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절기,헌신예배]

기독교 행복론(3): 회심(回心)은 행복의 문 (계시록 3:14-22)

好學 2012. 8. 14. 14:55

기독교 행복론(3): 회심(回心)은 행복의 문 (계시록 3:14-22)

 

Christian Hedonism(3): Conversion, the Door to Happiness 

 

1. 미지근한 불행 (Unhappiness in Lukewarmness) * 생수 통로가 막힌 신앙 (Blocked channel of living water) * 스펄젼 목사님의 경고 (Warning from Charles Spurgeon) * 풍요 속에 잠든 신앙인 (Spiritual sleep in affluent society)

 

2. 죄를 회개하라 (Repentance from Sin) * 미지근한 상태에서 벗어나라 (Arise from lukewarm faith) * 회개는 지정의(知情意) 반응 (Intellectual, emotional, and volitional change) *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 (Confession of Augustinus)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3-14).

 

3. 주를 신뢰하라 (Faith in the Savior-Lord) * 예수님을 왕좌에 (Enthrone Jesus in your heart) * 믿음, 윤리, 비전 (Faith, proper conduct, and vision) * 믿음 = 지식 + 승인 + 신뢰 Faith = Knowledge + Approval + Trust 존 맥스웰 (John Maxwell), <실패해도 앞으로 나가라>(Failing Forward) “실패해도 그리스도에게 나가라” (Failing Christward).

 

기독교 행복론(3): 회심(回心)은 행복의 문 (계시록 3:14-22)

 

지난번에 우리의 행복의 근거는 하나님의 행복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행복은 하나님의 주권에 기초한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원하시는 대로 하시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행복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전심전력 하십니다(사 48:11). 하나님은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전심전력 하십니다(렘 32:41).

 

그런데 왜 우리들 중에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불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까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예수님을 믿는데도 예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불행한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미지근한 신앙입니다(15절). 에스겔 47장 말씀대로 예수님의 생수가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생수가 흘러가는 곳마다 팔팔하게 살아나는 행복이 있습니다. 신앙이 미지근한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과 행복의 통로가 끊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생명의 약동이 없고 생명의 감격이 없습니다. 그것이 불행입니다.

 

현재 터키의 서남쪽 히에라볼리(현재 파묵깔레)는 섭씨 35도의 뜨거운 온천으로 유명합니다. 히엘라볼리의 뜨거운 물이 라오디게아 근처에 오면 아주 미지근한 물이 됩니다. 그 물이 골로새에 가면 아주 차가운 물이 됩니다. 라오디게아의 미지근한 물은 마시면 토할 것 같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신앙은 주님이 토할 만큼 미지근했습니다.

 

19세기 세계 최고의 설교가 스펄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에게 12명의 진지한 심령들을 주시고, 나를 런던 어디에라도 내려놓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좋은 도우심으로 곧 광야와 적막한 땅으로 즐거워하게 만들 것입니다. 마음을 절반만 바치고 결단력과 관심이 없는 여러분 모두를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단지 사람들의 열정과 진심을 막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미지근한 교인 5천명은 5천 개의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영혼들을 구원하기로 결심한 12명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심령은 너끈히 승리합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미지근하면서도 나름대로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17절에 의하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라오디게아 시는 은행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직물업으로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안과대학에서 만든 안약으로 눈병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물질적으로 부유한 것을 영적으로 부유한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물질적으로 잘 살다가 보니까 영적으로 “자장! 자장! 자장!”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무디 기념교회의 위어스비(Wiersbe) 목사님이 지적한 대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물질적인 부와 번쩍이는 통계가 사실은 썩어가고 있는 시체를 감싸고 있는 수의”였습니다. 17절 말씀대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은행업으로 부유했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했습니다. 안과대학으로 유명했지만 영적으로는 눈이 멀었습니다. 직물업으로 유명했지만 영적으로는 벌거벗었습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눈멀고 벌거벗은 거지”였습니다. 신앙이 미지근하면 불행합니다. 대충대충 믿는 사람들은 행복을 모릅니다. 세상에도 한 발, 주님에게도 한 발을 걸친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그들 속에 예수님의 생명과 희망이 흐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희망이 흐르지 않으니 감격과 감사와 행복이 없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생활이 불행하다면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주님은 19절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책망한다고 하시면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하면서도 부유한 것으로 생각하고 벌거벗었으면서도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고 보지 못하면서도 본다고 생각하는 착각과 교만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물질적으로 편리한 생활을 하면서 빠져든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지은 죄를 지성적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은 죄에 대해 감성적으로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은 죄에서 의지적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변화된 마음과 변화된 삶으로 나타납니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회개하는 신앙이 진짜 신앙입니다. 믿는 회개가 진짜 회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주시는 구원자(Savior)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인도하시는 주님(Lord)이십니다. 예수님을 구원자와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님을 삶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받아들이는데 필수이고, 그리스도를 삶의 주님으로 모시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님으로 모시고 그리스도에게 굴복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에게 배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사 55:6-7; 행 2:37-38; 3:19; 5:3; 17:30; 20:21; 롬 2:4; 고후 7:10; 히 6:1).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죄를 지적하심으로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의 경우 물질에 대한 탐욕을 지적하셨습니다(눅 18:22).

