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시련과 박해
성리학을 숭상하던 조선사회에서 외래 종교사조인 천주교는 사학(邪學)으로 간주되었다. 1886년 한불조약 체결로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1백여년 동안 천주교인들은 잦은 공격과 박해를 받았고, 수천 명의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척사윤음
1839년 기해박해시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단정하고 박해에 대한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하여 헌종(憲宗)이 내린 윤음이다. 윤음은 오늘날의 유시(諭示)와 같은 의미로, 척사윤음은 1801년 신유박해시 순조(順祖)가 반포한 이래 1839년, 1866년, 1881년 등 네 번에 거쳐 반포되었으며, 천주교 박해의 법적 근거가 되었다
척사설
천주교 배척론으로, 회산(檜山) 황필수가 쓰고 그의 아우 황지수(黃芝秀)가 주해한 것이다. 유교입장에서 천주학은 ‘금수(禽獸)의 학(學)’이자 오랑캐의 학문이며, 하늘의 이치에 어긋난다는 등 천주교의 그릇된 점 10가지를 조목조목 비탄하고 있다. 그리하여 천주학에 물든 이들을 구제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유학(儒學)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사교금지공문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천주교인의 활동을 규제하는 공문이다
기해일기
1839년 기해박해시 순교한 천주교 신자 78명의 순교자전이다. 기해박해 당시 조선교구 주교 앵베르(L.Imbert)가 한양 교우회장인 현석문(玄錫文, 1797-1846)에게 의뢰하여 작성되었다. 병인박해(1866) 때 거의 없어진 것을 뮈텔(G.C.M.Mutel, 閔德孝) 주교가 어느 신자집에서 발견하여 보존·보충·정리한 것으로 후에 시복 자료가 되었다. 서울이라는 지역에 편중되어 있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천주교 순교 역사를 전하는 생생한 자료이다.
치명일기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을 지낸 뮈텔 주교가 순교자들의 시복 수속을 밟기 위해서 순교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순교한 877명의 순교자 행적이 담겨져 있다. 순교지별로 각 고유번호를 붙여 출생지, 신앙상태, 잡힌 날짜와 장소, 치명일자와 장소, 나이를 구분하여 간단하게 기록하였다.
벽이연원록
이익(李瀷) 선생 일가 사람들이 기록한 종교와 풍습에 관한 시(詩)와 논평(論評)을 묶어 편집한 것이다. '가학벽이연원록서'(家學闢異淵源錄序),'양학변상편'(洋學辨上篇), '벽사문'(闢邪文)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벽사문에서는 천주학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학문'이라 규정짓고 이단으로 배척하는 내용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사학징의
1801년 신유박해시 포도청 및 형조(刑曹)에서 취조당한 천주교 신자들의 진술과 판결문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사학징의’란 사악한 천주교를 징계하며 유교와 성리학의 가르침으로 다시 이끌어 들인다는 뜻이다. 내용은 “정법죄인질(正法罪人秩), 유배죄인질(流配罪人秩), 방면인질(放免人秩)”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유배자의 신분·직업 및 입신동기(入信動機), 신앙활동과 가족관계, 거주지, 체포일, 유배지 등이 수록되어 있다.
교황즉위기념메달
교황청에서 발행한 교황즉위 기념메달로 선교사들에게 주어진 것이 전해진 것이다.
순교자 기념메달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인 모방(Pieere Philibert Maubant, 羅伯多祿)·앵베르(Laurent Marie Joseph, 范世亨)·샤스땅(Jacpues Honore Chastan, 鄭牙各伯) 순교기념메달이다. 이들 세 신부는 1837년 서울에 들어와 활동하면서 교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이들은 1839년 기해박해시 스스로 순교의 길을 나서 한강 새남터 형장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되었다
척사문
천주교를 '금수지도(禽獸之道)'이자 사학(邪學)으로 규정한 내용과 이를 배척하는 이유 여섯 가지(①褻天 ②背親 ③負國 ④亂甁 ⑤斃祭 ⑥埋主)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