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참회록]Augustine

제10 권 고백 (31~35)

好學 2009. 6. 25. 00:06

 

제10 권 고백 - 31. 식욕의 조절. 

그밖에도 '그날의 고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만
그날의 고통은 그날로 충족되기를 빕니다.
즉 당신께서 음식과 위를 멸하실 때까지는
우리는 매일 시들어 가는 육체를 먹고 마시는 일로 보완시킵니디.
그때에 당신께서 충족하게 채워 주심으로써 우리의 옥망이 사라지게 해주시고
이 소멸할 것을 영존할 비소멸성으로 입히십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쾌락이므로
쾌락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 쾌락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식하고 날마다 싸우워서 이따금 육체를 굴복시키지만
그 고통을 멸하기 위해서는 쾌락을 이용합니다.
사실 굶주림과 갈증은 일종의 고통이며
만약 영양이라는 의약이 다시 도와주지 않으면
열병이 사람을 죽이듯이 나의 몸을 산화시켜 버리겠지요
그런데 그 영양이라는 의약은 당신의 위로에 가득찬 선물에 의해 준비되어 있어서
땅과 하늘, 그리고 물은 그 선물을 가지고 우리를 도와주므로
본래 재앙이어야 할 이 음식을 우리는 '맛'이라거 부릅니다.

당신은 영양을 섭취함에 있어 약을 먹는 자세로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복의 고통에서 포식의 만족으로 옮기려 할 때
그 과정에는 육욕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그 통로 자체가 쾌락입니다.
필요에 의해 통과해야만 하는 통로는 없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때 어떤 위험한 쾌락이라는 동반자가 끼어들어
내가 말하기는 건강을 위해 먹고 마신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쾌락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과 쾌락의 기준은 결코 일정하지가 않습니다.
건강에 있어서 충분한 것은 쾌락에는 불충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육신을 돕기에 필요한 염려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쾌락으로 유혹하는 향락을 위해서 하는가를 묻게 됩니다.
가엾은 영혼은 이 불확실성을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명의 여지를 마련해 두고 건강이 필요로 하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매우 즐거워하면서
육신의 필요라는 구실 아래 쾌락의 일거리를 감추어 둡니다.
나는 그러한 유혹을 물리치려고 매일 노력하고
당신의 오른손으로 나를 도와달라고 매일 부르짖고
내 마음의 불안을 당신께 맡깁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문제는 나로써는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음식과 술로 몸을 둔하게 해선 안된다"고
명령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술은 나 자신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그런 것이 내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식욕과도 같은 육욕은 당신의 종을 여러 번 사로잡았습니다.
당신께서는 그런 것이 내게서 멀어지도록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만약 당신께서 보살펴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도 절제할 수 없습니다.
당시은 우리의 기도에 응낙하시고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가서야 그것을 깨닫게 된 것도 우리가 당신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나는 결코 애주가가 아니었으나
당신으로 인해 어떤 애주가가 금주가로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 애주가가 아닌 사람이 앞으로 금주가가 되는 것도
당신으로 인해서이며 그들이 그것을 깨닫는 것도 당신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나는 또 "육욕을 좇지말고 쾌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라."
하시는 당신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선물이었습니다.
나는 그 음성을 무척 좋아합니다.
"우리는 비록 먹더라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지만 먹지 않더라도 잃는 것이 없습니다."
즉 그것은 어떠한 것도 나를 부하게 하거나 가난하게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나는 또 다른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곤궁한 데서 인내할 줄도 압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분 안에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늘 나라의 병사이며 우리들과 같은 먼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시여, 우리는 먼지이며 당신은 먼지로부터 인간을 만드시어
인간은 일단 사라졌다가 다시 발견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바울 역시 먼지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께서 불어넣어 주신 숨결로 인해 그러한 말씀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그처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는 나를 능하게 만드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를 능하개 하셔서 나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십시오
당신께서 명령하실 것을 내려보내신 후에 당신의 뜻대로 명령하십시오
바울은 받았다고 고백했고 자랑도 주님 안에서 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나의 배의 정욕을 내게서 취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나의 거룩하신 하나님, 무엇이든 그렇게 되라고 명하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께서 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지신 아버지이신 당신께서 내게 가르치시기를
'깨끗한 자에게는 무엇이든지 깨꿋하지만 사람이 먹는 것으로 인하여
마음에 걸리면 악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피조물은 선하여 버릴 것이 하나도 없으며
사람은 모름지기 감사하는 마음으로 취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는 음식이 우리에게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고
더구나 어느 누구도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우리를 판단하지 못하며
그리고 모든 것을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판단하지 말고
먹지 않는 자도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이러한 것을 배웠습니다.
내 마음을 공평하게 하시고 내 마음 위에 빛을 비추신 나의 스승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신 당신께 감사하고 당신을 진정 찬양합니다.
모든 유혹에서 나를 구원해 주옵소서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부패한 음식이 아니라 추잡한 식욕입니다.
노아는 먹어서 영양이 될 고기는 무엇이나 다 먹도록 허락받았고
엘리야는 고기를 먹고 기운을 얻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한편 절제의 은사를 받은 요한은
짐승의 고기와 메뚜기를 먹었어도 더러워지지 않았고
에서는 죽 한 그릇에 넘어갔고
다윗은 물 한모금 마시려다가 실수하여 스스로를 책했고
우리의 왕 예수님도 고기가 아닌 빵으로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의 백성이 벌을 받게 된 것도 고기를 탐한 때문이 아니라
음식 투정으로 주님을 거스려 떠들어 댔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유혹에 처한 나는 매일 식욕과 싸우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적인 교접처럼 한번에 끊어버리고 나면
다시 되풀이 되지 않는 경우와는 다릅니다.
위(胃)의 고삐는 적절히 조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시여, 이같은 일에 있어서 꼭 필요한 분량만큼을
조금도 넘기지 않는 인간이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훌륭한 인물이며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을 찬양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위인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그렇지만 나도 당신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이 세상에서 승리하신 분(그리스도)이 나의 죄를 도맡아
자신의 한 허약한 지체로 여겨 주십시오.
왜냐하면 이 완전하지 못한 것을 당신의 눈이 확인하시고
모든 것이 당신의 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10 권 고백 - 32. 후각의 자극. 

