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漢字文學/[사서오경]四書五經

논어(論語)의 第一 學而篇(제일 학이편)

好學 2009. 9. 21. 23:50

 

논어(論語)의 第一 學而篇(학이편)

 

學而第一(학이제일) 1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溫이면 不亦君子乎아."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배워 때에 맞추어(timely)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

뜻을 같이 하는 자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으니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

<해설> 
공자에게 있어서의 학(學)이란 "무지로부터의 탈출"이며 "미지의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이다. 공자의 일생을 통해 추구된 학(學)의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학문"이 아닌, "禮(예)·樂(악)·射(사)·御(어)·書(서)·數(수)"로 통칭되는 육예(六藝)를 말한다. 그것은 문무의 구분이 전혀 없는 매우 실용적인 개념이다. "習(습)"은 學과 병치되는 독립된 개념이다. "習"(익힌다)이라는 것은, 學이 미지의 세계로의 던짐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실천의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실천은 반드시 "때"(時)를 갖는다는 것이다. 문무가 통합된 六藝(육예)를 익히는 과정이란 반드시 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린 아이가 書(서)·數(수)를 할 수는 있으나 射(사)·御(어)를 할 수는 없다. 장년이 되어도 여름의 맑은 날씨에 말달리고 활을 쏠 수는 있으나 추운 겨울날씨에 빙판에서 말달리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배움의 익힘이란 내 몸의 모든 상태에 따라 그 익힘의 형태가 달라질 것이요(身中時), 또 계절의 형태에 따라(年中時), 또 하루 중에서 아침,점심,저녁에 따라(日中時) 익힘이 달라질 것이다.

 

때를 잘못 타서 배우고 익히면 그것이 병이 되는 것이다. 공자는 평생을 통해 때를 맞추어 끊임없이 정진하여 삶의 기쁨을 만끽했다는 뜻이다. "不亦說乎(불역열호)"라 한 구문에서 "亦"의 뜻도, 딴 즐거움도 있는데 이것 "또한" 즐겁다는 식으로 새기면 안된다. 여기서 "亦"이란 자기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남에게 전달하고 남의 동의를 얻고자 하는 강조의 뜻으로 새겨야 한다. 그것은 상대적인 "亦"이 아니라 기쁨의 절대적 경지를 구가하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구문의 "不亦樂乎"의 "樂"과 첫 구문의 "說"에 있어서 "說(열)=悅"은 나의 실존적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뜻이요, "樂"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즐거움"을 표현한 말로 보아야 한다. 說은 卽自的(즉자적)이요, 樂은 對自的(대자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朋"이란 우리말의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朋黨(붕당)"이요, "同門(동문)"이요, "同志(동지)"다. 그것은 개인적 친구가 아니라, 학을 위하여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遠方(원방)"이란 먼 나라 사람들까지 찾아온다는 뜻만이 아니라 더 중요한 의미는 國을 벗어난 鄙野(비야)의 세계, 즉 편벽한 庶人(서인)의 세계까지 포함해서 말한 것이다.

 

즉 자로(子路)와 같은 卞(변)의 야인(野人)들도 찾아왔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공자의 "有敎無類(유교무류)"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실현을 위하여 배움을 같이 하는 붕당이 형성되었다는 것, 공자의 인생을 회고할 때, 가장 큰 즐거움 이었을 것이다. "人不知而不溫"에서 "人"은 "남"(타인)의 뜻이다. 옛말에 人은 己(자기)와 대비되는 말이다. "不知"는 단순히 "알아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공자의 인생은 자기의 이상을 실현해줄 명군(名君)을 만나기 위하여 주유한 삶이었다. 결국 "人不知"란 뜻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할 때, 정치적으로 등용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좌절된 素人(소인)으로서 마감한다는 뜻이다. "溫"이란 단순히 "부끄러움"의 뜻이 아니라,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 우리말로 "한"에 해당되는 말이다. 나는 평생을 통해 나의 이상의 현세적 실현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여한이 없다! 왜냐? 바로 君子(군자)됨을 추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學而第一(학이제일) -2


"有子曰 基爲人也 孝第오 而好凡上者 鮮矣니 不好犯上이오 而好作亂者 未之有也니라.
  유자왈 기위인야  효제   이호범상자  선의    불호범상      이호작란자  미지유야
君子는 務本이니 本立而道生하나니 孝弟也者는 基爲仁之本與인저."
군자     무본       본립이도생           효제야자     기위인지본여

"유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 사람됨이 효제스러우면서도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드물다.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하는 자는 있어본 적이 없다. 군자는 근본을 힘쓴다. 근본이 서면 길이 생겨난다. 효제라고 하는 것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일 것이다."

<해설>
이것은 공자의 말이 아니라 有若(유약)의 말이다. 孝는 분명 부모와 자식간의 덕목이다. 그것은 종적이다. 弟는 형제간의 덕목이다. 그것은 횡적이다. 弟는 횡적인 인간관계에 있어서 '공손함'을 나타내는 일반적 덕성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유가의 생각은 바로 이러한 혈연적 관계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느낌을 모든 인륜의 덕성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는 것이다. 이러한 가까운 인간에 대한 善意(선의)를 확충해 나가는 것이 모든 도리의 근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本立而道生(본립이도생)'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道는 노자가 말하는 우주론적 근본원리로서의 道가 아니라, '인륜의 길'을 지칭하는 것이다. 제일 마지막 구문, '孝弟也者, 基爲仁之本與!'에 관한 宋儒(송유)들의 재미있는 논의를 보면, 문제는 이 부분의 딴 판본에 '孝弟也者, 基仁之本與!'라고 되어 있어 발단되는 것인데, 이러한 타본의 논리에 따르면 孝弟라는 덕목이 곧 仁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 즉 효제 그 자체와 인의 뿌리와 가치상의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효제'라는 구체적인, 개별적인 덕목에 불가하다.

