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漢字文學/[사서오경]四書五經

논어(論語) 第四 里仁篇 (이인편 6~13)

好學 2009. 9. 21. 23:57

논어(論語) 第四 里仁篇 (이인편 6~13)

 

里仁第四 6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

자왈   아미견호인자  오불인자  호인자  무이상지  오불인자  기위인의   불사불인

 

者加乎其身. 有能一日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자가호기신  유능일일용기력어인의호   아미견력부족자 개유지의   아미지견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아직도 인(仁)을 좋아하는 자와 불인(不仁)을 미워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인을 좋아하는 자는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 그런데 불인을 미워하는 자는 그 인을 행함에 있어, 불인한 것이 자기 몸에 물들지 않게 한다. 하루라도 그 힘을 인에 쓸려고 노력한 자가 있는가? 나는 그 힘이 부족한 자를 본 적이 없다. 아마도 그 힘이 부족한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단연코 그러한 자를 본 적이 없다."


<해설>

이 글에서 공자가 보지 못한 것은 다음의 두 종류의 인간이다.

한 인간의 유형은 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또 한 인간의 유형은 불인을 미워하는 사람이다. 인을 좋아하는 사람과 불인을 미워하는 사람은 모두 공자에게서 높이 평가되는 인간의 두 유형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이 유형의 인간을 아직 만나보지 못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을 좋아하는 사람과 불인을 미워하는 사람의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호인자(인을 좋아하는 사람)는 인이라는 덕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말한 것이고, 오불인자(불인을 미워하는 사람)는 부정적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그렇지만 호인자만으로 인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오불인자가 있어야 비로소 우리가 말하는 호인자의 진정한 상이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즉 호인자는 오불인자의 실천적 행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인을 좋아한다는 것은 최상선을 의미한다. 최상선이란 그 이상의 이상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이상에 더 보탤 것이 없는 완전함이다. 이것을 공자는 '무이상지(無以尙之,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 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호인자로써만 운영되지 않는다. 오불인자의 실천적 행위 또한 중요한 것이다. 인하지 못한 것을 증오할 줄 아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사회정의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호인자의 침묵보다 오불인자의 증오의 함성이 때로 인간세에 더 강렬하게 인의 가치를 구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불인자의 방법론은 보다 소극적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불인함이 자기 몸에 물들지 않게 경계하는 것이다. 불인함을 경계함으로써 인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호인과 오불인은 같은 동면의 양면이다. 하루라도 인에 힘을 쓴 자가 있는가? 이 표현은 그 다음에 연결되는 '나는 힘이 부족한 자를 보지 못하였다'라는 구문의 조건절로서, 가정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루라도 인에 힘을 쓰려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힘이 부족해서 인을 이룰 수 없다고 하는 게으른 변명은 통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돈을 벌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나의 의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물질적 여건과 나의 성실한 노력과 재주와 시대적 상황의 모든 여건이 맞아 떨어져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仁)의 실천은 이러한 객관적 여건의 구비나 불비를 막론하고 나의 의지로부터 절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때고 어느 상황에서든지 '역부족'을 말 할 수 는 없는 것이다. '역부족'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仁)이 아니다.


里仁第四 7


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

자왈   인지과야   각어기당 관과 사지인의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람의 과실이란 각기 그 편벽한 습벽을 따른다. 사람의 과실을 살펴보면 곧 그 인함을 알 수 있다."


<해설>

주자의 집주의 입장에서 '각어기당(各於其黨)' 이라는 의미를 해석하면, 인간의 오류는 그 당류에 맞게 일어나고 있다는 식으로 그 해석의 가닥을 잡는다. 즉 군자는 군자다운 오류를 범하며, 소인은 소인다운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즉 군자는 인정이 후하기 때문에 과실을 범하고, 소인은 인정이 박하기 때문에 과실을 범한다는 것이다. 군자는 지나치게 사랑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고 소인은 너무 잔혹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자 신주의 해석은 인한 사람이나 군자라 해서 오류가 없을 수는 없다는 보편주의적 사고가 배태되어 있다. 즉 군자는 완벽하고 소인은 오류투성이라고 하는 식의 이원론적 인간상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과실의 형태만 보아도, 그 과실이 주체인 인간이 인한지, 인하지 못한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완벽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은 허물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허물 그 자체가 인한 허물이 있고, 불인한 허물이 있다. 그 허물을 보아서 우리는 그 인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인(仁)의 정체는 그것의 부정적 상태에서 드러난다는 신주의 입장은 공자사상의 매우 소박하고 인간적인 측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산 정약용은 당(黨)이라는 것을 인간에게 고유하게 형성되어 있는 편벽한 습벽과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 "과는 허물이다. 당은 편벽과 같은 뜻이다. 지혜로운 자의 허물은 항시 지혜 때문에 생겨나며, 용기 있는 자의 허물은 항시 용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는 제각기 그 편벽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다. 인한 자의 허물 또한 그러한 것이므로, 그의 허물을 보면 또한 그의 인함을 엿볼 수 있다."


里仁第四 8


子曰: "朝聞道, 夕死可矣."

