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書槪論/[신약성경개론] 개관

로마서:The Letter of Paul to the Romans

好學 2009. 8. 24. 10:05

로마서:The Letter of Paul to the Romans

 

 

[영] The Letter of Paul to the Romans(The Epistle to the Romans)신약성서중 제6번째의 글로, 사도 바울이 로마의 교회신자에게 써 보낸 편지.

 

1. 바울의 편지-13통 있는 바울의 편지중, 처음의 9종은 일개 또는 수개처의 교회에 보낸것이고, 나중의 4통은 개인에게 보내기 위해 기록된 것으로서, 모두 그 때때로의 필요에 응하여,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시작이라든가 결미등도, 당시의 일반 편지의형식에 따라, 보내는 발신인과 받는 수신인과의 이름의 기록이어서 인사의 말로 시작하고,그리고 축복의 말로 결말되어 있다. 그 사이의 부분에서, 필요한 일들을 가르치고, 권면, 명령, 교훈, 위로 등을 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복음이 명시되고, 사도적 해석이 행해져, 그의 신앙내용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바울은 처음은 열렬한 우대교도로서 교회를 박해했으나,그 한창중에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되어 그리스도인으로 되고,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되었던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회심인데, 그의 신앙은 이 회심에 의해 지배되고, 깊이와 철저함을같이 하는 그의 주장에는 유대교의 율법에 대립하는 은혜주의가 넘쳐 있다. 복음은 바울에의해 사상적인 근거를 얻고, 신학적인 표현을 획득한 것이다. 그는 복음을 널리 이방인에게전하고, 교회를 세워 그것을 강론함과 함께, 편지로서, 복음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2. 로마의 교회-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 티베르(Tiber) 강가의 필라티누스(Palatinus)를 둘러싼 일군의 언덕(구릉 丘陵)을 중심한 도시로서, 로마제국의 수도이다. 제국은 특히 카에사르 아우구스투스(한글역은 아구스도 Augustus 전 31-후14재위)이래(전30경),기원제5세기에이르기까지, 지중해 세계와 서유럽을 지배한 정치적, 군사적,사회적, 문화적 힘이었다. 더구나 신약성서의 시대는 바로 그 최성기로서 사람들은 로마의 평화와 불멸을 믿고[로마는 세계이다]라는 자랑을 품고, 광대한 식민인들도 거의 이에 귀속하는 것을 좋게 여기고, 유대인 마을까지 [나는 자유인이다], [나는 로마인이다]라고 했다는 것이 전해진다.그리고 로마에는 각양의 많은 민족이 와서 살고 있었다. 디아스포라(Diaspora 離散者)의 유대인도 상당히 많이 살고 있었다(당시 약 4만으로알려진다).필론(Philon 전 20/30경-후45/50경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에 의하면 폼페이우스(Pompeius Magnus Gnaeus 전106-48로마공화정말기의 정치가, 장군)의 군대가, 팔레스티나를 습격하여(전 63),많은유대인을포로로 해 로마에 데려가고, 이것을 노예로 하여 사역했는데, 뒤에 그들을 석방했다.그 중에는 로마에 정착한 많은 유대인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이 이른바 리베르텐(→리베르티논)이었고(행6:9의 [리리버디노]의 회당에 속하는 사람들이란, 그들 중에서 팔레스티나로 귀환 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지), 또 이른바 오순절날의 [여행 중에 있던 로마인들](행 3:10)도 그 예루살렘에의 순례자들이었던 듯하다.그리하여 로마에 그리스도교가 들어간 것은, 팔레스티나에 여행을 한 로마의 디아스포라가,그곳에서 예수의 복음을 믿고, 로마에 귀환한 데 있는 것이 아닐까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한 로마와 팔레스티나와의 교통이 빈번해 있던 것도 무시할 수 없으리라. 특히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분리된 헬레니스트 유대인의 그리스도인 및 전도자가, 바울에 앞서, 사명을 느끼며로마에 왔을 가능성도 하다. 여하튼 그 처음은 베드로에 의해서가 아니며, 또 처음의 시기는이른바 예루살렘회의(행 15:4)의 무렵이 아니었을지! 그리하여 최초로 로마에 복음이 전해진것은, 베드로나 예수의 직제자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즉 세계의 사도로서 알려지는 바울에의해서도 아니다(1:5-6). 확실히 원시 그리스도교의 전도는, 소수의 위대한 지도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름도 없는 무명의 신자, 전도자들에 의해서 행해지고, 크게 발전해 갔던 것이다.그리하여 로마에 있어서도, 먼저 유대인에 대한 전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드디어 이방인 사이에도, 퍼져 갔다. 그러나 로마의 유대인은 일반에게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그것은 유대인들에 의해 소동이 일어나곤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49년경,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칙령에 의해 로마에서 유대인이 추방되었는데, 이것은 우대인들 사이에 [크레스토스의소동]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고,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 Tranquillus, Gaius69-140경)의 저서인 <<황제전(皇帝傳) De vita Caesarum>>은 전하고 있다(Claudius XXV. 4).즉 유대인 사이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유대교를 지지하는 자들과의 사이에 커다란 분쟁이 크레스토스의 사주에 의해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로마의 유대교회당 안에새로운 그리스도신앙이 전해졌으니 소동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으나, 확실한 사실은 알수없다. 크레스토스의 당시 모음 e와 i 가 동일 발음이었기 때문에 크리스토스를 크레스토스로 쓴 것이라면 새로운 신앙 때문에 유대인 교회당내에 소란이 나서 추방되었을 것으로본다. 그러나 이 추방된 유대인 중에 그리스도인도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그 중에 후에 바울의 원조자가 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처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롬 16:3,행 18:2). 그렇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대인 추방이었지, 그리스도인 추방은 아니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아직 렐리기오 리키타(religio licita 로마공인의 종교단체)인 유대교의 그늘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유대인 아닌 이방인 신자는 가령 많아졌다 해도, 모두 로마에남아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클라디우스 황제의 사후(54), 유대인도 많이 돌아와 다시 신앙활동을 시작하고, 다시 새 신자도 증가되어, 세계의 수도인 로마 교회는 급히 발전되었으리라. 그러기에 바울도 [너희의 믿음이 온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롬 1:8). 그것은 먼저 신앙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독립된 퍽 유력한 존재였음을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64년, 네로 황제가 저 괴화사건(怪火事件)의 책임을 그리스도인에게 전가했다고 전해지는 일에 의해서도, 이미 그리스도인이 유대교에서 독립하여, 상당히 눈에 띄는 사회적 존재로 인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타키투스(Tacitus, Cornelius 55경-115이후, 로마 제1의 史家)는 어쨌든, 그리스도인을 [아주 많은 군중](Ann. XV. 44)이라 부르고있다.

 

3. 본서 집필의 동기-바울은 아직 한번도 로마에 간 일이 없고, 그 사정은 들어 알고 있는것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때까지의 데살로니가 및 갈라디아, 고린도등 자기가 창립한 교회에써보낸 편지와는 상당히 그 배경이나 사정이 달라있다. 그런데서 1:8-15과 15:14-19에 이 편지 집필의 동기에 대하여 쓰고 있다.때는,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도 끝나고, 그의 생애의 한 정점에 서 있었다. 회심 후 이미 20수년, 지중해연안 동쪽의 여러 지방들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창립하여 터를이룩해 놓았다. [마침내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두루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전했다], [이제는 이 지방에서 더 일할 곳이 없다](롬 15:19-23)고 쓰고 있다. 이것은 물론새로운 전도처를 개척하여 교회를 창립한다는 바울 독자의 사명감과 또는 그 묵시적 종말적자각에서 말해진 것이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의하면[.....헬라(그리스)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는 석달을 지냈다](20:2-3)고 되었다. 이 [헬라](그리스)란 고린도이다. 그곳은, 바울이 창립한 교회였는데 그가 떠난 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나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이제는 일단해결을 보았다. 바울은 이제부터 자기의 다음의 생애의 과제를 생각했다. 그의 눈 앞에는아직 미개척된 서방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 끝에 이스바냐(스페인)이 있다. 그 곳에는 디아스포라(離散者)의 유대인도 있다. 그러나, 먼저 그의 마음을 끄는 것은, 역시 그 도상에 있는 로마의 수도이다.바울은 개척전도에 의한 교회창립을 자기의 사명으로서 하고 있었다. 로마는 이미 바울의역사(일) 없이도 유력한 신자의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그 본래의 사명의 자각에서 한다면,로마에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로마는 사정이 달랐다. (1) 바울은 이방인의 기둥, 즉세계의 사도로소 부르심을 입고, 파견된 것이라 자각하고 있었다. 로마는 세계의 수도이다.그는 이것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그도 역시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얼마나마 이방인을 인도했으면 했다(1:13-15). 그러나 바울이 더 간절히 원한 것은, 로마의 신자와의 친교였다.[피차의 믿음을 통하여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1:11,12)이라고 한다. 그러나 (2) 다시 바울은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 원하는 일이 얼마라도 채워진다면, 로마의 신자들에게 보내져,서바냐에 전도하려 가고 싶다고, 즉 바울은 로마교회를 자기의 이제부터의 생애의 과제,서방전도의 기지로 했으면 하고 원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그의 로마교회에 대한 깊은 신뢰와 경의의 생각이 보여져 있는 것이리라.로마에는 바울을 아는 사람들(16장) 외에는, 다수의 신자들이 그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다.특히 유대적 그리스도인에게서 곡해되고, 비난, 증오되었다. 그러므로 이미 바울을 로마에 편지를 보내어, 자기가 선교하는 복음을 분명하게 (조금도 흐리터분하지 않게)하고, 유일한 공동적인 복음에 기초하여 서로의 위로와 일치 및 협력을 얻기를 원했다. 이러한 기도와기대를 가지고서, 이 편지도 집필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종의 자기소개, 고백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사적이 아니라 공적인, 당당한 복음의 논술을 형성하고 있다.또한 바울은 이 편지를 쓴 후, 예루살렘에 가려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전도처에서 모은 헌금을 가지고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이다. 그곳은, 바울에게는 극히 위험한 곳, 바울의 숙적 유대교도의 본거지이다. 그러나 바울은 굳이 예루살렘에 가고자 한다. 그것은 이미 분열의 조짐이 보이는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와의 일치위해, 더욱그의 새로운 서방전도의 길 떠남에, 어머니인 예루살렘에서 출발하고자 원했기 때문이라고생각된다.

 

4. 본서의 집필연대-이상의 사정 따라 이 편지가 씌어진 것은 (1) 지중해 연안 동방의 전도가 일단 끝난 때, (2) 예루살렘으로 출발하려 하고 있는 때, (3) 로마에의 여행을 계획하고있는 때이다. 그리고 보면, 고린도 체재의 동기 3개월동안, 즉 56년의 말에서 57년의 봄,부활절까지로 본다. 55년 겨울, 1-2개월로 보는 이도 있다.그리고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서, 그곳서 잡혀(21:15-), 가이사랴에 감금되어 있다가(24:27), 가이사황제에게 상소하여, 거기서 2년 머물러 있었다(28:14,16). 그러고보면 로마인에의 편지는, 바울이 자유의 몸으로 쓴 최후의 편지였다(C.A Dodd:The Letterof the Romans). 또 로마서를 바울의 최후의 편지로 보는 이도 있다. 거기서는 빌립보서와빌레몬서는 이것보다 일찍이 에베소에서 집필된 것으로 하고, 골로새서, 에베소서는 목회서신등과 함께 2차적 바울로 본다.

 

5. 본서의 성질-로마서는 바울의 진작이며(다른 그의 서간과 한가지로 口授하여 필기케 한 것이기는 하나), 그리고 또 그의 최대작이기도 하다. 혹은 성서중의 최대작으로 보는이도 있고, 또 나아가서는 일찍이 인류의 손으로 된 최대의 저작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리스도론과 종말론에 대해서는 말하는바가 적으나, 복음의 진수를 조직적으로, 또는 극히 심각히 말하여 보인 것으로서는, 성서 중 비류 없는 것이다. 실로 그 가치는 무한한 바 있다.

 

6. 본서의 중요성-로마서의 중요성은, 여기에 바울의 복음이 이론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있고, 이 편지가 후세에의 대영향을 주는것도 이에 유래하는 것이다. 바울은 1:16-17에 있어서, 복음은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얻게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하나님의 의가 그 중에계시되어 있는 것이고, 신앙을 가지고서 이것을 받아들이는 때, 의롭다함을 입으며, 생명이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주제라고도 할 일을 해명하기 위해 1:18-8:39의 주요 부분이 기록되어 있다.

 

7. 본서의 내용-서언(1:1-15)이 있고, 다음에 본서의 중심문제를 실어(1:16,17), 하나님의 의및 신자가 [믿음으로써 얻는 의]가 본서의 핵심임을 보이고 있다. 다음은 설명으로 들어가,먼저 인류 모두가 죄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 처음에 이방인의 죄를 열거하고(1:18-32), 다음에 유대인의 그것을 말하여(2:1-3:8), 전인류 모두 죄 중에 있다고 단정하고,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는, 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수 없는 까닭에, 여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의롭다하시는 길이 열려 있음을 기록하여, 십자가 중심의 복음을 고조한다(3:32-31). 이것이로마서중 제1의 클라이막스이다. 다음에 4장 전체를 가지고서, 아브라함의 예(例)를 인용하여, 앞에서의 복음주의를 입증하고, 나아가서 구원의 확실성을 말하며(5:1-11), 원죄를 끌어다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영구적 효과를 주장한다(5:12-21). 이상과 같이 하여, 십자가 중심의 복음주의는 주장되었다.다음으로는, 이상에서와 같이 하여 외롭다함을 받은자의 신앙생활의 설명에 들어간다. 그리스도와 하나로 되는 새생활을 말하고(6:1-14), 죄에서의 해방(6:15-23), 율법에서의 해방(7:1-6)을, 그리고 율법과 죄의 관계를 말하여, 심각한 자기 고민의 발표로 되어 사람들의마음을 찌른다(7:7-25). 신앙생활의 설명은 제8장에 들어가 고조에 달하고, 내세문제, 만물완성의 문제, 예언문제 등의 대문제를 제창한 후, 승리의 개가로서 제8장을 마친다. 이 제8장은 로마서의 제2의 클라이막스이고, 또 신약성서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제9장부터는 이스라엘 문제의 제창에 들어가, 이스라엘 불신의 이유를(9:6-29), 그리고 원인을 설명하고(9:30-10:21), 제11장에서는 이스라엘과 전인류에게 임할 구원의 날을 대망하여,장대한 희망을 걸며, 송영으로서 마치고 있다.12장부터는 실천도덕의 제창이 된다. 먼저 개인도덕(12장), 다음으로 사회도덕(13:1-10)을 말하고, 종말이 가까웠으므로 엄숙한 생활을 권했다(13:1-14). 다음은 신자 서로간의 화합일치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다(14:1-15:13).최종에는 권말의 말로서, 자기일 및 인사등을 기록하고(15:14-16:23), 드디어 결미로서 송영하여(16:25-27), 이 대서간은 마친다.

