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漢字文學/[사서오경]四書五經

논어(論語)의 第三 八佾篇(제삼 팔일편)

好學 2009. 9. 21. 23:44

 

논어(論語)의 第三 八佾篇(제삼 팔일편) 

 

八佾第三(팔일제삼) -1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孰不可忍也!"
공자위계씨   팔일무어정  시가인야 숙불가인야

공자께서 계씨를 일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여덟 줄로 뜰에서 춤추게 하니, 내 이것을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 참으리오!"

<해설>
전통적 주석의 말대로 8일무는 8×8〓64 명의 춤이며 이것은 천자(天子)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제후는 6일무를, 대부는 4일무를 사는 2일무를 추도록 허락되어 있던 것이 당대의 예의 질서감각이었다는 것이다. 공자는 계씨가 일개 대부의 신분으로 그 사가의 사당 앞 중정(中庭)에서 8일무의 제식을 자행하는 것은 예의 파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파괴를 '참(僭)'이라 부르는 것이다. 공자는 신분에 맞는 바른 예야말로 한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보았다. 그러한 예악의 파괴는 사회혼란만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계씨의 그것은 탐욕과 허세와 혼돈의 장난에 불과했던 것이다.
'시가인야, 숙불가인야'의 해석은 공자자신의 울분을 토로하는 신음소리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내 이것을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 참으리오!"

八佾第三(팔일제삼) -2


三家者以雍徹. 子曰: "相維벽公, 天子穆穆', 奚取於 三家之堂?"
삼가자이옹철  자왈   상유벽공  천자목목   해취어 삼가지당

맹손,숙손,계손의 삼가사람들이 옹의 노래로서 제사를 마치었다.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 '제후들이 제사를 돕네.그 가운데 천자의 모습이 그윽히 빛나도다'라는 저 가사의 노래를 어찌 삼가의 마당에서 부를 수 있겠는가?"


<해설>
이 세 대부의 가문이 모두 자신의 사가의 당(堂)에서 천자의 제사에나 쓸 수 있는 노래로써 철상(徹床)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철(徹)이란 제사를 다 끝내고 늘어놓았던 제기를 철수시키는 제사의 마지막 마무리 단계의 의식이다. 이 때 악인(樂人)으로 하여금 먼저 옹(雍)노래를 부르게 하여 귀신을 즐겁게 해드리고 난 후에 제기를 거둔다는 것이다.
벽공이란 천자가 제사를 지내는 자리에 모여드는 제후들이다. 그렇다면 이 옹(雍)이라는 노래는 명백히 천자의 제사의 격에 맞는 노래임이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도저히 노(魯)나라와 같은 소국의 대부가 자기 집 뜰에서 취할 수는 없는 노래인 것이다. 이에 공자는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八佾第三(팔일제삼) -3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자왈   인이불인  여례하   인이불인  여악학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사람이면서 인하지 못하다면 예인들 무엇하리오? 사람이면서 인하지 못하다면 악인들 무엇하리오?"

<해설>
이장은 공자의 생각의 철학적 구조를 잘 나타내는 심오한 표현으로 해석한다. 악(樂)은 하늘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요, 예(禮)란 땅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악은 인간의 허령한 상초적 상상력에 속하는 것이요, 예란 인간의 구체적인 하초적 질서감에 속하는 것이다. 악은 신(神)을 거느리고 天을 따르고, 예는 귀(鬼)를 거느리고 지(地)를 따른다. 악은 신(神)의 세계요, 예는 귀(鬼)의 세계다.악은 혼(魂)의 세계요, 예는 백(魄)의 세계다. 악은 부드러운 정감의 소산이요 예는 딱딱한 이지의 소산이다. 따라서 악은 친화를 위해있는 것이요, 예는 변별을 위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악은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요, 예는 인간의 외면으로부터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은 고요한 것이요, 예는 질서 정연한 것이다. 악은 천지지화(天地之和)요 예는 천지지별(天地之別)이다. 예는 우리에게 질서의 아름다움을 제공하고 악은 우리에게 생명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위대한 예악을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 궁극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 최종적인 인성론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인(仁)'이라고 공자는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예와 악은 예와 악다웁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인간이요, 인간을 인간다웁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인(仁)이다. 그렇다면 인(仁)이란 무엇인가?
'불인(不仁)'이라는 말은, 의가(醫家)에서 '무감각'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느낄 수 없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불인의 뜻에서 인(仁)의 의미를 역출해 낼 수 있다. 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느낄 줄 아는 상태'이다. 인(仁)은 인자함의 규범적 윤리덕성이 아니다. 그것은 윤리이전의 느낌이다. 그것은 심미적 세계를 느낄 줄 아는 감수성이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심미적 감수성이다. 심미적 감수성은 원초적인 것이며 상황적인 것이며 포섭적인 것이며 유동적인 것이다.

八佾第三(팔일제삼) -4


林放問禮之本子曰:大哉問!禮,與其奢也,寧儉;喪,與其易也,寧戚."
임방문예지본자왈 대재문 예 여기사야 녕검 상 여기이야 녕척

 

임방이 예의 근본을 여쭈었다.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훌륭하도다, 그 질문이여! 예는

사치스럽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하고, 상은 질서 정연하기 보다는 차라리 슬퍼해야 한다."

<해설>
임방이 공자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을 당시 이미 세속인들의 예에 대한 생각이 그 근본을 버리고 말엽만을 숭상하는 폐단에 빠져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그 예의 근본을 물었던 임방이 위대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與其) A 녕(寧) B'라는 관용구는 여(與)는 '.....라기 보다는(than)의 비교를 나타내는 뜻이며, 녕(寧)은 '차라리'의 뜻이다. A 라기보다는 차라리 B, 그러니까 A는 부정적인 맥락에 놓여지며 B는 긍정적인 맥락으로 해석된다.예에 대한 공자의 설명인 사(奢)와 검(儉)은,사치와 검약이라는 오늘날 우리의 말로 쉽게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예식은 화렬하고 사치스러운 장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는 간단하고 검소하고 간략할수록 더 좋은 것이다. 예의 검(儉)이 곧 본(本)이다. 이(易)는 형식적으로 잘 치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질서 정연한 어떤 상례의 규칙에 의하여 깔끔하게 진행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상(喪)의 근본은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상실되었다는 슬픔에 있는 것이다. 질서 정연한 상례를 과시하기 위한 무대가 아닌 것이다. 상(喪_)이란 질서 정연하게 형식적으로 잘 치루어지기 보다는 오히려 그 슬픔이 생생하게 표출되는 것이 그 본질이다!
예의 본질은 사치와 질서 정연한데 있지 아니하고, 검소하고 슬퍼하는데 있다. 예의 본질은 형식이 아니 상황이다. 사회적 과시가 아닌 인성적 표출이다. 외면적 허례가 아닌 내면적 슬픔이다. 우리는 여기서 대악(大樂)은 필이(必易)하고 대례(大禮)는 필간(必簡)이라고 한 <악기>의 말을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다.