 

그렇다면 인의 핵심적 가치가 '효제'의 수준으로 격하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가 程子(정자)에게 묻는다. "효제가 곧 인의 근본이라면, 그것은 곧 효제를 통하여 인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정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럴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爲'라는 글자이다. 그것은 실천이다. 인을 실천하는 것이 효제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했을 따름이다. 효제는 仁의 한 행위일 뿐이다. 따라서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라고 말하면 되어도, 막바로 '인의 근본'이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자에게 있어서 仁이란 정의불가능한 것이며, 한정불가능한 것이며, 오직 삶의 유동적 현실 속에서만 끊임없이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노모스(원 뜻은 가축을 사육하는 장소라는 의미)적 울타리에 갇힐 수 없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仁은 분명히 관계론적인 것이지만, 두 사람의 관계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관계, 인적 관계, 물적 관계, 우주론적 관계의 총상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 성격이 윤리적인데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공자의 仁은 윤리적인 범주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윤리적이라기 보다는 감성적(Feeling-oriented)인 것이요, 감성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심미적인 것이다. 그것은 이성적 판단에 기초한 도덕적 요구가 아니다.

* 學而第一(학이제일) -3

子曰 巧言令色이 蘚矣仁이니라
자왈 교언영색 선의인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말 잘하고 표정을 꾸미는 사람치고 인한 이가 드물다.!"

<해설>
공자의 '巧言令色'에 대한 혐오는 단순히 우리가 일상적인 코멘트로 이해해서는 아니된다. 그것은 공자의 仁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핵심적인 인식론적 틀을 나타내는 중요한 발언이다. '巧言'이란 문자그대로는 '교묘한 발언'이다. '令色'이란 문자그대로 요염한 안색'정도의 의미가 된다.色은 때때로'여자'를 의미하기도하고,'기미','분위기',발출되는표정을의미하기도 한다.
'교언영색'은 분명 '仁'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鮮矣仁'이란 표현은 본시 '仁鮮矣'를 도치시킨 것으로 '鮮'(드물다)이라는 술어를 강화시킨 것이다. 仁은 교언이나 영색으로는 절대 잡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덕목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에 대한 깊은 불신을 나타낸 것이다. 언어적 표현의 교묘함에 대한 깊은 저주를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노자가 '道可道非常道'라 말한 것과 큰 차이가 없다. 道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면, 仁 또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노자는 이것을 우주론적으로 말한 것이다. 공자는 이것을 일상적 삶의 느낌 속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말 잘하는 자치고 인한 자가 드물다!

* 學而第一(학이제일) -4

曾子曰: 吾 日三省吾身, 爲人謨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증자왈  오 일삼성오신  위인모이불충호   여붕우교이불신호  전불습호
증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는 날마다 세가지로 내 몸을 돌이켜본다. 남을 위해 도모함에 충성스럽지 못하지 않았나? 벗을 사귐에 믿음직스럽지 못하지 않았나? 가르침 받은 것을 익히지 못하지 않았나?

<해설>
증자는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공자보다 46세 연하의 사람이다. 그러니까 공자의 말년의 제자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 曾晳(증석)이 공자의 제자였음으로 그러한 연줄로 인해 자연스럽게 제자가 되었을 것이지만, 안연이 그의 부친 안로와의 인연으로 공자와 사제의 정을 맺은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증자는 결코 공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공자 자신에 의하여 중요하게 언급된 바가 없다. 공자가 말년에 잠깐 가르쳤던 인물인 것 같다.
'孝經'의 저자로 알려진 증자는 '孝'와 '忠'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증자가 '논어에서 비중있는 인물로 다루어지게 된 것은 맹자가 子思(자사)-증자계열을 존숭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기 보다는, 전국말기의 유가에서 '충효'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기 위한 음모로 철저히 '증자'의 이미지를 재 구축시켰고, 그렇게 구축된 이미지에 따라 증자설화가 날조되었고, 그 권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날조된 설화들이 논어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논어'의 증자관계의 모든 파편은 그러한 후대의 윤색의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증자설화의 왜곡 때문에 공자사상이 '忠恕(충서)' 따위로 왜곡되는 비극이 초래된 것이다. 공자의 진실 위에 증자의 이데올로기가 덮어 씌워진 것이다. 이로써 유교는 철저히 정치화되어 갔다.

* 學而第一(학이제일) -5

子曰, 道天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
자왈 도천승지국 경사이신 절용이애인 사민이시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천수레의 나라를 다스릴 때는, 매사를 공경스럽게 하여 믿음이 가게하며,쓰임을 절도있게 하여 아랫사람을 사랑하고,백성을 부리는 데는 반드시 때에 맞추어 한다.

