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역사)韓國敎會史

세계교회사에서 한국교회사까지

好學 2009. 9. 6. 18:41

세계교회사에서  한국교회사까지

 


 

1 세계 교회사

4.1.1 초대교회에서 중세교회까지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시어 인류의 구원을 준비하셨고 결정적으로 당신의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 주심으로써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만민을 구원에로 이끄시기 위해 교회를 세우시어 그 사명을 계속해 나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래서 교회는 그 시작부터 전 인류에게 하느님의 구원이라는 복음을 알리기 위해 그 사명을 계속해 왔다. 그 사명 수행을 위한 파란 만장한 삶, 그것이 곧 교회의 역사인 것이다.


 

1)초대교회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예수님과 직접 살았던 12사도시대와 직접 체험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신앙을 본받아 계속해 나간 사도 후 시대로 나누어 살펴볼까 한다.

① 사도시대

예수께서는 당신이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마태 28,19)고 명하였다. 예수님의 이 명령에 따라 12사도들과 다른 제자들은 자신들이 살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전교를 해 나가기 시작한다. 사도들이 지중해 근방 여러 나라에 복음을 전파해 나가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첫번째는 유대교와의 마찰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율법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모세 이후 율법은 그 본래적인 의미보다는 법 자체를 지키는 것으로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하지 못한다는 안식일법, 죄인, 병자들과는 따로 살아야 하고, 접촉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건주의,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식의 탈리온법(복수동태법), 이스라엘만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의식, 로마를 전복시키고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만이 유일한 구세주라는 의식 등을 들 수 있다.

둘째는 근동지방의 문화입니다. 당시 지중해 연안의 지방들은 그리스 철학과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살아가는 다신교의 사회였고 따라서 그런 생활에는 많은 미신적, 기복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분의 차이가 엄격하여 노비, 평민, 귀족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신분들로 인식되어 있었다.

셋째로는 당시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의 지배체제이다. 로마는 많은 나라를 다스려 나가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도 이념이 필요했고 또 당시는 잡신숭배로 사회질서가 혼란스럽고 사치가 심해 있는 상태여서 황제를 숭배하라고 강요함으로써 질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이런 상황아래에서 신분의 차이 없이 서로 평등하다고 주장하며, 남녀노소 신분의 차이를 두지 않고 함께 모여 기도하며 가진 것을 서로 나누고 사랑을 실천하며 산 그리스도교인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반대 받는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죄인과 병자 빈자와 소외된 자들을 찾아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들까지 복음을 전하며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흠숭하며 잡신과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모습들은 다분히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눈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무리요, 음탕하게 사는 무리요 반역을 꾀하는 무리와 같이 취급받게 되어 많은 고난과 박해를 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로마에는 이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흔적들 즉, 원형경기장, 십자가 형틀, 사자우리 등을 찾아 볼 수 있다.

②사도 후시대

첫 순교자는 스테파노(사도 7장 54)였고 대표적인 박해자는 사울(사도 8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박해의 와중에서도 그리스도는 힘이 되어 주셨고(사울의 개종;사도 9장), 이에 힘입어 교회는 그 사명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베드로와 바오로 역시 로마에서 순교하였고 다른 많은 신자들이 로마 시민들 앞에서 무참히 죽어 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당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희생을 치르게 되지만 당시 로마의 부패에 반해,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사회에 정의와 평화를 심는 그리스도의 삶, 그리고 그 삶을 본받은 순교의 삶이 가장 가치로운 삶임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더욱 열렬히 자신을 투신해 나갔으며 박해의 상황하에서도 신자들은 점점 늘어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200여년 간의 긴 박해를 거치고 313년 드디어 콘스탄틴 황제에 이르러 박해가 종식되고 국교로 승인을 받게 되는 승리를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국교가 된 교회는 이제 더욱 활발히 수도원을 창설하고 교회공식회의(공의회)를 만들어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이단에 대항하며(대표적인 예 ; 아리우스주의) 교회를 수호 번창시켜 나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2) 유럽교회로 확장

5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붕괴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왜냐하면 유럽북쪽에 있는 게르만 종족들이 남으로 대이동을 함으로써 침략과 약탈을 자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본래의 사명을 잃지 않고 게르만 부족들을 개종시켜 나간다.