니고데모의 경우 지식의 교만을 지적하셨습니다(요 3:1-21).

삭게오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함과 동시에 예수님을 삶의 주님으로 삼아 부정축재와 횡령의 죄를 청산했습니다(눅 19:1-10).

회개는 하지 않고 믿는다고 하니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보아도 소용이 없더라. 아무 변화가 없더라.”고 하는 것은 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살던 잘못된 삶을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가 없이 믿기만 하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악인이 그 악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고 앙심을 품고 있는데 행복할 수 있습니까? 결혼 테두리 바깥에서 간음을 하고도 행복할 수 있습니까? 악에서 돌이켜야 마음이 편합니다. 용서할 사람 용서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마음이 편합니다. 욕심을 버려야 행복합니다.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의 길목에서 가장 놀라운 영향을 미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책 <참회록>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이웃집에서 노는 아이들이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고 부르는 노래를 듣고 쓰디 쓴 마음으로 회개하면서 통곡했습니다. 저는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그런 말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펴서 제일 먼저 발견하는 부분을 읽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저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닦고 일어났습니다. 저는 바울 사도가 쓴 성경을 다시 펼쳐서 조용하게 제 눈이 제일 먼저 닿는 곳을 읽었습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저 더 이상 읽지 않았고, 읽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끝 부분을 읽을 때에 갑자기 평안의 빛이 제 마음 속으로 밀려들어왔고 의심의 모든 어둠이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방탕과 음란의 악한 길에서 돌이켰고, 그 결과 놀라운 행복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예수님에게 처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면 그것이 바로 행복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계속 믿으면서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서 몰아냈을 때에는 예수님을 다시 마음의 왕좌로 모셔야 행복을 회복합니다. 주님은 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을 해결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마음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 다시 모시면 믿음이 강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18절 말씀대로 “불로 연단한 금” 같은 믿음을 주십니다. 믿음이 있으면 마음에 불이 붙습니다. 믿음이 강해져서 성경이 절실히 믿어지니까 생명의 양식을 먹어 행복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흰 옷”과 같은 바른 행위를 주셔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게 해 주십니다. 바로 살면 마음에 불이 붙습니다. 벌거벗은 수치가 없으니까 마음이 편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가짜 영수증 쓰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혈기를 부리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미워하고 앙심을 품고 용서하지 않으니까 스스로도 부끄럽고 남들에게도 부끄러워서 불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바르게 살면 마음이 편하고 행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안약을 눈에 발라” 영적인 것을 밝히 보게 해 주십니다. 안약을 발라 보게 되니까 행복합니다. 천국도 보이고 지옥도 보이고 예수님도 보이고 하나님의 영광, 임재, 영생도 보이고 내가 왜 이 땅에 왔는지, 뭐하다가 가야 하는지도 보이니까 행복합니다. 귀로 듣기만 하다가 눈으로 보니까 행복합니다(욥 42:5). 영적인 소경이 눈을 떠서 하나님의 세계를 보니까 행복합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35년 간 정확하게 말해서 허무주의자였습니다. 사회주의 혁명가가 아니라 아무것도 믿지 않는 허무주의자였습니다. 5년 전에 예수님을 믿고 나서 저의 삶 전체가 갑자기 변화되었습니다. ... 삶과 죽음이 더 이상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절망 대신에 죽음이 빼앗아가지 못하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톨스토이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절망 대신에 기쁨과 행복을 맛보며 삽니다. 회심은 회개와 믿음을 합친 것입니다. 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이고,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knowledge)과 아는 것에 동의하는 승인(approval)과 아는 것에 동의한 대로 자신과 자신의 삶을 던지는 신뢰(trust)입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롬 10:14).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을 알아야 믿습니다.

