이로서 무려 400년 동안의 삼국시대라는 대분열의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삼국시대(三國時代, A.D.220 ~ A.D.280)]
- 유비, 조조, 손권. 풍운아들의 시대.
중국대륙이 삼국으로 나뉘어 대립한 분열의 시대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로, 조조의 위나라, 유비의 촉나라, 그리고 손권의 오나라는 모두 천하통일의 야심을 품고, 나머지 두 나라들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통일하여 새로운 대통일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세 나라 사이의 계속된 혼전은 노동에 종사하는 백성들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가져왔다. 그러나 삼국의 통치자들은 자기의 실력을 확장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두가 각자의 경제 발전에 전력을 다했고, 그로 인해 이 시기의 농업 생산력은 매우 크게 발전하였다.
위나라는 군둔(軍屯 - 군인이 농사지음)과 민둔(民屯 - 민간인이 농사지음)의 발전에 큰 힘을 기울여 중원의 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촉나라는 비옥한 토지가 천 리에 이르는 성도(成都) 평원을 지니고 있어 평소에 ‘천부지국(天府之國 - 하늘나라의 곡식창고 같은 국가)’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려졌다. 오나라도 여러 차례 동남아시아의 소수 민족이 거주하는 산월 지역을 지배하여 중국 동남 지역 경제개발사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렇듯 삼국의 경제 개발은 장차 다가올 대통일을 위한 물질적인 면에서의 준비를 이룬 셈이었다.
[서진(西晋, A.D.265 ~ A.D.316)]
- 유비, 조조, 손권 세 영웅의 난세를 진정시킨 ‘잠시 동안의 평화’
반세기의 정치 변화와 경제발전을 거쳐 삼국이 균형 있게 공존하던 국면은 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중원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조조가 세운 위나라는 그 강대한 세력으로서 263년에 유비가 세운 촉나라를 무너뜨렸다. 위나라 정권은 남북을 통일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생존 역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서기 265년, 사마염(사마염)이 무대 뒤 막에서 무대 앞으로 나오게 되었으니, 그는 위나라 황제에게서 자리를 ‘선양(宣揚 - 물려받음)’ 받아 새로운 왕조인 진(晋 - 서진)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10여 년 후에 진은 손권이 세운 오나라를 평정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로서 한나라 말엽부터 장장 1세기나 되던 중국 대륙의 분열은 끝이 나게 되었다.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서진은 완비된 관료 제도를 확립하였다.
경제적으로 서진의 통치자들은 백성이 편히 지낼 수 있는 정책을 실행하여 사회 경제를 회복하였고, 이로서 전란의 시대 동안 극심하게 혼란하던 사회 질서는 안정되었다. 그러나 좋은 세월도 얼마 가지 않았으니, 290년 사마염이 죽은 뒤에 ‘팔왕(八王)의 난’이 일어났고, 사마씨 집단 내부에는 장장 16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대살육이 시작되었다. 이로서 서진은 급속히 쇠망하였고, 316년에는 진 민제(晋愍帝) 사마업(司馬鄴)이 유요(劉曜)의 압박으로 투항하면서 서진은 멸망하였다.
서진은 비록 하나의 통일된 국가였지만 시황제의 진나라의 정권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민족 충돌이 있었으므로, 서진의 통일은 항상 분열의 요인과 불안정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서진이 멸망한 후 중국은 즉시 심각한 분열과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동진 & 16국(東晋 & 十六國, A.D.317 ~ A.D.420)]
- 힘 있는 소수의 다툼은 힘 없는 다수의 고통을 부른다.
진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하여 유유(劉裕)가 송나라를 건립할 때까지 104년 동안 중국은 또 한 번 남북 분열의 혼란에 휩싸였다.
서진이 멸망한 후에 흉노, 선비, 갈(羯), 강(姜), 저(氐) 등 여러 민족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중국 북방 지역에 무려 20여 개의 나라들을 수립하였는데, 역사에는 이를 ‘16국’이라 한다. 정권은 번번이 바뀌었으며, 나라와 민족 간의 갈등이 첨예하여 사회는 불안하였고, 경제는 쇠락하여 중국 북방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영가(永嘉)의 난 이후 낙양이 몰락하자, 중원의 백성들은 분분히 남으로 이동하였다. 318년에 사마예(司馬睿)는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여 동진을 건립하였다. 동진 정권의 정치적 기초는 강남에 임시로 거주하고 있던 문벌가들이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가문의 명망과 관직의 권세에만 만족할 뿐, 기본적인 정치 소양과 정무 능력이 부족하여 동진 정권의 쇠퇴를 초래하였다.