八佾第三(팔일제삼) -5


子曰: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자왈   이적지유군  불여제하지망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오랑캐에게 군주가 있다 해도 그것은 중원의 여러 나라들이 군주가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해설>
제하(諸夏), 즉 중국에는 는 군주가 없다 할지라도, 이적(夷狄), 즉 오랑캐의 나라에 군주가 있어 돌아가는 것만큼의 또 다른 질서가 정치질서 배면에 있다는 것이다. 즉 군주의 유무는 한 국가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일차적이고 원초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군주제의 정치질서 배면에 있는 보다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질서, 그것을 공자는 '사문(斯文)'이라 부르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예악'이라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인(仁)'이라는 것이다. 인(仁)에서 우러나오는 예악만 있어도 무군주·무정부의 무질서를 감당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한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표명하는 것이지 이적은 단지 제하의 비극적 상황을 돋보이게 하는 항목으로서 원용되었을 뿐이다.제하(諸夏)는 '문명화된 나라들'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명국가의 근간은 군주의 유무가 아니다. 군주는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예악만 바로 서있으면 흔들림이 없다. 허나 오랑캐의 나라는 좋은 군주가 있을 때는 흥하고 좋은 군주가 없을 때는 망하고 마는 것이다. 즉 군주만 있고 문화가 없는 것이다.

八佾第三(팔일제삼) -6


季氏旅於泰山. 子謂염有曰: "女弗能救與?"對曰: "不能." 子曰: "鳴呼!

계씨려어태산  자위염유왈   여불능구여   대왈   불능   자왈   명호 

曾謂泰山不如 林放乎?"
증위태산불여 임방호

 

계씨가 태산에서 여제를 지내었다.공자께서 염유에게 일러 말씀하시었다: "너는 그것을 막을 길이 없었느냐? "염유가 이에 대답하여 말하였다: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아∼ 슬프도다! 일찍이 태산의 신이 임방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해설
염유는 공자의 초기 제자로서 공자에게 가장 중요한 제자들 중의 한명이다. 그는 특히 재예(才藝)에 뛰어났고 정사(政事)로서 이름을 날렸다. 염유는 육예(六藝)<禮(예)·樂(악)·射(사)·御(어)·書(서)·數(수)>에 달통한 인물이었고 매우 조용하고 겸손한 성품이었다. 기예와 재능이 풍부한 인간이었다.여기의 계씨는 당시 노(魯)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대부가문의 계강자를 가리킨다. 이때 염유는 계씨의 총재였다. 태산은 중국인들이 상상력 속에서는 천하 제일 산이라고 불리우는 오악 중의 으뜸가는 산이었다. 중국인들에게 태산이 의미를 갖는 것은 마치 조선인들에게 백두산이 차지하는 의미와도 같은 것이다. 사실 태산은 천자만이 접근할 수 있는 영험한 산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위대한 태산의 신령에게 계씨가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공자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개 대부인 계씨가 태산에 제사를 올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旅)'자는 한 사람이 깃발을 들고 가면 그 뒤로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가는 행렬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가 '여행'이란 의미로 이 '여(旅)'의 글자를 쓰고 있지만, 옛날에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러 가는 행렬의 모습을 여(旅)라고 불렀다. 계강자는 태산으로 가서 여제를 지내고 말았던 것이다. 공자의 분노는 들끓었다. 염유에게 꾸짖어 말하였다: "그래 그것을 막을 길이 없었단 말이냐?" 염유의 대답은 "네, 막을 수 없었습니다." 염유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한 마디다. 자기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에 대해서는 주제넘게 참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공자의 꾸지람의 '불능(弗能)'이 염유의 대답 속의 '불능(不能)'보다는 더 강한 어조이다. 여기서 태산이란 제(祭)를 받는 태산의 신(神)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로부터 제를 지내지 않아야 할 곳에 지내든가, 제를 지내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지내든가 하는 것을 '음사(淫祀)'라 불렀다. 음사는 무복(無福)한 것이며 오히려 재앙을 불러오는 것이다. 태산의 신이 그런 음사를 구분할 줄 모를 줄아는가? 그렇다면 태산의 신이 예의 근본을 묻는 임방만도 못하다는 말인가? 태산이 임방만도 못할 것 같으냐? 태산이야말로 계씨 제사의 잘못을 처음부터 꿰뚫고 있었을 것이라고 외치는 공자의 탄성은 계씨와 그것을 막지 못한 제자 염유에 대한 강렬한 질책이었을 것이다.

八佾第三(팔일제삼) -7

子曰: "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下而飮. 其爭也君子."
자왈   군자무소쟁  필야사호  읍양이승  하이음 기쟁야군자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군자는 다투는 법이 없다. 그러나 굳이 다투는 것을 말하자면 활쏘기 정도일 것이다. 상대방에게 읍하고 사양하면서 당에 오르고, 또 당에서 내려와서는 벌주를 마신다. 이러한 다툼이야말로 군자스럽지 아니한가!"

<해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경쟁을 근원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공자는 경쟁을 근원적으로 거부할 수 없다면 어떠한 경쟁이 군자다운 쟁(爭)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다.'군자무소쟁' 군자는 다투는 법이 없다. 군자는 다투는 것을 원칙으로 삼지 않는다. '필야사호!' 그러나 다투는 상황을 굳이 말하라면 아마도 활쏘기 정도일 것이다. 활을 쏘러 당에 오를 때도 읍하는 예를 한다. 읍례는 두 손을 모아 위로 들어 절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 먼저 쏘라고 사양하면서 당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활쏘기가 끝나면 당에서 내려와서, 과녁에 적중시키지 못한 쪽이 벌주를 마시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다툼이야 말로 군자의 다툼이 아니겠는가!

八佾第三(팔일제삼) -8


子夏問曰:巧笑천兮, 美目盼兮, 素以爲 絢兮.'何謂也?"子曰:

자하문왈 교소천혜  미목반혜  소이위 현혜  하위야   자왈  

繪事後素.曰: 禮後乎?"子曰: "起予者商也! 始可與言詩已矣." 