<해설>
이 장의 마지막 두 구절 '節用而愛人', '使民以時'에서는 매우 중요한 제도사적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 분명 人과 民은 분별되어 사용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人은 國의 人을 말하는 것이요, 民은 野의 民을 말하는 것이다. 愛人의 人은 國人이요 그들은 노 나라의 도성 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강 士의 계층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서 공자의 정강정책이 표방하는 '節用(절용)'이란 도성 밖의 鄙野(비야)의 庶人(서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본시 절약하는 사람들이다. 하늘을 보며 쌀 한 톨을 아끼는 사람들이다. 노 나라의 경제 문제는 바로 성내 즉 國中의 문제인 것이다. 국인들이 절약하는 생활을 해야만 나라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공자가 절용의 윤리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國人, 즉 士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의 부패는 공무원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愛人(애인)의 愛(애)는 본시 '아낀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서구화된 의미에서의 '사랑한다'의 뜻이 아니다. 공자가 절용을 강조하는 대상은 곧 士이다. '使民以時' 의 '使民'은 주로 戰役(전역)과 관련된 것이다. 民은 전차를 탈 수 없으며, 보병이나 치중대의 노역에 동원된다. 使民 즉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반드시 농한기를 틈타지 않으면 아니 된다. 농번기에 전쟁을 일으키면 그것은 승리했더라도 패배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국고가 텅 비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장의 대강의 뜻은 공자라고 하는 고급관리의 입장에서 자기이외의 세 계층을 대상으로 발한 멧세지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敬事而信'은 공자가 자기의 상관들에 대한 태도를 말한 것이다. 이때 '事'는 공무원으로서 수행하는 공무를 일컷는 것이다. 그것은 '事君'에서 발생하는 일들이다. 이러한 일들은 반드시 공경되이 처리하여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의 '節用而愛人'은 고급관리로서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아래의 士人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使民以時'는, 士에 대하여,밖에 사는 野人(야인)들을 함부로 괴롭히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 學而第一(학이제일) -6

子曰 弟子入卽孝 出卽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卽以學文.
자왈 제자입즉효 출즉제 근이신 범애중 이친인 행유여력 즉이학문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젊은이들이여! 들어가서는 효성스럽게 하고, 나와서는 다정하게 하시요. 말은 삼가되 믿음있는 말만 하시요. 많은 사람을 널리 사랑하되 인한 자를 가까이 하시요.
이 모든 것을 실천하고 남음이 있으면 곧 문자를 배우시요.

<해설> 
이 말은 나이 먹은 공자가 당대의 젊은이들을 향해 외친 말로 해석될 수 있다.
'弟(제)'는 반드시 친 형제간의 관계에만 귀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孝(효)'를 수직적 관계의 덕목이라고 한다면 '弟'는 수평적 관계의 덕목을 모두 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출발은 형제간의 우애이다.
'謹(근)'은 말을 삼가는 것이다. '信(신)'은 평소 말을 삼가되 말을 일단 하면 반드시 신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親(친)'은 '近(근)-가까이 한다'의 뜻이다. 仁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사람의 뜻이다. 곧 仁人이요, 仁者다.
이 장에서 가장 핵심에 놓인 말은 '行有餘力 卽以學文'이라는 마지막 구문이다. 이 한마디를 위하여 앞의 모든 교훈이 존재한 것이다. 이 구문을 반드시 '行하고 나서 여유가 생기면'이라는 시간의 단계적 선후를 말하는 것으로 풀면 안된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의 단계적 절차를 지적한 것이 아니라 학문과 일상적 덕목의 실천사이에서, 즉 學과 行사이에서 '行'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다. 공자의 어투는 상당히 반주지주의적이다. 그것은 교언영색에 대한 혐오감과 상통하는 것이다.

* 學而第一(학이제일) -7

子夏曰 賢賢 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자하왈 현현 역색사부모 능갈기력  사군 능치기신 여붕우교 언이유신 수왈미학 오필위지학의

자하가 말하였다.: 어진이를 어진이로서 대하기를 아름다운 여인을 좋아하듯 해라. 부모를 섬길 때는 있는 힘을 다하여라. 임금을 섬길 때는 그 몸을 다 바쳐라. 친구와 사귈 때는 믿을 수 있는 말만 하여라. 그리하여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운 사람이라 일컬을 것이다.
<해설> - 도올
자하의 성은 卜(복) 이름은 商(상)이다. '사기'에 공자보다 44세 연하로 기록되어 있다. 晋(진)나라 溫國人(온국인)이라고도 하고, 衛(위)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온국이 원래 위나라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다른 이야기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가 魯(노)나라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이 卜인 것으로 보아 그도 아마 점과 관련된 무속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공자가 자하에게 특별히 지목하여 小人儒(소인유)가 되지 말고 君子儒(군자유)가 되라고 말씀하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문학적 상상력이 뛰어났고, 특히 '詩(시)'에 밝았다고 생각된다. 예술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그의 제자 중에 문학으로는 子游(자유)와 자하 두사람을 꼽았다.
공자가 죽은 후 자하는 西河(서하)에서 학단을 형성하여 제자들을 가르쳤다. 서하는 魏(위)나라 땅으로 황하의 서쪽에 있다는 뜻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그러자 魏文候(위문후)는 그의 문하생이 되어 경학과 육예를 배웠으며, 그에게 국정의 자문을 구하였다. 위문후는 위나라의 건립자이다. 그는 창업주 답게 위나라를 크게 번성시켰다. 이러한 자하의 지혜로움으로 위문후의 브레인 탱크가 형성되었고, 이것이 후대에 전국시대정신을 이끈 직하학파를 탄생시킨 모태가 되었다. 본문에 '賢賢'을 '현명한 자를 현명한 자로 대접한다'라고 새기고, '易'을 '바꾼다'로 새기면, 현인을 현인으로 대접하는 마음을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과 바꿀 수 있다는 뜻이 된다. 현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자에게 있어서 아주 단순한 의미였다. 현인이란 나보다 먼저 깨달은 자요, 나보다 먼저 배운 자이다. 그러한 현인을 현인으로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이 곧 '好學(호학)'의 출발이다.


