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書槪論/[신약성경개론] 개관

베드로전서:The First Letter of Peter

好學 2009. 10. 15. 01:23

 

베드로전서:The First Letter of Peter

 

 

[영] The First Letter of Peter신약성서 중의 1서. 공동서간에 속하고, 전후서로 되어있다.

 

1. 본서의 저자

편지 처음에 [사도베드로]로 명기되어 있고, 또 저자는 [그리스도의 고난에대한 증인](5:1)임을 말하고 있다. 베드로의 이름을 들어 이 편지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최초의 사람은 소아시아 신학의 대성자인 교부 이레나에우스(Irenaeus 130경-200경)이고, 2세기말 이래 본서의 저자는 베드로임이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에는 베드로의 저작설에대하여 여러 가지 의문점이 지적되고 있다.

(1) 이 편지의 그리스문은 뛰어나 있고, 구약성서에서의 인용은 그리스어역(七十人譯 Septaginta)에의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 것 없는 사람](행 4:13)이라 불리우고,아람어('aramith)를 모어(母語)로 하고 있었다는 것.

 

(2) 이 편지의 용어 및 사상에는, 바울 특히 로마서의 그것과의 유사함이 보여지는데 즉 [그리스도 안에서 ejn Cristw' ](3:16, 5:10, 14, 기타 4:1=롬 6:7, 4:10, 11=롬 12:6, 7, 2:13-17=롬 13:1-7),바울과는 반드시 입장을 같이 하지 않고, 더구나 자신이 사도였던 베드로가 바울의 영향을그렇듯 강하게 받았으리라고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

 

(3) 사도의 편지로서는 예수의 회상이 부족하다는 것.

 

(4) 독자들은 본격적인 박해를 받고(4:14, 16), 그 박해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는데(5:9), 그러한 박해는 네로황제(Nero 帝)에 의한 국지적인 박해(후 64)보다도, 도미티아누스 황제(후81-96), 또는 특히 플리니우스의 편지(Pliny's letters)와의 관련에 있어서, 트리야누스 황제(후 98-117) 치세의 박해에 부합하며, 베드로의 순교는 64년경이므로, 연대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

(5) 또는 [피 뿌림[(1:2), [다시 남](1:3, 23) 등의 관념은 그리스의 밀의종교(密儀宗敎 Mysteryreligion)와의 관련을 보이고, 율법에 언급하고 있지 않는 것은 유대인인 베드로에게 알맞지않다는 것 등이다.그러나 베드로의 필기자 실루아노는(5:12), 바울의 글의 필기자인 사도행전 중의 실라와 동일인물로 생각되고, 헬레니즘 세계의 사람으로(행 16:37,38), 그리스어에 정통한데다, 또 바울과 친한 사이였으므로(행 15-18장,고후1:19,살전 1:1,살후 1:1,→실루아노 →실라), 이실루아노의 등장에 의해 의문점의 (1) (2)는 해소될 수 있다. 의문점 (2)는 베드로와 바울과의 배후에 원시교단의 공통의 전승(傳承)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실루아노의 역할에 중요성을 지나치게 두면, 실루아노 저작설에 기울어지는 결과로 되고, 또 실루아노를 꺼내 말하는 것은 베드로를 저자로 하는 것의 모순을 혼동케하는고안으로 의심받을 수도 있다. 박해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박해와 본격적인 박해와의구별이 어느 만큼 엄밀하게 될 수 있느냐에 대하여, 또 순교에 관한 기술이 없는 것이라든가 국가권위에 대한 온건한 태도(2:13-17)가 보여지고 있는데 대해서도 고찰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또 예수의 회상도 개무하지는 않다(1:8, 2:22-24, 3:9, 14, 4:1, 14, 5:7). 의문점 (5)도 결정적은 아니다. 그러므로 대체로 베드로설 부정의 입장도 강력하나, 베드로설을주장하는 것도 적지 않다.베드로설을 부정하고, 베드로의 감화를 받은 유력한 전도자를 말하는 때에는, 저자로서는 실루아노가 유력한 인물로 되는데, 그 경우에는 실루아노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던 바울의이름이 아니고, 베드로의 이름이 사용된 것은 어찌해서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2. 본서의 독자

