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書槪論/[신약성경개론] 개관

고린도전서:The First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

好學 2009. 8. 24. 10:07

고린도전서:The First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

 

[영] The First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The First Letter of Paul tothe Corinthians)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중의 1서.

 

1. 고린도와 고린도 교회-고린도는 바울시대에는 인구 670만으로 말해지고 있던 그리스(희랍)의 대도시로서, 상업의 중심이었고, 각국의 인종이 모여 있었다. 또 학문도 대단히 성해,당시의 역사가는 [철인(哲人)을 만나는 일 없이 고린도의 거리를 다닐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상숭배가 성행하여, 도덕적으로 아주 퇴폐해 있었다. [고린도인의생활]이라고 하면 방랑생활의 대명사로 씌어질 정도였다. 이 도시에 바울이 온 것은 제2차전도여행 때로(행 18:1-8), 그 체제 기간은 기원 51년 9월에서 53년 2월까지인데(DavidSmith에 의함), 그 동안에 이 교회가 세워졌다. 바울은 아덴으로 부터, 실누아노, 디모데와같이(행 18:5,고후 1:19) 이 고린도에 와서 젊은 부부신자인 아굴라와 부리스길라의 집에유숙하며 이들과 같이 천막제조에 종사하면서 복음을 전함으로써(행 18:1-4), 이곳 교회의창설자가 된 것이다(고전 4:12,9:1이하, 고후 11:7-9). 바울이 떠난 후, 아볼로가 이곳에 전도하러 오고, 또 유대교의 일파가 침입해 와서, 교회내에는 여러가지 분파 분쟁이 생겨났다.게다가 이 도시의 폐풍이 교회내에 까지 스며들어와,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이 교회는,바울이 세운 교회 중 가장 큰 것이고, 또 문화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던 중요한 것이었는데,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이상과는 거리가 심히 멀어, 바울은 이 교회로 인해 몹시 고생했던 것이다.

 

2. 본서의 저자와 쓴 때와 장소-본서가 바울의 저서임을 의심하는 자는 거의 없다. 그가 제3차 전도여행의 도상, 2년 이상 에베소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편지를 고린도에 보냈다(고전5장 9절의 [내가 너희에게 쓴 것], 즉 [전에 쓴 편지]란 이것을 가리키고, 없어져 현존치 낳는다). 그 편지의 회신으로서 여러가지 일을 질문해 왔다. 그 질문에 대답함과 함께, 또한당시 고린도에서 온 [글로에의 집 편](1:11)으로 교회의 분쟁 기타에 대해 듣고, 그것을 경계하기 위해 쓴 것이 이 편지이다. 때는 기원 54(53년에서 55 사이로 보는 이가 많다)년경으로서, 바울이 52(-3)세 되던 무렵으로 말해지고 있다.

 

3. 본서의 특징-본서는, 고린도 교회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킨데 대해 바울이 실제적으로 준 글이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골로새와 달리, 교리를 주도하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실제적 해결을 준 것이다. 그것돠 동시에, 모든것의 중심적 보편적인 원리, 영원적인 진리를 지적하는 일을 잊지 않고 있다. 특히 이교 사회의 한 가운데 놓여진 교회의 고민, 싸움, 실패와 승리를 솔직하고도 적나라하게 서술한 문서로서 본서는 독자적 의의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다시, 이러한 교회에 대하여, 바울이 얼만 총명하게, 친절하게, 또는 힘차게 지도와 해결을 주었는지를 아는데 있어서, 이 편지는절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가장 진실한 의미에서, 바울의 [목회서간]인 것이다. 그리고 본서는 종교문학으로서도 뛰어나 있다. 사랑의 찬가(13장), 부활론 (15장) 같은 것은,종교문학상의 절품(絶品)이라고 할 것이다.

 