후각의 유혹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없어도 아쉬워하지 않고 있으며 구태여 물리치지 않고
항상 없어도 그리 곤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시 속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에도 내 능력조차 알아 볼 수 없는 혹심한 암흑이 있어서
내 정신은 나의 능력에 대해 물어 볼 때 조차도 쉽사리 믿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정신에 고유한 것은 모두
경험이 밝히기 전까지는 대부분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사는 동안은 시련의 연속이어서
악한 상태에서 선한 상태로 된 자가
또다시 악한 자가 되지 않는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유일한 희망, 유일한 믿음, 유일한 확약,
그것이 바로 당신의 자비입니다.

 

제10 권 고백 - 33. 청각의 자극. 

귀의 쾌락은 나를 어찌할 수 없도록 꼭 얽어매고 있었지만
당신은 나를 풀어 놓아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나는 지금도 밝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면
당신의 말씀으로 감동되듯이 항상 즐겁게 마음의 안정을 찾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에 집착함이 없이 언제든지 필요할 때는 털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을 형성하고 있는 말로써 그 목소리가 내 마음에 들려고
그것의 훌륭한 위엄으로 내 마음속에 자리를 잡으려 할 때
나는 그것에 맞는 응분의 자리를 바로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어울리지 않는 명예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말씀도 이처럼 노래하면 가락에 맞추어 부르지 않았을 때보다
더 우리의 마음을 생생하게 감동시켜 준다는 것을 나는 느낍니다.
또 우리들의 정신의 모든 자극은 그 종류를 따라
음성과 노래에서 그 본래의 표현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저 신비로운 음조와 어울려 나타나는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정신이 감각의 즐거움에 굴복하면 유약해지고
감각이 이성을 동반자로써 관계하기보다는 가끔 속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감각은 이성때문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이면서도 순순히 이성을 좇아가지 않고
오히려 앞질러 가려고 이성을 자기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때때로 내가 이런 속임수를 지나치게 경계하다가
너무나 엄격한 나머지 잘못을 저지를 때도 있었는데
다윗의 시편이 노래로 불려질 때 그 즐거운 음악까지도 모두
내 귀와 교회의 귀에까지 들려지지 않도록 쫓아 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의 말이 떠오르면서
그것이 차라리 안전하게 여겨졌습니다.
내가 들은 것에 의하면 그는 시편을 읽는 사람에게
노래라기 보다는 낭독이라고 생각될 만큼 억양을 되도록 작게 읽으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신앙을 되찾기 시작한 초기에 교회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던 일을 상기하고는 지금도 그것이
밝은 목소리와 정확한 박자로 불려지는 것을 듣거나
가락보다는 가사의 내용에 감격하는 것을 보면
그 습관이 매우 유익했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나는 감각적 즐거움의 위험과
그것이 가지고 있는 구원적 효과의 경험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지만
ㅡ 결정적인 판단은 아니지만 ㅡ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더 좋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귀를 즐겁게 함으로써 마음이 연약한 사람에게도
경건한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는 내 경우에 있어서는 가사보다는 노래 자체에 더 많이 끌렸으며
