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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6)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好學 2009. 9. 6. 22:28

한국교회사(6)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2) 천주교회의 제사 문제로 인한 수난

한국의 천주교회가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은 제사문제 때문이었다. 천주교회의 지도자들은 1789, 1790년에 걸쳐 두 번이나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 신부의 파송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 교회에서 오랜 동안 논란을 겪었던 제사문제에 대한 지도를 요청하였다. 윤유일이 받아온 답은 조상 제사가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원래 예수회의 독점적인 전교 시기에는 제사 문제가 별로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다. 예수회가 처음으로 현지 적응 정책을 써서 조상 제사와 공자 제사를 용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서 프란시스코(방지거)회와 도미니쿠스(도밍고)회 및 파리외방전교회가 중국에 진출하여 예수회의 제사 용납 정책에 대해 교황청에 제소함으로‘典禮問題’가 시작
되어 거의 120년 간 계속되었다. 교황청은 처음에는 단안을 내리지 못하다가 결국‘제사 금지’로 결론짓게 되었는데, 이런 조치에 반발하여 중국 정부는 예수회 이외의 선교 단체들을 추방하였고, 교황청은 예수회의 해산을 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윤유일이 받아온 조상 제사 금지 결론은 당시의 한국 사회를 규제하고 있던 지배 이데올로기라 할 주자학과의 갈등이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조선 사회가 조상과 부모에게 드리는 제사를 폐하고 신위를 없애는 천주교도들의 행위에 대하여 국가적인 차원의 반응을 보인 것은 이 문제가 단순히 가정적인 효의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윤리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인간됨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물론 조선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이념적 기반이라 할 주자학적 충(忠)을 붕괴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전례 문제가 한 구실이 되고 정치 역학 관계가 상승하여 몇 차례에 걸친 박해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1784년에 창설된 조선 천주교회는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어 사실상의 종교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년 동안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역사를 겪었다. 이 같은 박해는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듬해인 1785년부터 시작된다.

1785년(정조 9년, 乙巳) 봄에 형조의 금리들이 우연히 명례방(明禮坊, 명동) 김범우의 집을 지나다가 이상한 집회가 열리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벽이 중앙에 앉아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있었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 권이신, 권상학 부자 등이 모여 있었다. 금리들은 처음에 노름하는 것은 아닌가 하여 들어갔다가 천주교 서적과 화상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압수하여 형조에 갖다 바쳤다.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은 집주인인 중인(中人) 김범우만 체포하고 나머지 양반계층 교인들은 회유하여 내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것이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천주교인의 실체가 정부 기관에 의해 최초로 발각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연루, 체포된 김범우는 단양에 유배당한 후 1년만에 유배지에서 죽음으로 조선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벽과 이승
훈은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며, 이백은 배교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번민하다가 1786년 봄에 열병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핍박이 가라앉자 이승훈을 비롯하여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1787년 겨울에 이승훈, 정약용, 강이원 등이 반촌에 있는 김석태의 집에 모여 서학서를 공부한 사실이 폭로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것을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라 하는데 이 사건을 폭로한 인물은 이승훈, 정약용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처음엔 서학에 호의적 관심을 보였던 이기경이었다. 이기경은 반촌에서 있었던 서학 연구 모임의 실황을 홍낙안에게 알렸고, 홍낙
안은 이 사실을 세상에 폭로하여 왕으로 하여금 서학관계 서적을 불살라 없애라는 명을 내리게 하였다.

이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소위 진산사건이 터졌다. 1791년(정조 15년)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인 윤지충, 권사연이 체포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터졌으니 조선 천주교회로서는 처음으로 맞은 대규모 박해였다.

정약용의 외종이 되는 윤지충은 진사 시험(1783년)에 합격한 양반계층 신분으로 1784년 서울에 갔다가 김범우의 집에 들러 천주실의와 칠극(七克)을 얻어 보았으며 고향에 돌아와 그의 외종형 되는 권상연과 함께 서학을 연구하던 중 둘이 함께 입교하였다. 정미반회사건 이후 정부에서 서학을 금하는 명이 내리자 집에 있던 서학서를 태웠으나 은밀하게 신앙은 계속 지켰다. 그러던 중 1790년 말 윤유일을 통해 전달된 북경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라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그 신주들을 땅에 묻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은밀한 신앙행위가 1791년 여름 그의 어머니 권씨가 별세하게 됨으로 폭로될 수밖에 없었다. 상례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위마저 만들지 않은 윤지충이나 그의 행위를 지지하는 권상연의 행위는 전통 양반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같은 공개적 제사폐지 행위는 소문을 통해 중앙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정치 문제화시킨 장본인도 역시 홍낙안이었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멸륜패상’(滅倫敗常),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난행을 범한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되어 1791년 12월 8일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이 박해로 인해 조선 초대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재정립하든지 아니면 천주 신앙을 포기하든지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하나는 박해라는 외부로부터 오는 도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 천주교를 이끌어 온 지도자들의 배교로 인한 도전이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뿌리가 깊지 못한 조선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훈을 비롯해 이벽, 정약전, 권일신, 최필공, 최인철, 최인길, 최필제, 정인혁, 손경윤, 양덕윤 등이 배교하고 말았는데, 천주교의 이와 같은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성경 번역으로 시작된 후대 개신교 선교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지 못한 가운데 천주교 선교가 진행되었으므로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한 까닭이라 할 수 있다.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3) 신유박해와 조선천주교

천주교회가 형성되면서 신자들은 모두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성직자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서로 상의한 끝에 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이단원, 유항검, 최창현 등을 신부로 선정하였다. 1789년 10월, 교회의 지도자들은 윤유일에게 동지사 이성원 일행을 따라 북경으로 가서 천주교 주교를 만나 서울에서 교회가 조직되었음을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북경에 주재하는 주교 구베아(Gouvea)는 평신도가 행할 수 있는 세례성사만 인정할 뿐 성직제도는 인정하지 않았다.

