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漢字文學/[사서오경]四書五經

논어(論語)의 第五 公冶長篇(제오 공야장편)

好學 2009. 9. 21. 23:46

 논어(論語)의 第五 公冶長篇(제오 공야장편)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1a

子謂公冶長, "可妻也. 雖在누설之中, 非 其罪也." 以其子妻之.
자위공야장   가처야  수재누설지중   비기죄야   이기자처지

공자께서 공야장을 평하여 이르시기를"사위삼을만 하다. 비록 그가 오랏줄에 묶여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것은 그의 죄가 아니다."하시고, 자기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셨다.

<해설 >
'위(謂)'라 한 것은 단순히 '일컷는다'는 뜻이 아니고, 인간에 대하여 평가한다는 가치판단의 의미가 깊숙이 내포되어 있다. '처(妻)'는 자기 딸을 시집 보낸다는 의미의 동사이다. '가처야(可妻也)'는 '내 딸을 시집 보낼 만 하다'는 뜻이지만, '사위 삼을 만 하다'로 번역하였다.공야장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공자는 그의 옥살이가 그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 딸을 그에게 시집 보내었다. 누구든지 자기 딸은 귀하고 사랑스럽다. 아무리 성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딸을 사랑하는 심정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렇지, 사랑하는 딸을 옥살이하고 있는 죄수에게 시집 보낸다는 것은 결단력 있는 행동이다. 공자는 자기 딸을 시집 보낼 즈음의 처지는 결코 그 사회적 지위가 낮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자의 딸은 귀한 집의 규수였을 것이다. 그러한 딸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청년에게 시집 보낸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지도층 인사들이 부귀를 만끽하는 폐쇄적인 써클 내에서만 혼사를 일삼는 가증스런 세태를 반추해볼 때 참으로 생각해볼 것이 많은 장이다. 공자는 진리 앞에서 엄정한 보편주의를 실천하는 과감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1b


子謂南容, "邦有道, 不廢; 邦無道, 免於 刑戮." 以其兄之子妻之.
자위남용   방유도  불폐  방무도  면어형륙    이기형지자처지

공자께서 남용을 평하여 이르시기를"나라에 도가 있으면 버려지지 않을 것이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형벌은 면할 것이다."하시고, 그 형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셨다.

<해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버려질 수가 없는 인물이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도 최소한 형벌을 면할 정도의 인품과 세태를 바라보는 형안을 갖춘 인물이라는 평은, 한 인물의 평가로서는 결코 낮은 평가가 아니다.남용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남궁도라는 제자라는 설과, 맹손씨의 일족인 남궁괄 즉 맹의자의 형인 남궁경숙이라는 두가지 설이 있다.'방유도(邦有道) ... 방무도(邦無道)...'라는 표현을 유가철학의 도피주의적인 나약함을 나타내는 구문으로 이해하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참여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숨거나 기피해 버린다면,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상식적 반문은 <논어>의 현실적 맥락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당시의 '방(邦)'의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는 '민족국가' 개념과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방'은 나와 절대적이고도 필연적인 관계를 갖는, 혈연공동체적인 벗어날 수 없는 울타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자 당대의 '방'이란 당대의 사(士)들에게는 얼마든지 선택의 여지가 가능한 가상적 개념의 무엇이었다. 심지어 일반 백성들조차도 자유로운 이민을 통해 삶의 터전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일이 가능했다. 당대의 부국강병이란 곧 이러한 부동인구를 긁어 모음으로써 인구증대를 획책하는 것을 의미했다. 공자 당대에는 산아제한은커녕, 인구증대가 부국강병의 최고목표였다. 인구 노동력만 있으면 개간할 수 있는 땅은 무한 대로 확보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당대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유사(遊士)였다. 이들에게는 하나의 '방'에 대한 고착적 충성심이라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이다. '방유도(邦有道) ... 방무도(邦無道)...'는 그러한 정도의 맥락밖에는 없다. 문제는 '방'을 운영하는 치자 의 철저한 책임이 더 가혹하게 요구되는 도덕성의 맥락인 것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2

子謂子賤, "君子哉若人! 魯無君子者, 斯 焉取斯?"
자위자천   군자재약인  노무군자자  사 언취사

공자께서 자천을 평하여 말씀하시었다:"군자로다! 이 사람이여. 노나라에 군자가 없었다면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러한 덕성을 취했겠는가?"

<해설>
자천은 공자가 말년에 노 나라에 돌아왔을 때, 목격한 노 나라의 훌륭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젊고 유능한 판관과도 같은 어떤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제자해>에 자천에 관한 매우 간결하고 유용한 정보가 있다.
"복부제는 노나라 사람이다. 자는 자천이다. 공자보다 49세 연하이다. 그는 벼슬하여 선보의 읍재가 되었다. 재주와 지략이 있었으며, 인자스럽고 사람을 아끼었다. 백성들을 기만하는 일이 없었다. 공자는 그를 크게 평가하였다."'노무군자'의 '자(者)'는 가정을 나타내는 조사이다. 그리고 '사언취사'에서의 앞의 '사'는 자천 그 사람을 받는 지시대명사이며, 뒤의 '사'는 그 사람이 구현하고 있는 덕성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언(焉)'은 '어떻게' '어디서'의 뜻으로 이유를 탐색하는 의문사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3

 

子貢問曰: 賜也何如 子曰: 女, 器也."曰:何器也?"曰: 瑚璉也."
자공문왈  사야하여 자왈  여  기야   왈 하기야    왈  호련야

자공이 여쭈어 말하였다: "저는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너는 그릇이다." 자공이 이어 "어떤 그릇입니까?"하고 되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귀한 호련 옥그릇이다."

<해설>
자공은 현실적인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공자학단의 경제적 지원자였고 정치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인물이었다. 자공은 아마도 공자가 자천에 대하여 그렇게 높은 평가를 하는 것을 보고 샘이 났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기도 공자에게 어떤 평을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애타게 묻는 자공에게 공자는 다음과 같은 선언을 한다. "너는 그릇이다." <위정>12의 '군자불기'라고 하는 공자의 말씀으로 비추어 풀면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너는 그릇이다. 그러므로 너는 군자가 아니다."가 된다. 너는 군자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공자의 말씀을 들은 자공은 비참한 심정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자공은 결코 그러한 공자의 말에 그냥 무릎은 꿇고 말수는 없었다. 무엇이든, 그 말의 배면에 감도는 여운 속에서 다시 건질 그 무엇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제가 불기의 군자가 아니래도 좋습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단지 한 그릇에 지나지 않은 인간이라고 폄하하셔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그릇입니까?" 공자는 한 마디를 던진다. "호련이다."호련이란 무엇인가? 호련이라고 하는 것은 수수를 담는 그릇으로 종묘제례에 쓰이는 그릇 중에서 귀한 것에 속하는 그릇이다. 따라서 공자가 자공을 평하여 "여기야(女, 器也)"라고 한 것은 결코 폄하의 의미가 아니다. 공자는 자공을 인간적으로 사랑하였으며 그의 인품 됨됨이에 큰 기대를 걸었다. "너는 참으로 그릇이다"라고 말한 것은 "불기(不器)"와의 관계에서 부정적으로 한 말이 아닌 칭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사(賜)'는 선생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어 부르는 표현이다. 사(賜)는 자공의 실제 이름이다. 자기의 실명으로써 우리말의 '저는'에 해당되는 주격을 나타낸 것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4

或曰: "雍也仁而不녕." 子曰: "焉用녕?禦人以口給, 屢憎於人.

혹왈   옹야인이불녕   자왈   언용녕 어인이구급  누증어인  
不知其仁, 焉 用녕?"
부지기인  언 용녕

누군가 말하였다: "옹은 인하기는 한데 말재주가 없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말재주를 도대체 어디에 쓰겠다는 거냐? 약삭빠른 구변으로 남의 말을 막아, 자주 남에게 미움만 살 뿐이니,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를 도대체 어디에 쓰겠다는 거냐?"