그런데 이 때 앞에서 언급한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단죄 받고 쫓겨나 게르만 부족을 개종시키는데 프랑크족 외에는 거의 모든 부족들이 아리우스 파가 되어 상황은 가톨릭 교회에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사실 당시 가톨릭은 프랑크 족만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에 다른 부족이 게르만족을 통일하게 된다면 그리스도교는 붕괴되고 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프랑크족이 게르만족을 통일하고 유럽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강력한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순탄하게 유럽전역을 그리스도교화 해 나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후 620년경 중동에서 모하메트에 의해 회교가 일어나는데 회교는 '한 손에는 코란을 한 손에는 칼'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강제적인 선교를 해나감으로써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 중심의 모든 그리스도교가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키도 한다. 이상과 같이 초대교회는 200년간의 박해와 많은 이단, 민족의 대이동 등으로 숱한 고난을 겪기도 하지만 프랑크 왕국을 통한 유럽통일로 그리스도교가 유럽전체에 뿌리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로마를 거쳐 유럽전체로 퍼질 수 있었다는 것은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앙공동체가 순교까지 감수하며 그리스도를 전했다는데 있으며 무엇보다 이 사실은 교회가 인간이 세우지 않았고 하느님께서 이끄시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역사라는 것이다.


 

3)중세교회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여 유럽전체에 그리스도교가 정통종교가 됨으로써 외적으로는 교세가 확장되고 교황을 중심으로 통치하는 지역(교황령)이 생겨나는 등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국가 권력에 힘입어 교회가 성장하게 됨에 따라 차츰 황제가 교회에 간섭을 가하게 된다.

이리하여 교회는 점점 속화되고 그 힘을 잃어 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다 9세기말에 이르러 바이킹족을 중심으로 하는 해적들과 이슬람민족은 유럽을 침략하게 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유럽사회는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국가의 권위도 약해지게 된다.

이런 사회풍조에 따라 당시 교회 안에서도 신앙의 본질이 흐려지게 된다. 이런 어려운 분위기 안에서 교회는 이제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의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종말을 잘 준비하기 위해 교회 본연의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와중에 교회는 많은 아픔을 겪게 된다.

① 먼저 동서방 교회의 분열

당시 교회 안에서는 로마 가톨릭과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간의 미묘한 신학적 논쟁으로 충돌이 벌어진다.

동방교회는

* 성령의 성자예속설, 즉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아니라 성령은 그리스도에 의해 보냄 받은 분으로써 그리스도에 예속된다는 주장

* 누룩이 든 빵이냐 누룩 없는 빵이냐?로 서로 논쟁

* 교권시비, 즉 로마교회 주교인 교황에게 수위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에 따라 로마교회는 정통교의를 옹호하기 위해 동방교회와 열띤 논쟁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1054년 교황이 파견한 교황대사와 동방교회가 서로를 파문함으로써 동서방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서로 분리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상태가 900년간 지속되어 오다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와서야 서로의 파문을 철회함으로써 새로운 일치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② 성인공경, 성상 및 성화상 공경

초대교회 이후 종교자유를 누리며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게 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에 그분의 삶을 가장 잘 본받아 살았고, 죽음으로써 그 삶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신앙생활에 있어 최대의 영광이라 생각하여 순교자들을 공경하는 신심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순교자들의 무덤을 찾는 신자들, 순교자들의 유해를 공경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성상이나 성화를 통해 신앙을 키워 나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순교자들을 본받고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될 신자들의 신심이 하느님은 뒷전이고, 점점 유해 성상, 성화 그 자체를 절대시하고 그것들에 복을 비는 미신의 풍토로 전락되어 가는 경향이 짙어져 갔다. 이리하여 교회 내에서는 이것에 대한 우려와 토론 등이 일어났고 마침내 교회회의에서 성인, 성상, 성화 공경의 의미를 명확히 해 줌으로써 논란이 끝을 맺게 된다.

