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학의 교육 2/[인터넷성경교육]

제62과 사무엘하(3): 다윗 왕국의 위기와 극복(2) (14-20장) 6

好學 2012. 11. 25. 07:39

제62과 사무엘하(3): 다윗 왕국의 위기와 극복(2) (14-20장) 6


 2-7. 압살롬의 패배(18:1-18)

 

  다윗은 자신을 따르던 용사들과 그 곳에서 지원한 병사들을 정비하고 사열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 이 당시에 다윗군의 병력은 그렛 군사들과 블렛 군사들, 가드에서 온 육백 용사들, 그리고 기타 병력을 합해서(15:18) 약 4천명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윗은 이 병사들은 좀더 세분하여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우고 그들에게 그 병력을 맡겼다. 이때에 병력의 1/3은 요압이 , 그리고 1/3은 요압의 아우 아비새가, 그리고 나머지 1/3은 가드 사람 잇대가 통솔하게 하였다.

 

이 때에 다윗은 선두에 서서 그 군대를 지휘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백성들이 다윗의 출전을 만류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1) 첫째로 부자지간의 전쟁이 보기에 좋지 않았고,

2) 둘째로 부친인 다윗이 아들인 압살롬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으며,

3) 셋째로 다윗이 전사하는 경우 사태는 절망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4) 그리고 숫자 면에서 압살롬의 군대에 비해 월등히 적은 다윗 군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성을 굳게 지키는 것, 역시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이 성에는 보급품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17:27-29), 유사시에 이를 적절하게 공급해 줄 지도자도 필요했다. 다윗은 백성들의 만류가 타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뒤에서 그들을 지원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1-3). 마침내 다윗이 성 문 곁에 서 있는 가운데 군사들은 백 명씩, 그리고 천 명씩 무리를 지어 행진을 했다. 이때에 다윗은 군대 장관인 요압와, 아비새와, 잇대를 불러 소년 압살롬을 관대하게 대해달라고 부탁했다(4-5).

 

마침내 이스라엘과 압살롬의 군사들은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언급된 에브라임 수풀은 요단 강 서편에 있는 에브라임 지파가 살던 곳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 다윗과 압살롬의 군사들이 싸우고 있는 곳은 요단 강의 동쪽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압살롬이 이끄는 군사들은 다윗의 부하들에게 크게 패했다.

이 날에는 전투로 죽은 사람들보다 수풀 속에서 죽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요단 동편의 에브라임 수풀에는 좁은 협곡이나, 가파른 벼랑, 또는 늪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다윗의 부하들이 이를 이용한 효율적인 공격에 뿔뿔이 흩어졌던 압살롬의 군사들은 이러한 곳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 전쟁으로 압살롬의 군대는 결정적인 패배를 했으며 2만 명이나 되는 군사를 잃고 말았다(6-8).


 
2-8. 압살롬의 죽음(9-18)

 

  압살롬은 전쟁에서 패한 것을 보고 다윗의 부하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그만 그의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서 그의 몸이 공중에 매달리게 되었다(9). 압살롬은 머리숱이 많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14:26). 그러나 그는 자랑스럽게 여기던 머리털로 인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의 자랑거리를 멸망의 도구로 삼으시는 경우가 많다. 이 광경을 본 한 병사는 즉시 요압에게 달려가서 그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자 요압은 그 군사에게 "왜 즉시 압살롬의 죽이지 않았느냐?" 고 다그쳤다. 요압은 만일 그가 압살롬을 죽였다면 그에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 열 개와 띠 하나는 전공을 세운 병사들에게 주는 포상물이었다. 여기에서 언급된 '은 열 개'는 화폐라기 보다는 군복에 매다는 장식품이나 소지품이었을 것이다(눅 15:8). 또한  '띠'('하고라') 역시 허리에 두르는 군장으로, 화려한 수를 놓은 장식품으로 보인다(왕상 2:5; 사 3:24; 22:21). 이러한 포상물은 군인의 명예를 세워주는 훈장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병사는 다윗이 압살롬에게 관대하게 대해 주라는 부탁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은 일천 개를 준다고 해도 자신은 압살롬을 죽일 수 없다고 말했다(10-13). 그러나 요압은 아무리 다윗의 부탁이 있었다고 해도 적장을 살려 둘 수는 없었다.

 

그는 즉시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인 압살롬의 제거하여 모든 반란의 화근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즉시 끝이 뾰적한 막대기 셋을 가지고 달려가서, 나무에 매달려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다. 그리고 이를 보고 요압의 병기를 맡았던 열 명의 군사들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죽이고 말았다(14-15).

요압은 반란 군의 수장이 죽은 것을 보고 나팔을 불어 더 이상 이스라엘 군사들을 추격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무리들은 압살롬의 시체를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있는 큰 구멍에 던졌다. 그리고 그 위에 큰 돌 무더기를 쌓아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16-17). 여기에 언급된 구멍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구덩이나, 또는 폐쇄된 우물이었을 것이다(Wycliffe). 팔레스타인에는 물이 귀해서 곳곳에 우물을 파던 곳이 많았다(창 26:17-22).

 

요압이 압살롬의 시체 위에 돌무더기를 쌓은 것은 부모의 말을 거역한 패륜아를 돌로 치라는 율법의 조항을 따른 것이었다(신 21:21). 또한 이 돌무더기는 아간의 경우처럼 반역자의 수치를 나타내기도 했다(수 7:26; 8:29). 본래 압살롬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일찍 죽고 말았다(14:27).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이름을 이을 가능성이 사라지게 되자, 비석을 세워서 자기의 명예를 후대에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으로 세워진 비석은 정반대로 그의 수치를 전하는 표시가 되고 말았다.

 

 '왕의 골짜기'는 (창 14:17)에 나오는 '사웨 골짜기'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을 물리친 후에, 소돔 왕과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났던 골짜기였다. 요세푸스는 왕의 골짜기가 예루살렘에서 약 40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Ant. Vii,3). 이러한 요세푸스의 주장을 보면 왕의 골짜기가 기드론 골짜기의 한 부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Keil, Lan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