'致其身'의 '致'는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 '희생한다'는 뜻으로 새긴다. '事君'은 곧 국가사직의 안보에 관한 문제였음으로 그런 뜻이 자연스럽게 들어간 것이다.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는 앞 장에서 '行有餘力 卽以學文'이라 한 것과 똑같은 반주지주의적 강조의 맥락을 가지고 있으나,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學'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어떤 전문적 학단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未學이라는 것은 '구태여 어떤 학단에 들어와 공부하지 않았어도', 즉 '어떤 學의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않았어도' 그를 배운자라 말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예나 오늘이나 우리는 너무 제도권 내에서 익히는 학문만을 학문으로 생각하는데 너무 익숙해 있다. 학문의 근본적 소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깊게 통찰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배움의 궁극적 목적은 배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있는 것이다. 배움은 삶이다. 삶이란 곧 賢賢, 事父母, 事軍, 與朋友交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관계 속에서 있는 힘을 다할 수 있는 자야말로 곧 '배운 자'인 것이다. 학문과 삶이 점점 유리되어 가고 있는 요즈음의 세태에 대한 자하의 경종의 메세지이다.

* 學而第一(학이제일) -8


子曰  君子 不重卽不威 學卽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卽勿憚改.
자왈  군자 부중즉불위 학즉불고  주충신 무우불여기자 과즉물탄개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군자는 무게있게 행동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고, 학문을 해도 견고하지 못하게 된다. 우러나오는 마음과 믿음있는 말을 주로 하며, 자기보다 못한 자를 벗삼지 아니하며,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않는다.

<해설> 

 
이 장의 대의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액센트는 역시 '過卽勿憚改(과즉물탄개)'에 놓여있다. 인간은 허물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일,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신의 일"이라는 시인 알렉산더 포우프의 유명한 말대로 인간은 '허물'을 향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神(신)의 사업이 아니다. 용서 그 자체가 나의 실존적 사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유교는 인간을 신에 떠맡기지 않는다. '잘못'은 결국 '내'가 아는 것이다. 내가 안다면 바로 고쳐야 하는 것이다. 그 '고침'에 '거리낌'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허물을 고치기를 거리끼는 인간, 그것이 바로 小人(소인)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변의 群像(군상)이요, 나의 모습인 것이다. 나의 행위가 나의 존재에 허물됨을 자각하는 순간, 그 허물됨을 고치기를 꺼려한다면 그는 영원히 배움의 길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 學而第一(학이제일) -9

曾子曰 愼終追遠  民德歸厚矣
증자왈 신종추원  민덕귀후의.

증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삶의 마감을 신중히 하고 먼 조상까지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후하게 될 것이다.

<해설>

 
'愼終(신종)'의 '終'은 인간 생명의 종언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 삶의 마감이다. '終'은 곧 '죽음'이다. '신종'이란 '죽음을 신중하게 한다'는 뜻이다. 愼(신)의 글자는 우리말로 '삼간다'는 뜻이다. '신중하게 한다', '삼간다'는 동사의 주체는 죽는 당사자에게 물론 해당될 수도 있다. 내가 죽을 때 나의 죽음을 신중하게 선택한다, 값있는 죽음을 죽는다, 죽는 환경을 아름답게 조성한다는 뜻도 물론 내포될 수 있다. 그러나 이 愼(신)의 주체는 주로 그 후손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종'은 우리 삶의 대표적 四禮(사례), 즉 冠(관)·婚(혼)·喪(상)·祭(제) 중의 흉례인 상례에 해당되는 것이다. 관·혼은 삶의 제식이요, 상·제는 죽음의 제식이다. 관·혼은 嘉禮(가례)요, 상·제는 凶禮(흉례)요 吉禮(길례)다. '신종'이란 곧 상례를 말하는 것이요, '추원'이란 곧 제례를 말하는 것이다.


'추원'에서 '遠(원)'은 나에게 멀리 있는 조상, 그러니까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혹은 그 이상의 선조를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한 인간이 죽은 시점에서 3년까지의 복상기간을 '喪(상)'의 기간으로 본다면, 3년이 지나게 되면, 이미 그 인간은 나에게서 멀리 있게 된다. 이미 정감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모두 '遠'의 개념으로 편입되게 되며, 그러면 그때는 愼의 대상이 아니라 追, 즉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추원'이란 죽은 지 3년이 지나면 그 인간은 喪의 대상이 아니라 祭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祭는 흉례가 아니라 길례다. 祭는 상실의 슬픔을 넘어서서 이제는 삶의 기쁨으로 화하게 되는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民이란 보편적 인간이다. 역대의 모든 주석가들은 조건절의 '신종추원'을 천자로부터 제후·대부·사에 이르는 喪祭(상제)로 해석하였다. 즉 지배자들이 상례와 제례를 후덕하게 하면, 민심이 후덕하게 돌아간다 라고 풀이하였다. 즉 '民'의 계급성을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喪祭가 천자·제후·대부·사에게만 있고 民에게는 없단 말인가? 民은 죽지도 않고 제사도 안 올린단 말인가? 상례와 제례는 상하에 모두에게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보아 감화를 입는다는 식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증자의 '신종추원'은 전통적 조상숭배의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대치시키는 발언이다. 즉 상제의 궁극적 의미가 '귀신의 달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성 속에 내재하는 하나의 축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죽음은 나의 유한성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손의 유한성과의 연속의 계기라는 것이다. 즉 나의 죽음이 나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손에 의하여 추모됨으로서 어떤 연결의 고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존재의 유한성의 단절이 다시 단절될 타의 유한성과 접합됨으로써 무한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한한 시간의 연접은 무한하다. 그 연접의 고리가 바로 喪·祭의 제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귀신에 대한 수직적 공포가 아니라, 나의 존재의 유한성의 두려움에 대한 수평적 유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한 수평적 유대가 곧 인간의 역사이다. 모든 사람이 후세에 널리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가까운 사람에게 기억된다고 하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유한성의 공포를 느끼지 않고 편안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당분간 그들과 더불어 살아 갈 것이다. 나는 죽는 순간 매정하게 단절되거나 내가 사랑했던 그들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나의 삶을 편하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제사의 궁극적 의미는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다. 죽는 자의 삶에 있고 살아남는자의 삶에 있다. 그것이 바로 '민덕귀후'의 궁극적 의미다. 상제의 의미를 민덕의 귀후로 돌렸다는 것은 곧 인성의 종교적 공포로 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의 수직적 관계를 역사의 수평적 관계로 환치시킨 것이다.

