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절기,헌신예배]

기독교 행복론(5): 사랑은 행복의 수고(고후 8:1-5)

好學 2012. 11. 25. 22:25

기독교 행복론(5): 사랑은 행복의 수고(고후 8:1-5)

 

 

1. 사랑 = 은혜의 통로 (Love, Channel of Grace) * 사랑이 없는 희생 (고전 13:3) (Sacrifice without love) * 사랑이 있는 구제 (고후 2:1-5)(Sacrifice with love) * 은혜는 흐르는 것 (Overflow of grace)

 

2. 사랑 = 기쁨의 공감 (Love, Empathy of Joy) * 너의 기쁨 = 나의 기쁨 (고후 2:1-4) (Your joy = my joy) * 기쁨을 나눈 어떤 신자 (A Christian who shared joy) * 닫힌 마음→ 열린 마음 (Closed heart→ open heart)

 

3. 사랑 = 행복의 갈망 (Love, Desire for Happiness) * 가슴 아픈 행복 (Heart-rending happiness) * 주는 것이 행복 (행 20:35)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 사역을 좋아하라 (히 11:24-26) (Enjoy sharing ministry)

 

기독교 행복론(5): 사랑은 행복의 수고(고후 8:1-5)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즐기는 행복한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시는, 우리의 행복하신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우리의 유익을 이루시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함으로 수직적인 행복을 누립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감동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배, 즉 ‘영으로’ 예배를 드릴 때에 예배의 감격을 맛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머리로 깨닫고 예배를 드릴 때, 즉 ‘진리로’ 예배를 드릴 때에 예배의 환희를 맛봅니다. 마음에 열(heat)이 있고 머리에 빛(light)이 있는 예배는 하나님의 행복에 동참하는 행복의 잔치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아버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를 마십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수직적인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수직적인 행복을 누린다면, 무엇을 통해서 수평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수평적인 행복을 누립니다. 어떤 사랑을 통해서 수평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1. 사랑 = 은혜의 통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 3절에서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교훈입니다. 여러분, 동료 조종사가 위험에 처한 것을 보고 동료 조종사를 구해 주고 자신은 그대로 산화한 조종사가 있다면, “아, 대단하네. 동료를 사랑하는 마음이 목숨을 바친 희생으로 나타났구나.”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그런 희생도 사랑이 아닐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후세에 자신의 명예로운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자신을 던져 산화(散華)한 것은 희생은 있어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8-9장에 마게도냐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구제 헌금을 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런 사랑이 행복의 수고라고 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게도냐 교인들의 구제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금을 두고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라고 했습니다(8:1). 그들의 구제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가 예루살렘 교인들에게로 흘러넘친 것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8:2). 그들은 고통과 시련과 가난이 극심했지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넘치는 기쁨을 가지고 넘치는 구제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들의 감격은 다른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후하게 채워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고후 8:2). 수직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즐거움이 수평적으로 사람들을 향한 후한 사랑으로 흘러넘친 것입니다. 그들은 억지로 구제한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구제했습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8:4). 그들은 기근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인들을 위해서 구제할 기회를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본래 나를 통해서 남들에게 흘러가도록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도 아브라함에게서 멈춘 것이 아니라 그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천하 만민에게 흘러들어가야 하는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도 그 은혜가 우리에게 멈추어 있도록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가 흘러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복도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하는 대로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멈추면 우리는 불행해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음과 사랑과 복이 우리에게 멈추어 있으면 우리는 아무리 많이 가져도 늘 불행합니다.

 

‘록은 롤의 대왕’ 엘비스 프레슬리가 죽기 6주 전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처음 음악을 하실 때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고 행복해지고 싶다고 하셨는데, 지금 행복하십니까?” 그는 “저는 지옥처럼 외롭습니다.”고 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부자도 되었고 유명해지기도 했는데, 왜 지옥처럼 외로웠을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의 은총(자연은총과 구원은총)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하나님의 은총이 흘러가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처럼 고독했습니다.