4. 본서의 개요-바울은 본서에 있어서 다른 서신에서와 같이, 먼저 인사의 글을 쓰고(1:1-3),다음으로 고린도 신자에 대한 감사의 말을 써서(1:4-9), 본서의 서신으로 하고 있다. 바울은이 편지로서 고린도 신자를 훈계, 지도하는 의미에서 쓴 것인데, 그럼에도 그들의 장점을 들어 감사하고 있는 것에 그의 심정의 후덕(厚德)이 잘 보여져 있다. 다음으로 이제는 본론에 들어가, 먼저 그들의 분쟁을 지적하며 그들이 인물 숭배에 빠져 있음을 경계하고, 다만 십자가의 복음에만 의지할 것을 가르친다(1:10-4:21). 바울은 글로에의 집사람에게서 교회중에 분쟁이 있고, [나느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는 당파적 분쟁에 교회가 빠져 있는데 대해, 복음이 중심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는 것으로서, 교묘한 지혜나 총명에 있지 않음을 역석하고, 또 바울도, 아볼로도 다 하나님의 동역자인 것으로, 모두는 그리스도의 것,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여 분파당쟁을 배제하려 하고 있다. 다음으로 교회의 성결을 명하면서 제5장에서는 교회내에 일어난 간음사건을,제6장에서는 소송사건을 취급하여, 그러한 것에 대한 교회의 올바른 처치를 교시하고 있다.즉 전자(前者)에 대해서는 해당자의 파문을 명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교회의 중재 재판을 시사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전이고, 신자는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되어 그리스도에게속한자, 성령의 전이다. 그러므로 죄에서 피하여, 성도의 열매를 행위로서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다음으로 고린도 신자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1) 결혼생활에 대한 문제(7:1-40), (2) 우상에 대한 문제(8:1-11:!)에 대하여 적당한 교시를 하고, 다시 나아가 교회의내적상태에 관하여 (1) 부인의 예배때의 복장(11:2-16), (2) 성찬식(11:17-35), (3) 영의 은사(12:1-14:40)에 대해 가르치고, 그 영의 은사의 최상의 것으로서, 저유명한 [사랑의 찬가]로되었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 붓을 옮겨 부활문제에 이르러(15장), (1)부활의 증명(15:1-11),(2) 부활에 대한 원리 (15:12-34), (3) 구체적 문제(15:35-55)를 거론하고, 그의 부활에 대한확언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결말로서 두 세가지 주의를 주고 (16:1-18), 마지막인사로서(16:19-24), 이 대서간을 끝맺고 있다.

 

5. 본서의 내용분해

(1) 서언 (1:1-9)

1. 인사(1:1-3)

2. 감사(1:4-9)

(2) 교회의 분쟁문제(1:10-4:21)

1. 사실(事實)의 지적(1:10-4:21)

1) 분쟁을 경계한다(1:10-17)

2)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1:14-17)

2. 복음의 성질(1:18-2:16)

1) 다만 어리석은 십자가를 전한다(1:18-25)

2) 주로서 사랑하라(1:26-31)

3) 전도자의 굳은 결심(2:1-3)

4)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2:4-9)

5) 성령에 의해 보여지다(2:10-13)

6) 판정하고 판정되지 않는다(2:14-16)

3. 전도자의 임무(3:1-23)

1) 사람을 따라 행치 말라(3:1-3)

2) 하나님의 동역자(3:4-9)

3) 마지막 날의 시험에(3:10-15)

4)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3:16-17)

5) 만물의 소유(3:18-23)

4. 분쟁의 원인으로서의 자랑을 경계한다(4장)

1)주께서 오시기까지는(4:1-5)

2) 다시 자랑을 경계한다(4:6-8)

3) 세상에서 영달하려함과 과오(4:9-13)

4) 아버지로서 자녀를 경계한다(4:14-21)

3. 도덕문제(5, 6장)

1) 죄를 범한 자 위해(5:1-5)

2)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5:6-8)

3)세상에 대하는 길(5:9-13)

4) 소송의 가부(6:1-6)

5)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6:7-11)

6) 육체의 존중(6:12-20)

4. 결혼문제(7장)

1) 결혼생활의 시비(是非)(7:1-7)

2) 결혼생활의 제문제(7:8-16)

3) 참된 무차별에의 길(7:17-24)

4) 때는 단축되었다(7:25-31)

5) 주를 섬기기 위해(7:32-40)

5. 우상에 관한 문제(8:1-11:1)

1) 지식이냐 사랑이냐(8:1-6)

2) 사랑 위한 배려(8:7-13)

3) 무엇 때문의 권능주장이랴(9:1-12a)

4) 일체의 일을 참는다(9:12b-18)

5)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9:19-22)

6) 내 몸을 쳐(9:23-27)

7) 옛 일을 찾아 경계한다(10:1-11)

8) 종교적 환경의 영향(10:1-11)

9)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10:23-11:1)

(6) 집회에 있어서의 부인의 쓰는 것의 문제(영의 평등과 육의 차별)(11:2-16)

(7) 성찬식에 관한 문제(11:17-35)

1) 두 가지의 경계(11:17-35)

2) 한 때의 벌과 영원한 벌(11:26-35)