회사후소 왈  예후호   자왈   기여자상야  시하여언시위의


자하가 여쭈어 말하였다.: "'어여쁜 웃음 보조개짓고, 아릿다운 눈동자 흑백이 분명하니, 흰 것으로 광채를 내도다!'하니 이것은 무엇을 일컬은 것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 것을 뒤로한다." 자하가 말하였다: "예가 제일 뒤로 오는 것이겠군요?"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를 깨우치는 자, 상이로다. 비로소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겠구나."

<해설> 
자하는 공자 말년제자로 본시 위(衛)나라 사람으로, 나중에 위문후의 스승이 되어 제(齊)나라 직하학파의 모델이 된 위나라의 학단을 형성했다. 자하는 문학적 상상력이 탁월했던 인물이다.자하가 위나라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자하가 위나라의 노래, 위풍(衛風)의 한 수를 인용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 노래는 위나라 장공의 제나라 태자 득신의 여동생인 장강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 제나라의 여자가 너무도 아름다워, 그녀가 시집올 때 위나라 사람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노래라 한다. 이 노래는 오늘날의 <시경>속에 위풍(衛風) "석인(碩人)"으로 편집되어 남아있다. "석인"이란 훤칠하고 늘씬한 여인을 뜻한다. 공자가 말하는 '회사후소'란 이러하다. 그림을 그리는데 먼저 색색의 물감으로 모든 형체를 구현하고 제일 나중에 흰 물감으로 그 형체를 명료하게 드러내어 광채나게 만드는 최종 텃치를 하는 것과도 같이, 인간의 예라는 것은 온갖 갖가지 삶의 경험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 최종적으로 그 인격의 완성을 최종적으로 텃치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하는 말하였다: "그림에서 흰 물감이 제일 뒤에 오듯이, 인간의 인격형성과정에 있어서는 예가 제일 뒤에 온다는 뜻이겠군요?" 결국 석인의 아름다움의 최종적 치장은 예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이에 공자는 기뻐서 말하였다. 이 때 '상(商)'이라는 것은 자하의 실제 이름이다. 애정이 듬뿍 담긴 친근한 호칭이다: "상아! 넌 정말 나를 계발시키는 사람이로구나! 이제 너와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구나!" '기여자'의 '기(起)'는 단순히 감정의 흥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제자라 할지라도 그 깨달은 바가 선생인 나를 앞서는 면이 있어, 내가 미처 생각치 못했던 것을 깨닫게 해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八佾第三(팔일제삼) -9


子曰: 夏禮,吾能言之,杞不足徵也;殷禮,吾能言之,宋不足徵也.
자왈  하례 오능언지 기부족징야 은례 오능언지 송부족징야
文獻不足古也. 足, 則吾能徵 之矣."
문헌부족고야  족  즉오능징지의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하나라의 예는 내가 말할 수는 있지만 그 후예인 기나라가 증험을 대주지 못하며, 은나라의 예 또한 내가 말할 수는 있지만 그 후예인 송나라가 증험을 대주지 못한다. 문헌자료와 구두자료가 모두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료들이 충분하다면, 나는 하,은의 예를 후손들에게 증명해 낼 수 있을 텐데."

<해설>
공자가 이 장에서 '능언(能言)'이라고 말한 것은 이미 이 세상에는 하나라, 은나라의 예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공자는 워낙 넓게 배운 사람이라서 비로소 그것을 능히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말할 수 있다 해도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면 그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이다. 만약 기나라와 송나라에 문헌자료와 구두자료가 충분히 있었다고 한다면 반드시 공자의 말씀과 상합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것을 증험해 낼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하신 것이다.

八佾第三(팔일제삼) -10


子曰: " 체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
자왈    체자기관이왕자  오불욕관지의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체제사에서, 이미 강신주를 따른 뒤로부터는, 나는 그것을 보고 싶지 않다."

 

<해설>
체라는 것은 왕자의 대제(大祭)다. 이것은 군주가 선조의 위패들을 모신 태묘에서 철에 따라 지내는 대제인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종묘대제야말로 체제사의 한 전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나라 종묘의 정시제는 춘하추동 사계절의 시작과 납일에 지내었다. 체제사는 원래 천자만이 지낼 수 있었던 제사였는데, 노 나라는 주공의 단(旦)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태묘에서 체제사의 격식을 차리는 것이 주(周) 성왕(成王)시절부터 허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례의 원래 의미는 상실되어 갔고 그 후 노 나라에서 지낸 체제사는 무엇인가 원래의 모습에서 크게 변질되었을 뿐 아니라, 그 격식도 많이 비하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체제사가 아닌 제사에도 체의 격식을 마구 쓰는 그런 사태가 목도되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그것을 체제사의 대중화 현상이기도 했지만 공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명백히 월권이요 타락이었다.여기 관(灌)이라는 것은 신을 부르는 최초의 제식이다. 이것은 강신주를 땅이나 지푸라기에 붓는 제식이다. 이때 쓰이는 강신주를 울창주라고 한다. 공자는 말한다: 나는 체제사에 있어서, 이 울창주를 지푸라기 깔린 땅에 붓는 최초의 강신 제식단계 이후로는 도무지 관람하고 싶지를 않다. 관(灌) 이후의 체제사의 진행방식은 도무지 공자의 상식으로는 허용될 수가 없는 수준의 것들이었다.

八佾第三(팔일제삼) -11


或問체之說. 子曰: 不知也;知其說者之 於天下也,其如示諸斯乎!"

혹문체지설  자왈 불지야 지기설자지 어천하야 기여시저사호

指其掌.於天下也, 其如示諸斯乎!" 指其掌.
지기장 어천하야  기여시저사호   지기장

 

어떤 이가 체에 관한 해설을 듣고자 하였다. 공자께서 이에 말씀하시었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설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천하를 대함에 있어서, 그것을 여기에 놓고 보는 듯 하겠구나!" 그러면서 손바닥을 가리키셨다.

<해설>
혹자가 공자에게 체에 관한 학설을 물었다. 공자는 물론 체라는 제사의 본질이 어떠해야한다는 것을 이미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체라는 것 자체가 이미 노 나라의 현실 속에서는 당위적 형태를 반영하고 있질 못하였으므로 논의를 삼가는 것이 정도(正道)였다. 공자는 말한다: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시저사호(示諸斯乎)는 '천하를 여기에서 본다'는 의미로 여기는 곧 '손바닥'이다. 공자는 이 말을 하면서 손바닥을 가리켰던 것이다. 우리가 흔히 '손바닥을 들여다 보듯이 환하다'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러한 우리말 표현이 바로 이 <논어>의 구절에서 유래된 것이다. 신의 제사를 손바닥에 놓고 들여다보는 듯하다 함은 곧 인간과 우주에 대한 통찰의 스케일이 신의 경지를 뛰어 넘고 있다는 것이다.

