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한국교회사(14)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好學 2009. 9. 6. 22:39

한국교회사(14)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① 이수정의 일본 방문

만주 우장에 거점을 마련한 존 로스 선교사와 의주 출신 젊은이들에 의해 중국에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바다건너 일본에서는 이수정(李樹廷)에 의해서 복음이 준비되고 있었다. 대학자 이병규의 아들 이수정은 민영익과 교분이 두터운 친우 사이였고, 일찍부터 개화설을 주장하였으며, 여러
차례 국가에 공로가 많았던 인물로 1882년 9월 19일 임오군란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본래 개화사상을 가지고 있는 데다 오래 전부터 일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수정은 일본에 건너가기 전부터 민영익과 가까운 친분을 가지고 있었고, 1881년 초 이전에 이미 부산주재 일본영사 콘도우(近藤)와 접촉하고 동경에 가기 위하여 일본 주우은행에 적금도 들어 놓고 있었다. 그만
큼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가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면서 밝혀진 일이지만 그는 상당한 예술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는 한때 민영익과 함께 무역과 상업을 통한 부국의 길을 찾는 데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81년 농학부문 담당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지우(知友) 안종수(安宗洙)를 통해 일본에 대해 어느 정도 식견을 갖고 있던 이수정은 일본의 선진 농업정책을 전수받고 한국에 그것을 계승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일어났다. 안종수는 일본에 있는 동안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걸출한 농
학자 쯔다센(律田仙)을 만나 기독교에 대해 전해들은 후,“ 내가 배운 바를 왕과 나의 친구들에게 말할 것이고, 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버리도록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쯔다센의 탁월한 선진 농법에 감명을 받은 안종수는 돌아와 농정신편(農政新編)을 저술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농업기술 서적으로 국민들에게 농업 선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수정이 관심을 갖고 있던 분야는 일본의 문화, 특히 농업과 법률, 우편 및 조운(遭運) 시설 사찰(査察)이었으나 제일 큰 관심은 일본의 농업 정책이었다.

② 이수정의 회심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은 쯔다센과 개신교 지도자들, 그리고 주일 미국 선교사들과도 교분을 갖기 시작했다. 쯔다센은 자신을 찾아온 이수정을 친절히 맞아 주었고, 교리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한문 성경 한 권을 건네주었다. 쯔다센은 당시 일본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이수정에게 한문 성경을 건네주고, 한문을 인용해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 이수정은 숙소로 돌아와 한문 성경을 읽는 가운데 감동을 받고 쯔다센이 믿고있던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수정은 김옥균과 민영익이 귀국하고, 다시 얼마 후 박영효가 본국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쯔다센 박사 밑에서 농업 기술을 전수받겠다는 이유로 계속 일본에 남았다. 그러나 그가 남은 진짜 이유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이수정은 쯔다센 박사로부터 농업기술을 전수받는 중에 훌
륭한 그의 인격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그의 인격의 기원이 종교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쯔다센 박사가 다니는 감리교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즈음 쯔다센 박사가 야스카와 토오루(安川亭) 목사를 이수정에게 소개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 처음으로 츠키지교회(築地敎會)에 나가 신앙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수정은 쯔다센에게 체계적으로 성경교육을 받으며 신앙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수정은 1883년 4월 29일 일본에 건너간 지 9개월 만에 로개쥬쵸교회(露月町敎會)에서 야스카와 토오루 목사로부터 세례문답을 받은 후 미국 선교사 조지 낙스(George W. Knox)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문답에 대한 그의 답변은 너무도 명확하고 또렷했다. 시취한 일본인 목사나 낙스 목사는 물론 방청했던 사람들 모두가 이수정의 분명한 신앙고백과 유창한 일본어 답변 실력에 놀랐다.