<해설>
옹(雍)은 성이 염, 명이 옹, 자(字)가 중궁이다. 염옹은 매우 못난 아버지 밑에서 나서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덕행으로 이름을 날렸다.염옹은 비천한 출신의 인간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그러한 가정환경 덕분에 그의 언어습관이 상류사회에서 쓰는 어떤 매끄러운, 멋이든, 그리고 논리적으로 유창하지 못한 매우 투박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 염옹을 평하면서 공자에게 말하였다. 염옹은 인할지는 모르지만 말재주가 모자라요!이 말재주가 모자란다는, 무심코 던져진 흔해 빠진 세속적 평어는 공자에게는 참을 수는 발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말한다."말재주를 도대체 어디에 쓰겠다는 거냐? 약삭빠른 구변으로 남의 말을 막아, 자주 남에게 미움만 살 뿐이니,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를 도대체 어디에 쓰겠다는 거냐?" '어(禦)'란 막는다는 뜻이다. 남의 말을 막아 곤혹에 빠뜨린다는 뜻이다. '구급(口給)'이란 '구변'이란 의미와 통한다. '급(給)'은 문자그대로 풀면 '재빨리 말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루(屢)'는 '자주'라는 부사이다. '증어인(憎於人)은 '남에게 미움을 산다'는 뜻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5


子使漆彫開仕. 對曰: "吾斯之未能信."子說.
자사칠조개사  대왈   오사지미능신  자열

공자께서 칠조개에게 벼슬을 권하시었다. 칠조개가 그것에 대하여 말씀드렸다: "저는 벼슬하는 것에 관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공자께서 기뻐하시었다.

<해설>
칠조개는 <논어> 전편을 통하여 단지 이 장에서 한번 언급되고 있는 인물이다. 성이 칠조요 이름이 개다. 칠조는 칠(漆)과 조(雕)를 의미한다. 칠은 옻칠이요, 조는 자개를 박는 것을 의미한다. 칠조는 자개칠 가구를 만드는 장인에서 유래된 성임을 알 수가 있다. 칠조는 당대로서는 천한 장인집안이었다. 칠조개가 언제 공자 아래서 수학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 나이로 보아 초기에 입문한 인물일 수도 있고, 또 나중에 늦깎이로 입문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고 향학열에 불탄 사람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의 향학열로 보아, 그는 장인으로서 인생을 충분히 경험하고 나중에 나이가 들어 학문에 뜻을 세운 사람이었을 확률이 높다. 나이가 들어 공부하는 사람들일수록 진중하고 또 깊게 천착하는 성향이 있다. 공자가 칠조개에게 벼슬을 권한 것은 역시 획기적인 것이다. 우선 칠조개가 천한 장인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공자의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늦깎이로 공부하는 그의 생계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한 보상에 대한 따뜻한 배려의 마음씨를 느낄 수 있다. 과거에는 배움과 벼슬이 이원적으로 분리되질 않았다. 학(學)이란 사(士)가 하는 것이다. 사(士)는 곧 벼슬을 위해 존립했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의 권유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나이도 들고 공부도 그만큼 했으니 이제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어떠한가? 이에 대한 칠조개의 답변은 참으로 의외였다. 그것은 당대의 상식을 거부한 발언이었다. "저는 벼슬하는 것에 관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벼슬길에 오르지 않더라도 나의 배움을 통하여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칠조개는 공자 학문의 그러한 새로운 가능성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기뻐했던 것이다. 공자의 기쁨은 자신의 삶이 지향한 새로운 문화적 이상의 가능성을 칠조개의 고백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고 확인하는 기쁨이었던 것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6


子曰: "道不行, 乘부浮于海. 從我者,其由與 子路聞之喜.

자왈   도불행  승부부우해  종아자 기유여 자로문지희

子曰: 由也好 勇過我, 無所取材."
자왈  유야호
용과아  무소취재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나의 도가 실현되지를 않는구나. 뗏목을 타고 바다에 둥둥 떠 있고 싶다. 이럴 때 나를 따르는 자는 오직 유이겠지?" 자로가 이 말을 듣고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유는 용맹을 좋아하는 것은 분명 나를 뛰어넘는다. 그러나 그는 사리를 헤아리는 바가 부족하다."

<해설>
<논어>에 자로가 없으면 재미가 없다. 인간은 자기에 가장 부담없이 가장 의지하고 싶은 인간에게는 항상 짜증을 부리게 마련이다. 공자와 자로와의 관계를 보면, 공자는 항상 자로를 나무라고 꾸짖고 또 짜증을 부린다. 공자는 자로에게 자못 신경질적이다. 그런데 보통의 인간관계는 자주 나무라고 짜증을 부리면 멀어지고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로는 공자가 자기에게 짜증을 낼수록 더욱 충직해지고 더욱 가깝게 다가가고 더욱 깊게 자기를 반성한다. 자로에게 있어서 공자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자기에게 무어라 하든 절대적인 존경과 충성을 바치는 우뚝 선 태산이었다. 그리고 공자에게 있어서 자로는 더 없는 삶의 위로였다.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드라마틱한 대화가 이 장이다.'도불행, 승부부우해'라는 말 속에는 공자의 세상 흐름에 대한 깊은 절망감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승부부우해'라는 표현을 실제로 뗏목을 타고 황해를 건너는 모험을 강행하는 항해의 의미로 해석할 수가 없다.우선 '부'는 작은 뗏목을 의미하며, 작은 뗏목으로는 도저히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이, 도(道)가 행하여지지 않는 실망감 때문에 바다 건너 다른 나라 땅으로 가 버려야겠다고 하는 구체적인 도피주의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여기 '부우해'라는 표현은 구체적인 목적지를 향해 항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막막한 대해(大海)에 둥둥 떠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항해의 의미가 아니라 정처 없이 바다 위에 둥둥 떠있는 이미지다. 이것은 공자의 공상이요 몽상이다. 이것은 '도불행'이라고 하는 절망감에 상대적으로 상정된 공상인 것이다.이러한 순간에 나를 따를 자는 오직 나의 사랑하는 '유'일 뿐일 것이다. '유'는 자로의 실명이다. 그러한 절망과 도피와 죽음의 순간에 나를 동반해줄 수 있는 유일한 친구로서 자로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충직한 자로의 입장에서 본다면 눈물겨운 우정이요 최고의 칭찬이었을 것이다. 자로는 정말 기뻤을 것이다. 나의 스승님, 나의 삶의 모든 것인 사부님께서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시다니! 자로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우직한 자로의 기쁨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이때 공자는 무어라 말했던가?
由也好勇過我, 無所取材

유야호용과아, 무소취재)
자로의 감격은 너무도 충직한 것이다. 공자를 모시고 외로운 바다로 간다는 그 일념만 매달려 있었다. 공자의 절망감과 처절한 고독의 몸부림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공자는 또다시 짜증을 낸다. "유는 용맹을 좋아하는 것은 분명 나를 뛰어넘는다. 그러나 그는 사리를 헤아리는 바가 부족하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7

孟武伯問: 子路仁乎 子曰: 不知也."又問. 子曰: "由也,

맹무백문  자로인호 자왈  부지야  우문  자왈   유야

千乘之國, 可使治其 賦也, 不知其仁也." "求也何如?" 子曰: 

천승지국   가사치기부야  부지기인야    구야하여    자왈
求也,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 不知其仁也."
구야  천실지읍  백승지가  가사위지재야  불지기인야
赤也何如?" 子曰: "赤也, 束帶立於朝, 可使與賓客言也,
적야가여    자왈   적야  속대입어조  가사여빈객언야 
不知其 仁也."
부지기 인야


 

맹무백이 여쭈었다:
"자로는 인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맹무백은 다시 여쭈었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유는 천 수레의 나라라도 그 군재정을 맡겨 다스리게 할 만하지만,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구는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구는 천 가호의 읍이나 백 수레의 대부 영지에서 지방장관을 하게 할 만하지만,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적은 어떻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적은 대례복을 성대히 차려입고 조정에 서서, 외국사신들을 응대하여 말을 나누게 할만 하지만,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습니다."

