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천주교신앙의 성숙 [보존자료]

好學 2009. 9. 6. 18:46

천주교신앙의 성숙

천주교신앙의 성숙
17세기 초 입연사행(入燕使行)을 통해 호기심 단계에서 유입되기 시작한 서학 서적은 18세기 중엽부터 이익·홍대용 등과 같은 실용적 학자들에 의해 학문적 연구대상이 되었다. 이 탐구 과정에서 서학의 사상적 근거로 등장한 서교, 즉 천주교까지도 수용하여 이를 실천하려는 학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권철신·권일신·정약용·정약종·이가환·이 벽·이승훈 등은 서학의 사상적 근거인 천주교 신앙을 직접 실천하고자 하였다. 주로 정치권의 소외된 기호(畿湖)지역의 남인계(南人系)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1777년 ‘서학교리연구회’를 조직하고 신앙실천에 나섰다. 권철신·정약용·이 벽을 비롯한 수명의 학자들이 천주교 교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광주군과 여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앵자산(鶯子山) 중턱에 위치했던 천진암(天眞庵)과 주어사(走魚寺)라는 사찰에 모여 서학과 천주교 관계 서적을 연구하였다. 이들은 아침 저녁기도, 주일(主日)의 노동금지, 금육재(禁肉齋) 등 천주교에서 요구하는 몇 가지 계율을 지켜나가기 시작하였다. 천주교서적에 대한 학문적 접근에서 연구되기 시작한 천주교 교리는 이들의 신앙적 고백이나 실천으로까지 연결되었다


령세명쟝
1790년 한국 최초의 신부 이승훈(李承薰, 세례명 베드로 白乭)이 정약종(丁若鍾)에게 수여한 영세명장이다. 영세자 이름, 생년, 세례명(위오사뎡)을 적었으며 좌측 하단에 ‘이승훈’의 낙관이 찍혀 있다
영세명부
18세기 말 잦은 박해에도 천주교회는 날로 성장하였다. 조선의 천주교인들은 정약종을 회장으로 한 ‘명도회’(明道會, ‘庚申會’라고도 함)를 만들어 교리연구와 전교활동을 하는 등 조직적인 교회활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1800년에는 교인 1만여 명으로 확장되었다. 이것은 1795년∼1800년간의 천주교인 명부로, 표제(表題)는 ‘망장’(忘葬)이다. 김범우(金範禹), 정약종(丁若鍾) 등 202명의 세례자 본명, 부모와 처의 이름, 거주지, 세례일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셩탄미상지셩경 
우리말로 간행된 현존하는 최고의 천주교 성경이다. 천주교 수용사에서 특징적인 것으로, 선교사 입국 이전에 성서가 먼저 들어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중요 유물이다

권철신 서찰
권철신 (權哲身, 1736∼1801)은 유학자이자 천주교인으로 교명은 암브로시오(Ambrosius)이다. 이익의 문인으로 남인계 학자들과 서학교리연구회를 가지면서 중국에서 전해진 철학·수학·종교 등을 연구하였으며, 이승훈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정약전·정약용·이벽 등 남인계 실학자들과 천주교 교리를 연구할 목적으로 1777년 '교리연구회'를 조직, 서학실천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유박해(1801년) 때 정약용, 이승훈 등과 함께 순교하였다.
경신회규범
경신년(庚申年,1800년) 주문모(周文謀) 신부 주도하에 정약종, 김건순 등을 중심으로 한 천주교 신도들이 서울에서 조직한 전도회의 규범이다. 경신회는 교리연구와 전교운동에 주력한 종교단체로 ‘명회’(明會), ‘명도회’(明道會)라고도 한다. 1801년 신유박해시 주문모, 정약종 등이 순교하면서 이 회의 활동이 중지되었다. 이 규범에는 교회 확장과 동회의 규범 및 회원 30명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주요 내용으로 천주(天主)를 지성으로 신봉하고
 성서를 익혀 외울 것, 매달 회집하여 강론 학구(學究)할 것, 천주의 박애 구세의 뜻을 전심전력하여 전할 것과 관아에서 탐문시 죽더라도 함구할 것 등 9가지 규범이 제시되어 있다.


천주교 성찬기

정약종 초상
조선후기 유학자이자 천주교 순교자인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의 초상화이다. 초기 천주교인의 유일한 초상화로, 같은 시대 천주교인이던 이희영(李喜英, 1756-1801)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정약종은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으로 우리 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학자라 할 수 있다. 정약종은 《주교요지》(主敎要旨)라는 한글교리서를 저술하여 초기 조선 천주교회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천주교 신앙 연구 및 포교에 힘쓰다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에 순교하였다.

견도
한국에서 서양화법으로 그려진 초기의 작품이다. 서양화의 전래는 17세기부터이지만, 서양화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부터이다. 처음에는 서양화의 음영법(陰影法)을 이용하여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희영(李喜英, 1756-1801) 때에 와서 완전한 서양화가 그려졌다. 이희영은 예수상(像)을 그린 사실이 발각되어 사형당한 천주교 신자로, 박해과정에서 천주교 성화를 주로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림 우측에 이희영의 약력과 이 그림이 서양화법의 효시임이 설명되어 있고, 좌측에는 이희영이 천주교 신앙으로 인하여 순교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