* 學而第一(학이제일) -10

子禽問於子貢曰  夫子至於是邦也, 必聞其政, 求之與? 抑與之與?
자금문어자공왈  부자지어시방야  필문기정  구지여  억여지여

子貢曰 夫子溫·良·恭·儉·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  異乎人之求之與!
자공왈 부자온 량 공 검양이득지  부자지구지야  기제  이호인지구지여


자금이 공자에게 물어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한 나라에 이르시면 반드시 그 나라의 정사를 들으시었다. 그것은 선생님 스스로 구하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그런 기회가 상대방으로부터 주어진 것인가?"
자공이 대답하였다."선생님께서는 따뜻하고 솔직하고 위엄있고 검소하고 사양하심으로써 그런 기회를 얻으셨다. 선생님께서 구하신 것은 다른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해설>


이 장에는 두명의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하나는 '자금'이요, 그 하나는 '자공'이다. 자금은 <열전>에 공자의 제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추론은 오직 <논어>의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혹자는 자금이 자공의 제자였기 때문에 <열전>에 안올랐다고 하지만, 자금이 공자에게 묻는 장면이 <논어>에 두번 등장했다고 해서 자금을 자공의 제자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자공과 같이 스마트한 사람이 자금과 같이 삐딱한 인물을 제자로 두었을리 만무하다. 자금은 분명 공자의 제자로서 매우 나이가 어린 그룹에 속해있었다. 공자의 사후에도 공자교단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자금은 姓(성)은 陳(진)이요 名(명)이 강이다. 자금은 그의 字(자)이다. 아마 자금은 魯(노)나라 사람으로 공자 문하에 입문하였으면서도 중심에 들어오지 않고 주의를 맴맴 돌면서 공자를 삐딱하게 보는 매우 부정적인 인간이었을 것이다. 본장에서도 자금이 공자를 비아냥 거리며 "공자는 치사하게 이 나라 저 나라 정가에 끼웃거린 사람이 아니겠수?"라고 묻는다.


자공은 탁월한 웅변가며 지략가며 외교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국제적 물류를 잘 파악하여 막대한 재부를 축적하는 호상이었다. 요즈음의 감각으로 정확하게 국제적인 비즈니스맨에 해당되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항상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있었다.자공은 <논어>의 실제적 주인공이다. 안회는 너무 완벽하게 이상화도어있고, 자로는 최다출연자이기는 하지만 항상 조연의 역할에 머물고 있다. 자공은 자로를 제외하면 <논어>의 최다출연자이다. 그리고 그는 항상 스승 공자와 맞대결하면서 깨달음을 축적해가는 주인공적 캐릭터로서 등장한다. 그리고 공자가 오늘날의 공자가 된 것은 실상 자공덕분이라 말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자공은 공자사후에도 공자에 대한 철저한 충성심을 지켰다. 공자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추호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차에 돋을 싸들고 제후를 찾아다니면서 공자의 위대함을 선양하였던 것이다.


자공이 衛(위)나라 사람이라는 사실도 매우 <논어>를 읽는데 중요한 함수로 작용한다. 공자의 유랑이 기나긴 장정이기는 했지만 그 루트를 잘 뜯어보면 항상 위나라를 거점으로 해서 움직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장정의 비용을 댄 것이 바로 자로였다. 자로의 위나라 재정기반이 없었더라면 공자 장정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공자와 자공의대화가 상당부분 위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자공은 상당히 현실적인 인간이었기에 공자는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는 안회와 실컷 나누었을 것이다. 안회의 내면성의 깊이를 자공은 가지고 있지를 못했다. 그러나 자공은 자신의 분수를 명확히 깨닫는 훌륭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인식의 한계 내에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의 질문은 예리하고 우리로 하여금 공자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엄청난 도움을 준다. 그는 끊임없이 물음으로써 배워간 인간이었다.

* 學而第一(학이제일) -11

子曰 父在 觀其志 父沒 觀其行. 三年 無改於父之道  可謂孝矣.
자왈부재  관기지부몰  관기행  삼년 무개어부지도  가위효의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아버지 살아계실 때는 그 뜻을 살피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는 그 하신 일을 살핀다.삼년동안 아버지의 도를 고침이 없으면 효라 이를만 한 것이다.

