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한국교회사(17)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好學 2009. 9. 6. 22:43

한국교회사(17)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⑤ 이수정의 귀국

이수정이 이같이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당시 조선 정부로서는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갑신정변 이후에 한국에서는 외국 유학생을 소환하기 위해 소환령을 내렸다. 이수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두 명의 고위 관리가 일본에 와 이수정을 설득했으나 이수정이 귀환을 거절했다. 1886년 1월경에는 이수정의 동생이 형이 일본에서 진 부채를 갚기 전에는 한국으로 귀국할 수 없다는 소문을 듣고, 7,8백 달러에 해당하는 1천 원을 건네주러 왔다. 일본에서 농업 기술을 배워 한국의 농업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형의 말을 그대로 믿고 일본에 건너온 동생은 형이 더 이상 상업과 농업을 연구하지 않고 기독교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대단히 실망했다.

당시의 상황을 오윤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여기에 도착하자 그는 이수정이 농업, 상업의 연구에 종사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고, 혹은 수많은 이상한 발명품에 접하여 보고 놀랐다. 그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바쳐졌으며, 그의 마음은 완전히 변화한 것 같았다. 동생은 이것을 보고 당황하여 그 형 이수정에게 말하기를“당신은 더
이상 나의 형님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떠한 이상한 감응이 형님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기독교 신앙에 빠져 성경 번역에 자신의 전 시간을 몰두하며 신앙생활에만 매진해 있는 형의 모습을 불신자인 동생이 이해할 리 없었다. 그가 볼 때 그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었을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리고 일본에 도착해 한동안은 농업기술을 전수해 한국의 농업발전에
기여하겠다던 형이 이처럼 기독교에 빠져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보고는 형에 대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형을 돕기 위해 1천 원의 돈을 가지고 일본까지 찾아왔던 동생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분노하는 동생에게 이수정은“나는 돈이 필요 없다. 너는 그 돈을 도로 가지고
가라. 나는 내가 여기서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 있으니 네가 바라는 대로 돌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나와 우리 동포를 위하여 철도나 전신기나 증기선보다도 더 좋은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라고 하며 동생을 돌려보냈다. 이수정은 자신이 하고 있는 성경 번역 사업이 얼마나 중요한 사역인지를 깨닫고 있었고, 또 그 일을 속히 마쳐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동생의 귀국 권유를 거부한 것은 동생을 무시하거나 고국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민족을 향한 더 큰일, 더 시급한 일을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국 정부가 또다시 고위관리 박준우를 일본으로 파송해 설득하는 바람에 이수정은 고국의 부름을 거부하는 것도 신앙인으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귀국을 결심했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평소 이수정은 조선의 왕실은 물론 기왕의 민영익과의 친분과 우호를 소중히 여겼다. 정치적인 역학관
계도 그의 귀국을 부채질했다. 갑신정변 후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주모자들을 색출하려는 움직임은 물론 자객을 보내 주모자들을 암살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옥균이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선교를 호소하자 자신도 그들과 한 배를 탄 매국자라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일본에 올 수 있도록 자신을 지원해준 민영익과의 개인적 친분을 고려할 때 더욱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주재 선교사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성경을 번역하고 그들에게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행위 자체가 순수한 신앙에서 발로된 것이지만 본의 아니게 개화파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격이 될 수도있다고 그는 판단한 것이다.

