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인터넷성경교육]

제63과 사무엘하(4): 부록 및 결론 (21-24장) 9

好學 2012. 12. 8. 21:49

제63과 사무엘하(4): 부록 및 결론 (21-24장) 9

 

5. 다윗의 용사들의 이야기(23:8-39)


  (삼하 23:8-39)에는 부록에 나오는 두 번째 다윗의 용사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는 (삼하 21:15-22)에 나오는 명단과 비슷하게 다윗의 엘리트 용사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총사령관들 아래에 있는 30용사의 명단이 제시되고 있다. 이 곳에 소개되고 있는 용사들은 다윗 왕국 건립에 크게 활약했으며,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일에 큰 공을 세운 600명의 용사들 중에 일부이다. 본문에는 모두 37인의 용사들이 소개되고 있는 반면에 (대상 11:10-47)에는 16명의 용사들이 추가로 소개되어 있다.

 

 5-1. 다윗의 첫 번째 3 용사들(9-12)

 

 * 다그몬 사람 요셉 밧세벳(에센 사람 아디노)(8)
  그의 본 이름은 '야소브암'이며, '아디노'는 그의 별명이었다. 그는 시글락에서 다윗과 합류하였고(대상 12:6), 2만 4천명으로 구성된 정예병 중에서 1월에 근무하는  첫 번째 부대의 부대장이었다(다윗은 상비군을 12개의 군대로 나누고, 달마다 한번씩 근무하는 체번제를 실시했다)(대상 27:2). 그는 군장의 두목이었는데, '군장'('솰리쉬')는 '셋'이란 뜻의 '솰로쉬'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그는 지휘관 중의 지휘관, 즉 가장 뛰어난 세 장군의 하나였다. 그들은 왕이 전쟁에 나갈 때에 병거에서 왕과 함께 있었고, 왕의 주변에서 특수 부대(호위병)를 지휘했다(왕하 9:25; 10:25). 그러나 이들은 요압이나 아마사가 차지했던 전체 이스라엘 군대의 군장('사르')보다는 하급의 직책이었다.

 

 *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8-10)
  '아호아'는 베냐민 지파였으며(대상 8:4), '엘르아살'은 2만 4천명으로 구성된 부대 중에서 2월에 근무한 부대의 부대장이었다(대상 27:4). 그는 야소브암과 삼마와 함께 다윗의 뛰어난 세 장군('솰리쉬')의하나였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바스담밈'에서 전쟁할 때에(대상 11:13)블레셋 군사들을 보고 고지 쪽으로 올라가며 후퇴하였다. 이때에 다윗의 3장군은 물러서지 않고 블레셋 군사들을 유도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엘르아살이 혼자 앞서 나가서 손에 쥐가 날 때까지 블레셋 군사들을 쳤다. 이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승리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사들은 다시 돌아와서 블레셋 군사들이 버리고 간 군수품만 노략했다.

 

 *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11-12)
  마지막 다윗의 3 장군은 '삼마'였다. 전에 블레셋 사람이 레히(우리 말로 "떼를 지어"라고 번역된 말은 "레히"를 가리킨다. 이 곳에는 녹두 나무 밭(또는 보리밭)이 있다)에 모였을 때에 이스라엘 군사들은 그들을 보고 도망을 쳤다. 그러나 그때에 삼마는 홀로 그 밭에 서서 물러서지 않고 블레셋 군사들을 막아 공격했으며, 여호와의 도움으로 크게 승리했다.


 
5-2. 다윗의 두 번째 3인의 용사들(13-23)-아비새, 브나야, 익명의 한 사람


  이 세 사람은 충성에 있어서는 앞에 언급된 3인과 같았지만, 그 능력에 있어서 뒤지는 사람들이었다. 이 세 사람은 곡식을 벨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이때에 블레셋 군사들은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아둘람 굴은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 은신한 곳으로, 이곳에서 다윗은 그의 가족과 다른 동료들과 합했다(삼상 22:1-2).

 

이 곳은 가드와 베들레헴의 중간에 있는데, 최근 성서 고고학자의 탐사로 이곳의 산 중턱에서 약 400명 정도가 거주할만한 큰 동굴이 발견되었다. 블레셋 군사들이 진을 쳤던 '르바임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 지역에 있었다(5:18).

이 전투는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직후에, 다윗의 세력을 우려한 블레셋 족속이 선제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5:17). 이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었으며, 블레셋 군대의 진은 베들레헴에 있었다. 여기에 언급된 산성(메추다)은 아둘람 근처에 있던 산성을 말한다. 당시에 다윗은 아직 예루살렘을 정복하지못했기 때문에, 다윗은 아둘람 근처의 산성에 머물고 있었다(5:17). '영채'(맛차브')는 '군부대'를 의미하는 말이다(13:23; 14:1).