八佾第三(팔일제삼) -12
祭如在, 祭神如神在. 子曰: "吾不與祭,如不祭."
제여재  제신여신재  자왈   오불여제여부제

제사를 지낼 적에는 있는 것 같이 하라 함은, 신을 제사 지낼 적에는 신이 있는 것 같이 하라는 뜻이다.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내가 직접 참여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면 그것은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해설>
예나 지금이나 신(神)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신을 제사 지낼 적에는 마치 신이 그곳에 강림해 나와 같이 있는 것처럼 생각해야만 그 제사의 의미가 있다. 여기 중요한 것은, 이 장의 문장이 신이 존재론적으로 이미 존재해 있고 그 신에게 참여한다는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여신제(如神在)'는 '마치 신이 있는 것처럼'의 뜻이다. 이 신의 존재는 신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인간에게 강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적으로 요청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말한다. 신의 존재는 오로지 내가 제사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만 확보되는 것이다. 신의 존재는 일방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의 실존의 유무와 상관없이 외로이 존재하는 느낄 수 없는 존재태가 아니라 나와 더불어 감응함으로써만 그 의미를 갖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무슨 바쁜 일이 있어, 제사에 남을 대리 출석시켰다면, 사실 그 제사는 안 지낸 것과 마찬가지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제신여신재(祭神如神在)라고 하는 일반 명제에 대해 공자는 '오불여제, 여부제(吾不與祭,)'라고 하는 주체적 인식의 명제를 제시한 것이다. "내가 직접 참여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면 그것은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신은 나와 더불어 감응하는 장에서만 존재한다. 신의 궁극적 의미는 나의 감응의 장 속에 있는 것이다.

八佾第三(팔일제삼) -13

王孫賈問曰: "與其媚於奧, 寧媚於조, 何謂也?" 子曰: "不然

왕손가문왈   여기미어오  녕미어조  하위야    자왈   부연

獲罪於天, 無所禱也."

획죄어천  무소도야

 

왕손가가 공자에게 물어 말하였다: "아랫목 신에게 잘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부뚜막 신에게 잘 보이라 하니,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지 않다!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

<해설>
왕손가는 위나라 현명한 신하 삼인(三人) 중의 한사람이다.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 위령공의 패정에도 불구하고 위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중숙어가 외교를 잘하고, 축타가 종묘를 잘 다스리고, 왕손가가 군사를 잘 다스리어, 적재적소에 재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공자는 위나라의 정세를 해설하고 있다.오(奧)란 '오묘한 구석'이란 뜻인데 이것은 안방아랫목을 관장하는 신이란 뜻이다. 조란 인간의 가옥 삶의 구조에서 가장 비천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부엌의 신이다. 부엌을 관장하는 자가 실권을 장악한 자이지만 그는 항상 윗사람을 모시는 비천한 자리에 있다.미(媚)는 아첨한다, 잘보인다는 뜻이다. 안방마님이 사시는 곳의 성주대감신에게 아첨하기 보다는 차라리 저 부엌뜨기가 사는 비천한 듯이 보이는 저 곳 부엌의 조왕신에게 잘 보이는 것이 더 실속이 있지 않겠소? 여기서 오는 위령공이나 위령공의 부인 남자(南子)를 가리키고, 조는 바로 이 말을 하고 있는, 위치는 낮지만 실권자인 왕손가 자신을 가리킨다. 왕손가가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었다면 공자에게 이런 말을 해서는 아니 되었을 것이다. 왕손가는 이때 자기 나라에서 실각하고 유랑의 길에 올라 여기저기 끼웃거리며 벼슬길을 구하고 있는 공자를 매우 얕잡아 보았음에 틀림이 없다.이때 공자의 자세는 준엄하다. 그렇지 아니하다!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 내 어찌 아첨하는 사람이랴! 나는 성주대감에게도 조왕신에게도 아첨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인간세의 이득을 추구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나는 하늘아래 떳떳하게 서고자 할 뿐이다. 나는 성주대감이나 조왕신에게 호감을 사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오로지 하늘에 죄를 얻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빌 곳이 없는 인간처럼 비열한 인간이 어디있으리오!

八佾第三(팔일제삼) -14


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
자왈   주감어이대  욱욱호문재  오종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주나라는 하나라,은나라 이대를 거울삼았다. 찬란하도다, 그 문화여! 나는 주를 따르리로다."

<해설>
'감(監)'을 계승발전시켰다는 적극적 뜻으로 풀어, 주나라는 하나라와 은나라의 장단득실을 참고하여 새로운 인문주의 문화를 꽃피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하는 자연주의 문화요, 은은 초월주의적 종교문화요, 주는 인문주의적 문화다. 주는 하,은의 변증법적 발전으로 공자의 의식 속에서 이상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욱욱(郁郁)'이라는 뜻은 성대하고 찬란한 모습이다.
'오종주(吾從周)'나는 주를 따르리로다. 이 한마디처럼 강렬하게 공자의 삶과 이상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문구는 없다.

八佾第三(팔일제삼) -15

子入大廟,每事問.或曰:孰謂추人之子知禮乎?入大廟,每事問."

자입태묘 매사문 혹왈 숙위추인지자지예호  입태묘 매사문

子聞之, 曰: "是禮也."

자문지  왈   시예야

 

공자께서 태묘에 들어가 제사가 진행됨에 매사를 물으시었다. 혹자가 말하기를: "그 누가 저 추인의 자식을 일러 예를 안다고 하는가? 태묘에 들어와 매사를 물으니." 공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시었다: "묻는 것이 곧 예니라."

<해설>
공자가 태묘에 들어갔다 하는 것은, 공자가 대사구가 된 이후의 일이다. 주공의 사당에서 행해지는 모든 예는 천자의 예에 준한 것이므로 평민들은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장의 사건은 공자 50세이후의 사건이다.그러므로 여기 '추인지자(추인의 자식)'라는 말은 매우 심한 경멸을 함축한 표현이다. 추는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지방관으로서 재임하였던 곳의 지명이다. 그러므로 여기 '추인'이란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추라는 곳은 좀 편벽된 곳이요, 괴팍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었으므로 '추인'이란 말 자체가 좀 비꼬는 톤을 함축하고 있다.그런데 공자는 태묘에 들어가서 제식이 진행됨에 따라 모든 단계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여기에 심한 아이러니가 있다. 공자는 원래 '예의 전문가'로 이름을 드날린 인물이다. 공자는 누구보다도 고례의 문헌에 밝기 때문에 그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막상 대사구가 되어 태묘에 들어 오니까 하나도 모르는 듯, 매 절차의 순간마다 구차스러울 정도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혹자는 말한다: "아니 누가 저 추인의 자식을 예의 전문가라고 했단말인가?" 이 말을 듣고 공자는 무어라 답했든가? 是禮也."내가 묻는다고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예다."예라는 것은 나의 물음을 통하여 끊임없이 생성되어가는 것이며, 그러한 물음을 통해 예는 변증법적으로 형성되어가는 것이다. 예는 존재가 아닌 생성이다. 사회적 질서가 생성이 아니고 존재가 되어 버릴 때 그것은 인간을 질식시키는 독선이 되어 버릴 뿐이다. 예는 영원히 물음의 외피일 뿐이요, 물음의 결과일 뿐이다. 예는 끊임없는 우리의 물음을 통하여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다. 고정불변의 예는 없다.