동진 말년에, 내부에서는 환현(桓玄)이 전권(專權)을 행사하고 외부에서는 손은(孫恩)과 노순(盧循)이 반란을 일으켜 타격을 주자, 동진 정권은 겨우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동진 시대에는 남방의 농업 생산의 수준에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북방 농민은 끊임없이 강남으로 이주하였으며, 비교적 선진적인 생산도구와 생산기술을 가지고 오게 되니, 중국의 경제 중심은 이때부터 남방으로 이동되기 시작하였다.
[남북조(南北朝, A.D.420 ~ A.D.589)]
- 사분오열된 중국이 다시금 정리되던 시대
서기 420년, 출신이 미천한 유유는 유명무실한 동진을 대신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송(宋)이라 하였다. 이후로 반세기 동안 강남에는 차례로 제(齊), 양(梁), 진(陳) 등 건강을 도읍으로 하는 세 개의 나라들이 출현했으니, 역사상 이 네 나라들을 남조(南朝)라 부른다.
그리고 같은 시기 북방에는 한족(漢族) 이외의 민족들이 세운 나라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전쟁을 거듭하다가, 북위(北魏)와 위나라 말기에 분열된 동위(東魏)와 서위(西魏) 및 이를 이은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를 합하여 북조(北朝)라 부른다.
420년 유송(劉宋) 왕조가 건립된 이래, 589년 진(陳)이 수(隋)에 멸망할 때까지 남북조는 모두 170년 동안 이어졌다. 유유는 송나라를 창건하고, ‘북부병’을 이용하여 황권정치(皇勸政治)를 일으키고, 남조 각 왕조의 정치적 기본 틀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남조의 네 나라들은 모두 수명이 길지 않았고, 왕조의 너무 빠른 교체 또한 남방 지역의 경제 발전을 더디게 하니, 557년에는 진(陳)나라의 패선(覇先)이 황제를 칭하고 나라를 세울 때에 이르러서는 강남은 이미 쇠락의 형세를 보이고 있었다.
진나라는 강남 전역의 통치를 실현하기 어려웠고, 다만 북방이 잠시 분열된 덕에 비로소 20여 년을 연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방은 북위 등 몇 개의 정권이 교체된 후, 결국에는 북주가 다시 북방을 통일하였다.
518년, 수나라 왕 양견(楊堅)은 북주의 마지막 황제 우문천(宇文闡)을 축출하고 수나라를 건립했다. 589년, 수나라가 남쪽의 진나라를 멸망시키니, 남북조 시대는 이로써 막을 내린다.
[수(隋, A.D.581 ~ A.D.618)]
- 전쟁과 침략을 좋아하던 황제들 때문에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통일제국
서기 581년, 북조의 대승상인 수왕(隋王) 양견(楊堅)은 주 정제(周靜帝)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수(隋)’라 개칭하니, 이가 바로 수 문제(隋文帝)다. 그는 정권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전국을 통일하는 전쟁을 일으켜, 589년에 남방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정권인 진(陣)나라를 공격하여 남북을 통일하였다. 이로써 위진 이래 근 4백 년간의 분열 국면은 종결되었다.
수 양제(隋煬帝)가 황위를 계승한 후에는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동경(東京)을 건설하고, 운하를 파고, 대대적으로 양자강 남북 경제 문화의 교류를 진행하여 국가의 통일을 공고히 하였다. 그 밖에도 수 문제가 시작한 제도는 수 양제 시기에 이르러 더욱 발전과 완성을 보게 되었으니, 수나라 초기의 제도는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당나라의 제도로 넘어가는 하나의 필요한 과도기가 되어 주었다. 수 양제는 또한 서역 및 동남아시아 인근 국가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수 양제 말년에 수나라의 영토는 대폭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후 수나라는 급속히 쇠락하게 되었다.
