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참회록]Augustine

제10 권 고백 (16~20)

好學 2009. 6. 19. 19:31

 

제10 권 고백 - 16. 망각의 기억. 

그러면내가 망각이라는 말을 입에 담고
그 입에 담은 말을 인식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금 말하는 것은 그 말의 음향이 아니라
그 말이 의미하는 사상(事象)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음향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잊었다면
그것은 결코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기억을 기억하는 경우,기억 자체는 그 자신을 통해서 현존합니다.
즉 기억을 통해서 내가 기억하고 망각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망각이란 바로 기억의 결핍입니다.
그러면 망각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것은 어떤 식으로 기억에 현존하는 것일까요?
만약 망각이 기억에 현존한다면 기억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것만을 기억할 뿐 망각은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 망각이라는 말만 듣고그 말에 의해서 그 뜻을 인식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결국 망각은 기억에 현존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릴 것이며
망각이 기억에 현존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잊어 버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망각을 기억하는 경우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
망각 자체가 아니라 그 영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까요?
ㅡ 망각 자체가 현존한다면 기억은커녕
오히려 망각을 위해서 존재하는 셈이 되고 말것입니다 ㅡ
그러나 누가 이 문제를 규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어떤 형태인가를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시여, 저는 이 문제를 위해 노력하고 나 자신을 위해 애썼습니다.
나 스스로가 곤란과 땀을 필요로 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지금 나는 천계를 재는 것도 아니고 땅의 중량을 재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오직 나, 다시 말해 기억하는 나의 영혼이 문제인 것입니다.
내가 아닌 것이 나 자신의 자아에서 멀리 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 보다 내게 가까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나 자신의 기억은 내가 파악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없다면 나는 나자신에 대해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내가 선명하게 나의 망각을 기억한다면
나는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어쩌면 내가 상기하는 기억 속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망각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그 망각을
내 기억 속에서 인지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모두가 어리석은 일뿐입니다.

그러면 제3의 해결은 어떻습니까?
내가 망각을 기억하고 있을 때 나는 망각의 영상을 기억에 보관하는 것이지
망각 그 자체를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것이건 그 영상이 기억에 새겨지기 위해선 우선 그 자체가 현존해야 합니다.

내가 카르타고를 기억하고 그전에 살았던 모든 장소를 기억하고
그전에 본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다른 여러 감각이 전하는 것을 기억하고
또 육체의 건강이나 아픔을 기억하는 것도 모두 그러한 방법에 의한 것입니다.
즉 이러한 것들이 현존할 때 기억은 그것들로부터 영상을 받아들엿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현존하지 않아도 상기하는 경우에는
마치 현존하듯이 마음으로 보고 상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망각이그 자체에 의하지 않고 영상에 의해서 기억된다면
그 영상이 파악되기 위해 우선 망각 자체가 현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망각이 현존했을 때에 그것은 어떻게 해서
자기의 심상을 기억 속에 새겨 놓을 수가 있었을까요?
망각은 현존함으로써 이미 거기에 새겨져 있었던 것까지도 말소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사 어떤 방법에 의하던지 비록 불가해하기 때문에
설명하기 곤란한 방법일지라도 망각 그 자체까지도
- 우리들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것에 의해서 메워져 버림에도 불구하고ㅡ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제10 권 고백 - 17. 기억력에 있어서도 위대하신 하나님. 

주님이시여, 기억의 힘은 위대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신비스럽고 깊으며 다양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내 영혼, 곧 나 자신입니다.
그러면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요?
주님이시여, 나는 어떠한 본성을 지닌 사람일까요?
그것은 복잡다양하고 실로 무한한 생명입니다.

주여 보십시오
내 기억은 대 평원이며수많은 사물이 가득한 동굴이며 만(灣)입니다.
그중에 어떤 것은 모든 물체같이 영상에 의해서
어떤 것은 여러가지 학문의 지식같이 현존하는 방식에 의해,
또 어떤 것은 마음에 생기는 감정같이
어떤 관념이나 지표같은 것에 의해 기억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억 속에 있는 것은 전부 마음 속에 있습니다.
기억이 그것들의 관념이나 지표를 보존하면서
마음은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기억 사이를 배회하며 가능한 한 기어들어가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도 끝이 없으며 기억의 힘은 그처럼 큽니다.
죽어야 할 자로써 살아있는 인간 속에
이처럼 큰 생명의 힘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나의 영원한 생명이시여,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의 기억이라는 나의 힘까지도 초월하여
감미로운 빛이신 당신에게 다다를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보십시오, 나는 내 주위에 상주하시는 당신께 나를 올리면서
기억이라 부르는 나의 능력을 넘어서 당신을 만져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만질 수 있는 곳에서 내가 만지려 하고
우리가 당신께 매달릴 수 있는곳에서 내가 당신께 매달리려 합니다.
사실 새나 짐승도 기억력이 있습니다.
그 기억력이 없다면 제 집이나 그밖에 습관이 된
여러가지 일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기억이 없다면 어떠한 일에도 익숙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기억력을 초월해서 당신에게 다다르고자 합니다.
나를 네발 가진 짐승과 다르게 만들어 주셨고
나는 새보다도 슬기롭게 만들어 주신 그분께 도달하기 위해
기억마저 넘어서려 합니다.
그러나 어디서 당신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진실한 선이시며 무한한 즐거움이신 당신을 어디서 발견하겠습니까?
만약 나의 기억 밖에서 당신을 본다면 나는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당신을 발견하겠습니까?

