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書槪論/[신약성경개론] 개관

요한 1서:The First Letter of John

好學 2009. 10. 31. 21:46

 

요한 1서:The First Letter of John

 

 

1. 본서의 저자

본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요한복음과 한가지로, 사도 요한의 작으로 되고 있다.

외적증거는 이것을 지지하고, 내적증거도 그것 이상으로 강하다.

한 편에 보여지는 소수의 말이, 다른 한편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반대하는 이도 있으나, 양서에 공통된 용어는 보다 많다.

예컨대 말씀, 빛, 영원한 생명, 사랑, 새 계명, 거한다, 자기의 생명을 버리고 죄를 벗어버림, 마귀의 일 등등.

 

2. 본서의 독자

본서의 수신인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파르티아인(-Parthians오순절 때 예루살렘에 왔던 자국민의 일군)에게 보낸 것이라고도 하고, 또는 팔레스티나의 유대계 그리스도인에게, 혹은 고린도교회에, 혹은 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등등, 그러나 본서는 특정한 교회에 보낸 편지라기 보다는 순회용으로 당시의 일반교회, 특히 소아시아의 제 교회에 보내진 것이리라.

 

3. 본서의 연대 및 장소

복음서 보다도 전에 쓴 것인지, 후에 쓴 것인지의 결정은 곤란하고, 만약 추에 쓴 것이라 해도 기원 2세기 초까지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은 문제이다.

통설따라 1세기 말경, 즉 90년경 요한복음에 이어, 요한이 에베소에서 당시의 일반교회에 써 보낸 것이리라.

 

4. 본서의 특징

(1) 극히 장엄한 사상을, 간결한 문자로서 표시하고 있다.

문장은 소아에게도 이해될 만큼 평이한데, 그 의의는 경건한 성도도 아직 충분하게 찾아낼 수 없을 만큼 심원하다.

기도하는 중에 이를 맛보는 자는, 누구나 자기의 체험의 부족을 통감하리라.

 

(2) 본서는 이미 [진리를 안 자]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일체의 교의를 망라하고 있지는 않으나, 복음과 도덕과의 진수를 가장 명확하게 기술하고 있는 점에 있어서, 요한복음과 함께 신약성경의 압권(壓卷)이라 할 만한 것이다.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여기에 유감없이 종합 통일되어 있다.

신앙을 역설한 바울의 서간과, 행위를 존중한 야고보의 서간과, 모순하는 듯이 보이나, 실은 사물의 표리같이 일치되는 것을 본서를 숙독하는 자가 인정치 않을 수 없는 일이다.

(3) 노사도 요한은 수신인 일동을 자기 아들 같이 생각하고, 신앙의 아버지의 권위와 사랑으로서 가르치고 있다.

엄숙하면서도 유유히 강요하는 일 없이, 차근차근 가르쳐 마지 않는 바는 달리 유(類)를 볼 수 없는 것이다.

 

(4) 영적, 도덕적인 것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빛과 어두움, 진리와 거짓, 사랑과 미움, 생과 사,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랑과 이 세상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아들과 악마의 아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 등등, 그리고 양자를 선명히 대조하기 위해서는 감연히 극단적인 말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13:6, 9, 5:18, 19 등등).

이들을 문자대로 해석하면 신자는 결코 죄를 범하지 않고, 불신자는 죄 중에만 살고 있는 듯 한데, 요한의 정신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편이든 상습적인 상태를 지적한 것임은 전편의 사상에 비추어 명백하다.

 

5. 본서의 목적

(1)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이단에 미혹되는 일 없이, 언제나 정통적 그리스도관에 입각하여 기독교 도덕을 행케 하는데 있다.

1). 많은 이단자(거짓 예언자)가 나타나 있다(4:1).

2). 지금은 마지막 때이다(2:18).

3). 그 하는 말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분별하고,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된다(4:6).

 

4). 거짓말 하는 자란, 예수가 그리스도심을 부정하는 자이다(2:22, 4:3).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서 오신 분임을 고백하지 않는 것이다(4:2, 3). 이것으로 보면, 저자가 경계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 크리스챤케린토스([그] Kerinthos 1-2세기경의 그노시스적 에비온주의적 이단자)가 주창한 그리스도 가현설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참 육체를 가지지 않고, 그 인성과 수난은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단설이다.

이 이단은 또 윤리면에서도 경계해야 할 것이었다.

사랑이라는 글자가 이 편지 중에는 52회 사용되어 있는데,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육체를 취한 그리스도의 구체적 사실 중에 있음을 보였다.