<해설>
이 장에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하나 있다. 공서화라는 인물이다. <제자해>에 보면 '공서적은 노나라 사람이며, 자가 자화이다. 공자보다 42세 연하이다. 관대를 두르고 조정에 서서 의례를 주관하였다. 그는 특히 빈객과 주인의 의례에 능통하였다.'라고 적고 있다.이 장의 전체적인 대의는 인(仁)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 공자는 여기서 모든 제자들에게 인(仁)하다고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각기 능한 바를 설명한다. 각기 그릇됨만을 허락하는 것이다. 인의 본질은 결국 각자가 자기의 그릇됨을 통하여 스스로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그 무엇일 뿐이다.
맹무백이 묻는다. "자로는 인합니까?" 공자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맹무백은 재차 다그친다. 이에 공자는 대답한다: "자로는 천승지국에서 그 군 재정을 다스리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가 인한지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부지기인(不知其仁)'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공자가 인을 허락할 수 없다는 뜻으로만 풀 수는 없다. 인이라는 덕성은 궁극적으로 스스로 달성해야 하는 그 무엇이며, 근본적으로 내가 인하다 인하지 않다고 말로 규정해서 될 문제는 아니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각자가 지닌 실리적 능력이 곧 그 인간의 인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천승지국은 당대의 상황으로 볼 때, 노나라의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대국이다. 부(賦)는 국가재정을 유지케하는 세금이다. 그런데 당시의 국가는 모두 전쟁국가였기 때문에 세금이 모두 군역의 명목으로 걷히는 병부(兵賦)였다. 천승지국의 군 재정을 다스리게 하는데는 자로 만큼 적격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 공자가 자로를 큰 국가의 재정, 즉 돈을 만지는 자리에 맡길 만 하다고 평한 것은 얼마나 자로의 정직함에 대한 신뢰가 깊었나 하는 것을 엿볼 있다.
맹무백은 또 묻는다: "그럼 염구는 어떻습니까?" "천실지읍, 백승지가의 재(宰)을 삼을만 하지만,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다." 읍이란 제후가 실제로 사는 수도를 제외한 지방의 큰 취락을 말하는 것이다. 요즈음 말로는 지방도시가 되는 것이다. 천실지읍은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니다. '백승지가'라는 표현은 백 수레의 규모를 갖춘 대부의 채읍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재(宰)라는 것은 대부가의 총관이다. 즉 지방장관 격이다.마지막으로 또 묻는다:"공서적은 어떠합니까?" 공자는 대답한다: "적은 속대하고 조정에 서서, 빈객과 더불어 말을 나누게 할 수는 있지만 그가 인한지는 알지 못한다." '속대'는 성대한 예복(관복)을 차려 입은 모습이다. 공서화에게는 번거로운 의례를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는 탁월한 외교관의 기능을 인정한 것이다. 본 장에서 우리는 세상사에 대한 능수 능란한 기술이 곧 그의 윤리적 본질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공자의 인간관의 한 측면을 읽을 수 있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8


子謂子貢曰: "女與回也孰愈?對曰: 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

자위자공왈   여여회야숙유  대왈  사야하감망회   회야문일

以知十, 賜也聞一 以知二."子曰: 弗如也. 吾與女弗如也."

이지십  사야문일이지이   자왈  불여야  오여여불여야

공자께서 자공에게 일러 말씀하시었다: "너와 안회, 누가 더 나으냐?"
자공이 대답하였다: "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넘보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이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래 너는 안회만 같지 못하다. 그래 나와 너 두 사람 모두 안회만 같지 못하다."

<해설>
안회를 공자보다 30세 연하라고 한다면, 자공은 31세 연하이니까, 자공은 안회보다 한 살 어릴 뿐이다. 즉 이 두 사람은 동년배의 사람들로서 공자의 총애를 받았던 탁월한 제자들이었다. <논어>속에서 안회라는 인물의 탁월함에 관한 신화는 어느 누구도 깰 수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 자공도 안회에 못지 않은 인물이었다. 유능한 언변과 외교, 그리고 성실한 배움의 자세, 냉철한 상황판단과 상식적 겸손, 그리고 치부의 능력, 이 모든 면에서 공자의 사랑을 받고도 남을 큰 제목이었다.이 장의 대화는, 안회가 등장하고 있지만, 실제로 안회와 무관하게 공자와 자공사이에서 이루어진 대화일 뿐이다. "너와 안회, 누가 더 나으냐?" 이런 당혹스런 질문을 존경하는 스승으로부터 받았을 때, 이러한 곤혹스러운 상황을 대처해 나가는 자공은 역시 탁월한 외교관답게 정치적이면서도 그 소박한 내면의 진실을 잃지 않는다. 자공은 역시 위대하다."제가 어찌 감히 안회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이옵니다."여기 '하감망회'의 '망(望)'은 우리말의 '넘보다'는 뉴앙스가 잘 담겨져 있는 단어이다. 자공이 자신에 대하여 자평을 한 것을 보면 매우 절묘한 구석이 있다. 만약 '하나를 들어 하나를 안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문일이지십(聞一以知十)'에 대한 완전한 패배의식을 자인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문일지일(聞一知一)은 진보가 없다. 그것은 항상 제걸음이요, 배우는 대로만 알 뿐, 그 배운 지식을 뛰어넘는 추리나 응용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일지이(聞一知二)'는 '문일지십(聞一知十)'과도 같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미 그 가능성을 내포한 동차원의 언급이다. 자공은 자신의 능력을 폄하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공자는 기뻤다. 자공이 친구 안회 앞에서 자기를 낮출 줄 아는 허심탄회한 자세에 감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弗如也. 吾與女弗如也." 여기서 '여(與)'는 '......와'(and)라는 접속사의 의미이다. 공자가 처음 자공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면, 그 짓궂은 질문 앞에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자공의 훌륭한 인격을 바라보면서 우선 자공이 안회만 못하다는 자공의 자기시인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공자는 그러한 겸손한 자공과 길을 함께 한 것이다. 너뿐이 아니야! 그래! 나 또한 안회만 못하지.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스승의 자세를 배운다. 겸허를 통해 청출어람의 격려를 잊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미 한번 자공이 안회만 같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난 후, 또 다시 나와 너 둘다 안회만 같지 못하다고 하므로써 자공의 마음을 위로하는 스승의 따뜻한 마음씨가 엿보인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9


宰予晝寢. 子曰: "朽木不可雕也, 糞土之
재여주침   자왈  후목불가조야  분토지

장불가오야 어여여하주 자왈 시오
於人也聽其言而信其行今吾於人也聽其言而觀其行於予與改是."
어인야청기언이신기행금오어인야청기언이관기행어여여개시

재여가 낮잠을 자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썩은 나무에는 조각을 할 수가 없고, 거름흙으로 쌓은 담은 흙손질 할 수가 없다. 내 재여에 대하여 뭔 꾸짖을 일이 있겠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내가 처음에는 남에 대하여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행실을 믿었으나, 이제 나는 남에 대하여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사람의 행실을 살펴보게 되었다. 나는 재여 때문에 이 버릇을 고치게 되었다."

<해설>
<논어> 전편을 통하여 재여는 공자에게 미움을 사는 제자의 모습으로 거의 일관되게 그려지고 있다. 재여의 자(字)는 자아이며 보통 재아(宰我)라고 불리어진다. 그러나 재아는 공자의 제자로 자공과 더불어 언변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며, 또한 탁월한 관료의 재질을 가진 유능한 정치인이었다.여기서 낮잠이란 자서는 아니 되었던 상황에서 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었을 것이다. 공자와 제자들이 같이 공부하는 공석에서 재아 혼자 코를 골며 곯아 떨어졌을 것이다.'썩은 나무는 조각을 할 수 없다, 부슬거리는 썩은 거름흙으로 발라 올리는 담은 도저히 흙손질할 수가 없다'라는 것은, 소질이 나쁜 인간은 도저히 교육시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내 재여에 대하여 뭔 꾸짖을 일이 있겠는가?"라는 말은 꾸짖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꾸짖어도 소용이 없다는 의미며, 꾸짖을 가치조차 없다는 의미의 극심한 꾸짖음이다.
스승이 간곡한 심정으로 제자에게 진리를 설파하고 있는 자리에서 제자가 대낮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상황은 물론 엄한 꾸지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재여의 모습은 단순한 '낮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닫혀 있음'의 문제이다. 아무리 생리적으로 졸리다 하다라도 스승이 진리를 설파하는 자리에서 졸 수는 없는 것이다.공자는 한 사람의 말만 듣고도 그 실천력을 믿을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재여로 인하여 깨지게 되었다. 이제는 말을 듣고 과연 그가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가를 유심히 살펴본 후에야 사람을 평가하는 신중한 삶의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실천력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시(改是)'는 문자 그대로 '이를 고치었다'로 해석되지만, '이와같이 고치게 되었다'라는 뜻도 내포할 수 있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10


子曰:吾未見剛者."或對曰: 申장.子曰: 장也慾, 焉得剛?"
자왈 오미견강자  혹대왈   신장자왈  장야욕  언득강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나는 아직 강직한 자를 보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대답하여 말하였다:"신장이 있지 않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신장은 항상 욕심이 앞서는 사람이니 어찌 그를 강직하다 하리오?"

