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참회록]Augustine

제10 권 고백 (11~15)

好學 2009. 6. 19. 19:26

 

제10 권 고백 - 11. 배운다는 것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영상을 감각 기관을 통해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물체 자체를 아무런 영상도 없이 통찰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배운다는 것은 기억이 무질서하게 지니고 있던 조각들을
생각하며 거두는 일이고, 이미 친근해진 마음을 그곳으로 향하기만 하면
곧 나올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나의 기억은 이러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들이 지금 말한 것 처럼 손 위에 놓은 듯이 명확해질 때
우리는 무엇을 배웠다거나 또는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생각을 게을리하면 알던 것도 잊어버리고
캄캄한 어둠으로 들어가 버린 듯한 것을 다시 생각해 내려면
거기에서 다시 불러내야만 합니다.
즉 안다는 것은 흩어져 있는 것을 거둔다는 뜻이므로
흔히 생각을 모은다고들 합니다.

왜냐하면 'cogo(거두다)'와 'cogito(생각하다)'와의 관계는
'ego'와 'agito', 'facico'와 'factico'의 관계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cogito라는 동사의 의미를 마음이 독점해 버렸기 때문에
다른 장소가 아니고 오직 마음이라는 장소에서 수집되어(colligitur) 
종합되는 것이라고(cogitur) 말하는 것은
이제 생각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제10 권 고백 - 12. 수학에 관한 기억 

이밖에 기억은 수와 양에 관한 무수한 비례 관계나 법칙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색채나 음향. 냄새.
또는 맛을 지니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기 때문에
어느 것도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인상지워진 것은 없습니다.
물론 그것들을 다룰 경우 그 낱말들의 소리가 있기는 하지만
이 말과 그 대상은 별개의 것입니다.
말은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울려 나올 수 있겠지만
그 대상은 그리스어나 라틴어 그밖에
다른 어떤 언어로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나는 설게사들이 제도한 아주 가느다란 선들을 보았습니다.
그 선들은 기하학의 선과는 달라서
육안으로 전달된 그런 선의 영상이 아닙니다.
어떤 물체도 생각하지 않고 마음속에 인식할 수 있는 자라면
그러한 기하학의 선을 알고 있습니다.
또 나는 자기들이 세는 수를
신체의 모든 감각에 의해서 인지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의해서 헤아리는 수'는 별개이며
인지되는 수의 영상도 아니기 때문에 훨씬 더 뛰어난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수를 볼 수 없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하는 나를 비웃어도 좋습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겠습니다.

제10 권 고백 - 13. 회상에 의한 회상  

나는 이러한 모든 개념을 기억으로 간직하고
그것을 어떻게 배웠는가 하는 것도 기억에 의해 간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사실에 반대하여 여러가지 잘못된 논리를 펴는 것도
내 귀로 듣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잘못된 논리라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내가 그것을 기억해 냄으로써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두가지를 구별하곤 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과는 각각 다른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종종 이것들을 이해한 것도 기억하고
또 지금 내가 구별하고 이해한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가서도
지금 내가 이해 했다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나는 내가 기억했다는 것까지도 기억하며
또 나중에 지금 기억하고 있는 사실을 회상한다면
그것은 다름이 아닌 기억의 힘으로 되새길 것입니다.