이 편지는 [본도와 갈라디아와 감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거류하는 사람들](1:1)에게 보내져 있다. 이들 지방은 남부를 제외한 소아세아의 대반(大半-5州)의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이 중 갈라디아와 아시아는 바울의 선교지역이었다. 다른 지방의선교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비두니아의 총독 플리니우스(小 Plinius 61-62/114경 로마의 정치가)가 로마황제 트라야누스에게 보낸 편지는 [112년경, 또는 도미티아누스 황제(Domitianus 재위 81-96)의 치세에도] 그 지방의 그리스도 신도들이 박해를 받은 것을 전하고 있다. 베드로의 편지는 이들 지방의 교회에 보내진 회장(回狀)으로 추정된다. [흩어져 거류하고 있는 사람들]은 본래는 유대 본국을 떠나, 이국에 산재하는 사람, 즉 디아스포라(Diaspora)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지상의 나라를 천상의 나라에 대한 이국으로 보고 위에말한 지방에 거주하는 그리스도 신도 일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2:11, 빌 3:20,히11:13). 그들의 다수는 이방인인 듯하고(1:14, 2:10, 4:3), 또 믿은지 얼마되지 않은 신자였을지도 모른다(2:2, 10, 3:21, 4:2-4).

 

3. 본서의 집필시기와 장소

베드로 저작설을 취하면, 집필의 때는 베드로의 순교(후 64경)의조금 전(前)으로 된다. 독자들이 박해 받을 때를 도미티아누스황제의 치세 중으로 보면 저작연대는 90-95년경, 트라야누스 황제의 치세시의 사건으로 하면, 2세기의 초엽으로 된다.[바벨론에 있는 교회에서](5:13)라고 했는데, 바벨론은 유대의 묵시문학에 있어서 로마의 이명으로 씌어지고, 원시 교회가 그것을 이어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계 14:8,16:19기타 참조). 집필의 장소가 로마인 것은, 베드로가 만년을 로마에서 보내고, 그곳에서 순교했다는고대의 전승 및 베드로와 마가와의 관계(5:13, 몬 1:24)와 부합한다. 베드로 저작설을 부정하는 경우에는, 로마교회가 이 편지의 작성에 관여했다고 보는 설(設)도 있는데, 이 편지는 로마교회와 관계가 있는 무라토리단편(-斷片 Muratorian Canon 現存하는 최고의 新約聖書目錄集)에도 빠져 있고(寫本의 破損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 로마는 베드로와 관계가 깊기 때문에 도리어 위작적인 조작으로서 의심될 가능성도 있어서, 시리아(수리아)설 및 소아시아 설이 제창되고 있다.

 

4. 본서의 집필의 사정과 목적

독자들은 로마 관헌에 의한 박해의 고난에 직면하고 있었다(1:6, 2:15, 3:14, 17, 4:12, 14, 16, 5:9). 저자는 박해가 가열을 더하려는 위급한 사태를 추찰하여, 독자들에게 다시 복음의 진리(1:3, 18-19, 2:9-10, 21-25, 3:18, 5:10)와 종말의 희망(1:7, 13, 4:7, 5:4, 10)을 다시금 재확인케 하고, 박해 중에서 신앙을 지키며(1:7, 13, 2:19,3:14, 4:7, 12-13, 19, 5:7-9), 올바른 생활을 영위케(1:14, 15, 2:12-3:9), 또 더 나아가 신앙의증거를 하도록 격려, 권면(2:15, 3:2, 15-16)하기 위해 이 편지를 쓰고 있다. 5:12에 집필의목적이 명기되어 있다.또 1:3-4:11을 세례의 설교로 해석한다면, 이 부분은 새 입교자를 특별한 대상으로 하여, 그들이 세례에 있어서 받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존귀함과 그것에 부응한 생활의 책임을 가르치기 위해 집필된 것으로 된다. 또 이 편지 전체를 예배의 문서로 보는 설도 있다.

 

5. 본서의 내용

베드로는 박해와 싸우고 있는 신도들에게 향하여, 고난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1) 고난은 영혼을 연단하여 귀하게 한다(1:7)

(2) 죄에서 떠나게 한다(4:1)

(3) 성령을 받게 한다(4:14)고난은 필경, 기독자로 하여금 확실하게 천국의 광영에 참여케 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밝혀, 그들을 격려함과 동시에, 결코 목전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일 없이, 일상생활에있어서 사랑과 순결로 시종하도록 역설하고 있다.

 

-내용 분해-

1. 인사 1:1-2

 

2. 그리스도의 생애1:3-2:10

(1) 그리스도인의 특전(1:3-12)

(2) 성결의 권면(1:13-25)

(3) 신앙에 발육하라(2:1-5)

(4) 신자 불신자의 구별(2:6-10)

 

3.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교훈 2:11-4:6

(1) 총론(2:11-12)

(2) 국민의 마음가짐(2:13-17)

(3) 종의 마음가짐(2:18-25)

(4) 아내의 마음가짐(3:1-6)

(5) 남편의 마음가짐(3:7)

(6) 일반적인 교훈(3:8-22)

(7) 고난의 의의(4:1-6)

 

4. 교회생활에 관한 교훈 4:7-5:11

(1)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4:7-11)

(2) 박해의 뜻(4:12-19)

(3) 장로 및 청년의 마음가짐(5:1-7)

(4) 마귀를 경계하라(5:8-11)

 

5. 최후의 인사 5:12-14

 

" 본서의 내용구성(內容構成)을 달리 다음과 같이 보기도 한다.