이는 수 문제 시대에 쌓였던 재화가 급속히 소진되고, 수 문제 때에 다져 놓았던 정국 또한 수 양제 시기에 급박하게 요동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수 양제가 큰 공을 세우기를 좋아하여, 무력을 남용해 전쟁을 일삼고, 그의 짧은 일생 동안 세 번이나 강남의 도시들을 순행하였으며, 여러 차례 고구려를 침공하고, 거국적으로 큰 공사를 일으켰으며, 젊은이들을 모두 병사로 동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논과 밭이 황폐해지니 이로서 수나라 전역에서 수나라 정권에 반항하는 봉기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여기 더하여 수나라 지배계급의 내부 분열은 수나라의 통치를 신속하게 와해시켰다.
급기야 618년, 이연(李淵)은 수 공제(隋恭帝) 양유(陽侑)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되어 당나라를 세우니 이로써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당(唐, A.D.618 ~ A.D.907)]
- 이태백의 시와 양귀비의 미모로 상징되는 중국 역사 최고의 전성기
당나라는 중국 봉건 사회에서 가장 강성한 시기로, 건국 초기에 사회의 안정과 정치적 개명을 몹시 중시하였다.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치세에는 오곡이 풍성하고 백성이 안락한 생활을 누린 ‘정관의 치세’(貞觀之治)를 이루었으며, 현종(玄宗) 황제 이융기(李隆基)의 치세에는 국력이 몹시 강성하여 역사에서는 이를 ‘개원의 성세’(開元盛世)라고 칭한다.
정치상에 있어서 당은 위진(魏晋) 이래의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를 폐지하고 진일보 개선된 과거제를 시행하여 양호하고도 질서 있는 정부 관리 시스템을 건립하였다. 경제상에 있어서는 세금제도에 있어 균전제(均田制)를 추진하고 조용조(租庸調)를 실행하며, 황무지의 개간과 농업 및 잠업(蠶業 - 누에치기)을 장려하여 농업과 수공업이 모두 전대미문의 발전을 이루었다. 당의 문화와 과학 사업 역시 공전의 번영을 이루었는데, 특히 시가(詩歌) 발전에 있어서는 중국 고전 시가의 최고봉으로 발전하였다.
당나라 시대는 그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 중의 하나로서 주변 인접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당의 번영과 강성한 배후에는 심각한 내우외환이 잠복하고 있었으니, 이융기 집정 후기의 당조는 이미 쇠퇴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755년 폭발한 장장 8년간의 ‘안사(安史 -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은 당나라의 국력을 전부 소진시켰으며 당나라는 이로써 재기불능이 되었다. 후에 비록 헌종(憲宗)의 중흥이 있었지만 구제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875년에 폭발한 ‘황소(黃巢)의 반란’은 당나라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당은 이로써 각 지역에서 일어난 군벌들에 의한 혼란과 전쟁 속에 빠져버려 이름만 존재하는 멸망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907년, 주온(朱溫)은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압박하여 제위에서 물러나게 만든 다음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니, 이로써 당나라는 멸망을 고하게 된다.
[오대십국(五代十國, A.D. 907 ~ 960)]
― 안록산의 난에 의한 당나라의 멸망이후 송나라 건국 때까지의 혼란의 시대.
당나라 시대 말기, 중국 대륙 각지에 형성된 군벌호족 세력은 그 기세가 한층 더 확장되었다.
서기 907년, 당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 주전충(朱全忠)은 당 애제(唐哀帝)를 협박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뒤, 후량(後粱)을 건립하니 이로서 중국은 오대십국의 시대로 진입하게 된다.
907년에서 960년까지 중국 황하 유역에는 후량, 후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 후주(後周) 등 다섯 왕조가 연이어 출현하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오대(五代)’라 칭한다. 이와 동시에 남방에서도 전촉(前蜀), 오(吳), 민(閩), 오월(吳越), 초(楚), 남한(南漢), 남평(南平), 후촉(後蜀), 남당(南唐) 등 아홉 개의 군벌호족들이 할거(割據 - 지역을 서로 나누어 차지함)하여 수립한 정권이 출현하였으며, 여이게 산서 지역에 건립한 북한(北漢)을 합쳐 역사상 ‘십국(十國)’이라 칭한다.