 

(2) 본서가 기록된 주목적의 또 하나는, 하나님 및 예수와의 사귐(교제)을 가지도록 구하는 일이고(1:3), 그것과 동시에 신자 동지의 교제(1:7), 형제애(3:11, 23-24, 4:10-11)를 강조하는데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본서는 요한복음서와 비슷하다. 그러나 본서는, 이것을 구체적 윤리생활과 결부시키는 점에서 특질적이다.

하나님 및 예수와 사귐을 가지는 것은 빛가운데를 걷고(1:6-7),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2:6, 9, 10, 3:11).

<메네인 mevnein>이라는 말은, [있다]든가 [거하다]등으로 번역되는 말인데(2:6, 24, 3:6, 24, 4:12, 16). 이것은 사귐(교제)을 보여주는 요한의 특징적 용어이다. 또 그와 같은 교제의 근거는 성령이시다(4:13).

 

(3) 이상과 함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자각케 하는데도 있다(3:14-15, 5:11-13).

그러나 또 본서에 서는 장래적 종말의 희망 및 재림시의 성취도 말해지고 있다(2:28, 3:2, 4:17).

6. 본서의 내용-본서는 편지의 체재를 갖추고 있지 않고, 수신인도 없으며, 인사도, 축복도 없다.

그러나 저자는 어떤 특정한 독자를 염두에 두고 다음 사실들을 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시는 이단 사설이 횡행하여 자주 교회를 침해했다.

어떤 이는 예수를 우리들과 같은 죄인이라 하고, 그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영이 그에게 임하고, 겟세마네에서 다시 그를 떠났다고 주장했다.

또 혹자는 그의 인간으로서의 실재를 부정하고, 지상의 그는 단지 유령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요한은 이 양설을 절대로 부인하고, 예수 는무한의 옛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계신 거룩한 실재자로서, 드디어 육체를 취하여 사람으로 되어 세상에 나타났음을 주장하고, 이로써 복음의 기초를 굳게했다(4:2).

또 이단자들이 지식을 과중히 여기고, 그들 자신처럼 하나님을 아는 자는, 죄를 범해도 위법이 아니라 말하고, 극단의 도덕무용론을 주장하자, 요한은 이에 대하여, 죄는 누가 범해도 불법임을 단언하고, 기독자는 은혜를 감사하여, 사랑과 의로 살아 갈 것을 반복 역설했다(3:4).

 

-내용 분해-

 

1부. 서언 1:1-4

 

 

2부. 하나님은 빛이시다 1:5-2:28

(1) 신앙생활의 특징(1:5-2:11)

1). 빛 가운데를 걸어감(1:5-10)

2). 보혜사 예수 그리스도를 우러름(2:1-6)

3). 형제를 사랑함(2:7-11).

(2) 악을 본받지 말라(2:12-28)

1). 세상을 사랑말라(2:12-17)

2). 적그리스도를 피하라(2:18-28)

 

 

3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2:29-5:12

(1) 기독자의 생애(2:29-4:6)

1). 하나님의 아들과 마귀의 자녀(2:29-3:12)

2). 생과 사(3:13-24)

3). 진리의 영과 미혹의 명(4:1-6)

(2) 신앙과 사랑과 의와의 관계(4:7-5:12)

1). 하나님은 사랑이시다(4:7-21)

2). 세상에 이기는 신앙(5:1-12)

 

4부. 맺는 말 5:13-21

(1) 응답되는 기도(5:13-17)

(2) 권면-우상을 피하라(5:18-21)

 

※ 다음과 같이도 한다.

1부. 서언 1:1-4-생명의 말씀

 

2부. 사귐의 도(道) 1:5-2:27

(1) 빛 가운데를 걸을 것(1:5-2:2)

(2) 계명을 지킬 것(2:3-6)

(3) 형제를 사랑할 것(2:7-11)

(4) 격려와 경계(2:12-17)

(5) 적그리스도를 경계할 것(2:18-27)

 

3부. 하나님의 자녀의 도 2:28-5:12

(1) 하나님의 자녀의 의의(2:28-29)

(2) 하나님의 자녀로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3:1-3)

(3)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범치 않느다(3:4-12)

-상습적인 능동의 죄-

(4) 하나님의 자녀는 서로 사랑한다(3:13-24)

(5) 하나님의 자녀는 계명을 지킨다(4:1-6)

(6) 하나님의 사랑과 형제애(4:7-21)

(7) 하나님의 자녀의 신앙(5:1-12)

 

-세상을 이기는 신앙-

4부. 결미 5:13-21

 

7. 본서의 구약인용-본서에는 복음서와 달리, 1회도 구약 인용이 없고, 특별하게 유대인을 적대하는 표현도 없다.