 

-내용분해-

I. 서언(序言) 1:1-17

1. 인사(은혜와 평강의 축복)(1:1-7)

2. 본서집필의 이유(1:8-15)

3. 본서의 중심제목(1:16-17)

 

--하나님의 의(義), 또는 신앙의 득의--

 

II. 교리부(敎理部) 1:18-11:36

1. 의롭다함을 받는일(1:18-5:21)

(1) 이방인의 죄(1:18-32)

(2) 유대인의 죄(2:1-3:8)

(3) 만인의 죄(3:9-20)

(4) 하나님의 의의 나타나심(3:21-31)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니라, 신앙에 의함(3:28 信仰義認)--

 

(5) 신앙에 의한 의의 성서의 증거(4:1-25)

 

-아브라함의 신앙--

 

(6) 구원의 확실(5:1-11)

(7) 아담에 의한 의의 상실, 그리스도에 의한 회복, 영생획득(5:12-21)

 

2. 의롭다함을 받은자의 생활 6:1-8:39

(1) 그리스도와 하나로 된 신생에 굳게 서라(6:1-14)

(2) 죄에서의 해방(6:!5-23)

(3) 율법에서의 해방(7:1-6)

(4) 율법과 죄와의 관계(7:7-25)

1). 율법은 죄를 죄로서 보여준다(7:7-13)

2). 율법은 무력과 절망을 고백케 한다(7:14-25)

(5) 성령에 의한 신앙생활(8:1-39)

1). 그리스도 강세의 목적(8:1-4)

2). 육에 따르는 생활과 성령에 따르는 생활(8:5-11)

3). 후사됨의 길(8:12-17)

4). 만물완성의 대상(8:18-25)

5). 성령의 중보(8:26,27)

6). 예정(8:28-30)

7). 승리의 대확신(8:31-39)

 

3. 이스라엘 문제(유대인 문제)(9:1-11:36)

(1) 문제의 제출(9:1-5)

(2) 이스라엘 불신의 설명(9:6-29)

(3) 이스라엘 불신의 원인(9:30-10:21)

1). 총설(9:30-33)

2). 신앙의 의를 모름(10:1-13)

3). 듣고 믿지 않음(10:14-21)

(4) 이스라엘 문제의 해답(11:1-36)

1). 다수자의 불신과 소수자의 믿음(11:1-10)

2). 이스라엘의 불신과 이방의 믿음(11:11-24)

3). 이스라엘은 최후에 구원될 것임(11:25-32)

4). 송영(11:33-36)

 

III. 실천부(實踐部) 12:1-15:13

(1) 도덕의 원리(12:1-2)그리스도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종교이므로, 신자는 하나님(그리스도)의 성질, 의지, 행위를자기의 생활의 기준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도덕은 하나님의 율법에의 복종이며, 다만 창조주로서가 아니라 속죄주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들은 종으로서 복종할 것이 아니라, 감사로써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성결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거룩한 생활 그것이 참된 예배인 것이다.

(2) 일반생활의 교훈(12:3-21)

(3) 국가의 일원으로서의 생활교훈(13:1-14)

(4) 교회원으로서의 생활교훈(14:1-15:13)

 

IV. 권말의 말 15:14-16:27

(1) 바울의 전도와 전도방침(15:14-21)

(2) 금후의 전도 여행 계획(15:22-33)

(3) 뵈뵈 소개(16:1-2)

(4) 친구에의 인사와 전언(16:3-16)

(5) 권고(16:17-20)

(6) 바울의 교우로부터의 인사(16:21-23)

(7) 최후의 송영(16:24-27)

 

8. 본서의 텍스트의 문제-본서(로마서)가 바울사도에 의해 일시에 기록된 것인지, 그렇지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의 문서에 일찍부터 혹은, 후에 가필한 것인지에 대해 문제가 있다.이 문제는 다음 4점에서 생겨나고 있다.

(1) 로마서의 짧은 형태의 것이 2, 3세기에 유포되어 있었다. 본문상에서의 증거로서는 4장 23절로 끝나 있는 사본이 있다. 그리고 키프리아누스(Cyprianus),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이레나에우스(Irenaeus) 등의 유력한 신학자,교부등은 15장과 16장에서는 하나도 인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

(2) 현재의 형태의 로마서에는 결말로 생각되는 곳이 몇곳이 있다. [평화의 하나님께서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아멘](15:3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있을찌어다-아멘](16:24). [지혜로우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이 영원하도록 있을지어다-아멘](16:27).

(3) 짧은 편의 교정본에서는, 현행역의 16:25-27에 있는 송영이, 14장 말미에 있다. 어떤 사본은 14장과 16장의 두 끝에 송영을 가지고 있다. 이 송영은 바울의 일반 문체와 다르다고주장하는 이도 있고, 그 친필성(진작성)은 문체의 면에서 의심된다는 것.

(4) 바울은 로마교회에 비교적 친분이 있었던데서, 16장의 개인적인 인사는 사정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그것들은 모두 오히려 에베소서(에베소교회에의 편지)의 인사로 적합하다는 것 등이다.이들 반론에도 불구하고, 본서의 통일성은 잃어지지 않고 있다. 본문(Text)의 문제는 다음과같이 생각하면 해결되리라. 즉 이단자 마르키온(Marcion 초대교회의 僞바울주의적 이단자AD 154-166에 로마에서 활약했다)은, 15장을 유대교가 복음전진에 준비적 기능을 한 것을인정하는 일로 보고, 최종의 2장을 고의로 삭제했다는 것이다(예 15:4-성서에 기록된 모든말씀은 우리를 교훈하기 위한 것이며, 성서가 우리에게 주는 인내와 위로의 말씀을 통하여우리로 희망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15장에는 구약성서의 인용이 적어도 다섯이나있고, 16장은 마르키온의 견해에 찬성도 반대도 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러므로 현행의 긴 것의 편이, 본래의 것으로서 용인된다. 14장으로 끝나고 단축된 것은,구약성서에 대한 편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 열거되어 있는 16장에 대해서는, 가능한 많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바울의 목적이었음을 고려하면, 어느 의미에서 그것이 오히려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에베소가 대부분의 바울서신의 집필지라는 가정을 별도로 해도 로마는 바울의 친구들에게 있어서, 에베소와 마찬가지로 거주에 알맞는 곳이었다.그러므로 로마서는 본래 사도가 일시에 써서 고린도에서 보낸 완결된 편지로서, 그 완전성을 잃지 않고, 현재의 형태로 전해졌다는 견해를지지 않을 수 없다. 본문을 이것저것잘라버리는 학설은 오히려 내용이 가지는 통일성을 무너뜨리는 심각한 위험이 있는 것이다.

 

9. 본서의 영향-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이래, 본서는 신학뿐 아니라 철학에도 정치에도 깊은영향을 주었다. 특히 종교개혁자들은 로마서에 의해 싸우고, 그리고 저 로마 카톨릭의 유럽에, 새로운 교회와 시대를 창조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바르트(K. Barth)는 로마서에 의해 문학적 근대주의 그리스도교와 신학에 도전하고,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었다. 로마서야말로 [신약성서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모든 것 중 아주 분명한 복음이다](M.Luther). 그러므로 [로마서를 이해하는 자는 바로 그 이해에 의해 성서의 모든 보고의 입구에 들어간다](J. Calvin)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文獻] M. Luther:Romerbrief-Vorlesung; J. Calvin:Commentarii in epistolamad Romanos, 1540, E.Tr. by Owen, 1849; W. Sandy-A.C. Headlam: The Epistle to the Romans, ICC, 1895, 新版1905; J. Denny:Comm. on Romans(The Expositor's Greek Testament), II. 1900; K.Barth:Der Romerbrief, 1919, 1926^6; C.H. Dodd: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Moff. Comm.),1932, 1949^12; A. Nygren:Pauli brev till Romarna, 1944; O. Michel:Der Brief an die Romer(MeyerKomm.), 1955^10, 1963^12; J. Murry; The Epistle to the Romans, I. 1960, 1964^2, II. 1965; 日本 것으로는 內村監三, 黑崎幸吉,高倉德太郎,村田四郎,山谷省吾,등의 주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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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The Roman Empire(지명)

 

(The Roman Empire, 帝國)

 

(1) 개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했을 때 유대는 헤롯 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 유대는로마의 종속국의 하나였다. 헤롯 왕은 그 부친 안티파터(Antipater)의 대 이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종속국으로써 유대는 로마에 의한 과세를 거부할 수 없었다. 이과세의 현실적 징수는 헤롯이 로마 황제의 비위를 건드려 `가이사의 벗'(amicus Caesaris)이라는 칭호를 빼앗긴(BC 8) 다음 BC 7년부터 시작되었다. BC 4년 헤롯이 죽고 상속자 다툼으로 얼마동안 혼란이 계속되는데, 그 수습책의 하나로 로마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를 영지로써 받은 헤롯 왕의 아들 아켈라오는 AD 6년 폭정때문에 추방되고, 그 해 유대와 사마리아는 정식으로 로마의 직접 통치하로 들어간다.로마의 `속주(屬州) 유대'(Provincia Judaea)가 그것이다. 그 후 이 유대는 로마로부터 파견되어 오는 총독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총독부는 해안 도시 가이사랴에 있었다. 예수님을 재판하고 십자가형을 명한 것은 이 속주 총독의 한 사람인 본디오 빌라도였다. 예수님은그의 앞에 반로마적인 군사적 메시야 왕으로서 기소되어 있었던 것이다. 기소한 것은 로마지배에 밀착하고 있던 유대측 지배층이었던 가야바 등 공회 수뇌부였다. 사도 바울의 재판도 유대 총독 벨릭스, 이어서 베스도의 법정에서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로마 시민으로서의권리를 행사하여 황제에게 상소하였다. 이상의 몇 개 사실로부터 분명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복음의 선교와는 유대의 땅을 무대로하여 전파되었으나, 그것은 동시에 로마제국의 지배 역사와 밀접하게 엉키어 거기서 극히 중요한 몇 개의 역사적 낙인을 받은 것이었다. 이 관련을 분명히 하기 위해 다음에 간단히 로마의 지배 역사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2) 로마의 건국:

로마 제국은 본래 중부 이탈리아의 한 구석에 있던 한 작은 도시 국가가점차 사방으로 세력을 뻗혀 지중해 세계 전체를 그 지배하에 넣었던 것이다. 이 소도시 국가는, 전설로는 BC 753년, 그러나 실제로는 BC 600년 경 건국된 것인데, 티벳 강 하류에 부락을 이루고 있던 라틴 사람의 일파와 그 부근에 부락을 만들고 있던 사비니 사람(Sabini)이 합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라틴 사람과 사비니 사람은 이탈리아 사람에 속한 종족인데, 이 이탈리아 사람은 근본을 따지면 인도 유럽어족(印度語族)에 속한 민족으로서,BC 1000년 전후에 북방에서 이탈리아 반도에 남하 이주한 족속이다. 그것은 희랍에 도리아족(Doria\ns)이 남하 이주한 것과 거의 때를 같이 하였는데, 같은 물결을 탄 것이었다고 생각된다.새로 만들어진 로마 도시 국가는 처음에 왕정(王政)을 했으나, 곧 북방 에트루리아(Etruria)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에트루리아는 BC 8세기부터 BC 6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토스카나(Toscana) 지방을 중심으로하여 12도시가 연합하여 강성(强盛)을 자랑한 민족이었는데, 그 언어 계통이 셈어계(語系)인지, 인도 유럽어계인지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아직분명치 않기 때문에 아직 수수께끼의 민족으로 되어 있다. 다만, 그들의 계보에 대해서는 원래 이탈리아 반도에 정주하고 있던 선 주민이라고 하는 설이 고래로부터 전해져 오늘날도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며, 다른 편에서는 헤로도터스(Herodotus)에게는 그들은 소아시아 서부의 류디아 사람(Lydians)의 일부가 도항(渡航)하여 왔다고 하는 전승이 있으며, 오늘날 이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편이 많다. 여하튼 당시 그들은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희랍계 문자를 사용하여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희랍인 식민지와 같은 발생기의 로마 사회,제도,습관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로마 왕 최후의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타르퀴니우스(Tarquinius)라는 에트루리아의 이름을 가지고, 나머지 한 사람은 타르퀴니우스가의 사위였음이 알려져 있다. 이것으로부터 그들은 밖에서부터 들어와 로마의 왕으로 된, 본시 에트루리아 귀족이었다고 생각되며, 에트루리아에 의한 지배가 이것으로부터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BC 500년 경 이 최후의 왕이 귀족의 젊은 아내 루크레티아(Lucletia)를 강간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이 왕은 로마의 귀족으로부터 쫓겨났다. 이것이 로마 공화정치의 시작이다.

 

(3) 공화정치:

로마의 공화정치라는 것은 귀족(파트리커, patricii)으로 구성되는 원로원이 정치의 실권을 갖고 있으나, 정치의 실제 행사는 귀족 중에서 매년 두 사람씩 뽑히는 임기 1년의 집정관(執政官, consul)에게 위임되며, 또 한편으로는 전 시민에 의한 민회(民會)도 정식 의결 기관으로써 설치되어 있는 국제(國制)를 가리킨다. 그것은 희랍의 폴리스로 발전한민주정치와도 다르고, 또 귀족만의 과두정치도 아니다. 이를테면 귀족정치와 민주정치의 혼합체와 같은 것인데, 임기 중의 집정관이나 비상시에 임기 반 년으로 뽑히는 독재관(dictator)의 절대적 권력에는 왕정(王政)의 전통도 이어지고 있다는 참으로 독특한 국제였다. 이와 같은 국제는 타협의 산물일 수 없다. 사실, 과감한 정치적 타협이야말로 로마인으로 하여금 생득적(生得的)인 `정치인'으로서의 큰 그릇이 되게 하였으나, 이 타협은 또 필요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시 에트루라아계의 왕을 추방하여 북방의 영웅 에트루리아와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다른 라틴인의 제도시와의 전쟁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로마가 방위를 위해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조치의 하나였다. 왜냐하면, 종래의 귀족에 의한 기병의 일대 일로 맞선 싸움을 주로하는 전투로부터 중무장을 한 보병의 밀집 방진(密集方陳)에 의한 전투로 전술의 전환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이 새로운 형의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중무장 보병으로서 출진할 평민(平民, plebs)을 방위력으로서 동원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국내 정치에서 평민과의 타협이 불가결했으며, 또 항상 전쟁 체제에 있을 필요상 집정관 따위의 고급 관리(그들은 로마에서는 동시에 군사령관인데)의 권력을 강화해 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공화정치의 초두부터 이와 같은 유연(柔軟)한 정치적 타협을 거듭하여 공화정치의 형태는 항상 변화되어 갔다. 최초의 사건은 BC 495년에 일어났다. 그 당시 채무에 빠진 빈민이 많아 이 채재(債財) 문제를 계기로 평민의 귀족에 대한불만이 폭발하여 평민은 일제히 로마시를 퇴거하여 시의 동북쪽 약 5㎞지점에있는성산(몬스 사케르, Mons Sacer)에 농성했다. 그들은 요구가 수락되지 않을 경우 별도의 독립 공동체 국가를 결성할 기색을 보였으므로, 귀족도 양보하고 그 조건으로서 평민들만의 민회(民會, 平民會)와 그 의장을 할 의민관(議民官)의 설치를 허락했다. 더욱이 이 의민관에게정무관(政務官)의 명령이나 원로원, 국가 전체의 민회(이것은 평민회와 구별하여 병원회〈兵員會〉라 부른다)의 결의를 거부하거나 방해할 권한을 부여하여, 이 권한을 가지고 평민의권리를 수호하도록 하게 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때 국가 권력이 명하는 바를 거부할 수 있는 저항권이 국가 자체에 의해 인정되었던 것이다. 또 평민회는 정식 민회가 아니기 때문에그 결의는 국법으로는 되지 않았으나, 평민회 결의는 평민의 의지 표명으로서 실제적으로는정치적 효과를 지니게 되었다.다음 변화는 BC 450년에 일어났다. 이 해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십이표법(十二表法, lex<&24904>. Tabularum)이 제정되었다.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성문법의 제정은 로마에 있어서도 귀족에 의한 법의 독점을 깨고 평민의 권리 옹호에 한몫 했다. 십이표법에는 평민의권리를 인정한 조항 외에 귀족의 기득 권한을 인정한 것도 많아 그 점에서 바로 양자의 타협을 나타내는 것인데, 여기에 정해져 있는 귀족과 평민과의 통혼 금지가 BC 445년의 카눌레이우스법(lex Canuleia)에 의해 철폐된 것에 나타나 있듯이, 점차 귀족과 평민과의 양 신분의 평등에도 진일보 되어갔다.이와 같은 타협에 의해 강화된 로마군의 군사력은 곧 인근의 적과의 싸움에서 그 위력을 나타내어 남방에서는 아에쿠이인(Aequii)이나 볼스키인(Volscii)을 격파하고, 북방에서는 에트루리아의 대세력 웨이이(Weii)와 10년간의 싸움 끝에BC 396년 마침내 이를 항복시키는 등 점차 사방으로 영역을 넓혀 갔다. 그러나 BC 387년돌연 북방에서 켈트인(Celts)이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로마시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방화하여로마가 잿더미로 된 사건이 생겼다. 켈트인은 곧 철수했으나 로마의 부흥은 지극히 곤란하여 특히 그것은 빈민에게 큰 중압으로 되었다. 이 곤란 속에서 귀족과 평민의 다툼이 다시격화되어 정정은 혼돈하였지만, BC 367년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법(Leges Licini aeSextiae)이 제정되어 일단 타협이 성립되었다. 이 법은 빈민의 부채를 경감할 조치와, 대토지 소유의 형성을 저지하기 위한 국유지 이용에 대한 제한조치를 포함한 경제적인 조항, 그리고 차후로는 집정관의 한 사람을 평민 출신자로 한다는 정치적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이 중 경제적 조항은 빈부 격차의 확대를 막으려는 것이었으나, 이것 또한 군사적 필요상요청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에서는 희랍의 폴리스(povli") 따위처럼 무장은 자비(自費)로 하는것이 방침이었으나, 중무장 보병으로서의 무장을 갖출 경제력이 있는 자로서는 어느 정도의토지를 소유하는 중소농민이 아니면 안되었으므로, 빈민의 증대는 즉각 방위력의 저하로 되지 아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법에 있는 조치에 의해 빈부 격차의 확대를 막고,또 정치적 양보도 이에 덧붙여 평민, 특히 그 핵심적 상층인 중무장 보병 농민과의 동맹 강화를 꾀하였던 것이다.도시국가 로마는, 귀족과 평민과의 신분상 차이는 있을지라도 건국 당초부터 도시국가 구성원, 즉 로마시민의 평등 관계를 주의로 하는 공동체 국가였다. 이 시민 공동체가 내부의빈부차의 증대 때문에 점차 그 평등 관계를 상실해 간 것, 즉 분해한 것은 공동체 국가 그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로마의 정치는 이런 분해를 저지 내지는 복구시키는 개혁을 재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개혁의 하나였던 BC 367년의 개혁에 의해 로마는 막스 웨버(Max We\ber)가 말한 의미의 `중무장 보병 폴리스'(Hoplitenpolis)로서의 진용을 갖추고 다시 그 위력을 발휘, 종종 대적한 라틴인 제도시 국가를 마침내 BC 338년에 격파하고 라티움(Latium)을 그 지배하에 넣었다. 이어 로마는 이전부터 적대 관계에 있던 아페닌 산맥(Apennines Mts) 남쪽에 사는 산지 종족인 삼니트인(Samnites, 이들도 이탈리아인의 한 종족)과 세 차례에 걸쳐 전쟁을 하여 BC 290년에는 마침내 이를 굴복시켜 중부 이탈리아에게 재갈을 물리게 되었다. 굴복시킨 이들 도시국가에대한 로마의 지배는 각 도시국가와 개별적으로 조약을 체결하고, 각기 도시국가와 로마와의관계를 다양화함으로써 종속한 도시국가 상호간의 이해 일치를 방해한다고 하는, 소위 `분할 통치'(divide et impera) 방식이었다. 그리고 종속한 도시국가는 군사^외교에서는 로마에그 결정권을 빼앗겼으나 내정에 대해서는 종래대로 자치가 허용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와같은 방식이 이후 로마의 다른 공동체에 대한 지배의 원형으로 된다.그런데, 중부 이탈리아에 있어서 패전 획득에 대한 전쟁은 다시 로마 시민 공동체의 분해를 야기했다. 증대하는 채무자의 불만 때문에 BC 287년, 평민은 다시 로마시 퇴거를 감행하여 이번에는 티벳 강 저쪽에 있는 야니쿨롬(Janiculum) 구릉에 농성하였다. 이 투쟁의 결과도 역시 귀족의 양보였다. 평민회의 결의는 국가 전체의 민회인 병원회(兵員會)에서 결의된것과 마찬가지로, 이후부터 국가 전체를 구속하는 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는 것을 규정한호르텐시우스법(lex Horten\sia)의 제정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법으로 귀족과 평민과의 신분 투쟁은 종식을 고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의 정치가 완전히 민중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BC 367년 리키니우스 섹시티우스법의 개혁 이래 집정관으로취임한 평민 출신자는 평민 중에서도 극히 소수의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의 출신자에 한하였으며, 이들 평민 상층의 유력자와 귀족과의 밀착에 의한 새로운 `노빌레스'(nobiles)라 불리우는 귀족이 실질적으로 로마의 정권을 공화 정치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조종하게 되었기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노빌레스는 BC 287년의 양보로 평민과의 동맹을 재확인하고 공동체의 강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얼마 안 있어 로마는 BC 282년 남부 이탈리아의제도시간의 싸움에 개입하여 타렌툼(Tarentum)과 전단을 열었으나, 에피루스(Epirus) 왕 퓨르로스(Pyrrhus)가 타렌툼을 돕기 위해 이탈리아에 침입했기 때문에 난국을 맞았다. 그러나악전고투 끝에 퓨르로스를 쫓아 버리고 BC 272년 간신히 승리를 거둔 로마는 BC 266년까지 중^남부 이탈리아를 완전히 그의 세력하에 두게 되었다.

 

(4) 포에니 전쟁(Punic War):

여기서 로마는 카르타고와 이해가 충돌하게 되자 BC 3세기중에 두 번 포에니 전쟁을 했다. 카르타고(Carthazo)는 BC 8세기 경 베니기아인이 아프리카북안 지금의 튜니지아(Tunisia) 부근에 건설한 식민시인데, 해상 무역으로 번영하여 BC 6세기 경 이후는 서지중해에 그의 웅자(雄姿)를 과시하고 있었다. 로마와는 지금까지 수차에 걸쳐 조약을 맺고 제각기의 세력 범위를 인정하고 있었던 형편이었는데, 바야흐로 남부 이탈리아에까지 진출한 로마와는 결국 언젠가는 충돌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에 있었다.제 1차 포에니 전쟁(First Punic War, BC 264-241)은 사소한 일로 발단되어 지금까지 본격적인 해군을 갖고 있지 않던 로마에게 있어서 그것은 대단한 고전이었다. 로마는신형 군함을 많이 건조하고, 거듭된 패전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승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 전후 로마는 지금까지 카르타고의 세력하에 있던 시칠리아(Sicilia)의 대부분을 속주(屬州)로하고, 수 년 후 코르시카(Corsica), 사르지니아(Sa\rdinia)도 속주로서 병합하였다. 이들 병합은 로마에게 있어서 최초의 해외영(海外領)이며, 로마에게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고과세하는 속주(프로빈키아, provincia) 통치 방식의 최초 예였다. 또 한편 제 1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는 북부 이탈리아와 아드리아해 연안 지방에도 정복의 손길을 펴서 곧 그 땅에몇 개의 식민시를 건설하고 로마 시민을 보냈다. 이들 로마 시민에 의한 식민시는 행정상본국 로마시의 구(區) 일부분으로서 취급되고 식민자(植民者)는 로마시의 시민임을 그만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식민시는 로마의 전진 거점으로서 쓸모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술한조약에 의해 다른 도시 국가나 왕국을 종속시키는 방식과, 지금 시작한 속주 통치 방식과,식민시 건설은 그 후 로마 제국(帝國) 지배의 중요한 세 기둥으로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곧 자치가 허용된 다른 도시국가 또는 왕국의 지배적 상층에 로마 시민권을 주어 그들을 지배자측인 로마 시민 공동체에 포섭하려는 방법을 종종 쓰게 되어, 로마의 세계 제국(帝國) 지배의 구조는 완성해 가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들 몇 가지 방식은 후에 유대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패한 카르타고는 그대로 주저앉은 것은 아니었다. 명장 하밀카르 바르카스(HamilcarBarcas)와 그의 아들 한니발(Hannibal)은 스페인에서 로마 복수전(復讐戰)을 준비하여 BC218년 한니발은 코끼리 수 10두를포함한대군을거느리고 피레네(Pyrenees)와 눈 쌓인 알프스를 넘어 북쪽으로부터 이탈리아로 쳐들어 왔다(제 2차 포에니 전쟁). 그 후 한니발은 트라시메누스(Trasimenus) 호반의 싸움이나 칸나에(Cannae) 싸움 등에서 몇 번이나 로마군을전멸시켰으나, 로마는 패전때마다 사기를 떨쳐 스키피오(P. Scipio)를 우두머리로 하는 원정군에 의해 스페인의 카르타군 근거지를 빼앗고, 나아가 카르타고에 역상륙(逆上陸)를 감행하여 마침내 BC 201년 구원하러 귀국한 한니발군을 자마(Zama) 싸움에서 격파하여 카르타고로 하여금 화청(和請)케 하였다.

 

(5) 동지중해에로:

두 차례에 걸친 이 포에니 전쟁은 로마를 서지중해의 패자(覇者)로 만들었으며, 뿐만 아니라 이 전쟁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로마가 동지중해에로 진출하게 된 점에서도 그것은 로마의 제국 지배의 진전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되었다. 먼저제 1차 포에니 전쟁 종식 후 로마는 남이탈리아의 희랍 제도시와의 동맹 관계에서 그 당시강력하게 된 아드리아 해안의 이루리아 왕국과 두 번 이루키아 전쟁을 일으켜(제 1차:BC229-228, 제 2차:BC 219) 승리하였다. 이어 제 2차 포에니 전쟁 중 마게도냐 왕 필립포스 Ⅴ세(Philippos Ⅴ)가 한니발을 도와주었으므로 잠시 제 1차 마게도냐 전쟁(FirstMacedonian War, BC 214-205)이 일어났으나, 그 후 필립포스 Ⅴ세의 세력 확대에불안을 느낀 로마는 제 2차 마게도냐 전쟁(Second Macedonian War, BC 200-196)을 일으켜 희랍 제도시를 마게도냐 왕의 지배에서 해방시켰다. 이어 그 당시 구라파에까지군대를 보냈던 수리아 왕 안디오코스 Ⅲ세(Antiochus Ⅲ)에게 선전을 포고하고 로마군은 처음으로 아시아의 다른 곳으로 진군시켜 수리아군을 격파하였다(수리아 전쟁, BC192-189). 이때까지 로마는 전승 후 군대를 철수시켜 영토를 병합하는 행동으로까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곧 로마의 동방 정책에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제 3차 마게도냐 전쟁 후부터이다. 제 3차 마게도냐 전쟁(Third Mace\doni an War, BC171-167)은 국력을 회복한 마게도냐가 로마의 동맹국 페르가모(Pergamum)와 충돌한데서부터 일어난 전쟁인데, 로마군은 왕 페르세우스(Perseus)를 퓨드나(Pydna) 싸움(BC168)에서 격파하여 이를 항복시켰다. 전후 처리는 종래에 볼 수 없이 가혹하였는데, 마게도냐인이나 마게도냐측에 가담했던 제도시에는 세금을 물게 하고, 또 아가야 동맹의 유력자1,000명을 인질로 로마로 데려갔고, 에피루스에서는 15만 명이 노예로 되었다. 그 후 마게도냐가 다시 군을 일으켰을 때 로마는 이를 격파하고 BC 146년 마침내 마게도냐를 속주로 하였다. BC 146년, 아가야인을 중심한 반로마 반항 운동도 진압되고 고린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어 전 주민은 노예로 팔렸다. 그 후 희랍도 속주나 진배없는 것으로 되어버렸다.BC 146년은 로마의 침략 정책에 있어서 기념할만한 해인데, BC 149년에 일어난 제 3차포에니 전쟁 결과 카르타고시가 잿더미로 된 것도 이 해였다. 다른 한편, 스페인도 제 2차포에니 전쟁 후 BC 197년 속주로 되었으나, 그 곳 원주민의 반란이 꼬리를 물로 일어나 2차에 걸친 켈티베리아(Celtiberia) 전쟁을 거쳐 제 3차 켈티베리아 전쟁에서 적의 아성 누만티아(Numantia)를 교전 결과 불살라버리고(BC 133) 간신히 이를 평정하였다. BC 133년 페르가모 왕 앗탈로스 Ⅲ(Attalos Ⅲ)가 죽었는데, 지금까지 로마 쪽에 붙어 있던 페르가모도점차 강대한 로마 앞에서 독립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을 깨닫고 앗탈로스는 그 유언에서왕국을 로마에 유증(遺贈)하였다. BC 129년 이 땅은 로마의 속주 아시아로 되었다. 또 북쪽이탈리아에 대한 정복도 BC 2세기 전반 시기에는 진행되어 마르세이유(Marseille)에서 이스트리아 반도(Istria Peninsula)에 이르는 지방이 로마의 세력하에 들어가 그들 지방에 몇 개의 중요한 식민시가 건설되었다.