오대십국은 중국이 위진남북조(위진남북조) 이후 다시 분열과 혼란에 빠진 시대였다.
각지의 백성들은 분열과 할거로 인해 초래된 여러 재난에 저항하였으며, 또한 중국인들의 힘을 모아 거란족의 침략에 따른 약탈을 막기 위한 통일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대 후기에 이르러 통일의 추세는 날로 명확해졌다. 이에 979년에 이르러, 북송이 다시 한 번 중국을 통일하니 오대십국의 할거는 이로서 종말을 고했다.
오대십국 시대에 북방은 전쟁과 난리가 빈번하고 정국은 혼란스러운데 반하여, 남방은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에 중국 대륙 전체의 경제중심은 황하 유역에서 장강(양쯔강) 유역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농업, 수공업, 그리고 상업 등이 비교적 발달하였고 해상무역 또한 상당한 번영을 이루었다.
[북송(北宋, A.D.960 ~ A.D.1127)]
―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로 내부분열을 막아보려던 통일왕국의 시대
송나라 시대는 서기 960년에 건립되었고, 1279년에 원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 기간 중 금나라로 휘제(徽帝) 및 흠제(欽帝) 두 황제 및 종실 비빈들이 포로로 잡혀간 1127년을 기점으로 전후 두 시기로 나뉜다. 1127년 이전이 북송 시대이고 그 후부터는 남송 시대이다.
북송 때는 온 중국이 여전히 분열되어 북송과 함께 중국대륙에 존재한 비교적 큰 국가로는 요나라를 제외하고도 또 서하(西夏)와 대리(大理)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와 달리 송나라는 오대십국의 분열을 종식시킨 상대적으로 통일된 왕국이었다.
북송시대의 정부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여 권력이 황제에게로 집중되는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이 시기 북송의 사회와 경제는 뚜렷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또한 북송문화 역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학술상에서 이학(理學)은 유학을 진정한 철학으로 발전시켰으며, 사학에서도 큰 성과를 이룩하였고, 사(詞)는 특히 독특한 품격을 구비하여 일절(一絶)이라 칭해졌다. 고문(古文)이나 통속문학, 희극, 그리고 설창(說唱) 분야의 예술도 급속히 발전했다. 인쇄술, 화약, 나침반 등의 중국3대발명품 또한 북송 시대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상징한다.
또한 공명정대하기로 유명한 판관 포청천(포증, 999~1062)이 활약했던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이렇게 발달했던 북송은,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 실시한 각종 조치들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어 국력은 약해지고 백성은 가난하게 되었다. 이에 북송 시대 후기에는 왕안석(王安石)의 법개정으로 국력의 강화를 시도하였으나, 결실을 보기는커녕 도리어 당파싸움이라는 화근을 초래하였다. 또한 이로서 통치계급 내부의 모순은 이미 타협할 수 없는 국면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기 1127년, 내우외환에 직면한 북송은 결국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황제들이 금나라로 끌려가는 ‘정강의 치욕’(靖康之恥)을 초래하였고 뒤이어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남송(南宋, A.D.1127 ~ A.D.1279)]
― 평화를 돈으로 사려다 야금야금 멸망한 남송
북송 멸망 후 1개월 뒤에 조구(趙構)가 남경(南京 : 지금의 하남성 상구商丘 지역)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송나라를 중건하니, 이로써 남송 시대가 시작되었다.
남송은 건립 초기부터 금나라와 대치했으나, 남송의 최고 통치자들은 (북송 시대부터 지속되어온) ‘안락함과 평화를 구걸하는 정책’을 계속하였다. 이 때문에 비록 이강, 종택(宗澤), 한세충(韓世忠), 그리고 악비(岳飛) 등 일부 장수들이 용맹하게 금나라와 싸워 승리를 얻었음에도, 남송은 1141년에 금나라와 ‘소흥화의(紹興和議 - 송나라가 금나라의 신하가 되어 매년 엄청난 액수의 조공을 바치기로 소흥 황제가 합의)’에 조인해 타협하였다. 이후 송나라와 금나라 양국은 동쪽으로는 회수(淮水)를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대산관(大散關)을 경계로 상대적으로 안정된 대치국면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결국 남송 말기에 이르러 간신들이 계속 정권을 잡으면서 조정에는 칠흙같은 암흑이 드리웠고, 이때 북방의 징기스칸이 건립한 몽골제국이 급속도로 강대해져 몽골의 철기군(鐵騎軍)이 남하, 서하와 금을 멸망시켰다.