자왈   조문도  석사가의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해설>

고주는 이 공자의 고백을 정치사적 맥락에서 푼다. '문도(聞道)'의 道도덕의 정치가 실현되는 세상의 출현을 의미한다. 공자는 죽음에 임박할 때까지 자신의 고국, 노나라에 그러한 인(仁)에 의한 정치의 밝은 세계가 도래하기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몸은 쇠해가고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한다. 아~ 아침에 그러한 도의 세상이 밝았다는 소식 한번만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을 텐데! 그런데 신주는 이러한 정치사적 맥락과 무관한 공자의 일상적 체험, 즉 진리를 갈망하는 애절한 호소로서 풀고 있다. 주자는 말한다. "도(道)라는 것은 사물이 제각기 정당한 모습을 지니는 이치이다. 만약 그 도를 얻어 듣는다면 삶이 순탄하고 죽음이 편안하여 다시 한을 남기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아침과 저녁을 말한 것은 그 때의 가까움을 매우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里仁第四 9


子曰: "士志於道, 而恥惡衣惡食者, 未足與 議也."

자왈   토지어도  이치악의악식자  미족여 의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서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긴다면, 그와 더불어 의논할 수가 없다."


<해설>

악의(惡衣)와 악식(惡食)은 부끄러움의 대상이 아니다. 도(道)에 뜻을 둔 선비가 악의·악식을 부끄러워  한다면, 어찌 그를 친구 삼아 말벗을 할 수 있으리오? 아무리 비싸고 사치스러운 의식이라 할지라도, 더러운 것 투성일진대, 오히려 그것을 멀리하는 것이 선비의 아름다움이요 멋이다.


里仁第四 10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자왈  군자지어천하야   무적야  무막야 의지여비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세상일에 관하여서는 가까이 할 것도 없고 멀리 할 것도 없다. 오로지 의로움에 따를 뿐이다."


<해설>

적(適)이라는 것은 긍정의 말이요, 막(莫)이라는 것은 부정의 말이다. 이란 가까이 함이요, 이란 멀리 함이다. 무적과 무막이라는 것은 중용에 대한 양극단이다.

군자는 인간세를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자로 세상일에 대해 어떤 공적 기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적·무막' 이라는 표현은, 사적 감정에 치우쳐 세상일을 긍정하고 부정하는 경향성을 경계한 말이다. '비(比)'는 따른다는 뜻이다.


里仁第四 11


子曰: "君子懷德, 小人懷土; 君子懷刑, 小人懷惠."

자왈   군자회덕  소인회토  군자회형  소인회혜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큰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편안한 삶의 터를 생각한다. 군자는 보편적 법칙을 생각하고 소인은 작은 혜택을 생각한다."


<해설>

'회' 라는 것은 '생각 한다',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덕'이란 큰 덕이다. 즉 보편적인 삶의 가치이다. '회덕' 이란 '나의 존재에 고유한 선한 본질을 보존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토'란 삶의 터전이라는 뜻이다. 편안한 자기만의 삶의 반경을 의미한다. '회토'는 '자기가 사는 곳의 편안함에 탐닉하는 것을 말한다.' '형' 이란 단순한 '형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사회질서, 즉 법 일반을 의미한다. '혜'란 자신에게 이로운 은택, 즉 '봐 줌'의 관용의 의미한다. 군자는 사회기강으로서의 보편적인 법질서를 생각하지만, 소인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되는 법망의 구멍이나 빽에 의한 은혜만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里仁第四 12


子曰: "放於利而行, 多怨.'

자왈   방어리이행  다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이익에 질질 끌려 행동하면 원망만이 많이 생겨날 뿐이다."


<해설>

'방(放)'이란 질질 끌려 다님을 의미한다. 매사를 이익에 질질 끌려 다니면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利)'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만을 앞세우는 행동이다. '이'는 공자에게 있어서는 인(仁)의 반대적 덕목이다. 인(仁)은 인간을 최종적 목적으로 간주하는 어떤 법칙을 전제할 때만이 의미 있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성이란 인간이 스스로 어떤 보편적 법칙을 입법하고 그 스스로 입법한 법칙에 따라 행위하는 것을 말한다. 보편적 법칙이 확립될 때만이 그 보이지 않는 법칙의 도덕적 연대감 속에서 인간들은 서로가 서로를 규제하고 결속하고 의미 있는 질서를 유지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利)는 이러한 보편적 인의 법칙을 파괴하는 무법자이다. 이(利)는 나의 자유와 쾌락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자유와 쾌락을 희생시킨다. 그것은 곧 인간을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수단으로서 바라보는 것이다. 나 이외의 모든 인간이 나의 이익을 위하여 복무할 뿐인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수단화 될 때 그러한 사회는 오직 원망만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里仁第四 13


子曰: "能以禮讓爲國乎? 何有? 不能以禮讓 爲國, 如禮何?"

자왈   능이례양위국호   하유  불능이례양 위국   여례하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예와 겸양으로써 나라를 잘 다스린다면, 도대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예와 겸양으로써 나라를 잘 다스리지 않는다면 도대체 예를 어찌할 것인가?"


<해설>

'예양(禮讓)'의 '양(讓)'은 '사양', '겸손', '겸양'의 의미를 나타낸다.

공자는 말한다. 예양으로써 한 나라를 다스린다면, 그 나라를 다스림에 과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통치자가 양보할 줄 알고 그 밑의 지배관료들이 서로 양보할 줄 안다면 그 나라는 다스려지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욕심을 채우려고만 하니까 그러한 이해의 충돌 속에서는 국민들의 원성만 높아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양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면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건만, 사람들이 예양으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고 욕심만 부리고 있으니, 모처럼 인간세의 문명의 결정체로서 공자가 제시한 예(禮)가 아무 소용이 없지 아니한가? 그 고귀한 예를 어찌할 것인가? 사람들이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지 아니한다면, 예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공자의 개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