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참회록]Augustine

제10 권 고백 (21~25)

好學 2009. 6. 25. 00:00

 

제10 권 고백 - 21. 모든 사람은 행복을 원한다. 

영생 복락은 내가 본 카르타고를 기억하는 것 같은 종류가 아닙니다.
그것은 물체가 아니므로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수를 헤아리는 식으로 기억 속에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수를 지식 속에 소유하는 자는
그 이상으로 한층 더 자기 것으로 하겠다는 따위의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우리는 영생 복락을 지식 속에 가지고 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영생 복락을 누리기 위해 한층 더 그것을 내것으로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변론술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기억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분명히 변론술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아직 변론에 능통하지 못한 사람들도
그 이름에 의해서 표시돠어 있는'것 자체'를 생각해 내고
많은 사람들은 변론에 능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들의 지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체의 감각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변론에 능통해 있는 것을 인정하고 기뻐하며 자기도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내적인 지식에 의한 것이며
기뻐하지 않으면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영생 복락을신체의 감각에 의해서
타인 속에서 경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쁨을 기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속에 포함 되어 있을까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사실 나는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비참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영생 복락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나의 기쁨을 신체의 감각에 의해서 보거나 들은 것도 아니며
냄새를 맡은 것도 만져 본 것도 아닙니다.
단지 기쁠때 마음 속에서 경험한 것이고 그 지식이 기억에 들어왔기 때문에
지금 기 기쁨을 기뻐했다고 기억하는 대상의 종류에 따라 때로는
경멸을 가지고 또는 동경하면서 회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 나는 그전에 추악한 것에 대해 특별한 기쁨을 느꼈던 일이 있습니다만
지금 생각하면 혐오스럽고 끔찍하기만 합니다.
어떤 때는 선하고 훌륭한 것에 대해 만족할 만큼 커다란 기쁨을 느꼈습니다만
지금은 그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슬퍼하면서 지나간 기쁨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떤 느낌을 주는 영생 복락을 경험했기에
그것을 기억하고 좋아하며 동경하는 것입니까?
나의 이웃 뿐만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원하며
우리가 가기에 대해 확고 부동한 지식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굳은 결의로써 갈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가 두 사람에게 군대에 나가 근무하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한 사람은 원한다고 하고 한 사람은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두 사람에게 행복해지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즉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군복무를 원하는 사람이든 원하지 않는 사람이든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여기에서 저 사람은 다른 곳에서 각각 기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기뻐하기를 원하느냐는 물음에 똑같은 대답을 하는 것과 같이
똑같이 복된 삶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기쁨을 복된 삶이라고 부릅니다.
한 사람은 여기서, 다른 한 사람은 다른 곳에서 찾으나
그들이 구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이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생 복락이라는 말이 울려 나올때
그 기억 속에 이미 있었으므로 이를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10 권 고백 - 22. 지복의 삶. 

주님이시여, 멀리해 주십시오.
당신에게 고백하는 종의 마음으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게 해주십시오
'어떤 기쁨으로 기뻐할 지라도 나는 복되다.'
하는 생각이 내게서 떠나게 해주십시오.

불경한 자에게는 주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당신만을 의지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기쁨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이신 당신 자신이 기쁨이 되십니다.
복된 삶이란 당신을 향하여, 당신한테서,
당신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일 뿐 다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것을 복된 삶이라고 멀하는 사람들은
참된 기쁨이 아닌 다른 기쁨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어떠한 기쁨의 영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도 아닙니다.

 