<해설>
'志(지)'는 요새말로 지향성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생동하는 마음의 지향성이다. 志는 살아있는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역동적 의지의 세계이다. 따라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그 아버지의 살아 움직이는 뜻을 즉각 즉각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그러한 志는 포착될 수 없음으로,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그이 행업, 그러니까 이루어 놓은 업적 등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효심의 기본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삶의 길을 최소한 삼년 동안은 고침이 없어야 한다. 삼년이라는 숫자의 설정이 중요하지는 않지만 아버지가 해오던 일들, 주변에 형성된 삶의 방식을 너무 매정하게 하루아침에 바꾸어 버린다면 앞서 '신종추원'에서 말한 대로 역사의 단절이 초래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도'를 말할 때는 대강 그 좋은 점을 말하는 것이요, 삼년을 설정해 놓고 생각하면 그 나쁜 면은 점차 잊혀져 갈 것이다.

* 學而第一(학이제일) -12


有子曰 禮之用, 和爲貴.先王之道, 斯爲美 小大由之.有所不行,知和而和,不以禮節之,亦不可行也.

유자왈 예지용  화위귀 선왕지도  사위미 소대유지 유소불행 지화이화  불이예절지역불가행야

유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예의 쓰임은 조화로움을 귀하게 여긴다.선왕의 도가 이 조화를 아름답게 여겼다. 작고 큰 일이 모두 이 조화로움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었다.그러나 이런식으로 행하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오직 조화만을 알고 조화를 도모하고, 예로써 절제하지 않는다면 또한 행하여 질 수 없는 것이다.

<해설>

 
'禮之用'이란 '예의 쓰임'의 뜻이다. 이것은 아마도 예가 지향하는 바, 즉 예라는 것의 사회적 기능이 의도하는 바는, 和(樂)을 귀하게 여긴다, 和(樂)를 으뜸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동양인들은 예를 예로서만 고립시켜 생각한 것이 없다. 예는 반드시 樂과 相須(상수)되는 개념인 것이다. 예없이는 樂이 없고, 樂없이는 예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자의 관계를 밝힌 천하의 명언이 <樂記>에 실려있다.


樂者敦和, 率神而從天; 禮者別宜, 居鬼而從地.
악자돈화, 솔신이종천; 예자별의, 거귀이종지.
[樂이란 조화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神(신)을 거느리고 하늘을 따른다. 예란 마땅함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것은 鬼(귀)와 더불어 살며 땅을 따른다.]


樂은 하늘의 세계요 神의 세계다. 예는 땅의 세계요 鬼(귀)의 세계다. 예술이란 본시 하늘을 향한 인간의 동경이다. 예의란 본시 이 땅에 사는 인간의 질서이다.


樂者爲同, 禮者爲異. 同則相親, 異則相敬.
악자위동, 예자위이. 동칙상친, 이칙상경.

[樂이란 같아짐을 위한 것이요, 예란 달라짐을 위한 것이다. 같아지면 친해지고, 달라지면 공경하게 된다.]선생과 제자,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이 모든 관계에서 존재하는 예란 이들 사이의 마땅한 바를 분별키 위함이요, 이들의 다름을 확실케 하고자 함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름과 공경으로만 살 수가 없다. 그러면 인간은 소원해지고 고독해지고 엄숙해지기만 하는 것이다. 바로 음악, 예술이란 이러한 異化(이화)의 방향을 同化(동화)의 방향으로 전화시카는 것이다. 그것이 곧 和(화)요 同(동)이다. 樂속에선, 우리가 같이 노래부르고 춤추는 가운데선 우리가 하나됨을 체험한다. 樂이란 같아짐을 위한 것이다. 禮者는 天地之別이요, 樂者는 天地之和인 것이다. 樂이란 안에서 동하는 것이요, 禮란 밖에서 동하는 것이다.여기 '禮之用, 和爲貴'라 한 말은, 禮는 분별을 위한 것이지만, 禮(예)는 樂(악)과 이원적으로 분립되는 것이 아니요, 궁극적으로 樂이 지향하는 和를 성취하는데 쓰임(用)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래서 선왕지도는 이 和를 아름다운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선왕지도는 곧 禮의 총칭이다. 그것은 예의 다른 말인 것이다. 그래서 작고 큰 일들이 모두 이러한 화를 지향하면서 인간세의 문명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和 즉 樂으로써만 아니되는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오직 조화를 위한 조화, 같아짐을 위한 같아짐만을 생각하는 것은 위태롭다는 것이다. 和(樂)은 반드시 禮로써 절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로써 절제된 때만이 樂은 樂으로서의 기능(用)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예가 없는 樂은 광란일 뿐이다. 樂이 없는 예는 구속일 뿐이다.

* 學而第一(학이제일) -13

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
유자왈 신근어의  언가복야  공근어예  원치욕야  인부실기친  역가종야

유자께서 말씀하시었다.약속이 의로움에 가까워야 그 말이 실천될 수 있다.공손함이 예에 가까워야 치욕을 멀리할 수 있다.그렇게함으로써 가까운 사람들을 잃지 아니하면 또한 섬길만하다.