(8) 영의 은사에 대한 문제(12:1-14:40)

1) 성령의 감화(12:1-3)

2) 은사의 차별과 영의 일치(12:4-11)

3) 몸의 일부로서의 지체(12:12-26)

4) 제일 좋은 길(12:27-31)

5) 사랑이 없으면 무익하다(13:1-3)

6) 사랑의 역사(일)에 대하여(13:4-7)

7) 사랑의 영구성(13:8-10)

8) 얼굴을 대하여 서로 볼 때까지(13:11-12)

9) 가장 큰 것은 사랑(13:13)

10)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14:1-13)

11) 사랑의 마음을 주안(主眼)으로 하여(14:14-25)

12) 집회의 질서(14:26-40)

(9) 부활문제(15장)

1) 부활의 증명(15:1-11)

2) 부활 부정의 결과여하(15:12-19)

3) 잠자는 자들의 처음열매(15:20-22)

4) 죽음을 멸하기까지(15:23-28)

5) 만약 부활이 없다면(15:29-34)

6) 후에 살아날 몸(15:35-41)

7)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15:42-49)

8) 부활 및 변화(15:50-53)

9) 죽음을 멸한다(15:54-58)

(10) 결말의 말(16장)

1) 두 세가지 일(16:1-12)

2) 권면 및 인사(16:13-24)

 

6. 본서의 중심사상-사랑신학적으로 보면, 고린도전서의 중심적 사상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8:1이하이고, 그것도 13장의 [사랑의 찬가]를 제외하고는, 자주 보여지지는 않는데, 전체를 일관하는 사상으로서는 [사랑]을 다루는 것이 지당하다. 8:1의 [지식은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는 말이 보여주는대로, 사랑은 고린도인이 중시하고있던 [지식]에 대하여 보다 중요한 덕이고, 바울이 [지식]이 가지는 의미와 그 한계를 보여줌에 있어서, 언제나 비교 대립되는 것은 사랑이었다. 아가페(ajgavph)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한최고 용어이다. 요 21:15를 보라. 이 말은 극히 드물게 씌어진 말로서,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적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쓰고 있다. 70인역 이전에 이 말이 씌어지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치가 않다. 처음, 한글에는, 사랑이라는 말의 관념이 극히 낮은 수준에 있었는데, 그것이현재와 같은 높은 관념에 까지 높여져 온 것이다. 그리스에 있어서는 이지(理智)가 예배되고,로마에 있어서는 권력이 예배되고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고, 예수에게서 비로소이 최고의 사랑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文獻] G. P. Pierson:I Corinthians, 1934;John D. Davis; Dictionary of the Bible, FourthRevised Edition,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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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서:The Epistles to the Corinthians

 

[영] The Epistles to the Corinthians고린도서는 전서와 후서의 2통이 있는데, 모두 고린도 교회에 써 보낸 바울의 편지이다.

전서는 54년경, 후서는 55년으로 보아 무방하다. 고린도 교회는 활발한 교회였는데, 문제가 많아 바울을 계속 괴롭혔다. 전서에서는 그러한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하나 하나 자랑스럽게,철저한 복음적 지시가 주어지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교회 생활이 가르쳐져 있다. 바울을 괴롭힌 것은 먼저 교회내에 있어서의 당파싸움이었다(1:10-12). 그 근저(根抵)에 그들 스스로의 지혜를 자랑하며, 남을 배척하는 아집(我執)이 있음을 보고,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의 진리는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심을 말하고(1:18 이하), 참된 지혜는 성령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임을 가르치고(2:6 이하), 그리고 사도의 의의(意義)와 일(역사)을 말하고 있다(3:1 이하, 4:1 이하). 다음으로 교회에 야기되어 있는 여러가지 사건에 대한 올바른태도를 가르치고(5:1 이하, 6:1 이하), 다시 결혼문제(7:1 이하), 우상에 바친 것을 먹는 일의가부(8-10), 영의 은사의 우열(優劣 12-14) 등에 대해 교시(敎示)하고 있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현저한 것은,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중심으로 멋대로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에게, 바울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교시한 일이다. 즉 그리스도를 본 받다, 세인의이익을 도모하고, 교회의 덕을 높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져 있는 자유를 형제위해 제한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제 13장은 이 사랑을 노래한 노래로서, 유명한 사랑의 찬가이다. 이어서 부활에 대해 기록한 제15장도, 대표적인 부문이다. 거기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서술하고, 그것에 따라 신자의 부활이 크게 힘차게 논급되어 있다.이상의 고린도 전서는, 로마서와 한가지로 16장으로 된 대서간인데, 고린도 후서도 12장으로된 힘찬 편지이다. 전서를 써 보낸 후, 유대인 기독자들의 책동의 결과, 바울과 교회의 관계는 위기에 처하고, 그것 때문에 바울은 몹시 괴로웠는데, 다행히 최후에는 깨끗한 해결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 때 그가 경험한 괴로움과 기쁨을 중심으로 하여, 교회에 대해 자기의 사도직에 대한 변명을 하고, 그 권위를 말하고, 신앙의 오의를 보여준 것이 이 편지이다. 그것은 바울의 가장 개인적인 편지로 말해지고 있고, 자기의 경험과 고백을 통하여 보여져 있는그의 인격의 격렬함과 그 힘찬 신앙의 말들이 도처에 기록되고, 사람들의 심령에 절절하게호소하는 바가 있다. 따라서 후서의 내용은, 감사와 하나님의 위로(1:3-11), 그리고 첫째로변명-사도직의 영광(1:12-7:16), 둘째로 예루살렘교회에의 헌금(8:1-9:15), 셋째로 반대자에의공격과 자기변명(11:1-13:10)으로 되어 있다. 여기의 셋째부분이, 처음부터 편지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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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Corinth(지명)

