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漢字文學/[사서오경]四書五經

논어(論語) 第四 里仁篇 (이인편 1~5)

好學 2009. 9. 21. 23:59

 

논어(論語) 第四 里仁篇 (이인편 1~5)

 

里仁 第四 1


子曰: "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자왈   이인위미  택불처인  언득지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마을에 인의 덕을 갖춘 이가 살면 이웃도 그 감화를 받게 되므로, 그런 마을에 사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인한 이를 택하여 그 이웃에 살 줄 모른다면, 도저히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해설>

'이(里)'를 사람들이 거처하는 동네로 보아, '이인(里仁)'을 한데 묶어 '인한 동네에 거주한다.'라고 해석하여 정현의 고주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동네라는 것은 백성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인한 사람의 동네에 거처하는 것, 그것을 좋게 여기는 것이다. 좋은 거처를 구함에 있어서 인한 사람의 동네에 처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혜롭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주자의 신주도 비슷하다. '마을에 인후한 풍속이 있는 것이 아름답다. 마을을 선택하되 인후한 풍속에 처하지 않는다면, 시비의 본심을 잃게 되어 지혜롭다할 수 없는 것이다.'


里仁 第四 2


子曰: "不仁者不可以久處約, 不可以長  處樂. 仁者安仁, 知者利仁"

자왈   불인자불가이구처약   불가이장 처락   인자안인 지자이인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인하지 못한 자는 오랫동안 곤경에 처하지 못하며, 또 오랫동안 즐거움에도 처하지 못한다. 인자는 인에서 편안할 줄 알고, 지자는 인에서 이로움을 취한다."


<해설> 

인간이 오랫동안 곤궁한 상황에 처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곤궁한 상황을 참고 견디어 낼 수 있는 극기의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곤궁한 상황에 쉽게 좌절하고 만다. 그러나 인간에게 똑같이 어려운 것은 혜택 받은 환경과 성공의 즐거움에 오랫동안 처할 줄 아는 슬기를 발휘하는 것이다. '약(約)' 이란 궁핍하고 곤궁한 상황이다. '락(樂)'이란 성공의 즐거움이요, 부귀의 획득이다. 인간은 곤궁한 상황을 극복하는 데만 지혜를 발휘한다. 그러한 세속적 가치는 영웅적 행위로서 예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참으로 어려운 것은 행복한 순간들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공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창출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은 고통의 극복 못지않게 어려운 것이다.

 

인간이 즐거움에 오래 처한다는 것은 결국 도덕적 가치를 끊임없이 창출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도덕적 가치는 순수하게 인(仁) 그 자체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인간다움의 감수성에서 절대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어떤 상대적, 혹은 공리적 결과를 위하여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자와 지자의 가장 큰 차이는 안인(安仁)과 이인(利仁)의 차이이다. 지혜로운 자들은 인함으로부터 어떤 이로운 결과를 취하기 때문에 도덕적일 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인한 자들은 인함 속에서 살고 단지 인함 속에서 편안히 느낄 뿐이다. 사회적 칭찬과 비난에 관계없이 양심의 소리를 따르는 것이다. 인의 도덕의식은 절대적이다.


里仁第四 3


子曰: "惟仁者能好人, 能惡人."

자왈   유인자능호인  능오인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오로지 인한 자래야 사람을 좋아할 수 있으며, 또 사람을 미워할 수 있는 것이다."


<해설>

인의 덕을 체득하지 못한 사람이 남을 미워하거나 사랑한다 할 때, 그것은 반드시 미워할 만해서 미워하고 사랑할 만해서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다. 인(仁)을 체득 못한 사람은 남을 오해할 수도 있고, 사적인 감정, 이해관계에 의해 좋아하고 미워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최고 도덕인 인(仁)에 도달한 사람은 이런 사적인 감정, 이해관계를 초월해 있으므로, 그 사람이 좋아한다면 그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요, 미워한다면 정말 미움을 받아야 할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里仁第四 4


子曰: "苟志於仁矣, 無惡也."

자왈   구지어인의  무오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진실로 인함에 뜻을 둔다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해설>

이 장을 행위의 주관성의 맥락에서 해석하면 내가 참으로 인간됨의 보편적 원리 차마 어찌할 수 없는 도덕적 감성의 보편성인(仁)에 기준을 두고 나의 삶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알고 설정한다면, 나는 남이 싫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게 될 것이며, 남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里仁第四 5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不以其道得之,不處也. 貧與賤,是人之所惡也;不以其道得之, 

자왈  부여귀  시인지소욕야 불이기도득지 불처야  빈여천 시인지소오야 불이기도득지 

不去也. 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불거야  군자거인  오호성명   군자무종식지간위인  조차필어시  전패필어시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부귀는 사람들이 다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에 처하지 않는다. 빈천은 누구나 다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부당한 방법으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군자가 인함에서 떠나 있다면 어찌 명예로운 이름을 이룰 수 있겠는가? 군자는 한 끼의 시간동안에도 인을 어기는 법이 없다. 황급한 때에도 반드시 인과 같이하며, 실족할 때에도 반드시 인과 같이 할 뿐이다."


<해설>

'조차(造次)'란 무엇인가 예기치 못했던 일들이 황급하게 벌어지는 상황을 말하는 것. '전패(顚沛)'는 '몸이 굳어 넘어진다, 쓰러진다.'는 뜻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중심을 잃고 기울어 쓰러져 정처 없이 표류하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시절이 있게 마련이다. 조차나 전패나 모두 그러한 우리 인생의 시련기나 위기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부귀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요,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이해하기 쉽다. 그런데 인간세에 있어서, 부귀는 소수의 현실이요, 빈천은 다수의 현실이다. 대다수의 인간들은 빈천하게 살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빈천한 사람들이 자신의 실존적 과오로 인하여 당연히 빈천해야 할 상황에서 빈천한 삶을 영위하는 현실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빈천한 사람들이 그러한 실존적 과오가 없이도 그냥 빈천한 운명에 처하고 있는 상황에 직면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생명은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어떤 생명은 엄동설한에 연탄 한 장을 피울 수 없는 판잣집에서 태어난다. 그 판잣집에서 태어난 생명에게 빈천의 실존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공자는 '불이기도득지'라 표현한 것이다. 즉 그러한 빈천은 결코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말한다. 그렇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결과가 아닐지라도, 그러한 빈천을 구차스럽게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 "그것이 비록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고, 부당한 방법으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여기에 깔려 있는 공자의 사상 핵심은 인간이 산다고 하는 문제가 부귀에 처하거나, 빈천을 벗어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은 오로지 '인함(仁)'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말한다. 군자가 잠시라도 인을 떠난다면 어찌 우리가 그를 사람이라 말할 수 있으리오? 여기 공자가 말하는 '성명(成名)'이란, 인간이 인간다움을 이룩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인이란 인간의 심미적 감성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어떤 도덕적 경향성이다. 인간이 이 인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공자는 말한다. 한 끼의 식사를 끝낼 그러한 짧은 시간 동안에라도 군자는 인에서 어긋나는 벗이 없다. '종식지간(終食之間)'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당시에 짧은 시간을 나타내는 숙어적 표현이었을 것이지만, 문자 그대로 인은 밥을 먹고 있는 중에도 떠날 수 없는 것이라는 소박한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조차, 전패의 한계상황에서도 반드시 인간은 인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조차와 전패의 고뇌 속에도 우리 인생의 시련기나 위기상황을이겨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