1. 인사 1:1-2

 

2. 구원의 은혜 1:3-12

(1) 찬미(1:3-4)

(2) 구원의 현재성과 종말성(1:5-9)

(3) 구원과 선지자, 사도, 천사(1:10-12)

 

3. 은혜에 부응한 생활 1:13-2:10

(1) 부르심을 입은 자의 생활태도(1:13-16)

(2) 구속받은 자의 생활태도(1:17-21)

(3) 신생과 사랑(1:22-2:3)

(4) 귀한 모퉁이 돌과 새 이스라엘(2:4-10)

 

4. 그리스도 신자의 사회 및 가정생활 2:11-3:12

(1) 기본적 권면(2:11-12)

(2) 시민(2:13-17)

(3) 종(2:18-25)

(4) 남편과 아내(3:1-7)

(5) 결말의 권면(3:8-12)

 

5. 박해에 관한 훈계 3:13-5:11

(1) 의 위해 받는 박해의 의의(3:13-22)

(2) 박해와 하나님께 따르는 생활(4:1-6)

(3) 종말과 사랑의 봉사(4:7-11)

(4) 그리스도 위한 박해의 축복과 박해자의 심판(4:12-19)

(5) 장로들과 청년들에의 훈계(5:1-5)

(6) 결말의 훈계(5:6-11)

 

6. 끝 인사 5:12-14

 

6. 본서의 특색과 의의(意義)

본서에는 바울서간에 보이는 것 같은, 당당한 교의상의 의론이 없고, 또 세찬 논란의 언설도 없다. 언언구구 체험의 피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글로, 영미진진하여 퍼내어도 퍼내어도 다함 없다.

(1) 여기에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생활의 요령이 극히 명백하게 보여져 있다. 은혜를 감사하는자는 언제나 그같이 걸어갈 것이다.

(2) 박해에 관한 교훈이 많다. 그 교훈의 간결하고 심각한 점은, 신약성서 중, 드물게 보는바이다. 특히 박해에 대처하는 태도에 관하여 훈계를 주고 있는 것이 본서의 기본적인 태도이다(→上記4 집필사정 참조)

(3) 그것과 관련하여 종말적 희망(소망)이 강조되어 있다. 우리들은 [나그네와 행인] 등을,기도하는 중에 본서를 맛보는 때면, 마음에 절로 땅을 떠나는 것을 느낀다(→4 참조)

(4) 또 박해에 대한 신앙의 증거로서 윤리적 생활이 역설되어 있다(→4 참조)

(5) 윤리적 훈계에 대해서는, 국가 권위에 대한 태도의 교훈(2:13-17)과 가정생활에 관한 교훈(2:18-3:7)등이 특징적이다.

(6) 또 1:3-4:11에 있어서 신생 및 세례에 대하여 종종 언급되어 있는 것도 두드러지게 보인다(1:3, 18, 23, 2:2, 10, 3:21).

(7) 전편에 걸쳐 복음적인 요소가 강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일하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중심적 위치가 고조되어 있다(1:3, 7, 13, 18-21, 2:4-5, 9-10, 21-25, 3:15-16,18-19, 21-22, 4:1, 11, 13, 5:10).

(8) 특히 그리스도가 [옥에 잡혀 있는 영들]에게 설교하셨다는(3:19, 4:6) 주장은 이색이다.이 편지를 후기의 위서(僞書)로 보는 이들은 그것은 교회의 예배적 고정화(2:5, 9), 캐티키즘적(Catechism-敎理問答的)교훈(1:13, 2:1, 2, 11-12, 13-17) 및 가정 윤리의 강요(綱要 2:18-3:7)의 형성 등의 문제와 관련, 교회의 카톨릭화(化)에의 초기의 징후를 보이는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 하기도 한다.

 

7. 본서의 통일성 문제

1:3-4:11과 4:12-5:11과의 사이에는, 본래는 그것이 각각 별개의 문서였던 것이 아니었을까고 생각하게 하는 문제가 있다.

(1) 전자(前者)는 송영으로 매듭지어 있고, 4:7-11은 마지막 권면의 내용을 갖추고 있다.

(2) 전자에서는 새 신도들에 대한 신앙생활의 기본적인 교훈이 주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는데, 후자에서는 박해중에 있는 신도들에의 훈계가 기록되어 있다.