 

(Kovrinqo",Corinth) 「뿔」

희랍의 중요한 상업 도시로서 중부 희랍과 펠로폰네수스(Peloponnesus) 반도를 잇는 지협(地峽)에 위치하고 있었다. 현금의 고린도 시는 1856년의 지진으로 고(古) 고린도가 완전히 폐허가 되고 동북 5㎞ 지점, 즉 고린도 운하의 서단(西端) 부근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옮겨갔는데 인구는 1만 7천이다. 고린도는 고대로부터 `온 희랍의 빛'(Iumentotius Graeciae)으로서 그 번영을 자랑하던 도시였으나, BC 146년 로마의 장군 뭄미우스(Licius Mummius)와 그의 정병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것은 고린도가 반 로마 운동을 일으킨 아가야 도시 연맹의 본부였던 때문 뿐만 아니라, 로마는 전부터 고린도의 번영을시기 질투하고 있었던 결과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그 후 고린도는 100년의 긴 세윌에 걸쳐폐허가 된 채 버린 바 되었으나, BC 46년 선견지명이 있는 율리우스 가이사(Julius Caesar)는 그 유리한 지리적 위치에 착안하여 이것을 로마의 식민시(植民市)로써 재흥하기에 이른것이다. 그는 이것에 Colonia Laus Julia Corinthus라는 명칭을 주었다. 먼저 식민으로써 보내진 사람은 로마의 노병과 피해방자(ireedmen)들이었으나, 곧 각 처에서 모여들어 사는 희랍인들이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유대인도 상당히 많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로마나 알렉산드리아에는 각각 수만의 유대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도시들과 거의 비등할 만한 번영을 자랑하기에 이른 고린도에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와서 살았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사도행전 18장에 의하면, 이 도시에 유대인 회당이 있었다. 또 고린도의 땅에서 `히브리인 회당'이라는 비문을 새긴 돌조각이 발견되었다. 또 사도행전 18:2에 의하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로마에서 고린도로 이주했는데,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이 시에 와서 살게 된 유대인의 수는 적지 않았을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의 지리적 위치는 각처에서 오는 여행자, 상인, 항해자들을 끌여들이는데 있어서 유리하였다. 즉, 고린도는 희랍 본토와 펠로폰네수스 반도를 잇는 지협의남단에 위치하여, 말하자면 희랍의 목을 조를 수 있는 유리한 곳을 차지하고 있음과 동시에,서쪽 2.4㎞ 지점에 있는 레기옴(Lechaeum) 항은 고린도 만에 있고, 또 동쪽 13.5㎞ 지점에있는 겐그리아 항을 통하여 살로니카 항에 대하고 있어 마치 양쪽 바다를 발로 디디고 서서지협을 가로막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서쪽으로는 로마, 멀리 스페인 방면에서 동양으로 가는 대부분의 선박은 일단 고린도만에 들어와 레기옴 항에서 양륙하고, 이것을 겐그리아로 보내고, 또다른 배에 선적하여 항해를 계속하곤 하였다. 동양에서 서쪽으로 갈 때도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펠로폰네수스의 남단 말레아갑(Akra Maleas)을 우회(300㎞)하면많은 시일이 걸릴 뿐만 아니라, 풍랑이 거칠기 때문에 항해가 불편하거나 또는 위험했기 때문이다. 작은 배일 경우는 그대로 양륙하여 지협을 끌어서 횡단하여(이를 위해 약 8㎞길이의목제궤도가만들어졌는데, 현재는 6.4㎞, 폭 22m, 깊이 8m의 훌륭한 운하가 굴착되었다.1881년 프랑스의 회사에 의해 기공되어 1893년 희랍 회사에 의해 완공되었다) 다시 바다에띄워 항해를 계속하곤 하였다. 