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聖書]The Bible

성경과 세계사 11

好學 2012. 10. 22. 11:09

성경과 세계사 11

 

 

바벨론 포로 귀환 시대의 선지자들

 

 

<예루살렘 성전 모형>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귀환 후에 활동하던 선지자들로 학개, 스가랴, 그리고 말라기를 들수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먼저 활동을 시작한 선지자는 학개입니다. 학개서의 저자인 그의 이름은 '축제'란 뜻입니다. 그는  스가랴와 동시대 인물이며, 그들이 함께 사역하여 성전 재건을 독려하였습니다. 학개의 개인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다만 B.C. 537년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그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팔레스틴으로 귀환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학개가 선포한 네 예언의 서두에는 각각 공식적인 날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리오 왕 2년은 B.C. 520년에 해당됩니다. 다리오 I세는 제국 내의 종교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의 재위 제2년에(B.C. 520) 학개와 스가랴도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개는 공사의 지연이 대적자들보다는 유대인 스스로의 태만과 직무유기 때문임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성전 재건 노력을 유브라데 강 서쪽 지역의 총독과 관리들이 방해했을 때, 다리오 I세는 전폭적으로 유대 인을 지지했으며 이로 인해 B.C. 516년에 성전이 완성되었습니다.

 

학개와 동시대에 활동한 선지자 스가랴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유브라데 강서쪽 지역의 통치자였던 닷드내가 다리오 왕에게 상소문을 올려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었습니다. 그러나  B.C. 521년 다리오 왕이 페르시아의 왕위에 오르고, 그 다리오 왕이 고레스의 조서를 그대로 승인하여 공사가 다시 계속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 인들의 마음은 변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재건이 자꾸 방해를 받는 것은 하나님이 그 일에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백성들의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고치고, 그들의 무관심을 깨우치려고 노력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14년이나 중단되었던 성전 재건에 다시 착수하기 위해 다시 백성들을 일깨웠습니다. 그리고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이 일을 지도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성전 재건에 호응하게 되었고, 결국 B.C.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다 인들은 부푼 꿈을 안고 포로에서 귀환하였고, 학개와 스가랴의 설교에 감동을 받아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바벨론이 무너뜨린 그 성전의 영광에 비길 수는 없었지만, 장차 더 큰 영광이 임하리라는 예언으로 감동받아 지어진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도 임하리라던 그 큰 영광이 나타나지 않자, 유대인들의 소망과 기대는 희미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이 약속했던 그 번영이 돌아오기는 커녕, 하루하루의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기근과 흉작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공의로운 통치에 회의와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자를 선하다고까지 말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며 하나님 앞에 슬프게 행하는 것도 무익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말라기 선지자의 활동이 있었습니다. ‘나의 사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는,  성전 재건이 끝난 후에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회의와 의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을 잘 모르는 까닭에 비롯되는 것이라고 답변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이 신실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재난이 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격는다고 말하였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부패한 제사를 드리고 있었고, 성전 의무를 불경스럽고 형식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좋은 것으로 드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흠 있는 것들만 골라서 드림으로써, 백성들까지도 그릇된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한편, 백성들은 젊어서 맞은 아내를 버리고 이방 여인과 결혼하였습다. 이처럼, 당시에는 마술·간음·부정·약자를 압제하는 일·불경건 등 모든 종류의 죄가 편만해 있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의 죄를 모두 지적하고, 그들이 돌이켜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신구약 중간시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시대에 본국으로 돌아오는 귀환시대 이후를 신 구약 중간시대라고 분류합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에 기록된 말라기서 이후 신약시대의 시작으로보는 예수님이 탄생할 때까지의 기록이 성경 속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 시대를 침묵시대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그 주변의 당시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됩니다.

 

포로귀환의 시대가 페르시아 시대였음을 우리는 앞서 배웠습니다. 그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다리오3세 때에 페르시아는 알렉산더가 이끄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연합군과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의 승자는 알렉산더였습니다. 알렉산더는 B.C. 356년 필립포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다른 이름은 필립포스 3세입니다. 에페이로스의 왕 네오프톨레모스의 딸이 그의 어머니로 이름은 올림피아스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필립포스가 아들을 위해 청해온 당시의 대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유명한 플라톤의 제자였으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운 자였습니다. 알렉산더는 그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에 영향을 받아 그리스문화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그의 아버지로 부터 배워 지덕과 용맹을 갖춘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B.C.336년 아버지 필립포스 왕이 암살 되자 군대의 추대로 20세에 그는 왕이 되었으며, 그리스 대표자 회의에서 헬라의 맹주로 뽑혔습니다.

그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의 영토였던 지금의 터키가 위치한 소아시아 반도부터 수리아지방과 팔레스틴, 그리고 이집트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그는 새 도시를 건설하고 그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동으로 계속 진군하여 지금의 이라크와 이란 등이 위치한 페르시아의 마지막 영토를 빼앗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칸지역과 인디아의 인더스강 지역까지 점령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지친 부하들의 건의레 따라 군사를 되돌린 알렉산더는 바벨론을 수도로 정하고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 다리오3세의 딸과 결혼하지만 모기에게 물려 학질로 B.C. 323년에 죽었습니다. 왕위에 오른지 14년 만에 죽은 것입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그의 부하들에 의해 나라가 분할통치 되다가 각각의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카산더는 마게도냐와 헬라, 리시마쿠스는 그리스 동북부의 트리키아, 프톨레미는 이집트, 그리고 셀류코스는 시리아를 중심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땅은B.C.305년 알렉산더의 부하 프톨레미가 이집트에서 왕조를 열고 지배하다가 B.C.198년에 셀류코스왕조의 지배에 들어갔습니다.

알렉산더는 자기가 정복한 영토에 자신 이름의 도시를 70개나 세웠는데 그 중에 제일 유명한 곳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입니다. 그는 또 곳곳에 헬라문화와 헬라어를 보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의 통치기간 동안 나라를 잃기는 했으나 문화적인 동요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페르시아인 보다 나은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헬라가 유대를 통치한 때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가는 곳마다 지혜를 강조하였으며, 그 곳에 헬라주의의 문화를 심으려고 했습니다. 헬라는 교육을 통해 인도주의 문화를 건설했으며, 유대인들에게도 헬라화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유대인들은 헬라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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