(3) 전자에서는 박해가 절박하여 있지 않은 듯한데(1:6, 2:12, 15, 3:16, 4:4), 후자에서는 박해가 본격적이고, 가열한 상태에 있다(4:12, 14, 16, 5:8).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행해지고 있다.

1). 1:3-4:11은 세례의 설교였는데, 뒤에 박해중에 있는 신도들에의 편지와 함께 하나의 문서로 편집되고, 그것에 앞의 인사(1:1-2)와 마지막 인사(5:12-14)가 부가되었다.

2). 문서의 중도에 송영이 있는 예(例)는 다른 데도 있다(롬 11:36,갈 1:5,엡 3:21,딤전 1:17).4:11의 곳에서 박해에 관한 긴박한 급보가 들어왔으므로, 4:12이하에서는 내용이 바뀌었다.

3). 4:11 전후에 있어서의 박해상황의 차이는 보내는 곳의 여러 지방에 있어서 박해상황의 차이에 의한다. (1)의 경우에는 이 편지의 통일성이 부정(否定)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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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Peter, Simon(인명)

 

(Pevtro", Peter, Simon)「반석」

(1) 준비시대:베드로의 유소년 시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외전에는 어느정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믿을 수가 없다(교부들의 것 이외에도 베드로 행전, 크레멘트 문헌 등 그 수는 매우 많다). 확실한 것은 단편적으로 기록된 성경에 의지할수밖에 없다. 그의 성은 시므온(행 15:14) 또는 시몬(마 4:18)이었다. 이것은 창세기29:33에 나오는 한 부족의 조상에서 연유하여 유대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름이다. 히브리어의 @/[m]vi(시므온), 아람어의 @/myv(스이몬)은 헬라어역(LXX)에서 Sumewvn(스매온)이라고 쓰여져 진짜 희랍(헬라) 이름 Sivmwn(시몬)이 이를 대신하여 쓰여지고있었다. 베드로(Pevtro")는 아람어 게바(ap;yBE Khfa'")의 헬라어역인데, 후에 주예수님이 주신 `반석'을 의미하는 별명이다. 그는 같이 예수님의 사도가 된 그의 형제안드레와, 사도 빌립과 마찬가지로 갈릴리의 벳새다라는 동리 출신이다(요 1:44). 이벳새다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그러나 가버나움 근처 어부들이 사는 동리였던 것 같다. 이 벳새다란 `어부의 집'이란 의미이며, 갈릴리에는 같은 이름의 동리가 없기 때문에 이것이 옳은 판단인 것 같다. 복음서에도, 사도행전에서도, `베드로' 또는 `시몬'이란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으나, 바울은 그에게 언급할 때 갈라디아서 2:7, 8을 제외하고는 `게바'란 이름을 쓰고 있다(고전 1:12,3:22,9:5,15:5,갈 1:18,2:9-11).베드로의 부친은 요한(요 21:15)이었다. 그의 형제 야고보˙요한도 역시 어부였다. 아마 아버지의 대로부터 가업으로써 종사한 모양이다. 그는 주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이미 아내가 있는 몸이었다. 후세의 전설에 의하면, 그의 아내는 바나바의 형제 아리스도브로스의 딸로서 일남 일녀가 있었다고 하나, 근거가 희박하다. 다만 그가 대처자이며, 장모도 생존하고, 형제 안드레도 같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막 1:29,31). 그는 제자들 사이에서 연장자였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그것은 그가대처자였다는 점에서였을는지는 모르지만, 당시는 일반적으로 조혼하는 습관이 있었기때문에 대처가 반드시 연장이라는 증거는 못된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 사이에서 항상지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것을 보면, 당시의 유대인은 젊은 사람을 지도자로 하는습관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상당히 연장자였으리라고 여겨진다. 혹설에 의하면, 그는당시 약 40세쯤이었을것이라한다. 그의 가정은 부친의 대로부터 극빈하였다고 후세의 한 전설은 전하고 있으나, 그들 형제는 자기의 고기잡이 배(漁舟)를 소유하고, 주님과 그의 제자들을 초대할 수 있을 만한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우선 중류 이하 정도의 생활 형편은 되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받은 교육은 사도행전 4:13에는 `학문 없는 범인'이라고 불리우고 있으나, 그렇다고 완전한 문맹자는 아니었을 것이다.당시 유대인은 초등 교육을 회당에서 받았는데,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다. 후년에 서신을 써서 소아시아 제교회에 보낸 사실을 보더라도 다소의 교육은 있었다는 것이 수긍된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윗 말은 `신학적 교양 없는 평신도'라던가 `고등 교육을 받지 않는 평민'이라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베드로베드로그들이 살고 있던 갈릴리 바다 주변의 인종은 다양하였다. 유대인˙헬라인˙수리아인˙아랍인˙베니게인, 그리고 로마의 군인과 관리가 약간 살고 있었다. 고기를 잡아 파는 것은 한편으로는 로마 세리들과 관계하고, 다른 편에서는 수리아인,헬라인들의 상인과 접촉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또 때로는 외국에서 온 손님을호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네 주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그의 시계(視界)를 넓혀 좁은 유대교의 울타리 밖에 있는 넓은 세계를 볼 수 있게 하고, 후에 더 자유롭고 진보적인 가르침을 듣고 이에 공명하여 이를 믿고 일어설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예수님에게 오기 전에 이미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는 것을 보면, 이전부터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인 것 같다. 아마 그가 직업상 접촉했던 관계의부패, 실업계의 혼탁(混濁), 사회 인심의 타락 등은 정직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여자기 자신의 갱생과 세상 혁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것들도 역시 그가 곧 구주의 사도로 부름 받아 나올 준비로 되었을 것이다.