사실 성인공경이란 그분들이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준행하였고, 그래서 이미 천국에 든 그들에게 신자 자신들도 하느님의 뜻을 더 잘 실천하고 성화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전구해 달라고 기도하며 또 그분들의 삶을 본받아 더 잘 살아보자는데 의미가 있다. 우리가 성당에서 보게 되는 십자고상, 마리아상, 성요셉상, 십자가의 길 등은 그것들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의 의미를 깨닫고자 함이지 그 자체를 숭배함으로써 그것들에게서 복을 얻고자 함은 아닌 것이다.

성모송을 보더라도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간구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지 성모님께서 직접 복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절대시하고 숭배하는 경향들은 참된 신자의 삶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③ 교회의 암흑기

9세기 末에서 10세기까지 교회는 정치적으로 황제의 권위아래 눌려지내게 되었고 따라서 국가는 직접 주교나 신부를 자기들 마음대로 임명하고 해고하는 일을 자행하게 된다. 그래서 정식교육과 자격 없이도 그들의 심복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아무나 주교나 신부에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런 지도자들로 인해 교회는 참된 신앙을 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고,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부패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를 우리는 교회의 암흑시기라 한다. 암흑기를 맞은 교회는 스스로 쇄신을 부르짖게 되는데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이 수도회다. 대표적인 것이 베네딕도 성인이 일으킨 베네딕도(분도)회로 이들은 영주들의 앞잡이가 된 주교나 신부가 교회의 본연의 삶을 살아 주지 못함에 반해 소외된 빈자와 죄인들을 스스로 찾아가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회개를 전하며 교회의 참 정신을 심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교황청에서는 국가권력으로부터 교권을 분리시키는 시도를 하기 시작한다. 당시 이 시도는 교회 내에서 시작되었지만 부패하는 교회를 걱정하고 있던 전 유럽국민들에게 공감과 지지를 얻게 되어 공통관심사가 됨으로써 매우 큰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급기야 그레고리오 7세 교황 때 교권의 분리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명실공히 교황권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황금시대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시행착오, 그리고 고통과 희생을 당해야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2세기 말에서 13에 이르러서는 이제 전유럽에 교황권이 강해짐으로써 세속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그래서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국제적 분쟁까지 교황이 직접 나서서 중재하고 해결하는 역할까지 담당하게 된다.

이런 전성기를 맞으며 교회는 당시 이슬람교도(회교도)에게 빼앗긴 성지 이스라엘을 되찾고자 하는 염원이 생겨난다. 이것이 곧 십자군 운동이다. 이 운동은 당시 성직자와 신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게 되고 1096년 제 1차 원정으로 시작하여 1270년 8차에 걸쳐 탈환이 시도된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처음의 좋은 의도와는 달리 기사들의 명예욕과 모험심이 심해지고 또 많은 나라가 참여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위한 이권다툼이 생겨나 결과는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이교도들에 의해 성지가 점령당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운동은 이런 세속적 욕심이 개입됨으로 인해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광포함과 잔인함을 보여주기도 한 중세의 아픔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후 교회는 폭력보다는 사랑과 가난한 이와 함께 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교회 쇄신을 해 나가게 된다.


4.1.2 교회의 쇄신 (종교개혁과 현대교회까지)


 

1. 종교개혁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중세교회를 마감하고 새로운 교회쇄신의 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은 종교개혁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속된 모습을 보였을 때마다 그 내부에서는 개혁의 외침과 쇄신의 움직임이 있어 왔었다.

