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한국교회사(18)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好學 2009. 9. 6. 22:44

한국교회사(18)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3) 일본에서 복음을 받은 이수정

⑥ 이수정의 죽음

귀국 후 이수정의 신상에 대해서는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한국에 도착한 후 보수파에 붙잡혀 처참히 살해당했다는 설인데, 이것은 일본교회문서 기록에도 나타나 있다. 루미스 역시 이수정이 한국으로 돌아간 후 권력을 잡고 있는 보수파들에 의해 체포되어, 장차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반대할지도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사지
를 토막내 처형당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소문은 이수정과 함께 귀국한 유학생들이 처형된데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수정과 함께 귀국한 유학생 6명 중 유형준, 김한기, 박영우, 유송목 등과 뒤따라 귀국한 장은규, 박영빈 등 6명은 귀국 후 김옥균 잔당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이때 이수정은 처형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때 귀국한 8명이 모두 처형된 것으로 보도되었고, 박영빈과 함께 귀국한 이은종도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동경에서는 이수정의 추모회까지 열렸던 것이다. 이은종의 처형 소식을 접한 일치영화학교(명치학원의 전신) 학생이었던 미야치 겐기치(宮地謙吉)의 추도문은 다음과 같다.

“나도 이모라는 최연소의 조선 사람과 친하게 지냈는데 6월 말일 경에 그는 선배 이주필 군의 권계를 물리치고 당시 조선 정부에서 지금 돌아온다면 어떤 국사범의 큰 죄라도 용서한다는 통지를 굳게 믿고 근일 중으로 귀국한다 하면서 학교에서 퇴학하였다. 나는 그가 근일 중으로 자기 부모들과 만나게 된다고 하면서 매우 기뻐하던 모습이 환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 수십 명을 싣고 가는 배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붙잡아 다 죽여 버렸다. 이 슬픈 소식이 그해 가을에 축지 일치 영화학교에 들려왔을 때 다 비분을 금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또 하나는 이수정이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처형은 사실이 아닌 풍설이라는 주장이다. 이수정과 같은 배를 타고 조선에왔던 정상각오랑(井上角五郞)은 1886년 7월 14일자 조선에서 동경으로 보낸 통신에“오랫동안 일본에 체재하고 있던 이수정 씨는 귀국 후 일본에 있을 때 얻었던 지병도 근일에는 점점 쾌차가 있어 건강이 회복되어 가며 국왕은 특별히 그를 사랑하고 우대하며 소중하게 여겨 근일에는 특별히 쌀과 돈을 하사하였다고 한다.”는 보고를 보냈다. 오윤태는 고종의 총애를 받았던 그가 갑자기 기록에서 사라진 것은 처형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서 받은 상처로 인한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이수정의 배교설이다. 이것은 백낙준에 의하여 제기되었는데, 그는“이씨는 귀국을 앞두고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하였다.”라고 하면서 파슨(Ellen C. Parson)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 이수정이 있다. 그는 일본에서 문필로 널리 공적을 세웠고 미국에서는 그의 사진이 지상에 실렸다. 그는 마게도니아인처럼 나타났으나, 가련한 이수정은 좋지 못한 영향에 빠져 한국에 대한 관심을 적잖게 불러일으켰지만 그 문을 박차버렸다. 자기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한국에 보내어질 첫번째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기회까지 던져버렸다.”

위의 견해에 대해 이만열은“과연 이수정은 배교함으로써 ‘잃어버린 지도자’가 되었으며, ‘일반 사회의 시각에서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의 시각에서도 사라졌고’그에게서는‘순교자적인 기독교 영웅의 삶’을 찾아볼 수 없으며, ‘초기 빛나는 선교 활동에 비해 그의 종말은 대조적으로 침울’했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우리는 일단 앞에서 이수정이 귀국하기 전에 루미스를 만나 자신의 과오를 회개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귀국하기 전에 기독교 신앙을 이탈하였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된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박용규 역시도“만일 이수정이 기독교 신앙을 정말 버렸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겠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단지 귀국전 그 주변에 벌어진 정치적인 정황 때문에 잠시 그런 모습으로 비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루미스에 따르면 동생이 다녀가고 오래지 않아 이수정은 일본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에 개화파 정부를 세우려는 책략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면서 그의 주의력이 자연히 성경연구나 번역에서 점점 더 벗어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루미스는 이것이 곧 배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또한 박용규는“그가 수구파에 의해 처형을 당했든 아니면 일본에서 받은 상처로 세상을 떠났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한국개신교 선교에 바쳐진 그의 길지않은 생애 자체가 일종의 순교적 희생,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라고 그의 업적을 평가하고 있다.

이만열도“우리는 그를 불타지 않은 등잔 심지 혹은 잃어버린 지도자로 보기 전에 인간의 연약한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를 불러 사용하였는가를 살필 줄 아는 신앙적 역사 인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땅 한반도가 암흑에 잠겨있던 한 시대에 복음의 빛을 주시기 위해 택함을 받은 도구였던 이수정은, 한국 선교와 한글 성경 번역의 개척자 역할을 감당하고 조용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가 소원했던‘성경을 조선에게’는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점차 구현되어 갔다.”고 하였다.

(4)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의 활동에 대한 평가

① 한국 선교는 성경 번역에서부터 출발했다는 점이다.

로스와 맥킨타이어가 의주 젊은이들과 더불어 성경 번역을 하고 있던 동안 일본에서는 이수정에 의해 성경 번역이 진행되고 있었다. 해서 정식으로 한국에 선교사가 입국하기 이전에 이미 국외에서 번역된 성경이 존재했으며, 선교사 입국 시 그 성경이 사용되었다는 점은 다른 나라의 선교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드문 현상이다.

② 한국 선교는 한국인에 의해서 스스로 복음이 전파됨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의주 젊은이들이 중심이 되어 신앙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후에 자신의 고향에 복음이 전해졌고, 선교사가 입국하기전에 소래교회가 먼저 세워졌다. 또한 일본에서는 이수정이 예수를 믿은 후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신앙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한국선교를 준비했다는 점 역시 다른 나라의 선교 역사에서 찾아보기 드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③ 이러한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한국의 선교의 장을 여시기 위해 깊이 개입하시고 섭리하셨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불교신자인 김옥균이 한국을 살릴 수 있는 길이 기독교라고 외칠 수
있었으며, 지극히 세속적인 임오군란의 사건으로 그것도 농업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건너간 이수정이 세례를 받고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겠는가? 만주에서 만주인들을 위해 활동하겠다고 입국한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가 한국선교를 위해 성경을 번역하며 한국선교를 위해 일생을 헌신할 수 있었겠는가?

이 모든 사건은 그 사건의 배후에서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 역사를 하나님의 구속사로 운행해 나가신다. 그리고 그 역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운동을 전개하는 기관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자신에게 맡겨진 구속 운동을 전도(선교)를 통해 현실화시킨다. 그 전도 곧선교의 현장에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그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곳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임하여 그 말씀을 받은 자들을 변화시키시고, 변화를 받은 사람들을 통해 또 다시 교회 운동을 전개해 나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위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 섭리의 결과 한국교회는 성경 위에 든든히 서 있는 교회가 되었으며, 120여 년 전 복음의 불모지요 세계에 그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던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21세기 세계 선교의 대명을 받고 움직이는 선교 대국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