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참회록]Augustine

제10 권 고백 (36~40)

好學 2009. 6. 25. 00:09

 

제10 권 고백 - 36. 제2의 유혹, 교만.

 이러한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 속에 넣어도 상관없겠습니까?
주님의 사랑 이외에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실 이미 당신은 우리를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어느 정도로 바꾸어 놓으셨는가 하는 것은 당신이 더 잘아십니다.
당신은 처음에 자기 변호를 하려고 정욕을 고쳐주셨습니다만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다른 불의까지도 가엾게 여겨 모든 병을 고치고
부패로부터 생명을 구원하시고 자비와 연민으로 내 머리를 꾸며 주시고
행복으로 내 욕구를 채워 주셨습니다.

당신은 나의 교만을 당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누르시고
당신의 멍에로 내 목덜미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나는 그멍에를 등에 지고 있으며 그것은 가벼운 것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약속하신 대로 해주신 것입니다.
그전부터 가벼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등에 자기를 두려워 했던 시절에는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이시여, 오로지 당신만이 당신 위에 주를 모시지 않는 참된 주시며
오직 홀로 교만함이 없이 지배하십니다.
그러나 제 3의 유혹도 나에게서 제거해 주셨을까요?
혹은 전생애에 걸쳐서 결코 그 유혹이 다시 솟아나지 않을까요?

즉,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유혹입니다.
그것도 다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고
바로 그 존경받고 사랑받는 것에 대한 기쁨을 느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된 기쁨은 아닙니다.
불쌍한 삶이며 더렵혀진 허세에 불과합니다.
특히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진심으로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도
욕망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세상의 야심가의 머리 위에 천둥을 치시면 산들은 그 뿌리까지 흔들립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인간사회에 있어서의 그 직분상 아무래도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에
진실한 행복을 시기하는 악마는 우리에게 접근해서
곳곳에 올가미를 쳐 놓고 장하다, 장하다 라는 칭참을 늘어놓습니다
만약 그 칭찬을 굶주린 듯이 주어 모은다면 모르는 사이에 악마의 포로가 되어
기쁨을 당신의 진리 속에 두지 않고 인간들의 기만 속에 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차라리 당신 대신에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기를 즐기게 됨으로써 악마와 닮은자가 되어
사랑의 일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형벌에 말려들려고 그들과 한 패가 될 것입니다.
악마는 그 자리를 북쪽 끝에 두려고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암흑속에서 냉랭해진 사람들이 당신을 거꾸로 하여
빗나간 방법으로 흉내를 내는 악마를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시여, 우리는 당신의 작은 무리입니다.
우리를 소유해 주십시오.
당신의 날개를 펼쳐 주십시오. 그 밑에 숨겠나이다.
당신이 우리의 영광이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으로 인하여 사랑받고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존경받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꾸중을 듣더라도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자는
당신의 심판이 있을때 사람들의 변호를 받지 못할 것이요
당신이 단죄하실 때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죄인은 마음의 희망을 칭찬받지 못하며
불의를 행하는 자는 찬양받을 수 없으며
당신으로부터 받은 어떤 선물 탓으로 칭찬을 받는 경우라도
만약 그가 그것으로 인해 칭찬을 받는 것 보다도
차라리 타인으로부터 받는 칭찬을 기뻐한다면 역시 그사람도
타인으로부터는 칭찬을 받으면서 당신의 꾸지람을 들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우 칭찬한 사람이 창찬받는 사람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칭찬한 사람은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기뻐했는데 칭찬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 보다는 인간의 선물을 기뻐했기 때문입니다.

제10 권 고백 - 37. 칭찬에의 유혹. 