그리하여 나는 벌받아 마땅한 죄를 범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러한 경우는 노랫소리조차도 듣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지금의 나의 상태입니다.
마음속에 어느 정도의 선을 구하며 선행을 쌓는 사람들이여!
나를 위하여 나와 더불어 울어다오!
나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은 자들은 내 말이 곧이들리지 않을 것이다.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어 돌아보시고 나를 보살펴 주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고쳐 주십시오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있어서 수수께끼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곧 나의 병입니다.

 

제10 권 고백 - 34. 눈의 유혹. 

당신의 신전인 형제들의 귀, 즉 경건한 자들이 들어야 할 고백이 아직 남아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육체가 가지고 있는 시각의 유혹입니다.
그것을 갖비고 비탄속에 잠긴 나,"하늘이 주시는 장막을 껴입기 위해 열망하는"
나를 아직도 괴롭히는 이 육체적 욕망에 대한 유혹 이야기를 끝내고자 합니다.

눈은 갖가지 아름다운 모습이나 밝고 고운 색갈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나의 영혼이 겉으로 보이는 이것들에게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좋은 것들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나를 차지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선은 하나님 자신이며 그런 것들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눈을 뜨고 있는 한 매일매일 내 눈앞을 얼씬거리며
잠깐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청각의 경우에는 조용해지는 시간이 있으므로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이것은 그렇지 못합니다.

색채의 여왕인 빛은 우리의 시야가 미치는 모든 것을 비춰 주며
낮이면 어디를 가나 내가 다른 일에 몰두하여
빛을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도 갖가지 모습으로 유혹해 옵니다.
게다가 너무나 교묘하게 달라붙기 때문에 갑자기 몸을 가리면
그리워서 다시 찾게 되고 오랫동안 빛이 없으면 서글퍼지기까지 합니다.

오, 빛이여! 토비아스가 눈이 멀었어도 아들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고
실수없이 사랑의 발걸음으로 앞서 가면서 느꼈던 빛입니다.
이삭이 노령으로 인해 눈이 어두워져 자기의 아들들을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그 빛을 보고 축복했으나 그러면서 깨달았습니다.
야곱이 고령으로 시력을 잃었어도 마음속으로 그 빛을 보고서
자기 아들들에게서 태어날 미래의 민족을 미리 내다 보았으며
요셉이 낳은 그의 손자들에게 축복할 때 팔을 교차시켜 놓았으니
아이들의 아버지가 아는 척하면서 그 팔을 바꾸어 놓으려 하였으나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 두 손자를 구별하여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빛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이고 이것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앞서 말한 사물의 빛은그것을 애호하는 소경들에게
이승의 삶을 유혹적이고 위험한 즐거움을 얹어 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빛에 대해서도 하나님이시여,
그 빛으로 당신을 찬미할 줄 알게 되면 꿈속에 빠져들기보다는 오히려
당신의 송가에 이를 다루게 되는 것이오니 나도 이같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나의 눈으로 인한 유혹을 극복해 당신께로 향하여 나아가는
나의 발걸음이 붙잡히지 않게 하시고
당신께서 '내 발을 줄에 얽어매이지' 않게 해주시도록
나는 보이지 않는 눈을 당신께로 행하게 합니다.
그 줄이 얽혀 있으므로 당신께서 그것을 하나하나 풀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 군데 놓아 둔 덫에 언젠가 한 번 내가 걸려들지 모르지만
당신은 이스라엘을 수호하시는 분이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

