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聖書]The Bible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사 1

好學 2012. 11. 4. 18:04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사 1.

 

 

종교적 대의를 부르짖는 자가 진정 그 종교의 순수성을 담지한 것이 아닌 것처럼 열렬히 애국심을 부르짖는 자가 진정으로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유대종족’을 내세웠던 사람들도 자기들의 종족에게 진정한 애정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야욕을 성취하고자 하는 강력하고도 끈질긴 욕구가 있었을 뿐이다. 권력을 지향하는 소수 집단이 자신들의 이론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다수화하는지 자기 민족과 종족을 배신하고 타민족을 살해하고 학살하면서 성취한 결과를 어떻게 전유하는지 이스라엘의 건국 과정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세워지는데 가장 큰 축이 되는 것은 ‘시오니즘’과 ‘서구 열강의 도움’ ‘유엔의 방조와 지원’이다. 그러한 요소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상호작용했는지 살펴본다.

 

 

1. 시오니즘

 

 시오니즘(Zionism)은 유대인만의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유대 민족주의 운동을 의미한다. 시온(Zion)은 보통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집거하던 지역의 이름이라고 성경에서 설명되며 신이 유대인들에게 약속한 땅을 의미한다. 19세기 후반 동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억압받지 않는 주권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다수가 모인 집단들이 원하는 바다. 그러나 시오니즘은 자신들의 문화적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것에서 나아가 타종교, 타민족, 타인종에 대한 강한 배타성을 가졌다는데 문제가 있다. 신에 의해 ‘선택된 민족’ ‘약속된 땅’이라는 말은 신이 정말 있는가, 그 신이 누구의 신인가 하는 문제 제기는 물론 왜 유대 민족만이 선택받은 민족인가, 그것을 누가 확인하고 증명하는가 하는 문제, 타민족에 대한 자민족의 근거없는 우월감의 과시라는 문제를 보여준다. 

 

시오니즘은 1881년 이후 러시아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과 1894년 9월 프랑스에서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보다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1881년 한 사람의 유대인이 낀 러시아 혁명가들이 황제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하고 암살자가 유대인이라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대중들에게 반유대주의가 확산․강화된다. 유대인에 대한 살인, 강간, 폭행이 러시아 전역으로 퍼지고 학교 입학은 물론 이동과 거주의 자유가 제한된다. 1891년부터 1892년 사이에 약 2만 명의 유대인이 모스크바에서 추방된다.

 

1894년 프랑스 군대 정보를 독일에 넘기는 스파이를 찾던 프랑스 참모본부는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대위를 지목한다. 드레퓌스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반유대주의를 선전하던 신문들은 드레퓌스가 간첩행위를 저질렀다며 크게 보도했고 드레퓌스는 그해 12월 군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제출된 문서들은 거짓으로 꾸며진 것이었고 드레퓌스는 증거들에 대해 말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1896년 3월 진짜 스파이가 에스테라지 소령임이 밝혀졌으나 참모본부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언론은 드레퓌스 사건을 놓고 유대인 추방을 선동하는 다수와 에스레타지가 진짜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소수로 나뉘어졌고 드레퓌스 재판을 다시 하느냐 마느냐 의견이 나뉘어졌다. 왕정복고주의자와 옛 귀족들, 군부, 유대인 박해에 앞장선 과격한 가톨릭 사제와 신도들, 보수적인 정치가들, 군국주의자들이 재심 반대를 외쳤고 양심있는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와 진보적인 정치인들, 사회주의자와 노동조합이 재심을 외쳤다. 드레퓌스가 결백하다는 사실이 드러날수록 재심 반대파는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켜 유대인을 죽이고 그들의 상점을 부수고 짓밟았다.

 

1906년 7월 드레퓌스는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1) 이 사건을 취재한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2)은 이것이 유럽의 반(反)유대주의 때문이라 보고 『유대국가』(1896)와 『오래된, 새로운 땅』(1903) 을 통해 유대국가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 대회가 열리고 ‘시오니스트 기구(Zionist Organizaion)’를 세워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 민족을 위한 공적인 법으로 보증된 향토의 창설을 목적으로 한다’는 강령까지 채택한다. 제1차 시오니스트 대회가 열리고 50년이 지난 뒤 또 벨푸어 선언 이후 30년 만에 시오니즘은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목표를 달성한다.

시오니즘 운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운동을 지원하는 사람들을 보통 시오니스트(Zionist)라 부르는데 그럼 그토록 민족을 강조하고 내세우는 시오니스트들은 진정 자신들의 동족을 사랑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랄프 쇤만은 말한다.

 

.1943년 말, 유럽인 수백만 명이 학살되고 있을 때 미국에서 시오니즘의 주요 대변자로 활동하던 랍비 스테픈 와이즈는 구조 법안에 반대하는 증언을 했다. 구조 법안이 팔레스타인의 식민지화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79쪽)

 

.벨포어 선언을 주도한 시오니즘 지도자이자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헤임 바이즈만(Haim Weizmann)은 “‘당신은 6백만 유태인을 팔레스타인으로 데려갈 수 있습니까?’ 나는 이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정말 슬픈 일이지만 나는 팔레스타인을 위해 젊은이들을 구출하길 원한다. 나이 든 사람들은 곧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이 냉혹한 세계의 먼지에 불과하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먼지와 같은 존재일 뿐이다.” (80쪽)

 