주님이시여 우리는 항상 이러한 유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항상 우리를 시험하는 도가니는 사람의 혀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그러한 일에 대해서도 근엄할 것을 명하십니다.
우리에게 명하시는 바를 주시고 바라는 바를 명하십시오
당신은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 당신에게 향하는
내 마음의 애원과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류의 유혹이라면 어떤 것이건
그것에 대해서 나 자신을 음미하는 힘을 지니고 있지만
그 종류의 유혹에 대해서는 아무런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육의 쾌락이나 불필요하게 무엇을 알려고 하는 호기심에 대해서
스스로의 마음을 억제하는 능력을 얼마만큼 얻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것들이 스스로에게는 없을때
ㅡ 자신의 의지를 버렸건 또는 자연히 없어졌건 간에 ㅡ
분명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때 나는 나 자신에게 그것을 갖지 않은 것이 얼마나 불쾌한가,
또는 불쾌하지 않은가를 물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가지 유혹중에서 하나나 둘, 아니면
세 가지 모두를 채우고자 하는 부(富)도 영혼이 이것을 멸시하는지
어떤지를 알아 보기 어려울 경우에는 시험삼아 내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칭찬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일 칭찬을 바라지 않고 어떤 일을 하려고 할때
우리가 나쁜 짓을 해서까지 남에게 비난을 받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물론 생각하는 것조차 쓸데없는 일입니다.
선한 생활과 선한 행위에는 칭찬이 따르는 것이 통례이거니와
선행 자체와 마찬가지로 칭찬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없어도 내가 괜찮다고 생각할지
또는 고통스럽게 여길지 당해 보아야 알 일입니다.

주님이시여,
이런 종류의 유혹에 대하여 제가 당신에게 어떻게 고백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면 칭찬 이외에 나를 즐겁게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기는 나는 진리를 칭찬보다 더 좋아하고 있습니다.
만일 어리석은 생활을 하면서 그러한 잘못을 범하며 온 세상의 칭찬을 받아야 할까,
혹은 진리 안에 굳게 서서 변하지 않는 인간으로써 일반의 비난을 받아야 할까
하는 문제가 생기면 나는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선행에 대해 기뻐할 때 남들이 칭찬한다고 해서
더 기뻐하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칭찬 받으면 더 기쁘고 비난 받으면 좋지 않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형편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명이 생깁니다.
주님이시여,
그것이 가치있는 일인지 나는 확실히 모르나 당신은 잘 알고 계십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절제만을 명령하신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사랑해야 할까, 즉 정의도 명령하셨습니다.
당신만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웃도 사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올바르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이 칭찬할 때
나는 이웃이 진보하고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가졌다는 데 대해서 기쁨을 느낍니다.
그러나 자기가 이해하지도 못하고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도 모르면서
이를 부인하는 이웃을 볼 때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때로는 나 자신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점이 내게 있거나
별로 대수롭지 않은 선이 있을 때
남들이 요란스럽게 칭찬해 준다면 그것도 역시 섭섭한 일로 생각합니다.
남이 내게 대해서 나와 달리 생각한다고 해서
섭섭히 여길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가장 좋은 것을 생각해도 나를 감동시키지 못하지만
내가 기뻐하는 선을 남도 기뻐할 때 그 기쁨은 더욱 커집니다.
말하자면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약간 마음에 들 때
내가 나에 대해 칭찬하지 않게 되고, 그런 경우에는
어떤 의미로는 내가 칭찬 받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내가 불확실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진리여, 당신을 통해서 봅니다.
인간이 칭찬을 받을때 나는 그것에 의해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 사람의 이익을 위해 마음이 움직여야만 한다는 것을 진실로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움직여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잘 모릅니다.
이 점에 대해서 나는 당신에 대해 아는 만큼도 나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시여,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속에 존재하는 상처를 분명히 보고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형제들 앞에서 고백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내 앞에 드러내 보여주십시오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자세히 음미해 보겠습니다.

만약 내가 타인의 칭찬을 받을 때나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이웃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누군가 타인이 부당하게 비난받을 때
내가 비난을 받을 때만큼 나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를 향해서 모욕이 던져질 때 몹시 언짢은 마음인데
그와 똑같은 모욕이 내 앞에서 타인에게 던져지는 것을 볼때
그다지 마음이 아프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나는 모르는 것일까요? 아니면
"나 자신을 속이고 있다.
마음에서도 혀에서도 당신 앞에서 진실을 행하지 않고 있다."
는 것이 최후의 결론이 되는가요

주님이시여, 이러한 광기를 우리들로부터 사라지게 해주십시오
나의 혀로 하여금 나의 머리에 칠하는 죄인의 기름 역할을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10 권 고백 - 38. 허무한 영광의 위험. 

나는 부족하고 가난합니다.
조금이라도 나은 자가 되는 것은 자신에게 불만을 가져
남모르게 한숨을 짓고 당신의 자비를 애원하면서
나의 결함이 고쳐지고 완성되어서
최후의 평화에 다다를 날을 기다리자고 마음 먹을 때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주어질 수 없는 평화입니다.
하여간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많은 말과
사함들에게 알려지는 행위와의 사이에는
칭찬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극히 위험한 유혹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에서 사람은 자기 한 사람이 위대해지기 위해
사람들의 찬동을 모으려고 합니다.