제10 권 고백 - 14. 감정의 기억 

이 기억은 나의 감정까지도 간직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감동을 경험하는 식으로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본성에 따라 간직하는 것입니다.
즉 나는 과거에 기뻤던 일을 지금 기뻐하지 않고도 상기하고
언젠가 무서웠던 일을 지금 아무 공포감 없이도 기억해 내며
과거의 욕정을 지금 그 욕정을 느끼지 않고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반대로 지나가 버린 슬픔을, 지금 기쁨을 가지고 상기하고
기쁨은 슬픔을 가지고 상기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 사실이 신체에 관한 한 그렇게 놀랄 일이 못되는 것은
마음과 몸은 별개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나간 신체의 고통을 지금 기뻐하면서 상기한다 해도
이상한 것은 없으나 마음의 경우는 전혀 이와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기억 그 자체가 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향해서 무엇인가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할 때에는
'자, 이것을 명심하시지요.' 라고 말합니다.
잊었을 때에는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다.다든가
마음으로부터 사라져 버렸다. 라든가 하는데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기억 그자체를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과거의 슬픔을 기쁨으로 회상할 때,
비록 슬픔을 기억한다 해도 내 영혼은 즐거운 까닭이 무엇입니까?
내 영혼이 즐거움과 동시에 슬픔을 기억하고 있는
기억 그 자체는 슬프지 않은 것이 웬일입니까?
그렇다면 기억은 영혼에 속하지 않는 것일까요?
누가 감히 그런 주장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틀림없이 기억은 영혼의 위(胃)같은 것이며
기쁨이나 슬픔은 달콤한 음식과 쓴 음식 같은 것이겠지요
일단 기억에게로 넘겨지면 위 속에 들어간 것같이
그 속에 간직되기는 해도 그 맛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비슷하다고 하면 우습지만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가 영혼에는 네 가지 감정, 즉 욕망. 기쁨. 두려움. 슬픔이 있다고 말할 때에도
역시 기억 속에서 상기해 내는 것입니다.
내가 이 네 가지를 종류대로 분류하고 그 개념을 규정하면서
이에 대해 무엇을 말하던가 또는 말해야 할른지는 거기서만 발견하고
거기서부터 이끌어 내지만 내가 이것에 대하여 기억하고 얘기할 때는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것들을 기억해 내고 고찰하기 이전에 그것들이 그곳에 있었으므로
내가 그것들을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것뿐입니다.

마치 음식이 위로부터 반추에 의해서 되새김이 되듯,
이것들고 기억의 되새김에 의해서 꺼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즐거움이나 슬픔에 대해서 말하거나 회상할 때
의식의 위속에서 그것을 맛보지 못할까요?
비슷한 것이 완전하지 못하므로 여기에는 비슷하지 않은 것이 놓여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슬픔이나 불안을 입에 올리기만 해도 슬퍼지거나 두려워진다면
누가 그러한 것을 굳이 입에 올리려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면
감각적으로 받아들인 그 말의 울리는 소리뿐 아니라
사물 자체의 개념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개념은 어떤 육신의 문을 통해서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며
다만 그 영혼이 그 정렬을 경험할 때 영혼 자체가 깨닫고 기억에 맡겼거나
아니면 기억이 위임을 받지 않고도 그냥 받아 두었거나 한 것입니다.

제10 권 고백 - 15. 현존하지 않는 것도 기억한다 

그러나 이것이 영상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를 누가 쉽게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나는 그 물체 자체가 내 감각 때에 있지 않을 때에도
돌이라든가 태양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영상들이 분명 내 머리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고통을 말한다고 해도 내게 어떤 고통이 없는 한
고통이란 현존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영상이 머리속에 현존하지 않는 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며
말을 할 때 기쁨과 고통도 구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건강한 상태에 있으면서 육체의 건강에 대해 말하게 되는 것은
건강 그 자체가 내게 현존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기억에 관한 영상이 없다면
나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결코 생각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병든 사람 역시 건강이란 말이 뜻하는 바를 아는 것은
비록 그 자체가 자기 몸에는 현존해 있지 않지만
기억력으로는 그 영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헤아리는 수를 입으로 얘기할 경우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영상이 아니라 바로 수 그 자체입니다.
'태양의 영상'이라는 말을 할 때 그 영상이 내 기억 속에 있으면
내가 회상하는 것은 그 영상의 영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영상 그 자체이고 이것은 내가 회상할 때 현존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기억이라고 말하면
내가 말하는 그 기억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 기억 자체 내에서가 아니면 무엇을 통해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것도 그의 모형 속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그의 현실성 가운데 현존하는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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