<해설>
고주에서 신장을 단지 노(魯)나라 사람이라고만 했다. 신장이라는 사람이 과연 공자의 제자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강(剛)이란 단지 강함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신체적인 강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그 인품의 강직함, 굳셈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강(剛)함의 표본으로서 어떤 사람이 신장이라는 인물을 제시하였다. 여기 '혹대왈'의 '대(對)'는 그러한 공자의 탄식에 대하여, 그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는 신장이라는 인물이 강하기는 하여도 그의 강함이 어떤 개인적 욕망이나 사사로운 욕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진정한 강(剛)이란 개인이 사사로운 욕망을 벗어나는 보편적 기준이 있지 않으면 않된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11

 

子貢曰我不欲人之加諸我也吾亦欲無加諸人子曰賜也非爾所

자공왈아불욕인지가저아야오역욕무가저인자왈사야비이소

及也

급야

자공이 말하였다:"저는 남이 저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남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야! 그것은 네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해설>
고주는 양자를 단절적으로 파악하는데 반하여, 신주는 양자를 연속적으로 파악한다.
고주는 우선 '가(加)'라는 동사를 매우 구체적인 행위를 지시하는 것으로서 해석한다. "가라는 것은 능욕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물질적, 정신적 폭력이나 압력을 타인에게 강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는 남이 저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저 또한 남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신주는 이 양자를 연결하여 하나의 문장처럼 해석한다. 그 해석은'남이 나에게 가하기를 원치 않는 것을 저도 남에게 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라는 뜻이 된다. '기소불욕(己所不欲), 물시어인(勿施於人):자기가 원치 아니하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과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한다.공자는 말한다: "사야! 바로 그것이 네가 미칠 바가 아니다." 남이 나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원치 않으려면 타인의 폭력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노력햐야 할 것이다.그리고 내가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으려면 내 자신이 철저히 비 폭력화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게 자공의 말처럼 원한다 해서 곧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공자의 사(士)의 집단은 폭력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공자가 추구한 사의 이상은 타인과 나를 철저히 비 폭력화 시키는데 있었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12

子貢曰:夫子之文章可得而聞也;夫子之言性與天道不可得而聞也.
자공왈 부자지문장가득이문야 부자지언성여천도불가득이문야


자공이 말하였다: "선생님의 문장은 얻어 들을 수 있으나, 선생님께서 본성과 천도를 말씀하시는 것은 얻어 들을 수가 없다."

<해설>
공자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형이하학적인 것이며 형이상학적 본체론에 관한 담론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통설이다. 따라서 이 장은 공자의 사상이 추상적이고 사변적이라기 보다는 매우 구체적인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자공이 부자의 문장을 들어볼 수 있으나, 성(性)과 천도(天道)는 들어볼 수 없다고 말한 것은 공자의 사상은 본성이나 천도로 규정될 수 없는 소박한 인문주의의 표방일 뿐이라고 하는 강력한 주장을 나타낸 것이다.
문장이란, 문(文)의 장(章)이란 문(文)의 질서이다. 여기서 문이란 예,악,형,정의 문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소한 공자에게 있어서 문자를 매개로 해서 표현되고 전달되는 성격의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 문화란 문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전통이요 질서다. 그의 문자가 대상으로 한 것은 예악이요 형정이다. 이러한 예,악,형,정의 근거로 공자는 인(仁)을 말했을 뿐, 성(性)이나 천도(天道)라는 어떤 형이상학적 논란을 일삼지 않았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13
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
자로유문  미지능행  유공유문

 

자로는 좋은 가르침을 듣고 아직 미처 실행하지 못했으면 다른 말을 들을까 두려워하였다.

<해설>
자로의 우직함과 진실함을 잘 나타내는 명구로서, 듣는 이의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이 깊은 장이다. 이것은 자로의 독백도 아니요, 자로에 대한 공자의 평어도 아니다. 자로에 대한 어떤 이의 이야기를 여기 담아 놓은 것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14
子貢問曰孔文子何以謂之文也子曰敏而好學,不恥下問,

자공문왈공문자하이위지문야자왈민이호학 불치하문
是以謂之文也."
시이위지문야


자공이 여쭈어 말씀드렸다: "공문자를 어찌하여 문이라 시호하였습니까?."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영민한 사람인데도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문이라 일컬은 것이다."

<해설>
공 문자는 위나라의 중신(重臣)이었다. 그의 성(姓)은 공(孔), 명(名)은 어, 문자(文子)라는 것은 사후에 붙여진 시호다. 시호라는 것은 한 사람의 생전의 업적을 평가하여 붙여지는 것인데, 훌륭한 사람에게는 훌륭한 시호가,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시호가 붙여진다. '문(文)'이라는 시호는 최상에 속하는 것이다.그런데 이러한 최고의 시호를 받은 공어라는 인물은 공자와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별로 그렇게 훌륭하게 칭송할 만한 인물로 간주하기 어려운 요소가 많다. 그러나 공자는 한 인간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그 인간이 외면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결과적 행위보다는, 그 인간의 내면적 삶의 원칙 같은 것을 존중하고 있고, 그 원칙의 보편적 가치를 개인적 좋음과 싫음에 무관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민이호학(敏而好學)'의 해석은 그가 매우 영민한 사람이래서, 즉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라서, 지긋이 앉아서 공부하는 스타일이 아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심히 공부하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호학(好學)은 공자에게 있어서의 최고의 찬사이다. 호학하면 문(文)이라는 시호는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변호하는 것이다.더 중요한 자격으로 공자가 제시하는 덕목은 '불치하문(不恥下問)', 즉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많은 사람들이 유교를 예교의 권위주의로 생각한다. 공자에게는 권위주의가 없다. 모르는 것은 누구에게든지 묻는 것이 곧 호학이다. 배움이란 묻는 것이다. 물음이란 대상을 가라지 아니한다. 아랫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진솔하게 물을 줄 아는 성품이 지도자의 제일의 덕성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15

子謂子産,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其事上也敬,其養民也惠,
공위자산 유군자지도사언 기행기야공 기사상야경 기양민야혜

其使民也義."

기사민야의

공자께서 자산을 평하시어 말씀하시었다:
"군자의 도가 네 가지 있으니, 몸가짐이 공손하며, 윗사람을 섬김이 공경스러우며, 백성을 기름이 은혜로우며, 백성을 부림이 의로운 것이다."

<해설>
자산은 정(鄭) 나라의 왕족출신의 재상인 공손교의 자(字)이다. 그는 정 나라 목공의 손이며, 자국의 아들로 태어나 BC543년에 정권을 장악하였다. 공자보다 1세대가 빠른 명망 높은 정치가였다.'위(謂)'는 평가한다는 뜻이다. 군자는 벼슬을 가진 정치적 지도자라는 뜻과 벼슬과 무관하게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물론 여기서는 이 두 가지 뜻이 다 함께 내포되어 있다. 그 군자의 도에 네 가지가 있는데 정자산은 그 네가지를 다 구비하고 있는 훌륭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행기(行己)'란 문자 그대로 자기를 행함이다. 즉 자신의 처신이나 몸가짐, 일상적으로 행동할 때의 모습이다. 그러한 몸가짐이 공손하다는 것이 그 첫째이다.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현대 민주사회에서도 윗사람이 있고 아랫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사상(事上)은 윗사람을 섬김이다. 윗사람을 어차피 섬겨야 할 것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공경스러워야 한다.'양민(養民)'과 '사민(使民)'은 통치의 두측면이다. 양민이란 요즈음 말로하면 복지의 측면이다. 사민이란 어떻게 국가대사에 국민들의 노동을 제공받느냐 하는 문제이다.
'기름(養)'과 '부림(使)'은 고대이래 오늘날까지 통치의 양대 측면이다. 기름이 없이 부림이 있을 수 없고, 부림이 없이 기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기름의 원칙은 '사랑(惠)'이다. 어떻게 아래 일반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가에 대한 깊은 생각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 없는 기름은 기름이 아니다.그리고 부림의 원칙은 '의로움(義)'이다. 즉 백성을 부리는 명분이 적절하고 정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대사회에 있어서의 정의의 개념이다. 오늘날과 같은 법제적인 정의는 아니지만 백성의 노동력을 제공받는 모든 행위가 어떤 원칙에 의거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16

子曰: "晏平仲善與人交, 久而敬之."
자왈   안평중선여인교  구이경지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안평중은 사람과 잘 사귀는 구나! 오래될수록 오히려 공경하니."