 

이러한 묘사는 당시에 상황이 이스라엘에게 매우 불리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블레셋 사람들은 길보아 전투(삼상 31:1-7)에서 베들레헴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며, 그 후에 그 곳에 군부대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에 다윗은 목이 말라서 베들레헴 성 문 곁에 있는 우물 물을 마시고 싶어 했다. 당시 다윗이 진 치고 있던 아둘람의 물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깨끗하고 시원한 베들레헴의 물을 사모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 우물은 베들레헴 북동쪽으로 약 15분 걸리는 곳에 있었으며, '다윗의 우물'이란 이름으로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Keil). 다윗은 베들레헴 태생으로(16:2,18), 어려서부터 이 우물 물을 마시면서 자라났을 것이다. 그 때에 다윗의 두 번째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블레셋 군사들을 치고 나가서 베들레헴의 우물 물을 길어왔다. 그러나 다윗은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떠온 피와 같은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물을 여호와의 제단에 전제물로 붓고 말았다(13-17). 다윗은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세 용사 생명의 대가인 물을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 헌납했다. 다윗은 '피를 먹지 말라'(레17:10)는 율법에 따라 세 용사의 피와 같은 물을 마시지 않았다.

 

  이러한 두 번째 3인에는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인 아비새와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그리고 무명의 한 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비새는 이 3인 중에 우두머리였는데, 그는 창을 들어 한 자리에서 300명의 군사를 죽있다. 또한 브나야는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이었다. '갑스엘은 유다 남쪽에 있는 지방이었다(수 15:21; 느 11:25). 여호야다는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이었는데(대상 27:5;12:27), 그의 아들 '브나야'는 다윗 치하에서 그렛과 블렛의 대장(근위대장)이 되었고(8:18; 20:23), 2만 4천 명으로 구성된 3월 군대의 장관으로 있었었다(대상 27:5).

 

또한 브나야는 아도니야의 반역을 분쇄한 공으로 솔로몬 때에 요압 대신 군대 장관이 되었다(왕상 2:28-35).그는 매우 효용한 일(라브 페알림-'위대한 행위', '큰 일')을 행했다. 그는 모압의 강한 용사 둘을  죽였으며, 눈이 올 때에 함정에 내려가서 사자를 쳐죽였고, 2m30cm나 되는 거대한 애굽 사람을 막내기를 가지고 싸워서 그의 창을 빼앗아 그를 죽이고 말았다. 이는 그가 얼마나 큰 힘을가진 자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다윗은 이러한 그를 인정하여 자신의 시위대 장관을 삼았다. 시위대는 왕의 근위대를 의미하며, 이는 사형 집행 기관인 '그렛' 부대와 왕명을 급히 전달하는 '블렛' 부대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매우 뛰어닌 용사들이었지만, 첫 번째 3인의 용사들보다는 못했다.
 

 5-3. 다윗의 31용사들(24-39)


  사무엘서 기자는 첫 번째 3인의 용사들과 두 번째 3인의 용사들을 언급한 후에 계속해서 그 밑에 있던 30인의 용사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 용사들의 마지막 명단에는 헷 사람 우리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다윗이 범한 밧세바의 남편으로 다윗의 충신이었으나, 다윗의 책략으로 인해 모살당하고 말았다(11:14-17). 한편 '헷'은 가나안  족속으로서 이방 족속이었다(창 10:15).  마지막 용사의 이름은 예상 외로 다윗이 죽였던 헷 사람 우리야이다. 우리야는 평범하게 징병된 인물이 아니라, 왕을 위해서 특별히 모집된 이방의 전문 군인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이스라엘의 경건한 병사처럼 행동했으며, 이로 인해 다윗의 죄가 더욱 강조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야에 대한 언급은 왕권의 교만이 불러온 비극과 그 대가를 암시하는 암호라고 할 수 있다.

 

  사무엘서 기자는 이들이 모두 37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본문(24-39절)을 보면 용사의 수는 도합 31인이 된다. 여기에 기록된 37인은 다음과 같이 산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 첫 3인의 용사들(8-12절), 2) 둘째 3인의 용사들(13-23절), 3) 세째 그룹의 31인의 용사들(24-39절). 한편 이 용사의 명단에는 군대 장관인 '요압'의 이름이 빠져 있다. 아마도 요압은 전군의 군대 장관이었기 때문에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요압은 헌신적으로 충성하긴 했지만, 그가 아브넬과 압살롬, 그리고 아마사 등을 살해하는 무자비한 행동을 했으며, 솔로몬 왕 때에 반란에 가담했기 때문에 본 명단에서 삭제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