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智慧묵상/[지혜묵상]신앙지혜

상실의 아픔 속에서

好學 2012. 10. 23. 14:01

상실의 아픔 속에서

에스겔 24:15~24

 

 

서양 사람들이 즐겨 쓰는 속담에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냇물은 노래를 잃는다”는 말이 있다. 조용하던 우리의 삶에도 정신적으로 또는 육체적으로 고통이 찾아올 때가 더러 있다. 우리는 무언가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며 살아간다.

많은 것들을 얻는 것 같지만 동시에 많은 것들을 잃고 사는 것이다. 때로는 중요한 사람들을 잃거나 떠나 보내는 경우도 있다. 부모, 자식, 동료나 친척, 친한 친구나 협력자들을 상실할 수도 있다. 일, 욕구, 꿈, 고수입의 직장을 떠나야 할 때도 있다. 상실은 이따금씩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숙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가장 극적인 방법 중 하나이다.

상실은 고독, 아픔, 실패, 이별 등 여러 가지 감정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상실이 왔을 때 인생을 뒤집어 볼 필요가 있다.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보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실을 뒤집어 보면 축복의 가능성이 보이고, 축복을 뒤집어보면 축복을 받기까지 겪었던 고난이 보인다. 문학작품 가운데 단테의 "신곡"은 시성 단테가 그의 사랑하는 애인이었던 베아트리체를 놓친 아픔에서 얻어진 불후의 작품이다. 단테에게 그런 아픔이 없었다고 하면 그런 결실은 없었을 것이다. 음악의 거성 모짜르트도 가난과 고독으로 찌들었던 경험 후에 작곡할 수 있었던 것이 "진혼곡"이다. 상실과 고난은 우리 눈에 안보이는 또 다른 선물을 숨겨놓을 때가 많다.

에스겔 선지자는 자기 아내의 죽음이란 실제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선포한다. 뜻하지 않게 맞이한 아내의 죽음 앞에서 그는 울거나 애도하지 않는다. 에스겔에게 아내는 그의 눈에 기쁨이었다(16절). 자신의 삶에 일어나서도 안되고, 일어나리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아내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인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의 충격이 너무 크고 뜻밖에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망연자실하여 눈물도, 애곡도 잊은 채 깊은 비통함과 죄책감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불행 앞에 슬퍼할 기회마저 박탈당할 정도라면 그 고통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유다백성들은 예루살렘성을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시고 세우신 성이요, 실제로 어떤 이방 세력들에 의해서도 멸망하지 않을 난공불락의 성읍으로 믿었다. 에스겔에게 아내가 기쁨이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은 자부심이었고 기쁨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단장(斷章)의 슬픔’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새끼를 빼앗긴 후 온갖 몸부림을 치다가 죽어간 어미 원숭이의 내장이 조각조각 끊어져 있었다는 말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단장의 슬픔이었을 것이다.

남자들이여, 우리는 잃어버린 것에 항상 초점을 두곤 한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 상실의 슬픔과 좌절가운데 있게 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상실을 경험하는 순간에만 인생의 소중한 가치와 믿음을 회복하게 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보자. 상실이 아닌 일상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경험함으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경건한 남자가 되자.

 

'好學의 智慧묵상 > [지혜묵상]신앙지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때 잘나간 남자들   (0) 2012.10.30
사람답게 사는 것  (0) 2012.10.30
하나님만 바라고 산다는 것은   (0) 2012.10.23
우울과 좌절 속에서   (0) 2012.10.21
제대로 남기는 삶   (0) 2012.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