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漢字文學/[사서오경]四書五經

논어(論語) 第四 里仁篇 (이인편 14~26)

好學 2009. 9. 21. 23:55

 

논어(論語) 第四 里仁篇 (이인편 14~26)

 

里仁第四 14


子曰: "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자왈  불환무위   환소이입  불환막기지  구위가지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무엇을 가지고 설 것인가를 걱정하라. 사람들이 자기를 알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참으로 알려질 수 있기를 구하라."


<해설>

위(位)가 없다는 것은 사회적 지위를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적 지위를 얻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기 보다는, 과연 내가 무슨 실력으로 그 자리에 당당히 설 수 있을 것인가를 걱정해야 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도 '무위(無位)'와 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걱정해야 할 사안이 아니다. 내가 참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참으로 내가 남에게 알려질 만한 실력을 축적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참으로 알려질 수 있기를 구하라! 소리 없이 자신의 실력을 축적한 사람에게는 출세의 기회가 어김없이 찾아온다.


里仁第四 15


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唯." 子出, 門人問曰:"何謂也?" 曾子曰: "夫子之之道,

자왈   삼호  오도일이관지   증자왈  유   자출  문인문왈  하위야   증자왈    부자지지도

忠恕而已矣."  

충서이이의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

증자는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증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뿐이다."


<해설>

증자는 공자사상의 통일된 핵심을 충서(忠恕)라 보았다. <충>이란 자기 양심에 충실한 것이거니와, 그것만으로는 남에게 통용하기 어렵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지적인 동정이 필요해진다. 그것이 <서>며 충과 서가 결합해서 한 덩어리가 된 것이 인(仁)이다. 그러나 이 장은 공자와 공자의 애제자 자공과의 사이에 있었던 대화의 두 장면의 파편을 드라마틱하게 합성한 것이다. <위령공>에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대화가 공자와 자공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다. 공자와 자공이 유랑의 길을 헤매고 있던 적적하고도 한가로운 때였을 것이다. 그때 공자는 갑자기 옆에 있던 자공에게 묻는다. "사야! 너는 내가 뭘 많이 배워서 많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이러한 공자의 갑작스러운 자기 확인의 질문에 자공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황망히 자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선생님처럼 많이 아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암 그렇고 말구요. 그렇지 않단 말입니까?" 이때 공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자공의 열띤 모습을 자애롭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말한다.

"사야! 그렇지 않다! 나의 도는 하나로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단다." 공자가 말하고 있는 '일(一)'이란 충서(忠恕)처럼 한 개의 단어나 한 개의 개념이 아니요, 그의 사상 전체를 전관하고 일관하는 통합성의 문제이다.


<위령공>에 자공과 공자 사이에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생생한 대화가 수록되어 있다. 자공은 공자에게서 수많은 가르침을 배웠다. 그러나 무엇인가 한 마디로써 그 많은 가르침을 요약할 수 있는 금언을 가슴에 새기고 싶은 어떤 충동을 갑자기 느꼈던 모양이다. 자공은 공자님께 여쭌다. "선생님! 제가 단 한 마디로써 종신토록 그것을 실천에 옮기며 살 수 있는 그런 것이 있겠습니까?" 공자는 말문을 연다. "그래? 서(恕)일 꺼야! 서라는 것은, 자기가 원치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아니하는 것이란다." 그런데 자공이 원래 질문을 던진 본래적 맥락은 공자의 전체 사상의 한마디 요약이 아니라, 자기 삶의 행동지침을 요약적으로 표현한 요청이었다. 즉 그것은 개념적 축약이 아니라, 실천적 행위의 일관된 준칙과도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공자는 서를 개념적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행동의 준칙으로서 제시했다. '자기가 원치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


里仁第四 16


子曰: "君子喩於, 小人喩於."

자왈   군자유어의  소인유어이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의에서 깨닫고, 소인은 이에서 깨닫는다."


<해설>

'유(喩)'를 '깨닫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군자는 의로움에서 깨달음을 얻고, 소인은 이로움에서야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도 있다: '군자의 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里仁第四 17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자왈   견현사제언  견불현이내자성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하며, 어질지 못한 이를 보면 안으로 자기를 되돌아본다."


<해설>

현명한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견(見)'이라 단순히 시각적인 '봄'이 아니라, 내면적인 '만남'이다. '사제(思齊)'는 배움의 동경이요, 그것은 본받음이다. 어진 이를 만나면 우리는 그와 같아지기를 희구한다. 말씨나 행동방식이나 사고방식이 닮아 가는 것이다. 그러나 어질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그를 정죄하기에 앞서 우선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내가 어질지 못하지나 아니한지를 반성하는 것이다. 내가 남이 어질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그 어질지 못함의 기준이 이미 나에게 있는 것이므로, 내 자신이 그 기준에 합당한 존재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를 먼저 반성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里仁第四 18


子曰: "事父母幾諫, 見志不從, 又敬不違 勞而不怨."

자왈   사부모기간  견지부종  우경불위 노이불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부모를 섬길 때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은밀히 간해야 한다. 부모님의 뜻이 내 말을 따르지 않음을 보더라도 더욱 공경하여 어기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괴롭더라도 원망하지는 말아야 한다."