八佾第三(팔일제삼) -16

子曰: "射不主皮, 爲力不同科, 古之道也."

자왈   사부주피  위력부동과  고지도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활쏘기는 과녁의 가죽을 뚫는 것을 장끼로 삼지 않고, 힘쓰는 것은 일률적으로 그 등급을 매기지 않는다.이것이 곧 옛사람의 도이다."

<해설>
'사부주피(射不主皮)'라는 것은 활을 쏘는 방식에 관한 논의다. 즉 활을 쏠 때, 과녁에 적중한다는 것은 물론 활쏘기의 최대 목적이 아닐 수는 없다. 그러나 과녁에 적중하되, 과녁을 그려놓은 가죽포대기를 뚫고 나가느냐 안 나가느냐에 더욱 활쏘기의 의미를 두는 방식으로 활쏘기의 인식이 변천되어 갔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과녁의 적중'이라고 하는 문제 보다는 '과녁가죽의 뚫음'이라고 하는 힘의 과시에 보다 중요한 의미가 부과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태라는 것이다. 사실 이 '가죽 뚫음'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당시의 병사의 갑옷이 가죽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가죽을 뚫는 힘이 있어야만 무기로서의 힘이 과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힘이 다른데 어찌 힘의 과시만으로 활쏘기의 의의를 찾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주나라가 쇠퇴하여 예가 폐지되고 열국들이 무력으로 다투어 다시 가죽을 꿰뚫는 것을 숭상하였으므로 공자가 탄식한 것으로 풀면 좋을 것이다.'위력부동과(爲力不同科)'에 '위력'은 힘쓰는 일이다. 즉 인간이 몸으로 힘을 쓰는 신체적 운동은 그 과(종류)를 달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레슬링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이기기 어렵지만, 사격이나 양궁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이기기는 어렵지 않다. 예로부터 '힘을 쓴다'(爲力)하는 것은 그 과(종류)를 달리하는 것이다. 동일한 종류의 동일한 기준량의 힘만이 힘이 아닌 것이다. 인간의 힘이란 모두 제각기 그 과(종류)를 달리하는 것이니, 그 과(科)에 따라 힘의 질과 양이 모두 동등하게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옛사람의 도란 곧 이러한 인간의 다양한 재능에 대한 존중이요, 결과보다는 인간의 노력의 과정에 대한 윤리적 가치의 존중이다.

八佾第三(팔일제삼) -17

子貢欲去告朔之희羊. 子曰: "賜也! 爾愛其 羊, 我愛其禮."
자공욕거곡삭지희양  자왈   사야  이애기 양  아애기례

자공이 초하루를 알리는 제식에 바치는 희생양 제도를 없애려 하였다.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사야! 너는 그 양을 아끼는구나, 나는 그 예를 아끼노라."

<해설>
매월의 삭일(첫날)에 종묘에 임금이 나아가 희생제물을 바치고 "오늘은 몇월의 시작이옵니다"하고 선조의 신(神)들께 알리는 제사의 풍속이 있었는데, 이것을 '곡삭'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곡삭의 의식을 결정하는 역(曆)이 중앙의 주나라의 왕실로부터 반포되었던 것이다.노 나라의 곡삭의 행사는 물론 군주가 친히 참가하는 행사였다. 그런데 공자의 시대보다 1세기를 앞선 문공의 시절부터 군주가 참여하지 않고, 단지 형식적으로 희생양을 바치는 의식만이 존속되었던 것이다. 자공이 노 나라의 고관노릇을 하고 있었을 때 자공은 이러한 희생양의 의식을 폐지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자공은 곡삭이 이미 시대적으로 의미를 잃었으며, 군주가 등한시하는 제식이 되었을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주는 효과도 옛날같은 의미가 상실되었다고 판단 했을 것이며, 형식적으로 남아있는 희생양 제도를 폐지하면 자연스럽게 곡삭의 제도도 폐지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제도개혁'과 관련하여 흔히 만나게되는 상황의 한 전형이다. 의미가 상실된 형식적 제도는 혁파해 버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하는 판단은 상식적이며 진보적이며 시대를 앞서가는 판단이다. 이에 대한 공자의 반발을 사회개혁에 대한 매우 보수적인 공자의 입장을 드러내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공자에게 있어서 곡삭의 의미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그것은 고례(古禮)의 실상을 전달해주는 것이며 그것은 단지 형식적 무의미성에 그치는 것이 아닌 현실적 예의 효용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을 했다는 것이다. 공자가 중시한 것은 역사의 연속성이며, 사회적 가치의 안정적 전이었다. 그리고 예라는 것의 가치가 결코 한 시점의 효용성에 의해서만 공리주의적으로 결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너는 그 양을 아끼는냐? 나는 그 예를 아끼노라!
공자의 말씀은, 무엇이든지 사회적 효용의 기준에 의하여 삭삭 자취도 없이 바꾸어 버리는 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생각하는 요즈음의 세태에 대한 한 경종이기도 하다. 왜 우리가 문화유산을 아껴야하는가? 단지 관광수입 때문일까? 우리는 이 장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八佾第三(팔일제삼) -18


子曰: "事君盡禮, 人以爲諂也."
자왈   사군진례  인이위첨야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임금을 섬김에 예를 다하는 것을 사람들이 아첨한다 하는구나!"

<해설>
공자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 그 신분과 상황의 차이에 따라 예를 다하는 삶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비단 나에게서 높이 있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자가 윗사람을 섬김에 있어, 특히 군주와 같은 정치적 권력자에게 예를 다하는 정중한 태도를 취했을 때, 사람들은 그러한 공자의 행위를 권력자에게 아첨하는 것으로 곡해했던 것이다. 이장은 진정한 예와 아첨을 구분치 못하는 소인배의 비아냥거림에 대한 공자의 탄식이다.윗사람에게 타당한 논리로써 간하거나 득실을 논하는 비판을 가하는 것은 매우 정당하다. 그런데 소인배들은 예를 잃는 것만이 용감한 비판의 전제 조건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윗사람을 비판할 때에도 예로써 할 줄 알아야 한다. 윗사람을 비판할 때, 우리는 냉철한 논리를 관철하면서도 모든 예의를 다 지킬 수 있어야 한다.

