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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5 )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好學 2009. 9. 6. 22:26

한국교회사 (5 )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2. 천주교의 한국 전래

1) 천주교의 전래 및 정착

중국에 천주교 선교사를 파송하여 처음 상주토록 한 것은 예수회에 의해서다. 예수회 창설의 주역을 맡았던 프란시스 자비엘은 동방 선교에 나서서 1549년 일본 선교에 이어, 중국 선교에 나섰으나 1552년 광동 앞바다의 섬에서 돌아갔다. 그 뒤 카르네이로(1568년), 발리냐니(1573년)와 40명의 선교사들, 루기에리(Michael Ruggien, 羅明堅)가 파송되었고, 루기에리의 권유로 선교 길에 오른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1552-1610)에 의해 중국 선교가 본격화되었다. 마테오 리치는 자비엘이 돌아가던 해에 출생한 같은 예수회 신부로 이태리 태생이며, 1581년에 마카오에 도착한 후 남경(1595년)을 거쳐 1600년에는 북경에 들어갔고, 그 이듬해에는 북경에 교회당(南堂)을 세우고 동지 카타네오, 판토쟈와 함께 열심히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는 1603년「天主實義」등의 책을 저술하여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천주교를 소개하였다.

천주교는 17세기 초부터 조선의 지식층에게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은 주자학(朱子學)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사회·경제의 제반 체계가 굳어져 있었고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통하여 그 사회적 모순이 여러 곳에서 노정되고 있었던 만큼, 조선의 지식층, 그 중에서도 특히 자기 사회의 모순을 뼈저리게 느끼며 이를 개혁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젊은이들에게 이 천주교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가 당시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남인계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환영받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현(昭顯)세자가 한국인으로서는 비교적 초기에 천주교와 접하게 되었는데 그 때는 볼모 생활을 할 때였다. 병자호란 후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1644년 북경으로 옮겨진 후 당시 예수회 신부로서 청(淸)나라 조정의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에 오른 아담 샬(J. Adam Shall van Bell, 渴若望)과 사귀게 되었다. 서양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세자는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예수회 신부들은 세자를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가 환국할 때 선교사들은 중국인 궁녀 감독관인 환관 5명을 교인으로 구성하기까지 하였지만, 귀국한 지 70여 일만에 세자가 돌아감으로 그 계획도 수포로 돌아갔다.

1777년 정조(正祖) 원년에 이벽(李蘗), 권일신(權日身), 정약전(丁若銓),
정약용(丁若鏞) 등 남인의 시파 유학자들이 서학(西學)에 관심을 가지고 한강가의 산사인 주어사(走魚寺)에 모여 토론을 하였다. 이벽은 서학에서 신앙을 얻고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을 쉬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으며, 다른 이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가르쳤다. 1783년 정조 7년에 동지사 겸 시은사 황인점의 서장관 이동욱의 아들이요 정약전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이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자, 이벽은 천주교의 진리를 잘 알아 오도록 부탁하였다. 이승훈은 일행을 따라 10월 14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12월 21일에 북경에 당도하여 남당(南堂)을 방문하고 신부에게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웠다. 1784년 음력 정월 그믐께 귀국하기 직전에 예수회 신부 그라몽(Louis de Grammont)에게 세례를 받고‘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해 3월에 수십 종의 교리 서적과 십자가상과 성화, 묵주 등 진귀한 물품을 가지고 돌아와 신앙생활을 하고, 이벽에게 교리 서적들을 전해 주었다. 이벽은 기독교 진리 변증, 중국과 조선에 있는 미신에 대한 반박, 7개 성사(聖事)에 관한 설명, 공교요리(公敎要理), 복음 해설, 매일의 성인전, 기도서 등을 통하여 신앙에 더욱 확신을 하고 전도하였다.

이벽은 천주교 전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양반계층보다는 중인(中人) 계층에 먼저 전도를 시작했다. 역관인 최창현, 김범우, 최인길, 지황, 김종교 등이 그의 전도를 받아 입교했다. 이들 중인계층 역관 출신들은 전통 유학에 사로잡힌 양반계층보다는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받아들이는데 개방적이었다. 그들은 북경을 왕래하며 이미 서학의 정신과 문명세계의 진보성을 보아 알고 있던 터였기에 이벽의 권유에 찬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반계층에게 전도하려는 이벽의 시도도 계속되었다. 이가환, 이기양과 같은 학자들과 공개토론까지 벌이면서 입교를 꾀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 1784년 9월, 경기도 양근(양평)에 사는 권철신, 권일신에게 전도하여 그중 권일신을 입교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승훈이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주게 되면서 한국내에서 자생적인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고, 이벽, 권일신, 유항검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이때 그들은 교황청의 허락도 없이 최연장자인 권일신을 주교로,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을 신부로 선출하고 이들에 의해 성사를 집행하는 가성직시대(假聖職時代)를 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제도의 모순을 곧 깨닫고 북경 교회에 알려 지시를 받게 되었지만, 한국인들 스스로에 의한 가성직제의 출현은 한국 천주교회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천주교회의 자생적 성격을 이해토록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국의 천
주교회는, 초기의 학문적인‘서학’,‘ 천주학’의 단계에서 신앙적인 단계로, 초기의 기호(畿湖) 지방의 몇몇 학자들 중심의 단계에서 양반 계층을 포함한 사회 전 계층의 전국적인 규모로 발전하게 되었다