이 칭찬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기 비판을 하는 경우에도
바로 그 자기 비판이라는 행위에서 자기를 유혹합니다.
또 사람은 종종 허무한 영광을 멸시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때 앞서의 경우보다 더 허무한 영광을 자랑하는 격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미 영광을 멸시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랑하는 경우에는
그것을 멸시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10 권 고백 - 39.자애의 힘과 본성. 

게다가 나의 내부에는 같은 종류의 악한 유혹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타인에게는 만족을 주지 않고 때로는 불쾌감을 주며
그뿐만이 아니라 타인에게 만족을 주기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허무한 자기 만족에 빠지려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자기 만족을 하는 사람들은 당신에게 많은 불쾌감을 줍니다.
그것도 착하지 않은 것을 착한 것처럼 느끼고
자기 만족을 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당신의 선을 자기 것처럼 여기고 자기 만족을 하는 경우
또는 비록 당신이 주신 선이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자기에게는 당연히 그것을 받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만족을 하는경우,
또는 비록 당신의 은혜에 의한다고 하더라도
모두 함께 기뻐하려 하지 않고
그 은혜에 타인도 참예하는 것을 시기하는 경우,
그처럼 자기 만족을 하는 자는 당신에게 많은 불쾌감을 주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 속에서
또는 이와 흡사한 모든 위험과 노고의 사이에서
나의 마음이 떨리며 설레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나는 이미 그런 상처를  다시 입게 되리라고는 느끼지 않으며
그보다는 그런 상처를 입자마자
당신에 의해서 고쳐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제10 권 고백 - 40. 모든 사물 속에서 찾는 하나님. 

진리여, 당신은 항상 내 곁에 계십니다.
당신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항상 나와 함께 걸어가 주셨습니다.
이 낮은 지상의 세계에서 볼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당신에게 알리고 조언을 구했을때 무엇을 피해야 하는가와
무엇을 구해야만 하는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만큼 외계에 존재하는 세상을 나의 오관으로 바라보고
내 육체와 감관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생명을 생각합니다.
그러고 나서 분리된 기억의 공간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곳은 매우 넓은 방입니다.
놀라운 방법으로 지난 일들이 가득히 쌓여 있어서 두루 살펴볼 수조차 없습니다.
나는 사면을 살펴보고는 매우 놀랐습니다.
당신이 아니시라면 나는 이 모든 것 가운데 그 어느 하나도 식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 가운데서도 당신이 누구신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두루 살피면서 탐구하는 나 자신이 모든 것을 분류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고 어떤 것은 감각의 사환 격인  감관을 통해서 받아들이고
나 자신과 뒤섞여 있는 것을 감지하고 그것을 다시 구별한 연후에
내 기억의 방대한 보고에서 어떤 것은 검증하고
어떤 것은 다시 쌓아 두고 어떤 것은 이끌어 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한 것은 나 자신이나 나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도 당신 자신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 빛을 향해서 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것들의 존재 여부와 어느 정도로 평가해야 하는가를 묻고
그 빛이 나에게 가르치고 명령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런 행동을 잘합니다만 이것은 나의 큰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해야 할 일에서 벗어나면 언제나 이 쾌락 속으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조언을 구하면서 그 모든 것의 사이를 뛰어다니지만
내 영혼이 있을 안전한 곳은 당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엇습니다.
당신은 내 속에 흩어져 있는 모든 것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거기서 내 지체 중 어느 것이라도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당신은 여러 번 나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게 해주십니다만
그 감미가 나의 내부에서 극치에 달하면
그것은 이 세상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겠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많은 무게에 눌려 차츰 옛 생명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옛 습관의 생명이 다시 나를 붙잡아 단단히 묶어 놓습니다.
내가 몹시 슬퍼해도 여전히 묶인 채로였습니다.

이와 같은 관습은 우리의 무거운 짐입니다.
내가 있을 수 있는 이곳에는 내가 있으려 하지 않고
내가 있을 수 없는 저곳에는 있으려고 합니다.
가지고 있는 때도 비참하고 없는 때도 역시 비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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