1271년, 쿠빌라이는 국호를 몽골에서 ‘대원(大元)’이라 고치고, 그 후에 남송과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 그리하여 1279년, 더 이상 달아날 길이 없게 된 남송 정권은 결국 육수부(陸秀夫)가 어린 황제를 안고 바다에 투신함으로써 멸망을 고했다.
남송이 강남으로 물러난 후에도 정치 및 사회 등 모든 방면에서 북송의 수많은 특징들을 계승하였다. 특히 정치 제도에서 상당히 완벽한 중앙집권제를 수립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 남부지역의 경제는 전에 없이 번성하여 방직업은 장족의 발전을 거두었고, 조선업 역시 매우 발달하였다. 도자기 제조, 제지업, 인쇄업 등도 북송시대의 그것을 뛰어넘었을 정도였다.
[요(遼, A.D.916 ~ A.D.1125)]
- 현대의 중국에 한족 이외의 민족들에 대한 통치기법을 물려준 요나라
요나라는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인 거란족이 창건한 나라로, 오랫동안 ‘거란국’이라 불렸다.
거란족은 동호(東胡)에서 기원하여 요하(遼河) 상류 일대에서 활동했으며, 당나라 말엽과 오나라 대에 세력이 크게 번성했는데, 그 중 질랄부(迭剌部)의 야율씨(耶律氏)가 급속도로 팽창하였다. 이에 서기 916년에는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황제를 칭하고 ‘거란국’을 건립했으며, 947년에는 ‘요’로 국호를 바꾸었다.
거란국의 건립은 중국 북부 대부분 지역을 최초로 통일했다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며, 이 지역의 개발과 사회 및 경제 발전을 이룩하여 다민족 국가인 중국의 융합과 통일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요나라의 통치자들은 국경 내의 민족 구성이 복잡함에 따라, 거란족과 한족에 대한 두 종류의 정책과 법령을 제정하여 이들을 나누어 통치하였다. 이른바 ‘국법으로는 거란을 통치하고 한족의 법으로는 한족을 통치한다’는 방식으로, 거란의 통치를 위해서는 거란인 귀족들을 임명하고 한족을 통치하는 것은 당나라의 제도를 따랐다. 후에 일련의 개혁을 거쳐 성종(聖宗) 때 이르러서는 거란과 한족의 법률을 점차적으로 일치시켜 나갔다.
요나라 중기의 정치와 경제는 모두 커다란 발전을 이뤘는데, 982년~1031년의 야율융서(耶律隆緖)의 재위 기간 동안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태평성세를 구가하였다. 그러다 12세기 초부터 부패와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특히 여진족에 대한 압박은 여진족들의 강렬한 원한과 불만을 야기했다. 이리하여 1125년, 요나라는 송나라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연합군에게 패하고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天祖帝)가 금나라의 포로가 됨으로서 멸망했다.
[서하(西夏, A.D.1038 ~ A.D.1227)]
- 권력에 도취되면 필멸(必滅)한다. 신흥강국이었던 서하의 사례.
서하는 중국 서북부의 당항족(黨項族) 탁발씨(拓拔氏)가 건립한 봉건 왕조다.
서기 1038년, 이원호(李元昊)는 요나라와 송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칭 황제가 되어 국호를 대하(大夏)라 하고 수도를 흥경부(興慶府 - 지금의 영하영하 은천은천)에 정하였다. 하지만 송나라의 서쪽에 세워졌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이 나라를 ‘서하’라고 부른다.