 

아동행동연구소의 소장 버나드 림랜드(Bernard Rimland)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남들을 돕는 사람들이다.”라는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남들을 돕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것은 그들이 은총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나를 통해서 남에게 흘러가게 할 때 나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잭 캔필드가 쓴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화가이자 도예가인 알이라는 사람이 큰 아들을 급성 맹장염으로 잃었습니다.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아이가 죽지 않았으리라는 죄책감 때문에 그는 정신이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얼마 뒤 그의 아내마저 여섯 살짜리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집을 나갔습니다. 비극에 비극이 겹치자 마음의 상처를 이기지 못한 그는 알콜 중독자로 살다가 어느 허름한 여인숙에서 혼자 쓸쓸히 생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 남겨 놓은 둘째 아들은 사랑이 넘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아들이 결혼해서 자녀들과 함께 사는 모습을 보면 언제나 평화롭고 활기가 넘치는 사랑이 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자상한 애정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집을 떠날 때인 19세가 될 때까지, 아버지는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키스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해 주셨습니다. ‘얘야, 난 널 사랑한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알콜 중독자 아버지가 매일 밤 아들에게 키스하면서 “난 널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 즉 아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흘러가게 할 때만은 행복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사랑의 통로가 될 때 아들에게 행복한 인생을 선사하게도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은혜의 막힌 통로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신 복음과 사랑과 복이 여러분에게서 멈추어 있다면, 이 시간부터 은혜의 막힌 통로를 뚫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복음도 흘러가고 사랑도 흘러가고 복도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2. 사랑 = 기쁨의 공감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2장 3절에서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한다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한다고 했습니다(1:24).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을 근심하게 하면 자신의 기쁨도 사라진다고 했습니다(2:1-3). 바울은 이런 자신의 태도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그의 “넘치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2:4). 여기에 매우 중요한 사랑의 또 하나의 원리가 나옵니다. 사랑이 행복의 수고가 되는 매우 중요한 비결이 나옵니다. 그것은 너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기쁨이 동시에 나의 기쁨이 될 때 사랑이 행복의 수고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남의 자식이 잘 되면 질투가 난다고 합니다. 남이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 괜히 심술이 난다고 합니다. 남이 주머니를 털어 베푸는 것을 보면 ‘돈 많다고 자랑하는 거야?’라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형제자매가 잘 되고 친구가 잘 될 때에도 내 자식이 잘 되는 것처럼 내가 기뻐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라.”고 합니다(롬 12:15). 우리가 하나님의 이 말씀에 순종하면, 남이 잘 될 때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 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사랑이 행복의 수고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이 행복의 수고라는 것은 자식들을 위해 수고하시는 어머니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자식들을 위해서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장을 볼 때 이를 박박 갈면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어머니가 있습니까?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합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어머니가 지은 밥을 먹고 좋아하면 절로 기분이 좋습니다. 자식들의 기쁨이 어머니의 기쁨입니다. 사랑은 행복의 노동입니다. 사촌이 땅을 살 때 배가 아프더라도 축하해 보십시오. 사촌이 땅을 살 때 축하해 주면 사촌이 땅을 살 때 기뻐하는 여유를 배우게 됩니다. 경쟁관계에 있는 친구가 잘 될 때 질투가 나더라도 축하 메시지를 보내 보십시오. 친구가 잘 될 때 진심으로 축하하는 여유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행복의 수고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답게 이웃을 사랑하다가 보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은 자다운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그 때에 사랑이 행복의 수고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사랑을 베풀면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남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서 기뻐할 때 나도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남이 기뻐할 때 내가 질투하는 것은 마귀의 뜻입니다. 남이 기뻐할 때 나도 기뻐해야 내가 행복합니다. 남이 기뻐할 때 내가 질투하면 나는 불행합니다. 입시 준비를 하는 자녀를 둔 어느 권사님이 입시를 앞둔 대여섯 명의 학부모들을 집으로 초청해서 다과를 대접한 후 함께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자녀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입학시험이 끝난 후 함께 기도하던 분들의 자녀들은 다 목표하던 학교에 들어갔는데 권사님의 자녀만 낙방했습니다. 권사님은 마음이 몹시 아팠지만, 다른 분들을 초청해서 자녀들의 합격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정말 하기 힘든 일을 하신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남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 후 권사님의 아들은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남의 기쁨을 공유하는 마음은 열린 마음입니다. 남의 기쁨을 질투하는 마음은 닫힌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마음이 닫혔다면 이 시간부터 마음을 열어 놓으십시오. 남이 기뻐할 때 축하해 주는 쪽으로 마음을 여십시오. 여러분이 마음을 여시고 남들의 기쁨을 여러분의 기쁨으로 공유하시면 여러분은 행복해지십니다.

