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한국교회사(13)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好學 2009. 9. 6. 22:38

한국교회사(13)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1) 권서인들의 활동

④ 백홍준, 이성하의 의주 전도

백홍준은 1879년 수세 후 의주에 거주하면서 최초의 전도인으로서 복음을 은밀히 전파하였으며, 이듬해의 투옥사건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켰다. 그는 자신과 친구들이 우장과 봉천에서 가져온 한문 및 한글 복음서, 소책자들을 의주는 물론 구성, 삭주, 강계 등지에 반포함으로써 예수 믿는 사람들이 곳곳에 생기게 하였다.

한편 이성하 역시 의주 전도인으로 활동하였다. 서상륜, 서경조의 글에 의하면 이성하는 초기 번역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그는 번역보다는 전도인으로 활약했다. 그는 다량의 한글 복음서를 책문을 거쳐 압록강 연안의 구련성까지는 가져왔으나 삼엄한 국경 경비 때문에 그곳 중국인 여관에 쌓아두었다. 그가 외출을 한 후에 의심을 품은 여관집 주인이 그의 짐을 풀어보고는 금서인 것을 알고 이를 압록강에 던져 떠내려 보냈고, 일부는 소각해 버리고 만 사건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로스는“성경이 던져진 물은 한국인들에게 생명의 물이 될 것이고, (성경이 탄)재는 한국교회가 크게 성장할 밑거름이 될 것이다.”라고 술회한 바 있는데, 뒷날 그의 예언이 이루어져 압록강 일대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이성하는 성경 유입에 실패한 후 병을 얻어 전도인 직을 사임한 듯하다.

이성하가 성경반입에 실패한 후에 백홍준이 재차 시도하였다. 그는 변경에 도착하여 정세를 살펴보니, 성경을 반입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내었다. 그는 곧 시장에 나가 별 것 아닌 책들을 여러 권 샀다. 그리고 성경을 한 장씩 뜯어내어 돌돌 말아 긴 끝을 만들어 시장에서 사온 책을 묶었다. 그리고는 이 책을 짊어지고 강을 건넜다. 관리는 책만 조사하고 별 것 아니므로 통과시켜 주었다. 집에 돌아온 백홍준은 책은 버리고, 책을 묶었던 끈을 풀어 다시 성경을 만들어 전도를 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의주 청년들이 이곳에서 열심히 전도하여 신자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백홍준이 요리문답반을 운영하면서 더욱 신자들이 증가하여, 1885년에는 약 18명의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예배처가 생겨났다.

백홍준은 맥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로스 목사의 권서인으로 본국에 들어와 전도하다가 언더우드 목사에게 전도사로 임명을 받아 사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역을 하던 중 백홍준은 2년간 봉천 감옥에 수감되었는데, 그 이유는 만주에 있는 선교사와 내통한다는 죄명이었다. 백홍준이 내통했다는 선교사는 로스 목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는 1894년 봉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백홍준의 옥사를 두고 차재명은 그가 편찬한「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에서 자연사한 것이라 기술하고 있으며, 김해연은「한국기독교회사」에서 백홍준의 죽음을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가 된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⑤ 서상륜의 서울 권서 활동

서상륜은 1882년 4월에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고 6개월간 봉천에서 성경 사업을 돕다가 10월 6일 권서인으로 의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서상륜의 성경 밀반입 행로에 대해 여러 책은 그가 국경에서 검거 투옥되었다가 친척 관리의 도움으로 밤에 탈출하여 의주에 도착, 전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과 다른 듯하다. 서상륜은 국경 검문소에서 성경을 압수당했지만, 첫 밀반입이라 아무 일 없이 의주로 돌아왔는데, 며칠 후 검사관이 서상륜을 찾아와서 그 책들을 읽어본 결과 좋은 것들이므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면서 여러 권의 책을 옷속에서 꺼내놓았던 것이다. 서상륜은 이 우호적인 검사관으로부터 전해받은 성경과 소책자로 의주에서 전도하다가 경성(京城)에 잠도(潛到)하여 복음전포(福音傳布)를 경영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이 없어 곤란을 겪게 되었고, 이에 로스는 1883년 봄에 김청송을 통하여 수백 권의 성경을 전달했다.

서상륜은 김청송으로부터 전해받은 복음서를 서울에서 장사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나눠주면서 은밀히 전도하였다. 그리고 김청송도 평양 권서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봉천으로 돌아갔는데, 이는 뒷날 평양교회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로스는 이보다 앞선 1883년 봄에 봉천을 지나가는 조선 북경 사절단에게 성경을 전달하려고 복음서 200권을 따로 준비해 두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883년 8월에는 6천 권의 복음서가 거의 배포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에 고무된 로스는 이듬해 1884년 봄 묄렌도르프 부인의 주선으로 인천 해관(海關)을 통해 6천여 권의 성경을 서상륜에게 전달한 듯하다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2) 국외에서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한 활동

(2) 서상륜에 의해 세워진 소래교회

한국 땅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는 서상륜에 의해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세워진 소래교회이다. 소래교회가 세워진 송천리는 순 토박이말로‘솔샘’이었다. 솔샘은 솔내로 변했고, 그것이‘소래’가 되었는데, 이 마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은 황해로 흘러들어가는 곳이다.