 

(2)예수의 동역자로서의 베드로:베드로가 처음 주 예수를 만난 것은 요한이 세례를주던 요단 강가 저쪽 베다니였다(요 1:28). 그는 주 예수의 세례받는 광경을 목격했을는지도 모른다. 혹설에, 베드로가 처음 예수를 만난 것은 세례 요한이 입증한 안식일이었을 것이라 한다. 먼저 안드레가 세례 요한의 증거를 듣고 예수의 처소를 찾아가가르침을 받고 이에 감동되어 그의 형제 베드로를 권하여 주를 만나게 한 것이다. 그때 주는 그의 사람 됨됨을 통찰했음인지 게바(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었다(요 1:41,42). 그러나 그가 실제로 예수의 제자가 된 것은 그로부터 잠시 후인데, 그와 안드레가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때였다. 이때 주님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고 말씀하시어 그를 부르셨다. 이것은 주님의 공생애 최초의 일로써, 그들 형제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최초의 네 제자라고 불리우는 최고참자였다. 그 후 주님은 제자들 중에서 12명을 선발하여 항상 가까이 대동(帶同)하셨는데, 베드로도 그 안에 포함되어, 더우기 맨 선두에 세움을 받았다(막 3:16-19).베드로 신앙고백 장소X가이사랴 빌립보〉베드로 통곡 교회그는 최초부터 제자들 사이에서 지도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사도의 명단에서도 항상 맨 앞에 기록되고 있다. 전기 최고참의 4명, 특히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의 3명은 다른 제자들의 동행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에도 동행이 허락되었을 정도로 주 예수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변화산이나 겟세마네 동산까지도 주를 따라가 그곁에 있는 것은 그들이었다. 베드로는 항상 언행이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였다. 주님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바다 위를 걸어 가려던 것도, 변화산에서 초막 셋을 짓겠다고 제안한 것도, 주의 수난 소식을 듣고 죽어도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호언 장담한 것도,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벤 것도,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재판 광경을 보러 간 것도, 주님이 부활 후 디베랴 바다에 나타나셨을 때 주님이라 하는 말을듣자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린 자도 그였다. 그는 또 예수가 제자들에게 중대한질문을 했을 때 제자들의 대변자로서 입을 연다. 즉,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여 주님으로부터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사도의 지도자적 지위를 확인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주님이 수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자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간하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는 신랄한 책망을받았다(마 16:23,24). 이런 장면을 보면 그는 `반석'이란 이름을 붙일 만한 강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극히 감수성이 풍부하고 충동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주님 수난의 전날 밤만 하더라도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고 호언하던 혀끝의 침이 채 마르기도 전에 주를 모른다고부인했으니 말이다. 그런가하면 곧 회개하여 울었다(막 14:66-72). 그러나 그의 주를사랑하는 열정은 어느 누구 못지 않았다. 성 어거스틴은 "요한은 주님이 사랑하신 제자이고, 베드로는 주를 사랑한 제자였다"라고 말한 것은 일리있는 말이다. 대중이 예수의 가르치심을 오해하고 실망하여 떠나고, 제자들의 대부분이 역시 떠나버렸을 때,주님은 12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다. 이 때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리오까"라고 그는 대변했다(요 6:67,68). 전술한 고백이라든가, 지금 또 명언(明言)한 주 예수에 대한 신뢰라든가, 모두 이것은 과거 수 개월 동안주님이 대중을 떠나 핵심이 될 제자들의 훈도(薰陶)에 전력을 기울인 그 목적이 기울어진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리하여 드디어 주 예수의 이 세상 생애의 최후 수 주일이되었다. 비장한 결심을 하고 예루살렘에 입성, 예루살렘에서의 유대교 당국과의 충돌, 논전, 최후의 만찬, 배신, 체포, 재판, 십자가 등으로 전개되어 갔다. 그동안 베드로는 다른 어느 제자들보다 더 주님께 가까이 있어 이 사건들을 직접 목격하였던 것이다. 부활의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 다음에 제자 중에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고전 15:5). 요한복음 21장의 기사에 의하면, 주님이 운명하신 후의기소침한 제자들은 갈릴리에 돌아와 이전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을 때, 거기 나타나신 주님은 특히 베드로에게 다짐하듯이 세 번씩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네가 나를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고, 여기에 대해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한 그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주님은 자신의 사업의 계속을 격려하시고,그를 위해 비상한 고난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그 최후가 비참한 것(요 21:15-19) 등등을 친절하게 교훈하고 계신다.

