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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8)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好學 2009. 9. 6. 22:30

한국교회사(8)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1) 귀츨라프(Karl A. F. Gutzlaff)
② 귀츨라프의 내한
1831년 선교여행 이후에 한국 선교를 모색하며 본격적인 한국 방문을 계획하고 있을 때, 마침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중국까지 교역을 확대한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조선, 일본, 오키나와, 대만까지 교역을 확대하기 위해 1천 톤급의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 무역선을 이끌고 항해할 때 그 배에‘통역관’으로 동승할 수 있었다. 다행히 로드 암허스트 호의 선장 휴 린세이(Hugh H. Lindsay)는 중국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독실한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귀츨라프에게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번에도 귀츨라프에게 통역, 선의(船醫), 선목(船牧)을 제의해 이 역사적인 한국 선교여행이 상업적인 목적을 띤 상선을 타고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이 여행을 통해 귀츨라프는“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서구에서 온 첫 개신교 선교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비록 그가 통역관으로 승선하긴 했으나 그의 입국 목적은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 근해와 백령군도의 어느 한 섬에 정박하였고, 지방 관헌을 통하여 정부 당국과 접촉을 시도하였다고 하나, 그가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에 대하여 역사는 별로 기록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다만 1832년 7월 17일, 충남 장항 앞 창선도에 도착한 이후 기록한 일기가 남아 있어 그의 활동을 잠시 엿볼 수 있을 뿐이며, 이 일에 비추어 황해도에서도 이와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 외에는 별로 큰 진전이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7월 17일, 강한 바람에 밀려 한국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나님이 자비로운 섭리로 중국 해안을 항해하는 동안 많은 위험 속에서도 우리를 보호하셨으며, 오! 그로 인해 우리는 진실로 감사드린다.”

“7월 17일, 고깃배를 타고 있는 남루한 차림의 두 어부를
만났고, 그 중 한 노인에게 성경과 사자표 단추를 주었더니 매
우 좋아하였다.”
주민과 접촉하고 그들에게 복음서를 주려고 했으나 그 중 한 사람이 책을 받고는“불가”(不可, pulga)라고 소리치며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귀츨라프는 자신의 일기에서 그 말을“불질러라”(fire), “그것을 불태워버려라”(burn it)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가 일기에서 밝힌 대로 그곳에서는 “직접 복음서를 주는 기회는 매우 드물었다.”하지만 귀츨라
프는 이들과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해 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한국에 대한 기록들이 하나같이 외국인들에 대해 무조건 폐쇄적이고 닫혀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것은 정확한 평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귀츨라프는 비록 한국인들이 외국인에 대해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적대적인 것만도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가 그들에게 준 복음서 선물에 대해 보답할 수 없어서 그들은 대단히 감사하며 우리에게 잎담배 몇 잎을 주었는데, 우리는 겸손하게 그것들을 받았다. 그 후 어디서든지 조선인을 혼자서 만나면 이 어부들처럼 인정에 넘쳤으며 은혜를 베풀었다.”

장산을 떠나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7월 23일에 안면도 근해에 이르러 안개가 짙게 깔린 가운데 한 섬에 정박했다. 그날 어부 몇 사람이 와서 귀츨라프 일행을 초청, 소금에 절인 마른 물고기와 신 액체(막걸리)를 융숭하게 대접했다. 7월 24일 사람들이 갑판에 올라와 문안하며 현재 배가 정박한 곳은 위험한 곳이기 때문에 강경이라는 항만으로 가면 안전하고 또 고관을 만나 무역 상담을 하며, 식량을 구할 수 있다고 조언해주었다.

“7월 25일, 한국 관원의 요청으로 고대도 안항으로 옮겨 정박하였으며, 섬 사람들은 신기한 서양 배와 서양 사람들을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는데, 나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고 성경과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

고관과 만난 일행은 왕에게 헌상할 서신과 선물 준비를 서둘렀다. 성경도 선물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능한 곧 왕에게 서신과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들을 포장하는 데 한나절을 넘게 시간을 보냈다. 린세이 선장은 내가 갖고 있는 성경 한 질과 전도문서 전부를 함께 국왕에게 선물하라고 아주 정중하게 요청했다.…두 교섭위원인 텡노와 양치를 대동하고 우리는 선물을 갖고 출발했다. 그 선물은 유리그릇, 옥양목, 낙타모직물, 담요 등과 한문으로 쓴 서한인데 붉은 비단으로 싼 것이다.”