그런데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교회 쇄신으로서의 종교개혁은 1500여년 동안 전승, 보존되어 온 그리스도교신앙을 근본적으로 파괴하였고, 1504년의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결별이후 다시 한번 그리스도교 세계를 오늘날까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갈라놓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① 원 인

중세말기의 사회는 산업화의 영향으로 농촌이 붕괴되고 도시로 사람들이 집중하는 현상을 보이게 되자 농촌과 도시의 격심한 빈부차를 겪게 된다. 그리고 반면 교회는 이제껏 가지고 있던 토지들로 인해 그들에 비해 부유한 상태에 있었다. 한편 국가는 또 국가 나름대로 국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세금을 많이 거두어들이고 교회의 재산을 은근히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영주들은 세금을 채우기 위해 농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되었다. 그렇게 되자 당시 몰락 중에 있던 기사계급과 농민 계급이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게 되며 상대적으로 부유한 교회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고 모든 속박과 권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인문주의 사조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결정적으로 교회는 불만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교회에서는 성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시작하는데, 그 큰 공사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전대사를 발표하고 교우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럼 여기서 전대사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교회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이 진정으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에게 고해성사를 통하여 죄를 사해 준다. 그러나 죄를 용서받았다고 해서 그 벌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다른 사람의 돈을 훔쳤는데 그것을 돌려주지 않았다면 고해성사를 통해서 그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있지만 돈을 돌려주어야할 의무는 여전히 남는 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잠벌이라 하는데 이 잠벌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보속을 통하여 사면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현세에서 다하지 못한 경우 연옥에서 치러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보속을 면해주는 것을 대사라고 합니다. 대사는 특별한 시기에 교황이나 주교들이 줄 수 있는 것으로, 대사의 근거는 그리스도와 성인들이 쌓아 놓은 공로의 보고에 있는 공로를 교회의 권리로 각 영혼들에게 나눠줄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대사를 받기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참회)이고 이 회개를 위해서 생활을 개선하고 속죄의 행위로써 자신을 다듬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 대사발표가 너무 잦았고, 사람들 중에는 전대사의 본래적인 의미를 변질시켜 그것을 돈벌이의 계기로 삼으려던 자들이 많아, 그 폐단이 사람들 사이에 비난거리가 되기 시작하였다. 15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대사가 교회의 주요 수입원으로 오용되어 설교가들은 모금의 성공을 위하여 대사의 효과를 너무 과대하게 설명하기에 이른다.

이런 과정에서 무지한 신자들은 대사를 받으면 곧 구원받는 것과 똑같다는 것으로 오인 대사 부여를 약속하는 성사표가 곧 천국행 티켓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신자들은 이것을 얻기 위하여 대사를 얻기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내적 회개는 등한시하고 돈만 내면 구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잘못 인식된 교리가 중세 말기의 지배적인 견해였고 여기에 근거한 대사시행과 대사 판매행위는 비난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런 과장되고 잘못된 교리를 선포한 적이 없다. 문제는 대사발부의 남용입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는 잘못된 대사시행에 대한 개혁의 소리가 높았고, 대사의 본래적인 의미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② 경 과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으로 볼 때 루터가 대사교리에 대한 토의를 제기하기 위해 95개조에 달하는 반박문을 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의 교리는 정통교리에 위배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교리는 성서만으로(Solla Scriptura), 신앙만으로(Solla Fidei), 은총만으로(Solla Glatia)를 주장하였습니다.

풀어 보면 성서해석에 대해 교회가 규제하거나 따로 인준할 필요가 없고 오직 성서 그 자체만이 유일한 말씀이라 하여 누구나 성령의 인도에 따라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노력할 필요가 없고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구원은 하느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인간에게는 다만 신앙(믿음)만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것은 결국 교회의 교계제도와 성사들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으로 구원예정설(칼빈)도 나오게 된다.

③ 결 과

이것은 전통신앙의 기저를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리스도교계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분리시키는 종교개혁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를 필두로 하여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와 칼빈이 종교개혁을, 그리고 재세례파의 급진적인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고, 영국에서는 국교회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이 대사논쟁으로 인해 루터는 불행히도 가톨릭에서 파문 당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구교(가톨릭)와 신교(프로테스탄트)로 나뉘게 되는 역사를 맞게 되는 것이다.


