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한국 천주교 형성과 박해 [보존자료]

好學 2009. 9. 6. 18:48

한국 천주교 형성과 박해

천주교는 명대(明代)에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利瑪竇) 등 예수회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중국사회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당시 조선사회는 양란을 겪으며 사회변화에 대한 자각의 움직움 속에서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특히 연행사절단에 의해 서구 과학지식과 문물 수용이 이루어지면서 천주교가 조선사회에 전래되었다. 초기 천주교는 ‘신앙적 체계’보다는 ‘학문적 관심’, 즉 서학(西學)의 차원에서 조선사회에 수용되었다. 하지만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등 천주교 관련서적이 전해지면서 점차 종교로서 신봉되기 시작하여 급속하게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천주교의 확산은 전통적 유교사회를 동요시켰으며,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하는 보수세력으로부터 갖은 박해를 당하였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 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박해는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1839년 기해사옥(己亥邪獄),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를 거치면서 수많은 순교자를 낳았고 조선 천주교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적 열정과 고귀한 희생은 오히려 천주교의 확산과 성장을 가져왔다. 초기 천주교회를 주도했던 양반층과 지식인층의 역할은 점차 중하층의 일반 교인들이 대신하게 되었으며,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로 피신한 신자들을 중심으로 교우촌(敎友村)이 형성되면서 천주교 신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천주교리서의 유입
17세기 이후 조선사회에 중국을 통해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와 서양선교사들이 제작한 세계지도를 비롯한 서구과학문물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한역서학서가 유입되면서 천주교 교리를 담은 서적도 함께 들어왔다. 천주교서적의 유입은 주로 중국 수도인 북경을 방문하는 외교사절단인 ‘입연사행’(入燕使行)을 통해 이뤄졌다. 외교사절로 중국 북경에 갔던 조선 사신 일행 가운데는 북경의 천주당을 찾아보고 선교사들과 학문적·종교적 교류를 행하였다. 현실 비판적인 유학자들은 천주교 서적을 학문적 관심에서 주목하고 접근하였다. 이들을 통해 국내에 소개된 한역서학서 가운데 《천주실의》(天主實義)·《칠극》(七克)·《성세추요》(盛世芻璧)·《진도자증》(眞道自證) 등 천주교리서는 유교전통의 조선사회에 천주교 신앙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진도자증
프랑스 선교사 샤바냑이 북경에서 간행한 천주교 교리서이다. 천주교 교리 해설과 불교비판 및 천주교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던 중국인을 설득하고자한 내용으로 이뤄졌다. 18세기 후반 조선에 전래되어, 이기경(李基慶) 김범우(金範禹) 등 수많은 초기 천주교인이 돌려보면서 천주교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였다

교요서론
벨기에 선교사 베르비스트가 북경에서 발행한 초보적인 교리서이다. 천주의 존재, 천지창조, 영혼불멸, 천당지옥 등 천주교리가 12가지로 해설되어 있고 천주십계, 사도신경, 주의 기도, 성모송 등이 수록되어 있다. 1801년 신유박해 때의 기록인 《사학징의》에 한글본 《교요서론》이 언급된 것으로 보아 18세기 말 이승훈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세추요
예수회 선교사 매라가 중국에서 간행한 천주교 교리서로, 상벌편(賞罰編)·영혼편(靈魂編)·이단편(異端編)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주의 존재, 강생구속, 상선벌악, 삼위일체 등 이른바 4대 교리를 모두 담고 있다. 불교, 도교 및 중국의 민간신앙을 배척하고 천주교리를 옹호하는 호교론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취비훈몽
상해자모당장판(上海慈母堂藏板)으로 천주교 교리를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오른쪽은 이를 번역한 한글필사본이다.



역이충언 

 천주교신앙의 성숙

17세기 초입연사행(入燕使行)을 통해 호기심 단계에서 유입되기 시작한 서학 서적은 18세기 중엽부터 이익·홍대용 등과 같은 실용적 학자들에 의해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었다. 이 탐구 과정에서 서학의 사상적 근거로 등장한 서교, 즉 천주교까지도 수용하여 이를 실천하려는 학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권철신·권일신·정약용·정약종·이가환·이 벽·이승훈 등은 서학의 사상적 근거인 천주교 신앙을 직접 실천하고자 하였다. 주로 정치권의 소외된 기호(畿湖)지역의 남인계(南人系)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1777년 ‘서학교리연구회’를 조직하고 신앙실천에 나섰다. 권철신·정약용·이 벽을 비롯한 수명의 학자들이 천주교 교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광주군과 여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앵자산(鶯子山) 중턱에 위치했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라는 사찰에 모여 서학과 천주교 관계 서적을 연구하였다. 이들은 아침 저녁기도, 주일(主日)의 노동금지, 금육재(禁肉齋) 등 천주교에서 요구하는 몇 가지 계율을 지켜나가기 시작하였다. 천주교서적에 대한 학문적 접근에서 연구되기 시작한 천주교 교리는 이들의 신앙적 고백이나 실천으로까지 연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