이리하여 고린도는 신흥 도시로서 눈부시게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옛날 번영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희랍 전국에 있어서 최대의 무역 도시로서 중요한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 정부는 이것을 아가야도(遺)의 수도로 정하고 총독을 두었으므로 정치적 중심지로서도 역시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고린도에는 샘물이 많이 있다. 아그로고린도(Acrocorinthus)의 석회암 산(높이 575m)을 등지고 있는 요해지였기 때문에 희랍에 있어서 최고(最古)의 도시 중 하나이며, 최초의 거주는BC 4000년대로 소급한다. 지형상 상업, 공업(놋세공, 도기제조, 이것은 특히 토질이 좋았음으로 유명)이 발달하여 희랍의 중요한 도시로 되었음은 상술한 바이다. 이 도시는 흥망성쇠의 역사를 더듬었는데, 그 번영 시대는 BC 7-6세기와 BC 3세기(헬레니즘 시대)그리고 AD 1세기(로마 시대)의 세 시기였다. 고대의 성벽은 연장 8㎞로서 아그로고린도의것을 포함하여 만까지 연장된 것을 가산하면 총연장은 16㎞나 되며, 인구는 60만(그 중 3분의 2는 노예)이었다고 추정한다.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에서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는 비교적 새로운 부홍 도시로서 로마인을 비롯하여 헬라, 베니게, 팔레스틴, 애굽 등지로부터의 식민이 많았고, 완전히 코스모폴리탄적 도시로서 전통이 오랜 아덴보다도 전도지로서 유망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1년 6개윌 동안 체류하면서 전도하여 유력한 교회를 설립했다. 신자는주로 하층 및 중산층으로부터 이루어져 있었다(고전 1:26-). 바울은 이 고린도 체재중에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각각 필요에 따라 써 보냈다. 성읍의 중심부를 이룬 아고라가 발굴되었다. 그것은 동서 180m, 남북 90m의 장방형의 광장인데, 그 둘레에 신전, 상점, 주랑(柱廊) 등의 여러 가지 건조물이 늘어서 있다. 남아고라는 두 단으로 되고, 남쪽은 낮고 북쪽이 2.5m 높다. 그리고 돌단을 따라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남단에는 길이165m의 도리어식(Doricorder) 주랑(BC 4세기)이 있으며, 뒷쪽은 33개의 방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고대 희랍 최대의 아고라였다고 한다. 광장의 중앙, 즉 높은 부분과 낮은 부분의경계에는 중앙 점포의 건물이 동서로 늘어서고, 그 중앙에 법정(행 18:12)이라고 부르는 다듬은 돌로 쌓은 높은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총독은 여기서 재판을 했으므로 바울도 이 법정 앞에 섰던 것이다. 이 때의 아가야 총독은 루기오 유니오 갈리오(Lucius Junius Gallio)였는데, 철학자 세네카의 형이었다. 고린도만의 북안 부근의 델 피에서 출토된 비문은 갈리오가 51년 7월부터 52년 6월까지의 임기 동안 아가야 총독이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어 바울의 고린도 체재 시기를 정확히 판단할 자료가 되었다. 광장의 북부에서는 항구 레가이온으로 훌륭한 포장 도로가 뻗어 있고, 이 도로가 광장에 접하는 곳에 백색 대리석으로 세운 아치의 주랑 현관이 있었다. 그것은 태양신이 화염의 전차를 탄 청동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이 주랑 현관 부근에서 `히브리인의 회당'이라는 자문(劃文)이 있는 돌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회당 입구의 문 인방 돌(漏石)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3, 4세기의 서체(舊體)라고 하는데,바울 시대에도 상당수의 유대인의 식민이 있었으며, 이 시장 부근의 레가이온 가도에 연하여 회당이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랑 현관의 동쪽에 베이레네 샘이 있다. 1시간에 11,000ℓ의 물이 솟아나와 오늘날도 부근의 마을에 급수하고 있다. 고대에는 아고라의 각상점에 수도관으로 송수하고 가가 호호는 우물을 파서 포도주나 육류를 우물 수에 달아매어냉장하였다. 