<해설>
안평중이란 공자의 동시대 인물로서 당시의 대국 제(齊) 나라의 재상 안영을 가리킨다. BC567에 제 나라에 멸망당한 내 나라의 이유 사람으로 제 나라의 영공, 장공, 경공을 섬겼다.사마천의 <사기>는 안영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안평중은 내 나라 이유의 사람이다. 제 나라 영공,장공,경공을 섬겼다. 절약하고 근검함으로써 힘써 실천하는 인물이었기에 제 나라에 중용되었다. 안영은 제 나라 재상이 된 후에도 식사에는 육류를 올리지 않고 소찬으로 먹었으며 처첩에게 비단옷을 입히지 않았다. 또 조정에 들어가서는 임금이 하문하시면 공과를 생각치 않고 곧고 바른 말로 응답하고, 하문이 없을 때는 자기 행동을 바르게 하는데만 힘썼다. 임금의 다스림이 올바를 경우에는 그 명에 순종하고, 올바르지 않을 경우에는 그 명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실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영공,장공,경공의 3대에 걸치어 제후들 사이에서 명성을 휘날리었다."그는 확실히 근검하며, 귀천을 불문하고 인물다운 인물을 꿰뚫어 볼 줄 알고 또 과감하게 등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선여인교(善與人交)'에서 본동사를 '선'을 본동사로 보면 '안영은 사람과 사귀는 것을 잘 한다.'의 뜻이 되고, '교'를 본동사로 보면 '안영은 사람과 잘 사귄다'의 뜻이 될 것이다.


'구이경지(久而敬之)'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주어를 안영 자신으로 보는 것이요, 하나는 주어를 타인으로 보는 것이다. 전자의 해석을 따르면 안영은 사람을 오래 사귈수록 더욱더 공경스럽게 사람을 대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사람은 친해지고, 또 친함이 오래되면 그 인간의 가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무감각해지기 쉽고, 또 지켜야 할 예의를 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친해질수록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요, 친해질수록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후자의 해석을 따르면 안영은 사람을 오래 사귀면 오래 사귈수록 상대방이 그를 공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도 뜻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교제를 오래 할수록 타인에게서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교제가 오래가면 그 인간의 일상생활의 여러 약점이 엿보이게 마련이고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로 사이가 벌어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오래 사귀어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그 인간의 됨됨이가 매우 사소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어떤 원칙에서 벗어나는 행동거지가 없는 철저히 자기규율성을 지키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현자가 아니면 지키기 어려운 것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17

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절, 何如其知也?"
자왈   장문중거채  산절조절  하여기지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장중문이 큰 거북딱지를 걸어두었고, 기둥머리 두공에는 산모양을 조각하고, 들보 위 동자기둥에는 수초모양을 그렸으니, 어찌 그를 지혜롭다 하겠는가?"

<해설>
장문중의 성(姓)은 장손이요, 명(名)은 진, 문(文)은 시호요, 중(仲)은 자(字)이다. 장손진은 공자의 고국 노나라의 대부였다. 그러나 공자와 동시대의 인물은 아니다. 공자 당대의 장문중이라는 사람은 노나라 인민들에게 명 정치가로서 훌륭한 말을 남긴 사람이며, 그 말이 썩지 않고 후세에 모범으로 빛나고 있었다.그런데 공자는 당대의 노 나라의 상식, 즉 장문중이 노 나라의 위대한 인물이라고 하는 일반적 판단을 뒤엎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의 역사적 평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것이다. 공자는 결코 상식이나 통념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존중하고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채(蔡)'라는 것은 점을 치는데 쓰는 거대한 거북의 딱지이다. 이 채는 오직 왕실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다. 나라 대사의 길흉을 판단하는데 쓰는 것으로 군주의 예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개 대부인 장문중이 이 채를 집에 걸어두고 살았다는 것은 곧 월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의 비판은 예악주의적 월권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다음, '산절조절'이라는 말은 '거채'와 함께 월권의 예로 들고 있는 것이다. 이 '산절조절'조차도 그것은 군주의 궁실 이상에만 허락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개 대부가 자기의 거실을 '산절조절'했다는 것은 공자로서는 참기 어려운 월권이었을 것이다. 장문중의 지극히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어찌 이런 자를 지혜롭다 할 수 있으리오?"그러나 장문중에 대한 기록은 공자의 말대로 부정적이지 만은 않다. 장문중은 춘추시대에 합리주의적 틀 속에 있는 훌륭한 정치가였음에는 부인할 여지가 없다. 희공 21년(BC639) 여름에 노 나라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 희공은 이에 절름발이 무당을 불에 태워 희생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 절름발이 무당 때문에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서양 역사에서 보는 마녀사냥과 거의 동일한 상황이었다. 이 때 장문중은 이를 저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웅변하는 것이었다.장문중이 말하였다. "이런 짓은 결코 가뭄에 대비하는 방책이 될 수가 없습니다. 먼저 내성과 외곽성을 수리하시고, 음식을 질소하게 줄이며, 모든 쓰임새를 검약케 하옵소서. 그리고 농사일에 사람들이 전념케 하며 그들이 맡은 바 직분에 충실토록 권하옵소서. 그리고 서로 골고루 나누어 먹도록 권고하옵소서. 이런 일들이야말로 가뭄에 대비하여 힘쓸 일들일 뿐이외다. 무당이 뭔 나쁜 짓을 했으며, 도대체 그를 죽여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하늘이 그를 죽이려 했다면, 애당초 그를 이 세상에 낳게 하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그가 만약 가뭄을 들게 할 수 있는 권능이 있다고 한다면, 그를 불태우면 가뭄은 더욱 더 심해질 것이옵니다." 희공이 이 말을 듣고 따랐다. 이해에 흉년이 들기는 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공자는 아마도 장문중의 합리주의적 정신을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러한 합리주의적 정신의 구현 못지 않게, 사회적 리더에게 필요한 어떤 도덕적 삶의 자세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18
子張問曰:令尹子文三仕爲令尹,無喜 色;三已之,無온色.
자장문왈 영윤자문삼사위영윤 무희 색 삼이지 무온색

舊令尹之政,必以 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曰: "
구영윤지정 필이 고신영윤  하여    자왈   충의   왈

仁矣乎"曰:未知.焉得仁 崔子弑齊君, 陳文子有馬十乘,
인의호 왈  미지 언득인 최자살제군  진문자유마십승

 

기이위 之. 至於他邦, 則曰: '猶吾大夫崔子也.'

기이위 지  지어타방  즉왈   유오대부최자야

違之. 之一邦, 則又曰: '猶吾大夫崔子 也.'違之.何如?"
위지  지일방  즉우왈   유오대부최자 야  위지 하여

 

子曰: 淸矣."曰:仁矣乎 曰:未知. 焉得仁?"
자왈  청의  왈 인의호 왈 미지  언득인

자장이 여쭈었다:
"영윤 자문이 세 번 벼슬하여 영윤이 되었는데도, 그 때마다 기뻐하는 기색도 없었고, 세 번 벼슬을 그만두면서도 그 때마다 서운해하는 기색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맡아보던 영윤의 정사를 반드시 새로 부임해온 영윤에게 상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이만하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충성스럽다 할 만하다." "인하다고 할 만합니까?"하고 다시 여쭈니,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모르겠다. 어찌 인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으리오?"

자장은 또 여쭈었다: "최자가 제나라 임금을 시해하자, 진문자는 말 10승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부를 다 버리고 떠났습니다. 다른 나라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 나라 권력자들도 우리나라 대부 최자와 같다.'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다시 한 나라에 이르러 또 말하기를, '이 나라 권력자들도 우리나라 대부 최자와 같다.'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이만하면 어떠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청백하다 할 만하다." "인하다고 할 만합니까?"하고 다시 여쭈니,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모르겠다. 어찌 인하다고 까지 말할 수 있으리오?"