본래부터 이수정이 김옥균과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이수정은 김옥균과 마찬가지로 개화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에 문호를 열어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을 꾀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다. 1880년 친구 김굉집이 일본에 건너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왔을때 그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일본에 갔을 때도 이수정은 김옥균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만큼 둘의 사이는 좋았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기 1개월 전인 1883년 3월에 김옥균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 이수정은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정책적으로 조선과의 관계 증진을 위해 조선 학생들을 받아 1884년 3월 7일 당시 30여 명의 학생들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가 1883년 8월에 저술한 조선일본선린호화(朝鮮日本善隣互話) 1권에 김옥균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묘사한 것을 볼 때도 김옥균에 대한 이수정의 인상이 상당히 우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그들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된 것은 갑신정변 이후였다. 이수정은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주도하고 자신과 절친한 사이였던 민영익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것으로 인해 적지 않은 상처를 받았다. 그때부터 이수정이 1886년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이때문에 김옥균은 기회가 있는 대로 이수정을 제거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1886년 1월에 방문한 동생이 고국으로 돌아간 후 불과 얼마 되지 않은 3월 21일, 이수정은 김옥균이 보낸 자객에 의해 습격을 받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당시 일본에서 간행되고 있던 1886년 5월 10일자 시사신
보는‘김정식이라는 사람이 이수정을 암살하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동경경죄재판소에 구속되어있다.’고 보도했으며, 그 해 8월 24일자 시사신보에 의하면 ‘조선국 양산부 원동에서 온 김의순은 지난 3월 21일 밤에 신전구 담로정 2목 4번지 도변유길(渡邊留吉) 댁에서 친하게
교제하던 이수정 씨와 말다툼 끝에 복부를 차고 준비해 가지고 있던 비단 손수건에 싼 탄환의 파편으로 머리와 얼굴을 때려 전치 20일 이상의 상처를 입혀 동경경죄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은 결과, 지난 21일 형법 제 삼백일 조에 의거 중금고 일년의 형을 받았다.’고 하였다.

1886년 들어 이수정은 두 번에 걸쳐 자객에 의해 습격을 당한 것이다. 이것은 이수정에게 적지 않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미 이 일이 있기 전 고국을 다녀올 계획을 세웠던 이수정으로서는 이와 같은 자객의 습격을 받자 아예 일시 귀국이 아닌 영구 귀국 쪽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위험한 상황에서 이수정이 일본에 계속 체류한다는 것은 신앙을 떠나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또한 조국의 부름을 계속하여 거부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클라라 루미스(Clara Denison Loomis)에 의하면 그는 한국으로 떠나기 전, 헨리 루미스를 찾아와 한국에 오면 자신을 방문해 달라고 헨리 루미스를 초청했다. 루미스에게 방문 요청을 한 것을 보면 이수정은 귀국해
도 특별한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것 같다. 이렇게 해서 그는 1886년 6월 2일, 4년 동안의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정부가 보낸 박준우와 함께 귀국했다. 그가 탄 배에는 이수정 외에도 박준우, 본국으로 소환되는 유형준, 유송진, 박영우, 서광철, 김학기 등 다섯 명의 유학생 그리고 김옥균을 암살하겠다며 한국 정부로부터 2만 원을 가지고 와서 호화로운 생활만 하던 조복도 있었다.

조선으로 귀국할 당시 이수정과 선교사들과의 관계는 상당히 소원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유는 이수정이 정치 외교 문제에 깊이 관계하면서 친선교사적인 망명 개화파들(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의 정적으로 등장하는 한편, 반선교사적인 인물로 인식되어 오던 묄렌도르프와 가까워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1885년 3월 5일 매클레이의 집에서 제1회 한국 선교사회가 모였는데, 매클레이 부처 외에 한국 선교사로 임명받은 스크랜튼 여사, 아펜젤러 부부, 언더우드 그리고 한국인으로 이수정과 박영효 등이 참석해서, 한국에 대한“상황 분석과 여행 문제, 사업 방법, 선교회 개설 계획 등을 토론하고 무엇보다 앞에 놓여 있는 중요한 사업을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것을 감사와 함께 간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수정과 선교사들과의 사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민영익과의 관계로 김옥균과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망명 개화파들의 정적이 되어 김옥균 일파가 보낸 자객에 의해 두 차례의 암살 미수를 당하면서 이수정은 정치적인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신앙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루미스는 1886년 5월 14일자의 편지에서“이수정은 5월 12일 한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는 줄곧 기독교인으로만 산 것은 아니었으며, 우리는 대단히 실망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매우 아팠으며, 최근에는 한 못된 동료에 의해 살해될 뻔 하였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우리는 위 편지에서 루미스가 이수정에 대해 실망한 것이 그의 비기독교적인(정치적인) 행동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귀국하기 전 이수정은 루미스를 찾아가 “그의 죄에 대해 깊이 뉘우친다고 고백”하였으며, 한국에 오면 자신을 찾아달라고 루미스를 초청하였다. 이러한 이수정의 행동은, 지난 1년여 동안 그가 행한 분주한 정치적 활동이 그에게 남겨준 것은 상처와 오해뿐이었음을 깨닫고, 루미스를 만나 우정을 회복하고, 한국선교 사업에 동참할 것을 약속한 것이라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