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인터넷성경교육]

평신도를 깨운다[독후감 요약]

好學 2009. 7. 9. 01:23

 

 

평신도를 깨운다.

 [옥한흠 목사]

 


초판이 나온지 14년이 지난 지금 제자훈련의 요구가 갈수록 증폭되어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거부할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이다.

본서는 제자훈련에 대한 더 활발한 연구를 위해 개정된 것이다.


제1부. 현대교회와 평신도

한국교회의 경이적이고 폭발적인 부흥은 현대 선교역사의 위대한 드라마의 하나로 불렸다. 그러나 부흥의 이면에는 부정직함의 허수와 무기력함의 허세, 그리고 신앙과 삶의 괴리에서 오는 허상이라는 부정적인 현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최근에는 기독교인의 숫적인 감소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앞에두고 성경의 원리로 돌아가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행6장의 기록처럼 그 해답은 평신도 지도자 발굴에서 찾아져야 한다.

평신도의 잠재력 활용에 대한 노력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결과로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는 성경적 요구에 의하여 대두된 20세기의 평신도 운동은 교회에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교회역사상 개혁의 횃불은 대부분 평신도들에 의해 들려졌다. 따라서 평신도가 잠자거나 주저앉아 있으면 그 교회나 시대는 절대로 건강하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첫 번 종교개혁이 성경의 공유라면 두 번째 종교개혁은 사역의 공유라고 할 수 있다. 한국어와는 달리 평신도를 나타내는 라이코스란 말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가르키는 것이다. 존스토트는 성경에서 사람을 오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으로만 구분하며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별하지는 않는다고 언급한다.성직자와 평신도 모두는 하나님의 동일한 백성으로 함께 선택받고, 한 성령의 전이며, 그리스도의 한 몸이다. 그러나 로마교회의 성직우월주의로 인하여 평신도란 용어는 왜곡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탁월한 평신도들이 단지  교회조직의 기능유지를 위한 통상적 봉사활동에만 투입되고 있는 실정이며, 또한 대부분의 평신도들이 잠자고 있는 실정이다. 불편한 교역자와 평신도의 관계에는 평신도를 멸시하는 교권주의와 교직을 멸시하는 반교권주의가 있다. 그러나 서로 섬김과 겸손으로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달려가야 할 것이다.


제2부. 세상으로 보냄 받은 교회

교회는 보이지 않는 추진력에 따라 움직이며 방향지워진다. 그것을 목회철학이라 한다. 성경에 근거한 철학이 있고 가슴에 성령의 불이 있으며 내일의 비젼이 분명한사람은 일을 저지르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된다. 목회철학의 근간이 되는 것은 바로 교회론이다. 부르심을 입은 택자들의 모임인 “에클레시아”는 자칫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특권만을 가진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소명을 확실히 할 때 평신도를 힘있게 깨울 수 있다.

현대 교회의 정의는 너무 정적인 인 측면이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수립한 교회의 정적인 정의는 당시의 정적인 사회구조와 그들의 주관심사인 교회의 순결성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구조가 동적으로 변화되었으며, 초대교회와 같이 비슷한 환경에 처한 오늘에는 교회의 순결성과 함께 사도성이 강조된 새로운 교회의 정의가 필요하다.

거룩성, 통일성, 보편성이라는 교회의 본질에 사도성이 추가되어야 한다. 사도성이 로마교회의 교황제도 옹호를 위해 왜곡되기도 했지만 사도직은 절대로 반복될 수 없으며, 사도성이 사도들의 교훈과 사역을 계승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한스큉의 주장처럼 사도성은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유일한 뜻인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사도성을 계승한 교회는 구원을 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시공을 초월하여 사도들과 동일한 고백과 믿음과 사역을 수행하도록 성령을 통해 역사하신다.

사도성을 계승한 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인 창조와 구속에 대해 영광을 돌리는 예배와 세상을 구원하며 성도를 양육하고 훈련하기 위해 이땅에 존재한다. 이를 위해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성도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고, 영적제사를 드리며, 말씀을 증거하고 중보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예배와 전도와 훈련이라는 교회의 존재이유는 균형있게 고려되어야 하며, 사도성에 입각한 지상교회의 선교적 소명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잠자는 평시도를 깨울 수 있다.

 

제3부 제자도

-모든 제자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를 만들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을 만드는 일이 먼저요 일을 맡기는 것은 그 다음의 과제라는 원칙을 가지고 계셨다.

세상은 더 좋은 방법을 찾고 있지만 하나님은 더 좋은 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이다.