1793년 구베아 주교는 서울의 신도들이 신부를 보내달라고 하는 요청을 받고 북경 천주교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중국인 주문모(周文謀) 신부를 선정하여 보내기로 하였다. 주문모는 1794년 12월 국경을 넘어 이듬해 1월에 서울에 숨어들어왔다. 그러나 약 6개월 후에 밀고로 인하여 관의 체포령이 내려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신도들의 도움으로 6년 동안 용케 피해
다니면서 교회를 돌보며 지방으로 순회하면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 그가 입국할 때 4천 명이던 교인수가 5년 후에는 만 명이 되었다.

박해가 완화되기를 기다렸으나 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더 이상 숨어 지낼 수 없었던 주문모 신부는 이와 같은 조선천주교회의 상황을 북경의 주교에게 알리기 위해 편지를 썼다. 발각되지 않도록 명주에 라틴어로 쓴 다음 옷 속에 꿰매 철저하게 보안장치를 한 편지는 1797년 1월 28일 동지사 일행 틈에 끼어 북경에 입국한 두 명의 조선의 천주교인을 통해 중국 주교에게 성공적으로 전달되었다. 주 신부의 편지는 포르투갈 왕이 조선 왕에게 조선의 천주교 신도들을 대변해 줄 것과 조선 왕과 수호조약을 맺을 것, 그리고 조선의 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해줄 것 등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요청은 주 신부가 볼 때 조선에서의 천주교 선교 활동을 위해서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그러나 천주교가 전통적인 조상숭배를 거부하며 반국가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조선 정부로서는 이와 같은 천주교 전래의 자유를 허락할리 만무했다. 오히려 주문모 신부가 이와 같이 요청했다는 사실이 조선 정부에 알려지면서 주신부의 그와 같은 행동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사건은 1791년에 있었던 신해박해에 이어 1801년 신유박해로 이어져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3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로 이어졌다. 주문모 신부는 점점 더 절박하게 다가오는 위험을 피하여 국경을 넘어 귀국하려고 가다가 많은 교인들이 자기 때문에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되돌아와 자수하고, 1801년 음력 4월 19일에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위와 같이 처음 천주교가 전래되고 100여 년 간 조선천주교는 제사 문제로 엄청난 박해를 받았고, 그로 인한 순교자만도 10,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부의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런 박해 속에서도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조상 제사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순교적 신앙으로 일관했다.

신유박해와 관련, 주목되는 점은‘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이다. 천주교도였던 황사영은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 배론의 은거지에서 비단에 글을 써서 북경에 보내려 하다가 중간에서 발각되었다. 1만 3천여 자나 되는 이 글에는 박해의 경위와 주문모 신부 등 순교자들의 사적, 조선 천주교회의 부흥과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법이 나름대로 제시되어 있다. 문제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청나라와 프랑스 함대를 동원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신앙의 자유와 민족적 주체성 사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어서 신앙 외적인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 일로 정부는 더욱 천주교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고, 이어 천주교에 대해 더욱 무서운 박해를 가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했는지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이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 기적이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일은 조상숭배 문제로 순교에 이르기까지 박해를 받았던 천주교가 토착화 선교 정책이라는 명목으로 조상제사를 비롯하여 공자숭배와 신사참배까지도 종교의식이 아닌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을 표현하는 국민적 예식이라는 이유로 허용했다는 것이다.

약 2세기 간이나 엄격히 금지되어 오던 동양제례가 20세기에 들어와서 다시 문제화 된 것은 1932년 일본의 팽창주의에 의해 세워진 만주국이 국민의 단결을 이루기 위하여 공자숭배를 국민에게 의무화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일로 인해 천주교인들은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되었고, 당황한 교회당국은 공자숭배의 성격을 정부에 질의했으며, 정부는 이 의식이 종교적이 아
니라 단순히 사회적, 국가적 예식일 뿐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토착화 정책을 선교의 기본방향으로 지향하고 있던 교황 비오11세는 1935년 공자 공경의식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만주 주교단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례시 사자(死者)에 대한 사회적 경의 표시로서의 절도 허용하였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되었다. 군국주의의 일본정부는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국민적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의무화하였다. 이에 교회당국은 신사참배의 의의와 성격에 대해 정부에 질의를 하였고, 정부는 이 의식이 국가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을 표현하는 국민적 예식이라고 답변을 하였다. 교황청은 정부의 해명을 근거로 하여 1936년 신사참배를 허용하면서 선교사들은 조국에 대한 국민의 충성과 사랑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야하며 신자들에게 일반 국민들에 못지않은 애국심을 갖도록 고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천주교의 주장대로라면, 그 직무에 있어서 무흠한 교황과 절대 오류가 없는 교회가 어떻게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 이같이 번복된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그 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조상제사나 공자숭배와 신사참배가 하나님의 계명에 위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일로 인해 죽은 자들은 순교자가 아니라 교회의 잘못된 결정에 의
해 어이없이 희생되어진 자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사건만 보아도 천주교가 때를 따라 본색을 달리하는 단체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