 

2)가톨릭의 개혁

가톨릭은 15세기 초부터 교회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느껴 오던 중에 루터의 종교개혁을 계기로 교회의 내적인 쇄신과 정화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 여러 공의회를 거치면서 교회 쇄신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지만 제대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쇄신을 위한 공의회를 열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져 갔다. 그래서 마침내 1545년에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함으로써 교회내 전 부분에 걸쳐 개혁을 달성하게 된다.

이 공의회는 타락한 교회의 구성원들에 대해 반성하면서 신학과 교리를 재정리하고 교회규율을 혁신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서만으로라는 사상을 배척하고 성서와 성전이 신앙의 원천이라고 규정하였으며, 성서해석권은 교회만이 갖는다고 천명하였고, 또한 은총의 절대성과 구원예정설 배척하고 원죄와 의화 교리, 성사규정을 명확히하였다.

그리고 대사규정을 만들어 규제하고 옛날의 엄격한 보속 규정 폐지(초대교회부터 있어 온 것으로 대사 받기 위한 엄한 규정을 완화하여 신자들이 대사를 받기 위해서는 신자로서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하고, 성당참배를 하며 교황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여야 한다고 규정함. 중요한 것은 대사는 벌을 면할 수는 있어도 죄를 면할 수는 없다는 것)을 폐지하였다.

3)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가톨릭 교회사

종교개혁의 영향, 가톨릭 교회 내의 쇄신노력 등으로 가톨릭 교회내에서도 신자 스스로의 쇄신과 교회성직자들의 생활 쇄신이 있었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새로운 수도원이 세워지고, 교회의 고유한 정신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개혁정신은 선교활동에서 잘 나타난다. 종교개혁 전까지는 유럽을 중심으로 하던 교회선교가 항해술의 발달에 힘입어 전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계몽주의와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교회는 유럽에서 그 권위를 상실하였고 세속화되어 갔다. 그러나 이런 교회의 세속화는 교회가 스스로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자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부유한 교회에서 가난한 교회의 모습으로 바꾸었으며 교회와 국가를 엄격히 구별하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교회는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성직자를 중심으로 하던 교회를 신자들 중심의 교회로 바꾸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무엇보다 1962에 열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하여 화해와 쇄신을 통한 교회가 인류의 복지와 평화와 구원을 촉진시킬 수 있는 교회로 되기 위한 공의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는 급변하는 현대세계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여 시행하고 있으며, 동시에 다른 그리스도교와 타 종교와의 대화를 통한 일치의 길을 모색하고, 그 일을 진행하고 있다.

4.2 한국의 교회사

먼저 조선에 천주교회가 들어오게 되는 세계사적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면, 당시의 세계 교회의 상황은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세계에로 향한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도미니꼬회, 프란치스코회, 예수회 등의 수도회가 창설되어 선교사명을 펴 나가고 있었으며, 이웃 중국과 일본에도 이미 천주교가 전래되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일본을 통해 조선에 천주교 전파를 시도하지만 별 진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은 이 때 당시 주자학을 건국이념으로 하는 유교를 국교로 삼고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큰 나라로 받들면서 일년에 몇 차례씩 사신을 보내 우호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이를 부연 사행이라 하는데 이를 통해 중국문물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4.2.1 천주교의 전래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조선 후기인데 이 때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당쟁으로 인하여 정치질서가 문란해진 시대였다. 경제적으로는 농민이 점점 많아지는 세금수탈로 인하여 노비로 전락하는 예가 많았고, 상업이 발달하여 어려워진 농민이 도시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찾아 시도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양반과 상인이란 계급에서 양반, 중인, 상인, 노비의 네 신분으로 세분화되었고, 18세기 후반에는 양반이 전체 인구의 40-50%에 달하였다.