절벽 아래 사자들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손만 잡으면 사자들에게 떨어져 먹히지 않도록 건져주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지식입니다. 지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알고도 반항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롬 1:32). 귀신들도 예수님을 알지만 믿지는 않습니다(약 2:19). 지식만이 아니라 수긍이 필요합니다. 수긍이란 아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알고 수긍했습니다(요 3:2).

알고 수긍하는 것은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고집 부리는 것과 다릅니다. 절벽 아래 사자들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손만 잡으면 사자들에게 떨어져 먹히지 않도록 건져주신다는 사실을 알면서 인정하는 것이 수긍입니다. 지식과 수긍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구약을 알고 수긍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았습니다(행 26:28).

지식과 수긍과 함께 신뢰가 있어야 참된 믿음입니다. 신뢰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새로운 생명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절벽 아래 사자들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손만 잡으면 사자들에게 떨어져 먹히지 않도록 건져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수긍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는 것이 신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요 1:12).

손님을 집안으로 영접하듯,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으로 영접해 들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올인(all-in)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존 맥스웰은 <실패해도 앞으로 나가라>(Failing Forward)라는 책에서 싱가포르의 성공 비결을 소개했습니다.

싱가포르는 1959년 영국에서 독립했을 때 최고의 희망은 말레이시아에 배속되는 것이었습니다.

싱가포르가 1963년 말레이시아에 배속되었으나 2년 후에 말레이시아가 싱가포르와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 때 싱가포르는 스스로 그 난관에서 빠져나오는 길밖에 희망이 없었습니다.

싱가포르의 42세의 지도자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는 산업을 일으키고, 공공 주택을 건립하고, 국민들을 교육하고, 은행 시스템을 만들고, 여행 산업을 독려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싱가포르는 걸핏하면 파업하고 하루걸러 데모하는 등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리콴유는 공장 건설은 일본과 독일, 은행과 금용은 스웨덴과 홀란드, 육군은 이스라엘, 공군과 해군은 뉴질랜드와 호주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싱가포르는 한 때 실패했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감으로써 국민소득 세계 10위 안의 부국이 되었습니다.

싱가포르는 제주도의 1/3만한 작은 국토에 인구는 고작 400만 밖에 되지 않지만, 실패해도 꾸준히 앞으로 나감으로써 세계적인 강국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실패해도 그리스도에게 나가라”(Failing Christward)는 메시지가 떠올랐습니다. 실패해도 그리스도에게 나가고 죄를 지어도 그리스도에게 나가면 삽니다. 절망 밖에 없어도 그리스도에게 나가면 희망의 빛이 비춰옵니다. 살 길이 막연해도 그리스도에게로 꾸준히 나가면 살길이 열립니다. 우리를 불행에 빠뜨린 악한 길에서 돌이켜 그리스도에게 나가면 행복의 원천에서 솟구치는 행복의 생수를 매일 매순간 마실 수 있습니다. 회심은 죄에서 돌이켜서 그리스도에 나가는 회개와 믿음입니다. 회심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만 하는 것(마 11:28-30)이 아니라 평생 계속 하는 것(계 3:20)입니다.

 

주기도에 나오는 대로 우리를 용서해 달라는 회개는 평생 하는 것입니다(마 6:12).

바울은 평생 매순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도 평생 매순간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갈 2:20). 매일 회개하고 매일 예수님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습니까? 예수님을 삶의 주님으로 믿습니까?

예수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믿습니까?

모든 것을 팔아 보물이 숨겨진 밭을 산 것처럼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예수님을 보배로 삼고 계십니까? (마 13:44).

행복의 문을 여는 비결은 회심입니다.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모실 뿐 아니라 삶의 주님으로, 삶의 보배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무엇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기독교 행복의 출발점입니다.

모든 것을 팔아서 보배 중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십시오.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삶의 가장 귀한 보배로 삼으시면 여러분 속에서는 행복과 만족의 생수가 솟아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취향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에 대한 새로운 갈망이 생깁니다.

관념이던 그리스도, 토론의 대상이던 그리스도가 기쁨의 보물이 됩니다. 새로운 행복이 태어납니다. 미지근한 신앙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즉시 청산하셔야 합니다. 악한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와 삶의 주님으로 섬겨야 합니다.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날마다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롬 15:13).

하나님을 사모하는 새로운 맛, 새로운 갈망, 새로운 열정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안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평안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의욕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문제 해결의 열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매일 매순간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가갈 때 행복은 여러분의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예수님을 대충 믿으면 행복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배로 믿으면 행복이 넘칩니다.

회개와 믿음, 즉 회심이 행복을 여는 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