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聖書]The Bible

성경과 세계사 12

好學 2012. 10. 22. 11:10

성경과 세계사 12

 

 

프톨레미와 셀류쿠스

 

 

<알렉산드리아의 헬라시대의 유적>

 

헬라제국의 알렉산더가 갑자가 죽은 후 그의 부하 장수들에 의해 나라가 분열되었음을 지난 글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들 중에 수리아를 중심으로 동쪽 넓은 영토를 통치한 셀류쿠스(Seleucus)  애굽을 통치한 프톨레미(Ptolemy)만이 팔레스틴 지역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팔레스틴은 애굽의 프톨레미왕국이 한 세기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리아의 셀류쿠스왕국은 애굽의 통치를 끊임 없이 방해했으므로 팔레스틴은 두 왕국의 전쟁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애굽 시대 (B.C. 301-198)

 

이 당시 애굽의 통치자들은 헬라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프톨레미는 지혜있게 그 자신의 몫으로 양식이 충분하고 침략도 별로 없는 부분을 선택했습니다. 요세지인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와 그의 건축가에 의해 세워졌고 곧 상업과 문화로 이름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급속히 성장하였습니다. 처음에 프톨레미는 이곳에 큰 도서관을 건립했는데 이것은 약1000년 간이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과 헬라인은 별로 접촉이 없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 유대인이 선원을 직업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과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애굽으로 옮아가서 헬라어를 배우고 헬라문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마게도니아인과 같은 시민권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70경이라고 부르는 헬라어 구약성경은 이 시대의 산물입니다. 이 시기에 팔레스틴은 조용히 헬레니즘화의 과정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헬라어의 언어, 예술, 축제나 놀이 등의 헬라적 생활 양식의 매력에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원형극장이나 공동 목욕탕에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유대 민족의 예배를 간섭하려고 하지 않는한 이 문화적인 영향은 격렬한 반대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수리아 시대 (B.C. 198-167)

 

판네아스(Paneas)전쟁(B.C. 198)에서 수리아의 안디오쿠스대제(Antiochus the Great)는 애굽을 이기고 팔레스틴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수리아와 유대 관계의 위기는 안디오커스 4, 즉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Epiphanes)라고 알려진 왕의 통치 동안에 생겼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의 종교적인 생활까지를 규제하여서 완전히 헬레니즘화하여 강력한 국가를 소유하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는 화폐에신은 왕 안디오쿠스를 승리자로 명시한다고 새겨서 그의 신성을 과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그의 정책은 헬라적 삶의 양식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큰 압력이 미쳤습니다. 그러나 강제로 헬라화하려는 그의 행동은 오히려 반항정신을 일깨웠고 폭동을 빚어냈습니다.

반대 그룹은 유대 관습과 종교를 보존하려는 자들로서  하시딤(Hasidim)(경건한 자들)이라고 알려졌다.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려한다고 생각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을 완전히 헬라화하겠다고 마음먹고 법령으로 유대주의 관습을 금지시켰습니다.  마침내 B.C. 168 12월에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는 성전의 각종 기물들을 약탈하고 성전을 더럽히게 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할례를 제거했고,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을 다른 우상을 경배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했고, 성전에서 음란한 일을 행하고, 돼지를 제물로 드리고, 돼지 피를 뿌리고, 성전의 그릇들을 약탈하고, 대제사장 우니아를 죽이고 유대인 약 10만명을 죽였습니다. 이렇게하여 스룹바벨에 의해 새로 지어진 성전이 더럽혀지고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프톨레미 왕조와 클레오파트라

 

 

<터키의 다소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문>

 

 

B.C. 444년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때까지를 신구약 중간시대라고 말함을 앞에서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이 살던 팔레스틴은 B.C. 301년에 헬라제국의 왕   알렉산더의 부하 프톨레미가 이집트에서 왕조를 열고 B.C. 198년까지 유대를 지배하였으며,  B.C. 198년에 셀류쿠스왕조의 지배에 들어갔음도 우리는 배웠습니다. 즉 팔레스틴은 이집트의 지배를 받다가 후에 시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던 왕조는 외지인인 유럽의 그리스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후에 셀류쿠스왕조의 시리아의가 먼저 로마에게 망하고 나중에 프톨레미왕조의 애굽도 로마에게 망하게 됩니다.

 

300년간 애굽을 통치한 그 프톨레미왕조의 마지막 왕이 역사에 유명한 클레오파트라인 것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정확하게 표현하면 클레오파트라 7세입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남동생 프톨레미 13세와 함께 이집트를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B.C. 48년에 동생에 의해 축출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당시 로마의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간의 전쟁의 여파가 이집트에 미쳤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군이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로 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폼페이우스를 살해한 후 이집트로 들어온 카이사르에게 폼페이우스의 머리를 바쳤습니다.

 카이사르는 형제간의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양쪽 진영을 모두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나 아르시노에 쪽이 장악한 궁으로 들어가기에는 클레오파트라로서는 너무나 위험했기에 카이사르를 만나기 위해 클레오파트라는 융단에 쌓여 궁으로 잠입해야 했습니다. 그 유명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극적인 회동 장면이 여기서 연출된 것입니다. 그러나 동생 쪽은 공동정권에 반발하면서 카이사르쪽과의 알렉산드리아전쟁을 벌이지만 패배하여 프톨레마이오스13세는 전쟁중에 죽고 그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14세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뒤 2년간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부부생활을 하면서 아들 케사리온을 낳았습니다. B.C. 46년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갔고, 2년 뒤인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일당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카이사르의 죽음으로 로마에는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레피두스 등 3명의 실력자가 로마세계를 삼등분해 통치하는 3두정치 시대가 열렸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의 동방을 맡은 카이사르 진영의 2인자였던 안토니우스와 만나서 새로운 사랑 끝에 결혼하고 세 아이를 낳았다. 필자는 안토이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만난 곳인 다소를 방문하여 클레오파트라의 방문을 기념한 클레오파트라의 문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바울의 고향 다소였습니다.  

 

그 후 안토니우스는 정복지인 시리아, 키프로스, 아르메니아, 그리고 리비아 등을 클레오파트라쪽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덤을 이집트에 만들라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로마인을 분노에 들끓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문제를 더한 것은 당시 삼두정치의 한 세력인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가 안토이우스의 부인으로서 로마에 있었는데 안토이우스는 그녀와 이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져 로마로 돌아오지 않고 있던 안토이우스와 로마의 권력을 쥔 옥타비아누스와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집트와 로마의 운명을 건 B.C. 31년의 악티움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군과 안토니우스의 연합군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게 참패했습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자살했고, 이집트가 로마의 속주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프톨레미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구약 중간시대에 한 때 팔레스틴을 지배했던 세력이 프톨레미왕조의 애굽이었으며, 세계사 속에 유명한 여인인 클레오파트라가 바로 그 시대의 사람인 것입니다. 


 

 

 

'好學의 聖經信仰 > [聖書]The Bib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사 1  (0) 2012.11.04
성경과 세계사 13  (0) 2012.10.22
성경과 세계사 11  (0) 2012.10.22
성경과 세계사 10  (0) 2012.10.22
성경과 세계사 9  (0) 2012.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