 

[文獻]

A.E. Brooke:The Johannes Epistles, ICC, 1912;

H. Windisch:Die Katholischen Briefe, NTD, 19513;

J. Schneider:Johannesbriefe, NTD, 19619;

C.H.Dodd:The Johannine Epistles(Moff Comm.), 1946;

H. Asmussen:Wahrheit und Liebe,U.B. 19573:

E. Gaugler:Die Johannesbriefe, 1964;

R. Schnackenburg:Die Johannesbriefe,HTK, 1963;

R. Bultmann:Die drei Johannesbrife, 1967.

 

----------------------------------------------------------

 

요한:John(인명)

 

('Iwavnnh", John)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

 

[1]사도 요한이다.

세베대의 아들이며 사도 야고보의 형제이다.

요한복음, 요한 1, 2, 3서, 요한계시록의 저자이다.

사도 요한에 대해서는 성경 기록에 의한 것과 전설에 의한 것을 구별하여 살펴 본다.

(1)복음서 이전:요한은 갈릴리 출신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정열적이고 용기가 있으며 호전적인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영향이 큰 유대 지방 사람들에 비하면 일반적으로 소박하고 편견도 적고 늠름하다고 한다.

12제자 중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전원을 갈릴리사람 중에서 택한 것은 흥미롭다. 요한은 갈릴리의 한 어촌에서 자랐다.

벳새다라고도 하고 가버나움이라고도 한다.

그의 가족은 성경에 나오는 사람만도 네 사람 있다.

먼저 어부인 아버지 세베대(막 1:19,20)와 어머니 살로메(마 27:56,막 15:40)이다. 살로메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자매라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그녀도 열심히 예수를 따랐으나 그 아들들을 영광의 자리에 앉힐 것을 구하여 어머니다운 이기심을 보인 적도 있다(마 20:20,21).

야고보는 그의 형일 것이다.

요한과 더불어 사도로 택함 받았으나,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사도 중 최초의 순교자로 되었다(행 12:1,2).

그리고 요한 자신이다.

 

(2)복음 시대:요한은 처음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다음 예수의 제자로 되었다(요 1:30-).

즉, 갈릴리해변에서 아버지와 형제 야고보와 같이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을 때 예수를 만난 것이다(마 4:21,막 1:19).

그 때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부르시니 그들 형제는 즉시 배와 부친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따랐다.

바울과 같이 극적인 회심을 체험한 일도 없지만, 예수님과 행동을 같이 하거나 또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곧 문자 그대로 일체를 버리고 예수를 따르게 되었다(눅 5:1-11).

예수께서 갈릴리 전도를 시작하자 요한은 주님과 같이 동행했으며, 직접 훈도(薰陶)를 받았다(막 1:21,22).

또 12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선택되어(마 10:2,막 3:17,눅 6:14) 그 중에서도 가장 예수의 사랑을 받았으며, 베드로와 야고보와 더불어 항상 예수님 곁에 있었다. 야이로의 딸 사건(눅 8:49-56), 산상의 변화(마 17:1-8),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막 14:32-42) 등, 그는 특별한 때에 주님 옆에 있는 것이 허락되었다.

또 최후의 만찬 준비 명령을 받은 것도,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었던 것도, 십자가상에서 최후의 순간 주님께로부터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받은 것도 이 요한이었다(눅 22:8,요 13:23,19:26,27).

요한에게서 모순되는 두 가지 성격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내성적이다.

요한복음에서도 그는 거의 말하지 않았으며, 부활하신 날 아침 정경에서도 그의 소심할 정도의 신중성이 엿보인다(요 20:1-10).

사도행전에서도 그는 항상 베드로의 보좌역을 하고 있다.

둘째는 동시에 또 정열적이고 과격한 성격의 일면도 보인다.

예수를 받아 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의 촌에 하늘로부터 불을 내리게 하자고 제안하고(눅 9:54), 예수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 내는 것을 금지시켰다(눅 9:49).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에게 `보아너게(우뢰)'란 이름을 붙였다(막 3:17).

그는 십자가까지 예수님을 따라가 그 최후를 지켜본 유일한 남자 제자이다.

그는 부활의 날 아침 베드르와 같이 무덤에 갔고, 그 후 몇 차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여 그는 죽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졌다(요 21:23).

 

(3)사도행전 시대:사도행전에는 과히 등장하지 않는다.