전통적인 유대 지도자들은 앉아서 제자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주도적으로 찾아다니시며 제자들을 부르셨다.

3년간 그들과 기도하시고 함께 계시며 본을 보이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시기전 미숙함과 불신의 찌꺼지가 남아 있었지만 그들을 신뢰하시고 선교적 위임과 파송을 하셨다.

예수님은 이땅에 무식하고 평범한 제자 몇 사람외에는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으셨다.

오직 소수의 제자를 만드는 일에 자신의 전 생애를 투자하신 것이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공동체에 들어온 모든 사람을 제자라 부르고 있다.

서신서에는 제자라는 말 보다는 온전한 자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누가 제자인가?’

예수님이 요구하신 제자도의 길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프로그램이나 헌신도나 성숙도에 의해 취사선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은 제자가 되기 위하여 훈련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자이기에 훈련을 받아야 한다.

 

-제자는 예수님 닮기를 소원한다.-

이를 위해 한자리에 가만 있지 않고 계속 성장하고 성숙해 가야 한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의 프로그램은 질좋은 특정인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예수 닮기를 남보다 더 사모하고 성장과 성숙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찬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인 것이다.

 

- 제자는 인격적으로 위탁된 자이다.-

제자의 삶 곧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은 평생동안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단번의 결단을 통해 이루어 진다.

이 때 제자는 자신을 인격적으로 예수님께 위탁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을 예수님께 전적으로 위탁하면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자신을 위탁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는 선택의 희생, 십자가를 짐, 생명을 바치는 모험이라는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제자가 지불하는 대가가 크기는 하지만 세상과 죄의 종으로 살면 더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제자훈련이란 평신도를 전적인 위탁자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여기에는 훈련자와 훈련생 모드에게 해산의 고통이 따른다.

 

-제자는 증거를 위하여 보냄을 받은 자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위임한 궁극적인 일은 그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증거를 위해서는 반드시 목격자일 필요는 없다.

스데반의 경우 처럼.

비록 성경에는 전도와 증거에 대한 명령이 희소하지만 초대교회는 전도와 모이는 일에 가장 힘을 쏟았다.

이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도록 성령께서 강력한 내적인 충동을 주셨기 때문이다. 증거는 은사가 아니다.

성령의 충동에 순종하는가? 순종하지 않는가?를 보여주는 근거일 뿐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전도는 모두 입으로 증거하는 것이었다. 말로 전하는 복음이 빠진 선한 행위만으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초대교회는 선한 행실 때문에 핍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입으로 전하는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은 입을 봉하기 때문에 행위까지 악취를 풍기는 경우가 많다.

입으로 예수를 증거하면 행위를 선하게 가지려고 노력하게 된다.

 

-제자는 섬기는 종이다.-

예수님은 친히 성육신과, 성만찬, 세족식, 십자가의 속죄양 등으로 친히 섬기는 종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제자는 마땅히 스승인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는 사랑으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과 행위로 증거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희생은 흠모의 대상이 아니라 본받고 증거해야할 내용이다.

제자는 구약의 귀를 뚫은 자원하는 종처럼 ‘나는 종이며 사랑으로 기꺼이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고백으로 자신을 스스로 사랑의 법에 얽어 매어 놓는 사람이다.

제자는 종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종의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이며 제자훈련은 종의 생활을 실천하도록 돕는 것이다.

제자훈련을 통해 교회는 영적 훈련소, 작업장, 발전소로서의 이미지를 갱신할 수 있다.

훈련을 통해 평신도의 자아상이 바로 정립되며 교회의 체질이 바뀌게 된다.

보호목회는 나약한 평신도를 만들지만 훈련을 통하여 강하고 생산적인 평신도가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과실을 많이 맺게된다. 

훈련의 결과로 교회조직의 역기능성이 현저히 감소하고 상호사역하는 순기능이 강화된다.

교역자와 평신도가 함께 살아가는 건강한 교회구조를 가지게 되며, 사역을 분담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을 많이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훈련을 통하여 교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일시적인 성장이 아니라 건강한 체질에 바탕을 두고 성숙과 성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제4부. 제자훈련의 원리와 실제

제자훈련은 성경공부다.

