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한국교회사(7)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好學 2009. 9. 6. 22:29

한국교회사(7)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제1장 개신교 선교 이전의 한국의 정황
3. 개신교의 한국 전래를 위한 노력
1) 중국을 통한 한국 선교의 시도

박연(벨트브레), 하멜, 영국 해군대령 맥스웰과 홀이 상업과 정치적인 목적으로 조선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었다면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입국한 칼 귀츨라프(Karl August Friedrich Gutzlaff, 1803-1851) 선교사, 런던 선교회 소속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그리고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Alexander Williamson)은 선교를 목적으로 입국하거나 한국선교를 측면에서 지원한 이들이었다.
독일에서 발흥한 경건주의운동의 저변 확대, 요한 웨슬리 형제와 조지 휫필드를 통한 영국의 부흥운동 그리고 1740년대 조나단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국의 1, 2차 대각성 운동은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고, 이와 같은 영적인 생명력은 선교열을 가속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세기 중엽이 되었을 때, 세계는 근대화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은둔의 나라로 세계와의 단절 속에서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조선에 대한 관심은 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국가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당시 제국주의 정책의 붐
을 타고 동양과의 통상확대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면서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던 유럽과 북미의 강대국들도 조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런 두 가지 이유, 즉 선교와 상업의 목적으로 동양에 대한 유럽과 북미인들의 관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지극히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치 불가분의 관계처럼 병행되어 진행되었던 것이다. 선교를 추진하고 타진하는 과정에서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자국의 힘을 의지하여 선교사역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인도의 동인도회사를 거점으로 한 영국선교나 그 이전에 있었던 포르투갈의 남미 선교는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다행히 한국선교는 비교적 순수한 목적으로 복음이 전래된 몇 안 되는 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1) 귀츨라프(Karl A. F. Gutzlaff)의 내한

① 귀츨라프의 선교준비
개신교의 동양선교는 18세기 말에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영국인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의 인도선교(1793년)를 비롯하여, 모리슨(Robert Morrison, 馬禮遜)의 중국선교(1807년), 미국인 저드슨(Adoniram Judson)의 버마선교(1812년)가 시작된 것은 이 무렵이다. 이어서 스코틀랜드 출
신의 밀른(William Milne, 米燐)이 1813년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마카오에 도착하였고, 영국 회중교회의 중국선교사로서 매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 麥都思)가 같은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1817년에 말래카에 도착, 모리슨과 밀른을 도와 출판선교사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선교사는 의사이며, 목사였던 칼 귀츨라프이다. 그는 1803년 7월 독일 포메라니아(Pomerania) 지방의 피리쯔(Pyriz)에서 유태계 독일인으로 태어났다. 그는 독일 경건주의 운동의 발상지였던 할레(Hall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로 안수받았다. 꿈에 그리던 경건주의의 중심지인 할레대학에서 신학 교육을 받는 특권을 얻는 귀츨라프는 학업을 마친 후 베를린에 있는 선교사 양성소(the Missionary Institute)에서 국비로 선교사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여섯 개 언어를 동시에 공부했다. 이와 같은 훈련 과정을 통해 그는 학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장차 선교사로서의 자격을 충실히 갖춘 뜨거운 신앙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일찍이 선교사가 될 꿈을 키우고 있었는데, 영국 여행 중에 영국 선교사로서 중국 선교의 선구자였던 모리슨(Robert Morrison)을 만나, 중국선교 보고를 듣게 된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 선교사가 될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그는 1827년 1월 네덜란드선교회(the 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의 파송을 받고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인 동남아의 바타비아(Batavia)에 도착했다. 1828년 8월 23일 시암, 방콕으로 선교의 거점을 옮긴 후 그의 선교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귀츨라프와 그의 아내는 시암어로 많은 작품을 번역하고 Cochin-Chinese 사전을 편찬하고 신약성경을 다섯 개의 방언으로 번역하였고, 난파한 일본 선박의 한 선원과 친숙해져, 그와 협력해서 1838년에는 일본어로 요한복음을 번역 간행할 정도로 천부적인 어학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1827년부터 네덜란드선교회와의 관계를 끊은 귀츨라프는 영국 회중교회 선교사인 월터 매드허스트의 제안에 따라 태국선교를 두 차례나 시도해 어느 정도 열매를 거두고 4년 뒤인 1831년에 원래 자신이 바라던 선교지인 중국으로 옮겨 갔다.

1831년 그는 요동반도를 거쳐 마카오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선교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모리슨과 합류하였다. 귀츨라프는 그
가 마카오에 도착했던 1831년 6월에 중국 동해안과 만주를 거쳐 오는 약 6개월에 이르는 전도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이 여행에서 많은 성과를 올리고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귀츨라프가 한국에 오게 된 것도 이 선교여행에서의 성과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