성전에서의 기적(행 3장),사마리아인에게 성령 강림(행 8:14-25) 때 등장하나 모두 베드로의 보좌역으로서이다.

아마 그는 예수님의 유언을 충실히 따라 마리아의 시중에 골몰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미문(美問)에서 앉은뱅이 거지를 고쳐 주었을 때, 또 예루살렘의 대중에게 기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의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증거를 했을때, 그 표면에 서는 이는 베드로였으며, 그를 붙들어 세운 이는 요한이었다.

유대인들이 그들을 위협하여 앞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며 가르치지 말라고 경계하자,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대담하게 대답하였다(행 4:19,20).

바울이 회심후 14년만에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AD50년 경)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었던 야고보, 게바, 요한의 세 사람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했다고 갈라디아서 2:9은 쓰고 있다.

그 밖에 요한복음에는 요한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 않으나, 다른 복음서의 기사, 혹은 전후 관계로 미루어 사도요한에 대해서라는 것은 1:35의 `세례 요한의 제자인 두 사람 중 하나', 18:15의 `다른 제자 하나', 13:22, 25, 19:26, 20:2, 21:20, 24의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되어 있는 것 등이다.

 

<참고〉 전설로서 알려진 요한전설에 의하면, 요한은 십자가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당부에 의해 마리아를 보호함에 있어서 마리아를 예루살렘에 있던 자기 집에 모셔다가 마리아가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보호했다.

요한은 바울의 활동에 의해 복음이 소아시아 지방에서 세력을 얻게 되자, 에베소 교회의 초빙을 받아 요한은 에베소에 갔다.

이 전설은 이레니우스(Irenaeus), 에베소의 폴리크라테스(Polycrates),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등의 저서에 근거한 것이다.

이레니우스(제 2세기 말 프랑스 리용의 감독)의 `배이단'(排異端)에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세웠다.

요한은 그들과 같이 영주하여 트라야누스조(朝)에 이르렀다"(제 3권 제 3장), "주의 제자 요한은 전에 주의 품에 의지했던 사람인데, 아시아의 에베소에 살면서 일부의 복음서를 썼다"(제 3권 제 1장)는 기사가 있다.

폴리갑은 사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또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과 교제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에 의해 서머나 교회에서 아시아의 감독에 임명되었다.

요한이 트라야누스(Trajanus, 53- 117, 로마 황제, 재위 98- 117) 황제 때까지 살았다면 극히 고령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에베소에는 감독 요한이 있었기 때문에 이사도 요한을 장로 요한으로 보는 이도 있다.

여하튼 전설에 의하면, 그 후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형되었다 에베소에 있는 요한의 무덤이 있다는 것이다(이 해설은 계 1:9"나 요한은…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요한이 밧모 섬에 간 것은 묵상을 위해(와이스의 설), 또는 박해를 피하기 위함이었다는 설도 있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는 고령에 달할 때까지 에베소에 있다가 거기서 고요히 죽었다고도 하나, 이와 정반대의 전설도 있다.

그것에 따르면 "히엘라폴리스의 파피아스(Papias) 감독은 `주의 교훈' 제 2권에 요한은 유대인에게 피살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운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제 9세기에 생존한 게오르기우스 하다르톨로스(Georgius Harmartolos)의 저서에 있다고 한다.

여하튼 이와 같은 전설이 있었다는 것은, 예를 들면 수리아의 교회력에 12월 17일은 요한과 야고보의 순교 기념일로 되어 있다는 것 등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상상할 수 있다.

사도 요한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전설도 남아 있다. 그는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51-96, 로마 황제, 재위 81 96) 황제 때 박해를 받아 독배를 마셨으나 아무런 해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또 그는 펄펄 끓는 기름솥에 던져졌지만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했다고도 한다. 아폴로니우스는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죽은 자를 소생시켰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그는 타락한 신자로서 강도의 무리에 빠진 자를 구출하기 위해 삼림에 들어가 마침내 그를 신앙으로 복귀시켰다"고 말했다.

그 밖에 세린사스의 이단을 극복하기 위해 소아시아에서 제 4복음서를 썼다거나, 노경에 이르러서는 자고새를 벗삼아 노는 것을 일삼았다거나, 또 입버릇처럼 "활을 늘 휘어 두어서는 안된다"느니 하는 전설도 있다.

그는 종종 교회에 부축을 받고 출석했으나, 나이 많아 말도 변변히 할 수 없게 되어 겨우 "젊은 아들아, 서로 사랑하라"은 말을 한데 불과했다고 제롬은 말했다. 그가 죽자,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잔다고 전해졌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21:23의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를 반영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