八佾第三(팔일제삼) -19


定公問:君使臣,臣事君,如之何孔子對曰:君使臣以禮,臣事君以忠"
정공문 군사신 신사군 여지하공자대왈 군사신이례 신사군이충

정공이 물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었다: "임금은 신하를 부리기를 예로써 하고, 신하는 임금을 섬기기를 충으로써 해야 합니다."

<해설>
정공은 노나라 군주였다. 형 소공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삼가(三家)의 대부들이 연합세력에 의하여 추방되었고, 국외에서 객사를 하고 만 후에, 권신들에 의하여 옹립되어 15년간 재위하였다. 정공의 재위기간을 공자의 나이로 말하자면 43세부터 57세 사이의 기간이다. 그러니까 공자가 노 나라에서 대사구의 자리에까지 중용된 것은 모두가 이 정공이라는 인물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정공은 매우 여린 성격의 인물이었다. 공자에 대한 애증이 항상 엇갈린 인물이었다. 누구보다도 공자를 사랑하고 존경하면서도 공자의 말을 실천하기를 두려워했다. 공자가 수상과도 같은 실권자의 지위에 오른 것도, 또한 삼환(三桓)의 무장해제시도나 개혁정치의 단행을 계기로 실각의 고배를 마시고 기약없는 유랑의 슬픈 여정을 떠나게 된 것도 모두 이 정공이라는 인물의 덕분이었던 것이다.정공은 공자가 대신(大臣)의 지위에 오르자,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을 것이다: "임금은 신하를 어떻게 부려야 하며, 신하는 임금을 어떻게 섬겨야 합니까? 군신관계의 마땅한 모습이 무엇인가?"이에 대한 공자의 대답은 매우 현명하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예의로 대해야 하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진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공자는 예의 전문가다. 예란 그에게 있어서는 사회를 지배하는 도덕적 질서였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상식의 근원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관적 질서인 동시에 상식을 통하여 객관화될 수 있는 규범이다. 군(君)은 신(臣)을 예(禮)로써 부릴줄 알아야 한다. 즉 상식적인 도덕적 규범 속에서 부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신(臣)은 군(君)을 충(忠)으로써 섬길 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충은 물론 협의의 충성심이나 복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충(忠)이란 가슴 속(中心)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심이다.

八佾第三(팔일제삼) -20

子曰: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자왈   관저  낙이불음  애이불상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관저 노래는 즐거우면서도 질탕치 아니하고, 구슬프면서도 상심케 하지 아니한다."

<해설>
'관저'는 <시경> 국풍 첫 머리에 나오는 시 이름이지만, 이 공자시대에 관현의 반추에 맞추어, 처음에 관저, 다음에 <갈담> 세 번째에 <권이>의 순서로 세 편을 으레 같이 노래하는 관례였다.공자의 '관저'에 대한 언급을 보면 '낙이불음, 애이불상'이라 했는데, '관저'의 가사내용으로 볼 때, '낙이불음'은 혹 해당될지 모르나, '애이불상'은 해당됨이 없다. 즉 전혀 슬픈 내용의 가사가 아닌 것이다.그렇다면 '낙이불음, 애이불상'은 어디까지나 '관저'의 멜로디를 두고 한 평론인 것이다. 시론(詩論)이 아니라 음악평론인 것이다. '음(淫)'이란 반드시 음탕하다는 뜻만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요, 너무 지나치어 마땅한 중용의 자리를 잃는 모든 사태에 대한 표현이다. 그 멜로디가 인간을 즐겁게 해주지만 또 그 즐거움이 지나침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또 '관저'의 어느 대목은 매우 구슬픈 애조를 띠고 있지만, 인간을 상심케 하는 비애에 젖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감성의 표현이지만 그 표현은 지극히 절제된 틀 속에서 오히려 그 섬세한 미감이 발현된다는 심오한 예술관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八佾第三(팔일제삼) -21

哀公問社於宰我. 宰我對曰: "夏后氏以松,殷人以柏, 周人以栗.

애공문사어재아  재아대왈   하후씨이송 은인이백  주인이율

曰, 使民戰栗. 子聞 之, 曰: "成事不說, 遂事不諫, 旣往不咎."

왈  사민전율  자문 지  왈   성사불설  수사불간  기왕불구

애공이 사에 관하여 재아에게 물었다. 재아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하후씨는 소나무를 썼고, 은나라 사람들은 측백나무를 썼고, 주나라 사람들은 밤나무를 썼습니다. 밤나무를 쓴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전율케 하려 함이옵니다." 공자께서 이를 들으시고 말씀하시었다: "내 이미 이루어진 일은 말하지 않으며, 끝난 일은 간하지 않으며,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은 탓하지 않겠다."


<해설>
애공은 정공의 아들로서 공자 58세의 때에 어린 나이로 즉위한 노 나라의 군주이다. 재아는 공자의 제자로 자공과 함께 언변의 천재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재아는 말을 잘했을 뿐 아니라 머리가 몹시 좋고 영악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태의 추이를 앞질러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따라서 말이 빠르고 실천력이 부족했다. 영리한 만큼 나태했다. 따라서 재아는 <논어>에서 중후한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공자에게 심하게 꾸지람을 계속 듣는 캐릭터로 유명하다.'사(社)'라는 것은 큰 나무를 신체(神體)로 삼는 토지의 신이다. 나무는 지기(地氣)의 솟음이며 그 주변은 땅의 신령스러움으로 성화되는 영역이다. 이 영역에 담을 둘러 사(社)를 만들었다.재아는 어린 군주 애공의 질문에 대해 아무 생각없이 답변해 버린다: "사(社)의 신체(神體)가 되는 나무는 왕조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하 왕조는 소나무를, 은 왕조는 측백나무를 신목으로 삼았는데, 현재의 주 왕조는 밤나무(栗율)를 신목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밤나무를 신목으로 삼는 이유는 바로 인민을 전율케 하기 위함 입니다." 물론 밤나무의 율(栗)과 전율의 율(栗,慄)의 동음(同音)이라는 점이 이 발상을 도운 것이다.재아가 주 나라가 사(社)를 밤나무로 삼은 것은 '사민전율'의 목적이 있다고 말한 것은 공자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어린 군주에게 '폭력'과 '위세'만을 가르치는 매우 사악한 발언이다. 더구나 공자가 이상으로 삼는 주(周)나라의 상징을 '전율', 공포로 해석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쏟아진 물은 이미 주어 담을 수 없다. 이루어진 일을 내 지금 말해 무엇하리오? 끝나 버린 일을 이제 와서 내가 왈가왈부 하겠는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지사를 탓해 무엇하리! 이 세마디는 제자 재아에 대한 공자의 심한 꾸지람이요, 저주와 회한이 섞여있는 독설이다!