인간은 그들의 눈을 위해 갖가지 기술과 손재주를 부려서
의류나 구두 그릇, 그밖에 온갖 종류의 일용품, 그림, 조각,
그밖에 생활에 필요한 정도, 또는 경건한 의무를 무시하면서까지
온갖 기교를 부려 놓습니다.
그리하여 외면적으로는 자기들이 만든 것을 추구하면서
내면적으로는 자기들을 만드신 분을 외면하고  그분에 의해
자신 속에 만들어진 것(하나님과 닮은 모습)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나의 영광,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는 이런 것 때문에 당신에게 송가를 올리고
나를 거룩하게 만드신 당신에게 나를 기꺼이 바칩니다.
예술가의 영혼을 통해 익숙한 팔에 맡겨지는 온갖 아름다운 것은
영혼을 넘어서서 존재하고 나의 영혼이 밤낮으로 추구하는 아름다움
그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분입니다.
그런데 표면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거나 갈망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의 판단 기준을 아름다움 그 자체로부터 끌어 내면서도
사용 기준은 거기에서 끌어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사용 기준도 있는데 그들은 보지 못합니다.
만약 보았다면 멀어지는 일이 없이 당신을 위해 힘을 모았다가
방종한 쾌락을 위해 써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분별하는 나 자신조차도 이러한 것에 끌려 들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시여, 당신이 끌어내 주십니다.
당신의 자비는 언제나 내 눈앞에 있습니다.
사실 나는 불쌍한 모습으로 이러한 것에 걸려들지만
당신은 자비를 가지고 끌어내십니다.
때때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살짝 걸려들지만
때로는 깊이 빠져들어 고통을 느낍니다.

 

제10 권 고백 - 35. 제2의 유혹, 지식욕. 

여기에 다른 형태의 유혹이 또 하나 있습니다.그것은 더 위험한 것입니다.
즉 그것은 육체의 유혹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당신을 떠나서 정욕의 노예가 되려는 자들이 즐기고 행락하는 정욕인데
이것이 우리의 영혼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이니 학문이니 하는 미명을 쓴 허망한 호기심입니다.
그것은 지식욕 안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지만
모든 감각속의 인식이라는 점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눈이므로
성경에서는 이를 가리켜 안목의 정욕이라고 합니다.

사실 본다는 역할은 본래 눈이 하는 일이지만
우리들은 그 동사를 다른 감각에 대해서도 흔히 이용합니다.
그것은 이들 감각을 인식의 필요에 이용할 경우입니다.
예컨데 어떻게 번쩍이는지 들으라든가,
어떻게 비치는지 냄새를 맡아라든가
어떻게 빛나는가를 맛보아라고 하지 않고
얼마나 눈부신가를 만져보라고도 말하지 않으며
이런 경우는 모두 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단순히 어떻게 빛나는가를 보라
ㅡ 이것은 오직 눈만이 느낄 수 있습니다.ㅡ 라고 말하며
또한 어떻게 울리는가를 보라, 어떤 맛인지 보라,
어떻게 판단하는지 보라 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감각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경험은 보통
지금 말한 것처럼 안목의 정욕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본다는 역할에 대해서 으뜸을 차지하는 것은 눈이지만
5기타의 감각도 무슨 인식에 대한 것을 더듬는 경우에는
눈과 흠사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또 감각에 의해서 움직일 경우
쾌감이 하는 것과 호기심이 하는 것의 구별이 명확해집니다
쾌감은 아름다운 것,  좋은 소리가 나는 것,향기로운 것, 맛있는 것,
부드러운 것을 추구하지만 이에 반해
호기심은 그것 과는 상반되는 것을 시험삼아 추구합니다.
그것은 굳이 불쾌감까지도 침고 견디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험해 보고 싶다거나 알고 싶다는 욕망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갈가리 찢겨진 시체를 보고 무서워 떠는 것이 어떻게 즐거움이 되겠습니까?
그래도 사람들은 송장이 어디 있다고 하면 뛰어가서 보고는 슬퍼합니다.
더구나 꿈에 나타날까봐 두려워 합니다.
생시에 누가 억지로 가서 보라고 했듯이
혹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소문이나 되는 것처럼 거기에 끌려갑니다.