<해설>
영윤이란 초 나라에서만 쓰는 관직 명으로 재상(수상)에 해당되는 벼슬이다. 자문의 성은 투이며 그 이름은 누오도라 한다.자문에 관한 본 장의 내용은 공자가 태어나기 113년 전의 일이다. 자문은 노장공 30년 초 나라의 영윤이 된 이래 노희공 23년에 이르기까지, 28년 동안 여러번 영윤직을 사양하고 또 다시 맡고 했던 것 같다.이 장의 질문자는 자장이다. 역시 자장의 <논어>속에서의 역할은 좋은 질문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자문은 분명 사심을 위하여 산 사람은 아니었다. 자문 자신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대저 정치에 종사한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백성을 비호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 대부분의 백성들이 빈털터리로 살고 있는데 나 혼자만 부를 취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백성을 근면케 일하게 하는 척하면서 나 혼자만의 배를 불리고 앉아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자문은 수상직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그 최고의 관직을 타인에게 양보하였다. 영윤이 될 때에도 기쁜 기색이 없었고 영윤을 그만둘 때에도 슬픈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하는 영윤에게 자기가 해오던 일을 상세히 알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이만하면 대단한 인물이 아니겠는가? 어떻습니까? 하고 자장은 공자에게 물은 것이다. 이에 대한 공자의대답은 자장의 기대만큼 시원치 않다. "그는 충성스럽다고 말할 만 하다." 자장은 되묻는다. 겨우 그 정도의 평가입니까? 선생님께서 주장하시는 최고의 덕목인 인함에 부응할 만한 인물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최후의 한마디를 던진다: "모르겠다. 어찌 인하다고 까지야 말할 수 있겠는가?"공자에게 '인'이란 지고의 덕목이다. 그것은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감수성이며, 어느 한 도덕성의 극단적 일면만으로 도달될 수 없는 것이다. 영윤 자문은 분명 범인이 따라갈 수 없는 덕성의 소유자이긴 했지만 자기의 주관적 한 가치의 달성에만 갇혀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초 나라에서 위대한 인물로 후세에 길이길이 기억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다음의 이야기는 제 나라의 진문자로 옮아가고 있다. '최자시제군'이라는 것은, BC 548년 5월 을해의 날에 제 나라의 가로, 최저가 그의 군주 장공을 죽인 사건을 의미한다. 여기 '시(弑)'라는 표현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였을 때 쓰는 말로서 하극상을 의미한다. 강한 폄하를 나타내는 가치술어이다. 진문자 또한 제 나라의 대부였다. 10승(乘)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말 40마리를 소유하는 신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 40필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정도의 부라는 것은 당대에는 상당한 수준의 것이었다. 최저의 발호하는 더러운 꼴을 보기 싫어 다 차 버리고 그는 타국으로 갔다. 그러나 타국으로 갈 때마다 최저와 같은 꼴을 목격하고 계속 그 나라를 떠나고 만다. 그만한 인물이면 평가해줄 만 하지 않는가? 공자는 '깨끗하다'고 만 평가를 자제한다. 인하지는 않습니까? 어찌 인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는가?타협을 모르는 깨끗한 삶의 자세만을 가지고 우리가 인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더러울 때는 더럽게 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19

季文子三思而後行.子聞之, 曰: "再, 斯可矣." 
계문자삼사이후행 자문지  왈   재  사가의

계문자는 세 번 곰곰히 생각한 후에야 행동하였다. 공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었다: "두 번이면 충분하다."

<해설>
계문자는 삼환(三桓) 중의 막강한 계씨 가문의 제3대 영주로서 노 나라의 문공, 선공, 성공, 양공, 4대를 섬기면서 깊은 신뢰를 쌓은 인물이다. 그는 계씨 가문의 대부라는 우리의 상식적 편견과는 달리 노 나라의 현인으로서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훌륭한 인물이었다. <좌씨전>에서 계문자라는 인물의 삶의 한 단면을 우리는 엿볼 수 있다. '노 나라의 계 문자가 세상을 떠남에 대부들이 그의 집으로 가서 염을 했다. 그때 노 나라의 양공도 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계문자의 가신 우두머리가 집안의 기물들을 갖추어 장례식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집안에는 명주나 비단을 입은 여자가 없었고, 사람이 먹는 곡식을 먹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감추어둔 금이나 옥의 패물이 전혀 없었고, 같은 기물이 둘 이상 있는 것이 없었다. 거기에 모인 군자들은 이런 것을 보고 계 문자가 얼마나 공실에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나를 알게 되었다. 선공, 성공, 양공 3대의 군주를 모시며 재상 노릇을 했는데도 자기 사익을 위하여 쌓아둔 것이 아무 것도 없었으니 충성스럽다 하지 않을 수 있을손가 ?'

'삼사이후행'이라는 표현을 통해 계문자는 대단히 신중한 사람이었으며, 매사를 충분히 준비하고 생각한 후 행동에 옮기는 인품의 소유자였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이 '삼사이후행'이라는 말을 듣고 공자가 그 선배 정치가에 대해 평한 것이 바로 이 장의 내용이다. 그런데 '재사의(再, 斯可矣 )'라는 공자의 평어에 대한 주석은 고주와 신주가 매우 상반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고주는 삼사(三思)를 크게 평가하는 입장이다. 즉 두 번만 생각했어도 될 것을 세 번씩이나 생각했으니 계문자의 인품이 얼마나 훌륭하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자의 '재사가의'를 '두 번만 생각해도 됐을 것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주는 공자가 '삼사'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이야기 한 것으로 간주한다. 세 번씩이나 곰곰히 생각한 후에 행동하였다구? 두 번이면 충분할 것을 세 번씩이나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몇 번이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일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신중함만이 인간의 행위에 대한 절대적 선일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때는 인간이 생각 없이 우선 행동으로 옳기고 볼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반추가 깊을수록 좋은 결과 만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려 깊음이 비겁의 간접적 표현일 수도 있고, 살피고 또 살피는 것은 사사로움이 개입할 여지가 더 커져서 미혹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20

子曰영武子邦有道,則知;邦無道,則愚其知可及也其愚不可及也.
자왈영무자방유도 즉지 방무도즉우 기지가급야기우불가급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지혜롭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어리석었다. 그 지혜로움을 따를 수 있으나, 그 어리석음은 따르기가 어렵다."

<해설>
이 장은 영무자라는 위 나라의 대신에 대한 공자의 평가를 적어 놓은 것으로 대체로 그 평가는 대단히 긍정적이다. 당시 위 나라는 북방의 진 나라와 남방의 초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그 사이에서 고민하던 작은 나라였다. 위 나라의 국내사정도 친진파와 친초파로 이분되어 싸우는 통에, 군주였던 성공은 국외로 망명했다가 또 다시 복귀하는 등 매우 어지러운 형국이었고, 정변이 끊이질 않았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분골쇄신, 나라와 군주를 지킨 인물이 바로 이 장에 등장하고 있는 영무자인 것이다.나라에 도가 있을 때 지혜롭게 활약하는 것은 좋은 일이요 오히려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나라에 도가 없을 때 어리석을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어리석음이란 우리가 소위 평상적으로 '지혜롭다'하는 것을 뛰어넘는 어리석음이다. 소위 '대지약우(大智若愚, 큰 지혜는 어리석은 듯하다)'라는 도가철학의 일반명제의 의미구조와 실제적으로 대차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 '방유도'와 '방무도'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영무자에게 어떠한 정황이었는지를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산(茶山)에 의하면 유도,무도의 시기를 모두 성공의 시대로 보고, 무도는 성공의 치세 초기 3년의 혼란시기이며 유도는 그 혼란이 영무자의 힘으로 평정된 이후의 27년간을 평화의 시기라고 본다. 즉 다산은 우(愚)를 혼란시기의 피세적 처신의 어리석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시기에 어리석을 정도로 보이는 충직함·우직함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영무자가 국가 종묘사직이 어려웠던 시기에 우직하게 국군을 보좌하고 국민들을 설득시켜 국난을 넘겼으니, 바로 이것이 그의 우직함을 본받기 어렵다고 말한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난이 평정되자 그 공적에 머무르지 않고 깨끗하게 은퇴하여 정계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그렇게 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천수를 다 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았다. 바로 이것이 나라가 유도함에 지혜롭다고 공자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나라가 다스려지자 자기 공로를 드러내지 않고 스러지는 지혜로움은 오히려 따를 수 있지만, 어지러운 상황에서 용감히 실천하여 그 역경을 타개해 내고야 마는 그 우직함은 쉽게 따르기 어려운 것이라는 것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21

子在陳,曰歸與 歸與吾黨之소자狂簡,斐然成章,不知所以裁之.
자재진 왈귀여귀여오당지소자 광간 비연성장 부지소이재지

공자께서 진 나라에 계시었을 때, 말씀하시었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오당의 어린 제자들이 박력있고 뜻이 커서, 찬란하게 문장을 이루었으나, 그것을 어떻게 다듬어야 할지를 모르는구나."