이처럼 천주교가 신앙화되기 시작하던 조선후기는 국가의 지배체제와 통치능력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던 때였고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때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이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말로만 껍데기의 학문이라는 것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리하여 정치에 회의를 느끼고 속세에 묻혀 살던 학자들은 허(虛)의 학문이 된 성리학적 유래에 대하여 실(實)의 학문을 찾게 된다. 이것을 실학운동이라고 합니다. 이 실학운동이란 실생활에 기여할 수 있는 학문을 말한다.

성호 이익을 중심으로 하는 학자들이 이른 문제를 고심하며 중국의 사신을 통해 들어온 책들을 연구하던 중 한계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상제의 문제였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우주만물이 생명을 가지고, 생명을 지속하는가? 그리고 이런 세상의 모든 질서를 주관하는 분은 누구인가? 라는 의문을 말한다.

그들은 그런 문제들을 연구하다 보니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실의 칠극 등의 책에서 그 해답을 얻게 된다. 이 책은 중국에 전래된 천주교를 중국 글로 정리한 것으로서 그들은 이를 통해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하여 이것을 인간의 삶에 있어 참 진리라 생각하여 학문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신앙 실천운동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1) 신앙공동체의 탄생과 첫 탄압

그러나 신앙 실천운동을 전개하다 보니, 교리 서적의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이벽은 동지사(부연사행 중 하나)편으로 북경으로 파견되는 그의 친구 이승훈에게 북경 천주당에 가서 성직자를 만나고, 교리서적을 얻어 올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이승훈은 북경천주교회에 찾아가 그곳 신부와 대화하며 이를 상의하던 중 스스로 세례 받기를 청하여 천주교 신자가 된다. 그리고 많은 교리서적과 성물을 가지고 1874년 봄에 귀국합니다. 그리고 이벽과 합심하여 전교하고 세례를 줌으로써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초기에 세례 받은 신자들로는 권철신 권일신 두 형제,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이 처음 모임을 가진 곳이 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인 중인 계급의 교우 김범우의 집인데 이를 명례방이라 부른다. 그들은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지곤 했었는데, 1785년 형조관리들이 순찰를 돌던 중 우연히 발견되어 양반계급 모두는 훈방 조치되고 중인이었던 김범우는 고문을 당하고 귀양가서 바로 그 해에 사망하게 된다.

(이 사건을 을사추조적발사건이라 한다) .

(2) 가성직 제도에 의한 자치적 조선 교회

성직자가 없었던 초대 조선교회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활성화하기 위하여 임으로 성직계급을 정하고 성무 활동을 하였다. 이를 가성직제도라 하는데, 그들이 교리를 연구하다 보니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북경성직자들에게 편지로 문의하여 확인한 그 답으로 시행해 오던 가성직제도를 폐지할 것과 조상제사를 금한다는 답서를 받게 됩니다. 이에 그들은 하던 모든 성무 활동을 중단하고 이때부터 중국에 진짜 성직자를 파견해 달라고 청하기 시작한다.

(3) 외국인 신부의 입국과 활동

조선교우들의 성직자 요청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파견됩니다. 그는 명도회라는 평신도 단체를 조직하여 교리를 익히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로 인해 신자들이 입국당시 4,000명에서 배인 10,00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 후 정부로부터 박해를 당하여 첫 성직자를 잃게 되고 그 후속으로 파견되는 외국인 신부들은 많은 활동을 하게 되지만 시국을 위태롭게 하고 사악한 종교를 퍼트려 민심을 흉흉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잡혀 많은 이들이 순교하게 된다.

이는 당시 정권을 쥐기 위해 각 파간에 당파싸움이 그치질 않았고 천주교인에게 우호적인 파가 정권을 잡으면 조용했고, 그러다 반대파가 정권을 잡으면 천주교는 박해로 희생되어 가게 된다. 그러나 조선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조선 소년 3명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 방인 사제를 양성하기도 하고 또 어려운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하는데 잠시도 쉬지 않고 열정을 불태운다. 그리하여 모진 박해 속에서도 산 속으로 피해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결과 1886년 드디어 종교의 자유를 얻기에 이른다.