전도와 가르침에 유능한 평신도 기능인을 기르는 것이다.  수준있는 중산층 이상의 평신도에게만 가능하다.는 주장은 모두 제자훈련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공부는 제자훈련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며, 제자훈련은 예수를 닮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며, 제자훈련의 열쇠는 지도자가 어떠한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지 평신도의 어떠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제자훈련은 궁극적인 목표, 구체적인 훈련방법, 훈련의 실제적인 결과에 대한 강한 기대 때문에 다소의 거부감과 강성의 이미지를 줄 수 있는 “훈련”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제자훈련은 평신도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게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하게하는 목적을 가지고 훈련자와 훈련생이 함께 몸부림 치는 것이다.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목회로 이루어지고 건강한 목회는 성경의 원리를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다.

 

제자훈련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게 하기 위해 세운 목사이며 동시에 교사인 교역자가 따라야할 가장 성경적인 목회방법이다.

평신도를 깨우고 더 강한 제자로 훈련시키는 것은 교역자의 책임이다. 이를 위해 교역자는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교역자는 제자훈련을 단지 방법이나 프로그램으로서가 아니라 목회철학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님은 무리에게는 설교하셨고, 제자들에게는 가르쳤으며 개인에게는 상담을 하셨다.

제자훈련을 하려는 교역자는 가르치는 사역의 중요성을 자각하여야 한다.

제자훈련을 처음시작하려는 경우 주위사람들과 자신의 철학을 나누며 그들에게 비젼과 그림을 그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을 선택하는데 기성교회에서는 다소 어려움이 있지만 당회원들부터 택하여야 한다.

어려움이 있어도 3년정도를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 충실한 훈련을 위하여 훈련자와 훈련생 모두가 훈련에 집중해야 한다.

첫 제자반의 성공은 파급효과가 엄청나므로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들여야 한다.

제자훈련은 하나님의 말씀과 지도자의 모범과 훈련생의 경험을 내용으로 한다. 말씀의 지속적인 묵상과 마음에 풍성히 거하는 말씀, 완전할 수는 없으나 지도자의 모범과 열린태도, 체험과 실습을 통한 생생한 경험이 고루 안배되어야 한다.

훈련교재를 활용할 경우 복음이 살아있고, 내용이 균형잡혀 있으며, 적용이 강조되고 교리적인 중요성과 목회철학이 반영된 귀납적 교재가 필요하다.

제자훈련은 소그룹 환경에서 이루어지며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소그룹의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 소그룹은 초대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소그룹 속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통한 치료, 공동체의식, 인격상호간의 학습, 상호모방, 애착심, 심리적 정화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난다. 따라서 제자훈련 소그룹은 훈련과 치료를 겸한 가장 적절한 훈련 환경이라 할 수 있다.

제자훈련에서의 성경공부는 관찰, 해석, 반응, 적용의 과정을 거치는 귀납적 방법이 효과적인데 참가자 전원이 교사가 되며, 성경에서 진리의 발견과 인격의 변화, 그리고 말씀의 적용이 중시된다. 귀납적 방법의 활용을 위해 지도자는 먼저 자신이 달인이 되어야 하며 적절한 질문 기법들을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

제자훈련 인도자는 하늘의 소리를 듣는 열린 귀와 비젼을 보는 눈과 진리를 증거하고 전달하는 입 그리고 권한을 위임하는 손으로 나타나는 변화를 주는 리더쉽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자식을 사랑하고 돌보는 부모의 자세로 대로는 격려를 때로는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훈련자는 훈련생들이 마음껏 활동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운동경기의 코치와 같은 리더쉽을 가지는 것도 필요하다.

훈련의 첫 시작을 위해 훈련대상자를 심방하고 훈련의 지침들을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며 교회 앞에서 공식적으로 개강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다.


제5부. 목회현장에서 본 가능성들

제자훈련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현장교회들은 목회자가 제자훈련을 목회철학으로 확고히 하고  7년 이상 제자훈련을 하여 목회의 중추신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건강한 성장의 증거로 주일 예배 성인 출석 수가 500명이 넘는 교회들을 선정하였다.

그 결과 전국의 곳곳, 도시와 농촌 뿐만 아니라 해외 교포교회에서도 제자훈련 사역의 아름다운 현장 사례들이 수집되고 있다.

평신도를 제자화하는 사역의 정신은 초창기 한국 선교의 원리인 네비우스 방법에서도 찾을 수 있다. 네비우스 방법에서 교육중심의 목회, 가정중심의 목회, 개인전도 중심의 목회 정신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정신들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현대선교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교회는 제자훈련의 뿌리를 내리기 위하여 궤도수정을 하지 않기, 힘을 분산시키지 않기, 자기발전을 위한 노력 계속하기, 훈련받은 자만  사역에 참여시키기, 휴가 봉사 과외 프로그램 등으로 리듬과 균형 유지하기등의 원칙들을 지켜오고 있다.