 

(6) 정복 결과:

불과 반 세기 동안에 로마는 이렇게 서지중해 지방의 패자(覇者)의 지위에서동지중해에로 진출하여 급속히 영토의 확장을 행하였는데, 이것은 중대한 몇 가지 결과를초래하게 되었다. 그하나는 로마에 대한 반항 운동을 불러 일으킨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로마 제국의 지배는 전술한 바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제 방식에 공통하는 성격은 피정복지의 공동체나 국가의 유산 지배층과 결합하여 이를 온존(溫存)하고, 때로는 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어 로마 시민 공동체라는 지배자측의 조직에 편입하는 것이었다.일반 민중이나 하층민이 그들의 지배층에 반항을 일으킬 때 그것은 당장 반로마 저항운동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들 하층민에 대한 착취는 로마 지배에 의해 배가되어 더해 갔기 때문에, 바야흐로 그와 같은 반항운동이 각지에서 속출하게 되었다. BC 2세기의 후반, 각지에서 일어난 노예반란이 그것이었다. 당시 최대의 것은 BC 136년 경 시칠리아에서일어난 노예반란인데, 가난한 하층 자유민도 이에 가담하여 한 때는 7만의 반란군으로까지증대하였다. 로마에서 파견된 진압군은 매년 패배하여 BC 132년에 이르러 겨우 진압시켰던것이다.같은 무렵, 같은 반란이 희랍, 로드 섬, 이탈리아의 일부에서도 일어나 시칠리아에서는 BC104년부터 100년에 걸쳐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또 BC 133년 페르가모의 로마에의 유증 후,죽은 앗타로스 Ⅲ세의 동생인 아리스토니코스(Aristonikos)는 이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하층 자유민이나 노예를 규합하여 `태양의 나라'(Heliopolis)라 칭하는 사회주의적인 이상 국가를 목적으로 싸웠다. 로마군은 한 때 이에 대패했지만, BC 136년에 이르러 겨우 이를 진압할 수 있었다. 후에 유대가로마의 세력하에 들어가게 되자 유대에서도 이와 같은 반지배층, 반로마의 반항운동이 전개되어 다른 제민족의 반항이 이미 끝난 후에도 이것이 계속되어 곧 예루살렘의 파괴와 민족의 조국 상실로 끝나게 되었다.로마의 급격한 대외 정복이 초래한 또 하나의 결과는, 로마 자체에 미친 그 반작용이었다.전술한 바와 같이 당시의 군제(軍制)하에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내부의 비교적 평등을 유지하는 것, 즉 분해를 저지하는 것이 필요하였으나, 거대한 규모로서의 정복은 오히려 분해를 촉진하였던 것이다. 장기에 걸친 외지에서의 전쟁은 종사했던 농민 병사의 농지를 황폐시켰다. 이리하여 토지를 상실한 농민은 종종 제대 후에 식민시에 토지를 주어 내보냈는데, 이것은 전체에서 보면 극소수이고, 대부분은 로마시에 모여 정부에서 받는값싼 곡물 배급에 의지하는 빈민으로 전락하였다. 또 한편, 정복지의 속주로서의 경영은 그곳에 총독으로 파견된 귀족층의 사복을 채우고, 또 속주의 조세 징속을 청부한 자본가층을한층 더 부유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공동체의 분해는 로마의 군사력 저하로 되어 나타나게되었다. 누만티아 공략전의 고전이라든가, 노예반란 진압의 곤란 따위는 그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태를 보고 개혁운동에 헌신한 사람이 티베리우스 그락쿠스(TiberiusGracchus)이다. 그는 손수 누만티아 공략전에 참가하여 로마군 병사의 약화를 직접 보고,또 원정에 나가고 돌아오면서, 에트루리아를 통과할 때에 농토의 황폐와, 농민 대신에 대토지 소유자의 노예제도 경영이 보급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이 귀족 출신이었지만 BC133년 호민관이 되어 개혁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개혁안은 제멋대로 대지주가 쓰고있는 고유지를 회수하여 빈민에게 재분배한다는 것이었는데, 이 법안 자체는 민회를 통과했지만, 그는 곧 반대파에 피살되었다. 10년 후 동생인 가이우스 그락쿠스(Gaius Gracchus)가호민관이 되어 형의 개혁운동을 계승하여 자본가들을 자기 편으로 포섭하여 목적 달성을 꾀하였으나, 그도 역시 반대파의 손에 걸려 학살되었다. 그락쿠스 형제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빈민에의 토지 할당 사업은 수년간 계속되었으나, 이것도 10년쯤 뒤에는 중지상태로 되고,로마 시민 공동체는 다시 분해의 물결에 말려 들어갔다.

 

(7) 100년의 반란:

그락쿠스 형제의 참살은 100년 내란의 개시를 고하는 경종이었다. 그것은그락쿠스 형제를 죽여도 문제 자체는 하등 해결되지 않은 채 있었기 때문이며, 그 해결을둘러싸고 바야흐로 무장(武將) 정치가들이 권력을 구하여 싸웠다. 이 권력 투쟁이 무력을 수반하게 된 것은 마리우스(Marius)의 개혁 수반 현상이었다. 마리우스는 명문의 출신은 아니었으나, BC 107년 아프리카의 종속국 누미디아(Numidia)의 왕위 다툼의 조정(調淨)을 둘러싸고 일어난 유그루타 전쟁 때 집정관으로 선발되어 로마군을 지휘했다. 이때 마리우스는빈곤한 시민 중에서 지원병을 모집하여 이를 무장시켜 이 새 편성군으로 유고루타를 격파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무장 자비 부담의 농민을 중심으로 한 병사로 군대가 구성되어온데 대하여 큰 개혁인데, 중소 농민의 몰락에 의해 종래의 병제(兵制)가 군사력의 저하를초래했다는데 대한 개혁책이었다. 마리우스는 다시 이 군대로서 BC 113년 이후 로마 국경을 침범하고 아라우시오(Arausio, 지금의 오란쥬, Orange)에서 8만의 로마군을 전멸시킨 킨보리 테우토네스의 게르만 재종족의 격퇴에 즈음하여 BC 101년 드디어 결정적인 승리를 초래할 수 있었다. 마리우스는 전후 그 군대를 해산하고 제대병을 누미디아, 시칠리아, 희랍,마게도냐, 코르시카 등의 각지의 식민으로 보내 토지 소유 농민으로 부활시켰다. 이 방법은그 후 술라(Sulla), 폼페이우스(Pompeius), 가이사 등 공화정치 말기를 장식한 무장의 답습하는바 되었는데, 이것으로서 토지를 잃은 빈민 시민은 군무를 매개로 다시 토지 소유 농민으로 될 수 있었으며, 이리하여 공화정치 말기에는 공동체의 분해는 이 길을 통하여 한 때저지한 셈이 된다. 그러나 또 한편 마리우스의 새 병제는 무장과 병사와의 개인적 관계를강화했으므로 이후 로마의 군대는 마치 장군의 사병(私兵)과 같은 존재로 되어, 이것이 권력투쟁에 쓰여 오랫동안 심한 내란으로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내란에 있어서 상잔한 무장 정치가들은 그저 무턱대고 권력 획득만 급급한 것이 아니고, 크게 말해 두 가지 사고 방식에 따라 싸웠다. 즉, 한 쪽은 민회의 결의를 배경으로 하여 개혁안을 통과시켜 자기의 권력을 장악하려고 한 사람들이며, 또 한 편은 민회 중심이아니고 옛날부터의 전통에 따라 원로원의 권위 존중 위에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전자는 민중파(Populares), 후자는 족벌파(族閥派, Optimates)라 불리웠다. 내란은 또 대외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먼저 BC 91-88년의 이탈리아 동맹시(同盟市) 전쟁에서는 종래 로마의 대외 전쟁에 협력하면서 거의 보잘 것 없는 이득도 받지 못했던 이탈리아 동맹 제도시가 결속하여 반로마 통일전선을 만들어 로마 시민권을 요구하여싸웠다. 이 전반적 반란에 로마는 위기에 빠졌으나 적을 격파하는 것과 로마 시민권 부여의약속으로 간신히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그때 민중파는 동맹 도시에 유리한 해결책을 마련하여 그것으로 동맹 도시를 내란에서 자기편에 끌어 넣으려 하였다. 여하튼 이 전쟁에 의해 로마 시민권은 이탈리아 반도 전체에 미쳤으므로 그 후 로마 제국의 지배자인 로마 시민공동체의 모지(母地)는 로마시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로 되었다. 또 동방에서는 소아시아의 본도 왕 미드리다테스(Mithridates)가 로마에 반항하여 하층민을 자기편으로하여 희랍에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대하여 로마로부터는 처음에는 족벌파의 술라가, 후에는 그 부장폼페이우스가 원정군을 지휘하여 파견되었다. BC 63년 미드리다테스를 추적하여 자살로 몰아 넣은 폼페이우스는 나아가 알메니아, 수리아, 아랍의 일부에까지 발을 뻗혀 그들 지방을로마의 세력하에 두었으나, 그때 유대의 힐카노스 Ⅱ세(Hyrcanus Ⅱ)와 그의 동생 아리스토불로스 Ⅱ세(Aristobulus Ⅱ)와의 왕위 쟁탈전에 개입하여 아리스토불리우스파를 예루살렘성전에 석 달 동안 가두고 포위한 결과 마침내 이를 함락시켰다. 유대가 직접 로마의 세력하에 들어간 것은 이 때였다. 이와 같은 외정(外征)은 또 동시에 무훈을 세운 무장의 내란에있어서 지위를 강화시킨 역할도 했다. 마찬가지로 외정의 대성공에 의해 정치적으로도 유력하게 된 무장은 곧 대두하는 율리우스 가이사(쥴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이다. 그는 BC58년부터 10년간 북이탈리아에서 이리리쿰, 갈리아에서 브리타니아에까지 원정의 발길을 뻗혀 무비한 실력을 쌓았다. 이전에는 빚장이었다고 하는 그가 이 원정에서 로마 세계에서 제일 가는 부자로 둔갑하고, 정치적 수하들을 많이 두어 강력하게 된 것을 보고 폼페이우스와원로원파는 로마에서 반가이사전의 준비를 착착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가이사는 이탈리아로쳐들어가 도망치는 폼페이우스군과 원로원파를 추격하여 희랍에 이르러 파르살로스(Pharsalos) 평야에서 이를 섬멸했다(BC 48). 그 후 도망치는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알렉산드리아에 온 가이사는, 거기서 클레오파트라(Cleopatra)에 반해 궁정의 내분에 말려들어시가전에서 고전에 빠졌으나, 이때 유대의 헤롯 왕의 부친인 안티파테르(Antipater)가 군사를 거느리고 내원(來援)하여 가이사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 공에 의해 안티파테르는 가이사로부터 로마 시민권을 받았다. 이리하여 유대의 헤롯 왕조는 지배자인 로마 시민 공동체의 일원(一員)에 완전히 편입되어 로마 지배의 전형적인 구조가 유대에도 확립되었던 것이다.BC 44년 3월 15일, 가이사는 너무나 강대한 권력 때문에 원로원파의 칼날에 쓰러졌다. 브루터스(Brutus)나 카시우스(Cassius)라는 가이사 암살자에 대한 가이사의 무장 안토니우스의 빌립보에서의 결전(BC 42)은 안토니우스의 승리로 끝났으나, 안토니우스도 또한 클레오파트라의 포로가 되어 마침내 그녀와 결혼, 마음대로 로마의 영주를 이 프토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에게 주는 등 방자한 행동을 거듭했으므로, 마침내 가이사의 조카이며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동정(東征)하여 희랍 서안의 악티움(Actium) 해전(BC 31)에서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비운의 이 부부가 이듬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살했을 때,100년의 내란은 사실상 종식되었다. 가이사에게서 세계 최대의 부와 최대의 군대를 물려 받은 옥타비아누스 단 한 사람이 남아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 시민 공동체의 정상에 서있었다. 어지럽게 변전하는 내란의 최후의 국면에서 유대의 실권자 안티바는 교묘히 처신하여 항상 그때마다 승리자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하였다. 전에 가이사와 맺었던 안티바는 얼마 후에는 가이사의 암살자 카시우스에 군자금을 보내고, 나아가 아들 헤롯 왕은 안토니우스를 바꾸었다. 악티움의 싸움에서 헤롯은 나바티아(Nabateans)와의 전쟁에 손을 붙잡히고있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에게 구원군을 보낼 수 없었던 것이 다행으로 전후 승리자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유대 왕의 지위가 안정되었다.

 

(8) 원수 정치(元首政治, Principatus):

BC 27년 1월의 원로원 회의에서 새로운 정치가 정해졌다. 그때까지 옥타비아누스는 내란 진압을 위해 공화정치의 목적에 위배되는 예외적인 제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 그는 그것을 전부 반환하고나서, 로마 전 속주의 절반을 통치하는 권한을 위임받고, 나머지 절반은 원로원이 관할하도록 규정되었다. 그 밖의 점에서는대개 공화정치의 형태가 부활했으나, 옥타비아누스의 실력과 내란 진입자의 권위가 법이나제도보다 우선한다는 질서의 원리인 것이다. 그가 가지는 질서나 지위는 그 후 여러 모양으로 변화했는데, 그것은 모두 공화정치적인 전통을 가지는 것이며, 그를 `제 일인자', 또는 `원수(프린케프스)'라 부르는 일은 있어도, 황제라는 지위가 새로 생긴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 후부터의 정치 형태를 `원수 정치(프린키파투스)'라고 일반적으로 부르나,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그것은 점차 `제정(帝政)'과 같은 것으로 되어 갔다. 원로원은 BC 27년 1월의결정을 공화정치의 부활이라고 기뻐하여 그에게 `아구스도'(Augustus, 존엄한 자)라는 존칭을 바치고 감사했다.원수정치 시기에 들어가서도 도시국가를 이루는 로마 시민 공동체에 의한 다른 공동체, 국가의 지배라는 로마 제국 지배의 구조에는 즉각 변화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관할의 속주에만 군대가 주둔한 것에 유래하는 황제에 의한 전군 지휘권의 장악과, 관료제의 점차적 완성은 제국 지배의 구조에 차차 변화를 가져왔다. 공화정치 시기에는 전문적인관료군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 그 독자적인 지배 구조를 필요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었으나,바야흐로 아구스도(Augustus, BC 27-AD 14 재위)에 이어 다음의 디베료(Tiberius, AD 14-37 재위), 제 4대의 글라우디오(Claudius, AD 41-53 재위)는 특히 관료, 행정 조직의 정비에 힘쓰고 제국의 모습은 일변했다.국경 상태는 대체적으로 수세(守勢)였으나, 북방에서는 도나우 강 선을 방비하고, 또 한 때엘베 강까지 군을 진주시켜 AD 9년의 튜토브르크(Teutoburg) 숲에서의 대패전을 제외하면군사 상황도 순조로왔다. 이와 같이 초창기의 황제의 노력에 의해 새로운 국가의 기초는 다져져 칼리굴라(Caligula, AD 37-41 재위)와 같은 광적인 폭군이나, 네로(Nero, AD54-68 재위)와 같은 광적인 몽상가가 재위에 올라 수도 로마의 풍기는 퇴폐하였지만 제국은 태평하였다. 처음에는 선한 정치를 베풀었지만 AD 58년 경부터 방종하기 시작,실모를 죽이고 아내를 발로 차 죽였다고 하는 폭군 네로는 특히 기독교도 박해로서 유명하다. 64년 7월 로마시의 대화의 책임을 기독교도에게 전가하고, 전대미문의 대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최초의 기독교 박해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때의 박해로 베드로와 바울도 순교했다고 하는 전승이 2세기 말경부터 이미 퍼져 있었다고 한다.