 

4.2.2 박해의 역사적 배경과 주요 원인들

우리는 여기서 조선교회가 박해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과 그 박해의 결과로 얻어진 것들에 대해 알아볼까 한다.

(1) 유대교 전통과 충돌

초대교회가 유대교 전통과 충돌하면서, 그리고 지중해 연안의 전통과 문화와 충돌하면서 박해를 당하고 그러면서도 그것을 이겨내고 신앙의 자유를 얻었듯이 우리 나라에서도 천주교라는 생소한 종교는 조선의 전통과 충돌하고 또 당시의 시대적 혼란으로 인해 잘 수용되지 못하고 박해를 당하게 된다. 박해의 가장 큰 원인은 당시의 정치적 혼란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유교의 전통에 위배되는 사항들 즉 조상제사거부, 가족과 관계,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보면, 각 파벌간의 정치적 갈등이 많았다. 지금 우리 나라에 영 호남의 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당시에도 남인파(시파)와 북인파(벽파), 그리고 노론 소론 등 각 파벌이 형성되었고 왕이 바뀔 때마다 왕이 비호하는 세력들이 정권을 잡고 자기 반대파들을 모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를 사색당파 싸움이라고 일컫는다. 그리하여 천주교는 이들의 싸움에 정치적 희생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2) 유교의 전통과 그리스도교 평등사상과 의 충돌

다음은 당시 조선의 중심사상이었던 유교의 전통과 그리스도교 평등사상과 의 충돌이다.

유교사상은 주자가례를 중심으로 엄격히 계급을 구분하여 주종의 관계를 유지하였고, 그리스도교는 양반 상민 천민 할 것 없이 모두 평등하게 생활해 나갈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공경은 유교의 효도관과 상충되어 부모보다 하느님 동경을 먼저 생각함으로 충돌을 빚고, 한편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당시의 관념에 비해 천주교는 남녀 모두 동등한 인격체로 보아 남편과 아내가 주종의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를 주장하였으며, 과부의 재혼도 허락할 뿐 아니라 여자가 강제로 결혼 당하는 것을 반대하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천주교의 평등관은 당시의 사회 위계질서를 혼란에 빠트리고 파괴시키는 요소로 간주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 조상의 제사문제

다음으로는 조상의 제사문제인데, 이 문제는 한국천주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고 서도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유교의 인(仁)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유교는 효를 통해 인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효에 따라 그 사람의 사람됨됨이를 파악했고 따라서 효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유교의 효의 정신은 가장 귀중한 생명과 지극한 사랑과 은혜를 조건 없이 주신 생명의 근원인 부모와 선조께 감사를 드리는데 있었다. 그래서 죽은 부모도 생시와 똑같은 방법으로 공경함(제사)으로써 그 효를 다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천주교인들은 제사를 거부함으로써 이 효를 거스렸던 것이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천주교인은 사람도 아니요, 파렴치한 짐승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4.2.3 결과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들로 인하여 조선교회는 그 출발부터 정부와 국민들에게 주목받지 않을 수 없었으며 무려 100여년 간에 걸친 모진 박해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교의 전통에 있어 부모와 조상에 대해 예를 다함은 좋지만 혼을 모시는 신주(지방, 위폐 등)을 모시고 그것에 감사하고 복을 기원한다는 것은 천주교에 있어서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일인지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정부로서는 사회질서에 위기와 혼란을 초래하고 국가를 반하는 요소로 인식되었기에 박해를 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남녀, 양반과 상민이 위계질서 안에 서로 뭉쳐 살아감은 좋지만 만민이 남녀 또 양반, 상민 할 것 없이 평등하다는 것은 기정의 사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진 박해에도 하느님의 진리를 지키고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그 순교를 체험한 당시의 의식 있는 학자들이나 관리,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새로운 충격이었고 삶의 참 진리라 인식되었기에 순교를 하면 할 수록 더욱 신앙인이 불어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을 위해 죽은 순교자들의 죽음은 신앙적 행위였을 뿐 아니라 사회체제에 대해서 사상통제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역사적 행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모진 박해를 이기고 신앙의 자유를 얻는 승리의 결과를 가져올 서 있었던 것이다.