제10 권 고백 - 23. 진리를 소유하고 있을 때.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행복해지려고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된 삶은 오로지 당신 뿐이므로
당신에게서 기쁨을 찾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복된 삶을 향유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행복을 원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원한다 할지라도 육체가 원하는 것은 영혼에 위배되고
영혼이 원하는 것은 육체에 위배되어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에만 빠져서 그로써 만족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것에 이를 만큼
열심히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진리를 더 기뻐하는가, 거짓을 더 기뻐하는가 하고 물을 때
누구든지 진리를 더 기뻐한다고 대답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스스럼없이 행복해지고 싶다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로 복된 삶이란 진리로 안해서 생기는 기쁨입니다.
즉 그것은 진리이신 당신으로 인해 생기는 기쁨입니다.
주님이시여, 당신은 나를 비춰주시는 영원한 빛이시며 내 영혼의 구원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이 복된 삶을 원하고 이 삶은 홀로 복된 것이어서
모든 사람이 원하며 모든 사람이 진리에의 기쁨을 원합니다.
나는 사람을 속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남에게 속고 싶어하는 사람을 아직 한 명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서 이 복된 삶을 알았을가요?
그것은 그들이 진리를 안 바로 그곳일 것입니다.
그들은 속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진리도 사랑합니다.
또 진리로 인해서 생기는 기쁨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닌
복된 삶을 사랑할 때 분명히 진리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만약 진리에 대한 어떤 지식을 기억 속에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진리를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진리 안에서의 기쁨에 도달하지 못합니까?
그들이 왜 복락을 누리지 못합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삶을 복되게 해줄 것을 매우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
자기들을 더욱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에 단단히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겐 아주 잠시 동안만 빛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진리가 증오를 낳았습니까?
사람들이 진리에의 기쁨인 영생 복락을 갈구하며 사랑하는데
참을 사랑하는 당신의 사람이 이 진리로 인해 미움을 받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자기들이 사랑하는 그것이
진리이기를 바랄 정도로 인간들이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또한 그들은 속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속은 거라고 남들이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리인 줄 알고 사랑하는 것 때문에
스스로 진리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서 뿜어 내는 빛은 사랑이지만 진리의 심판은 미워합니다.
그들은 속는 것은 싫어하지만 속이는 것은 좋아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진리 자신을 나타낼 때에는 사랑하지만,
진리가 자신을 폭로할 때에는 증오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리는 그들에 대해 이런 식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즉 진리로 인해 폭로되기를 싫어하는 그들의 뜻을 어겨 폭로함과 동시에
진리 자신은 그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식으로 말입니다.

바로 인간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즉 자신의 마음 속에는 맹목이 잠들어 있어 천하고 보잘 것 없으면서도
자신은 감추어져 있기를 바라고 반면에
다른 것은 무엇이나 자신 앞에 드러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 반대의 보답을 받아 자기를 진리 앞에서 숨기지 못하고
더구나 진리는 자기 앞에 숨어 있게 됩니다.
인간은 이와 같이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으면서도
허위 보다는 진리를 더 기뻐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어떠한 방해물조차도 중간에 개입시키지 않고
모든 참다운 것에 대한 진리 그 자체를 기뻐하는 경지에 이를 때
비로써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10 권 고백 - 23. 진리를 소유하고 있을 때.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행복해지려고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된 삶은 오로지 당신 뿐이므로
당신에게서 기쁨을 찾으려 하지 않는 자들은
복된 삶을 향유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행복을 원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원한다 할지라도 육체가 원하는 것은 영혼에 위배되고
영혼이 원하는 것은 육체에 위배되어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에만 빠져서 그로써 만족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것에 이를 만큼
열심히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진리를 더 기뻐하는가, 거짓을 더 기뻐하는가 하고 물을 때
누구든지 진리를 더 기뻐한다고 대답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스스럼없이 행복해지고 싶다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로 복된 삶이란 진리로 안해서 생기는 기쁨입니다.
즉 그것은 진리이신 당신으로 인해 생기는 기쁨입니다.
주님이시여, 당신은 나를 비춰주시는 영원한 빛이시며 내 영혼의 구원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이 복된 삶을 원하고 이 삶은 홀로 복된 것이어서
모든 사람이 원하며 모든 사람이 진리에의 기쁨을 원합니다.
나는 사람을 속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남에게 속고 싶어하는 사람을 아직 한 명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서 이 복된 삶을 알았을가요?
그것은 그들이 진리를 안 바로 그곳일 것입니다.
그들은 속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진리도 사랑합니다.
또 진리로 인해서 생기는 기쁨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닌
복된 삶을 사랑할 때 분명히 진리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만약 진리에 대한 어떤 지식을 기억 속에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진리를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진리 안에서의 기쁨에 도달하지 못합니까?
그들이 왜 복락을 누리지 못합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삶을 복되게 해줄 것을 매우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
자기들을 더욱 더 비참하게 만드는 것에 단단히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겐 아주 잠시 동안만 빛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진리가 증오를 낳았습니까?
사람들이 진리에의 기쁨인 영생 복락을 갈구하며 사랑하는데
참을 사랑하는 당신의 사람이 이 진리로 인해 미움을 받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자기들이 사랑하는 그것이
진리이기를 바랄 정도로 인간들이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또한 그들은 속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속은 거라고 남들이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리인 줄 알고 사랑하는 것 때문에
스스로 진리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서 뿜어 내는 빛은 사랑이지만 진리의 심판은 미워합니다.
그들은 속는 것은 싫어하지만 속이는 것은 좋아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진리 자신을 나타낼 때에는 사랑하지만,
진리가 자신을 폭로할 때에는 증오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리는 그들에 대해 이런 식으로 보답할 것입니다.
즉 진리로 인해 폭로되기를 싫어하는 그들의 뜻을 어겨 폭로함과 동시에
진리 자신은 그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식으로 말입니다.