.유럽 유태인들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의 의장이었던 이츠하크 그루엔바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이 내게 두 개의 계획, 즉 유럽의 유태인 대중을 구출하는 계획과 (팔레스타인) 땅을 되찾는 계획을 가져왔을 때 나는 주저없이 땅을 되찾는 계획을 택했다. 우리 민족의 학살에 대해 더 많이 얘기할수록 팔레스타인을 유태화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줄어든다.” (80쪽)

 

.1930년대 말과 40년대에 유럽의 유태인 지도자들은 연합국 정부를 움직이기 위해 유태인 동포들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그들은 대중적인 캠페인과 조직적인 저항, 그리고 시위를 주창했다. 하지만 이런 호소에 시오니스트들은 침묵을 지켰고 더 나아가 대영제국과 미국 정부가 제안하거나 준비했던 작은 노력마저도 적극적으로 무산시켰다. 시오니스트들의 이런 냉담한 반응에 랍비 바이스만델은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1944년 7월 그는 시오니스트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왜 당신들은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겁니까? 이런 끔찍한 무관심을 누가 책임질 겁니까? 유태인 형제들이여! 세상에서 가장 큰 행운, 곧 자유를 가진 당신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까?”(81쪽)

 

.1944년 부다페스트에 있던 [유태인 구조위원회]의 루돌프 카스트너 박사는 1944년에 아돌프 아이히만과 헝가리의 “유태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비밀 협약을 맺었다. 시오니즘 지도자들의 지침에 따른 비밀협약의 내용은 600명의 저명한 유태인을 살려주는 대가로 헝가리 유태인 80만 명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83쪽)

 

.1941년 1월 11일 나중에 이스라엘 수상이 된 이츠하크 샤미르는 <국민군사기구>, 즉 <시오니즘 이르군>과 나치 제3제국 사이의 공식적인 군사협약을 제안했다.  그 내용의 일부는

‘유럽으로부터 유태인들을 추방하는 것은 유태인 문제 해결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

 

1) 독일의 계획에 따라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는 것과 유태인들의 진정한 민족적 열망 사이에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을 수 있다. 유태인들의 진정한 민족적 열망은 <국민군사기구>에 의해 구현될 수 있다.…‘(86쪽)3)

시오니스트의 관심은 ‘국가’라는 정치권력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있었지 자민족 모두의 안전이나 생명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시오니스트들에게 타민족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있을 리 없었고 잔인한 인종주의, 오만한 백인 우월주의만이 있었다. 이스라엘 국가 성립 과정에서 아랍인들에 대한 대량 학살과 집단 이주, 추방이 이루어졌고 특히 1948년 전쟁에서 벤 구리온(Ben Gurion)4)과 요세프 바이츠(Joseph Weitz)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벤 구리온의 다음과 같은 말

 

.1938년 6월, “나는 강제 이송을 지지한다. 그것은 전혀 부도덕하다고 보지 않는다.” (163쪽)

 

.1948년 2월 7일, 예루살렘이 “로마인들에게 파괴당한 이후” “오늘까지 완전히 유대인으로만 채워진 적이 없었다. …… 이방인(즉 아랍인)은 한 명도 없다. 100% 유대인 뿐”이라며 기뻐했다. (164쪽)4)

 

그리고 요세프 바이츠의 1940년 12월 20일 일기의 내용을 보면 분명해진다.

 

“이 나라에 두 민족이 살 공간이 없다는 점이 분명해야 한다. …… 아랍인들이 떠난다면 이 나라는 우리가 살기에 넓고 여유있는 장소가 될 것이다. …… 유일한 해결책은 …… 아랍인이 없는 나라 이스라엘이다. 여기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 아랍인들을 이곳으로부터 인근 국가들로 이송시키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 그것도 베들레헴, 나사렛, 구예루살렘(의 아랍인들)을 제외한 전원을 이송시키는 것이다. 단 한 곳의 마을도, 단 한 명의 (베두인)부족도 남겨서는 안 된다. 이송지는 이라크와 시리아가 될 것이며 트랜스요르단도 가능하다. 이 목적을 위해 기금을 모아야 한다. …… 그리고 이 이송이 이루어진 뒤에야 나라는 수백만의 우리 형제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며 유대인 문제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될 것이다. 다른 해결책은 없다.”(189쪽)5)

 

시오니스트의 대부로 불리는 테오도르 헤르츨은 앞으로 세워질 유대인 국가의 모습을 “아시아에 대한 방어벽”이며 “야만성으로부터 문명을 지키는 전방요새”6)라고 묘사했다 특히 “나일강에서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시오니즘 운동의 목표로 제시했다. 여기에는 레바논과 요르단의 모든 영토, 시리아 영토의 3분의 2, 이라크 영토의 절반, 투르크의 일부, 쿠웨이트 영토의 절반, 사우디 아라비아의 3분의 1, 포트 사이드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카이로를 포함한 시나이 반도와 이집트의 3분의 1이 포함된다.7)

 

이러한 인종주의는 시오니스트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명한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의 권리를 해설하면서 그곳의 아랍인들을 여물통에 들어간 개에 비유했다.

 

“나는 여물통에 들어간 개가 그 안에서 아무리 오래 있었다 하더라도 여물통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권리를 갖는다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그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미국의 홍인종 인디언들에게, 혹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흑인들에게 극도의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더 강한 인종, 더 높은 등급의 인종, 아니 차라리 이런 식으로 표현하면 어떨지, 즉 현세에 좀더 현명한 인종이 들어와서 그들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고 해서 엄청난 잘못을 행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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