 

(9) 로마 제국과 유대:

기독교는 그보다도 30년 이상 이전에 유대의 반권력, 반로마 민중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되었다. 유대 민중의 외국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의 역사는 깊으나, 로마의 세력하에 들어간 때부터 반로마의 봉기는 종종 반복되었다. 폼페이우스에 의해섬멸된 아리스토불로스파는 BC 57년 반항하여 봉기하였으나 이를 막지 못한 안디바는 안토니우스의 로마군의 원조로 겨우 진압하였다. BC 55, 54, 53과 매년 이와 같은 반란이 일어나 그때마다 로마군의 파견을 청했던 것이다. 유대 민중의 반권력, 반로마의 저항 운동의 거점은 갈릴리였다. 안티바의 아들 헤롯은 또 왕위에 오르기 전에 히스기야를 수령으로 하는갈릴리의 반란을 진압하고 잔혹하게 히스기야를 처형한 것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헤롯 왕의오랜 치정(BC 37-4) 동안 헤롯의 무단정치와 바리새파의 회유를 위한 교묘한 제스처에 의해 반항 운동은 제압되고 있었지만, 그의 죽은(BC 4) 후 반항 운동은 즉시 발발하여헤롯의 후계자간의 다툼을 틈타 격화일로로 치달았다. 히스기야의 아들 유다가 민중의 선두에 서서 유대 군대가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당시 수리아의 총독이었던 바루스(Va\rus)의 3군단이 출동하여 이를 섬멸하였다. 그리고 AD 6년 유대와 사마리아는 속주 유대로 되고 로마의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던 것은 전술한 바이다. 그와 동시에 명령된 과세를 위한호구 조사는 다시 봉기를 야기하였다. 호구 조사가 행해지지 않은 갈릴리에서도 바리새파의좌파인 사독과 유다를 수령으로 하는 대반란이 일어났다. 이 유다들의 운동은 메시야의 내림을 방해하는 로마 지배와 싸우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내림을 열심히 대망하는 것이었으므로 `열심당'이라 부르는 그룹으로 되었다. 그들의 주된 활동 무대는 갈릴리였다.다른 한편, 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면서 그들처럼 반체제적 정치 활동으로 나오는 일 없이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데서 종교적인 금욕 생활을 계속하는 엣세네파라불리웠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전체로서 본다면 유대는 당시 반권력, 반로마의 민중 운동의고조기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복음 전도는 이 소용돌이 속에서 전개되었고, 또때로는 그 운동의 일환으로서 이해되었으며, 로마 총독에 의해 그런 것으로서 처리되었다.예수의 제자들 중에도 반로마, 반체제적 정치 운동과 관계를 가지고 있던 자도 있었는데, 바울에 의해 예수의 복음이 새로 이해되자 그 반권력적 색채는 조금씩 약화되어 갔다. 그와같은 변화의 요인 중 하나는, 적어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의 소유자였다는 것, 즉 바울은 객관적으로는 헤롯 왕조와 마찬가지로 지배자인 시민 공동체의 일원(一員)에 관련된 자였다는것에서 구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유대인의 반항은 그 후 끊임없이 꿈틀거렸지만, 네로의 말년, 곧 66년에 이르러 사소한 일이 발단이 되어 총반란으로 발전하였다. 봉기는 순식간에 팔레스틴으로 번지고, 로마측은 유능한 장군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대군을 맡기고 진압시키게 하였다. 로마측은 각지를 소탕한 후 예루살렘의 공위(攻圍)를 시작했으나, 69년에 이르러 제국 각지에 반네로의 반란군이 일어나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 다음은 그의 아들 티투스가 지휘하였으며, 70년 4월부터 9월까지의 격렬한 공격으로 100만을 넘었다고 하는 전사자를 냄과 동시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다(제 1차 유대 전쟁). 그 후60년 동안 예루살렘은 폐허가 된 채 방치되었으나 하드리아누스제(Hadrianus,117-138 재위)가 이 곳을 로마 식민시로서 재건하려 했을 때, 바르 곡바(BarKokhba)를 수령으로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132년부터 135년까지 싸운 이 제 2차 유대 전쟁은 그때까지의 어느 반란보다도 가장 치열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전멸된 후 유대인은 두 번다시 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후 예루살렘 자리에 건설된 식민시 아멜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에 유대인이 들어오는 것은 사형으로서 엄금하였다. 다만 1년에한 번 제 1차 유대 전쟁의 예루살렘 함락일에만 구성전의 폐허의 벽에 달라붙어 기도하는것이 허용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유대인은 조국에서 쫓겨난 유랑의 백성이 되었다.

 

(10) 로마 제국과 기독교:

그동안 로마 제국은 더욱 팽창을 계속하여 트라야누스제(Trajanus, 98-117 재위) 시대에는 그 판도가 사상 최대로 되었다. 그리고 2세기의소위 5현제 시대(五賢帝時代,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크스 아울레리우스의 다섯 황제)에 전성기에 이르렀으나, 2세기 말 경부터 제국의 정치^경제^사회 구조의 적폐(績弊)가 표면에 노출되고, 게르만 민족의 활발한 움직임도 여기에 더하여로마 제국은 조금씩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3세기 초의 카라칼라제(Caracalla,211-217 재위)가 212년 전제국의 자유인에게 로마 시민권을 준 것은 왕년의 도시국가에 의한 제국 지배의 구조가 완전히 버려진바 된 것을 보이고 있다. 그것에 대신하여완전히 군대에 의존하는 전체적인 황제의 강권적 지배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새 구조의 제국에로 탈피하려고 하는 전환점은 2세기 말부터 3세기 초의 세우에루스 왕조시대였는데, 그것은 3세기의 군인 황제 시대의 내란과 혼란을 거쳐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재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그 동안 끊임없이 박해를 받으면서, 자신이 로마 제국에 유용하다는 것을 호교가(護敎家)의 입과 붓을 통하여 계속 주장하여 온 기독교는, 303년에 시작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를 견디고 다음 콘스탄티누스(Con\tantinus, 306-337 재위)에 이르러 국가 공인 종교로 되고, 곧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379-395 재위)에 의해 국교로 되었다.이렇게 반로마 저항 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란 기독교는 4세기에 이르러 로마 제국의전체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지위에 올랐다. 데오도시우스의 사후 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어 476년에는 서쪽의 제권(帝權)이 소멸되나 동쪽의 제권은 1453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는 교회의 수장(首長)이 되어 국가와 교회와의 연결은 한층 직접적으로 되었다. 예수의 생애는 아구스도의 치세였다. 십자가에 달린것은 그의 후계자인 디베료 황제 때이다. 요한의 형제 야곱의 순교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치세이고(행 11:28,12:1,2), 바울이 상소한 것은 네로 황제에 대해서였다(행 2:11). 예수께서예언하신 예루살렘의 파괴(마 24장, 막13장, 눅19:41-44,21:5-36)는 후년에 황제가 된 디투스에 의해 AD 70년에 이루어졌다. 로마 제국의 영토는 최대였을 때에동서 4,800㎞, 남북 3,200㎞에 달했고, 인구는 약 1억2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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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시):City Rome(지명)

 

(City Rome)

이탈리아의 서안 튜레니아 해에서 티베르(Tiber, 테베레, Tebere) 강을 약 25㎞소급한지점우안에위치한 도시인데, 오늘날 이탈리아 공화국의 수도이며, 중세에는 로마 교황청의 소재지였는데, 이 항목에서는 고대의 로마시에 대해서만 취급한다. 팔라티누스(Palatinus), 카피톨리누스(Capitolinus), 퀴리날리스(Quirinalis), 카엘리우스(Cae\lius),아벤티누스(Aventinus), 비미날리스(Viminalis), 에스킬리누스(Esquilinus)의 일곱 구릉을 중심으로 BC 600년 경 도시 국가로서 건설되었으며, BC 2세기에는 지중해 세계를 영토로 하는 대국가의 수도로 되고, 4세기 초까지 로마 제국의 수도였다. `도시 국가'와 `제국 수도'로서의 로마시의 정치적 발전의 역사는 앞서 `로마(제국)'항에서 이미 다루었음으로, 이 항목에서는 로마의 행정,지리,주민 등에 대해서만 기술한다.로마시는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어도 옛부터 법적^종교적인 특수지위를 잃어본 일은 없다. 왕정 시대 이래 로마시는 `포메리움(Pomerium, 卜占境界)'에 의해 시역외(市域外, 밀리티아에, militiae), 시역내(市域內, 도미, domi)로 나뉘어 로마시의 고유의 신들을 제사한 본래의 로마시는 포메리움 안에 있었다고 생각되며, 이 내부에서 중요한 종교적,정치적 의식이 집행되었다. 따라서 이 신성한 도미에서는 항상 평화가 보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무장 군대의 출입이 엄금되었다. 그것은 또한 도미에서는 로마 시민이완전한 자유가 보장되기 위한 조건으로도 되었다. 일체의 법적 권한은 도미에서 행해지는종교적 의식에 그 원천이 있다고 생각, 출진하는 집정관(콘술, Consul) 따위의 정무관(마기스트라투스, magistratus), 또는 임지에 부임하는 속주 총독(프로콘술, proconsul) 등은 로마시를 출발하기 전에 반드시 새점(鳥卜占, 아우스피키움, auspicium)을 하여 신의(神意)의 찬부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정무관이 행사하는 국가 권력, 즉 명령권(imperium)도도미와 밀리티아에의 엄연한 구별이 있었다. 도미에서는, 거기서 명령권을 가진 정무관이라할지라도, 시민에 대해 직접 실력 행사를 할 수 없으며, 그것을 강행할 경우에는 호민관에게그것을 방해할 권한이 부요되어 있었으며, 그후 권한은 도미에 국한되어 있었다. 도시국가가로마시 또는 그 주변에 국한되어 있는 동안은 로마 시민, 즉 로마시의 주민이었으나, 로마시민이 원격지(遠隔地)로 식민 등으로 보내지거나, 타국인에게 로마 시민권이 주어지게 되면로마시의 주민과 로마 시민과는 일치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포에니 전쟁 이후의 사회 변동결과 토지 소유 농민(로마 시민)의 몰락하는 자가 늘어나자 그들 빈민은 생활자금을 벌기위해 지방에서 로마로 모여 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화정치 말기에는 로마시의 인구는 노예를 포함하여 약 100만에달하였다.시의인구 증가는 정치가에게 새로운 문제를 주었다.왜냐하면, 가난한 시민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가 되면 민회에 출석하여 투표하여 정치에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로마에서 열리는 이 민회가 전 제국의 운명을 결정할중대한 내용을 포함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은 더 중대하였다. 정치가는 로마 제국을, "로마라는 도시국가의 지중해 세계에 대한 지배이다"라고 하는 주의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기때문에, 이 민회의 조종책(操縱策)이 중요한 문제로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중대한 제안을 민회에서 상정하려고 한 정치가는 종종 빈민에게 환심을 살만한 안건을 포함하여 제안함으로써 민회를 통과시켰다. 가장 흔히 쓰인 안건은 곡물의 무료 내지는 저렴한 가격으로의 배급이었다. 이렇게 빵을 공급하고 거기에 덧붙여 공공 욕장이나 경기장에서의 구경거리따위의 오락을 주어 민중의 거세(去勢)를 꾀했는데, 이런 것이 이들 수도 빈민에 대한 정치가의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이와 같이 빈민에 대한 시중은 직접적으로는 안찰관(按察官, 아에딜레스, aediles)이라는 관리가 맡아 했는데, 아구스도 황제는 로마시에의 곡물 공급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이 곡물 장관이란 벼슬을 두었다. 그러나 또 한편, 로마에는 정치가, 무장으로서의 이름을 떨치려고 하는 귀족들, 지중해 세계에 상권을 넓히고 있는 자본가, 상인들의 본거지도 있기 때문에 이런 부호들은 교외나 지방에 훌륭한 별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밖에 반드시 로마시에는 저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시의 주민은 극심한 빈민과 대부호의 양극단으로 갈리는 경향이 있었다. 빈민과 부자의 주거는 뚜렷이 구별되었다. 중하층민은 인술라(insula, 字義는 "섬")라고 하는 공동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그 일층은 상점이고,이층 이상이 주거로 되어 있는 임대주택으로서, 오늘날로 말하면 싸구려 아파트였다. 이것들은 대개 시내 중심부의 복잡한 상가 지대에 있었고, 부호의 저택(도무스 domus)은 구릉 위나 가까운 교외의 한적한 곳을 차지하고 홀, 안뜰, 방화벽 등을 갖추고 있었다. 4세기 경의기록에 의하면, 인술라는 46,602, 이에 대하여 도무스는 1,797이라고 하니 주민의 빈부의 비율도 이것으로 대략 짐작할 수 있다.작은 도시에서 조금씩 큰 도시로 발전해 간 도시는 어디든지 그러하듯이, 로마시도 무계획으로 확대한 도시이기 때문에, 노폭이 좁고 꼬불꼬불한 길이 많고, 그 위에 인술라는 끊임없이 증축을 거듭했기 때문에 증축한 부분이 양쪽에서 도로의 위까지 돌출하게 되어 건물이매우 무질서하게 되었다. 로마인은 채광(採光)으로 기름을 썼으므로 화재가 빈번한 도시이며더구나 일단 불이 번지기 시작하면 도로가 좁아 진화작업이 불편하여 대화로 되기 쉬웠다.64년 네로 시대에 기독교도 박해와 결부되어 전해지고 있는 대화도 도시 중심부에 있는 대경기장 밑의 타기 쉬운 상품을 진열한 점포에서 발화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대화 후 네로는 시가지의 정비나 건물의 높이 제한 등 방화의 견지에서 개량하여 그 후 로마시는 상당히 면모를 일신하였다. 제정기에 들어가서는 로마시에는 소방대가 설치되었으며, 야경장관(夜警長官, Praefectus vigilum) 밑에 7대 7,000명의 야경관이 2구에 1대씩 배치되어 있었다.로마시의 성벽 내에는 공화정치 시대에는 4구(tri\bus)로 나뉘어 성벽 외나 많은 식민지를포함하는 31구와 합해 총 35구가 로마 시민의, 이를테면 정치적 본적지로 되었으며, 민회의투표는 이 구를 단위로 하여 행해졌다. 아구도스는 시내의 4구제를 개편, 새로 14구로 하였다. 각 구는 호민관이나 안찰관의 통제하에 두었으며, 구는 다시 소구분되어 총계 265의 소구(비키, vici)로 세분되었다. 이 소구는 지역적 제사를 중심으로 하는 것인데, 그 관리를 위해 각 소구에 4명씩 소구조역(小區助役, 비코마기스트리, vico magistri)을 두었다.제정기의 첫 2세기 동안 로마시는 번영을 계속했으며, 인구도 더욱 증가하여 2세기 초의트라야누스(Trajanus) 제시대에는 120만 정도였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그 중 약 40만은노예였다고생각되며, 노예를 합쳐서 대중용 시설이 더 많이 갖추어졌다. 오늘날 유구(遺構)로서 남아 있는 판데온(Pantheon), 바질리카(Basilica), 콜롯세움(Colosseum), 경기장(Circus),개선문(triumphal arch) 등은 역대 황제들이 다투어 호화롭고 아름답게 조영한 것이다. 제국의 수도로서 제국 각지에서 외인들도 많이 이주하였는데, 수리아인, 희랍인, 유대인 등이 제각기의 종교와 관습을 가지고 로마시에서 살았기 때문에, 로마시는 명실공히 고대 최대의국제도시였으며, 여기서 고대 제민족의 각양각색의 문화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역사적으로보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4세기 이후 제국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또 만족에 의해 점령, 약탈 당하는 일이 있어도 이와 같은 역사에 의해 성화된 로마의 광휘는 `영원한로마'의 이념으로서 순화(純化)되고, 곧 `사도의 좌(座)' 권위에 의해 새로운 위신을 획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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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Paul(인명)

 

(Pau'lo", Paul) 「작은 자」

라틴 이름은 Paulus, 히브리 이름은 Saul, Sau'lo"(사울로스) Saouvl(사울)=(샤울)이다.