그밖에 다른 감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모두 말하자면 길어질 것이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이 병적인 호기심 때문에 외게의 자연에 숨겨진 것을 탐구해 내지만
그것을 안다고 해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요
인간이 오직 알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 호기심 때문에 사람들은 같은 의도하에 마술의 술법을 통하여
어리석은 지식을 깨닫고자 문제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호기심 때문에 종교에 있어서조차도 기적적인 일과 표적을 구하는데
이것은 구원받으려는 데서 생긴 행위가 아니라
오직 알아 보고 싶은 마음에서 생긴 것입니다.

위험으로 가득 찬 이 거대한 숲에서 실상 나는 많은 것을 마음 속에서 버렸습니다만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당신이 자비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매일같이 이런 것들이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으므로
그러한 것에 정신이 쏠려서 바라본다든가
허무한 생각을 채울 생각은 없다고 감히 말할수 있을 때가 언제이겠습니까?

물론 나는 영화 구경에 마음 쓰는 일도 없고
별의 운행을 알려고도 하지 않으며
또 나의 영혼은 망령에게 회답을 청한 일도 없습니다
나는 모든 더러운 종교의식을 배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당신을 겸손하고 순수하게 섬김이 마땅한데
저 악마는 온갖 술수를 다 써서 기적을 청해보라고 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완과 깨끗하고 티없는 조국 예루살렘을 통해서 당신에게 빕니다.
지금 내가 그러한 꾐에 넘어가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더 멀리 떨어져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누군가의 구원 때문에 애원할 경우에는
나의 목적과 의도는 앞의 경우와는 매우 다릅니다.
그리고 바라는 바를 행하시는 당신은 나에게 당신을 흔쾌히 따르는 능력을 주시고
앞으로도 계속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극히 하찮은 일들에 있어서조차
우리들의 호기심은 늘 유혹에 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얼마나 자주 유혹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아무도 그 횟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
처음에는 그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견디며 듣다가
어느 틈에 자진해서 귀를 기울이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젠 토끼를 쫒는 개 구경을 하기 위해 원형 극장에 가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간혹 들을 지나가다가 그런 일이 생겼다면
무엇이든 중대한 생각을 하다가도 중지하고 그 뜀박질에 정신이 쏠릴지도 모릅니다.
설사 타고 가던 말 머리를 돌리지 않는다 해도 마음은 기울어질 것입니다.
이 경우 당신께서 내 약함을 보시고 당장 깨우쳐 주시지 않는다면
즉 그러한 환상에서 당신에게로 옮아갈 생각을 주심으로써
아주 무시해 버리고 자나가도록 인도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가만히 앉아서 도마뱀이 파리를 잡는 것을 지켜본다든지
거미가 거미줄에 뛰어든 파리를 잡아 먹는 모습에
정신을 빼앗기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작은 동물이라고 해서 이치가 다를 것은 없지 않습니까?

나는 그런 것들을 보면 거기에서 만물을 오묘하게 다스리시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당신을 찬양하려고 마음 먹은 것은 아닙니다.
쓰러져 곧 일어나는 것과, 쓰러지지 않는 것은 그 성질이 다릅니다.

나의 생활은 그러한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희망은 오직 하나 당신이 베푸시는 자비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런한 종류의 것을 담는 그릇이 되어 허무한 것의
거대한 무리를 운반할 때에는 기도는 종종 중단되거나 방해를 받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마음의 소리를 당신의 귀에 조금씩 쏟아내고 있을때
어디선지 하찮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 그처럼 소중한 일을 중단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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