서하 건립 후, 이원호는 끊임없는 조치를 취하여 정권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경제 발전에도 노력을 기하여 새로 건립된 국가는 한층 더 강성해졌다. 그는 또한 송나라와 요나라와의 잇따른 전투에서 계속 승리하여 북송 및 요나라와 함께 대립하며 존재하는 국면을 형성했다.또한 서하는 번학(蕃學)을 세우고 서하문자를 창제하여 점차 강렬한 민족 특색을 갖춘 서하 문화를 발전시켰다. 1139년, 인종(仁宗) 이인효(李仁孝)가 즉위한 후 서하는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번영 발전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인종 후에 서하는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권력의 중심이 안정되고 강대한 데에서 권세를 쥐게 된 신하들은 전횡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군대는 쇠약해지고 정치는 부패했다. 궁중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왕이 폐위되거나 새로 옹립되는 사태가 끊임없이 발생해 서하는 더욱 허약해졌다.
여기 더해 새로이 일어난 몽골은 금나라로 진격하여 후환을 없앤 다음, 서하에 대한 침략을 감행했다. 이에 서하의 마지막 황제 이현(李睍)은 군사들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몽골에 대한 항쟁에 온힘을 기울였지만, 끝내 징기스칸의 맹렬한 공격을 당해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1227년 6월, 이현이 항복함으로서 서하는 멸망했다.
[금(金, A.D.1115 ~ A.D.1234)]
- 한족의 나라와 같아졌던 여진족의 나라, 금나라
금나라는 요나라 통치 시절 송화강(松花江) 이북 지역의 여진족 부락이 강성해져 생긴 나라다.
서기 1115년, 여진족인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는 안출호수(安出虎水 - 지금의 흑룡강성 아십하阿什河 유역) 일대에서 건국하여 국호를 ‘대금(大金)’이라 하였다. 그 후 법령을 반포하고 문자를 창제하며 맹안모극제도(猛安謀克制度 - 백성들의 통제 및 징병을 위한 제도)를 실시하여 금나라는 급속도로 강대해졌다.
1120년, 송나라와 금나라는 연합하여 요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5년 후에 금나라의 군대가 응주에서 요나라의 천조제를 사로잡아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뒤이어 금의 공격과 침략의 목표는 북송을 향했고, 요를 멸한 그 해에 대군을 일으켜 송나라를 침공하였다.
1127년 금나라는 북송을 멸하고, 계속하여 공격을 늦추지 않으니 이에 부패하고 무능한 남송은 1141년에 금나라와 굴욕적인 ‘소흥화의’(송나라가 금나라의 신하가 되기로 하는 조약)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금은 중원에서의 통치 권력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요나라와 송나라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금나라의 통치자들은 끊임없이 한족화 되어갔다. 이에 따라 1161년 금나라 세종 즉위 후에는 폭넓게 한족 관리들을 흡수하여 군사와 정치에 참여시켰다. 경제적으로도 농업을 중시하고 시장을 개방하며 세금과 관련된 법률을 규정하고 동전을 주조하니, 경제가 크게 번영하고 발전하였다.
금나라 후기에 정치는 부패하고 중원의 한족 백성들과 여진 하층민에 대한 통치자들의 약탈과 압박이 너무나 잔혹하여 이들 백성들의 강렬한 저항을 불러왔다. 이리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 금나라의 통치는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1234년, 금나라는 송나라와 몽골의 연합군에게 멸망하였다.
[원(元, A.D.1206 ~ A.D.1368)]
― 한족(漢族) 이외의 민족이 처음으로 중국 대륙을 장악하다.
원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한족 이외의 민족이 통치한 통일국가이다.
서기 1206년, 몽골족 수령인 징기스칸은 몽골국을 건립했는데, 이때부터 황하 유역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징기스칸부터 몽케칸까지의 통치기간 동안 몽골은 당시 송나라와 함께 존재하고 있던 서요, 서하, 금, 대리(大理) 등의 한족 이외의 민족들이 세운 나라들을 차례차례 정복하였으며, 또한 토번(吐藩 - 티벳)에 행정기구를 건립하고 직접 통치하였다.
1271년, 쿠빌라이는 국호를 원(元)이라 칭하였으며, 8년 후에는 남송을 멸하고 중국 전체를 통일하여 수도를 대도(大都 - 베이징)로 정하였다.