4.2.4 조선말기와 일제시대의 교회상

조선말기에 들어 조선은 쇄국정책을 풀고 불란서와 한불조약을 체결되면서 외국인 성직자들이 한국에 들어와 자유로이 활동하게 되었다. 이 때 본당이 설립되고 공소(성당보다는 규모가 작고, 또한 성직자가 없는 곳)조직이 이루어지면서 한국교회는 활기를 띠었다. 그리고 비밀리에 원산 부흥골에 있던 신학교를 용산으로 옮기고, 1888년에는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고아, 병자, 노인들에게 구제사업을 벌렸다.

수녀회의 사업은 한국에서의 최초의 사회사업이었다. 1898년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교우들이 모임을 가졌던 명례방 김범우의 집터에 명동성당이 완공 축성되었다. 이 후 각종 잡지가 발간되고 학교가 건립되어 복음전파 뿐 아니라 조선에 근대화에 이바지하게 된다. 그러나 조선이 막을 내리고 일제에 의해 지배를 당하게 되자 학교가 일부 폐교되고 언론을 통제 당하는 등 다소의 박해를 받기도 하지만 교회는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고 애국계몽운동을 해 나감으로써 대응하게 됩니다.

그 예를 보면 안중근 의사, 독립단체를 조직한 이기당, 3.1운동 당시 서울의 '예수 성심학교'와 대구의 '성 유스티노 신학교'의 학생들 중 만세 운동에 참가하여 퇴학당하고 서품이 보류된 신학생들, 만주의 천주교 신자단체가 주축이 되어 활동한 '의민단' 등은 교회의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의 연장선상에서 민족사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4.2.5 현대의 한국교회

조선에 한국천주교회가 들어오면서부터 시작한 인권회복운동, 개화 운동, 근대화운동 등을 통한 복음화의 정신은 역사를 거듭하면서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1960년대부터 활발해진 경제개발 원조, 1970년대의 가톨릭 농민회 운동, 부산교구의 무주택 서민들을 위한 주택분양(800 가구), 무엇보다도 큰 영향을 끼친 '신용협동조합운동' 등이 있다.

그리고 전국에 370여개 소에 이르는 사회 복지 기관들(1989년 통계) 등은 우리 민족사회를 위해 기여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그리고 한편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노력도 들 수 있습니다. 정부가 설립되면서부터 자행된온갖 비리와 부조리를 고발하고 이 나라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 예를 보면 79년 농민탄압을 위한 조작사건인 오원춘 사건80년대의 민주헌법 쟁취 노력, 학원안정법 시행 반대 운동,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 민주화를 위한 기도운동 등을 통하여 87년 6,29선언을 유도해 내는데 한 몫을 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한국인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자발적으로 세워진 교회이다. 이는 인류 역사상 어디를 찾아보아도 유래가 없는 일이다. 외국선교사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 교회를 세우게 되었던 것은 결코 기적적인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의 설립은 진리를 향한 열정 속에서 자치적으로 생겨났고, 신도들은 교회를 지키고 확장시키는데 있어서도 열정적으로 나섰으며,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열렬한 신앙 운동을 폈기에 이룩할 수 있었던 승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들은 한국의 전근대 사회에 있어서 개인의 양심과 인격, 그리고 그 존엄성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으로 표출되었다.

그리하여 천주교의 신앙은 이 땅에 평등사상을 새롭게 심어 사회적 불평등을 배격하였고 박해의 혼란기에는 인간양심의 중요성을 교육하였다. 또한 일제하에서 교회생활의 연장선상에서 자신의 삶을 불태운 애국지사들과 많은 신도들도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 교회는 사회개발과 복지 그리고 정의 사회구현을 위해 노력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사명과 역사적 결과를 유산으로 안고 있는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 안에서 이와 같은 노력들을 계속해야 할 사명과 민족의 복음화 사명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