또한 강한 평신도를 위한 제자훈련 후 실제 사역을 하기 위한 사역훈련, 그리고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의  취약점인 전도를 가르치는 전도폭발 훈련, 사역자로서의 평생프로그램인 순장교육, 지속적인 성장과 균형을 이루기 위한 세미나, 집중강의, 평신도 대학 등의 보완적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다.

사랑의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실시한지 20년, 이제 제자훈련은 사랑의 교회 공동체를 이끄는 강력한 정신이 되었으며, 훈련의 결과 건강하고 지속적인 교회 성장, 다락방과 봉사사 현장등 사역현장의 확장과 다변화, 평신도 사역자들의 증가, 영적사역을 이해하는 공감대 형성, 그리고 지도자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라는 유익한 열매들을 맺고 있다.

한편 평신도들의 지속적인 성장은 교역자에게 끝없는 도전과 부담을 주며, 평신도들의 영적 요구의 증가로 교역자의 역할 또한 증대되고 있으며, 일부 이상론에 치우치는 경향과 교회의 강성이미지와 문턱이 높은 인상을 준다는 문제에 봉착해 있다. 그러나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와는 결코 비교가 될 수 없으며, 이미 제자 훈련은 미래교회의 가장 유효하고 성경적인 목회의 열쇠이다.

지금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다.

지금이 바로 평신도를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기 위한 목회 철학을 정립할 때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제자도에 입각하여 평신도를 온전한 자로 세울 수 있는 기회이다.

  


1) 제자훈련을 통해서 교회의 건강성이 회복되며 건강한 자연적 교회성장이 일어남을 믿는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건강성 까지도 염두에 두는 제자훈련이 되면 더 좋을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균형의 문제로 생각이 된다. 우리교회가 대전과 중부권에 영향력을 미치되 사회 전반에 걸쳐서 문화를 변혁시키고 대전이 하나님의 의의 성읍이 되도록 중보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쓰임을 받도록 강하고 충실한 제자로 훈련되어야 겠다.


2) 우리교회의 목회철학의 표현인 비젼선언문이 건강하고 동적이며 사도성에 입각한 교회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학교현장에서도 제자훈련이 가능함에도 나도 모르게 학생들을 무리로 보고 그들을 개인적인 관게에서 보지 않은 점을 회개 한다.
 

4) 거꾸로 된 기독교처럼 훈련을 받아서 제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제자이기에 훈련을 받는 다는 지적이 매우 충격적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에 선행을 해야 하는 것처럼 아직도 내 삶에서는 뒤바뀐 우선순위와 잘못된 고정관념들이 많은 것 같다. 제자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고정관념들이 하나씩 계속하여 깨어지고 무너지고 성서적인 관념들로 다시 세위지기를 원한다.


5) 교사라는 직업이 과거와 미래를 다 아우르긴 하지만 과거에 더 치우친 경향이 있다. 그 결과 매우 안정지향적이고 교사문화에 오래 젖다보면 정체해 버리기 쉽다. 진취적이라고 해야 승진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것이 현실적인 풍토이다. 제자훈련을 통해 날마다 자라가며 현실에 안주하려는 모든 유혹과 도전들을 단호히 거부해야 겠다.
 

6) 그동안 제자훈련을 이수해야 하는 과정의 하나로 생각하던 부분들이 있었다. 그리고 선택받은 것인양 여기고자 하는 개인적인 마음과 주위의 시선들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이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훈련에 참여하는 마음의 태도인 것을 깨닫는다. 훈련을 통해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제자이기에 더 성숙하고 성장해야 하며, 훈련을 통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훈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의 전 과정은 예수님께 대한 나의 사랑의 고백인 것이다. 그럼에도 최선과 열심을 내지 못하고 때로는 부담스러움과 충실치 못함으로 임한 것을 회개하며 주님사랑의 마음으로 새롭게 2학기를 달려가고 싶다.
 

7) 나의 헌신과 결단이 일생을 두고 변함없도록 하시고 언제나 무처럼 일관성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이 도와주시길 기도한다. 또한 매 순간 순간의 결단을 통해 도약하는 믿음의 삶을 살기 원한다. 지속작인 믿음의 삶 그것은 어쩌면 평지를 달리는 마라톤 경기가 아니라 엠파이어스테이츠 빌딩의 계단 오르기 시합과 같은 것이다. 매 순간 순간 마다 더 높은 수준의 헌신과 결단이 요구되며 끝없이 계속되기에.......