여기서 발견된 아구스도 시대의 비문에는 라틴어로 `macellum'라 불리운 시장(市場)이 기록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0:25의 `시장'(mavkellon)은 같은 말인데, 여기서는 우상에 바쳤던 고기도 팔고 있었다. 북서 시장의 주랑 동단에는 `거룩한 샘'이 있으며, 그 물은 지하 터널로 10m 떨어진 밀의교(密儀敎)의 소신전(小神般)의 제단 밑으로 도수(導水)되었다. 여기서 비법(秘法)에 의해 물이 포도주로 된다고 한다. 아마터널에 포도주를 미리 부어 넣고 제단에서 돌 항아리에 받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술의 기적은 디오뉴소스(박카스)의 제사에 관련하여 널리 행해지고 있었던 것인데, 그 방법을 여기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성천(聖泉)의 물이 말라 밀의(密騷)가 없어지고 BC 4세기에는 메꾸어져 시장 부지의 밑으로 되어버렸던 것이다. 서북 시장의 북쪽30m 지점에 고대의 아폴로 신전(BC 550경)이 있었다. 기둥이 양측면에 15기, 정배면에 6기의 요주식(繼柱式), 도리아식 신전이었다. 그러나 현금에는 서측 5, 남측 2, 도합 7기만이 선채 남아 있을 뿐이다. 원주(圓柱)는 높이 7m, 직경 1.7m인데, 로마 시대의 것이 대부분이다.여기서 서북쪽으로 200m 떨어져, 극장가에 연한 유악당과 원형 극장이 있었다. 이 극장은관중 18,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희랍 시대에 건립, 로마 시대에 수복된 것이었다. 스테이지의 일부분이 발굴되었을 뿐 나머지는 발굴되지 않았다. 고린도에서는 지중해 세계의 온갖 제사가 다 행해져 로마, 희랍의 제신, 근동의 제신이 제각기의 신전에서 예배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성읍 남쪽에 높이 솟아 있는 아글로 고린도 정상에 세워진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 신전이었다. 이것은 베니게의 아스다롯 제사의 영향을 받았으며 BC 5세기 경 아글로 고린도에 세워진 것이다. 신전에는 1,000명에 달하는 부인들이 살면서 신전 매창(賞娼)이 행해졌다고 한다. 따라서 성읍의 풍기는 문란하여 `고린도식으로 산다'(korinqiavzomai)란 `행실이 나쁘다'란 뜻이었다. 이 폐풍(幣風)은 교회 내에도 스며들어 고린도 교회의 고민이 컸다(고전 5:1-).바울 시대의 고린도의 특징을 몇 가지 지적한다면, ① 상술한 바와 같이 잡다한 인종과 민족의 집합 장소인 코스모폴리탄적 도시였다. 계급적으로도 여러 계층이 있었는데, 특히 주의할 것은 약 20만의자유민에대해40만 이상의 노예가 고린도의 인구를 구성하고 있었다.② 고린도는 상업도시였다. 따라서 이윤에 대한 사상이 발달하여 이기적 정신이 왕성하였다.고대 희랍인의 자랑이었던 깊은 예술적 교양과 같은 것은 거의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되고, 다만 헛되이 수사(修辭)의 기교를 부리는 천박한 이기주의로 타락해 버렸던 것이다.극단적인 이기주의의 발달, 이욕상의 노골적인 투쟁, 헛된 변론-수사-이와 같은 폐단이 고린도의 사회를 풍미하였다. ③ 그와 동시에 고린도는 향락의 도시였다. 그것은 올림픽 게임에 대항하여 행해진 이스미안 게임(Isthmian Games)의 개최지이며 희랍의 도시 중 최초로로마의 검사(劍士) 경기를 수입한 도시였다. 고린도를 지나가는 선객과 선원들은 경박하게 수치를 버리고 무책임하게 행동하였다. 상술한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수많은 매춘부가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이 때문에 고린도에 모였다. 이리하여 고린도는 음란한 도시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바울이 로마서 1:21-32에서 부도덕, 불경건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한것은, 그가 고린도 체류시에 쓴 것인데, 아마 고린도 사회를 묘사한 것일 것이다. 고린도에서는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9,10)할 정도로 사회가 타락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