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聖書]The Bible

성경과 세계사 7

好學 2012. 10. 22. 11:04

성경과 세계사 7

 

 

아합과 이세벨

 

 

<시돈의 해안에 남아있는 성채>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 악한 왕으로 유명한 아합왕을 생각해 봅시다. 북이스라엘의 왕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B.C.869  이스라엘의 제7대 왕이 되어  22년을 다스렸습니다.  그 아합은 북이스라엘 왕조 가운데 가장 악명을 떨친 인물입니다. 그는 먼저 북방의 큰 세력이었던 베니게와 국교를 맺고 국내의 안정을 이룩하기 위해 시돈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왕후로 삼았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엣바알은 바알과 아스다롯의 제사장을 겸임한자로 그의 딸 이세벨을 통해 바알 신앙을 이스라엘에 보급시킴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말살하려는 계략을 품었다고 합니다. 이세벨은 시집올 때 바알신상과 아세라목상을 가지고 와서 아합으로 하여금 경배케 했으며 신하와 온 국민들에게까지 신봉을 강요했습니다.

 

바알은 가나안과 수리아에서 주 신으로 섬김을 받은 남성의 신으로서, 토지의 생산력과 가축의 번식력을 주관하는 신으로 섬겨진 우상입니다. 그리고 아세라는 사랑 및 다산의 여신으로 숭배되던 우상으로서, 메소보다미아에서는 '이슈타르'라는 이름으로 섬김을 받았습니다.  아스다롯은 아세라의 복수형으로서 일반적으로 이방 신들을 가리킵니다.

 

그 아합왕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죽었으며 이세벨도 백성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하나님께선 아합과 이세벨의 우상숭배의 대가로 3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셨다가 갈멜산에서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응답으로 비를 주신 사건과 더불어 늘 기억되는 인물입니다.

 

낚시라는 의미를 가진 이세벨의 고향 시돈은 두로와  더불어 동 지중해  연안에서 제일 큰 항구였으며, 페니키아 시대의 비블로스,  두로와 더불어  3대도시의 하나로 중요한 해상진출의 요충지였습니다. 고대 베니게(페니키아)의 영화를 이끌었던 중심도시 시돈은 현재의 이름은 사이다로 불리는 중동의 레바논의 도시로서,  수도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41Km 지점에 있는 지중해 연안도시입니다. 그곳은 좋은 백향목이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유다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할 때 시돈에서 좋은 백향목을 실어오기도 하였습니다. 그 시돈의 남쪽에 엘리야가 흉년기에 유숙하던 한 여인의 집이 있던 사르밧이 있습니다. 그 사르밧은 후에 헬라인들이 자신들의 발음으로 고쳐서 사렙다가 되었습니다.

 

 중동지역을 지배하며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예레미야가 예언을 시작할 무렵인 B.C.612년에 신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남부 바벨론의 총독 나보폴랏살 (Nabopolassar)B.C.626년에 바벨론의 통치권을 장악하고 다른 성읍들에서 점차 앗수르 수비대 병력을 몰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사(페르시아)의 산지에서 온 메대와 스구디아인들의 군대와 동맹을 맺고 앗수르를 공격하여 B.C. 612년에 드디어 니느웨를 함락시켰습니다. 메대는 산이 많은 나라로서 북은 가스피 동은 사막, 남은 페르시아, 서쪽으로 앗시리아와 알메니아를 접하고 있던 고대 민족으로서 B.C. 7세기에 페르샤에 흡수되었습니다. 그리고 스구디아는 흑해로 부터 중앙 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이들로 추정합니다.

 

니느웨의 함락 후2년 뒤에 앗수르의 잔당은 완전히 소탕되었고,  애굽의 바로() ‘느고의 군대는 B.C. 605년 하란의 서북부 지역인 갈그미스에서 바벨론에게 참패당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갈대아인들은 소위 비옥한 초생달지역으로 불리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유역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유대의 멸망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경로>

 

애굽과의 갈그미스전쟁을 승리로 끝낸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은 B.C. 605년에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습니다. 이때 느부갓네살은 유대의 여호야김왕의 목숨은 살려 주었지만  유대인들 중 일부를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당시 유다의 왕 여호야김은 요시아왕의 둘째 아들로서 유대왕 여호아하스를 바로느고가 애굽으로 잡아가고 그 대신으로 왕으로 추대 되었는데 그의 본명은 엘리아김이었습니다. 그는 25세에 즉위하여 국민에게 세금을 많이 부과하였고,  애굽왕 느고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그후  바벨론왕 느부갓네갈이 느고를 격파한 후에는 바벨론왕에게 조공 바쳤습니다. 당시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것을 신랄하게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서기관 바륵을 시켜 모든 예언을 기록하게 하고 백성 앞에서 읽었으나 여호야김은 이 두루마리를 뺏어 불에 태우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으로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로 유명한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모두 바벨론식의 이름입니다. 사드락의 유대식 본명은 하나냐이며, 메삭의 본명은 미사엘이며, 아벳느고는 아사랴였습니다.

 

여호야김이 죽자 그의 아들인 여호야긴이 왕위를 이어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야긴은 겨우 석 달 밖에 나라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B.C. 597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다시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약을 어기고 자신의 나라를 배반한 유다를 징벌하기 위해서입니다. 여호야긴은 자기 모친과 궁궐에 있는 모든 사람을 데리고 가서 느부갓네살에게 항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의 전과 유다 왕궁에 있는 모든 기물들을 부수어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대규모 공사에 동원될 많은 기술자들도 사로잡아 갔습니다. 이는 약 115년 전 히스기야 왕 때에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로 왕을 세웠습니다.

 

유다의 16대 왕인 요시야의 막내아들 시드기야는 제19대 왕인 여호야긴의 숙부였습니다. 그는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조카를 대신해 바벨론 왕에 의해 유다의 20대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시드기야의 원래 이름은맛다니야로서 바벨론 왕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이름을 바벨론식인시드기야로 고쳤습니다. 하지만 즉위 3년 뒤에 시드기야는 모압 암몬 두로 시돈 에돔 등 유다 주변에 있는 군소 국가들의 권유를 받고, 또한 친 애굽파인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애굽과 동맹을 맺고 바벨론에 대항하는 반바벨론 음모에 가담하였습니다. 당시는 예레미야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선지자는 시드기야에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바벨론과의 동맹을 깨뜨리지 말 것을 역설하였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결국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 포위된 예루살렘은 16개월 동안을 힘겹게 버티다가 결국 성벽이 무너지면서 함락되었습니다. 이때 시드기야는 포위망을 뚫고 요단계곡쪽으로 몰래 도망치다가 여리고에서 붙잡혀 느부갓네살 왕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시드기야는 모진 고문을 받고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의 감옥에 갇힌 채 여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성은 황폐화되고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가 B.C. 586년으로서 유대왕국이 망한 때입니다. 이로써 분열왕국시대가 끝이나고 바벨론 포로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의 통일왕국시대(B.C. 1095-975)와 분열왕국시대(B.C.933-722)로 이어지던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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