<해설>
이것은 공자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귀로(歸魯)라는 사건을 직면하고 있는 공자의 인간적 '그리움'을 묘사한 탁월한 장이다. 후학의 교육이란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다. 교육이란 백년지계요, 한 계절이나 한 해, 단 기간에 뿌리고 거두는 수확물 일 수는 없다. 공자는 자신의 배움에 뜻을 둔 이래로 그는 줄곧 배우면서 가르쳤다. 평생을 그는 교육자로서 학단을 형성하고 살았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성숙한 모습을 보기 전에 기나긴 방랑의 길에 올라야만 했던 것이다.공자는 56세에 노 나라 대사구의 지위를 잃고 유랑 길에 올라 68세 때 다시 고국인 노 나라에 돌아오기까지 열국(列國)을 주유하였는데 진(陳) 나라 체재시의 상황인 것 같다.당시 노 나라의 재상인 계환자가 병이 들어 죽음의 병상에서 그의 아들 계강자에게 탄식하여 말한다: "내 생애 가장 큰 실수는 공자라는 위대한 친구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었다. 그가 집권했을 때 노 나라는 크게 일어나는 기운이 감돌았다. 그의 말을 계속 들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공자에게 죄를 지었다. 내가 죽으면 너는 반드시 노 나라의 재상이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반드시 공자를 다시 불러야한다."


수일 수 계환자는 격동의 생애를 마감한다. 계강자가 대를 이어 재상의 자리에 오르고 부친의 장례를 끝내자마자, 공자를 부르려 한다.그러나 계강자의 의지는 대부 공지어의 저지로 안타까웁게도 또 무산되고 만다. 그러나 공자 대신 공자의 제자인 염구를 부른다. 공자는 자신의 곁을 떠나는 염구를 바라보며 부러운 듯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노 나라 사람이 구를 데려가는 것을 보니, 이것은 작게 쓰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크게 쓰려하는 것이다."여기 '소용(小用)'이라는 말에 대하여 '대용(大用)'이라 한 것은, 지금은 비록 귀로의 길이 좌절되었지만, 필연코 앞으로 자기를 크게 쓰기 위한 길을 예비하고 있다는 뜻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유랑의 생활을 청산하고 싶은 심정과 보람 있는 귀로의 계기에 대한 갈망이 '대용(大用)'이라는 한 마디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바로 이 장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돌아가자! 돌아가자!(歸與! 歸與!)'
그 얼마나 긴박감 있는 표현인가? 그러나 이 발설의 순간에 공자는 노 나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오직 그의 제자 염구가 그의 곁은 떠났을 뿐이다. '돌아가자! 돌아가자!'는 기실 '돌아가고 싶구나! 돌아가고 싶구나!'의 애절한 심정의 표현인 것이다.오당지소자(吾黨之小子)라고 하는 것은, 노 나라 고향에 남겨두고 온, 보고 싶은 나의 어린 제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광(狂)'이란 서투르거나 닳아빠지지 않은 모습이요, 문명의 억압에 짓눌리지 않은 패기나 의욕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간(簡)'이란 것도 간략함과 동시에 거대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즉 좀 엉성하지만 스케일 큰 모습, 즉 젊은이의 야망이 큰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비연성장(斐然成章)'이란 의미적으로는 '광간(狂簡)'의 대비되는 것이다. 여기 '성장(成章)'의 '장(章)'이란 문명이요, 질서요, 교육을 거쳐 함양된 교양인의 모습이다. '비연(斐然)'이란 문화적 소양의 찬란한 모습을 형용하는 형용사다. 그 광간의 인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드디어 찬란하게 문명의 질서를 꽃피웠구나마지막 '부지소이재지(不知所以裁之)'의 '재(裁)'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가위질'이다. 즉 '모양'이나 '스타일'을 창출하는 최종적인 행위을 일컫는 것이다. '재지(裁之)'란, 즉 제자들 각기의 인간들이 문명 속에서의 자신들의 역량의 가능성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어떤 삶의 스타일을 창출하는 마지막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들을 다시 지도하면서 그들의 찬란한 역량을 다듬어 줄 수 있을 텐데, 아∼ 안타깝도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22

子曰: "伯夷·叔齊不念舊惡, 怨是用希."
자왈   백이 숙제불념구악  원시용희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백이와 숙제는 사람들이 저지른 지난 잘못을 기억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사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해설>
백이·숙제는 고죽국 군주의 아들이었는데 부친이 죽자 서로 군주 자리를 양보한 끝에, 마침내는 형제가 함께 고국을 떠났다. 그들은 처음에는 나라의 주왕(紂王)을 섬겼으나 그 포악함을 보자, 주 나라의 문왕(文王)에게로 갔다. 문왕이 죽은 직후, 그 아들 무왕이 은 나라를 치려는 것을 보고, 아무리 폭군이라도 이를 치는 것은 또 하나의 악을 저지르는 일이라 하여 무왕을 간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주 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자, 그 녹(祿)을 안 먹겠다 하여 수양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 죽었다.'불념구악(不念舊惡)'이란, 남들이 나에게 저지르는 잘못들, 당할 때는 괴롭고 원망스러운 것이지만 이미 흘러가 버리게 되면 그것을 꽁하게 나의 의식 속에 간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난 악을 기억치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현자가 아니면 실천키 어려운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구악(舊惡)을 기억하기 때문에 서로가 원망 속에 빠져 저주스러운 삶을 사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백이 와 숙제는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먹으며 굶어죽는 순간까지도 무왕의 악을 기억치 않았을 것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23

子曰:孰謂微生高直.或乞醯焉,乞諸 其隣而與之."
자왈 숙위미생고직 혹걸혜언 걸제 기린이여지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누가 미생고를 정직하다 이르는가? 어떤 사람이 초를 좀 얻으려 하자, 얼른 옆집에서 빌어다가 주는구나!."

<해설>
미생고라는 사람은 문맥으로 보건대 공자 당대에 정직한 사람으로 평판이 높은 사람이었다. 공자는 미생고가 정직한 사람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평판에 찬물을 끼얹는다. 누가 미생고를 정직하다고 말하는가? 미생고는 정직하지 않다! 왜 그런가? 어떤 사람이 그이 집으로 가서 식초를 좀 얻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의 집에슨 마침 식초가 없었다. 식초는 발효식품이었기 때문에 옛날에는 좀 귀한 조미료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생고는 옆집으로 달려가서 식초를 얻어다가 주는 것이 아닌가? 공자가 여기서 동네사람들이 이러한 정감있는 형태를 빌어, 그의 제자들에게 전하려 했던 교훈은 무엇이었던가?
인간은 원래 선의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는 선의를 다 실천할 수 있는 상황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게 무엇을 부탁 받았을 때, 그 부탁이 들어주기 어려운 형편이라면 솔직하게 거절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선의의 실천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리하게 모든 부탁을 들어주려고만 하다가는 '허위'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공자가 인간에게서 경계하는 것은 도덕성의 과불급이 아니라, 바로 '허위의식에로의 함몰'인 것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24

子曰:巧言·令色·足恭,左丘明恥之,丘 亦恥之.匿怨而友其人,
자왈 교언 영색 주공 조구명치지 구 역치지 익원이우기인
左丘明恥之,丘亦 恥之."
좌구명치지 구역 치지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번지르한 말, 꾸민 얼굴빛, 지나친 공손, 이것들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기노라. 싫어하는 감정을 감추고 그 사람을 사귀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기노라."