바로 인간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즉 자신의 마음 속에는 맹목이 잠들어 있어 천하고 보잘 것 없으면서도
자신은 감추어져 있기를 바라고 반면에
다른 것은 무엇이나 자신 앞에 드러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 반대의 보답을 받아 자기를 진리 앞에서 숨기지 못하고
더구나 진리는 자기 앞에 숨어 있게 됩니다.
인간은 이와 같이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으면서도
허위 보다는 진리를 더 기뻐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어떠한 방해물조차도 중간에 개입시키지 않고
모든 참다운 것에 대한 진리 그 자체를 기뻐하는 경지에 이를 때
비로써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10 권 고백 - 24. 기억속에 계시는 하나님. 

주님이시여, 나는 당신을 찾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나의 기억속을 헤맸는지 모릅니다.
그 기억 밖의 어디에서도 당신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내가 당신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을 알게된 후
기억속에 보관해 둔 것 이외의 무엇도 아닐 것입니다.
당신을 알게 된 후 당신으르 잊은 적은 결코 없습니다.
진리를 발견한 곳에서 바로 진리 그 자체인
나의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안 이후 당신은 나의 기억속에 머무르시며
당신을 상기하며 당신을 기뻐할 때 당신을 거기서 발견합니다.
이것은 당신이 나에게 주신 성스러운 열락이며
그것은 나의 가난한 마음을 굽어 살피는 당신의 자미입니다.

제10 권 고백 - 25.하나님이 계시는 곳. 

그러나 주님이시여, 당신은 나의 기억 속 어느 곳에 머물고 계십니까?
당신을 위해 어떤 곳을 마련해 두셨습니까?
어떤 성소를 당신을 위해 세우셨습니까?
당신은 영광스럽게도 나의 기억 속에 현존해 계시지만 그곳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신을 생각할 때 나는 짐승도 가지고 있는 기억의 공간을 초월했습니다.
사물의 영상 속에서는 당신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감정을 간직한 곳으로 왔지만
거기에서도 당신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기억 속에서 나의 마음이 차지하는 거처에 들어가 보았지만
ㅡ 사실 마음은 자기 자신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ㅡ
거기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사물의 영상이 아니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갈망하고 두려워하고 기억하고
그 밖에 그와 비슷한 마음의 감정을 갖는 것도 아니며 마음 자체도 아닙니다.
진실로 당신이야말로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이 모든 것을 움직이면서도 당신께선 만물을 초월해서 변함이 없으십니다.
게다가 당신을 알게 된 후부터 당신은 영광스럽게도 나의 기억 속에 계십니다.

나는 왜 실제로 거기에 장소가 있는 것처럼
기억의 어느 곳에 계시느냐고 묻는 것일까요?
어쨌든 그곳에 당신이 사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알게 된 후 지금까지 당신을 기억하고
또 상기할 때에는 언제나 당신을 기억 속에서 찾아 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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