이때 그의 나이는 약 40세였다. 비록 일본에 9개월밖에 체류하지 않았지만 그는 유창하게 일본어를 구사했고, 심지어 두 번에 걸쳐 설교해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정확한 언어로 모인 청중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그가 쓴 한문 시는 일본의 주요 신문에서 대단한 호평
을 받을 정도였고, 또한 그림도 상당한 수준으로 알려졌다. 루미스는 1883년 5월 30일 본부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그는 대단히 열렬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이미 여기에 있는 그의 모든 한국인 동포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는 그들이 이미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자질과 능력과 더불어 그의 탁월성은 그의 한국인 동료들에게 대단한 영향을 주고 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도쿄국립대학의 한국어 선생은‘만약 이수정이 기독교 때문에 죽는다면 나 역시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불과 18년 전 이수정의 친척가운데 한 사람과 그의 가까운 친구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기때문에 순교 당했다. 그의 팔과 다리가 먼저 절단되었고, 그
후 그의 머리가 절단되었다. 이수정은 몇 차례 밤에 나의 집에서‘만약 내가 나의 조국에 있었더라면 나는 어느 때든지 살해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인들은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미국 성서공회 일본주재 총무 헨리 루미스 선교사는 1883년 5월 11일 이수정의 세례 소식을 본부에 알리면서 이수정이 그의 조국 은둔의 나라에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푼 기대감을 나타냈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던 1883년 당시 일본 사람들과 일본에 있던 외국 선교사들은 한국선교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국인 이수정이 복음을 접했다는 소식은 곧 일본에 널리 알려졌고 여러 선교단체나 교회가 그를 연사로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수정이 세례를 받던 해인 1883년 1월에 일본에서는 선교사, 목사, 교역자, 교회 성도들 모두가 일본교회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대 부흥
이 일어났고, 그와 같은 부흥의 열기는 가장 가까운 나라 조선에 대한 선교열을 한층 더해 주었다.

그런 때에 이수정이 로개쥬쵸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1883년 5월 8일부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우에무라(植村), 니이지마 죠(新島)를 비롯한 전 일본의 기독교인들과 각 교파 목사, 교사, 교회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3회 전국기독교도 대 친목회가 동경에서 열렸다. 이것은 일종의 대 부흥집회였다. 집회 4일째인 5월 11일 오전 8시에 신에이교회당(新榮敎會堂)에서 특별기도회가 열렸을 때, 그곳에 참석한 일본인 목사 오쿠노 마사즈나(奧野正綱)의 제청에 의하여 이수정이 등단하여 한국어로 공중기도를 드렸다. 비록 그곳에 모인 이들 중 이수정의 한국어 기도를 알아들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오순절의 영감을 더해 주었다고 우찌무라 간조는 술회했다.

“그는 자기 나라 말로 기도했는데 우리들은 그 마지막에 아멘 하는 소리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무한한 힘을 가진 기도였다. 그가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과 또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 장소와 광경을 더 한층 오순절과 같이 만들어 주었다.”고 하였다.

1883년 5월 12일, 도쿄쿠단자카(東京九段坂) 스즈끼(鈴木)씨의 사진관에서 찍은 전국기독교 신도 대 친목회 간부 사진에는 이수정이 정가운데에 쯔다센과 마주앉아 있어 그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얼마나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그의 신앙고백문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요한복음에 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감응의 일치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으로서, 이것은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증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며, 만약 세례를 받고도 그 사람 마음속에 참된 신앙이 없다고 한다면 성도라고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수정은 인간의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자신의 분명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었고, 만약 그것이 포기된다면 곧 기독교가 포기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이수정의 성품과 관심은 바뀌어 갔다. 무엇보다도 진리를 사모함과 동포를 향한 구령의 열정이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 일본에 유학하고있던 유학생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해 주었고, 그들 중에 세례를 받은 이들이 늘어나면서 성경공부반도 생겼다. 1883
년 말 요한복음 15장에 기초한 그의 신앙고백과 교리에 대한 이해는 그가 이미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수정의 활달한 성격, 분명한 신앙고백과 민족에 대한 구령의 열정 그리고 그의 뛰어난 리더십은 일본인들은 물론 일본주재 미국 선교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
기에 충분했다.

이수정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중생의 깊은 체험을 통해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어느 것도 제공해 줄 수 없는 내면의 평안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가“나는 자네가 지금 그렇게 행복하게 보이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네. 자네는 최근 매우 크게 변화하였으며 어떤 새
롭고 특별한 기쁨을 찾은 것 같네.”라고 말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이수정은 그 친구에게“나는 내가 이전에는 결코 생각해보지 못했던 마음의 큰 평안과 행복이 있다.”고 답했다. 그에게는 내면에서 우러나는 깊은 영혼의 평안이 그의 마음과 전 인격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구원의 확신과 민족을 향한 구령의 열정이 없이는 소유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신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