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聖書]The Bible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사 3

好學 2012. 11. 4. 18:08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사 3

 

 

시오니스트들이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땅에는 이미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 기독교를 믿는 아랍인들, 시오니즘과는 상관없는 유대인들이 서로 어울려 자신들의 문화를 이루며 대대로 살고 있었다. 종교는 그들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세워지는 과정은 종교적․인종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정치권력에 의한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이주와 토착 종족의 추방과 살해, 이어지는 대규모 전쟁과 대량 학살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한 토착 종족에게는 지배와 점령에 대한 저항과 항거의 과정이었다.

 
1. 이주와 추방         

 
1904년부터 러시아에서의 학살을 피해 이루어진 이주는 이전의 이주에 비해 팔레스타인 상황에 큰 변화를 주었다.

1905년 유대민족기금(Jewish National Fund)이 아랍인들로부터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1910년대 1만 명이었던 유대 이주민의 숫자는 1920년대에 8만 명으로 증가, 다시 1933년 25만 명, 1939년 50만 명까지 증가한다. 유대인 자본가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각종 인허가의 90%를 독점하면서 도로 건설, 사해의 광물 개발, 전기 항만을 장악하였으며 1935년에는 1,212개 공장 가운데 872개를 장악하게 된다. 아랍인들은 무장투쟁과 총파업으로 맞섰으나 영국의 탄압으로 실패한다.

 

 1939년 9월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로 팔레스타인이 군사기지화 되자 유대인 소유 기업의 군수물자 생산이 증가하면서 경제적 성장과 군사력 증강이 이루어진다. 또한 영국군으로 참전한 유대인들이 현재 이스라엘 방위군의 전신인 하가나(Haganah)1)의 주요 구성원이 된다.

영국은 유대인 이주와 토지 판매를 제한하는 백서(White Paper)를 이미 5월에 내놓았는데 이에 유대인 군사조직인 이르군(Irgun), 스턴 갱(Stern Gang) 등이 영국에 무력투쟁을 벌인다.

 

1946년 10월 4일 헤리 투르만(Harry Truman) 미국 대통령은 ‘욤 키푸르(Yom Kippur) 성명에서 미국 정부가 팔레스타인 분할과 유대 국가 건설을 위한 실질적인 유대인 이민을 지원한다고 발표하였다. 미국과 입장이 달랐던 영국 정부는 1947년 2월 14일,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엔에 넘긴다.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 두 개의 나라로 분할하고, 예루살렘과 그 주변을 유엔의 관리 하에 두고 인구가 적은 유대인에게 더 많은 토지를 할당한다는 불평등한 유엔의 분할안이 통과된 1947년 11월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다수인 아랍인들을 추방하기 위한 공격이 이루어진다. 아랍인과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노력과 항의를 무시한 시오니스트들은 1948년 3월 'D계획(Plan Dalet, 공식 명칭은 여호수아 Yehoshua 계획)‘으로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하게 아랍인 추방과 학살2)을 벌인다. 영국군은 아랍인들의 보호 요청을 거절하고 충돌지역에서 철수함으로써 학살에 협력한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기 하루 전, 시오니스트들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한다. 팔레스타인들에게는 ‘알-나크바(Al-Nakba)’라 불리는 대재앙의 날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 날인 5월 15일, 미국은 이스라엘의 존재를 곧바로 승인한다. 이에 대응해 1948년 10월 1일 팔레스타인은 제1차 팔레스타인 민족회의에서 국가 창설을 선포하지만 국제사회는 침묵한다. 이후 1988년 11월 15일, 제19차 팔레스타인 민족회의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세계 90개국이 인정했음에도 이스라엘과 열강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2. 전쟁과 학살

 
이미 살고있던 사람들의 영토를 유엔과 서구 열강의 지원을 등에 업고 더 많이 차지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스라엘은 분할안에서 팔레스타인들에게 주어졌던 영토마저 전쟁과 추방을 통해 점령해 나갔다.

 

 

 ①1948년 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자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의 아랍연합국들은 전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군사력에서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과 경쟁이 될 수 없었다. 1948년 5월 중순, 아랍군의 병력은 25,000명 이하였음에 비해 이스라엘군 병력은 35,000명, 7월 중순 65,000명, 12월 96,441명으로 늘어난다. 영국, 미국, 캐나다 등에서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비행기 조종사, 통신 전문가 등이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해 모여들었으며 이스라엘은 체코슬로바키아 등으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수입한다.

결국 이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78%를 차지할 수 있었고 서안지구는 요르단이, 가자지구는 이집트가 관리하도록 휴전협정이 맺어진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 인구의 80%이상(약 75만 명)이 추방된다. 아랍인들이 떠난 땅은 ‘소유자 부재지’로 처리되어 유대인 이주민의 점령촌이 되었고 추방당한 사람들은 아랍 주변국가에서 난민이 되었다.

 
②1956년 2차 중동전쟁

이집트와 이스라엘, 프랑스, 영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자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였다. 수에즈 운하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인도양 지역으로 통하는 관문이었으며, 영국과 프랑스가 운하 주식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으로 가자와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였으나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철수하였다.

 
③1967년 3차 중동전쟁

이스라엘과 이집트, 시리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6일 전쟁, 또는 6월 전쟁으로 불린다. 이집트가 티란 해협으로 이스라엘의 선박이나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의 통행을 금지하자 전쟁이 일어났고,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이집트)와 골란고원(시리아), 팔레스타인의 가자와 서안을 차지하면서 예루살렘 전체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영토를 모두 점령하였다.

그 결과 1차 중동전쟁 때 가자와 서안으로 피난갔던 난민 중 19만 명이 다시 난민이 되었고, 서안과 가자에 원래 거주하던 20만 명도 난민이 되었다. 서안과 가자는 이스라엘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보여준 우세한 무력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전략적 자산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 이후부터 전폭적인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④1973년 4차 중동전쟁

이집트와 시리아가 시나이 반도와 골란고원을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과 벌인 전쟁. 초기에는 아랍국가들이 우세하였으나, 미국이 이스라엘에 막대한 무기원조를 제공하면서 한 쪽의 일방적인 승리 없이 전쟁이 끝났다.

 

 ⇒ 캠프 데이비드 협정(1978년)

 
4차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내세워 협정을 진행하였으나 정작 당사자인 팔레스타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협정 내용이 진행되었다. 이집트는 이 협정을 통해 시나이 반도를 되찾았고,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 처음으로 아랍 국가에게서 국가로서 공식 인정을 받았다. 양 측은 서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의 부담을 덜게 된 것이다. 결국 팔레스타인 문제는 각자의 이득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이 평화협정으로 이스라엘 수상 베긴과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 협정 이후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군사위협 걱정없이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한 계획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1980년 7월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하는 기본법 제정

.1982년 6월  레바논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던 PLO를 파괴하기 위해 레바논 남부를 침공. 공격 2개월 만에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가 7,000명이 주변 아랍 국가와 아프리카 등지로 쫓겨남.

.1982년 9월  친 이스라엘 성향이며, 그리스도교 마론파의 리더였던 레바논 대통령 당선자가 암살되고, 레바논의 그리스도교 민병대들이 팔레스타인 난민촌 두 곳, 즉 샤브라와 샤틸라에서 벌인 학살을 지원. 3일 동안 2,000~ 3,000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학살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