 

1. 사료:바울의 생애˙사상˙인물 등을 연구하는데 참고하여야할 사료로써는 바울자신의 서신 10 수편과 바울의 동역자 누가가 쓴 사도행전 등이 있다. 바울을 알려고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자신이 쓴 서신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귀중한 연구 자료로 되고 있다. 특히 바울의 서신에는 자기의 소신, 감정, 성격 등을 여실히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하여 이를 읽음으로써, 그의 인물에 대한 통찰을 용이하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쓰여진 서신이기 때문에 단편적으로 밖에 바울의 생애에 대하여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후반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경력 기사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원래 사도행전은 바울전으로서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전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간단하거나, 중요사항이 빠지거나, 또는 서술이 고르지 못한 점이 적지 않게 발견될 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것은 대체로 바울의 외적(外的) 경력을 정확히 전한 것으로 보아도 무관하다. 즉, 사도행전은 주로 바울의 외적 경력을 기록하고, 바울의 서신은 주로 그의 내적 생활을 반영한 것, 양자를 병용함으로써 대략 이 대사도의 진면목을 묘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밖에 믿을 만한 문헌적 사료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바울바울바울과 로마의 철학자이며 정치가인 세네카(Seneca) 사이에 내왕했다는 서간집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6, 7세기의 위작(僞作)이다. 다만 3세기 경에 쓰인 `바울과 테클라의 행전'(Acts of Paul and Thecla)이란 것에는 다소 신뢰할 만한 사실이전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의 환경 연구는 문헌이 주는 지식의 부족한 점을보충하는 것이며, 또 그를 이해하는데는 필요하다. 특히 신약 시대의 유대인의 사회˙문학˙사상˙생활 등을 앎으로써 유대인인 바울에의 깊이 또는 정확한 통찰(洞察)을주는 수가 많다. 또 바울은 당시의 희랍˙로마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무대로 하여활약했기 때문에 이 세계에 관한 지식은 또 그를 아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와 같이고전 연구˙여행˙고고학적 연구 등으로 끊임없이 풍부하게 해 주는 팔레스틴과 희랍, 그리고 로마 세계에 관한 지리적˙사회적˙역사적˙사상적 지식 등도 바울 연구를위해 활용할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Ⅰ. 바울의 생애:

먼저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의 연대를 정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바울서신에도, 사도행전에도 아무런 명확한 연대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문헌·비문·역사적 사건 등에 대해 면밀 주도한고찰이 필요하므로 도저히 일반 사람에게는 용이한 문제가 아니다. 또 전문적 연구를쌓은 학자들 사이에도 완전한 일치를 보기 어렵다. 참고로 대표적인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그리스도의 죽음, 승천 AD 30바울의 회심 35(?)제 1차 예루살렘 방문(갈 1:18) 37다소 체재 37- 43제 2차 예루살렘 방문(행 11:30) 44제 1차 전도여행 44- 48(?)예루살렘 총회 50제 2차 전도여행 51- 53데살로니가 전˙후서 52제 3차 전도여행 54- 58갈라디아서 55고린도 전서 56이나 57고린도 후서 57로마서 57- 58피포(被捕) 58가아사랴에서의 감금 58- 60베스도 부임 60바울의 로마 도착 61골로새˙빌레몬˙에베소서 61이나 62빌립보서 62이나 63제 1차 로마 감금으로부터 석방 63디모데 전서 64이나 65디도서 65이나 66디모데 후서 67바울의 죽음 67다소 바울의 생가에 있는 바울의 우물

 

(1)회심전:

사도행전 21:39에 의하면 바울은 스스로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기리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말은 그의 생장을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 즉 첫째, 그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자기의성장에 대하여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5,6)라고 말하고 있다. 즉, 바울의 생활과 사상과의 근저에는 유대 민족의 피와 전통, 그리고 종교가 가장 힘있고 뿌리깊은 기초로 되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소에는 대학도 있었고, 신약 시대의 동서 문화가 모인 중심지이며 문화적 도시였다. 그는 일찍이 예루살렘에 가서 율법을 배웠기 때문에 다소의 이교(異敎) 문화가 그 유소년 시대에 미친 영향은 적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의 수업 후 수년간과, 회심 후 수년 간을 다소에서 보냈으며, 이것이 바울의 인격, 사상 형성에 상당한 작용을 한 것은 무시할 수 없다. 다음 그는 `로마 시민'이었다. 즉, 그는 유대인이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행전 22:28에는 그가 `나면서부터' 시민권을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생득적(生得的) 로마인 이외의 사람으로서 그 시민권을 얻기위해서는 사도행전 22:28에 나타나는 천부장의 경우에는 "돈을 많이 들여" 시민권을얻었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로마 정부에 대하여 상당한 공훈을 세우든가 또는 오랜가문에 속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와 같은 점들을 종합해 보면 바울의 가정은 지위,재산 다 같이 상류의 가문에 속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울의 성격에 좋은 의미에서의`귀족적인' 어떤 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난국에 처했을지라도 그는 "나는 로마인이라"라는 긍지와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그는 그 시민권 때문에 몇 번이나 로마 정부의 보호를 받아 박해로부터 벗어나 소원인 로마에까지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가 질서를 중시하고 권세를 잡은 자에게 복종할 것을 역설한 것도 그의 시민적 의식에 기초한 것으로 풀이된다.유대의 종교, 희랍 문화, 로마의 지배, 이 3대 세력을 고려에 넣지 않고 바울의 생애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즉, 바울은 순수한 유대인이었다는 것이다. 그 자신는 이를 자랑으로 여겼다(빌 3:5,6). 그뿐만 아니라 그의 가정은 유대교 중에서도 순수성과 엄격을 자랑하는 바리새파의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바울을 일찍부터 예루살렘에 보내 교육을 받게했다.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행 22:3), 이것이 몇 살 적이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어떤 기록에는 그가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된것은 15세쯤이었다고 한다. 여하튼 예루살렘에서의 교육은 바울을 열렬한 바리새 주의의 교대교도로 만들었다(행 22:3). 바울의 스승 가말리엘은 당시 율법 선생 중에서 학식과 인격이 모두 함께 뛰어난 인물이었다.사도행전 5:34 39에서 보는 그의 연설은 그의 인품의 원숙미(圓熟味)와 설득력이 큰것을 남김없이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스승 이상으로 율법에 대하여 순수한열정을 나타냈다. 즉,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年甲者)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4). 이것은 당시를 회고한 바울의 술회이다. 그의 예루살렘에서의 수업에서 얻은 최대의 것은 절대적인 유일신의 신앙, 엄숙한 윤리 관념, 열렬한 애국 정신, 그리고 율법에 대한 전념적 충성이었다. 이리하여 바울은 그 가문, 교육, 학식, 열심 때문에 유대인으로서 최고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바울은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몇 년을 예루살렘에서 지냈는지, 또 수학을 끝마치고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모두 분명치 않다. 아마예루살렘에서의 수학 후는 고향 다소에 돌아가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성경이 전하는 역사에서 바울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스데반의 순교때이다(행 7:58). 그는 이 순교 때(AD 30) 예루살렘에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때까지 15년 동안 줄곧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을 때 그는 이에 찬성했다(행 8:1). 이런 성경 기사로부터 바울이 유대인 의회의 일원으로서 스데반의 죽음을 인정했다고 결론 지을 수는 없으나, 그가 이 일에 있어서 적극적인 역할이 높았던 것은 확실하다.바울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에 대해 이미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틀림 없다. 그러나, 그가 생전의 예수를 만난 일은 없는 것 같다. 만일 만난 일이 있었다면 바울은이것을 역설했을 것이나, 그런 기사가 없다. 고린도전서 9:1은 다메섹 도상의 경험을가리키는 것이며, 고린도후서 5:16은 전통적 메시야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6:9에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쌔"라고 되어 있는데, 바울이 그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여하튼 스데반 박해에 참가한 이래 바울은 그리스도교도 박해의 장본인이 되어그리스도인을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여 말하는" 자로 단정하였다. 바울에 대하여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이며, 유대교에 대한 비판은 모세의 권위와 옛부터의 유전, 율례를 파괴하는 행위이며, 용서할수 없는 범죄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교회를 잔멸할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행 8:3). 이렇게 그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을 스스로 생각하고"라 말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그리스도인에게적의를 품은 것은,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의 예수를 메시야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가 후에 진술한 것처럼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다. 그들은 항상 영광과 승리의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다. 고로 추악한 십자가의 처형을 받고죽은 목수의 아들을 메시야라고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의 자랑을 몹시 상하게하고, 전통적 신앙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이렇게 유대교의입장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주장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으며, 양자의 타협은 있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교는 철저히 근절해야 한다는 것을 바울은 간파하였다.

 

(2)회심:

바울의 박해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외국 성에까지 미쳤다(행 26:11). 그는"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우면서 다메섹으로 향했다. 길을 재촉하여 다메섹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그는 느닷없이 회심하였던것이다. 그야말로 그것은 돌연한 회심이었다. 그는 그 순간까지만 해도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 하였던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과 율법에 가장충실한 행위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마음이 약해졌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바울의 회심 사건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세 번 나온다(행 9:1-19,22:6-16,26:12-18). 바울 자신의 서신에는 회심 사실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만, 사건 경위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사도행전의 기사는 서로 상당한 차이가 보이나근본은 일치하고 있다. 즉, 사건은 다메섹 근방에서 일어났다. 때는 대낮이었다. 하늘로부터 빛이 비추었다. 바울은 그 때문에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그는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물었다. 한즉 대답이 있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리하여 바울은 회심하고 또 특별한 사명까지도 받았다.이상이 사건의 핵심이다. 바울이 땅에 엎어짐과 동시에 소경이 되어 동행인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 성으로 들어가 거기서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였다. 사흘째 주님이 다메섹의 아나니아라는 신자를 바울에게 보냈다. 그는 바울에게 가서 그의 눈을 보게 하고 세례를 주었다. 또 바울을 택한데 대한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 바울은 주님의 은혜를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모든 사람에게 증거하라는 특별한 사명에 소명된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분은 부활하신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부활하신 주님은) 보이셨느니라"(고전 15:8).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영광의 모습도 보았다.사도행전 26:19은 이것을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라고 말하며, 또 고린도전서 9:1에서바울은 "우리 주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주관적인 환상을 본 것이 아니고하늘의 영광에 쌓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예수그리스도는 바울의 심중에 성령에 의해 계시되어 그것에 의해 그가 그때까지 박해한나사렛의 예수를 주 또는 구주로서 맞아 들인 것이다(갈 1:15,16).요컨대 바울의 회심 경험에서 객관성과 초자연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택정(擇定)과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가 분명해졌다."가시채를 뒷발길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라는 말에 대하여 바울은 그 당시이미 유대교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마음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으나, 심중의 고투(苦鬪)를 잊기 위해 외면적으로는 한층 더 박해에 열심이되었다는 유력한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채택하지 않는다. 리버디노 회당에서의 스데반과의 논쟁이나 스데반의 순교시 그의 귀한 모습이 바울에게 어느 정도의 인상을 주었는지는 제쳐놓고라도, 이것으로 바울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대립이 생사를 건 분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유대교도로서 나사렛의 예수를 메시야라고하는 기독교도들의 주장 증거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갈 1:15) 주 예수의 뜻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것을 거부하면 헛되이 상처만 받게 될 따름이다. 무지와 불신앙의 죄중에 있을때, 그는 긍휼을 입어 그리스도를 보고 신앙과 지식을 받았던 것이다. 불신앙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 깨어지고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바울은 몸으로 체험했던 것이다. 바울의 회심은 바울 한 개인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 사상 가장 중대한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3)회심 후:

바울의 전도 생활은 회개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는 다메섹에서 "즉시로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다. 또 "사울(바울)은 힘을 더 얻어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라고 기록되어있다(행 9:20-22). 그의 회심은 동시에 사도에의 소명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은 곧 전도생활이었다. 이제 새 확신을 얻은 그는 즉시 그 전파에 착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기 내부 생활에 일어나는 변화와 그 의의에 대해,또 앞으로 취할 방침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조용히 기도할 필요를 통감했다. 따라서그는 "아라비아로 갔다가"(갈 1:17) 잠시 조용히 때를 보냈다. 이 다메섹 교외의 아라비아에서 보낸 기도와 명상의 기간은 어느 정도였는지 분명치 않다. 그것은 수 주일,길어서 수 개월 정도였으리라. 바울의 마음 속에서는 열렬한 사명감이 활활 타오르고있었다.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무턱대고 장시간을 도피자적 생활에 소비한다는것은 그의 본의도 아니고 성격도 아니었다. 다메섹으로 돌아오자 다시 예수의 복음을전파했으나, 헬라파 유대인들이 죽으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제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거기서 도망쳐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때 이미 회심한 지 3년 후였다(갈 1:18). 예루살렘에서의 된 일에 대하여 사도행전이 전하는 것(행 9:26-30)과 바울 자신의 기술(갈 1:8-24)한 것 사이에는 일치점이 없는 것 같이 보이나, 같은 사건을 두 필자가다른 관점에서 전하는데서 오는 차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은 먼저 선배인 베드로를 찾아 갔고, 또 주님의 형제 야곱을 만났다. 바울은 그들을 통하여 생전의 예수에 대해 자세히 들었을 것이다. 바울의 그리스도 관(觀)이 항상 역사적 예수에 뿌리박혀 있는 것은 이럴 때 얻은 예수의 사적(事跡)에 관한 지식 때문일 것이다. 예루살렘의 신자들은 바울의 회심을 의심하고 두려워했으나, 바나바 집사의 소개로 겨우 제자들의 틈에 끼이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이때 교회가 바울을 받아들이지 않고 말았다면 기독교의 역사는 완전히 판이한 과정을 더듬었을는지도 모른다.바울이 다메섹에서 유대인을 피해 도망한 탈출구바울은 예루살렘에 15일 동안 머물렀으나 그 동안도 예수에 대해 전도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도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꾀하였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를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다소로 보냈다. 사도행전 22:17- 21에 이때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고 이방인에대한 전도의 사명을 재차 나타내시고 격려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향 다소에서의약 10년 동안의 바울의 동정에 대해서 사도행전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상당히 긴 세월이었으므로 그동안 바울은 결코 헛되이 보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1:21- 24에 의하면, 유대의 여러 교회가 수리아, 길리기아 지방에 간 바울에대하여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함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며, 또 그 후 예루살렘 회의의 결의서를 "바울 등을 통해 안디옥에 보낸 것"(행 15:23)을 보면, 이 기간에 그가 수리아, 갈리기아 지방에서 열심히 전도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설립한것은 크게 주목할 만하다(행 15:41참조). 그동안 안디옥에서는 이방인에 대한 전도붐이 일어나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나바가 파견되었으나, 그 한 사람 가지고서는 도저히 충분한 활동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거기서 둘이 협력하여 기독교 전도 사상 획기적인 이방인 전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크리스챤(Cristianov"), 즉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이 안디옥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이방인에 대한 전도가 확대되고, 따라서 많은 이방인 신도가 교회에 들어옴에 따라 당연히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와의 관계, 전도구역의 문제 등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그때 유대 지방에 기근이 일어나안디옥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구제하는 일에 임하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파견하게 된 것을 계기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과 사적으로 만나,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바울은 "무할례자에게 복음전함을 맡기"로 하고, 여기서 그들은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고 갈라디아서 2:7- 9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바울은 회개의 순간부터 이방인에 대한 선교자로서 택함을 받았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행 9:15,26:17,18). 그리하여 이 자각에 입각하여 다메섹˙예루살렘˙수리아˙길리기아, 그리고 안디옥을 전전하면서 꾸준히 전도해 왔다. 그가 갈라디아서의 서두에서 선언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직접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허락과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그러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바울의 입장을 이해하고, 바울에게도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위해 능력을 주신" 것을 인정해 준 것은, 바울로 하여금 자유로이 행동하게 한효과는 있었다. 지혜가 있는 바울은 이 호기를 포착하여 여기에 대 전도여행을 시도하게 되었다.

 

(4)제1차 전도여행:

바울의 대 전도여행은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에게 대한성령의 지시에 의해 시작되었다(행 13:1-3). 교회는 이 지시에 따라 바나바와 바울을전도사로 파송하게 되었다. 요한 마가가 조수로 동행하였다. 이들은 먼저 구브로 섬에건너가 섬 전체를 순회하고 그 후 소아시아에 건너가 밤빌리아의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하였다. 이것이 소위 제1차 전도여행인데, 사도행전 13장, 14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왜 이 코스를 취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이 이때 소아시아의 남해안을 따라 전도할 계획이어었는데, 버가에서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렸으므로 건조한 고원 지방인 갈라디아 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학자는 바울이 지금까지 전도한 수리아, 길리기아의 주변 지방으로 전도의 범위를 확대하는 뜻으로 이 여정을 택했다고 한다. 이 전도여행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생략하고 일반적 고찰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이 여행의 처음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구브로 섬 바보 전도이후는 거의 `바울과 바나바' 또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로 고쳐 기록되어 있다. 즉, 여행의 중간 이전에 이미 바울은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이방인에 대한 사도로서의 실력을 발휘하기에 이른 것을 시사하고 있다. 바울이 바보에서 서기오 바울을 개종시킨 때부터 누가는 히브리 이름 사울을 라틴 이름 바울로 바꾸어 놓았다.

 

바울은 항상 지방의 중심 도시에 집중적으로 전도하였다. 이것은 그의 전도 방침의하나였다. 혹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왔다는 신념에서 하루 속히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도시 중심의 전도 방법을 택한 것 같다. 또 도시 출신인 그가 특히 도시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그는 어떤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서 전도했다. 이것은 첫째, 동포를 구원하려는 생각에서였으나, 둘째, 유대인 회당에 출입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즉 경건한 이방인 구도자를 인도하기 위해서였다고 믿어진다. 초대 기독교가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었던 큰 원인 중의 하나는 이미 유대교에 의해 종교적 윤리적으로 양육되고 있던 이방인 구도자가 계속 기독교로 개종한 데 있다. 바울은 재빨리이 점에 착안했던 것이다.

 

 

바울의 메세지는 대체적으로 유대인에 대해서는 예수에 의한 구약 종교의 성취 완성, 이방인에 대해서는 유일하시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실재를 역설하여 때를 얻든지못얻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하였다. 사도행전 13:16 41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설교, 14:15 17의 루스드라인에 대한 설교 등은 그의 메세지의 내용을 엿보고도 남음이 있다.

 

바울은 단순히 설교하고 신도를 만들 뿐만 아니라 교회를 조직하고, 장로를 세우고성도의 교제를 유지시키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가 귀로에 자연스럽고 안전한더베 다소 안디옥의 코스를 택하지 않고 지금까지 더듬어 온 길을 다시 순회한 것은이와 같은 교회 조직을 촉진시키고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열렬한 전도자임과 동시에 용의주도한 목자인 바울의 면목을 엿볼 수 있다. 이 전도여행 후 바울과바나바는 안디옥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말하고 감사했다.

 

(5)예루살렘 회의:

상술한 바와 같이, 바울의 이방인 전도는 대 성공적이었으나, 유대주의적 신자들은 전통을 중시하여 이를 기뻐하지 않고, 그들 사이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바울 일행이 안디옥 교회에서 전도여행의 결과 보고를 하고, 일동이 하나님의은혜에 감사하고 있을 때, 유대에서 온 유대주의적인 어떤 신자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행 15:1)고 주장하여 바울의 예수를믿는 신앙에 의한 구원의 교리에 정면 도전했다. 이 때문에 교회 내에 분규와 논쟁이일어났으므로 이 문제에 대해 예루살렘에서 바울˙바나바, 사도들, 그리고 장로들이회집하여 협의하게 되었다. 갈라디아서 2장은 이때의 사정을 기록한 것이며, 사도행전도 이 회의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다. 회의 결과는 기독교의 장래를 결정할 만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격렬한 논쟁 끝에 예루살렘의 중심적 사도들, 특히 베드로가 바울의 입장을 지지하여 유대주의적 입장을 부결함으로써 논쟁은 종결되었다. 이때 베드로는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은 줄을 믿노라"라는 연설을 했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라는 결의문을 각 교회에 보내자는 야곱의 제의가 채택되었다. 바울은 복음의 자유원칙이 승인되었으므로 야곱의 제의에 찬성했고, 그 결의문을 이방인 교회에 주지시키는 역을 바나바˙바사바˙실라와 더불어 맡았다. 이것은 바울측의 승리였다. 원래 위의 네 가지 금지령(행 15:20=15:29)은 유대적 관습에서의 양보를 의미한다. 바울은 원칙적으로 자기의 주장이 인정된 이상 지엽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위해 관대히 양보했다. 이렇게 그들은 상호 양보함으로써 위기를 무사히 극복할 수 있었다(네 가지 금지령 중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은 계 2:14,고전 10:16-22에, 음행을 멀리 하라는 것은 신약에 많이 있으니 논할 필요도 없고, 피를 먹지 말라는말씀은 살인하지 말라는 뜻으로 본다. 또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구약의 사상이기도하다. 피는 생명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베자 사본XCodex Bezae〉에는 `목매어 죽인 것'이 없다).

 

(6)제2차 전도여행:

예루살렘 회의 결과 바울의 전도 방침과 주의에 대해서는 전교회적인 공식 지지를 받아 이방인에 대한 전도가 더욱 확고하게 정해졌으므로 바울은 바나바와 더불어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려 하였다. 그런데 제1차 전도여행 도중 버가에서일행을 버리고 도중 하차한 요한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에 대해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려 서로 "심히 다투어" 마침내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섬으로 건너가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를 향하여 떠났다. 바울은 도중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났는데, 그도 일행에 가담했다. 바울은 처음에 소아시아 서쪽 에베소의 전도를뜻했으나,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므로 드로아로 내려가 하나님의지시를 기다렸다. 그런데 밤에, 환상에 한 마게도냐 사람이 바울에게 나타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청하므로, 바울은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하고 이에 비로소 구라파의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게 되었다(행 16:9,10). 사도행전에 있어서는 이때 홀연히 `우리'라는 대명사를 쓰기 시작하고 있다(행 16:10). 이것은 본서의 저자가 이 전도여행에 동행한 사실을 말해 준다. 즉, 누가라는 의사이다. 그 이유는, 본서에 의학술어가 있고, 또 바울의 동역자 누가는 의사인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환상에 나타난 `마게도냐 사람 하나'는 실은 다름 아닌 누가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누가의 종용(慫慂)이 구라파 전도의계기가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바울 자신의 심중에는 하루 속히 구라파에 복음을전파하지 않으면 못견딜, 참을 수 없는 열정이 있어 그를 서쪽으로 서쪽으로 발걸음을재촉한 것은, 사도행전 16:1- 10의 글쓴 태도로써도 짐작할 수 있다. 이리하여 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아덴, 그리고 고린도로 다채롭고 의의깊은 전도가 펼쳐진다.사도행전 16:1- 18:22에는 제2차 전도여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주의할 점은,2차 전도여행 중 네압볼리에 도착하는 사도 바울X네압볼리 사도 바울 기념 교회〉

 

마게도냐 지방에서는 여자 결신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빌립보에 있어서, 즉 구라파에 있어서의 최초의 그리스도인은 기록으로 전해지는 한에 있어서는 루디아라는 부인이었다는 것은 초대교회에 있어서 부인의 위치를 시사하는 사실로서 의의가 깊다. 빌립보 교회에는 또 순두게와 유오디아라는 유력한 여신도들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는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신앙의 길에 들어섰으며, 아덴에서는 `다마리아라 하는 여자'가 회심자들 중에 섞여 있었다.

 

유대인들의 집요한 반대 운동이 가는 곳마다 바울의 전도를 방해하였다. 특히 데살로니가에서는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라고 하면서 바울 일행을 체포하려한 것은, 그들의 운명에대하여 불길한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는 것이었다.아덴의 마르스 언덕. 바울이 이곳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이란 설교를 하였다.

 

이여행에 있어서 기독교는 헬라(희랍) 사상과 처음으로 정면에서 접촉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아덴에 있어서 바울은 에비구레오파와 스도이고(스토아) 철학자들과 논쟁하여이에 극히 철학적인 연설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보아실패였다. 믿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 후 바울은 더욱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지혜의 권하는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 2:1-5) 전도하려고 결의를굳혔다.

 

고린도 전도에 있어서 기독교는 이교 사상과 접촉했을 뿐만 아니라, 이교적 생활과도 접촉했다. 그리하여 이것을 기독교화하는데 다소의 효과는 거두었음에는 틀림없으나, 아직 교회 그 자체가 그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고린도전서에서 취급되고 있는 제문제는, 사실은 고린도에 있어서의 이교 생활과 기독교와의 접촉에서 생긴 것에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교 사상과 생활의 기독교와의 관계는 더욱 더 복잡하게 되어몇 개의 중대한 문제를 교회에 던지게끔 되었다. 여하튼 이교 생활의 전형적 대표 도시인 고린도에 유력한 교회가 설립된 것은 위대한 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빌립보에서는 로마의 관헌에 체포되었다.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 주었더니 그 주인이수입이 끊어지는 까닭에 군중을 충동시켜 소송하였다. 그러나 밤중에 옥중에서 기도하고 찬송할 때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스스로 열렸다. 그들은 자결하려는 간수에게 전도하고 이튿날 풀려 나왔다(행 16:16-40). 이렇게 1년 반에 걸친 고린도 전도 후 바울은 고린도에서 얻은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바울이 갇혔던 빌립보 감옥데리고 배로 에베소에 건너가 거기에 이 부부를 남겨 두고, 그와 실라 일행은 일단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안디옥으로 돌아갔다(바울의 고린도 도착은 AD 50년 초라고 한다. 이것은 바울의 연대기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따라서 바울의 생애에 있어서 다른 사건의 연대를 추정하는 열쇠가 될 만한 중추적인 연대이다.1905년 에밀 부르게XEmile Bourguet〉가 연구 발표한 델피 비문XDelphi 碑文, 글라우디오 황제가 델피 시민에게 보낸 서신〉에 바울의 고린도 전도시 아가야 총독으로 있는 갈리오X행 18:12- 17〉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어 그의 부임하던 해,따라서 바울의 고린도 도착 후와 체재X滯在〉의 연대를 아주 확실히 미루어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7)제3차 전도여행:

제3차 전도는 제2차 전도여행의 연속이었다. 제2차 때 성령으로 금지되었던 소아시아 전도, 특히 에베소 전도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바울은 일찍부터 중심적 대도시의 중요성에 유의하여 그 전도를 꾀하였으나, 이때까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년 간의 그 숙원을 이루게 된 바울은 약 3년동안이도시에머물렀다. 그의 오랜 전도생활에서 이렇게 한 곳에 오래 머물은 곳은 없었다. 그는 이 동안 부근의 각 도시에까지 전도를 시도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골로새와 히에라볼리에는 에바브라를 통하여 복음을 전했다(골 4:13). 다른 여러 도시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동역자를 보내 전도를 했을는지도 모른다. 누가는 "아시아에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 19:10)라고 기록했다.그러나 바울 자신은 줄곧 에베소에 머물러 전도에 전념했다고 여겨진다. 그 자신이 말하는 바와 같이 에베소에 있어서는 "내게 광대하고 공효를 이루는 문이 열려" 있었다.한편, 그에게는 "대적하는 자가 많아" 실로 다사다난한 3년이었다. 사도행전 19:1 41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은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가 험악하게 되어 바울은 적어도 한 번은 직접 고린도에 가서 화해에힘쓴 일조차 있었다. 실로 "날마다…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 있었으니 감개무량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에 건너갔을 때"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고 술회했다. 그러나 고린도에 보냈던 디도의 기쁜 보고를 받고 그는 비로소환희와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고후 7:5-16). 아마 이때 일루리곤 지방에서의 전도를시도했을 것이다(롬 15:19,20,행 20:1-3). 이렇게 그는 완전히 화해한 고린도 교회를 다시 방문하여 평화로운 3개월을 보냈다.이제 3차에 걸친 전도여행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고"(롬 15:19),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을 정도로되었다(롬 15:23). 전도에 지칠줄 모르는 그의 눈길은 더 서쪽인 로마와, 로마 이서(以西)의 나라에로 돌려졌다. 사실 그는 "여러 해 전부터…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다"(롬 15:18-29). 그리하여 이제 여러 해 전부터의 숙원이 이루어지려는 찰라에 우선 로마 교회에 자기의 계획을 말하고, 그와 동시에 전부터 품고 있던 소신을 밝혔던것이다. 이것이 곧 다름아닌 로마서이다. 그러나 로마에 가기 전에 일단 예루살렘에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 시대의 모든 서신이 보이듯이(고전 16장,고후8장,9장,롬15:25-28), 모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연보를 준비하여 이것을 각 교회의 대표자들에게 지참시켜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는 이와 같은 헌금으로 모교회와 이방인의 여러 교회와의 사이에 밀접한 연락을 갖게 하여 굳은 결합을 유지시키려 했던것이다. 이렇게 그는 이 대표자들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갔다(행 20:4).빌립보에서는 누가가 일행에 참가한 것은 `우리'라는 대명사가 다시 쓰여지고 있다는것으로서도 알 수 있다(행 20:5). 오랜 격심한 전도생활 때문에 지칠줄 모르는 바울도피로를 느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육체에 가시'가 들은 병약한 몸이었다. 여하튼 이때 의사 누가의 간호가 필요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로마에 이를 때까지누가는 항상 바울의 반려자로서 행동을 같이 하고 있다. 그것은 구약의 다윗과 요나단과의 관계에 못지 않는 아름다운 우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빌립보에서 예루살렘에의 여행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비아 도로로사'(슬픔의 길)였다. 그도, 사람들도불길한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는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라고 말했다. 그가 도중에 들린 드로아˙밀레도˙두로˙가이사랴 등의 각지에서 형제들과의 작별은 모두 눈물이었다. 특히 밀레도에서의 에베소의 장로들과의 작별장면을 이를 데 없이 애절하였다. 신약성경 중 이 기사만큼 페이쏘스(pathos)에 풍부한 곳이 다른 데는 없다(행 20:17-38)

