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聖書]The Bible

성경과 세계사 10

好學 2012. 10. 22. 11:08

성경과 세계사 10

 

 

에스더와 아하수에로의 시대

 

<Persepolis 에 남아 있는 아하수에로왕의 궁전>

 

 구약성경에서 에스더서 우리에게 익숙한 에스더는 포로시대의 인물입니다. 페르시아어로 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에스더는 유대인 포로의 후손으로서, 고아가 후에 사촌 오빠 모르드게에 의해 돌봄을 받았스니다. 모르드개는 포로로 끌려온 베냐민 지파에 속한 인물로서 바사제국의 수도 수산성에 살고 있었습니다. 모르드개라는 이름은 바벨론식의 이름으로서 그는 후에 1 포로귀환 때에 나오는 모르드개와는 다른 인물입니다.  에스더는 당시의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하던 아하수에로가 왕위에 오른지 3 후에 그의 부인이 됩니다.

 

  아하수에로라는 인물은 다리우스 1세의 아들로서 그의 이름은 크세르크세스(Xerxes)입니다. 아하수에로라는 이름은 그의 히브리식이름으로서 힘센 ’ ‘힘센 사람이라는 뜻을 갖습니다. 그는 B.C. 486년부터 B.C. 464년까지 나라를 통치하였습니다. 후일에 발견된 비문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그는 힘이 강하며 여러 나라를 굴복시켜 영토를 확장시킨 왕이었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현재의 에디오피아에 해당하는 구스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이러한 영토는 그의 선왕들이 점령한 영토보다 넓은 땅이었습니다. 다리오와 고레스는 120도를 다스렸으나 그는 127도를 다스렸습니다.

 

당시 페르시아의 수도는 수산(Shushan)이었습니다. 고대 왕국 엘람의 수도였던 도시의 본래 이름은 수사(Susa)이며,  현재 이란의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랜 역사의 도시 수산은 페르시아의 수도가 되면 당시 매우 번성하였으며 주변의 여러 도시들은 수산을 중심으로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그리고 문화적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곳이 성경 에스더서의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만이라는 사람의 음모로 유대인들이 모두 죽을 위기를 맞았으나 하나님이 그들을 구해주시는 내용이 에스더서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날을 기념하는 절기가 부림절인 것입니다.

 

아하수에로의 아버지 다리우스 1세는 B.C. 492년에 그리스를 침입하는 전쟁을 시작하므로 유명한 페르시아전쟁이 시작됩니다. 당시 소아시아반도의 해안 지방에는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국가(폴리스)들이 있었습니다.  도시들이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어 무역이 억제되고  자유를 빼앗기게 되자 지역의 도시국가인 밀레도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반란을 바다 건너 아테네가  돕자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원정을 시작하게 되어 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첫번 전쟁에서 바다의 폭풍으로 인해 페르시아 군대는 손실을 입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2 2 원정군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 군대는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아테네 북동쪽 26마일 떨어진 지점의 마라톤 평원에 상륙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라톤 전투에서 2만명의 군사를 가진 페르시아는 1만명의 그리스군에게 크게 패하게 됩니다. 그리스의 승전 소식을 전령이 쉬지 않고 달려와서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우리 군대가 이겼다 마디를 전하고 죽었다는데서 지금의 장거리 경주 마라톤이 생겨난 것입니다. 

 

다리우스 1세는 다시 그리스 침공을 준비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왕이 크세르크세스, 아하수에로가 준비를 계속하여 B.C. 480년에 3 그리스 원정을 하였였습니다. 그러나 마게도니아지방의 해안에서의 테르모필레전투의 승리 아테네의 남부 작은 살라미스 근처에서의 살라미스 해전, 그리고 B.C. 479년의 아테네 북동쪽의 플라타이아 평원에서의 전투에서 아하수에로의 군대는 그리스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여  페르시아전쟁은 끝이났습니다.  에스더는 바로 시대의 인물이며, 에스더의 남편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아하수에로는 크세르크세스라는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포로귀환 시대의 인물들

 

 

<페르세폴리스에 남아 있는 페르시아의 궁전유적>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유다백성들은 바벨론이 바사에게 멸망하며 바사의 초대왕 고레스에 의해 처음으로 귀환하게 됩니다. 그것이 B.C. 538-537년의 귀환입니다. 1  귀환의 지도자가 바벨론의 후예또는 바벨론에 대한 슬픔이란 이름의 뜻을 가진 스룹바벨(Zerubbabel) 입니다.  그는 브다야의 아들로서 유다의 왕통에 속한 인물입니다. 그를 세스바살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바벨론식 이름으로 바사 제국의 총독이란 직함을 사용할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스룹바벨은 시대에 다윗의 가문을 대표한 자로서 예수님의 직계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였는데 이것이 통칭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지는데 처음은 솔로몬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솔로몬 성전이로 부릅니다. 두번 째는 스룹바벨 성전이고, 세번 째는 헤롯성전입니다.

 

에스라는 요사닥의 아들로서 아론의 계보에 속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세의 율법에 통달한 학사로서 B.C. 457년의 2 포로 귀환 1,750 가량의 남자를 인솔해 왔는데 남여 모두를 합치면 5천명은 되었습니다. 이런 에스라의 정치적 직위에 대하여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느헤미야 처럼 총독은 아니었지만 바사(페르시아) 아닥사스다 1(Artaxerxes I)에게서 재무에 관한 특권과 관리를 임명할 권리를 받은 것으로 보아 바사 궁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에스라의 신앙은 돌아오는 무리의 보호를 위한 바사 왕의 군사적 호의를 거절한데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는 느헤미야와 함께 예루살렘과 유다 백성의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율법을 가르치며 회개 운동도 주도하였습니다.

 

스룹바벨과 에스라에 이어 3 포로귀환의 지도자는 느헤미야(Nehemiah)입니다. 당시 바사의 아닥사스다왕 1 때는 애굽을 무찌르고 또한 헬라와의 평화 조약으로 나라 사이의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였으므로 제국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에 거주하던 유다인들은 바벨론으로부터의 2 귀환 힘이 약하여 주변의 이방인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1세에 의해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받고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위로’ ‘여호와께서 불쌍히 여기심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느헤미야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지파에 속한 하가랴의 아들로서,  바사의 아닥사스다1세에게 신임을 받아 왕의 맡은 관원으로 있었습니다. 후에 그는 B.C. 445년에 아닥사스다 1세에 의해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예루살렘에 부임하였습니다. 그리고 B.C. 443년에 바벨론으로 돌아갔다가 B.C. 425년에 민족의 개혁을 위해 다시 귀국하였습니다. 그는 탁월한 행정력과 조직력을 갖춘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거룩한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통찰하고 있었습니다. 

 

포로귀환시대의 페르시아의 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페르시아의 초대왕은 포로귀환을 명령한 고레스였으며, 그의 뒤를 이은 왕은 캄비세스였습니다. 그 캄비세스가 왕 위에 있을 때 스룹바벨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다리오 1세가 아하수에로의 아버지로서 그리스와의 전쟁인 페르시아 전쟁을 시작하였고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한 일이 바로 이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아하수에로의 때에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닥사스다세는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이로서 그의 때에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2, 3차 포로귀환이 있게 됩니다. 아닥사스다1세의 다른 이름은 롱기마누스라고 합니다.  그의 뒤를 이어 다리오2, 아닥사스다2, 아닥사스다 3, 아르세스, 그리고 그리스의 알렉산더에게 나라가 멸망할 때의 마지막 왕인 다리오3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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