<해설>

부모라 할지라도 성인이 된 나의 입장과 그 삶의 뜻 사이에 충돌이 생겨나는 상황은 얼마든지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충돌의 상황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기간(幾諫)'은 부모님의 생각이 틀렸다고 간할 때는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예의를 갖추어 은밀히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간하였어도 부모님의 뜻이 나의 말을 따르지 않는 상황에 직면케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럴 때일수록 더욱 부모님에 대한 공경심을 늦추어서는 아니 되며 부모님의 말씀을 어기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짓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님의 생각이 내 생각과 틀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 생각을 어기지 않고 따르는 상황이, 나에게 괴롭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결코 원망치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의 체계 간에 충돌이 있을 때, 그것을 논리적 진위만으로 해결하려는 이성주의적 노력은 그 한계가 명백한 것이다. 그것은 자연적 법칙의 필연적 세계에서는 가능한 것이지만, 인간의 정감에서 발출되는 도덕적 영역에서는 그러한 이성주의적 해법이 때로 무의미한 것이다. 부모님과 나의 충돌은 깊은 정감의 공유를 토대로 하고 있으므로 그 충돌의 해결은 반드시 시간을 두고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里仁第四 19


子曰: "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

자왈   부모재  불원유  유필유방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부모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멀리 놀러가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놀러 갈 때에는 반드시 부모님께 갈 곳을 알려드려야 한다."


<해설>

'유(遊)'라는 표현은 집을 떠나 여행하는 모든 행위를 총칭한다. '유필유방(遊必有方)'의 ''은 가는 방향, 즉 갈 곳을 부모님께 아시도록 한다는 뜻이다. 이 장에서는 부모님의 마음으로써 자식된 나의 마음을 삼는 것이 곧 효(孝)라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里仁第四 20


子曰: "三年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자왈   삼년무개어부지도  가위효의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삼 년 동안 아버지의 도를 고침이 없으면 효라 이를만하다."


<해설>

<학이>11을 참조


里仁第四 21


子曰: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

자왈   부모지년  불가부지야  일즉이희  일즉이구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부모님의 나이는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한 편으로는 그로써 기쁜 마음이 들고, 한 편으로는 그로써 두려운 마음이 든다."


<해설>

부모님의 나이는 애써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 그런가? 부모님이 나이를 잡수셨다는 그 사실로 해서 우리는 기쁨과 슬픔을 항상 동시에 맛보게 되는 것이다. 오래 사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기쁨이 앞서지만, 또 동시에 사실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슴을 졸이게 되는 것이다. 이 문장은 아주 평이한 사실에 대한 묘사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애틋한 느낌의 사실을 너무도 절묘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명구에 속한다.


里仁第四 22


子曰: "古者言之不出, 恥躬之不逮也."

자왈   고자언지불출  치궁지불체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옛사람들이 말을 함부로 내지 않는 것은 몸소 실천함이 곧 미치지 못할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해설>

'옛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예찬하며 '현재 사람들'의 경박함을 경계한 공자의 말이다. 옛 사람들은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았다. 그 말을 몸소 실천하지 못할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교언영색(巧言令色)' 이래의 공자의 일관된 주제였다. 말보다 실천이 앞선다는 것, 말하지 아니하고 묵묵히 행동으로 보이는 솔선수범의 삶을 산다는 것, 이것은 유교적 가치관의 대명제이다.


里仁第四 23


子曰: "以約失之者, 鮮矣."

자왈   이약실지자  선의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검약으로써 잃은 자는 적다."


<해설>

'약(約)'이란 경제적 검약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언어의 검약, 행동의 검약, 가치관의 총체적 검약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약'이란 불급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의도적인 검약이다.


里仁第四 24


子曰: "君子欲訥於言, 而敏於行."

자왈   군자욕눌어언  이민어생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말은 어눌하게 하고,행동은 민첩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해설>

말은 아무리 느리고 둔해도 상관없는 것이지만, 행동 즉 실천은 민첩해야 하는 것이다. 실천 없이 말만을 앞세우는 인간, 이러한 종류의 인간이 바로 공자가 깊게 증오하는 인간이다. 말을 더듬거리지만 묵묵히 실천이 앞서가는 인간, 바로 이러한 인간상을 공자는 주저 없이 인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인은 언어가 이니요. 개념이 아니다. 인은 느낌이요 실천이요 행동이다."


里仁第四 25


子曰: "德不孤, 必有隣."

자왈   덕불고  필유린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덕은 외롭지 아니하다. 반드시 이웃이 있게 마련이다."


<해설>

덕(德)이란 근원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고립될 수 없는 것이다. 덕은 나의 존재에 축적되어 가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관계 속에서만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그 관계를 공자는 '유린(有隣)'이라 표현한 것이다.


里仁第四 26


子游曰: "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疏矣."

자유왈   사군삭  사욕의  붕우삭 사소의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임금을 섬김에 너무 자주 간하면 욕을 당하고, 붕우간에 너무 자주 충고하면 멀어지게 마련이다."


<해설>

'삭(數)'은 단지 '자주'라는 부사적 용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주 간하다'는 동사적 용법을 지니고 있다. 윗사람 섬김에 나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떠나야 하고, 친구를 인도함에 나의 선한 의도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쳐야 한다. 타인은 궁극적으로 내가 고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내가 개조할 수 있다는 신념은 하나의 독단이요 환상이다. 인간의 개선은 그 주체의 깨달음의 계기에 의하여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의 간언이란 기껏해야 상대방의 주체적 자각의 한 계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한 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나는 함구해야 한다. 쓸데없이 계속 간하면 말하는 자가 경박하게 되고, 듣는 자가 염증을 낼 뿐이다. 그러한 자들은 정의를 빙자하여 영화를 구하려다 오히려 욕을 당하게 되고, 친구 간에 의리를 빙자하여 친함을 구하려다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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