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한국교회사 (16)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好學 2009. 9. 6. 22:42

한국교회사 (16)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④ 이수정의 한국 선교 요청

이수정은 민족을 살릴 수 있는 길이 농업 기술이나 서양 기술문명의 전수가 아니라 동족을 복음화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자신이 만나는 일본 주재 미국 선교사들에게 한국선교를 호소했다. 세례를 받은 후 이수정은 곧바로 루미스와 다른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미국 선교단체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서 선교사역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나라에서 먼저 선교사를 파송해 선교사역을 시작할 것에 대해 매우 우려했다. 당시 일본 교회에서는 한국 선교에 대한 주장이 나오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한국 선교사를 지원하는 분위기였다. 이수정은 일본 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견한다는 데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한일 간의 오랜 역사적 감정 문제와 정치적 문제도 있었지만, 서구 문명을 직접 미국으로부터 수용하고자 하는 문화적 욕구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이수정은 통역과 지원만 이루어진다면 성공은 매우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수정의 노력에 힘입어 이미 1883년 5월에 조지 낙스 선교사와 헨리 루미스는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한국을 여행할 계획까지 세우고, 이를 본부에 타진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미국 선교부에 한국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는 1883년 12월 13일자 이수정의 편지가 선교잡지인 미셔너리리뷰(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1884년 3월호에 실렸다.

그의 편지는‘1883년 12월 13일 요코하마에서’로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이수정은 미국의 형제, 자매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믿음과 진리의 능력으로 나는 주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으며, 나의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간구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확고히 지킬 수 있으며, 결코 사단에 의해서도 제거될 수없기 때문에 주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의 조국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아직 참 하나님의 길을 모르고 있으며, 이방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복음전래의 시대에 우리나라는 불행히도 눈에 띄지 않는 지구촌의 한 구석에 위치하고 있어 그 곳에서는 기독교의 축복을 누리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성공할 수 있도록 나는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다섯명의 나의 동포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자
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장차 기독교인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숫자가 매일 증가하고 있습니다.

과거 칠, 팔십 년 동안 불란서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비밀리에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엄격히 그 종교를 금했고, 회심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승리의 죽음을 맞았던 것입니다. 사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숫자가
십만 명이 넘습니다. 비록 이 사람들은 주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했지만, 그들의 신앙은 예찬할 만하며,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부들 역시 종종 박해를 받았으나 그들은 결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정부는 나라를 개방해 다른 나라와 교류를 하고 있으며 국민의 여건을 증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과거보다는) 기독교에 대해 좀 더 완만한 정책을 쓰고 있으며, 그러므로 비록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허용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최근에 완선작이라는 한 중국 기독교인이 우리 왕에게 신약성경 한 권을 헌정했으나, 정부가 이를 방해해 왕이 그것을 하사받지 못했습니다. 왕은 매우 불쾌해 했고, 그 일이 현재 중요한 논제가 되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어려움들이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만 그것들은 곧 해결될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한국에 복음을 전하는 황금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귀국은 기독교 국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민족들이 교사들을 보낼 것이라고 우려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렇게 되면) 그러한 가르침들이 주의 뜻과는 일치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이 나의 말에 주의를 기울여 주기를 간구합니다. 만일 나의 요구가 허락된다면 나의 기쁨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그리스도의 종 이수정’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다.

이수정의 편지는 그가 일본에 건너간 이유와 그 곳에서의 활동과 사역을 비교적 소상하게 밝혀 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그가 일본에서 한국 선교를 준비하는 데 기여한 사실은 단순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은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여러 명의 한국인들이 복음을 접함으로 말미암아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복음 전도자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고, 후에 성경과 많은 기독교 전도문서를 번역하여 한국복음화를 위한 중요한 토대를 구축해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보다도 한국 복음화를 위해 그가 이룩한 더 큰 공헌은 미국에 한국 선교를 촉구하여 한국 선
교의 장을 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

세례받은 지 만 1년도 채 안 된 사람의 편지치고는 복음의 열정이 짙게 배어 있고, 전체 구성은 물론 내용과 논제가 너무도 분명하다. 이수정에게 세례를 베푼 일본주재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가 지적한 것처럼 이수정의 편지는 자기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달라고 바울의 꿈 속에 찾아와서 간곡하게
부탁했던 그야말로‘한국의 마게도니아인의 부름’이었다. 이것은 한국 선교열을 고취시키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미북장로회 선교부가 이 편지에 고무되어 선교사를 파송케 되었음이 다음 글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주목할 만한 일련의 사건에 자극된 우리(미북장로회) 선교사 몇 명은 여러 달 동안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사를 임명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하였는데, 이는 개종한 한국인 자신들의 청원과 일치한다. 다음 사실이 선교 본부가 취한 행동이다. 최근 모임에서 선교 본부는 목회 선교사로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를 임명했다. 그는 뉴욕 대학과 뉴저지 뉴브른스윅의 개혁교회신학교를 졸업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12월 1일까지 미국에 머물다가 일본으로 떠날 것이다. 최초의 선교사들이 현재 동경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 신자들로부터 일본에서 잠시 한국어 공부를 할 것이 확실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오윤태는‘이 편지를 읽고 한국 선교에 뜻을 정하고 자기 나라를 떠나서 멀리 태평양을 건너 한국까지 온 사람은 한국장로교회의 창시자 언더우드 목사(Rev. Horace Underwood)와 메쏘디스트(감리교)의 창시자 아펜젤러 목사(Rev. Gerhart Appenzeller)이다. 당시 신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두 청년이 뜻을 정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이수정 씨의 편지를 잡지에서 읽은 후에“조선에는 누가 가는가?”하는 신령한 음성을 듣고, 전자는 북장로회의 선교사로서, 후자는 메쏘디스트교회(감리교회)의 선교사로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수정의 한국 선교의 공헌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의 요청을 받고 감리교 요리문답도 번역하여 1천부가 출판돼 국내에 널리 유포되었다. 요코하마에서 그의 마가복음 성경 1천 권이 출판되던 바로 그 해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한국을 향해 오던 중 요코하마에 들려 이수정에게 2개월간 한국어를 배우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을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오는 데 일조를 하기도 했다. 그 당시 세계 어느 나라도 선교사가 입국할 때 그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입국해 선교를 시작한 경우는 없었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가 인도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해 인도 선교의 토대를 마련한 것처럼, 이수정의 성경 번역은 언더우드를
비롯해 이후에 오는 선교사들이 한국 선교를 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 준 셈이다. 언더우드가 선교지에 실린 이수정의 선교 호소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았고, 입국 전 그로부터 한국어를 배웠고, 그리고 그가 번역한 성경을 가슴에 지니고 입국해 선교를 시작했다면, 한국 선교에 끼친 이수정의 공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수정은“비록 나는 별로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이라고 겸손하게 편지에서 밝혔지만, 확실히 그는 한국 선교를 가시화시킨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