八佾第三(팔일제삼) -22

子曰: "管仲之器小哉!" 或曰: "管仲儉乎?"曰: "管氏有三歸,

자왈   관중지기소재   혹왈    관중검호  왈   관씨유삼귀

官事不攝, 焉得儉?然 則管仲知禮乎 曰: 邦君樹塞門, 管氏亦

관사불섭  언득검  연 즉관중지례호 왈   방군수색문 관씨역
樹塞門. 邦君爲兩君之好, 有反점, 管氏亦
수색문  방군위양군지호  유반점  관씨역
反점. 管氏而知禮, 孰不知禮?"
반점  관씨이지례  숙부지례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관중의 그릇이 작구나!" 그러자 어떤 이가 말했다: "관중은 검소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관씨는 부인을 셋을 거느렸고, 관의 사무를 부하들에게 겸임시키는 일이 없었으니 어찌 검소했다 말할 수 있겠는가?""그래도 관중은 예를 아는 사람이었지 않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나라의 임금이래야 나무를 심어 문안을 가릴 수 있거늘 관씨 또한 나무를 심어 문안을 가렸고, 나라의 임금이래야 두 임금이 만나는 의식 절차를 위해 대청에 술잔받침대를 두었거늘 관씨 또한 술잔받침대를 두었으니, 관씨가 예를 안다고 한다면 누가 예를 모른다 하겠는가?"

<해설>
'관중'이라는 인물은 우리에게 관포지교의 주인공으로 친숙한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의 친구 포숙아의 헌신적인 천거로 제 나라 환공을 보좌하여, 환공을 천하의 패자(제후의 으뜸)로 만든 지략가이다. 관중은 공자보다 약 두 세기 앞선 사람으로 이미 공자의 시대에는 신화로 남아있었다. 그의 신화는 패업이었다.그런데 공자 당시 노 나라에게 있어서 제 나라는 강압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공자에게 있어서 관중은 라이벌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패자였다. 공자의 인(仁) 사상 입장에서 본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관중의 현실 정치론을 액면 그대로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다."관중의 그릇이 작구나!"라는 탄식은, 관중을 평하여 '천하의 현인으로, 큰 그릇'이라는 속설 즉 당대의 통념에 대한 공자의 반박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러한 공자의 부정적 언급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묻는다. 관중은 최소한 검약의 미덕은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겠지요? 이 질문은 관중이 대정치가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생활은 몹시 검소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소문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통념으로 깔려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통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삼귀(三歸)'라는 것의 가장 보편적 해석은 '세 부인'을 두었다는 것이다.'관사불섭'은 하나의 부하직원이 여러 일을 담당케 해야 낭비를 줄일 수 있고 또 일의 능률을 올릴 수도 있다. 그런데 관중은 한 사람에게 겸직을 시킴이 없이 꼭 한 가지 일만을 시키는 매우 사치스러운 방식으로 사람들을 부렸다는 것이다. 어찌 이러한 인물을 검소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그러나 그 어떤 사람은 또 다시 질문한다. 관중이라는 현실적 정치가는 최소한 예는 아는 사람이었겠지요? 이 사람의 질문의 배경에는 관중이 설사 그러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할지라도 그러한 사치는 예의 원칙을 정확히 지키려고 노력한데서 생겨난 실수에 불과한 것이라는 옹호의 생각이 도사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공자는 대답은 끝까지 부정적이다. 관중을 보고 예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예를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예로부터 대문을 열면 그 마당 안쪽이 훤하게 내다보이는 것은 좋질 않다. 그래서 대문을 열면 바로 나무를 심어 병풍을 만들어 내정이 곧바로 안보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이 나무가 관리하기 귀찮고 보기도 별로 좋지 않기 때문에 나즈막한 담을 대문폭 보다 약간 길게 쌓아 내정을 가리는 건축법이 중국에 있었다. 이러한 '수색문'의 건축법은 관중 당대에는 오직 임금에게만 허용된 것이었다. 그런데 관중의 자기 사저에 이러한 '수색문'을 만들었다. 이것은 완벽한 월권행위이다. 그 다음에 '반점'이라는 것은 손님을 접대할 때 수작례에서 쓰는 것이다. 대청에서 술을 주고 받을 때 서로 마주 앉은 자리에서 옆의 받침대에 술잔을 올려 놓으면 그 술잔을 시종이 씻어 다시 술을 부어 상대방의 받침대에 갖다 놓는다. 그러면 다시 그 술을 받아 마시고 다시 받침대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러한 받침대를 '반점'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반점의 설치도 물론 임금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이었다. 두 임금이 만나 우호적인 수작을 할 때만이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관중은 집에서 이러한 반점을 두고 살았다. 역시 월권행위이다. 어찌 그를 예를 아는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八佾第三(팔일제삼) -23
子語魯大師樂, 曰: "樂其可知也; 始作, 翕如也;從之, 純如也,

자어노태사악  왈   악기가지야  시작  흡여야 종지  순여야

교如也, 繹如也, 以成."

교여야  역여야  이성

공자께서 노 나라의 악관인 태사에게 음악에 관하여 말씀하시었다. 이르시기를: "음악의 전체 구성은 알 만한 것이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모든 음색이 합하여 진 듯 타악기가 주선을 이룬다. 다음에 풀어지면서 순결한 현악기들의 소리가 이어진다. 그러면서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연음형식으로 서로 꼬여 나간다. 그러면서 최종의 완성으로 치닫게 된다."