소래교회의 설립은, 선교사들이 우리 땅에 들어오기 전에 성경이 먼저 우리말로 번역되었다는 것 못지않게, 1884년 4월 5일에 공식적으로 우리 땅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선교사가 도착하기 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소래교회는「황해도지」와「은율군지」의 자료에 의하면, 1883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타나며, 1·4후퇴 때 월남한 소래인들이 고향을 그리며 후세대에게 정확한 사실들을 알리고자 편집한「대구면지」(大救面誌)에 송천교회 회고편을 쓴 정용하의 증언에 의해서도 1883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타난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경조 목사님의 가르침에 의하여 1883년 5월 16일에 교회가 설립된 것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고향에 있을 때 5월이 되면 어린이주일, 어머니주일, 그리고 이어서 교회생일이 있었고,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온 교회가 축제 분위기에 젖어들었으며, 설립일에는 야외예배, 토론회, 웅변대회 등등 여러 가지 특별 행사를 하면서 이 날을 지켰습니다.”라고 하였다.

만주에서 쪽 복음서를 갖고 밀입국(1882년)하려다 관헌에 적발되었던 서상륜은 고향에 와서 전도하게 되었는데, 이 사실이 관가에 알려져서 그를 체포하라는 체포령이 내려지므로 신변의 위협을 받게 되자, 당숙이 살고 있는 소래로 피신하여 살면서 서울과 소래를 오가며 전도하였다. 의주에 살던 동생 서경조가 소래로 아주 이주하여 서상륜은 1883년 봄부터 자기 친척과 몇몇 동네 사람들과 함께 동생 서경조의 초가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후에 솔내는 58세대 중 50세대가 예수를 믿는 경이로운 전도의 업적이 나타난 동리가 되었다.

상경한 형에게서 신약과‘덕혜입문’을 받아 소래로 돌아온 서경조가 결단을 하고 믿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신약전서를 수차 읽어보니 예수교를 할 마음이 깊이 들어가는 동시, 그 교를 하면 피살하리란 마음이 또 생겨 시중전이 일어나”반년이나 갈등하다가 로마서를 보고는“사도 바울의 죽음을 무릅쓰고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보고 내 생각에 바울도 사람이라 어찌 죽기를 두려워 아니 하였으리오…죽는 것은 잠깐 동안이요 죽을까 두려운 마음이 실상 어려우니 성신을 받아 두려운 마음이 없으면 죽는 것이 두려울 것 없고 또한 생사가 천주의 뜻대로 되리라.”하며 기독교에 입문하였다고 술회하기도 하였다.

1895년에는 교회가 비좁아 신축을 하였다. 이때 교인 수는 2백여 명이라 했으며 교회를 짓기 위하여 밤새도록 기도하는 일, 금식하는 일, 십일조를 교회에 바쳐 3-4월이 되어 어려운 사람이 생기면 신·불신을 막론하고 구제해 주는 일, 근농으로 교회 설립 3-4년 만에 박토가 옥토 된 일, 주색잡기, 투전, 미신 등이 없어진 일, 열심히 전도하는 일이었다(국민일보“한국교회 뿌리를 찾아서”)고 기록되어 있다.

소래교회 건축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는데, 첫째는 소래교인들이 자체적으로 건축비를 부담했다는 것이다. 또한 둘째는 미리 비축해 두었던 기금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서경조는 성경 공부 차 상경하였을 때 언더우드의 사랑채에서 서울의 신도들과 예배당 건축계를 조직한 일이 있었다. 이계금은 매년 10냥씩 불입하도록 하였고, 한국 어디서나 최초로 예배당을 건축할 때 이 기금을 사용하도록 약조하였다. 따라서 소래교회의 건축 준비가 무르익고 공사가 진행되자 계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계금을 수령하였는데, 소래교회의 건축에 도전을 받은 서울교회가 서둘러 예배당 건축을 추진하였으므로 계금을 반분하여 500냥을 받아 건축비로 사용하였다. 셋째 특징은 건축비에 대한 언더우드선교사의 선교비 보조를 사절하고 한국 최초의 민족 교회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건축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소래교회의 부흥으로 인근 장연읍을 비롯하여 송화·은율·풍천·문화·해주 등 일곱 지역에 수십 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의 창설은 분명 성경을 번역한 평신도들의 독자적 전도와 한글성경 반포라는 특징을 갖고 시작되었다. 또한 소래교회는 한국교회 스스로의 힘으로 건축을 감당함으로 자립, 자생하는 교회로서의 기초 돌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