 

(3)주 승천 후의 베드로:그로부터 주님의 격려와 훈계, 그리고 주님에 관한 증거를부탁받은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집합하여 기독교의 재건에 착수하였다. 이 재건 운동에도 베드로는 선두의 지도자였다. 먼저 12제자 중에서 배신하여 없어진 가룟 유다의 후계자로서 맛디아를 선거했는데, 이것도 베드로의 제의에 의한 것이다. 이리하여 이들12명을 핵심으로 하는 120명의 무리가 주님의 명령을 좇아 약속된 성령의 강림을 대망하면서 계속 기도에 힘썼다. 마침내 오순절의 대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주석 연사로서대연설을 한 자는 역시 베드로였다(행 2:14-36). 즉, 그는 주님 승천 후에 일어난 초대 교회의 총수격(總帥格)이었다(행 1-2장).성령의역사에의한 그들의 운동은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기적은 베드로 등에 의해 행해지고, 그들의 말을 듣고 따르는 자들은 일심 동체가 되어 견고한 한 단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당시의 그들은 유대교에서독립한 교단을 조직하는 따위의 계획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오직 유대교 안에 있어 참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가 보내 주신 메시야를 믿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기다린다는 신앙에 불과했다. 따라서 다른 경건한 유대교 신자와 마찬가지로 성전에기도하러도 가고, 성전에서 가르쳐 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세력이 더해짐에 따라 종교 당국은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고, 드디어 그것이 압박으로 되고 박해가되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그 때를 맞아 베드로 등은 용감하게 이에 대항하여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고 말하면서, 한 치도 물러서지를 않았다. 여기서 주님의 생전과 완전한 딴 사람이 된 베드로를 본다.스데반의 사건 이후, 박해가 더욱 가중해진 결과 각지로 추방된 제자들의 활동에 의해복음 전선은 오히려 확대되었으나, 이와 같은 정세의 틈바구니에서 베드로는 이에 잘적응하여 활동했다. 사마리아 전도가 시작되자, 그는 빌립을 돕고(행 8:14-24), 계속하여 사방 각처를 순방하면서 룻다˙욥바˙가이사랴 등지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한 바울보다 먼저 이방인 전도에 손을 댔다. 그는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의 초청으로 그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이방인인 그를 교회에 받아들임으로써 "저(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행 10:43)라는 복음의 진리를 분명히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문호를 무할례자 이방인에게도 활짝 열었다(행 10:1-48). 또 이 문제에 관한 유대주의기독교와의 논쟁 결정을 위해 열린 예루살렘 회의에 야고보˙요한과 더불어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서 이방인에 대한 사도 바울과의 완전한 일치로(갈 2:6,9) 복음의 진리 확인을 위해 크게 기여했다(행 15:1-29). 이보다 앞서 그는 헤롯의 박해를 받아투옥되었다가 기적적으로 구출된 일이 사도행전 12장에 기록되어 있다.안디옥 산지의 베드로 동굴 교회그런데, 예루살렘 회의 후 그의 이름은 사도행전의 역사에서 사라져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 대신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한사도 바울(갈 2:7)이 크게 부각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에 기록되어 있는 안디옥방문은 이 때에 된 일이다. 그때도 그는 이방인과 같이 식사를 했을 정도로 엄격한 유대교도와 동떨어진 자유로운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바울 만큼은 철저하지못했다. 유대인 전도를 단념하지 않은 그는 후환을 염려하여 이와 같이 엉거주춤한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 여하튼 베드로다운 침착성이 없는 성격이 이렇게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퍽 유감스러운 것 같다. 신약성경에서 베드로의 기사는 이상에서 끝나고 있다. 바울이 마지막 예루살렘에 상경했을 때 베드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행21:15). 이것은 아마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고 거기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약성경도, 전설도, 그 이후에 있어서 유대인 신자간의 지도적 지위는 베드로에게서 주의 형제 야고보로 옮겨진 느낌이 있다.