<해설>
공자는 음악의 명인이요 달인이었다. 여기 실린 이야기는 같은 음악의 대가이며, 노 나라의 최고 악관인 태사와 음악에 대한 생각을 주고 받는 대화의 한 장면인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악(樂)'이란 음이 모여 하나의 체계적 구성을 이룬 완벽한 악곡을 말하는 것이며, 음악 일반을 추상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동양의 고대 심포니는 멜로디 간의 조화가 아니다. 즉 한 시점에 있어서 다른 음들의 하모니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개 동일한 멜로디에 대한 다른 소재의 악기를 내는 음색의 조화가 그 주선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음의 공간성보다 시간성이 철저히 중시되는 음악이다.따라서 여기 공자의 음악평론은 '시'로 시작하여 '성'으로 끝나고 있는데 이것은 철저히 멜로디의 시간성에 관한 것이다.'시작흡여야'라는 뜻은 심포니가 시작될 때, 타악기가 주종을 이룬다는 것이다. '흡(翕)'이라는 글자는 최초로 음악이 '작'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타악기가 일시에 꽝 울리면서 우렁차게 시작하는 그런 모습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이때의 타악기는 편종,편경 같은 것이 주종을 이룰 것이다.다음의 '종지'는 '시작'에 대하여 연이어 끌어 나가는 모습이다. '작'에 대하여 '종(따른다)'의 모습인 것이다. '순여'는 글씨에서 볼 수 있듯이 사(絲)의 음색이 주종을 이루는 것이다. 즉 현악기의 순수한 음색이 타악기의 '흡'을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교여'는 관악기와 관련된 것으로 밝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음색이 밝아지는 것이다. 다음에 '역여'는 모든 것이 착종되어 가면서 실이 꼬여 나가듯이 지익 지익 끌리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최종 완성을 향해 치닫게 된다.

八佾第三(팔일제삼) -24


儀封人請見,曰: 君子之至於斯也,吾未嘗不得見也."從者見之.

의봉인청견 왈  군자지지어사야 오미상부 득견야 종자견지 

出曰:二三子何患於喪乎 天下之無道也久矣,天將以夫子爲木鐸. 

출왈 이삼자하환어상호 천하지무도야구의 천장이부자위목탁

의(儀) 땅의 국경수비대장이 공자를 뵙기를 청하여 말하였다: "군자께서 이 땅에 이르시면 내 일찍 아니 뵈온 적이 없었다." 공자의 시종인들이 뵙게 해 주었다. 그가 뵙고 나와서 말했다: "그대들은 어찌하여 선생께서 지위를 얻지 못하고 유랑하심을 걱정하는가? 천하에 도가 없은 지 오래되었다.하늘은 장차 선생님을 목탁으로 삼으실 것이다."


<해설>
여기 의(儀)는 지명인데 현재의 위치를 확인할 길은 없다.
'봉인'이란 관문을 지키는 자이다. 아마도 저 조령, 문경새재의 관문이 있는 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수비대의 대장격의 지방관리였을 것이다. 공자는 기나긴 여행을 했다. 마지막에 다시 위 나라로 돌아올 때쯤이었다. 의 땅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관문의 수비대장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곳을 통과한 군자치고 제가 안 뵈온 분이 없습니다. 한 번 뵙기를 청합니다. 제자들은 그의 간곡한 청을 거절치 않았다. 이 봉인은 꽤 오래 공자와 단독 면담을 했다. 그리고 면담 장소로부터 혼자 나왔다. 궁금했던 제자들이 그 봉인을 에워쌌다.'이삼자'란 문자 그대로 '두서 놈'이라는 뜻인데, '너희들'이라는 좀 낮추어 부르는 친근한 말이다. '상(喪)'이란 공자가 지위를 얻지 못하고 여기 저기 유랑하는 애처로운 모습을 형용한다. 어찌하여 제자들 그대들은 공자의 잃음을 걱정하는가? 이놈의 인간세상에 도가 없어진지 오래 되었도다! 여기 '무도야구의'라는 표현은 무도함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도를 밝힐 구세의 인물이 나타날 때가 되었다는 메시아적 선포의 의미를 반어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어 말한다. 하늘이 그대들의 선생님을 곧 인류의 목탁으로 삼으실 것이다. 그리고 목탁은 불교사찰 대웅전의 목탁이 아니다. 우리나라 고대무덤에서도 잘 출토되는 것이며 보통 동탁(銅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옛날의 제사장이 들고 있었던 지팡이 꼭대기에 씌워지는 동제나 철제의 장식인데 그 속에 방울이 들어있다. 쇠방울이 들어 있으면 금탁(金鐸)이라 하고, 나무방울이 들어 있으면 목탁(木鐸)이라 하는 것이다. 금탁은 무사(武事)에 쓰고, 목탁은 문사(文事)에 쓴다. 공자를 목탁으로 삼는다는 뜻은, 신탁의 대행자가 지팡이 방울을 울려 신의 소리를 알리듯이, 공자가 문화의 소리를 이 세상에 펴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그 예언은 적중했다.

八佾第三(팔일제삼) -25

子謂韶, "盡美矣, 又盡善也." 謂武, "盡美矣,未盡善也."
자위소   진미의  우진선야   위무    진미의미진선야

 

공자께서 소악을 평하시어, "지극히 아름답고 또한 지극히 좋다."하셨으며, 무악을 평하시어, "지극히 아름답지만 지극히 좋지는 못하다."하시었다.

<해설>
소(韶)란 순임금 자신이 지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순임금 시대에 지어진 대표적 악곡이다. 무(武)란 무력으로 은나라를 정벌하고 혁명으로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시대에 만들어진 악곡이다. 소악은 천하를 선양받은 성군 순임금의 평화로운 시대의 목가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멜로디의 음악일 것이며, 무악은 무력혁명의 열기와 새로운 시작과 건설을 의미하는 의욕을 담은 매우 진보적인 음악일 것이다.하여튼 전체적으로 소악이 무악보다 점수가 높은 것은 확실하다. 이것은 공자의 시대가 이미 무력항쟁의 시대가 되어 음악의 성향이 너무 무악 쪽으로 치우치고 있는 당대의 분위기에 대한 공자의 비판일 수도 있다. 공자는 무인(武人)의 후손이며 자신이 사(射),어(御)의 달인이지만, 역시 문(文)의 세계를 통하여 새로운 사문(斯文)의 문화를 개칭한 인물이었으므로 그의 음악평론이 소악 쪽으로 기울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八佾第三(팔일제삼) -26


子曰: "居上不寬, 爲禮不敬, 臨喪不哀, 吾何以 觀之哉?"
자왈   거상불관  위례불경  임상불애  오하이 관지재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아니하며, 예를 행함에 공경스럽지 아니하며, 상에 임함에 슬퍼하지 않는다면, 내 그를 무엇으로 평가하겠는가?"

<해설>
윗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관용이다. 그리고 의식을 행할 때 요구되는 것은 허식이 아닌 인간에 대한 깊은 경의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의 예식에 임할 때 요구되는 것은 슬픔과 공감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인간의 세 측면을 실천하지 못하는 인간이라면, 내 그를 무엇으로 평가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