<해설> 
선진문헌에서 '信'의 의미는 곧 인간의 '말'이다. 信은 곧 言인 것이다. 이 장의 信과 言도 결국 같은 단어의 배열이다. 인간의 믿음은 모두 말 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약속도 결국 '말'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해석은 이와 같다. 약속이라구 다 약속이냐? 그 약속이 義(의)에 가까운 것이래야, 즉 의로운 것이래야 지킬만 한 것이 아닌가? 인간의 말이란 의로운 것이래야 그말이 되풀이되어 실천될 수 있는 것이다.恭(공손함)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공손한 사람들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공손한 자일 수록 위선자가 많다. 공손함도 禮에 가까워야만 비로소 치욕을 멀리 할 수 있는 것이다. 因은 앞 문장의 내용을 받은 전치사에 불과하다. '因信恭不失其親'의 맥락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親(친)'도 꼭 부모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부모로 시작해서 친척, 그리고 가까운 친지, 친구들...... 나에게서 가까운 연줄의 사람들에 대한 일반명사로 보면 될 것이다. '宗(종)'은 동사로서 종주로 모신다, 섬긴다, 받든다의 뜻이다. 평범하게 말하면 '존경하다'의 뜻이다.

* 學而第一(학이제일) -14

子曰 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자왈 군자 식무구포  거무구안  민어사이신어언  취유도이정언  가위호학야이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아니하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하며, 일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삼갈 줄 알며, 항상 도가 있는 자에게 나아가 자신을 바르게 한다. 이만하며 배움을 좋아한다 이를만 하다.

<해설> 
여기 공자는 전체의 문맥을 '好學(호학)'이라는 한 줄기에 잡고 있다. 호학의 조건으로서 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배움을 좋아하는 자들은 먹되 배부른 것을 구할 시간이나 관심이 있을 수 없고, 살되 편안한 것을 구할 시간이나 관심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배부르게 먹기 위해 사는 인간, 편안하게 살기 위해 사는 인간, 이런 인간들처럼 굴욕적이고 자기기만적이며, 이기적이며 몰가치적인 인간이 없다. 일상생활에서 먹되 배부르지 않게 먹는다는 명제는 참으로 실천키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조금만 입맛이 당겨도 과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식은 단순히 나의 위장의 불편함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영혼의 타락을 초래하는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바로 그러한 탐식의 마음이 공무원의 독직과 연결되는 타락의 바탕인 것이다. 집도 편안하게 꾸밀려면 한이 없다. 돈을 쳐들이기 시작하며 무한정 들어가는 것이 집이다. 조촐한 방 한 칸, 깨끗한 온돌장판에 창호지 발라 놓고 조그만 책상에 앉아 나의 세계를 꾸며놓아도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 것이다.


'敏於事而愼於言'이라는 말은 '巧言令色(교언영색)'부터 일관되어 내려오는 공자의 仁의 사상의 주제이다. 똑같은 말이 조금 표현을 달리하여 <이인>24에서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군자욕눌어언이민어행)-말에는 어눌하고 행동에는 민첩하다'로 나오고 있다. 모두가 공자의 일관된 입장, 언어적 표현에 대한 거부감, 언어적 표현보다는 행동의 실천이 앞서야 한다는 일관된 입장을 강력하게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는 말빠른 인간처럼 경멸스러운 인간은 없었다. 요즘같이 말을 중시하는 가치관 속에서는 공자의 이런 태도는 시대착오적인 가치로 보일 수도 있으나, 진실을 추구하는 모든 현대인이 이러한 공자의 말에 심복하지 않을 자가 없으리라고 생각하한다. 공자가 증오하는 것은 '웅변'이나 '달변'그 자체가 아니다. 실천이 앞서지 않는 공허한 웅변이나 달변이나 능변이 가증스러운 것이다.공자학단에 있어서 문자를 익히고 독서를 하며, 예악을 배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食無求飽(식무구포)하고 居無求安(거무구안)하는 것과 분리도어 이해된 적은 없다. 특히 마지막의 '就有道而正焉(취유도이정언)'이라는 말 속에는 스승을 만나 나의 무지를 끊임없이 깨우친다는 함의가 들어가 있다. 즉 '正'의 내용에는 오늘 우리가 말하는 '독서'의 함의가 배제될래야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먹되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고, 살되 편안키를 구하지 않고, 일에는 민첩하고 말을 삼가며, 훌륭한 스승밑에 나아가 공부하는 것 이 4가지 사태는 단 하나의 배움의 사태인 것이다. 끊임없는 삶의 과정인 것이다. 공자의 사상을 압축하면 하나는 '好學(호학)'이요, 하나는 '仁(인)'이다.

* 學而第一(학이제일) -15


子貢曰: "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 子曰: "可也.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자공왈   빈이무첨   부이무교  하여    자왈   가야  미약빈이락  부이호예자야
子貢曰: "詩云: '如切如磋, 如琢如磨,'其斯之謂與?"
자공왈   시운   여절여차   여탁여마  기사지위여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 而知來者."
자왈  사야   시가 여언시이의 고제왕 이지래자

자공이 말하였다.: "가난하면서도 아첨치 아니하고, 부하면서도 교만치 아니하면 어떠하겠습니까?"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괜찮지.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같지는 못해."자공이 말하였다.: "시경에 '자른 듯, 다듬은 듯, 쪼은 듯, 간 듯'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겠군요?"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야! 이제 비로서 너와 시를 말할 수 있겠구나!" 지난 것을 알려주니 올 것을 알아차리는구나."