 

(4)베드로의 최후:베드로가 그 후 무엇을 했는지 확연치 않다. 소아시아의 동북 지방에 있는 여러 교회를 방문했을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가 보낸 서신에서 추측한데 불과하다. 2세기 말엽 고린도 교회의 감독 다이오니시우스(Dionysius)는, 그가 고린도교회를 가르친 일이 있다고 썼다(Eusebius 교회사 2:25). 그러나 근거가 아주 희박하다. 할례자에 대한 사도 베드로(갈 2:7,8)의 서신에 의해 알 수 있는 그의 발자취는안디옥(갈 2:11), 고린도(고전 1:12), 바벨론(벧전 5:13) 정도밖에 알 수 없다. 그의죽음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예언(요 21:19) 이외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전설은 역사적 확실성이라는 점에서만 문제가 있다. 그가 순교하기까지의 25년간 로마의 초대 감독이었다는 로마 교회의 주장은 에비온파(Ebionites, 派)의이단에서 나온 거짓 이야기에 근거하는, 분명히 내부적 모순이 있는 가공적 전설이다. 공관복음˙사도행전˙서신 등을 통하여 알려져 있는 그는 충동적이며 그 언동에 많은 실수가 있었으나, 어느 경우도 뜨겁게 예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반석이라는이름에 합당하지 않게 약한 면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이름에는 그의 장래에 대한 약속이 내포되고 있었다. 그의 생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과 경고, 격려와 위로를 준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다.

 

X참고〉 전설에서의 베드로

 

(1)어린 시절:에피파니우스(Epiphanius, AD 310- 403)의 `안드레의 행위와 종언'에"히브리의 제사장 겸 국왕 우르카노스의 치세에 시므온 족에 요나라는 사람이 있었다. 가난한 그는 두 아들을 두고 죽었는데 시몬과 안드레라 한다. 안드레는 완전히 금욕의 일생을 보내고 있었고, 시몬은 사도 바나바의 형제 이리스토프로스의 딸을 아내로맞아 일남 일녀를 얻었다.…모친이 별세한 후 그는 아내를 태오토코스(또는 리프시우스)에 맡겼다"라고 쓰여 있다. 13세기 전반의 저자 솔로몬은 베드로는 납달리 족이라고 기록했다. 리프시우스는 이 저자가 항상 전대(前代)의 유서에서 인용한다고 지적했다. 클레멘스는 베드로와 빌립에게는 딸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예로님스도 베드로에게일남 일녀가 있다고 말하며, 그의 아내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이미 죽었을것이라고 상상한다. 클레멘스는 베드로가 전도여행시 아내를 데리고 다녔을 것이라고하며, 그녀도 순교했다는 전설을 전했다. 베드로의 딸이라고 상상되는 베드로닐라에대한 것이 여러 기록에 있다. 그러나 그 베드로닐라는 프라비오스 족의 여자가 일찍회개한 것을 후에 사도 베드로의 딸로 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용모에 대한 전설은후세의 작이라고 한다. 예로님스는 베드로의 대머리에 대해 전하고 있다.

 

(2)수리아의 안디옥과 베드로의 관계: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의 창설자라는 전설이 있는데, 3세기 초의 클레멘스의 이야기에는 베드로의 안디옥 입성의 성공을 기록하고 있다. 근거 없는 기사이지만, 당시 널리 유포되었던 전설을 반영한 것으로서 그 출처를수리아라고 했다. 오리게누스는 이그나치우스를 베드로 이후의 제 2대 감독이라고 불렀다. 희랍 여러 문서와 수리아 문서는 안디옥 교회와 베드로는 관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디옥에 7년 있었다고도 한다. 10년 설도 있다. 요세푸스의 고대사(古代史)는 판에 따라 다른데, 아르메니아탄에 베드로는 처음에 안디옥 교회를 세운 다음에가요스 3년(AD 39- 40)에 출발하여 로마에 가 글라우디오 2년(AD 42- 43)에 유모디오스를 안디옥 감독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3)본도, 소아시아 제지방과 베드로의 관계:오리게누스에 의하면, 베드로는 본도˙갈라디아˙비두니아˙가바도니아 및 아시아에 흩어진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썼고, 에비파니우스는 더 나아가 그는 종종 본도와 비두니아를 방문했다고 썼고, 예로님스는 이 전도여행을 베드로의 안디옥 감독 시대로부터 글라우디오 2년 로마로 출발할 때까지의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수리아의 문서인 `사도의 교의(敎義)'에도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를 창립하고 로마로 가기까지 시무했다고 한다.

