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절기,헌신예배]

기독교 행복론(4): 예배는 행복의 잔치 (요한복음 4:20-24)

好學 2012. 8. 14. 15:05

기독교 행복론(4): 예배는 행복의 잔치 (요한복음 4:20-24)

 

Christian Hedonism(4): Worship, the Feast of Happiness 

 

1. 바로 깨달아야 예배가 잔치 (Understanding through Shock-Therapy) 제1충격: 사마리아 통과 (Passing through Samaria) 제2충격: 윤락녀와 대화 (Conversation with a harlot) 제3충격: 물에서 생수로 (From water to living water) 제4충격: 영생하는 생수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 제5충격: 남편 불러오라 ("Call your husband.") 제6충격: 영과 진리로 (Worship in spirit and truth) 제7충격: 내가 메시야 ("I am the Messiah.")

 

2. 영으로 드려야 예배가 잔치 (Worship in Spirit) * 마음(heat)으로 드리는 예배 (Worship in heart by knowing how to worship) * 성령님의 감동으로 영의 예배 (Worship in spirit inspired by the Holy Spirit) * 놀란 침묵(stunned worship)→ 경외 경탄(awe and wonder)→ 통회 갈망(contrition and longing) → 기쁨 희망(joy and hope)

 

3. 진리로 드려야 예배가 잔치 (Worship in Truth) * 머리(light)로 드리는 예배 (Worship in mind by knowing whom to worship) * 아버지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 (God is the fountain of living water) * 예수 그리스도로 아는 하나님 (4:13-14) (Know God through Jesus Christ) 행복의 잔치 (The feast of happiness) 행복의 샘물 (The spring of happiness)

 

기독교 행복론(4): 예배는 행복의 잔치 (요한복음 4:20-24)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행복한 생활입니다(시 37:4).

우리의 행복의 근거는 아버지 하나님의 행복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만사를 자신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시는 행복한 분이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행복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와 믿음, 즉 회심(回心)의 문을 열고 행복의 집에 들어갑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느끼고 청산하는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수긍하고 영접하는 믿음을 통해서 행복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만 회개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평생 회개하고 평생 믿습니다. 평생 매일 매순간 잘못된 것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귀한 삶의 보배로 삼고 믿을 때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예배는 행복의 잔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드리는 예배에서 행복의 잔치에 참여했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 예배는 드려야 하고 드리게 되니까 드리는 것은 아닙니까?

예배를 드리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하다는 느낌이 드는 정도입니까?

말씀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있는 정도입니까?

예배의 감격이 있고 예배가 고대되고 예배가 삶의 원동력이 됩니까?

예배가 정말 여러분에게 행복의 잔치입니까?

 

1. 바로 깨달아야 예배가 잔치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과 오늘 우리들이 예배가 무엇인지 잘 깨닫지 못하고 덤덤하고 멍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영적인 잠을 깨우시기 위해서 충격적인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둘러서 갈릴리로 갔지만, 예수님은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피가 불순한 혼혈족으로 보고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9절). 그런데도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시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6시, 지금의 12시에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할 정도로 여성을 멸시하고 천대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유대인 여자도 아니고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하셨습니다(7, 9절). 예수님은 두 번째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하신 후에 그 여인이 예수님이 누구이신 줄 알았다면 예수님에게 뭔가 달라고 구했을 것이고 예수님은 그녀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0절). 여인은 “두레박도 없는데 어디서 생수를 구합니까? 당신은 우리에게 이 우물을 준 우리의 선조 야곱보다 더 큽니까?” 질문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11-12절). 예수님은 세 번째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신이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즉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하셨습니다(13-14절). 여인은 “세상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물을 제게도 주십시오.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물 길러 오는 번거로움도 없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15절). 예수님은 네 번째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느닷없이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을 때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같이 사는 남자는 여인의 남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15-18절). 여인은 자신의 삶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시는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하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19절). 예수님은 다섯 번째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를 묻는 여인에게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whom)과 예배의 태도(how)가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20-24절). 여인은 또 다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여섯 번째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오면 모든 것을 알려주실 것이라는 여인에게 “내가 바로 그다.”고 하심으로써 결정적인 충격을 주셨습니다(25-26절). 예수님은 일곱 번째 충격요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여인--생수--영생의 생수--남편--예배--메시야, 이렇게 7대 충격으로 잠든 여인을 깨우셔서 바른 예배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에 대해서 덤덤한 우리도 충격요법을 통해서 깨우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바른 예배를 드리게 하십니다.

 