<해설>

 
자공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여기 자공의 질문은 학문하는 자로서 이재에 밝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깊은 반성의 톤으로 시작하고 있다. "선생님! 빈궁하면서도 아첨하지 아니하고, 부유하면서도 교만치 아니한다면 그래도 훌륭한 삶의 자세라 할 만하지 않겠습니까?"이 한 질문은 자공에 있어서는 뼈저린 반성의 외침이었다. 내가 지금 비록 부유하지만 교만하지 말자! 또 세상이 바뀌어 내가 돈을 다 잃어 버리고 가난하게 되었을지라도 아첨하지 말자! 이렇게만 살면 우리 훌륭한 공자님의 제자라 할 만하지 않겠는가? 자공은 공자님의 입에서 "너 참으로 훌륭하다"는 긍정의 말씀을 잔뜩 기대했을 것이다. 그 긴장의 순간! 공자의 입술에서 새어나온 한 마디는 무엇이든가?
"可也"
이 순간 자공의 가슴이 저미어졌을 것이다. 철컹! 결코 긍정의 대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可也'는 부정의 온화한 표현일 뿐이다. 공자가 자공의 질문에 대한 부정 끝에 제시한 새로운 차원의 긍정적 진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
빈궁하면서도 즐길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자만 같지 못하다.貧(빈)에 대한 無諂(무첨)이나, 富(부)에 대한 無驕(무교)는 모든 '無'라는 부정사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부정적 가치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부정적 가치에 의한 소극적 대처로서는 군자다운 삶을 만들어 갈 수가 없다. 공자는 貧(빈)에 대한 樂을, 富(부)에 대한 好禮(호예)를 새롭게 제시한 것이다.이 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공에게는 어떤 영감이 스쳤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모자랐다는 어떤 깨달음이 북바쳐 올라왔다. 그 때 그 순간 그의 영감을 스치는 것은 그의 고국, 위나라의 먼 옛날 노래였다. 詩經(시경)의 한 편인 '淇奧(기오)'의 싯구 '如切如磋如琢如磨(여절여차여탁여마)'이다.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이는 위나라 武公(무공)의 덕성을 찬양한 노래라는 것이다. 그는 문장이 빛났으며 간언을 잘들어 예로써 자신을 잘 방비한 명군이었다는 것이다. '如切如磋如琢如磨(여절여차여탁여마)'는 옥석을 자르고 갈아서 서서히 완벽한 예술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인간의 덕성의 함양의 과정에 비유한 말이라는 것이다. 切(절)은 骨(골)에 대하여, 磋(차)는 象(상)에 대하여, 琢(탁)은 玉(옥)에 대하여, 磨(마)는 石(석)에 대하여 쓰는 가공기술의 언어라는 것이다.


자공이 이 노래를 불렀을 때, 자공의 의도는 곧 자신의 깨달음을 이 詩에 은유하여 자신의 修德(수덕)의 결심을 나타낸 것이다. 삶에 대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시각을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꾸는 작업이 곧 못생긴 옥석을 갈고 닦아 세련된 작품을 만들 듯이 자신의 인격을 다듬어 나가는 작업이 될 것이라는 결의를 구가했던 것이다.이 때, 공자는 자공의 이름을 부른다. "賜(사)여!" 賜(사)는 자공의 名이다. 즉 애명이다.'이제 비로서 너와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이 말은 공자의 극찬이다. 제자의 깨달음을 상찬하는 찬미의 말이다.
'告諸往而知來者'는 사실 문자 그대로는 해석이 어렵다. 지난 것을 말해주니까 올 것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미래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여기서 과거는 직접적으로 '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라는 공자의 교훈을 가리킨다. 미래는 '淇奧(기오)'의 싯구를 가리킨다. 즉 과거를 말해주니 미래를 안다는 것은, 하나를 알려주니 깨달음이 줄줄이 따라온다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學而第一(학이제일) -16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자왈  불환인지불기지  환불지인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라.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할지니.


<해설>

 
이것은 <학이>편의 첫 장에 이미 논파한 '人不知而不溫'을 생각하면 그 문제의 맥락은 쉽게 풀린다. 공자의 일생은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데 대한 한맺힌 생애였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한을 새로운 보편적 人의 間의 지평으로 확산시켰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한이 있다면, 우리는 그 한을 역으로 내가 이 순간 남의 훌륭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자각의 내성으로 회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 제일 끝의 '人'이 빠져 버린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에도 좋은 해석이 가능하다. 이때 '不知'는 단순히 내가 타인을 몰라본다는 협애한 의미를 떠나, 내가 진정으로 '알려지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참으로 남에게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는 것에 대한 냉정한 자기 반성의 뜻이 되는 것이다. 남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내면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가를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인>14에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불환막기지, 구위가지야)-남이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참으로 알려질 수 있기를 구하라'라고 한 뜻과 내면적으로 상통하게 된다. '나'의 내면적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남이 나를 모른다는 것을 탓하기에 앞서 내가 참으로 알려질 수 있는 내면적 실력을 함양하는데 더 주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기를 구하지 말라! 나에게 알려진 만한 그 무엇이 참으로 내재하고 있는가를 반성하자!
<헌문>32에 공자는 말한다.

'不患人之不己知, 患其不能也

(불환인지불기지, 환기불능야)-남이 나를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치 말라. 자신의 능하지 못함만을 걱정할지니'. <위령공>18에 공자는 말한다.

'君子病無能焉, 不病人之不己知也

(군자병무능언, 불병인지불기지야)-군자는 자신의 무능함만을 병으로 여겨야 한다. 남이 자기를 알지 못함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다.'공자의 사상에 있어서 남과 나의 관계는 중요하지만 그것이 일차적인 것은 아니다. 남이 단절된 나의 절대적 반성이 '방편적으로' 선행되어야만 남과의 관계가 항상 보편적 지평에 놓이게 된다. 남과 나가 어떤 공리주의적 수수의 관계에 놓일 수만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