 

(4)바벨론과 베드로:리프시우스는 베드로가 바벨론을 방문한 두 가지 증거를 들었다. 하나는 네스트리우스 파(Nestrians) 저자 두 사람이 단정한 것인데, 베드로전서 5:13에 근거한 것임이 확실하다. 다음은 `시몬과 유다 행전'에 시몬이 바벨론에 간 것을썼다. 이는 동명인 베드로에 대한 잘못이었다고는 하나 지나친 억측에 불과하다.

 

(5)로마와 베드로:베드로가 로마에 갔느냐, 갔다면 얼마동안 거기서 활동했는가, 그는 거기서 순교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연대는 언제인가? 각 교회에 보존되어 있는문서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로마 문서:먼저 클레멘스의 문서(AD 96년경)에는 질투 시기 때문에 죄악이 일어난 역사상의 예를 들고, 끝으로 "이 시대에 이르러 교회의 크고 바른 기둥인 사도도 이리하여 그 희생으로 되고, 많은 고통을 감당한 베드로도 이 영광의 곳으로 옮겨…"라고 기록했다. 이렇게 많은 신도들이 죽임을당한 것과, 베드로와 바울이 같은 운명으로 끝난 것은 분명하나 그 때는 언젠가? 클레멘스는 "우리 시대의 일"이라고 했다. 많은 신자가 죽임을 당한 것은 네로의 박해 때인데, 이 두 사도의 죽음도 이 박해의 전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는 박해한 흔적이 없고, 단 상기 문서에 "이 사람들 주위에 많은 택함받은 자들"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사도들은 맨 처음에 당한 자들 속에 있는 것 같다. 두 사도는 네로의 박해로죽은 것 같다. 카이요스 문서에서 인용한 유세비우스의 글을 보면, 바울과 베드로는얼마동안 로마에서 같이 수고하다가 같이 순교했다고 한다.

 

(나) 수리아 문서:안디옥의 이그나치우스(AD 115년 경)는 로마인에게 보내는 서신에 베드로와 바울의 이름을기록하고, 트랄리아 인에게 보내는 서신에는 사도들로서 기록했다. 클레멘스 문학의근본 문서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에는 베드로의 로마행에 관해 극히 적은 귀절이 있는데, 후세 사람이 기입한 것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다.

 

(다) 고린도 문서:고린도의 감독 디오누시우스(AD 170년 경)가 로마 감독 소태로스에게 보내는 서신의 단편으로서,유세비우스의 글에 남아 있는 것에는 베드로와 바울이 고린도에서 같이 활동했다고 기록한 다음, 이달리아에서도 "같이 수고했다"고 기록했다. 이달리아란 로마를 이름할것이다.

 

(라) 소아시아 문서:유세비우스의 책에 있는 파피아스(AD 130년 경)는 베드로전서 5:13의 바벨론을 로마로 해석했기 때문에,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고 한 것은 짐작이 된다. 노스틱 파(Gnosticism)의 `베드로 행전'에는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과 다툰것을 로마에서 있었던 일로 기록하고 있다.

 

(마) 알렉산드라 문서:클레멘스(AD 200년경)가 베드로 전서 주석에 베드로가 로마에서 가르쳤다는 것과, 마가복음과 관계 있다고 기록한 것이 유세비우스에게 있다. 오리게누스(AD 250년 경)도 베드로가 소아시아여행 후 로마에 가서 거기서 자청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다고 한다.

 

(바) 락탄티우스(Lactantius)와 유세비우스(Eusebius) 문서:이 두 사람은 4세기의 사가인데, 전자는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전도한 것을 기록하고, 네로가 베드로를 십자가에 달고바울을 죽인 것을 기록했다. 후자는 베드로가 글라오디오의 치세에 로마에서 마술사시몬과 다툰 것, 마가복음과 베드로가 관계있는 것, 글라우디오의 치세에 베드로는 로마에서 피론과 교제한 것, 로마에서 바울의 참수(斬首)와 베드로의 십자가형, 클레멘스는 베드로와 바울로부터 3대 감독이라는 것, 베드로는 마침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을 기록했다.

(6)유세비우스의 사기(史記):사기에는 이본(異本)이 있다. 하나는 아르메니아 판이고, 또 하나는 예로님스 본(本)이다. 베드로의 로마 도착에 대해 전자에서는 안디옥 교회 설립 후인 가이요스의 제 3년, 즉 AD 39- 40년, 또 유오디오스의 감독 임명은 글라오디오의 제 2년, 즉 AD 42- 43년으로 되어 있다. 후자는 유오디오스 임명을 글라우디오 제 4년으로 하고, 베드로의 로마 도착을 동 제 2년 안디옥 교회 설립 후라고 했다. 베드로의 죽음에 대해 전자는 네로의 13년(AD 67- 68), 후자는 14년이라고 하였다.또 `사기'에는 베드로가 25년간 로마 감독이었다고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