 

(8)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바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오순절 전날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울을 따뜻하게 맞았다. 성도는 이 명절 때문에 각처에서 모여들은 유대인으로 붐볐다. 그 중에는 바울의 전도를방해하고 그에게 적의를 품은 극단적인 반바울주의자들도 섞여 있었다. 팔레스틴 이외의 곳에서 로마 관헌의 제지로 바울 살해의 목적을 수행할 수 없었던 그들은 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온 성이 소동하여" 바울을 죽이려 했으나, 로마의 천부장이 달려와서 바울을붙잡아 안토니아의 영문으로 끌어갔으므로 간신히 무사하게 되었다.누가는 당시의 사정과 그에 뒤따른 그에 대한 신문과 그의 변명 등에 대하여 매우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행 21:27-23:10). 유대인들 사이에는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고 마시지 않는다"고까지 맹세한 일단의 혈맹단(血盟團)까지 조직되어 바울의 신변에위험이 밀어닥치고 있었으므로, 그는 밤중에 로마 군대에 의해 가이사랴로 호송되어로마의 총독 벨렉스의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벨렉스는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고, 그의 후임 베스도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하여" 두 사람이 다 신속한 처리를하지 않고 바울을 2년 동안이나 옥에 가둔 채 두었으므로 그는 분연히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고 신청했다. 이리하여 그는 백부장 율리오의 호송하에 로마로 가게 되었다.당시 가이사랴에서 로마에의 항해에는 사도행전의 기자 누가도 동행했는데, 이 항해에대해서는 사도행전 27장에 매우 자세하게, 또 인상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고대의 항해기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매우 귀중하고 또 흥미진진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허다한 곤란을 겪은 다음 바울 일행은 AD 60년 초봄 보디올에 도착, 거기서 주 안의 형제들의 영접을 받고 마침내 로마에 입성했다. 이렇게 다년 간의 숙원을 이룰 수있었다고는 하나, 결박된 몸으로서 로마 입성이란 그도 감?[인물편]바울바울개무량했음에 틀림 없었을 것이다. 로마에서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허락"되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재판의 날을 기다렸다. 로마에서는 많은사건이 산적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의 성소가 심의될 차례가 오기까지는 실로 2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그 동안 그는 헛되이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다. 많은 동역자가그에게 출입한 것은, 그때 집필된 골로새서나 빌레몬서의 끝에 열거되어 있는 인명을보더라도 알 수 있다. 빌레몬서는 이때 있었던 재미있는 한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빌립보서 1:12- 18에 의하면, 그 당시 바울은 더 적극적인 전도를 하여 비상한 성공을거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도행전은 "바울이…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쳤다"고 말을 끝맺고 있다.

 

(9)그 후의 바울:

사도행전 이후의 바울에 대한 소식은 분명치 않다. 그러나 바울은 2년 간의 연금 후 석방되어 계속 몇 년 동안 더 전도 활동을 계속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의 기사는 사도행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바울의 활동을 전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서버나(에스파니아)까지 전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시 체포되어 로마에 감금되었다. 디모데후서는 옥중에서 죽음을 눈 앞에 두고썼을 것이다. 바울이 죽은 연대는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AD 67년, 히에로님스에 의하면AD 68년이다.Ⅱ.바울의 인물고린도후서 10:10은 "그(바울의)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고 썼다. 이것은 고린도인들의 바울에 대한 비판인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의 풍채는 과히 훌륭한 것 같지 않다. `바울과 테크라 행전'에의하면, "그는 키가 작고, 대머리이며, 다리가 굽고, 골격이 다부지고, 눈썹이 서로맞붙고, 콧날은 약간 굽고, 표정은 온아(溫雅)함이 넘쳤다. 때로는 인간 같고, 때로는천사 같이 보였다"라고 한다. 15세기의 니세포라스는 "바울은 키가 작고 앞으로 숙은듯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 기록들을 덮어 놓고 상상적이라고 부인할 수만은 없다. 종합적으로 말해 바울의 외모는 사람을 위압하는 것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와 같은 약점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 있었다. 이 "대할 때는 약하고"라고 조소받던 바울을 갈라디아인들은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같이" 영접하였다(갈 4:14). 에베소의 장로들은 바울과의 작별을 애석하여 "크게 울며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행 20:37). 아굴라˙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다"(롬 16:3,4). 즉, 바울의 내적 사람의 아름다움, 이것이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이다. 바울의 안에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거기에는 `새로 지음받은 것'의 빛나는 모습이 있었다.바울은 병이 있는 몸이었다. 고린도후서 12:7에서 그는 `육체에 가시'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다"고 했다. 그것이 과연 어떤 성질의 병이었는지, 설이 구구하여 알길이 없으나, 여하튼 큰 고통과 불편을 준 것만은 틀림 없다. 그의 만년에 의사 누가가 늘 동행한 것은 병고에 괴로움을 받기 일쑤라서 그를 간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런 병고와 싸우면서도 그와 같은 대전도를 수행한 바울은 참으로 체력 이상의 힘을 지니고 있었음에 틀림 없다. 그는 강한 사람이기보다는 `강하게 된 사람'이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란 그의 증언이다. 또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고후 6:9)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전도자로서의 자기를 끊임없이 연단시키고 있었다."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얼마나 비장한 말인가!바울은 웅변가가 못되었던 것 같다. 고린도인들이 보기에 바울은 "말이 시원치 않다"고 했다. 고린도후서 11:6에서 바울은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는 웅변술을 수득(修得)한 일은 없다. 고로 당시의 헬라 사람의 귀에는 그의 변설은 미숙하고 졸렬하였다. 그러나 그는 말의 기교에 중점을두지 않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기로 했던 것이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라고 그는말했다. 미사여구를 나열하는 것은 그의 장기(長技)가 아니었으나,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살전 1:5)은 그의 의지였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에 불타는 듯한 열정과 신선미가 넘치는 독창성이 있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그의설교를 한 번 들은 사람들은 다시 설교를 듣기 위해 거의 모두 다 모였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바울의 말의 서툴음은 그로 하여금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에의지케 하고, 그의 체험을 통하여 보인 영의 생명을 증거케 하였던 것이다.바울은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고 전도하지 않았다. 그는 종종 "두려워하며 떨었다"(고전 2:3,고후 7:5)고 말한다. 그는 자기의 무력함을 종종 느꼈다. 그래서 그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격려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힘을 얻었던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라고 고린도에서 어느 날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말했던 것이다(행 18:9). 사도행전 23:11에서는 "담대하라"라고 격려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레미야선지자는 부름을 받았을 때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6)라고 주저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받고 비로소 일어섰는데, 바울도 자기의 능력을 믿고 일어서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붙잡혀 전도 전선에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그는 술회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 이렇게 하나님에 의한 내부적강요에 의해 일어선 바울은 인간적 약함을 초월한 대담함과 용기로 전도한 것이다.바울은 평생 독신이었지만, 결코 은사적(隱士的)이거나 비인정적인 성품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마음에는 극히 따뜻한 애정이 넘치고 있었다. 그는 결코 쓸쓸한 은사는 아니었다. 아마 바울 만큼이나 친구를 구하고, 가정을 즐긴 사람도 드물 것이다.그는 믿음의 친구에게 즐겨 `나의 형제' `나의 아들' `나의 사랑하는 아들' 등의 사랑이 가득 찬 가정적 용어를 썼다. 그는 또 어머니의 심정을 존중했다. 노예 오네시모에대해서는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몬 1:10)이라고 했고,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라 말하고, 데살로니가의 신자들에게는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살전 2:7)라 자기를 말하고, 갈라디아 사람에게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외치고 있다(갈 4:19). 또 "그(루포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롬 16:13)고말한 바울은 참으로 어머니의 사랑에 느끼기 쉬운 상냥한 마음씨의 사람이었던 것을알 수 있다. 그가 뜨거운 사랑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心腸)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등과 같은성구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빌립보에서는 루디아의 집, 고린도에서는 아굴라˙브리스길라의 집, 가이사랴에서는 빌립의 가정, 구브로 사람 나손의 가정에 손님이 되어 이를 기뻐했다. 또 그는 `동역자' `군사' `함께 갇힌 자'(fellow prisoners) 등의용어를 즐겨 쓰고 있다. 그는 정말로 친구로서 가장 우정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천국을 위해 스스로 된 고자'였던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그리스도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족을 이루고, 이에 대하여 전신의 사랑을 쏟은 것이었다. 바울은 예수와 더불어 진심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바울은 눈물의 사람이었다. 에베소의 장로들에 대해서는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고 말하고, 고린도 사람에게는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고후 2:4)라고기록하였으며, 청년 전도자 디모데에게는 "네 눈물을 생각하여"(딤후 1:4)라고 자못동정어린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강직하고 준엄한 반면을 가지고 있었다. 베드로의 불철저한 태도에 대하여 "저를 면책하였다"(갈 2:11,14)고 서슴치 않았으며, 빌립보 관헌의 비겁한 처사에 의분을 금치 못하여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행 16:37)고 요구하고, 대제사장 아나니아에게는 "회칠한 담이여,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행 23:3)라고 대갈(大喝)하였다. 그가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머물러전도할 것을 뜻한 것은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니라"(고전 16:9)는 이유 때문에서였다.바울은 사도로서 놀라운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갈 1:1) 자라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다. 고로 어떤 경우에는 거의 에고이스트라고 여겨질 정도로 그리스도의 사도로서의 권위를역설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후 12:11)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고전 15:10)라고 말하며,또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4:16)고 권했다. 이와 같은 자신은,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택함받은 사도라는 강한 자각과 사명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사명감이 그를`담대히' `거리낌 없이' 전도시킨 동력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지극히 겸손하였다. 스스로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 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라고 겸손을 나타내고 있다. 에베소에서의 그의 전도 생활은 `모든 겸손'(행 20:19)을 다했다는것은, 그 자신의 증언이다. 이와 같은 자신과 겸손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모순이 없었다. 참으로 하늘로부터의 사명을 느낀 인물에게는 이 두 요소가 혼연히 융화하는 것을 본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 그는 `질그릇'이나 `쓸데 없는 종'으로서 꿇어 엎딜 뿐이었다. 그런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 세워진 사도임을 자각할 때, 그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권위와 식견을 가지고 일어섰던 것이다.바울의 인격에 있어서 더 주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는 일면 신비적 경험이 풍부함과 동시에 또 날카로운 이지적 두뇌의 소유자였으나, 또다른 일면에 있어서는 극히 실제적인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종종 `환상'을 보았다. 그의 생애의전기는 거의 항상 그와 같은 신비적 경험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세째 하늘에 이끌려간…(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말할 수 없는 말을들었으니…"(고후 12:24)와 같은 경험도 있었다. 그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라는 깊은 영적 경험을 말하고 있다.그는 또 극히 명철한 두뇌의 소유자였다. 갈라디아서˙로마서와 같이 사상적으로 심원하고 논리적으로 정연한 서신을 쓸 수 있었던 바울은, 단순한 사상가나 이론가로서도위대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복음의 가르침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현대의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쌓은 것은 다름 아닌 바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유대주의자도, 이방의 철학자들도 그의 예봉(銳峯) 앞에서는 아무런 권위도 지킬 수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은 실제자(實際者)였다. 전도를 하게 되자 그는 극히 조직적인 계획 하에 이를 수행했다. 또 교회를 통일시키기 위해 예루살렘 모교회와 지방의각 교회와의 사이에 끊임없이 연락을 유지하는데 진력하였다. 그는 또 혼자서만 동분서주하지 않고, 오히려 여러 동역자들과 같이 전도에 종사했으며, 혹은 그들을 파견했다. 그는 혼자서 공명을 얻으려고 무턱대고 돌진하는 무사와 같지 않고, 만군을 지휘하는 대사령관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질서를 소중히 여기고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라고 가르치고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라고 역설하기로 했다.바울의 인격에서 풍성한 근대적 인간미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바울바울답게 한것은 이른바 인간미도 아니고 근대미도 아니었다. 그것도 인간을 초월하고,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역사하여 그를 변화시킨데 불과하다. 다메섹으로가는 도상에서 체험한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야말로 바울을 설명하는 열쇠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라는 것은 바울의 전심전령(全心全靈)을 불사르는 뜨거운 열정이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고 말하고, 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말한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사는 `그리스도의 종'이었다.결론적으로 말해 바울은 놀라우리만큼 다면적인 성격과, 재능에 뛰어난 사람이었다.그는 생득적으로 종교적 천재였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전인격적인 사항으로써 파악되고 있다. 그는 위대한 지성의 소유주였다. 진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의미하는 바를 질서 정연하게 해명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아름다운 성정을지니고 있었다. 그는 진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또 진리를 위해 전심전력 다할 수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또 실천가였다. 이론과 실천은 그에게 있어서 항상 불가분리의관계에 있었다. 요컨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도로서 그는 가장 적당한 인물이었다. 기독교는 바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최대의 해석자를 발견했다. 기독교의 세계적 종교화는 그 대부분을 바울의 활동의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바울에게서 기독교의 구원의 교리의 근본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학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또 윤리나 교회의 실제적 문제 등에 대해 배울 수 있다. 또 그에 의하여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인간의 전형적인 상(像)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