한양에서 회신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 일행은 정부 관리의 감시가 없는 해안의 해변에 상륙하여 주민들과 접촉하며 자신들이 가지고 온 서적, 의약품과 성경을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를 그들에게 설명하면서 그들에게 인류의 구세주를 자주 이야기할 기회를
가졌다.”백낙준 박사가 지적했고 후에 제임스 그레이슨(James Huntly Grayson)이 한국의 초기 불교와 기독교(Early Buddhism and Christianity in Korea)에서 진술한대로, 이 첫 개신교 선교사는 한국의 천주교와 달리 처음부터 복음을 공유하는 일, 곧 성경을 반포하는 일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1) 귀츨라프(Karl A. F. Gutzlaff)
③ 귀츨라프의 성경 반포
그의 일기에는 이 나라에 복음을 전하려는 그의 염원이 군데군데 짙게 나타나 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서를 건네주기를 원했고, 선물과 함께 성경을 동봉하여 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귀츨라프 일행은 7월 30일,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포도 재배법과 포도에서 미주(美酒)를 얻는 방법과 자신들이 가지고 온 감자 씨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면서 파종법과 재배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처음에는 외국 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국법에 금지되었다며 반대하던 주민들도 새로운 농산물로 재배 농업의 혁신을 이루어야 이윤을 얻을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말없이 승낙했다.
귀츨라프 일행은 이들 중 몇이라도 복음을 받고 구원받은 백성이 되기를 희망하며 그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그 기회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고대도에 암허스트 호가 도착하자 마량진에서 관리들이 입국 목적과 배를 시찰하기 위해 귀츨라프가 탄 배에 승선했다가 그만 일기불순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밤을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귀츨라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배에 올라온 홍주목사 이민회의 서생에게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적어 주고 그 옆에 한글로 토를 달게 하여 주기도문을 번역한 것이다. 그가 번역한 주기도문 기록은 찾을 길이 없지만, 이것은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한 가장 훌륭한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귀츨라프는 우리 민족에게 생명의 양식인 성경과 육신의 양식인 감자까지 주고 간 고마운 선교사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라고 김인수는 말한다.
1832년 8월 7일 서울에서 통역관을 대동하고 특사가 내려왔는데, 그는 조선은 중국 황제의 허락 없이는 어떤 외국이나 외국인과 통상이나 교역을 할 수 없으니, 즉시 물러가라고 엄하게 말하였다. 또한 선장이 국왕에게 보낸 선물도 성경과 함께 되돌려 보내었다.그러나 실상은 지방 관리가 통상과 선교 사업을 요청하는 귀츨라프 일행의 청원서와 선물을 아예 중앙정부에 전달도 하지 않고 되돌려 준 것이었다. 린세이와 귀츨라프 일행은 그것들을 되돌려 받기를 거부했다.
왜 한국 지방 관리들이 선물과 서신을 한양의 국왕에게 전달하지 않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미 16년 전 첨사가 바실 홀과 맥스웰 대령과 접촉한 뒤 불이익을 당했던 사례를 잘 알고 있던 지방 관리들에게는 또다시 외국인들과 접촉하고 그들의 선물과 서신을 조정에 전달하는 것이 큰 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8월 11일 어렵게 조선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은 이들은 영국 선박이 이곳에 오면 양식을 공급해 줄 것과 서해안에 배가 난파당하면 북경으로 되돌려 보내 달라고 청원했고, 관리는 두 가지 모두 동의했다.
귀츨라프는 더 이상 그곳에 체류하며 선교를 강행할 수 없어 훗날을 기약하며“아주 작은 한 알의 겨자씨와 같은 신앙”을 심어두고, 정들었던 주민들과 석별의 정도 나누지 못하고 섬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언젠가 자신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이 아름다운 결실이 되어 거둘 때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고대도를 떠날 수 있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안에 그들에게 은혜가 임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이것을 고대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영광스러운 십자가의 교리를 전파함으로 그 날을 앞당기려고 매우 간절히 열망했던 것이다.…고대도의 관리들과 많은 서민들이 성경을 받았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것들이 미약한 시작일지라도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더 좋은 때가 한국에 임할 것임을 희망하자.”라고 회고하였다.

귀츨라프 일행은 비록 자신들의 청원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백성들에게 성경과 근대 농업기술, 외국과의 교류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면서 한국선교에 대한 비전을 간직한 채 기수를 남으로 돌렸다. 며칠 후 제주도를 발견한 일행은 그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곳을 선교 기지로 만들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귀츨라프의 소원은 19세기가 지나기 전에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 세계 선교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놀랍게 응답되었다. 미개한 나라, 역사의 무대에 가려진 이 나라를 복음화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때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동원하셔서 한국선교를 타진하시고, 복음의 씨앗을 이 나라의 작디작은 섬 고대도에 뿌리셨던 것이다. 그 결과 1882년 그리피스가 그의 저서‘조선: 은둔의 나라’(Korea: The Hermit Nation)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비록 지금은 미개한 민족이지만, 장차 동방의 복음의 빛이 되어 동방에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최초의 나라가 되기를 희망했던 그 소원은 머지않아 역사 속에서 현실로 구현될 수 있었다.
1834년 모리슨이 세상을 떠난 후 귀츨라프는 중국주재 영국 대사관의 통역 겸 서기로 임명받았고, 마지막에는 무역 감독으로 임명받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직책을 갖고 있었다. 중국인, 중국 역사, 언어, 그리고 그들의 관습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귀츨라프는 영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아편 전쟁 동안 1842년 난징에서 평화협상이 진행될 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844년 그는 본국 전도사 양성소를 창립해 48명의 사역자들을 훈련시켜 파송하기도 했고, 1849년에는 영국, 독일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들을 여행하면서 강연을 통해 중국선교의 비전을 심어 주었다. 그는 1834년 『중국사개관』, 『칼 귀츨라프 항해기』를 저술하고, 1838년에는 중국
개항을, 1833-1837년에는『이스턴 엔 웨스턴 이그재미너』(The Eastern and Western Examiner)지를 간행했으며, 그 외에도 정기 간행물『차이니스 리파지토리』(Chinese Repository), 중국어 월간지 등을 간행하고 수많은 책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1851년 중국으로 돌아와 같은 해 8월 9일, 홍콩 빅토리아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극동의 비그리스도인들에게 파송된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인 귀츨라프는 많은 저술과 발자취를 남겨 극동 선교 역사에 소중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고난과 개척의 25년간의 선교사역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