 

제10 권 고백 - 18. 기억과 재인식. 

예컨데 한 여자가 은화를 잃고 열심히 찾았다고 합시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영영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녀가 발견한 후라도 기억이 없다면 그것이 돈인지 아닌지를 모를 것입니다.
나는 잃은 것을 찾다가 발견한 일이 많으므로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물건을 찾을 때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다가
찾는 것이 나오지 않을 때엔 으례 '그것이 아니다.' 라는 대답만을 했습니다.
잃은 것이 무엇이든 만약 기억하고 있지 않다면
눈앞에 나타난다 해도 알아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으로 알아 볼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잃은 것을 찾다가 발견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이럴 것입니다.

무엇인가가 시계(視界)로부터 없어져 가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경우
즉 어떤 가식적 물체의 경우에는 그 영상이 마음 속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시 눈앞에 나타날 때까지 찾아 발견하면
내부에 있는 영상에 의해 찾고 있던 물체가 바로 그것임이 확인됩니다.
그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잃어버린 것을 발견했다고 할 수 없으며
또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어쨌던 무엇을 잊어버리는 것은 눈 뿐이며
기억 속에는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10 권 고백 - 19. 재인식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고 나서 다시 기억해 내려고 할 때
기억 자체가 어떤 것을 모두 잊었을 경우에 어디에서 그 기억을 찾겠습니까?
무엇인가 찾는 것과 다른 것이 나타나면
울이는 찾는 것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찾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나타나면 우리는'이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소리치는 이유는 그것을 인식하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회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분명 그것을 잊어리긴 했지만.

우리가 전체를 망각한 것이 아닌 경우에
우리가 기억하는 부분으로부터 다른 부분을 찾아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이것이 전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눈 멀고 절룩거리면서 그 없어진 부분을 찾아 헤매기 때문입니다.
아는 사람을 만났거나 혹은 생각하다가 그 이름을 잊었을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 이름 저 이름 떠올려도 관습은 이 이름과 그 인물을 결부시키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의 참 이름이 나타날 때까지 모두 물리쳐 버립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참 이름이 나타나면 아무런 혼란도 일으키지 않고
경험된 관습이 그 이름을 마땅하게 여깁니다.

이 이름이 나타난 것이 기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그 이름을 상기시키고
우리가 그 이름이 옳다고 판단했을 때
그 이름은 본래 기억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새로운 것이라도 믿는 듯이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회상해 보고 '아, 그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정신에서 모두 없어져 버린 것이라면
남이 귀띔해을 해준다 해도 기억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잃어버렸다는 것을 기억하는 한,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완전히 잊어버렸다면 어떻게 잃은 것을 다시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10 권 고백 - 20. 복락과 기억. 

그러면 주님이시여, 나는 당신을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사실 나의 하나님이신 당신을 찾으면 영생 복락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내 육체는 영혼에 의해서 살고 내 영혼은 당신에 의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는 영생 복락을 어떤 방법으로 찾아야 하겠습니까?
'충분하다. 이것으로 족하다.'라고 말할 때까지는
아직 나에게는 영생 복락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기억에서 멀어져 갔지만
아직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고 회상을 하며 찾아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한 번도 안 적이 없거나 그것을 잊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모두 잊어버린 상태에서
그것을 마치 모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희구하면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영생 복락은 모든 사람이 갈구하는 것이며
이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것을 어떻게 알았으며
이것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분명히 우리는 이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나는 이것을 어떻게 소유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양상은 달라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행복한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소망하는 가운데 행복한 경우가 있습니다.
후자는 이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전자보다 조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소유하지도 못하고 소망도 없는 사람들 보다는
더 좋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긴 그 사람들도 이것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행복해 지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것을 갈망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것을 깨닫고
어떠한 방식으로 지금 감각에 지니고 있는지를 나는 모르나
이 깨달음이 회상에서 나온 것인지를 규명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깨달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한 순간 행복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들 각자가 행복했었는지
모든 사람이 처음 죄지은 저 한 사람 안에서만
행복했었는지에 대해서 묻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그 한 사람 안에서 죽었고
그에게서 우리가 모두 비참 속으로 태어났습니다.)
내가 묻는 것은 단지 우리 기억 속에서 영생 복락이 있는냐 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몰랐더라면 그것을 사랑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 복락이라는 말을 듣고모두가 그것을 갈망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저 그 말 자체만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인이 라틴어로 이런 말을 들을 경우
그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라틴 사람들이 들으면 기뻐합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인도 그리스어로 발음되는 것을 들으면 기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나 그밖의 다른 나라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도
모두 내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갈망하는 것은
그리스어나 라틴어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생 복락 그 자체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만인을 향해  단 한 마디로
'너희들은 영생 복락을 누리고 싶은가?'라고 한다면
모두가 서슴치 않고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 말이 뜻하는 행복 자체가 기억에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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