8) 헌신, 너무나 자주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연약한 부분들이 있었다. 방학동안  ‘고정관념 깨뜨리기’와 ‘얼굴의 수건을 벗을 것’을 말씀하셨다. 헌신에 아쉬움이 남지 않고 전인격적인 위탁과 즉각적 순종의 삶이 되어야 겠다.

 

9) 해산의 고통을 피하지 않게 하시고, 진통의 후의 새생명 탄생이 부모에게 기쁨이 되듯이, 인도자에게 기쁨이되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10) 성령님께서 복음을 전하라는 충동을 주셨지만 불순종 했던 순간들이 기억난다. 때로는 용기가 없어서, 때로는 둔감하여 성령의 강한 충동을 깨닫지 못하여............

  성령님께 민감하기를 원한다. 복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에, 그 능력을 확신하기를 원한다. 능력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할 때 주어지는 것임에도 전하지 않기에 그 능력을 체험치 못하고 있다. 나의 교실에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학생들에게 복음의 증인으로 살기 원한다.


11) 워치만 니의 소책자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행동에 자신이 있을 때 복음을 증거하겠다는 생각은 사단이 주는 생각이다. 아무리 자신이 선한 행위를 하려고 해 보라. 절대로 선한 행위를 할 수 없다.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전도를 하라. 전도를 하면 성령께서 우리의 행동을 선하게 변화시켜 주신다.”

   선행과 기독교인으로서의 품위를 나타내는데만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는 나의 삶을 회개한다.
 

12) 한 학기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도 제자훈련이 나의 삶을 지탱해 주는 지지대가 되어 주었다. 마치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켜 주었다는 것’ 처럼 제자훈련은 나에게 아름다운 구속이 되었으며 물결에 떠내려 가지 않도록 하는 십자가였다.

   ‘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들은 강을 건널 때 꼭 큼직한 돌 아니 바위덩어리를 들고 강을 건너는데 그렇게 하면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강을 똑바로 건널 수 있다고 한다.’ 요동하는 세상에서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나의 각오와 결단이 아니라 제자훈련과 같이 나를 잡아매는 든든한 끈임을 확신한다. 유대인들이 말씀을 손목에 맸던 것처럼 제자훈련과 아울러 기독교사로의 부르심에 자신을 굳게 매기 위하여 2000기독교사대회 팔찌를 손목에 계속해서 매기로 결정 했다.  
 

13) 목사님의 잦은 언급 처럼 최소한의 시간은 어디에나 필요한 것 같다. 최소한의 기도시간, 최소한의 묵상시간, 최소한의 훈련 시간, 그리고 최소한의 봉사시간.........

  주일학교 교사로서 최소한의 봉사 기간을 생각해 본다. 동일 부서에서 최소한 5년 정도는 되어야 제대로 주일학교 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2년은 학생이해와 조직이해. 분위기 파악을 위해, 3,4년은 자기 발전과 교수능력등의 배양을 위해, 그리고 5년차는 임상 실습을 위해...하지만 대부분 1,2년 하다가 성가대나 다른 부서로 옮긴다. 제자훈련의 정착을 위해 3년이 필요하듯 다음 세대를 세우는 교회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5년이 필요함을 생각해 본다.
 

14) 아직 훈련되지 않은 나의 산만함이여..열매맺기위해 가지치기가 필요한데 이것 저것 너무 벌려 놓은 것들을 하나씩 정리해야 겠다.집중의 원리에 충실한 훈련을 해야 겠다.

 

15) 기독교사로서 탁월한 리더쉽에 대한 소원함이 생긴다. 학교에는 관리자나 상관은 있지만 리더가 없다는 지적들을 받곤 한다. 

제자훈련에서 인도자의 본을 따라서 동료들의 중보와 격려를 통해 섬김과 겸손의 리더쉽의 훈련도 아울러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16) 우리교회가 제자훈련 사역의 모범케이스로 선정된 것과 그 훈련의 현장에서 제자훈련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큰 자부심과 도전감을 느낀다. 나는 나 하나가 아니라 이후로 나의 발자국을 따라 걸어올 수 많은 사람들의 선각이 되기에 더욱 긴강과 거룩한 부담을 가지고 역사의식을 가지고 훈련에 임해야 겠다. 아무도 없는 산속의 눈길을 걷더라도 함부로 걷지 않고 뒤에 올 사람을 생각하며 바르게 걸어가는 영적인 안목을 가져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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