2. 영으로 드려야 예배가 잔치 23절과 24절에서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예배는 우선 “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감성을 동원하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위대한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때문에 미지근한 예배는 역겨운 것입니다. 빛(light)과 함께 열(heat)이 있어야 합니다. 머리에는 빛이 있고 가슴에는 열이 있어야 참된 예배를 드립니다. 진리의 빛에 근거해서 가슴의 열로 예배하는 것이 ‘영’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고 할 때 ‘영’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우리의 ‘영’입니다. 우리의 영은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는 냉랭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영을 뜨겁게 하십니다. 참된 예배는 성령님으로 불붙은 인간의 영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살아나서 성령님으로 민감해진 우리의 영으로 예배합니다. 성령님은 진리라는 연료로 우리의 영에 불을 붙여 생동적인 예배의 뜨거움을 생산하십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이 아니라 사마리아 오경을 사용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누구신지(who) 바로 알고, 마음으로 생명력 있게(how)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바로 드리기 위해서 진리(truth)도 깨달아야 하지만 영(spirit)도 팔팔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공허한 형식주의와 전통주의에 매인 예배는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었습니다(마 15:8-9//사 29:13).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예배는 헛되고 공허한 예배입니다. 예배는 단순히 의지적인 행위만이 아닙니다. 마음의 감성이 들어가야 참된 예배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40년대 미국 대각성운동의 중심인물이었습니다. 대각성 운동 중에 사람들이 기절하여 땅에 쓰러지고 비명들을 지르고 발작을 일으키고 소동하고 뒹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극단적인 감정 현상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에드워즈는 그런 극단적인 감정 현상을 변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에 근거한 깊고 진지한 감성은 뜨겁게 표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진리의 영향을 받은 감성이라면 최대한 뜨겁게 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말씀 진리에 의해 하나님의 위엄과 성결에 마주칠 때 최초 반응은 놀란 침묵입니다(시 46:10; 합 2:20). 침묵에서 경탄과 경외가 나옵니다(시 33:8). 하나님의 의로운 능력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 임합니다(사 8:13; 시 5:7).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권위에 대해 얼어붙게 하는 공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의식하지 못한 데 대해 마음이 아프고 통회하는 것입니다(시 51:17; 사 57:15). 통회와 함께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생깁니다(시 42:1-2; 73:25-26; 63:1). 하나님은 통회하는 심령에 기쁨과 감사로 채워 주십니다(시 30:11-12). 통회할 때 희망의 서광이 비춰오면서 기쁨이 충만합니다(시 42:5-6; 130:5).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좋은 선물만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하나님은 하나님을 갈급하게 사모하는 심령을 만족하게 해 주십니다. 여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가 있습니다(시 27:4; 16:11; 37:4).

 

3. 진리로 드려야 예배가 잔치 사마리아 여인이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고 질문할 때,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에 관한 질문은 예배가 무엇인지 몰라서 하는 질문이라고 하셨습니다.

22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셨습니다.

 

예배는 알고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3절과 24절에서 예배할 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 지금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알고 드리는 예배가 진리(요 8:32; 17:17; 롬 10:2)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누구를 예배하는지,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알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23절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가 예배를 드릴 대상입니다.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제자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요 14:9).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신 분이십니다(4:34).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과 죽음과 삶을 통해서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을 맛있는 음식처럼 즐기셨던 행복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압니다(3:16). 하나님은 우리를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큼 영원만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서 영원히 지글지글 타야 할 벌레 같은 우리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최고 최상의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다 하실 수 있고, 어디나 계시고, 완벽하게 의로우시고, 완벽하게 진실하시고, 완벽하게 신실하시고, 완벽하게 아름다우시고, 완벽하게 위엄찬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완벽한 절대사랑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을 무시한 돈과 권력과 지위와 성공과 쾌락은 이스라엘 식으로 말하면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 우리 식으로 말하면 밑 빠진 독입니다(렘 2:13).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공허하고 허탈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우리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시는 “생수의 근원”이십니다(렘 2:13).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13-14). 예수님을 매순간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수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연결되기 때문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게 됩니다. 여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여기에 공허와 허탈이 없는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 마지막 날에도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요한은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는 해설을 덧붙였습니다(7:39).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영접할 때만 믿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순간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 실감나게 믿으면, 성령님께서 우리의 인격의 중심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생수가 펑펑 솟구쳐 흘러넘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맛이요, 하나님의 맛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바로 이런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심령 속에 거주하시면 좌절과 실망으로 속이 타는 영혼에 생수를 주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해서 영혼이 그것을 깨닫고 만족하게 하십니다(요 14:26).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마시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것은 생명과 능력이 없는 메마른 진리가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으로 흠뻑 젖은 진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 남편 다섯을 두었던 죄, 그 후에 자기 남편 아닌 사람과 같이 사는 죄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녀에게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심으로써 그녀의 어둠 속에 있는 영혼을 발가벗겨 노출시키셨습니다. 가려진 죄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죄는 영적인 감각을 무디게 해서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지만 그것도 못 느끼게 하는 한센병과 같습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전한 것을 보면, 그녀가 한센병 같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실 때에(고후 4:6), 우리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알고 드리는 예배,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면 “와, 하나님 대단하십니다. 앗다, 하나님, 굉장하십니다. 오 하나님, 제가 큰 절을 하겠습니다. 아니, 제가 무릎 꿇고 경배합니다. 영광과 찬송과 경배와 존귀를 세세토록 올려드립니다.”는 반응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기쁨입니다(시 4:7; 5:11; 9:2; 17:15; 40:8; 51:10, 12; 63:1-3; 73:25-26).

예배는 행복의 분출입니다.

공동체로 드리는 예배가 행복의 잔치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배를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주연 배우이고, 하나님은 목사님에게 대사를 알려주시는 프롬프터이시고, 교인들은 연극을 보는 평가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회중이 주연배우이고, 목사님은 회중에게 대사를 알려주는 프롬프터이고, 하나님이 평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예배드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반주자가 열성적으로 반주하고 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찬양대와 교인들이 찬양을 하고 있는데,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간절하게 기도드리고 있었는데, 그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놀란 그 사람이 천사 가이드에 얼굴을 돌렸을 때 천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요. 들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모양만 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예배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한 번 들어보십시오.” 정적 속에 선명한 어린아이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어린아이는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이 그 어린아이의 예배를 흡족하게 받으신 것입니다.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머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는 열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빛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이 우리 마음속에서 뜨거운 열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머리로는 차분하게 진리를 깨닫고 마음으로는 뜨겁게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예배입니다. 감성 없는 진리는 죽은 정통입니다. 진리 없는 감성은 공허한 열광입니다. 참된 예배는 건전한 교리에 깊은 감성이 결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머리로 하나님을 바로 깨닫고 마음으로 감격할 때 예배가 터져 나옵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과 진리로 예배하심으로 예배의 감격과 행복을 마음껏 누리시고 예배의 행복을 남들에게 전하십시오. 예배는 행복의 잔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