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세계文學名作]

2.괴테 - 파우스트(Faust:1831)

好學 2009. 8. 20. 13:03

  
2.괴테 - 파우스트(Faust:1831)       
작가 약전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라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 시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법학사의 학위를 가졌으면서도 재봉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관리로 채용되지 못했으나 부유했기 때문에 명문가였던 시장의 딸과 결혼하여 
나중에는 독일 황제 카를 7세로부터 궁중 고문관의 칭호를 얻어 
당시의 최고 인사들과 같은 지위에 몸을 두게 되었다. 
어머니는 겨우 18세에 괴테를 낳았다. 
어머니는 나이 차이가 심하고 까다롭고 엄격한 성격을 가진 남편 때문에 
괴로움을 받았으나 보기드물게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을 가진 부인이었으며 
언제나 낙천적이며 희망과 기쁨과 신에 대한 신앙을 잊지 않았다.
"어머니에게서는 기질과 인생에 대한 진지함을 그리고 
어머니에게서는 쾌활한 성격과 풍부한 상상력 그리고 문학적인 재능을 물려받았다"
이렇게 괴테는 그의 훌륭한 모친에 대한 감사와 애정을 작품에 담았으며
모친은 아들이 성장한 뒤에도 창작의 의논 상대가 되어 
아들의 모든 작품을 읽고 비평을 해주었다고 한다. 
특히 "루레의 왕"이라는 시를 여러 사람들에게 합창으로 들려달라고 한 후에는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이 시인을 낳은 사람은 나야!" 하며 자랑했다고 한다.
괴테는 대학 재학 중에 우연히 식당에서 알게 된 케트헨이라는 처녀와 깊이 사랑을 하게 되었다. 
대체로 괴테의 인간으로서의 성숙과 도전에는 여성이 않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와 교제한 여성을 논하지 않고 그의 시와 생애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병이 들고 나서는 신비주의와 연금술을 가까이 하였으며 
어머니의 친구인 노처녀 그레텐베르히 양으로부터 신에 대한 관념 등에 대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때에 질풍노도운동(Sturm und Drang)의 중심 인물인 헤르데르와 친교를 맺게되고 
마을의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1771년에는 법률가가 되어 고향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으나 
헤르데르에게서 문학의 새로운 세계를 배우고 목가적인 프리데리케와의 사랑으로 터져 나온
왕성한 창작열은 불과 6주일만에 "괴츠 폰 베르리힌겐"을 쓰게 하였다.
1772년에 베츨러의 제국 고등 법원에 사법 사무 견습을 가서 
친구 케스트네프의 약혼자인 샤 롯테 붓프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때 유럽 여러 나라에 소위 베르테르 열풍을 일으킨 유명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 때 체험한 사랑을 고백한 서간체 소설이다.
샤 롯테는 15세의 쾌활하고 총명한 처녀로서 미래의 남편인 외교관보다 16세나 나이가 어렸다. 
케스트네프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결코 미인은 아니었으나
괴테가 좋아하는 타입의 여성이었던 모양이다. 
케스트네프가 부재 중에 괴테는 자제할 수 없는 연정에 그만 새 롯테에게 키스를 하고 말았다. 
이 때 샤 롯테는 괴테에게 자기에게 우정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며 거절을 했고 
괴테는 마치 얻어맞은 것처럼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고 한다. 
샤 롯테는 약혼자가 돌아왔을 때 이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것은 케스트네프 자신이 샤 롯테의 말을 들은 대로 
담담하게 자신의 일기 속에 써 놓았던 사실이다.
다행히도 케스트네프가 침착하고 고결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문제를 원만하게 처리하여 
세 사람이 다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고 위험한 삼각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세 사람은 아름다운 교제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괴테는 이 사랑을 단념하지 못하고 자살까지도 생각한 일이 있었으나 
친구들을 괴롭히지 않으려고 두 사람에게는 내색하지 않은 채 혼자서 감당하였다.
샤 롯테에 대한 사랑을 끝내 잊을 수 없어 글로 표현한 것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인데 
전작 "괴츠"와 더불어 이 두 작품은 독일뿐 아니라 전 유럽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렸으며 
동시에 독일 문학의 존재를 전세계에 알리게 하였던 것이다. 
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나폴레옹도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되풀이 애독하였다고 하며
그 후 모방작까지 나오고 멀리 중국에서도 그릇과 부채에 베르테르와 롯테를 그렸으며 
베르테르가 자살할 때에 입었던 푸른 상의와 노란 조기와 바지를 
당시의 청년들도 입고 자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1781년에 그는 총리 대신이 되어 바이마르 공화국 안의
정치 외교의 중심 인물이 되어 활동하였으며 
이른바 시트름 운트 드랑 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국의 내정과 외교가 안정되자 
예술적 열정이 다시 되살아나 관직을 떠나 여행을 했다고 한다. 
이 여행은 그에게 정치가가 아닌 시인으로 설 결심을 하게 했다. 