원나라는 통치 기간 동안 엄격한 민족정책을 실시하여 한인들을 사회의 최하층 계급으로 만들었다. 이렇듯 잔혹한 몽골족의 통치는 1351년에 ‘홍건군(紅巾軍 - 홍건적)’이라는 농민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1368년, 홍건군의 지휘관 주원장의 군대가 대도를 공략하여 원나라를 정복하고 명(明)나라를 건립했다.
원나라의 통치기간은 비록 짧았지만 이 시기에 중국의 영역은 전에 없이 크게 확장되었고, 당시에 시행한 행성(行省) 제도는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명(明, A.D.1368 ~ A.D.1644)]
― 그 어떤 부강한 나라라도 상류층이 부패하면 반드시 망한다는 교훈을 남긴 나라
서기 1368년, 주원장(朱元璋)은 응천(應天 - 지금의 강소성 난징)에서 황제를 칭하며 명나라를 건립한 후, 정치와 군사 등의 방면에서 제도 개혁을 단행하고 군사와 관련한 핵심 권력을 집중시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다.
경제방면에서는 사회 경제를 회복하고 발전시키는 시책을 실시하여 홍무(洪武) 연간에는 사회 경제가 역사상 최고 수준에 달했으며 이는 명대 사회의 경제가 번영하는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명나라는 성조(成祖)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15세기 초에는 정화(鄭和)가 일곱 차례나 서양 원정에 나서 중국, 나아가서는 세계 항해사상의 장거(壯擧)를 이룩해 냈다.
하지만 영종(英宗) 정통(正統)황제 시기(1436~1449)부터 명나라는 쇠락으로 치달아 환관이 실권을 장악하고 정치가 부패했으며, 토지 겸병(兼倂 - 한데 아울러 다 가짐)이 심해지고 농민들의 난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급기야 만력(萬曆) 연간에 장거정(張居正) 등에 의한 개혁이 있었지만, 이는 한 잔 물로 수레의 불을 끄는 격이었으니, 이로서 명나라는 쇠퇴하는 형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격화되면서 명나라는 숭정(崇禎) 17년(1644년),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봉기군에게 베이징을 점령당함으로서 막을 내렸다.
[청(淸, A.D.1644 ~ A.D.1911)]
― 중국 역사상 마지막 황제의 나라
청나라는 만주족이 핵심이 되어 건립한 중국 최후의 봉건 국가다.
서기 1616년, 누르하치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의 각 부족을 정복하고 후금(後金) 정권을 건립한 후 쇠퇴한 명 왕조를 향하여 공개적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급기야 1644년, 청의 군대는 중원으로 들어와(그 사이 1626년에 ‘청淸’으로 개국하였음) 청나라로서의 통치를 시작하였다.
청나라 시대 전기의 통치자들은 사회 안정과 경제발전에 유리한 적극적인 조치를 시행하였고 이로부터 강희제(康熙帝),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 등 세 황제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로써 국가가 통일되고 정권은 공고해졌으며, 사회가 안정되고 생산이 회복되면서 경제 및 문화 모두 번영하게 되었다. 건륭제가 다스린 시대는 청나라 시대 중 최고로 강성했던 시기이자 쇠퇴의 기점으로, 각종 사회적 모순은 날로 첨예해졌으며 표면적인 강성함에 허약함이 가려져 있었을 뿐이었다. 즉 이때부터 중국은 세계 선진국 대열에서 점차 이탈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840년에 발발한 아편전쟁이 중국의 빗장을 연 후, 외국의 열강이 잇달아 침략하였고 이에 따른 전쟁이 끊이지 않아 중국은 반세기 만에 반(半)식민지 & 반(半)봉건 사회로 몰락하게 되었다. 이렇듯 제국주의와 청나라 정부의 이중적인 압박에 시달리던 중국의 백성들은 이 때문에 반항의 깃발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장장 14년에 달하는 태평천국운동은 청나라의 반동(反動) 통치를 뒤흔들었다.
이로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청나라 정부는 결국 1911년 손중산(孫中山 - 손문)이 이끄는 신해혁명(辛亥革命)에 의해 무너졌으며 이로서 2천여 년에 걸친 중국의 전제군주제 역시 이에 따라 마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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