 

3. 사랑 = 행복의 갈망 하나님의 은혜가 남에게 흘러가게 하고 남의 기쁨에 공감할 때 사랑은 행복의 노동(labor)이고 행복의 레저(leisure)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자식이 아프면 울고, 자식이 시험에 떨어지면 슬픕니다. 사랑하니까 울고, 사랑하니까 슬퍼하는데 어떻게 사랑을 행복의 노동, 행복의 레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린다는 복음의 은혜가 예수님을 안 믿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이웃에게 흘러가기를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불신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이웃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을 때 마음이 찢어집니다. 그것은 불신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혜가 흘러가기를 바라는 갈망 때문입니다. 불신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누리기를 갈망하는 마음과 불신 가족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하는 현실 사이의 간격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기를 바라는 갈망이기 때문에, 아픔이 따르지만 행복의 수고입니다.

 

<연탄길>이란 가슴 찡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책에 이런 시가 실려 있습니다. “잠자는 아기를 등에 업은/ 몸빼바지의 젊은 여자는/ 조심스럽게/ 대합실 바닥을 청소했다./ 뚱뚱한 역무원은/ 그녀의 굼뜬 동작을/ 호되게 나무랐지만/ 바보처럼 미소지을 뿐/ 그녀는 말이 없다./ 잠자는 아가야/ 어서 자라서/ 엄마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저주렴./ 너의 평화로운 잠을 위해/ 가슴을 찌르는 말에도/ 웃고만 있는 네 엄마는/ 바보가 아니란다./ 말 못하는 바보가 아니란다.” 아기를 업고 대합실 바닥을 청소하는 엄마가 가슴 찌르는 말에도 웃고만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아가의 평화스러운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엄마의 사랑입니다. 역무원의 호된 질책에는 눈물이 나지만 아가를 위해 수고하는 엄마는 그래도 행복합니다. 우리는 가슴 아픈 현실 속에서 사랑을 베푸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장로님들 앞에서 고별 설교를 할 때에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20:35). 약한 자들을 돕기만 하면 되지, 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까? 우리는 흔히 행복하기 위해서 남을 돕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남을 도와주는 것은 정말 순수하지 못한 것입니까? 돈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은 순수하지 못합니다. 돈은 사랑의 자연적인 보상이 아닙니다. 돈을 위해서 결혼을 하면 그것은 순수하지 못합니다. 돈은 사랑의 자연적이 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사랑은 자연적인 보상입니다. 결혼을 위해서 사랑하는 것은 불순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것입니다. 돈은 사랑의 자연적이고 정당한 보상이 아니지만, 결혼은 사랑의 자연적이고 정당한 보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정당한 보상은 어떤 행위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C. S. Lewis). 결혼은 사랑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결혼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은 순수한 동기입니다. 남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게 하는 것, 즉 주는 것은 행복한 수고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사역하는 것은 순수한 동기입니다. “남들을 도와주니 정말 기쁘더라.”고 하면서 도와주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 도와주는 것은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위해서 사역하는 것은 순수한 동기입니다. 행복은 주는 사랑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것은 행복합니다. 우리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행복을 위해서 나누고 섬기는 삶을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벧전 5:1-2).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남들을 섬기는 사랑에는 고통과 희생이 따르지만 고통보다 기쁨이 훨씬 더 큽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속담에 “눈에 눈물이 없으면 영혼에 무지개가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랑의 수고에는 눈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행복의 무지개도 있습니다.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히 11:24-26).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사역에 고통이 따르지만 사역을 즐겼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통해서 남들에게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남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기뻐할 때 남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고통보다 행복이 더 큽니다. 이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어 보십시오. 미운 사람에게도 사랑을 베풀다 보면 사랑이 행복의 수고라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