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聖書]The Bible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사 4

好學 2012. 11. 4. 18:12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사 4

 

 

3. 팔레스타인의 저항        

 
1) 팔레스타인 저항 조직

 
①파타

파타(FATAH)라는 말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을 뜻하는 아랍어 표기의 약자로 1959년 야세르 아라파트와 그의 동료들이 쿠웨이트에서 만든 조직이다. 주로 해외에서 망명 정부 형태로 혁명운동을 지지해왔고, 이후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생기면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속한 가장 큰 조직이 되었다. PLO의 상징적인 인물를 꼽는다면 아라파트를 들 수 있는데, 그는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이 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친서방 팔레스타인인들과 손을 잡았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압바스(현 파타 지도부)이다. 1990년대 들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생긴 뒤 2006년 1월 총선 때까지 자치정부의 집권당이었으나 부정부패에 연루되는 등 조직 내부의 문제점들을 드러냈다. 결국 2007년, 6월 선거에서 하마스에게 패배했다. 

 
②하마스

하마스(Ḥamās: Ḥarakat al-Muqāwamat al-Islāmiyyah)는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며 1차 인티파다가 일어난 1987년 성직자인 아메드 야신 등이 결성한 정치조직이다. 이슬람 종교를 기반으로 조직되었으며 1970년대 전까지 눈에 띄는 정치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점령의 상황에서 유대 이민자들에게 차별받는 아랍인들의 교육과 의료 등 사회 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1996년 최초로 실시된 팔레스타인 총선은 기만이라며 거부하였다가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 참여해 62.6%의 득표율로 총 132석 중 74석을 장악하며 제 1당이 되었다.

 
2) 저항의 확대


①1987년 1차 인티파다

이스라엘 군대가 탱크를 운반하던 중 크레인이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타고 있던 자동차 대열을 덮쳐 4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벌어지자, 수십 년 동안 쌓여왔던 점령에 대한 불만이 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으로 번져갔다. 가자지구에서 시작된 인티파다(민중 봉기)는 곧 서안지구로 확산되었고, 사람들은 이스라엘 군대의 철수, 양심수 석방, 난민귀환, 자치권, 독립국가 등을 요구하면서 대중 집회와 총파업, 세금거부 등의 투쟁을 전개했다. 이스라엘은 통행금지조치와 학교 폐쇄, 무력 진압, 가택수색, 폭행 등으로 저항을 억압하였다. 인티파다 1년 동안 3만 명의 팔레스타인이 체포되었고, 2000년 2차 인티파다 전까지 1천명이 넘게 살해되었다.

 

⇒ 오슬로 협정(1993년)

 
1987년 1차 인티파다 이후 이스라엘은 무력만으로는 팔레스타인을 점령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스라엘에게 새로이 필요한 것은 소수의 팔레스타인인들을 통해 팔레스타인 민중을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구조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이스라엘은 PLO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오슬로 협정을 통해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일부 지역을 시작으로 팔레스타인의 잠정 자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자치가 가능한 지역의 면적은 서안과 가자 전체의 1/20도 안 되는 면적에 불과했고, 점령촌 지역에는 유대인 안전을 이유로 이스라엘군이 재배치되었다. 저명한 이스라엘의 비둘기파로 불리는 역사학자 슐로모 벤아미(Shlomo Ben-Ami)는 이스라엘 안보 장관으로, 에후드 바락크 정부에 몸 담기 직전 한 학술 저서에서 “사실상 오슬로 협정은 신(新) 식민주의, 즉 한 국가가 다른 한 국가에 영원히 의존하는 삶이란 전제 위에 설정된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거의 전적인 의존을 강요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할 수 있다.

 

◎ 오슬로 협정에 따른 서안지구의 지역 구분

A 지역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행정과 보안을 완전하게 관할하는 지역(서안의 2%)

B 지역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행정관할 지역이지만 보안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협력하는 지역(서안의 26%)

C 지역 이스라엘이 완전화게 행정과 보안을 통제하는 지역(서안의 72%)

 

②2000년 2차 인티파다(알 아크사 인티파다)

2000년 9월 28일, 당시 이스라엘의 극우 정당 리쿠드 당의 당수였던 샤론이 이슬람 3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것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하면 팔레스타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란 것을 샤론과 당시 정치인들이 계산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항의 시위가 일었고 이스라엘 군대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였다. 오슬로 협정 이후 심화된 빈곤과 이스라엘의 도로봉쇄, 점령촌 건설 등에 대한 분노가 샤론의 오만한 행동을 계기로 폭발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저항운동 조직들은 이스라엘 군대의 탄압에 맞선 무장투쟁을 벌였고, 팔레스타인 밖에서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에 저항하는 국제적인 연대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져 이스라엘을 압박하였다.

 
  백인 중심의 미국 건국사가 당시 수천년 동안 그곳에 살고있던 인디언의 학살사인 것처럼 역사는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다른 것에서 나아가 그에 대한 판단과 비판을 해야 한다. 몇 백년이 지난 후에 인디언에 대한 학살과 흑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잘못이었음을 후대가 인정했지만 현시대에 그러한 행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도 지구상 곳곳에서는 유사한 차별과 억압, 살해가 벌어지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은 세계 7위에 이르는 군사비 지출과 미국의 막강한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바탕으로 50년이 넘는 동안 죄없는 다른 공동체를 철저히 파괴하고 잔인하게 추방, 학살하였으며 그것에서 나아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서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지는 일인 양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유대인의 근면성과 민족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언론과 활자매체, 영상매체를 통해 강력하게 홍보하고 선전하고 있다.

인종주의에 바탕한 이러한 오만과 인류에 대한 무례는 자국의 구성원에게조차 학살의 주체가 되게 하여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사회 내부의 공포 분위기 조성과 억압으로 나타나 인간성과 민주주의를 질식시킨다.

 
어떠한 역사적 사건을 바라볼 때 ‘중립적 시선’이라는 게 가능할까. 한 발 떨어져 냉정하게 사건의 본질을 들여다 보았다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 시점이 온다. 현 시대 우리의 눈앞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르고 있는 폭력을 우리는 객관적 시선으로, 관찰적 시선으로만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