<해설>
이 장에 나오는 좌구명은 현명한 노 나라의 대부였다고도 하나 그 구체적인 정황은 알 길이 없다. 공자 이전에 노 나라에 실존했던 현자(賢者)로서 공자의 마음 속 깊은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교언·영색'은 이미 나왔던 표현이다. '주공(足恭)'은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다리의 움직임을 지나치게 겸손하게 하는 작태의 형용이요, 하나는 그냥 추상적으로 지나치게 공손함을 말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족공'이라 발음하고 후자의 경우는 '주공'이라 발음한다. 지나칠 주(足)로 읽는다. 지나친 공손이나 겸손은 모두 교언·영색과 상통하는 것이다. 여기에 공통된 것은 '허위의식'이다. 인간세에서 겸손이란 미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겸손도 내면적 겸손이 있고 외면적 겸손이 있다. 겉으로 겸손하고 공손하게 보이는 인간이 내면은 자만과 교만과 무시로 가득 차 있을 수 있고, 겉으로 좀 무례하게 보이는 인간일지라도 오히려 소박하고 겸허한 성품의 소유자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열려 있느냐에 있는 것이지 그가 얼마나 공손한 외면적 작태를 일삼느냐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겸손의 본질은 개방에 있다. 지나친 겸손은 항상 교언 영색의 허위와 연계되어 있다. 불쾌할 때는 불쾌를 표현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요, 항거해야 할 때는 항거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요, 자신감을 과시해야 할 자리에서는 자신있게 행동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左丘明恥之, 丘亦恥之(좌구명치지, 구역치지)."라는 표현은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긴 것을 나 또한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부끄러움의 강도를 배가시키는 표현이다.여기 '원망을 숨긴다'는 표현은, 상대방이 정말 사귀기 싫은 저열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싫다고 하는 감정을 숨기면서 그 인간과 벗하는 위선을 말한 것이다. 호오(好惡)을 불문하고 인간관계를 넓게만 유지하려는 것은 허위요 위선이요 자기기만이다. 세상의 선악의 판단이 흐려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싫어하는 감정을 숨기고 그 사람과 벗하는 것, 그것은 부끄러워 해야 할 비 도덕이다. 그것을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구(丘) 또한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노라.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25

顔淵季路侍.子曰:합各言爾志"子路曰願車馬衣輕구與朋友共
안연계로시 자왈 합각언이지 자로왈원거마의경구여붕우공
폐之而無憾.顔淵 曰:願無伐善,無施勞 子路曰:願聞子之
폐지이무감 안연 왈 원무벌선 무시로 자로왈 원문자지
志."子曰: 老者安之,朋友信之,少者懷之."
지  자왈  노자안지 붕우신지 소자회지

 

안연과 계로가 공자를 모시고 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제각기 품고 있는 뜻을 한번 말해보지 않으련?." 자로가 말하였다: "원컨데, 수레와 말, 윗도리와 비싼 외투를 친구와 함께 쓰다가, 다 헤지더라도 유감이 없고자하옵니다." 안연이 말하였다: "원컨데, 잘함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공로를 드러내지 아니하고자 하옵니다." 자로가 말하였다: "이제는 선생님들의 뜻을 듣고자 하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늙은이로부터는 편안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친구로부터는 믿음직스럽게 여겨지며, 젊은이로부터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다."

<해설>
이 장에는 공자, 안연, 자로(계로), <논어>의 최고 주역인 삼인이 모두 그 동등한 배역을 맡고 있다. 자로는 공자의 오른 팔이요, 안연은 공자의 왼 팔이다. 자로는 무(武)와 의리와 우직한 충절을 상징한다. 안연은 문(文)과 사색과 고요한 내면을 상징한다.'합'은 '하불(何不)'의 축약태이다. '왜....... 하지 않는가?'의 뜻이다.
여기 '거마의경구(車馬衣輕구)'에서 '경'은 '구'의 가벼운 비싼 털가죽의 겉옷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경'자가 첨가되었을 것이다. '거마의구(수레,말,속옷,겉옷)는 모두 사치품목에 속하는 것이다. 앞의 '원(願)'은 '원컨데'의 뜻이다. '거마의구를 친구와 함께 쓰고, 그것이 다 낡아빠져도 유감이 없다.'고 자로는 말한다.안연은 무어라 말했을까? '願無伐善, 無施勞(원무벌선, 무시로)' 여기 '선(善)'이라 함은 도덕적인 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잘 함'이다. 즉 뛰어남이요, 유능함이다. 나의 뛰어남을 자랑치 아니하기를 원합니다. '무시로'는 시(施)를 '드러내다', '과시하다'의 뜻으로 보면,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이러한 안회의 대답에 멀쓱해진 자로는 갑자기 질문의 화살을 공자에게로 돌린다


그런데 공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너무도 일상적인 소박한 말이다. 이것은 공자가 얼마나 상식적이며 얼마나 일상적 정감의 꾸밈없는 인간인가 하는 것을 잘 말해준다. 여기서 노자, 붕우, 소자를 안(安), 신(信), 회(懷)라는 동사의 주어로 보면 '늙은이들이 나를 편하게 느끼고, 친구들이 나를 믿음직스럽게 여기고, 젊은이들이 나를 그리워한다.'가 된다. 여기 늙은이란 나에게 있어서 과거요, 친구란 현재요, 젊은이란 미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의 역사성이다. 지나간 사람들로부터 편안하게 여겨지고, 현재의 같이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신의가 있는 인간으로 여겨지며, 앞으로 올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한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더 말할 나위없는 지고의 이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세 마디야 말로 공자 생애의 이상과 그의 인품을 그려낸 명언이다. 그러나 이 세 마디 중에서 명구는 '소자회지(少者懷之)' 이 한 마디이다. 사람이 늙어갈수록 젊은 후학들을 가슴에 품어주어 그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줄을 알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로부터 영원히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늙어갈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공자는 '소자회지'의 삶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26

子曰: 已矣乎, 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 者也."
자왈  이의호  오미견능견기과이내자송 자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아∼어쩔 수 없구나! 자신의 허물을 보고서 내심 스스로 자책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해설>
여기 '이의호(已矣乎)라는 표현은 '아∼ 정말 이젠 틀렸구나!' 정도의 의미가 될 것이다.
'송(訟)'이란 원래 공자의 시대에도 재판의 뜻이 있었다. 그런데 이 장은 그러한 법제적 용어를 내성적 자책의 용어로 내면화 시키고 있다.인간은 늙어갈수록 자신의 허물을 인식하기도 어렵고, 또 그것이 허물임을 분명히 알아도 또 고치기 꺼려하는 성향이 짙어간다. 나이가 40만 넘어도 자기의 허물을 자인하고 그에 대하여 내면적인 부끄러움을 느끼는 상황이란 정말 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늙어갈수록 끊임없이 자기를 자책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탄식한 것이다. '아∼ 이젠 틀렸구나! 자기의 허물을 발견하고 내면 스스로 자책하는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인간은 늙어갈수록 '내자송(內自訟)'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성인의 길에 들어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위대한 역사적 인물 상들을 나열하면서, 그들에 관하여 일일이 평론한 끝에, 공자가 내리고 있는 결론이란 단순한 것이다. 허물이 있으면 언제고 그것을 고칠 줄 아는 인간이 된다면 우리는 역사적 성인의 고정된 이상적 모습을 더 이상 그릴 필요가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公冶長第五(공야장제오) -27
子曰:十室之邑,必有忠信如丘者焉,不 如丘之好學也."
자왈 십실지읍 필유충신여구자언 불 여구지호학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열가호 쯤 되는 조그만 마을에도 반드시 나와 같이 충직하고 신의 있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해설>
'십실지읍(十室之邑)'이란 열 가호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다. 읍의 가장 작은 단위로서 강조적인 표현이다. 그렇게 작은 마을에도 충직하고 신험있는 말을 하는 자들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충신한 자들이란 좋은 사람들이요, 착한 사람들이다. 이 문장에서 '필유.....'와 '불여....'는 내용적으로 강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나처럼 충신한 자들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드러나 그 충신한 자들도 나의 호학에는 절대 미칠 수 없다. 나의 삶의 지고의 이상이 '호학'에 있었음을 고백하는 공자의 최종적 설파다.충직하고 신의있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충직함만으로 인간의 인간됨은 완성되지 않는다. 인간은 아무리 충직해도 그 충직함의 울타리에 다시 갇혀 버리게 되고 마는 것이다. 충직의 울타리는 항상 좁은 것이다. 인간은 반드시 그 충직함의 울타리를 다시 개방시켜야 한다.

 

자신의 충신함을 뛰어넘어 사리를 파악하는 보편적인 안목을 기르지 않으면 안된다. 그 보편적인 안목에로의 끊임없는 자기개방, 자기해탈이 공자에게는 '배움'이라는 것이다. 공자에게서 '배움'이란 어떤 고정된 인격의 덕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습득의 방법을 말한 것이다. 충신은 지역적인 것이다. 그 지역적인 것이 지역적인 특성을 잘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지역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보편성의 획득을 공자는 '호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호학'은 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배우기를 좋아함'이라는 동명사적 상태이다. 인간은 충직과 신의로만 인간이 되질 않는다. 인간은 '학문'을 함으로써만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다. 즉 배움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인(仁)의 실천은 인간의 모든 사태를 넓게 통찰할 수 있을 때만 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자신의 충신함이 하나의 방편에 머루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은 결코 인(仁)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