여행 중에 괴테는 공직 생활에서 해방된 자유의 생활을 즐긴 동시에
바르고 아름다워 품위가 있는 고전 예술의 극치와 남방 풍경의 아름다움에 접하여 
고전주의 예술 원리를 확립하였으며 평생 동안 그 소신을 바꾸지 않았다.
1788년 귀국한 그는 예술과 과학의 연구를 일생의 과업으로 정하고 
정무에서는 물러나 다만 궁정 극장의 감독과 예나 대학의 지도에만 종사하였다.
1794년에 실러와의 친교가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슈레겔의 형제 철학자 피히테 쉘링과도 교류하여 영향을 받았다. 
실러와의 깊은 우정은 독일 문학 사상에 특기할 만한 사실이었으며 
두 시인의 협력은 독일 문학 운동의 융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서로 상반되는 특성을 지녔으면서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두 시인의 
서로에 대한 존경과 우정은 어디에서도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괴테는 1797년 제3차 스위스 여행에서 '빌헤름 텔'의 사적에 흥미를 느껴 
자료를 수집한 후 희곡을 쓰려고 하였으나 
이것을 실러에게 양보하여 그로 하여금 유명한 희곡을 창작케 하였다. 
그리고 공동으로 시평 "구세니엔"의 시를 짓기도 하고 경작도 하여 많은 담시도 지었다.
이 두 시인의 제휴는 또한 독일 연극사상에도 신기원을 이루었는데 
실러는 희곡을 쓰거나 다른 사람이 쓴 희곡을 각색하였으며 
괴테는 주로 연출의 지도에 종사하였다.
1805년 실러가 병사했다는 비보는 괴테를 절망 속에 빠트렸으며
 "나의 반신을 잃었다"고 탄식케 하였다. 
현재 독일 공화국의 신헌법 제정 의사당으로 선정된 바이마르 국립 극장의 전면에는
 두 시인이 서로 손을 잡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조각한 유명한 입상이 있다.
실러가 죽은 뒤 나폴레옹 전쟁은 그를 더욱 암담케 하였다. 
바이마르 공화국도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심각하게 동요되었다. 
1808년 10월 나폴레옹이 에르누르트에서 4명의 국왕과 34명의 대공과 함께 회의할 때 
괴테는 아우그스트공을 시종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곧 이 유명한 시인을 초대하였다. 
그가 일대의 영웅인 황제의 방에 들어갔을 때 
나폴레옹은 고관들에게 둘러싸여 조찬을 하고 있었다. 
황제는 괴테를 가까이 불러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더니
  "보라! 이 사람을!" 하고 부르짖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사람이다'라는 뜻이었으며 괴테에 대하여 
이 이상 정확한 비평이 없다는 것이 모든 비평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그에게
 "몇 살이 되십니까?" 하고 물었고 
괴테가 "60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참으로 건강하십니다. 귀하는 독일 제국의 극시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괴테와 한 시간 이상을 그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의 청년 시대의 애독서로서 
그는 그것을 모방하여 소설을 쓴 일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수 년 후 나폴레옹은 바이마르 대공에게 궁정 배우를 인솔하게 하여 
볼테르의 "시저의 죽음"을 상연시켰다. 
연극이 끝나고 무도회가 개최되었을 때에 그는 괴테를 가까이 불러
  "진실한 희곡은 황제에게나 백성에게나 좋은 교육이 됩니다. 
귀하께서 베르테르보다 더욱 위대한 시저의 죽음도 써 주었으면 좋겠습니다"고 말하며
파리로 오면 우대하겠노라고 권하였으나 괴테는 파리로 가지 않고 
바이마르에 머물러 있었으며 시저의 죽음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다.
 "파우스트"를 완성한 지 얼마 안 되는 1832년 3월 22일 오전 11시 30분에
84세의 고령으로 안락 의자에 기대 앉은 채 이 시성은 세상을 떠났다. 
죽기 직전까지도 이야기를 하였으며 중도에 말이 끊어지면 
문자로라도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려고 공중에 손을 내저어 쓰는 시늉을 하였으며 
그것도 여의치 못하자 자기의 무릎 위에다 글씨를 썼다. 
그의 노년에 그가 항상 귀여워했고 자기를 진심으로 섬겨 주었던 며느리에게
  "악수를 하자"고 말한 것과 청지기에게
 "방 안에 더 많은 빛이 들어 오도록 창을 열어라"한 것이 
이 위대한 인물의 최후의 말이었다
그는 혈육이 다 죽고 없었으므로 며느리 옷타리에의 이름으로
 사망 통지서를 내게 되었고 26일 오후 5시에 장엄한 의식으로써 
바이마르 대공가 역대의 영묘 안에 있는 실러의 무덤 곁에 묻였다.
1932년은 괴테의 사후 백 년 되는 해였는데 3월 22일부터 4월 5일에 걸쳐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는 다양하게 
괴테 백년제 강연과 연극 전람회 등을 성대히 개최하였다. 
이것을 보더라도 괴테가 세계의 문화 문학 연극 과학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괴테에 대한 전기 연구의 왕성한 열기도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살아 있을 때부터 열렬한 찬미자들에 의하여 성인으로까지 높이 받들어졌던 괴테가 
몇천 년 후에는 그리스의 신과 같은 존재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으리라는 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독일어와 독일 문학을 창조하였으며 독일 사상을 집대성하여 
후일 독일의 정치적 통일의 터전을 닦은 위인일 뿐만 아니라 시
적 상상과 풍부한 창작력 건전하고 심오한 사상 형식의 우아한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 등 
모든 것을 구비한 점에서 단연 독보적인 존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