2) 천주교회의 제사 문제로 인한 수난

한국의 천주교회가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은 제사문제 때문이었다. 천주교회의 지도자들은 1789, 1790년에 걸쳐 두 번이나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 신부의 파송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 교회에서 오랜 동안 논란을 겪었던 제사문제에 대한 지도를 요청하였다. 윤유일이 받아온 답은 조상 제사가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원래 예수회의 독점적인 전교 시기에는 제사 문제가 별로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다. 예수회가 처음으로 현지 적응 정책을 써서 조상 제사와 공자 제사를 용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서서 프란시스코(방지거)회와 도미니쿠스(도밍고)회 및 파리외방전교회가 중국에 진출하여 예수회의 제사 용납 정책에 대해 교황청에 제소함으로‘典禮問題’가 시작
되어 거의 120년 간 계속되었다. 교황청은 처음에는 단안을 내리지 못하다가 결국‘제사 금지’로 결론짓게 되었는데, 이런 조치에 반발하여 중국 정부는 예수회 이외의 선교 단체들을 추방하였고, 교황청은 예수회의 해산을 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윤유일이 받아온 조상 제사 금지 결론은 당시의 한국 사회를 규제하고 있던 지배 이데올로기라 할 주자학과의 갈등이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조선 사회가 조상과 부모에게 드리는 제사를 폐하고 신위를 없애는 천주교도들의 행위에 대하여 국가적인 차원의 반응을 보인 것은 이 문제가 단순히 가정적인 효의 질서를 무너뜨린다는 윤리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닌, 인간됨의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물론 조선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이념적 기반이라 할 주자학적 충(忠)을 붕괴시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전례 문제가 한 구실이 되고 정치 역학 관계가 상승하여 몇 차례에 걸친 박해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1784년에 창설된 조선 천주교회는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되어 사실상의 종교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00년 동안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역사를 겪었다. 이 같은 박해는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듬해인 1785년부터 시작된다.

1785년(정조 9년, 乙巳) 봄에 형조의 금리들이 우연히 명례방(明禮坊, 명동) 김범우의 집을 지나다가 이상한 집회가 열리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이벽이 중앙에 앉아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있었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 권이신, 권상학 부자 등이 모여 있었다. 금리들은 처음에 노름하는 것은 아닌가 하여 들어갔다가 천주교 서적과 화상들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압수하여 형조에 갖다 바쳤다. 당시 형조판서 김화진은 집주인인 중인(中人) 김범우만 체포하고 나머지 양반계층 교인들은 회유하여 내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것이 소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천주교인의 실체가 정부 기관에 의해 최초로 발각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에 연루, 체포된 김범우는 단양에 유배당한 후 1년만에 유배지에서 죽음으로 조선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벽과 이승
훈은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며, 이백은 배교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번민하다가 1786년 봄에 열병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핍박이 가라앉자 이승훈을 비롯하여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1787년 겨울에 이승훈, 정약용, 강이원 등이 반촌에 있는 김석태의 집에 모여 서학서를 공부한 사실이 폭로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것을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라 하는데 이 사건을 폭로한 인물은 이승훈, 정약용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처음엔 서학에 호의적 관심을 보였던 이기경이었다. 이기경은 반촌에서 있었던 서학 연구 모임의 실황을 홍낙안에게 알렸고, 홍낙
안은 이 사실을 세상에 폭로하여 왕으로 하여금 서학관계 서적을 불살라 없애라는 명을 내리게 하였다.

이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 소위 진산사건이 터졌다. 1791년(정조 15년)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인 윤지충, 권사연이 체포되어 처형당한 사건이 터졌으니 조선 천주교회로서는 처음으로 맞은 대규모 박해였다.

정약용의 외종이 되는 윤지충은 진사 시험(1783년)에 합격한 양반계층 신분으로 1784년 서울에 갔다가 김범우의 집에 들러 천주실의와 칠극(七克)을 얻어 보았으며 고향에 돌아와 그의 외종형 되는 권상연과 함께 서학을 연구하던 중 둘이 함께 입교하였다. 정미반회사건 이후 정부에서 서학을 금하는 명이 내리자 집에 있던 서학서를 태웠으나 은밀하게 신앙은 계속 지켰다. 그러던 중 1790년 말 윤유일을 통해 전달된 북경주교의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라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그 신주들을 땅에 묻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은밀한 신앙행위가 1791년 여름 그의 어머니 권씨가 별세하게 됨으로 폭로될 수밖에 없었다. 상례에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위마저 만들지 않은 윤지충이나 그의 행위를 지지하는 권상연의 행위는 전통 양반사회에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같은 공개적 제사폐지 행위는 소문을 통해 중앙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정치 문제화시킨 장본인도 역시 홍낙안이었다. 결국 윤지충과 권상연은‘멸륜패상’(滅倫敗常),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난행을 범한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되어 1791년 12월 8일 전주 풍남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이 박해로 인해 조선 초대 천주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을 재정립하든지 아니면 천주 신앙을 포기하든지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하나는 박해라는 외부로부터 오는 도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조선 천주교를 이끌어 온 지도자들의 배교로 인한 도전이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뿌리가 깊지 못한 조선 최초의 세례교인 이승훈을 비롯해 이벽, 정약전, 권일신, 최필공, 최인철, 최인길, 최필제, 정인혁, 손경윤, 양덕윤 등이 배교하고 말았는데, 천주교의 이와 같은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성경 번역으로 시작된 후대 개신교 선교와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지 못한 가운데 천주교 선교가 진행되었으므로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한 까닭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